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균관 통장(通章)이 글은 두루 통고하여 알리는 것입니다. 귀 문의 시조 이하 12대조의 제단을 설치하고 제향하기로 하였고 사단사적비(祠壇事蹟碑)를 건립하고 제사를 지내고자 한 것은 지극히 선조를 사모하는 정성에서 나온 것입니다. 다음의 비명을 짓는다.양산 김씨 양산군(梁山君) 이하 12대 사단사적비명(祀壇事蹟碑銘) 【서문 병기】강진 김문(金門)의 중환(重煥) 군은 사리에 밝은 글을 읽는 선비이다. 나와는 만년에 친분이 있어 정이 친형제와 같았다. 하루는 그 선대의 가장(家狀)과 가첩(家牒)을 가지고 내가 있는 서석(瑞石)의 임시거처에 찾아와 안부 인사를 마치고는 눈물을 줄줄 흘리며 말하였다. "우리 여한열선조(麗韓列先祖)의 소목(昭穆), 관직, 사행(事行)은 자세하게 실려 전해지고 있으나, 다만 배위(配位), 묘소(墓所)는 전래하는 것이 없습니다. 이 모두가 가문이 쇠퇴하고 복이 박한 소치입니다. 그러므로 수백 년 동안 제사를 받들지 못하여 우로(雨露)가 젖고 상설(霜雪)이 내리면 슬프고 두려운 마음과 풍수지탄(風樹之歎)의 느낌을 견디지 못하여 통한이 쌓인 지가 오래되었습니다. 올가을 종회(宗會)에서 문의(問議)가 벼락과 같이 일제히 일어나서 시조 이하 12대의 제단을 설치하고 제향하기로 결의하고 추진위원회를 구성하여 제단의 장소는 우리 선사(先祠)인 행정사(杏亭祠) 뒷산 야등(冶嶝) 간좌원(艮坐原)에 점정(占定)하고 경진년(2000) 4월을 기한으로 하여 제단 설치하는 일을 준공하기로 하였습니다. 하지만 한미한 가문의 쇠잔한 족속으로서 일이 중대하고 힘이 부족한 것이 몹시 걱정되고 두렵습니다. 감히 청하건대, 우리 어른께서 한마디 말씀을 내려 우리 열선조의 사적을 글로 지어 윤색하시고 천명하여 주시면 쇠잔한 가문의 큰 다행일 것입니다."내 사람됨이 보잘것없고 글재주도 없어서 감히 금석문자에 착수하기 어려워 사양하였다. 하지만 요청이 더욱 정성스럽기에 사양하지 못하고 가장과 가첩을 살펴보고 삼가 쓴다.양산 김씨의 시조인 연(衍)은 호가 의춘당(宜春堂)이니 고려 혜종조(惠宗朝)에 통사 사인(通事舍人)으로 양산군(梁山郡)에 봉작되어 득관조(得貫祖)가 되었다. 그 아들 지(贄)는 경종조(景宗朝)에 급사(給事)로 한림원을 겸직하였다. 그 아들 맹(猛)은 목종 무술년(998)년에 등제하여 좌습유를 역임하였고, 현종 병진년(1016)년에 중추 직학사에 제수되어 사절로 송나라에 조회를 받들고 이부시랑을 거처 중추사 태자소부에 이르렀다. 을축년(1025)년에 봉작되어 식읍 300호를 하사받았고, 참지정사에 제수되어 같은 해 12월에 세상을 떠났다. 문종조(文宗朝)에 태자태사 문하시중에 증직되어 문정공(文定公)으로 시호를 받았고, 충남 천원군 대홍리(大弘里) 홍경사(弘慶寺)의 비갈(碑碣)-국보(國寶) 7호-에 공의 공적이 등재되어 있다.그 아들 덕부(德符)는 문종 경술년(1070)년에 태자 빈객을 거처 임술년(1082)년에 좌복야에 제수되고 같은 해 6월에 세상을 떠났다. 그 아들 여흥(余興)은 평장사이고 시호는 문익공(文益公)이다. 그 아들 종(琮)은 인종조에 관직이 문하시중에 이르렀는데 정중부(鄭仲夫)의 난에 양주(良州)로 종적을 감추었다. 그 아들 의성(義成)은 고종조에 문하시랑 상서령에 이르렀고, 그 아들 이범(理範)은 원종조(元宗朝)에 신호위 중랑장(神虎衛中郞將)에 올랐으니 사절로 송나라에 다녀왔다. 그 아들 징(徵)은 녹사참군(錄事參軍)에 올랐고, 아내는 허씨(許氏)이다. 그 아들 희영(希盈)은 충정왕조(忠定王朝)에 우군만호에 이르렀고, 그 아들 효안(孝安)은 그 아들이 신분이 귀해진 연고로 자헌대부에 추증되었다. 