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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1년 이승학(李承鶴) 간찰(簡札)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개인-생활-서간 辛卯二月十四日 承鶴 景則兄 辛卯二月十四日 李承鶴 景則 전남도청(2020년 구입 의병자료)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891년에 이승학(李承鶴)이 경측(景則)에게 과거 시험 문제 등을 전한 간찰. 1891년 8월에 이승학(李承鶴)이 경측(景則)에게 과거 시험 문제 등을 전한 간찰이다. 수신자 경측이 누군지는 알 수 없다. 2년 동안 이별하여 그리움이 지극하다는 내용과 경측의 안부를 묻고 이승학의 안부를 전하면서 편지를 열었다. 편지 본문에서는 이번 과거 시험도 여의치 않지만 아직은 시험을 더 준비해 보겠다고 전하고 있다. 그리고 상의한 초장(初場) 시험의 한 장(張)을 특별히 알려달라고 간곡히 부탁하는 말을 전했다. 남은 얘기는 편지로 다 하지 못하니 직접 만나자고 하며 편지를 끝마쳤다. 이 편지에 알 수 있듯이 1890년 무렵 이승학은 서울 근방에 있으면서 끊임없이 과거 시험에 도전하고 있었다. 지인에게 시험에 관한 정보를 적극적으로 부탁하는 모습도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이승학(1857∼1928)의 본관은 전주(全州)로, 양녕대군(讓寧大君)의 후손이며, 자는 자화(子和), 호는 청고(靑皋)이다. 전남 담양(潭陽) 장전리(長田里)에서 출생하였다. 아버지는 기정진(奇正鎭)의 문인인 진사 이최선(李最善)이고, 이승학 본인도 기정진의 문하에서 배웠다. 을미사변(乙未事變) 때 팔도에 격문을 보내어 의병을 일으키기도 했다. 문집으로 ?청고집(靑皋集)? 4권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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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皮封]徐承旨宅長田謹椷雲茫雖殊每道同庚之好令監之高風令人可掬伏惟令軆起居湛樂萬裕現今駕住京耶鄕耶於京則見帶何職於鄕則消受何方邈矣無由得聆臨風瞻溯曷任遠悃庚生歲前作別後以病不卽還鄕亦不得出入凡月餘作苦辛酸何諭先事亦不得伸理無所屈而勢有所屈也亦復奈何歸家亦以病每每不健衰相良苦且憐而令監聞此必掀髥矣家兒但知讀書作文頗知歸趣而於世情疎矣使之北途同庚之子幸賜指敎耶願望萬惟烱照不備謹候庚子三月旣望庚生李承鶴二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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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0년 이승학(李承鶴) 간찰(簡札)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개인-생활-서간 庚寅至月晦 舍兄 寄舍弟書 庚寅至月晦 李承鶴 舍弟 전남도청(2020년 구입 의병자료)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890년에 이승학(李承鶴)이 동생에게 안부와 여러 가지 당부를 전한 간찰. 1890년 11월에 이승학(李承鶴)이 동생에게 안부와 여러 가지 당부를 전한 간찰이다. 여기서 동생은 내용의 전개 등으로 보았을 때 이승학의 숙부(叔父) 이원선(李元善)의 양자로 들어간 이승구(李承龜, 1860~1942)를 지칭한 듯하다. 노비 용석(龍石)과 정춘(丁春)을 통해 편지가 계속될 수 있어서 좋았는데 이제 소식이 오랫동안 막혀 울적한 심정이라는 말로 편지를 시작했다. 이어 3달 동안 과거(科擧) 시험 준비로 객지 생활을 하면서 겪는 어려움을 전하였다. 지난번 보았던 시험은 어렵겠다는 말과 명성을 가진 세력에 의지하려는 자가 많다는 내용, 수제(壽弟)는 무과(武科) 향시(鄕試)에 일단 합격했다는 내용을 전했다. 