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3년 조용숙(趙鏞肅) 간찰(簡札)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개인-생활-서간 癸巳七月卄九日 弟 趙鏞肅 癸巳七月卄九日 趙鏞肅 李光秀 전남도청(2020년 구입 의병자료)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893년 7월에 조용숙(趙鏞肅)이 이광수(李光秀)에게 보내준 시(詩)에 대한 감사 인사와 안부를 전한 간찰. 1893년 7월에 조용숙(趙鏞肅)이 이광수(李光秀)에게 보내준 시(詩)에 대한 감사 인사와 안부를 전한 편지이다. 편지는 피봉과 편지로 구성되어 있는데, 편지지 배면까지 내용이 적혀 있다. 편지 첫머리는 우애(友愛)를 확인하는 내용이 보인다. 조용숙은 자신이 용렬한 재주와 못난 자질로써 지향하는 것도 고루하고 학문도 얕아 교유하는 이들이 넓지 못해 자신을 증진 시킬 수 있는 가르침을 받지 못하는데, 이광수만이 집안 대대로 맺은 우호를 지키며 저를 비루하게 여기지 않았다고 하며 고마움을 전했다. 또 집으로 처음 찾아갈 때 잠깐 이야기를 나누었는데도 마치 오래도록 사귄 벗과 같았다고 회상했다. 그 후 헤어진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삼백 리 먼 길까지 편지를 부쳐주시고, 5언과 7언의 절구시(絶句詩) 2편을 보내주셔서 감사하다고 하였다. 보내준 글에는 곡진한 마음이 담겨 있어서 황홀함이 마치 상대방을 대한 듯 하다고 글에 대한 감동을 덧붙였다. 또 듣자니 솔바람 부는 언덕의 정자에서 술잔을 기울이며 시 모임을 했다고 하는데, 저와 같은 미천한 사람이 그 모임의 시를 얻을 수 있어서 매우 감사하다고 하고, 보답하려고 했으나 인편을 구하기가 쉽지 않았고, 이후 소식까지 전하지 못해 의아했을 것이라며 죄송한 마음을 전했다. 이어 조용숙은 이광수의 안부와 그 가족들의 안부를 두루 물었다. 서울에 계신 가족의 안부 소식은 계속해서 전해지는지, 부모님을 모시고 학문하는 생활은 좋으신지 묻고 더 노력하여 운남(雲藍) 어른의 기대를 저버리지 말라고 하였다. 이어 하룻밤에 사나운 바람이 일어서 조용숙이 사는 영남 전 지역에 대살(大殺) 기운이 퍼져 흉년이 이어지고 있다고 하며, 이전에 나라를 걱정하며 풍년을 기원했던 것이 진실로 이것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계속해서 조용숙 본인의 안부를 전하기를, 요즘 생활은 특별할 것이 없고 다만 조부모님과 부모님이 예전과 같이 별 탈 없이 지내셔서 다행이라고 하였다. 계속해서 이광수 가족과 친지들에 대한 안부 인사가 이어졌다. 이광수의 아버지, 즉 이승학(李承鶴) 어른께서 서울에서 아직 돌아오지 않은 듯하여 편지를 따로 드리지 않는다는 말과 함께 마을의 친족 어르신과 친우들은 두루 평안한지 물었다. 어느 때나 만날 수 있을지 알 수 없어서 편지지를 대하고 더욱 서글퍼진다는 말로 편지를 마쳤다. 조용숙(趙鏞肅, 1867~1929)의 본관은 함안(咸安)이며, 초명은 용대(鏞大)이다. 자는 사흠(士欽), 호는 복재(復齋)이며 진주(晉州) 출신이다. 할아버지 조성가(趙性家)에게 수학하였고, 송병선(宋秉璿) · 기우만(奇宇萬) · 김평묵(金平默)을 사사하였다. 1895년 을미사변(乙未事變)이 일어나자 지리산 밑으로 이사하여 석실정사(石室精舍)를 짓고 학문 연구와 후진 양성에 힘썼다. 태극동정설(太極動靜說) · 인물성동이론(人物性同異論) · 이선기후설(理先氣後說) · 명덕설(明德說) 등은 기정진(奇正鎭)의 학설에 기본을 두고 절충식 방법을 취하였다. 위정척사 의식을 표방한 「부정척사론(扶正斥邪論)」 등의 저술을 남겼다. 문집으로 ?복재집(復齋集)? 10권 4책이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