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6년 이광수(李光秀) 간찰(簡札)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개인-생활-서간 丙申臘月二十一日 宗生 光秀 丙申臘月二十一日 李光秀 宗人 전남도청(2020년 구입 의병자료)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896년에 이광수(李光秀)가 강화도(江華島)에 있는 종인(宗人) 이건창(李建昌)께 찾아뵙지 못한 사연과 안부를 전한 간찰. 1896년 12월에 이광수(李光秀)가 강화도(江華島)에 있는 종인(宗人) 이건창(李建昌)께 찾아뵙지 못한 사연과 안부를 전한 편지이다. 편지 상단에서는 그동안 이건창 선생을 뵙지 못한 그리움과 시세(時世)에 대한 근심 등을 실었다. 지난겨울에 보낸 편지는 잘 도착했는지 묻고 강화도와 담양(潭陽)으로 서로 떨어져 2년 동안 뵙지 못해 아쉽다는 내용, 온 세상이 풍우(風雨)로 가득하여 애통하다는 내용, 이러한 혼란의 때에 친우들도 우려하는데 선생과 같은 대인(大人)과 군자(君子)들의 근심은 어떠하겠느냐며 그 마음을 위로한 내용이 보인다. 이어 사람의 생사가 중요하나 이보다 중요한 것이 있다는 것을 알고 항상 선생께 배우려고 했으나 아득한 운산으로 막혀 끝내 이룰 수 없어서 날마다 조보(朝報)로만 소식을 접했다고 전했다. 또 지난 6월에 선생께서 정기(正氣)를 짊어지고 대의(大義)를 위해 송(宋)나라 정이(程頤)가 부주(涪州)로 유배를 떠나듯이 처신했다는 말을 들었는데, 처음엔 그 소식을 듣고 믿지 않았으나 지금 사변을 보니 과연 그러했을 것이라고 짐작했고, 보당(葆堂) 서병수(徐丙壽)의 편지를 얻어 선생께서 유배되었다는 것을 확인했다고 하였다. 이광수는 이 소식을 접하고 선생을 뵙기 위해 길을 나서려고 계획했으나 관보(官報)를 보고 선생께서 유배에 풀려나왔다는 소식을 접해 뵙지 못했다며 아쉬움을 표했다. 이 구절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1896년 4월에 이건창이 해주부 관찰사(海州府觀察使)를 제수받았으나 개화파의 득세와 을미사변(乙未事變)의 처리 문제 등을 들어 상소를 올리고 극구 사양하다가 고종과 조종의 노여움을 사 고군산도(古群山島, 현재 전북 군산시 소재)로 유배되었다가 특별 사면으로 2개월 후에 풀려난 사건을 말한다. 이광수는 이건창 선생이 군산으로 유배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담양에서 군산으로 찾아뵐 계획을 세웠으나 실행하기 전에 선생이 해배(解配) 되어 만나지 못하고 말았다. 계속해서 이광수가 편지에서 이르기를 '선생께서 해배 된 후에 장성(長城)의 식재(植齋) 기재(奇宰) 어른께 가서 선생의 편지를 얻어 보았더니 처신하는 명백한 의리가 분명하였다'고 전했다. 더불어 선생의 편지 끝에 '가군(家君)에게 편지를 쓴다'는 말이 있었는데, 끝내 그 편지를 잃어버려 암담한 심정이라고 아쉬움을 전했다. 편지 하단은 선생의 근래 안부를 묻고 자신의 안부를 전한 내용으로 채워졌다. 새말에 건강은 어떠하며, 두문불출하며 책을 읽으면서 묘책을 얻고 있는지, '벼슬에 나가서도 나라를 걱정하고 물러나서도 나라를 걱정한다는 말'이 선생께 해당한다고 하면서 심정을 헤아려 보기도 했다. 이어 이광수 자신의 안부를 전하기를, 본인은 조부모님과 부모님을 모시고 예전과 같이 지내고 있으나, 지난번 한 번 찾아뵌 이후로 세상이 상전벽해(桑田碧海)와 같이 변해서 책에 마음을 쏟지 못하고 있고, 지기(志氣)가 한결같이 혼란하고 태만하여 진취하는 것이 비루하다며 자신의 상황을 한탄했다. 지난번 선생께서 주신 시(詩)와 서(序), 간독(簡犢) 등 여러 편의 글은 정문일침(頂門一針)과 같이 매섭기도 하지만 사람을 아껴주는 성대한 덕이 담겼다고 고마움을 전했다. 더불어 선생을 모시고 그동안 듣지 못한 가르침을 배워 마음과 눈을 밝게 하기를 원한다고 덧붙였다. 편지 끝에는 나라를 위해 더욱 몸을 아끼시고 도(道)를 위해 보중(保重)하시기를 바란다는 말을 전하며 선생에 대한 존경을 드러냈다. 이광수(1873~1953)의 호는 옥산(玉山), 자(字)는 미중(美中)이다. 부인 죽산안씨(竹山安氏)와의 사이에 외아들 혁(爀, 1898~1977)을 두었다. 노사학파의 일원인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의 문인이다. 1900년에 경의문대(經義問對)로 성균관박사(成均館博士)로 되었으며, 계몽운동가인 양한묵(梁漢黙) 등과 교유하면서 신학문에 뜻을 두고 개화(開化)에 앞장섰다가 송사에게 파문(破門)을 당하기도 했다. 일제의 강제 병합을 목격하고 고향에 돌아와 후학을 양성하며 여생을 보냈다. 이건창(李建昌, 1852~1898)의 본관은 전주(全州)로, 조선 2대 왕인 정종의 아들인 덕천군(德泉君)의 후손이며, 병인양요(丙寅洋擾) 때 순절한 이시원(李是遠)의 손자이다. 자는 봉조(鳳朝), 호는 영재(寧齋), 명미당(明美堂)이다. 1866년 별시 문과(別試文科)에 급제하였다. 1874년에 서장관(書狀官)으로 청(淸)나라에 가서 여러 문장가와 교유하여 문장으로 이름을 떨쳤고, 강위(姜瑋) · 김택영(金澤榮) · 황현(黃玹) 등과 교분이 두터웠다. 충청우도 암행어사(忠淸右道暗行御史), 승지 등의 벼슬을 했으며, 1896년 해주부 관찰사에 제수되었으나 사양하다가 고군산도로 유배되었다. 그 뒤 고향인 강화에 내려가서 서울과는 발길을 끊고 지내다가 2년 뒤에 47세로 세상을 떠났다. 대표적인 저술로 ?당의통략(黨議通略)?이 있으며, 문집으로 ?명미당집(明美堂集)?을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