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龍灣感吟 千里關西地盡頭獨携雄劍倚高丘平臨夷夏橫分處天際三江入海流關頭秋色正紛紛落日平原散馬群回首不堪西北望九連城外盡黃雲旄丘播越勢難支社稷存亡一髮危當日若非蒙帝力秪今斑涅定無疑銀漢仙槎一夢悠薊門千里入邊愁傷心鴨綠長江水日夜朝宗不蹔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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次灣尹韻 霜露迢迢天宇寬遠遊千里更憑欄詩情對月秋偏感劍氣衝霄夜獨看萬事關心難盡了一身多病敢求安賓筵邂逅回靑眼何幸浮生半日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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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醉書呈大司馬大學士【幷小序】 人生飮啄亦有定分昔李文饒使日者算其命以爲啗羊萬頭當盡俄有節度使送羊五百文饒惡其數滿欲却而不受日者曰彼旣送遺却之無益匪久文饒竟卒術家語雖未可盡信天之定分蓋有不可逭也余自少嗜酒到老益甚往往廢食或至三四日形骸換脫齒髮俱衰人皆謂之必死余則以爲定限猶未及酒爲老妻所慳未能快飮性又喜詩而亦未滿三千首未知此生消得幾斛酒賦得幾首詩從今以還若滿酒萬斛詩萬首雖冥然長逝吾無恨焉戲吟長句以寓茲懷有酒當飮萬斛酒有詩當吟萬首詩大醉狂吟衆所棄襟胸蕩然伸吾眉人生定命各有分尺寸不能相推移顏回水飮竟短折伯倫昏冥老不衰且聞工詩解窮人褐博未必能文辭從他譏罵樂吾樂不知歲月頭邊馳從今天或假吾年詩幾千篇酒幾巵君看世事如雲煙麟閣功名還可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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次城南聯句韻 偶訪城南第欣開綠蟻罇招呼迎舊侶吟嘯樂新元頓覺幽懷暢能蠲世慮煩論襟偏惜老抵掌不妨喧自詑追名勝寧容雜俗言酒場俱是敵詩壘孰爲昆山月纔生白街鍾已動昏寒梅飄落蕊殘雪有餘痕共喜今宵集仍留後約存優遊太平樂均是聖君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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適得倭橘呈送麻田叔主感而有作 海外團團實來從日本船陸郞無限感分送淚潸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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太宗大王追上諡冊文 巍烈永垂於萬祀追慕彌新顯號加隆於百年闕典斯擧爰陳寶牒用昭彝章恭惟大王睿智有臨英武不世唐運始啓天意已眷於秦王漢道將興人心允屬於代邸決大策而禍亂克定恢神功而威德益彰開國承家○二聖有付託之喜立經陳紀八方致寧謐之休臨御十九載猷爲想慕三五上治理鴻厖之澤猶被於遺氓燕翼之謨永裕我後嗣至今傳祚之綿遠式賴基命之閎深顧念節壹之稱尙欠貴多之義情文恐歉於崇奉詎宜因循德美思盡於闡揚更加表揭尊名追上徵典禮於中朝縟儀竝行齊盛休於皇祖豈但有光於宗祏抑亦無憾於臣民謹遣臣云云庶鑑精衷俯賜明假昭耿光於不朽日星增輝流景福於無窮雲仍衍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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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박씨(密城朴氏) 괴양재기(槐陽齋記) 고문서-시문류-기 교육/문화-문학/저술-기 전남도청(2019년 구입 의병자료) (재)한국학호남진흥원 밀양박씨(密城朴氏) 묘재(墓齋)인 괴양재(槐陽齋)의 기문(記文) 밀양박씨(密城朴氏) 묘재(墓齋)인 괴양재(槐陽齋)의 기문(記文)이다. 기(記)를 작성하게 된 연유, 괴양재 건립 내력, 선대 가계 내력, 박영우(朴永佑)에 대한 행적 등을 기록하였다. 