그 아들 치현(致賢)은 조선 연산군 병진년(1496)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삼사(三司)를 거쳐 황해 감사에 제수되었다. 그 아들 자정(自禎)은 통덕랑에 올랐고 사업과 행적은 전해진 것이 없으며, 아내는 도강 김씨(道康金氏)이며 강진 입향조이다. 묘는 강진읍(康津邑) 송현리(松峴里)에 있는 것으로 기록되었으나 실전되었다.금번에 양산 김문(金門)이 시조인 양산군을 비롯하여 강진 입향조까지 13대의 제단을 설치하고 제향하고자 하였다. 그 가첩을 살펴보면, 명공(名功), 거경(巨卿)과 벼슬아치가 고려와 조선의 양조(兩朝)에 배출되어 삼한의 이름난 가문과 번화한 벌족이었는데, 지금에 이르러서는 먼 고을에 사는 반쪽 양반과 한미한 족속으로 일컬어지고 있으니 참으로 비통하고 한탄할 만하다. 옛일을 생각하고 지금을 슬퍼할 뿐이다.후손 중에 현달한 인물을 대략 거론하면, 명장(命璋)은 호조 참판에 이르렀다. 량(亮)은 진사에 이르렀는데 이 청련(李靑蓮)·백 옥봉(白玉峰)·최 고죽(崔孤竹)·임 석천(林石川)과 도의로 교유하였고 행정사(杏亭祠)에 배향되었다. 영(昶)은 문과로 능주 목사가 되었고 응호(應虎)는 천문 습독관(天文習讀官)에 올랐고 응인(應寅)은 문과로 홍문관 교리가 되었다. 응표(應彪)는 내자시 직장에 올랐고 응린(應麟)은 전주 판관에 올랐다. 경선(景善)은 호조 참판에 올랐고 수남(秀男)은 한성부윤에 이르렀다. 택선(宅善)은 성균관 진사에 올랐고 안선(安善)은 중추부사에 올랐으며 지현(知鉉)은 무과로 어모장군 부사과에 올랐다. 호광(好光)은 무과로 갑자년 이괄의 난에 참전하다 순절하였으니, 녹권이 있고 행정사에 배향되었다. 신광(伸光)은 무과로 인묘조 삼란(三亂)에서 전쟁의 공적을 많이 세워 일등의 공훈에 오르고 행정사에 배향되었다.아, 남은 경사가 있는 곳에는 문무 관헌(文武官憲)이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지만 위와 같이 개괄한다. 슬프다, 천하의 이치가 밝게 드러나고 감추어지며 낮이 되기도 하고 밤이 되기도 하는데 이 모두 음양이 성하고 쇠퇴한 정리(定理)이니, 이는 사람의 지력으로 미치지 못한다. 이제 양산씨는 양(陽)과 밝음이 돌아왔으니, 13대 사단을 영원토록 수호하고 제사를 받들어 선조를 계승하여 후손에게 복을 끼치게 하고 조상을 높이고 일족을 화목하게 하는 데 정성과 노력을 바친다면, 앞날이 창대할 것은 첨윤(詹尹)1)에게 점치지 않아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어서 명사(銘詞)를 쓴다.천 길의 흙도 능히 양옥(良玉) 빛을 못 가리고,만 길의 물도 능히 명주 빛을 못 가리네.양산씨가 이제 와서 밝게 빛나 꽃이 피네.13대 단위를 설치하는 것을 양산씨에게서 보았구나.거창한 추원(追遠) 사업을 다른 가문에서는 못 보아라.하늘이 상서로움을 내려 후예들이 창대하리.기묘년(1999)년 12월 일에 유주(儒州) 류한상(柳漢相)이 삼가 짓고,양산 김철순(金哲淳)이 삼가 쓰다.이상은 양산 김씨 대종회(大宗會)에 공경히 회답한다.경진년(2000)년 4월 일에 성균관장 최창규(崔昌圭) 첨윤(詹尹) 초(楚)나라 때의 태복(太卜) 정첨윤(鄭詹尹)을 말한다. 그는 점을 잘 치기로 유명하여 굴원(屈原)이 자신의 진퇴를 알아보려고 찾아간 일이 있다.