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정사묘정비문(杏亭祠廟亭碑文) 성균관 통장(成均館通章)성균관 통장이 글은 회유(回諭)하는 것이다. 귀 사우에 배향한 유항재 선생의 크고 넓은 학문과 밝게 나타난 덕행, 그 증손 절효공이 갑자년 이괄의 난에서 24세에 순국하여 하사받은 진무원종일등공신녹권, 행정공의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에 호종의 공과 심기원(沈器遠) 등의 역모를 막은 공으로 받은 영국원종일등공신녹권 등의 공적은 연대가 점차 멀어질수록 우러러 사모하는 마음은 더욱 새로워진다. 이에 다음과 같이 비문을 짓는다.행정사묘정비명(杏亭祠廟亭碑銘) 【서문 병기】도가 땅에 떨어지지 않아 인륜이 넘어지는 것을 붙잡아 일으켰고, 하늘이 사문(斯文)을 망하지 않게 하였기에 묘우(廟宇)가 빛나는 것을 보았다. 공손히 상고해 보건대, 여기 행정사는 김 유항재(金有恒齋)·김 절효(金節孝)·김 행정(金杏亭) 세 선생을 모신 사당으로 유항재 선생은 출생 때부터 기이한 조짐을 보였다. 어머니가 무후(武侯, 제갈량(諸葛亮))가 나타나는 꿈을 꾼 뒤에 선생이 태어나서 선생의 이름을 량이라고 지었다. 타고난 자질이 영민하고 성품이 순수하여 부모를 섬기는 데 정성을 다하였고 자제를 가르치되 엄격하게 하셨다. 어릴 적부터 학문에 뜻을 두고 청련(靑蓮) 이후백(李後白)·고죽(孤竹) 최경창(崔慶昌)·옥봉(玉峰) 백광훈(白光勳) 같은 명사 석학들과 종유하면서 날마다 강석에서 성리의 학설을 토론하고 『심경(心經)』·『근사록(近思錄)』을 손에서 놓지 않고 강마하였으며, 언제나 침착하고 마음이 담박하여 세상의 명리와 화려하고 사치한 것에는 욕심이 없었다.일찍이 사마시에 참방하여 음사로서 차례로 올라가 내자시 직장에 이르렀으나, 벼슬에 연연하지 않고 낙향하여 이청련·최고죽 등과 함께 공부하였던 박산(博山)의 이순당(邇順堂)에서 후학들을 계도하는 한편 위기(爲己)의 학문에 더욱 정진하였으니 행의가 드러나고 언제나 한결같아서 세상에서 유항재 선생이라 하였다.인조 2년 갑자년(1624)에 이괄(李适)이 병란을 일으키자 선생의 증손 김호광(金好光)이 분연히 일어나서 금남군(錦南君) 정충신(鄭忠信)의 막하에 종군하여 저탄(猪灘)에서 싸우다가 군량이 떨어지자 여기저기 주선하여 쌀을 모아 먹었으며, 싸움터에 나가 적을 꾸짖고 적진에 뛰어들어 힘을 다해 싸우다가 적에게 결박되었다. 이괄의 무리가 동참을 종용하자 호통치며 "신하는 충절을 위해 죽는 것이 떳떳한 일인데, 너희 역적들은 부끄럽지도 않으냐!" 하고 꾸짖다가 적들에게 난자를 당하여 장렬하게 죽었으니 당시 나이는 24세였다. 이듬해 7월 26일에 김류(金瑬) 등과 함께 진무원종일등공신(振武原從一等功臣)으로 책록되었는데, 공은 효자로서도 이름나서 절효공(節孝公)이라 하였다.