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姜一遠 三棣扁楣聳出天苾芬花樹舞風連鷺來細雨洗塵垢龍馬歸雲淸石泉富貴浮榮都夢外安貧樂道在心邊落成今日爭稱賀賢裔更新永保傳【安東郡北後面勿閒洞】 稼軒晉州姜一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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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德熙 高築棣亭福內天翬飛瓦角瑞光連桂棠白石粧新雪戛玉程川噴細泉相合弟兄眞勝裡生平日夕不離邊成均褒彰猶無足竹帛名垂永世傳【星州郡金水面德山】 日新密陽朴德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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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元熙 亭高福內半中天增彩暎濃左右連檻外川聲琴七五簾頭峰嶽釼龍泉燃燈共被論書藝聯袂登山又海邊友弟孝親垂世範宜當載史永遺傳【星州郡金水面明川洞德山】 逸川密陽朴元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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鄭淳權 弟兄孝友出於天三棣笑談活氣連簇簇群山皆絶景涓涓流水是源泉成均表賞名聲重鄕郡薦揚慶喜邊況復肖孫勤繼述祖先偉蹟永垂傳【高靈郡德谷面晚霞洞】 霞山東萊鄭淳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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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장(儒狀)이 글은 소장을 올리기 위한 것입니다. 강진의 현치 북쪽 작천면 군자리 행정동에 행정사가 있는데, 이는 곧 강진의 망족 양산 김씨 삼현을 제사 지내는 곳입니다. 김씨의 선조 가운데 유항재 선생 량이 있었는데, 중종 때의 어진 신하였습니다. 어릴 적부터 학문에 뜻을 두어 당대 석유 이 청련공·백 옥봉공·최 고죽공 등의 제현들과 함께 도의로 교유하며 자주 상종하여 성리설을 토론하였습니다. 평소 담박한 것을 편안히 여겨 손에서 『심경』·『근사록』을 놓지 않았고 세상의 이욕과 욕망에는 담담하였습니다. 일찍이 사마시에 입격하고 음직으로 내자시 직장에 나아갔으나 또한 달가워하지 않았습니다. 만년에는 학업이 확충되고 행의가 드러나며 곤궁함을 굳게 지키고 가난을 편안히 여겨 조금도 방탕하고 사치한 마음이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유항재 선생이라는 호를 지은 것입니다. 이에 중에 감화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으며, 그가 기거하던 곳을 '군자리'라고 명명하였는데, 지금도 그 이름으로 부르고 있습니다.대개 강진은 외지고 먼 곳에 있어 성대한 명성을 지닌 인물들이 본래 기호(畿湖)보다 뒤떨어졌는데, 선생이 학문을 창도한 이래로 훌륭한 선비들이 많이 배출되었습니다. 게다가 선생의 증손 절효공 호광과 행정공 신광이 있는데, 이들은 모두 하늘에서 내린 효자입니다. 모친의 병환에 메추리 두 마리를 잡아서 올렸더니, 위증이 한 달도 되지 않아 정상으로 회복되었습니다. 이에 향인들은 그 효성이 감응한 것이라며 칭송하였습니다. 절효공은 갑자년 이괄의 난에 저탄의 전투에서 순직하였고, 행정공은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에서 임금을 호종한 공적을 올렸는데, 단서 철권에 모두 일등으로 올랐습니다. 위대하고도 아름답도다! 한 가문에서 삼대에 걸쳐 삼현으로 세대를 이어 함께 빛났으니, 이 어찌 세상에 드문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이 사당을 설립한 유래가 오래되었다 하겠습니다. 