기문에 따르면 조목(鳥木) 구항산(鳩項山)에 박공(朴公)과 배우자 대구 서씨(大邱 徐氏) 묘가 있은지 수백 년이 되었는데 아직도 묘재(墓齋)가 없는 것은 자신들의 책임이라고 하면서 조상을 받드는 도리에 힘쓰지 않을 수 없다고 하였다. 오직 계미년에 이르러 급박하게 돌아가 모두 힘을 내어 명당에 자리를 잡아 건립하였다 한다. 괴양재는 4가(架) 5영(楹)으로 가운데에는 온돌방을 두고 바깥에는 시원한 마루를 두었으며, 좌우에 부엌과 곁방을 갖추었다. 무덤은 구항(鳩項)에 재실은 마두(馬頭)에 있는 것은 다름 아니라 사는 곳이 구항령(鳩項嶺)과 가까워 후손이 사는 곳의 편리함을 취하고 또 제사 때 제명(齊明)하게 하기 위함이라고 하였다. 재실을 짓는데 각자 일을 분담하여 맡은 바 업무에 정성을 다해 무사히 완료되었음을 서술하였다. 밀성인(密城人)으로 송은선생(松隱先生)(박익(朴翊), 1332~1398) 충숙공(忠肅公)에 이르러 네 아들 중 셋째 아들이 아당선생(啞堂先生)(박조(朴調), 1350~1431)이며, 공은 아당선생의 11세손이라고 하였다. 공의 휘(諱)는 영우(永佑), 자는 덕주(德周), 의재(宜齋)는 자호(自號)이다. 고조 금노(禁老)는 별감을 지냈고 효성이 지극하였다 한다. 증조 현영(顯榮)은 진사에 입격하였고, 조부 순형(順亨)은 주서(注書)를 지냈으며, 부(父) 린(麟)은 일등원종공신에 책봉 되었고 어머니는 김해 배씨(金海 裵氏)이다. 인겸(仁謙), 이겸(以謙), 의겸(義謙)의 세 아들을 두었다고 하였다. 공은 유명한 가문에서 생장하여 선조들의 가르침을 받아 그 조예와 성덕(成德)의 아름다움이 훌륭하였으나 사적들이 연기처럼 사라져 문헌이 10개 중 한 두 개도 남아있지 않고 단구(短句)만이 전해진다고 하였다. 일찍이 벗들과 더불어 시를 지었는데 대개 시의 뜻이 청아하여 흉금이 시원하고 깨끗하며 학문의 바름을 알 수 있었다. 한 점 고기로도 솥 전체의 국맛을 알 수 있고, 깃털 하나로도 봉황을 알 수 있으니 비록 짧은 구절만 남아있어도 부족함이 없다고 하였다. 이어서 후손들이 번성하고 집안이 찬란히 빛나리라, 비록 윗대보다 조금 못하더라도 잠영(簪纓)의 소망인 시예(詩禮)를 잇는 것은 잃지 않았다며 종친 여러분들이 마땅히 스스로 힘쓸 줄을 알 것이다 라고 하였다. 마지막으로 송산(松山)이 이지러지지 않음과 같이 더욱 높이 선현 봉사를 우러르고, 유천(柳川)이 마르지 않음과 같이 후손에게 전하여 이 재실 또한 영원히 사라지지 않고 무궁하며, 옛날 왕씨의 삼괴(三槐)에 부합하기를 바란다고 기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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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6년 충효당(忠孝堂) 상량문(上梁文) 1 고문서-시문류-상량문 경제-토목/건축-상량문 孔夫子誕降二千五百七年丙申四月十四日 後孫 [朴]道東 孔夫子誕降二千五百七年丙申四月十四日 朴道東 전남도청(2019년 구입 의병자료)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956년 4월에 충효사 강당(忠孝祠 講堂)인 충효당(忠孝堂)을 신축하면서 지은 상량문(上梁文) 1956년 4월 14일에 충효사 강당(忠孝祠 講堂)인 충효당(忠孝堂)을 신축하면서 지은 상량문(上梁文)이다. 표제는 "충효당상량문(忠孝堂上梁文)"이며, 문체는 변려문(騈儷文)으로 작성되었다. 충효사는 박지수(朴枝樹)와 박천주(朴天柱)를 배향하는 사당으로 1924년에 단(壇)으로 설향(設享)하였다가 1955년에 화순군 도암면 벽지리에 현재의 모습으로 복설(復設)되었다. 본 상량문을 쓴 사람은 후손 박도동(朴道東)이다. 