그의 아우 김신광(金伸光)도 타고난 효자로 남다른 공적이 있었고 이괄의 난에서는 17세의 소년으로 형을 따라 정충신(鄭忠信)의 막하에 들어가 저탄에서의 싸움과 경도(京都) 수복 등 많은 공을 쌓았다. 병자호란에서는 인조대왕이 남한산성으로 몽진하실 때 겸사복(兼司僕)의 벼슬을 띠고 호종하였다. 인조 22년 갑신년에는 심기원(沈器遠) 등의 역모를 미연에 막은 공으로 영국원종일등공신(寧國原從一等功臣)에 책록되어 녹권을 받았고, 박천·희천·충주·영천의 수령을 역임하면서 애민선정(愛民善政)을 베풀어 도처에 송덕비가 세워졌다. 만년에는 고향으로 내려와 은행나무 아래에 정자를 짓고 망북정(望北亭)이라고 하였으니, 사람들이 공의 호를 행정(杏亭)이라 하였다.아, 사람이 충과 효를 겸하기는 지극히 어려운데, 양산 김씨의 삼현(三賢)이 이토록 우뚝하니 모두가 함께 제향하여 남국의 토기(土氣)를 진작시키는 것이 합당하다. 순조 9년 기사년(1809)에 유림에서 발의하자 이론이 없었고 여러 고을의 유림이 메아리처럼 호응하니 강진군 작천면 군자리 행정에 사우를 세워 향사를 지내왔다. 이제 그 묘정비를 세우려고 원임 류한상(柳漢相)과 임원 정길태(丁吉泰)·공련웅(孔鍊雄), 본손 철순(哲淳)·중환(重煥) 군이 나를 찾아와 글을 청하였는데, 나는 그 재목이 아니라며 거듭 사양하다가 간략히 서술하고 이어서 명을 쓴다.명사 석학들과 종유하던 유항재 선생 마음이 맑아서 물욕을 멀리했네.학문에 정진하니 행의는 따라 드높았고 만사에 자강하여 종시 한결같았네.절효공이 의리를 떨쳐 역적을 꾸짖다가 죽음이 오히려 영원한 삶 되었어라.슬프다, 오직 공은 힘이 부족하여 잡혔어도 당당한 그 지조 꺾이지 않았었네.행정공이 뒤를 이어 삼란에 공이 높았고 거쳐 간 고을마다 송덕비 빛이 났도다.행정사묘정비를 세워서 이와 같은 학행과 충성과 효성이 세상에 널리 알려지도록 하는 것이 어찌 우리 사림들의 책무가 아니리오. 오직 원하노니, 여러 후손과 많은 선비가 본받고 교화되면 몹시 다행이겠다.이상은 양산 김씨 대종회에 공경히 회답하였습니다.신사년 서기 2001년 12월 모일에 성균관장 최창규(崔昌圭)양산 김씨 대종회 귀중에 成均館通章右回諭하는 것은 貴祠宇에配享하신有恒齋선생의 크고넓은學問과밝게나타난德行그孫節孝公의甲子李适의亂에서二十四歲에殉國하사받은振武原從一等功臣錄卷과杏亭公의丙子胡亂때南漢山城에扈從의功과沈器遠等의 逆謀를막은功으로받은寧國原從一等功臣錄券等의功蹟은年代가점차멀어질수록 우러러思慕하는마음은 더욱새로워집니다이때 다음 碑文과 같이杏亭祠廟亭碑銘 幷序道가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니 人倫이넘어지는 것을 붙잡아 이르켰고 하늘이 斯文을 亡하지 않게 하였기에 廟宇가 빛나는 것을 보겠다 恭遜히 詳考하건데 여기杏亭祠는 金有恒齋金節孝金杏亭세先生을 모신祠宇로서 有恒先生은出生時부터 奇異한 조짐이 있어서 어머니가 武侯를 現夢하시고 태어나니 이름을 亮이라 