그러나 공정하게 무과에 임했던 이들이 모두 떨어졌다는 말에서 당시 문란한 시험 상황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수제는 아마도 무과에 합격한 이승학의 동생 이승한(李承漢)을 지칭한 듯하다. 이어 이승학은 봄에도 과거 시험이 계속 있어 아직 남아 있겠다는 말과 이승학이 집에 없는 동안 잘 처리해 나가도록 독려한 내용이 보인다. 또 이승학의 체류 비용 역시 지난번 편지대로 처리해 달라고 요구했는데, 이는 이전에 언급한 담양읍(潭陽邑)의 상인 국영진(鞠永趁)에게 260냥을 집전(執錢)하여 받도록 한 일을 말한 듯하다. 또 의복을 보내달라는 말과 누이동생의 혼사 등 세세한 집안일에 대해 당부하는 내용이 들어있다. 또 이승학이 현재 거주하는 서울집에 진주하씨(晉州河氏) 하선전(河宣傳)이 함께 기거하는데 마음이 잘 통해 기쁘다는 내용, 숙씨(叔氏)가 근처에 있어 지낼 곳을 아직 정하지 못했는데 아마도 함께 지낼 것 같다는 등이 편지에 실렸다. 이승학의 이 편지에서 이승학의 1890년 상황을 엿볼 수 있다. 이 무렵에 이승학이 몇 달간 서울에 머물면서 과거 시험을 준비하고 있었으며, 그 비용 등을 어떻게 마련했고, 가족들이 어떻게 뒷받침해주었는지를 알 수 있다. 이승학(1857∼1928)의 본관은 전주(全州)로, 양녕대군(讓寧大君)의 후손이며, 자는 자화(子和), 호는 청고(靑皋)이다. 전남 담양(潭陽) 장전리(長田里)에서 출생하였다. 아버지는 기정진(奇正鎭)의 문인인 진사 이최선(李最善)이고, 이승학 본인도 기정진의 문하에서 배웠다. 을미사변(乙未事變) 때 팔도에 격문을 보내어 의병을 일으키기도 했다. 문집으로 ?청고집(靑皋集)? 4권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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病中感懷 經歲猶嬰疾逢春未送窮流光元忽忽浮世劇悤悤萬事孤吟裏殘生醉夢中寒宵耿不寐愁對燭花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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答嶺伯尹叔麟柬 停雲千里別懷深一札南來抵萬金莫道戲言無意緖山公雅量久傾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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又 素性愛靜僻厭逐長安陌低垂氣未舒鬱紆心不適束帶趨晨漏奔走至西夕人生將幾何奔駟過決隙擾擾百年間局趣爲形役疎頑乏時用敢意煕王績無德費國廩不去終何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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次梅澗韻 少年知舊盡凋零唯喜金門隱歲星杜曲繁花圍錦帳武陵流水遶雲屛誰知淨土留朝市別有淸風灑戶庭久識伯陽多道氣硏丹終日點羲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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次梅澗疊示韻傷宜拙南仲輝 人間何處躡芳塵冥漠泉臺又隔春斜日獨歸南郭路不堪隣笛淚揮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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歸川金尙書改葬挽 江漢風流已杳然人間哀樂幾推遷瀧岡阡表嗟無及衛瓘家聲幸有傳改卜佳城防墓合重蒙題湊主恩偏傷心未效侯芭役垂淚空思負笈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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蚊蝱說 