내용은 사우에 배향된 박지수와 박천주의 행적을 적고 부인 노씨(魯氏)와 노(奴) 근춘(近春)의 행적을 추기하였으며, 이어서 사우에 대한 내력을 간단히 서술한 뒤 바야흐로 사우의 공사를 마치고 감히 장로(張老) 같은 축하의 말을 올린다고 하면서 상량송(上樑頌)을 적었다. 이어서 상량문 마지막 부분에 상량한 뒤에 유아(儒雅)한 선비들이 배출되어 풍화가 다시 떨치고 예를 숭상하고 시를 습득하여 장차 바라건대 공‧맹의 바른 학맥을 세우고 척사위정(斥邪衛正)하여 영원히 양주(楊朱)와 묵적(墨翟)의 이단(異端)을 말하지 말기를 희망하였다. 충효사(忠孝祠)는 화순군 도암면 벽지리에 자리하며 박지수(朴枝樹)와 아들 박천주(朴天柱)를 배향하고 있는 사우다. 1598년 건립되었고 1868년 고종 때 대원군의 서원 훼철령으로 철폐되었다. 그 후 1924년에 우선 단으로 제향해 오다가 1955년에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되었다. 현재 밀양 박씨 문중에서 보존 관리하고 있으며 2001년 7월에 화순군 향토문화유산 제2호로 지정되었다. 박지수(朴枝樹, 1562~1593)는 본관이 밀양(密陽), 자가 무중(茂仲)이고, 호가 모봉(茅峰)이다. 밀양군(密陽君) 박중손(朴仲孫)의 후손으로, 증조할아버지는 찰방 박영걸(朴永傑)이고, 아버지는 사맹공(司猛公) 박억서(朴億瑞)이다. 자질이 빼어나고 일찍부터 강개한 뜻이 있었으며, 1580년(선조 13) 별시(別試) 문과에 병과(丙科)로 합격하였다. 1591년 사헌부 감찰을 제수 받았으며, 동료들 24인과 함께 사헌부에서 서로 친밀한 관계를 맺고 시를 지어 주고받았다. 선조가 이를 가상히 여겨 「총마계회도(驄馬契會圖)」를 지어서 주었다. 임진왜란 때 특명으로 왕자 임해군(臨海君)과 순화군(順和君)을 호위하여 북도로 피난 도중 적병 수천 명을 만나 삼일간의 접전 끝에 온몸에 상처를 입어 회령에서 순절하였다. 그의 노복이 시신을 수습하여 고향에 돌아오자 부인 노씨가 남편을 따라 자결하였고, 이 광경을 지켜본 노비 근춘(斤春) 역시 자결하였는데 이에 일문삼절(一門三節)이 배출되었다고 회자되며 이들의 충절이 높이 평가되었다 한다. 부친 사맹공(司猛公)은 83세의 나이로 재산을 털어 군수를 보조하였다. 1869년에 좌승지에 증직되었으며, 1870년에 정려가 내려지고, 1892년에 좌참찬에 증직되었다. 충효사(忠孝祠)에 그의 아들 박천주와 함께 배향되었다. 박천주(朴天柱, 1578~1650)는 자가 경국(擎國)이고 호가 회재(悔齋)이다. 박지수(朴枝樹)의 아들로, 주부(主簿)를 지냈다. 효성과 우애가 독실하였다. 나이 10세에 부모님 상을 당하여 3년 동안 시묘살이를 하였는데 계속 부모님이 처음 돌아가신 때와 같이 변함없이 하여 주변 사람들이 모두 감동하였다. 정려(旌閭)가 내려졌다. 충효사(忠孝祠)에 아버지 박지수와 함께 배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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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皮封]玉山 重省案將命者沙戚候函涯角欲言之恐却聞人心和氣伏問大人先生遠候神相重省經軆加飡自愛戚從侍奉如昨而自家送三夏身熱頭痛邊近經暴泄入水一升其出千派恨不用此腹於曩時龜疇吾輩擧患一腹刳不得奈何今則天時新涼生意少存欲理江山之筇而勿染赤壁是初路頭龜東欽齋是二客之從余豈獨專美於東坡而已乎吾賢亦有翩?