지난 가경 기사년(1809)에 처음으로 창립되고 고종 무진년(1868)에 이르러 훼철되었다가 지난 임인년(1962)에 다시 설립되어 향사의로 지금까지 제사를 모시고 있습니다.아! 선생의 도덕과 문장이 두 공의 충효·절의와 함께 이토록 탁월하고 남다르니, 마땅히 도사의로 제사 지내는 것이 옳은데 한갓 향사의로 제사 지내는 것은 어째서인가. 예로부터 선유들도 이와 관련하여 여러 차례 거론하였지만, 일이 중대하고 힘이 부족하여 시간만 지체하고 겨를이 없었으니, 이것이 후대 유생들이 억울해한 까닭입니다. 하지만 이제 사당이 일신되어 강당과 재실이 온전히 갖추어졌고 포주(庖廚)가 그럭저럭 충분해졌으니, 먼 곳에서 오는 선비들을 보내고 맞이하는 일에는 별도로 상관할 것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들은 이 사당의 제전을 도사의로 승격하여 제사를 모실 계획을 세웠고 공론도 한군데로 모아졌습니다. 그러나 이 일은 중대한 일이므로 마음대로 행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성균관장 경좌(經座) 아래에 우러러 고합니다. 삼가 바라건대, 저희가 지금 하는 이 일의 사유를 분명히 살피시고 서둘러 아름다운 승낙을 내려서 천추의 땅에 풍습을 교화할 수 있게 하기를 우러러 마지않습니다.공자 탄강 2545년 갑술년(1994) 모월 모일강진향교(康津鄕校) 전교(典校) 김중환(金重煥)·강진유도회지부장(康津儒道會支部長) 박현수(朴賢洙) 儒狀右文爲上狀事 康津治北鵲川面君子里杏亭洞有曰杏亭祠 卽康津望族梁山金氏三賢尸祝之所也金氏之先有曰有恒齋先生諱亮 中廟賢臣自幼有志學問與當世碩儒李靑蓮公白玉峰公崔孤竹公等諸賢爲道義交 源源相從 討論性理之說 平居恬素手不釋心經近思錄 於世利紛華澹泊如也 早登司馬 以蔭仕至內資寺直長 亦不屑焉 晩年學業擴充行義彪著 固窮安貧 少無放辟奢侈之心 故有號有恒齋先生 鄕人莫不感化 而因名其所居 曰君子里 至今猶以其名稱之矣 蓋康津僻在遐陬盛名文物素遜於畿湖 自先生倡學 彬彬縫腋之士多出焉 况復有先生曾孫節孝公諱好光杏亭公諱伸光俱以出天之孝慈患得雙鶉而進之 危症不月而復常 鄕人稱其孝感焉 乃節孝公則甲子适亂殉身於猪灘之戰 杏亭公則丙子胡亂效績於南漢之扈 丹書鐵券俱參一等 偉歟休哉 一門三世三賢聯世幷耀 是豈非爲世所稀者歟 蓋此祠設立由來則久矣 越在嘉慶己巳始創 而至于高宗戊辰見毁 往在壬寅復設 以鄕祀儀祭之 而至干今者矣嗚呼 先生之道德文章與兩公之忠孝節義如彼卓異 當以道祀儀祭之爲可徒其以鄕祀儀祭之者何也 自昔先儒亦因此 而屢有擧論 事巨力綿 而因循未遑者 是所以後儒抑鬱之者也 然而今則祠貌一新 講堂及齋室具全 庖廚稍足 遠來章甫送迎之節別無所關矣故于玆鄙等此祠祭典以道祀儀躋序奉祀爲計 而公論歸一矣 然此事重要 而非擅行之事 故玆以仰告于成均館長經座下伏願明察 鄙等今日此擧之由 而亟賜嘉諾以使風化於千秋之地仰望不己耳孔夫子誕降二千五百四十五年甲戌 月 日康津鄕校 典校 金重煥 [康津鄕校典校之印][金重煥]康津儒道會支部長 朴賢洙 [康津儒道會支部長印][朴賢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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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균관 통장(通章)이 글은 두루 통고하여 알리는 것입니다. 귀 문의 시조 이하 12대조의 제단을 설치하고 제향하기로 하였고 사단사적비(祠壇事蹟碑)를 건립하고 제사를 지내고자 한 것은 지극히 선조를 사모하는 정성에서 나온 것입니다. 다음의 비명을 짓는다.양산 김씨 양산군(梁山君) 이하 12대 사단사적비명(祀壇事蹟碑銘) 【서문 병기】강진 김문(金門)의 중환(重煥) 군은 사리에 밝은 글을 읽는 선비이다. 나와는 만년에 친분이 있어 정이 친형제와 같았다. 하루는 그 선대의 가장(家狀)과 가첩(家牒)을 가지고 내가 있는 서석(瑞石)의 임시거처에 찾아와 안부 인사를 마치고는 눈물을 줄줄 흘리며 말하였다. "우리 여한열선조(麗韓列先祖)의 소목(昭穆), 관직, 사행(事行)은 자세하게 실려 전해지고 있으나, 다만 배위(配位), 묘소(墓所)는 전래하는 것이 없습니다. 