花城野縣也前臨曠原旁阻巖阜雜卉叢林環植而蓊菀焉夏秋之交蚊蝱起而爲群大者如蠅小者如蟻聯股接翅噆人肌膚遭其毒者往往病瘡疽是以防之甚勤向晡而掩幃當夜而却燭閔閔以居三數月乃已邑宰患之余聞而笑曰夫物之與人均稟於天人雖自貴而賤物自天而觀果孰貴而孰賤耶今夫陸羅而川網供飛走於炰鼎者人之常也人旣食於物則物獨不可以食於人乎且人之於物物之於人異類也況蚊蝱潛形閟迹不敢晝見必乘夜之昏瞰人之睡而後有求焉是猶爲畏忌也今有同類於人而受字撫之柄白晝儼然推髓而吮膏則其爲毒不啻蚊蝱噆膚之患而已子於此知赤子之所病乎邑宰善之請以爲戒書此以貽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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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堂兄春沼居士文 維歲舍戊戌二月二十二日己丑堂弟【某】謹具觴豆之奠薦于堂兄春沼公之靈文以侑之曰嗚呼種德於先而不可獲報於後受才於天而不可蘄遇於人乎以我先王父先伯父之令德嵬節有以煇燿邦家而不能庇其嗣續以公之閎辭曠識杰然後輩而身遘佗傺詘而不信一斥而邅迍於그림입니다.貊之墟再黜而佪偟於朔漠之野鼪鼯與處羯夷與僯而卒以環琦之姿夭閼於杯觴吟囈之間嗚呼此何里也此何理也豈蒼蒼者不能司禍福之柄而殃慶之應或不相讎乎將天之於異才蓋有所靳閟故或出而遽收之不使久存於世乎抑所稟有定分人之不能兼備猶天與之角翼者去齒牙乎昔王元美論文章九命夭折居一意者造化之機幻變詭奇秘其端倪不欲使物闚覿揣摩而文人之辭多包橐萬類鉤抉幽眇造物者不能耑其權而或遭陵暴譏切之患故於其能者遣罰特重其生也備畸窮憂鬱之阨而死也又嗇其壽乎是則天之厚畀人才能適所以禍之也雖然世之所謂遇合於當時壽考顯隆者豈不艶灼一世而其徒生虛死磨滅無徵不翅若漚起而電沒鯈忽之頃皆同歸於草木蟲蟻而畸窮不遇之士顧以其感憤之思一發之於文章譬如昆吾寶鍔棄寘途旁而光怪之氣上盤星墟其沒也幸而有朝暮之遇寶之如球琳琬琰周鼎商彝大具與蠙珠則其所以不遇於今固未必無遇於後校其所獲果孰多而孰寘耶嗚呼公以稚年戰藝獨擅詞賦赫赫之聲早彰於章甫則人之望公如追風逸足一擧千里而偃蹇儒冠三十成名洎其身登翰苑薦錄玉堂周旋於薦紳學士之列則人之望公又如九苞之羽輝映丹霄而駭機猝發嬗變糾紛使其凌雲之志卒抑於中途公之所遭遇抑可謂畸且窮焉則其所以受才於天果爲公祟而種德於先者固有所難恃矣雖然公之文若出於百年之後必有得其辭而寶之者矣其一時之壽考顯隆豈足以易芳譽之無窮哉公之鬱紆於平生者其亦至此少慰而況有男若孫以承其後夫稼穡而秔稻樹藝而絲麻食實之效猶及數世矧乎種德之報奚遽泯泯而已乎吾知先澤之未究施於公身者其將昌大公後嗣而收其不食之報也顧余慟悼吁涕不能自已者蓋余生晩未逮我王父而猶及於先伯父之晩節矣文章忠孝足以跨越一世而貴而無位含蘊不施又不能享大其年壽使我小子噭噭追惋而其典刑之所存者唯公是毗每自念伯父不可見而以事伯父事公則猶可髣髴想像乎倜宕奇偉之氣矣公又棄我而不顧吾將曷從而寓慕瞻依哉嗚呼已矣曠逸之度卓佹之論今不可復得矣其或假於宵寐而接平生之情素耶言有窮而情不可極魂如不昧庶格斯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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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皮封]石初 惠啓靑皐候緘徂歲邂逅遇我同庚浮生良慰半夜傳燭呼酒阿凍其樂孔嘉俾也可忘春已仲矣更惟體事珍腴到處酒泉能無恙痛飮消遣臨風溸祝記下新舊之交又添寒感只作喀喀聲度日欲政專却不是陽界好況耳甘蔘湯試服有效而以痰蹙中止者累矣此去金友聞其高風方進去暫此探候不備上豊洞諸節泰平耶新年未聞泄泄爲傳此意否耶忙未修候耳戊戌二月四日記下李承鶴拜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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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6년 이광수(李光秀) 간찰(簡札)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개인-생활-서간 丙申臘月二十一日 宗生 光秀 丙申臘月二十一日 李光秀 宗人 전남도청(2020년 구입 의병자료)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896년에 이광수(李光秀)가 강화도(江華島)에 있는 종인(宗人) 이건창(李建昌)께 찾아뵙지 못한 사연과 안부를 전한 간찰. 1896년 12월에 이광수(李光秀)가 강화도(江華島)에 있는 종인(宗人) 이건창(李建昌)께 찾아뵙지 못한 사연과 안부를 전한 편지이다. 편지 상단에서는 그동안 이건창 선생을 뵙지 못한 그리움과 시세(時世)에 대한 근심 등을 실었다. 지난겨울에 보낸 편지는 잘 도착했는지 묻고 강화도와 담양(潭陽)으로 서로 떨어져 2년 동안 뵙지 못해 아쉽다는 내용, 온 세상이 풍우(風雨)로 가득하여 애통하다는 내용, 이러한 혼란의 때에 친우들도 우려하는데 선생과 같은 대인(大人)과 군자(君子)들의 근심은 어떠하겠느냐며 그 마음을 위로한 내용이 보인다. 