하였거니와 天資가英敏하고 稟質이純粹하여 父母를 섬김에 精誠을 다하고 子弟를 가르치되 嚴하게하였다 少時적부터 學問에뜻을두고李靑蓮後白崔孤竹慶昌白玉峯光勳같은名士碩儒들과從遊하면서날마다講席에서 性理의學說을討論하고 心經近思錄을손에서 놓지않고 講磨하였으며 언제나沈着하고 마음이淡泊하여世上의名利와華麗하고奢侈한것에는慾心이없었다일찍이司馬試에參榜하여蔭士로서차례로올라가內資寺直長에이르렀으나 벼슬에연연하지아니하시고 落鄕하여 어릴때李靑蓮崔孤竹등과함께공부하였든 博山의邇順堂에서 後學들을啓導하는한편 爲己의學問에더욱精進하니 行義가드러났고 언제나한결같으매 世上에서有恒先生이라하였다仁朝二年甲子에李适이兵亂을이르킴에先生의曾孫金好光이奮然히이러나 錦南君鄭忠信의幕下에從軍하여猪灘에서 싸우다가 軍糧이 떨어지자 여기저기周旋하여 쌀을모아먹였으며 싸움터에나가 賊을꾸짓고 敵陣에뛰어들어힘을다해 싸우다가 賊에게 結縛되었는데 李适의 무리가 同參을종용하자 호통치며 臣子는忠節을위해 죽는 것이 떳떳한 일이거늘 너희逆賊들은부끄럽지도 않느냐하고꾸짓다가 賊들에게 亂刺當하여 壯烈하게죽으니 當時의 나이는二十四歲였다 이듬해 七月二十六日金瑬등과함께 振武原從一等功臣으로 策錄되었거니와 公은孝子로서도 이름나서 節孝公이라하였다그의 아우 金伸光도出天의孝로異蹟이있었고 李适의亂에는 十七歲의 少年으로 兄을따라 鄭忠信의幕下에들어가 猪灘에서의싸움과 京都收復등에많은功을쌓았다 丙子胡亂에는 仁祖大王이南漢山城으로蒙塵하심에兼司僕의 벼슬을띠고 扈從하였고 仁祖二十二年甲申에는 沈器遠등의 逆謀를未然에막은功으로 寧國原從一等功臣에策錄되여 錄券을받았으며博川煕川忠州永川의守令을歷任하면서 愛民善政을배풀어 到處에頌德碑가새워젔다 晩年에는 故鄕으로내려와 은행나무아래亭子를짖고 이름을望北亭이라 하니 사람들이 公의 號를 杏亭이라 하였다嗚呼라 사람이 忠과孝를 兼하기는 至極히 어려운 바이거늘 梁山金氏의 三賢이저토록卓然하니 一體同享하여南國의士氣를 振作시킴이 合當하다하고 純祖九年己巳에 儒林에서 發議하자 異論이없었고 列郡의儒林들이響應하니 康津郡鵲川面君子里杏亭에祠宇를새워 享祀하여왔다 이제 그廟宇碑를새우려고 院任柳漢相과任員丁吉泰孔鍊雄本孫哲淳重煥甫가나를 찾아와 글을 請하매 나는 그材木이아니라고 거듭辭讓하다가 簡略히敍述하고 이어서 銘을 하니名士碩儒들과從遊하던有恒先生마음이 맑아서 物慾을 멀리했네 學問에 精進하니 行義는따라드높았고萬事에自强하여 終始한결같았네節孝公이奮義하여 逆賊을꾸짖다가죽음이 오히려永遠한 삶되었어라슲으다 오직공은 힘이 부처잡혔어도堂堂한 그志操꺾이지 않았었네 杏亭公이 뒤를 이어 三亂에功이높았고거처가신고을마다 頌德碑빛이난다杏亭祠廟庭碑를새워서 이같은學行과忠誠과孝誠이 世上에널리알려지도록하는 것은 어찌우리士林들의責務가않이리오오즉願하노니 여러後孫과多士들이본받고敎化되면 幸甚이겠나이다右는梁山金氏大宗會敬答합니다辛巳年 西紀二千一年 十二月 日成均館長崔昌圭[成均館長之印]梁山金氏大宗會 貴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