之羽衣則於我今幸也進逍遙仙廬似在上旬那時爲我釀酒數石淨掃室堂否當偃臥痛飮滌盡二十年姤穢之千曲愁腸矣萬留對敍不備候禮癸巳八月四日戚從奇重度拜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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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3년 기응도(奇應度) 간찰(簡札) 2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개인-생활-서간 癸巳八月十三日 弟 奇應度 癸巳八月十三日 奇應度 李光秀 전남도청(2020년 구입 의병자료)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893년 8월에 기응도(奇應度)가 인척(姻戚) 이광수(李光秀)에게 화순 물염정(勿染亭) 적벽(赤壁) 모임에 동참할 것을 요청한 내용의 간찰. 1893년 8월에 기응도(奇應度)가 인척(姻戚) 이광수(李光秀)에게 화순 물염정(勿染亭) 적벽(赤壁) 모임에 동참할 것을 요청한 내용의 편지이다. 초 4일에 우봉(牛峯) 안씨(安氏) 친구 편에 편지를 보냈는데, 잘 전달되었는지 알 수 없다며 답답한 마음을 표했다. 이어 요사이 부모님을 모시고 공부하는 생활은 어떠한지 묻고, 이광수에 대한 그리움 마음을 전했다. 갈대의 흰 이슬 맺힌 가을날 그리움이 싹트고, 창에 비친 달빛이 하얗게 흘러들 때 누워서 멀리 담양에 사는 미중(美仲, 이광수의 자(字))을 떠올린다고 하며 그리움을 시적으로 표현했다. 계속해서 유람에 대한 생각을 전하고 함께 할 것을 독려했다. 처음에 금재(欽齋)와 구동(龜東)과 함께 먼저 이광수 집을 방문해서 능성(綾城, 현재 화순)을 관광하려 계획을 세웠고, 황룡의 중동(中洞)에 사는 김씨(金氏) 형과 사방의 학자들도 함께 움직이려 했다는 것이다. 본래 저쪽 편 사람이 아닌데도 다행히 태평성세를 만나 비록 재주도 학식도 없지만, 어찌 한 번의 거동도 없겠으며, 또 오랜 병중 생활을 털어내고 유람을 하는 것은 적막을 지키고 마음만 상하게 하는 것보다는 나을 듯 하다고 하였다. 그곳에서 정답게 만나 많은 술을 마시고, 제비를 뽑아 시문(詩文)을 겨루며 호로(呼盧)와 악삭(握槊) 같은 투전 놀이도 하다 보면 더욱 호해(湖海)의 기상을 얻고 간담을 키우게 될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지석(池石)과 해망(海望) 사이에서 머뭇거리다가 마침내 이행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며 안타까운 마음을 전했다. 이광수(1873~1953)의 호는 옥산(玉山), 자(字)는 미중(美中)이다. 부인 죽산안씨(竹山安氏)와의 사이에 외아들 혁(爀, 1898~1977)을 두었다. 노사학파의 일원인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의 문인이다. 1900년에 경의문대(經義問對)로 성균관박사(成均館博士)로 되었으며, 계몽운동가인 양한묵(梁漢黙) 등과 교유하면서 신학문에 뜻을 두고 개화(開化)에 앞장섰다가 송사에게 파문(破門)을 당하기도 했다. 일제의 강제 병합을 목격하고 고향에 돌아와 후학을 양성하며 여생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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桑楡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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送李景略遊天磨 松京是我舊幷州悵望靑山入夢愁春到朴淵花爛熳羨君鳧舃興悠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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次李郞韻 