이어 사람의 생사가 중요하나 이보다 중요한 것이 있다는 것을 알고 항상 선생께 배우려고 했으나 아득한 운산으로 막혀 끝내 이룰 수 없어서 날마다 조보(朝報)로만 소식을 접했다고 전했다. 또 지난 6월에 선생께서 정기(正氣)를 짊어지고 대의(大義)를 위해 송(宋)나라 정이(程頤)가 부주(涪州)로 유배를 떠나듯이 처신했다는 말을 들었는데, 처음엔 그 소식을 듣고 믿지 않았으나 지금 사변을 보니 과연 그러했을 것이라고 짐작했고, 보당(葆堂) 서병수(徐丙壽)의 편지를 얻어 선생께서 유배되었다는 것을 확인했다고 하였다. 이광수는 이 소식을 접하고 선생을 뵙기 위해 길을 나서려고 계획했으나 관보(官報)를 보고 선생께서 유배에 풀려나왔다는 소식을 접해 뵙지 못했다며 아쉬움을 표했다. 이 구절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1896년 4월에 이건창이 해주부 관찰사(海州府觀察使)를 제수받았으나 개화파의 득세와 을미사변(乙未事變)의 처리 문제 등을 들어 상소를 올리고 극구 사양하다가 고종과 조종의 노여움을 사 고군산도(古群山島, 현재 전북 군산시 소재)로 유배되었다가 특별 사면으로 2개월 후에 풀려난 사건을 말한다. 이광수는 이건창 선생이 군산으로 유배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담양에서 군산으로 찾아뵐 계획을 세웠으나 실행하기 전에 선생이 해배(解配) 되어 만나지 못하고 말았다. 계속해서 이광수가 편지에서 이르기를 '선생께서 해배 된 후에 장성(長城)의 식재(植齋) 기재(奇宰) 어른께 가서 선생의 편지를 얻어 보았더니 처신하는 명백한 의리가 분명하였다'고 전했다. 더불어 선생의 편지 끝에 '가군(家君)에게 편지를 쓴다'는 말이 있었는데, 끝내 그 편지를 잃어버려 암담한 심정이라고 아쉬움을 전했다. 편지 하단은 선생의 근래 안부를 묻고 자신의 안부를 전한 내용으로 채워졌다. 새말에 건강은 어떠하며, 두문불출하며 책을 읽으면서 묘책을 얻고 있는지, '벼슬에 나가서도 나라를 걱정하고 물러나서도 나라를 걱정한다는 말'이 선생께 해당한다고 하면서 심정을 헤아려 보기도 했다. 이어 이광수 자신의 안부를 전하기를, 본인은 조부모님과 부모님을 모시고 예전과 같이 지내고 있으나, 지난번 한 번 찾아뵌 이후로 세상이 상전벽해(桑田碧海)와 같이 변해서 책에 마음을 쏟지 못하고 있고, 지기(志氣)가 한결같이 혼란하고 태만하여 진취하는 것이 비루하다며 자신의 상황을 한탄했다. 지난번 선생께서 주신 시(詩)와 서(序), 간독(簡犢) 등 여러 편의 글은 정문일침(頂門一針)과 같이 매섭기도 하지만 사람을 아껴주는 성대한 덕이 담겼다고 고마움을 전했다. 더불어 선생을 모시고 그동안 듣지 못한 가르침을 배워 마음과 눈을 밝게 하기를 원한다고 덧붙였다. 편지 끝에는 나라를 위해 더욱 몸을 아끼시고 도(道)를 위해 보중(保重)하시기를 바란다는 말을 전하며 선생에 대한 존경을 드러냈다. 이광수(1873~1953)의 호는 옥산(玉山), 자(字)는 미중(美中)이다. 부인 죽산안씨(竹山安氏)와의 사이에 외아들 혁(爀, 1898~1977)을 두었다. 노사학파의 일원인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의 문인이다. 1900년에 경의문대(經義問對)로 성균관박사(成均館博士)로 되었으며, 계몽운동가인 양한묵(梁漢黙) 등과 교유하면서 신학문에 뜻을 두고 개화(開化)에 앞장섰다가 송사에게 파문(破門)을 당하기도 했다. 일제의 강제 병합을 목격하고 고향에 돌아와 후학을 양성하며 여생을 보냈다. 이건창(李建昌, 1852~1898)의 본관은 전주(全州)로, 조선 2대 왕인 정종의 아들인 덕천군(德泉君)의 후손이며, 병인양요(丙寅洋擾) 때 순절한 이시원(李是遠)의 손자이다. 자는 봉조(鳳朝), 호는 영재(寧齋), 명미당(明美堂)이다. 1866년 별시 문과(別試文科)에 급제하였다. 1874년에 서장관(書狀官)으로 청(淸)나라에 가서 여러 문장가와 교유하여 문장으로 이름을 떨쳤고, 강위(姜瑋) · 김택영(金澤榮) · 황현(黃玹) 등과 교분이 두터웠다. 