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7년 이택종(李宅鐘) 간찰(簡札)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개인-생활-서간 丁酉菊月初六日 宗下 宅鐘 丁酉菊月初六日 李宅鐘 李光秀 전남도청(2020년 구입 의병자료)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897년 9월에 이택종(李宅鐘)이 종인(宗人) 이광수(李光秀)에게 안부 등을 전한 간찰. 1897년 9월에 이택종(李宅鐘)이 종인(宗人) 이광수(李光秀)에게 안부 등을 전한 편지이다. 지난번 화수회(花樹會), 즉 친족모임이 있었는데 참여하지 못한 아쉬움을 전하고, 저의 마음을 서로 알아주는 이는 옥산(玉山, 이광수 호)이라고 하며 친근함을 표현하기도 했다. 지난번 매산(梅山)의 모임은 일생에서 잊지 못할 만남이었으나 평교(平橋)에서 잠깐 상봉하고 헤어져 아쉬움이 들지만, 이 또한 좋은 인연이었다며 위로하기도 했다. 이어 말하길, 백 리의 거리를 두고 서로 떨어져 지낸 지 4달이 지나 그리워하던 중에 이광수가 읍으로 보낸 편지와 서문(序文), 시(詩)를 받아 읽어 보았다고 하였다. 이 글들을 보니 황홀하여 마치 청아한 모습을 대하는 것 같았다고 기쁨을 표시했다. 또 가르침을 받고 매우 기뻤으나 그간 답장을 하지 못한 사정과 죄송한 마음을 전했다. 이어 이광수의 안부를 물은 내용이 보인다. 조부모님과 부모님을 모시고 잘 지내고 있는지, 식구들과 마을의 여러 어르신은 두루 안녕하신지를 물어 이광수의 식구뿐만 아니라 문중 어르신의 안부까지 두루 챙겼다. 또 여름에 오서(鰲西)의 유람은 반드시 광명(光明)이 되었을 것이니 축하한다고 하며 부러움을 드러냈다. 이어 이택종 본인의 안부를 전하기를, 아버지께서 화담증(火痰症)을 앓고 계시는데 특별한 효험을 보지 못해 걱정된다는 말과 서울 소식이 몇 달 동안 막혀있어서 답답하다는 것, 공부는 일상적으로 해야 하는데도 문자를 접할 겨를이 없다는 내용 등을 전하면서 편지를 마쳤다. 이광수(1873~1953)의 호는 옥산(玉山), 자(字)는 미중(美中)이다. 부인 죽산안씨(竹山安氏)와의 사이에 외아들 혁(爀, 1898~1977)을 두었다. 노사학파의 일원인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의 문인이다. 1900년에 경의문대(經義問對)로 성균관박사(成均館博士)로 되었으며, 계몽운동가인 양한묵(梁漢黙) 등과 교유하면서 신학문에 뜻을 두고 개화(開化)에 앞장섰다가 송사에게 파문(破門)을 당하기도 했다. 일제의 강제 병합을 목격하고 고향에 돌아와 후학을 양성하며 여생을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