(『楚辭』 「卜居」) 成均館通章右文通諭之事는 貴門始祖以下十二代祖를 設壇設享키로 하고 祠壇事蹟碑를 建立香火를 받들고저함은 至極한 慕先之誠으로 다음의梁山金氏梁山君以下十二代祀壇事蹟碑銘幷序康津金門의 重煥君은 事理에 밝은讀書士이다 與余로 晩契가 있어 情若弟兄인데 日에 그先代의 家狀과家牒을 가지고 漢相을 瑞石僑居에찾아 寒暄禮畢에 泫然이 말하기를우리 麗韓列先祖의 昭穆과 官職과事行은 昭詳이 載傳되여 있으나 但配位와 墓所는 無傳이오니 이 모두가 門衰祚薄의 所致이외다 그러므로 數百年 동안에 香火를 받들지 못하여 雨露가 젖으고 霜雪이 내리면悽愴怵惕의 마음과 風樹의 느낌을이기지 못하여 痛恨이 쌓여옴이 오래였습니다 今秋宗會에서 問議가雷同齊發되여 始祖以下十二代를設壇設享하기로 決議하고 推進委員會를 構成하여 壇所는 우리 先祠인 杏亭祠後麓冶嶝艮坐原에 占定하고 限庚辰四月하여 壇役을 竣工키로 하오나 寒門殘族으로 事巨力綿이 憂惧莫甚이외다 敢請하오니吾丈의 一言으로 우리 列先祖의 事蹟을 文而潤之하시와 闡明하여 주시면 殘門의 幸甚이 莫大하겠습니다 한다내人微文拙로 敢히 金石文字에 犯手堪當키 어려워 辭讓하나 請益勤故로 辭不獲하고 家狀과 家牒을 按驗하여 삼가 쓰노니 梁山金氏의 鼻祖인 諱衍은 號宜春堂이니 高麗惠宗朝에 通事舍人으로 梁山君에 封爵되여 得貫祖이고 그 아들諱贄는景宗朝給事로 翰林院을 兼職하고그 아들諱猛은 穆宗戊戌九九八年에 登第하여 左拾遺를 歷任하고 顯宗丙辰一○一六年에 中樞直學士에 除授되여 使節로 奉朝于宋하고吏部侍郞을 거처 中樞使太子少傅에 이르고 己丑一○二五年에 封爵되어 食邑三百戶를 下賜받았고 參知政事에 除授되여 同年十二月에卒하고 文宗朝에 太子太師門下侍中에 贈職되여 文定公으로 賜諡되고 忠南天原郡大弘里弘慶寺의 碑碣國寶七號에 公의 功蹟이 登載되있다 그 아들 諱德符는 文宗庚戌一○七○年에 太子賓客卷을 거처 壬戌一○八二年에 左僕射에 除授되고同年六月에 卒하다 그아들諱余興은 平章事이고 諡는 文益公이다 그子諱琮은 仁宗朝에 官門下侍中인데 鄭仲夫의 亂에 良州로 遯跡하다그아들諱義成은 高宗朝에 門下侍郞尙書令이고 그아들諱理範은 元宗朝에 神虎衛中郞將이니 使節로如于宋하고 그아들諱徵은 錄事參軍이고 配는許氏이다 그아들諱希盈은 忠定王朝에 右軍萬戶이고 그子諱孝安은 以子貴로 贈資憲大夫하고 그아들諱致賢은 朝鮮燕山丙辰一四九六年에 文科에及第하여三司를 거처 黃海監司에 除授되고그아들諱自禎은 通德郞이고 事行無傳이요 配는道康金氏이니 康津入鄕祖이다 墓는康津邑松峴里로記錄되였으나 失傳되다 今番에 梁山金門이 始祖인 梁山君을 비롯하여 康津入鄕祖까지 十三代를 設壇設享케 되었다 그家牒을 보건대 名功巨卿과 圭組冠冕이 麗韓兩朝에輩出되어 三韓의 名門華閥인데 이제와서 遐鄕의 片班寒族으로 稱詡되고 있으니 참으로 可悲也可歎也이요 感古傷今할 뿐이다 後孫에 顯達한 이를 略擧하면 諱命璋은 戶曹參判이오 諱亮은 進士인데 李靑蓮崔孤竹白玉峯林石川과 道義交가있었고 享于杏亭祠하다 諱昶은 文科로 綾州牧吏이고 諱應虎는 天文習讀官이고 諱應寅은 文科로 弘文館敎理이고 諱應彪는 內資寺直長이요 諱應麟은 全州判官이다 諱景善은 戶曹參判이고 諱秀男은 漢城府尹이요 諱宅善은 成均進士이고諱安善은 中樞府事이요 諱知鉉은武科로 禦侮將軍副司果이다 諱好光은 武科로 甲子适亂에 參戰殉節하니 有錄券하고 配食杏亭祠하다諱伸光은 武科로 仁廟朝三亂에 多立戰績하여 參勳一等하고 配食杏亭祠하다 噫라 餘慶所在에 文武官憲이 車載斗量이오나 槪括如右하다 슲으다 天下의 理致가 有明有晦하고 有晝有夜하니 이 모두 陰陽盛衰의 定理이니 이는 사람의 智力으로 不及한 바이다 이제 梁山氏는 陽과 明이 돌아왔으니 十三代祀壇을永世토록 守護하고 香火받들어 承先裕後하고 崇祖穆族에 殫誠竭力한다면 앞날의 昌大할 것은 詹尹에게 占하지 않아도 可히 알 수 있으리로다이어 銘詞를 쓰노니千길의 흙도 能히良玉빛을 못 가리고萬丈의 물도 能히明珠빛을 못 가리네梁山氏 이제 와서光華이뤄 꽃이 피네十三代 壇位 設定梁山氏에 보았구나巨創한 追遠 事業他門에는 못 보아라하늘이 降祥하사後裔들이 昌大하리歲己卯之蜡月 日儒州 柳漢相 謹譔梁山 金哲淳 謹書右梁山金氏大宗會에 敬答합니다歲庚辰二千年四月 日成均館長 崔昌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