충청우도 암행어사(忠淸右道暗行御史), 승지 등의 벼슬을 했으며, 1896년 해주부 관찰사에 제수되었으나 사양하다가 고군산도로 유배되었다. 그 뒤 고향인 강화에 내려가서 서울과는 발길을 끊고 지내다가 2년 뒤에 47세로 세상을 떠났다. 대표적인 저술로 ?당의통략(黨議通略)?이 있으며, 문집으로 ?명미당집(明美堂集)?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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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皮封]上書客冬上書登覽否遠乎哉沁都何天秋城何地天之涯地之角若是懸隔而聲氣之落落二秊于玆但瀰天風雨連年不絶使戴髮含齒者所可哀痛者數矣于斯時也知舊憂慮亦有之而況當時大人君子如 先生而旣蒙 厚念之澤嚮慕之誠曷嘗少弛人之存沒亦雖大矣然猶大於此者常欲往聞於 左右矣雲山千里終不得遂誠日望 朝報之如何六月聞先生負正氣處大義涪州之行又在玆省初不信然然而今事變亦未必不然二十一日得葆堂書始知果然驚惶悚蹙繼謂自幸又欲修寂寞中起居禮將治裝有日矣適自隣邑得官報而計日則蒙宥已久想必返旆故悵然停止北望叫鬱不能定情追後自長城得拜抵植齋丈書槪詳處義之明白而末端已有書於家君云竟爲浮沈益覺黯黯獲拜君子之一幅德音亦有數乎伏惟歲色薄紗氣棣軆候對時萬康杜門繙書如何作消受妙方進憂退憂正是爲先生今日語也不任區區之至宗生重省視昔伏幸而一自拜退後累經滄桑心目未嘗到於冊子邊志氣一向昏怠進就一向鄙陋難免於聖人不移之戒而猶恐爲 先生之遐棄也敢不自憐而自增往日所贈詩與序簡犢諸篇是絶絶頂針久而伏讀尤切愛人之盛德而未副萬一負負實多那當復從於下風益聞其所不聞以望其心目俱明也萬萬不能遠書可旣不備伏惟爲國加愛爲道保重丙申臘月二十一日宗生光秀上書[別紙]邦瑞兄夏間付書幷付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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孝宗大王世室議定後敎中外文 於戲聖德之不忘萬世思報式講宗祀之永享百僚同辭慶溢神人歡均遐邇仰惟皇祖之偉烈實冠前代之哲王嗣承丕基季歷受太王之命服膺明訓大舜傳帝堯之心適値時運之孔艱每嘆國勢之漸削大志昭揭於日月殷憂彌切於旰宵創制一世之宏規振綱立紀旁招四方之賢士會精聚神是以十年間猷爲庶幾三代上治理神謨遠略縱未就於中途義烈英聲永有辭於後世肆惟公議之顯發亟請享事之加隆殷周之禮足徵宜作不祧之位祖宗之制可繼亦有已行之儀茲循群情之所同以俟異日之追擧情文大備豈但無憾於予心功烈益彰可以垂範於來裔纔行展告之禮庸頒宣諭之辭嗚呼體祖考貽後之謨敢墜基緖推寡人奉先之孝用勉臣民故茲敎示想宜知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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顯宗實錄改修後宣醞謝箋【以白虹貫日之變命寢宣醞故不用】 東觀受命蔑效裒輯之功北闕宣恩叨蒙醉飽之渥撫躬增感濡首知榮伏念才學空疎見識鹵莽辨誣歸正敢望范沖之公嚴尊堯斥邪有愧陳瓘之慷慨値茲寶籙之修改共抽金樻之秘藏闕文遺章粗有補綴神功偉烈曷稱楡楊不料編簡之纔完遽荷恩數之荐降憂歲省費猶軫汗竹之微勞分日設筵實追洗草之故事太官供具綺饌隨玉醴而偕頒近侍銜綸黃門與銀臺而迭至寔由孝思之不匱有此榮耀之非常無緣報酬只自兢惕伏遇維新庶政將多前功慕切羹墻旣盡奉先之道才收管蒯不替待下之誠遂令諸臣叨此異渥敢不歌詠聖德蹈舞昌辰筆慙摹天縱未稱於巍蕩誠深向日期有補於涓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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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皮封]玉山 侍經案 長田復齋生追謝緘庸才菲質薄志陋學淺而又不得廣植交游以資切琢彫朽之益自分爲溝中之斷久矣吾兄獨以世好之故不我鄙夷簉 門之初傾蓋如舊解携未幾珠玉之 唾飛越三百里抵落於樵牧之社而副之以五七二絶詩紙上 繾綣可匊怳然復若對芝宇而奉 淸晤聞一亭畔松濤游瀝蒲坪路次野酌淋漓自顧賤分何以獲此驚先於感亦未知何以報答匪報此稽非直討便之囏也計已在包荒中矣伊后聲息敻然莫續絶不見報則輟常情也固不能以常情致訝於兄而自罪則深矣謹詢[背面]京候續承安信而侍右學履萬重惟願益自努力毋負雲藍丈丈湖南第一人之獎勸也一夜惡飈全嶺辦此大殺貿貿溝壑如眼前事憂國願年豊良有以也弟狀無足道而惟幸重省觕依耳春府丈似聞洛駕未還故闕上謝書耳 