밀양박씨(密城朴氏) 괴양재기(槐陽齋記) 고문서-시문류-기 교육/문화-문학/저술-기 전남도청(2019년 구입 의병자료) (재)한국학호남진흥원 밀양박씨(密城朴氏) 묘재(墓齋)인 괴양재(槐陽齋)의 기문(記文) 밀양박씨(密城朴氏) 묘재(墓齋)인 괴양재(槐陽齋)의 기문(記文)이다. 기(記)를 작성하게 된 연유, 괴양재 건립 내력, 선대 가계 내력, 박영우(朴永佑)에 대한 행적 등을 기록하였다. 기문에 따르면 조목(鳥木) 구항산(鳩項山)에 박공(朴公)과 배우자 대구 서씨(大邱 徐氏) 묘가 있은지 수백 년이 되었는데 아직도 묘재(墓齋)가 없는 것은 자신들의 책임이라고 하면서 조상을 받드는 도리에 힘쓰지 않을 수 없다고 하였다. 오직 계미년에 이르러 급박하게 돌아가 모두 힘을 내어 명당에 자리를 잡아 건립하였다 한다. 괴양재는 4가(架) 5영(楹)으로 가운데에는 온돌방을 두고 바깥에는 시원한 마루를 두었으며, 좌우에 부엌과 곁방을 갖추었다. 무덤은 구항(鳩項)에 재실은 마두(馬頭)에 있는 것은 다름 아니라 사는 곳이 구항령(鳩項嶺)과 가까워 후손이 사는 곳의 편리함을 취하고 또 제사 때 제명(齊明)하게 하기 위함이라고 하였다. 재실을 짓는데 각자 일을 분담하여 맡은 바 업무에 정성을 다해 무사히 완료되었음을 서술하였다. 밀성인(密城人)으로 송은선생(松隱先生)(박익(朴翊), 1332~1398) 충숙공(忠肅公)에 이르러 네 아들 중 셋째 아들이 아당선생(啞堂先生)(박조(朴調), 1350~1431)이며, 공은 아당선생의 11세손이라고 하였다. 공의 휘(諱)는 영우(永佑), 자는 덕주(德周), 의재(宜齋)는 자호(自號)이다. 고조 금노(禁老)는 별감을 지냈고 효성이 지극하였다 한다. 증조 현영(顯榮)은 진사에 입격하였고, 조부 순형(順亨)은 주서(注書)를 지냈으며, 부(父) 린(麟)은 일등원종공신에 책봉 되었고 어머니는 김해 배씨(金海 裵氏)이다. 인겸(仁謙), 이겸(以謙), 의겸(義謙)의 세 아들을 두었다고 하였다. 공은 유명한 가문에서 생장하여 선조들의 가르침을 받아 그 조예와 성덕(成德)의 아름다움이 훌륭하였으나 사적들이 연기처럼 사라져 문헌이 10개 중 한 두 개도 남아있지 않고 단구(短句)만이 전해진다고 하였다. 일찍이 벗들과 더불어 시를 지었는데 대개 시의 뜻이 청아하여 흉금이 시원하고 깨끗하며 학문의 바름을 알 수 있었다. 한 점 고기로도 솥 전체의 국맛을 알 수 있고, 깃털 하나로도 봉황을 알 수 있으니 비록 짧은 구절만 남아있어도 부족함이 없다고 하였다. 이어서 후손들이 번성하고 집안이 찬란히 빛나리라, 비록 윗대보다 조금 못하더라도 잠영(簪纓)의 소망인 시예(詩禮)를 잇는 것은 잃지 않았다며 종친 여러분들이 마땅히 스스로 힘쓸 줄을 알 것이다 라고 하였다. 마지막으로 송산(松山)이 이지러지지 않음과 같이 더욱 높이 선현 봉사를 우러르고, 유천(柳川)이 마르지 않음과 같이 후손에게 전하여 이 재실 또한 영원히 사라지지 않고 무궁하며, 옛날 왕씨의 삼괴(三槐)에 부합하기를 바란다고 기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