急雨連朝不暫開南溪沙岸瀑流廻看看春事今將暮怊悵仙郞久未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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題趙公擧山亭 東園臺榭勢穹崇俯瞰長安四望通春樹萬家圍錦帳怳然身在畫圖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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與徐國益求馬史選目書 白近聞左右讀禮之暇遍觀龍門書有所删選云以左右敏達之才可以追其步驟而得其谿逕矣僕少學迷方長無所成其於作者之法固不敢有所希覬而顧以先人緖業不可廢墜日夜殫思勰勰而自厲者猶不出於文字之間第以才性薄劣鑑識瞢昧取讀諸家書不能自審其取舍譬如驅車適遠者不識其所逌茫然有迷路之歎嗟呼悲夫僕自受書以來略涉載籍如檀弓考工記孟子左氏戰國策諸書固古所云聖於文者而其風調跌宕詞采閎麗令人讀之而靡靡不厭者無如太史公是以喜讀此書窮晝夜唬嗄而不知罷也但其爲書開闔無端變化不測如長川崇嶽流峙千里其浩淼之勢崔崒之形觸境而殊觀苟非窮搜極探以徧其觀覽固不能領略選勝而爲平生游賞之所矣今左右才高識敏有濟勝之具而又理屐周行能選其勝其亦爲我指導其最勝觀否倘因左右而得入其境則雖不能偏觀全體抑將有得於一水一丘之趣也向之所以勰勰自厲者庶幾由此少進而不復有茫然迷路之歎矣顧嘗念太史公文章非佔畢呻吟之所可學爲也觀其橫放俊逸之氣蓋有得於周覽山川之助者多矣今吾輩塊然處闤闠中所見不過於培塿沮澤而迺欲屑屑以蠹簡求之其亦難矣雖然古人云太史公筆法如造化着物其平生所嘗游者皆在焉然則一部史記卽一山川也意者相與歷覽使此身如在長川崇岳之間則其亦能有所感而得其所助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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秋風悔心萌說 人未必皆感於物而人有時感於物物不能皆感乎人而物有時感乎人人觸於物而物使之感與物觸乎人而人自感之與物不能感人而人自感之則凡爲感也宜若無待於物而人情之有所感必觸於物而後發焉將其當感者存于中而潛藏不發如草木之未芽而雨濡之芽焉鐘鼓之未響而枹擊之響焉乎芽生於草木而非雨則不生響發於鐘鼓而非枹則不發人之觸於物而形其感者豈異於此哉文中子有言曰秋風悔心之萌可謂知武帝之所感矣夫武帝承文景之業挾雄豪之才掃幕南夷甌粤而卉服咮噙之俗奔走而委命矣封泰山禪梁父而昭姓考瑞之儀爀然而觀美矣屬南山建神明而窮苑囿臺榭之樂遵東海過碣石而極巡游眺覽之壯招燕齊之士求不死之樂而安期羨門之屬庶幾可遇則當斯時也帝固夸嫮自大有雄視千古之志而至於汾陰之游讌飮中流而俯仰慷慨之思遽發於懽愉得意之餘蓋秋之爲氣四時之將終也其意憀慄其色慘淡天地之間凡卉木之惹然而茂燁然而華者飄風一起而摧敗零落無復有長養生育之意其爲狀也如年旣壯而趨老治旣盛而向衰凜凜然可懼而可悲矣帝於是芒乎其若有失也恍乎其若有恨也雖不知何者爲恨而一念之感油然於方寸而不自已焉物我之間其相觸而相發有如是夫雖然物固易感乎人而不能感人之無感人固易感於物而未嘗無感而感物是以雍門生之操琴也能悲孟嘗於旣感之後而不能悲之於未感之前苟使武帝無可感之情則其悲傷激昂自失自恨者豈遽發於造次觸物之間哉蓋武帝爲人才多而志高方其快意當前無所顧忌而疏通明達亦足以自省其愆故平居燕閑固有感悟於中而特因其所觸乃發之於歌唫爾由此觀之輪臺之悔蓋未始不激於秋風而秋風之感亦未始不由於平日之所蓄也然則感蓄於平日物皆足以發之而獨發於秋風者豈不以天時人事有足以相感而自不得不然乎昔漢文帝方春和時見草木群生之樂而議振窮民文帝之心未嘗不在於民而乃於是興發亦以藹然之念有孚於春而春有以感之也今夫秋者於性屬義而義者宜之理也風者於卦爲巽而巽者巽之道也思其宜而志乎遜則反顧平生夸然自大者其不欿然自失而益萌其悔之所未萌乎此武帝之感不待於秋風而亦不能無待於秋風者與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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留贈灣尹 七月邊霜已作寒夢回虛館角聲殘今朝又向長安路去住天涯別意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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