村內令族諸長老諸執友俱泰平否希寜思仲皆無見故耳會面何時臨紙於邑不宣追謝上癸巳七月卄八日弟趙鏞肅拜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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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3년 기중도(奇重度) 간찰(簡札) 1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개인-생활-서간 癸巳八月四日 戚從 奇重度 玉山 癸巳八月四日 奇重度 李光秀 전남도청(2020년 구입 의병자료)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893년 8월에 기중도(奇重度)가 인척(姻戚)인 이광수(李光秀)에게 화순 물염정(勿染亭) 적벽(赤壁) 모임을 알리고 함께하기를 요청하면서 보낸 간찰. 1893년 8월에 기중도(奇重度)가 인척(姻戚)인 이광수(李光秀)에게 화순 물염정(勿染亭) 적벽(赤壁) 모임을 알리고 함께하기를 요청하면서 보낸 편지이다. 멀리 객지에 계시는 이광수의 아버지 이승학의 안부를 먼저 묻고 이어 조부모님과 부모님을 모시는 이광수의 안부를 확인하면서 편지를 열었다. 이어 기중도 자신의 안부를 전하기를, 여름 동안 신열(身熱)과 두통이 들고, 온몸에 차가운 땀이 나는 증상인 폭설(暴泄)을 앓았는데, 아이들도 모두 이 병을 앓았다고 하며 그간의 상태를 알렸다. 지금은 날씨가 서늘해져 생기가 조금 안정되어 산수를 유람할 계획이라고 전했다. 유람은 화순(和順)의 물염정 적벽을 출발점으로 하려고 하는데, 이때 구동(龜東)과 흠재(欽齋)도 함께 거동하여 소동파(蘇東坡)가 즐긴 적벽의 아름다움을 감상하기로 했다고 전했다. 기중도는 이광수가 훨훨 날 수 있는 날개옷을 가진 신선이라고 칭찬하며 상순(上旬) 쯤에 신선의 집에 도착할 것이라고 하고, 우리를 위해 술 몇 섬을 빚어 놓고 집을 깨끗이 청소해서 맞이해 줄 수 있느냐고 물으며 초청해 달라고 부탁했다. 자리를 함께하여 편히 누워 맘껏 마시며 20년 묵은 근심을 씻겨내자고 하였다. 남은 얘기는 직접 얼굴을 대하고 풀자는 말로 편지를 끝마쳤다. 이광수(1873~1953)의 호는 옥산(玉山), 자(字)는 미중(美中)이다. 부인 죽산안씨(竹山安氏)와의 사이에 외아들 혁(爀, 1898~1977)을 두었다. 노사학파의 일원인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의 문인이다. 1900년에 경의문대(經義問對)로 성균관박사(成均館博士)로 되었으며, 계몽운동가인 양한묵(梁漢黙) 등과 교유하면서 신학문에 뜻을 두고 개화(開化)에 앞장섰다가 송사에게 파문(破門)을 당하기도 했다. 일제의 강제 병합을 목격하고 고향에 돌아와 후학을 양성하며 여생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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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편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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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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次西伯韻 孤懷悄悄謾書空白首胡爲道路中事業已輸當世士襟期誰許古人風三年藥餌身無健千里鄕關信不通虛館雨聲驚短夢客情秋思摠難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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次西伯感懷韻 三韓萬古戴神宗夢裏猶思漢使通極目腥塵迷舊路謾將雄劍泣秋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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