이 모두가 가문이 쇠퇴하고 복이 박한 소치입니다. 그러므로 수백 년 동안 제사를 받들지 못하여 우로(雨露)가 젖고 상설(霜雪)이 내리면 슬프고 두려운 마음과 풍수지탄(風樹之歎)의 느낌을 견디지 못하여 통한이 쌓인 지가 오래되었습니다. 올가을 종회(宗會)에서 문의(問議)가 벼락과 같이 일제히 일어나서 시조 이하 12대의 제단을 설치하고 제향하기로 결의하고 추진위원회를 구성하여 제단의 장소는 우리 선사(先祠)인 행정사(杏亭祠) 뒷산 야등(冶嶝) 간좌원(艮坐原)에 점정(占定)하고 경진년(2000) 4월을 기한으로 하여 제단 설치하는 일을 준공하기로 하였습니다. 하지만 한미한 가문의 쇠잔한 족속으로서 일이 중대하고 힘이 부족한 것이 몹시 걱정되고 두렵습니다. 감히 청하건대, 우리 어른께서 한마디 말씀을 내려 우리 열선조의 사적을 글로 지어 윤색하시고 천명하여 주시면 쇠잔한 가문의 큰 다행일 것입니다."내 사람됨이 보잘것없고 글재주도 없어서 감히 금석문자에 착수하기 어려워 사양하였다. 하지만 요청이 더욱 정성스럽기에 사양하지 못하고 가장과 가첩을 살펴보고 삼가 쓴다.양산 김씨의 시조인 연(衍)은 호가 의춘당(宜春堂)이니 고려 혜종조(惠宗朝)에 통사 사인(通事舍人)으로 양산군(梁山郡)에 봉작되어 득관조(得貫祖)가 되었다. 그 아들 지(贄)는 경종조(景宗朝)에 급사(給事)로 한림원을 겸직하였다. 그 아들 맹(猛)은 목종 무술년(998)년에 등제하여 좌습유를 역임하였고, 현종 병진년(1016)년에 중추 직학사에 제수되어 사절로 송나라에 조회를 받들고 이부시랑을 거처 중추사 태자소부에 이르렀다. 을축년(1025)년에 봉작되어 식읍 300호를 하사받았고, 참지정사에 제수되어 같은 해 12월에 세상을 떠났다. 문종조(文宗朝)에 태자태사 문하시중에 증직되어 문정공(文定公)으로 시호를 받았고, 충남 천원군 대홍리(大弘里) 홍경사(弘慶寺)의 비갈(碑碣)-국보(國寶) 7호-에 공의 공적이 등재되어 있다.그 아들 덕부(德符)는 문종 경술년(1070)년에 태자 빈객을 거처 임술년(1082)년에 좌복야에 제수되고 같은 해 6월에 세상을 떠났다. 그 아들 여흥(余興)은 평장사이고 시호는 문익공(文益公)이다. 그 아들 종(琮)은 인종조에 관직이 문하시중에 이르렀는데 정중부(鄭仲夫)의 난에 양주(良州)로 종적을 감추었다. 그 아들 의성(義成)은 고종조에 문하시랑 상서령에 이르렀고, 그 아들 이범(理範)은 원종조(元宗朝)에 신호위 중랑장(神虎衛中郞將)에 올랐으니 사절로 송나라에 다녀왔다. 그 아들 징(徵)은 녹사참군(錄事參軍)에 올랐고, 아내는 허씨(許氏)이다. 그 아들 희영(希盈)은 충정왕조(忠定王朝)에 우군만호에 이르렀고, 그 아들 효안(孝安)은 그 아들이 신분이 귀해진 연고로 자헌대부에 추증되었다. 그 아들 치현(致賢)은 조선 연산군 병진년(1496)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삼사(三司)를 거쳐 황해 감사에 제수되었다. 그 아들 자정(自禎)은 통덕랑에 올랐고 사업과 행적은 전해진 것이 없으며, 아내는 도강 김씨(道康金氏)이며 강진 입향조이다. 묘는 강진읍(康津邑) 송현리(松峴里)에 있는 것으로 기록되었으나 실전되었다.금번에 양산 김문(金門)이 시조인 양산군을 비롯하여 강진 입향조까지 13대의 제단을 설치하고 제향하고자 하였다. 그 가첩을 살펴보면, 명공(名功), 거경(巨卿)과 벼슬아치가 고려와 조선의 양조(兩朝)에 배출되어 삼한의 이름난 가문과 번화한 벌족이었는데, 지금에 이르러서는 먼 고을에 사는 반쪽 양반과 한미한 족속으로 일컬어지고 있으니 참으로 비통하고 한탄할 만하다. 옛일을 생각하고 지금을 슬퍼할 뿐이다.후손 중에 현달한 인물을 대략 거론하면, 명장(命璋)은 호조 참판에 이르렀다. 량(亮)은 진사에 이르렀는데 이 청련(李靑蓮)·백 옥봉(白玉峰)·최 고죽(崔孤竹)·임 석천(林石川)과 도의로 교유하였고 행정사(杏亭祠)에 배향되었다. 영(昶)은 문과로 능주 목사가 되었고 응호(應虎)는 천문 습독관(天文習讀官)에 올랐고 응인(應寅)은 문과로 홍문관 교리가 되었다. 응표(應彪)는 내자시 직장에 올랐고 응린(應麟)은 전주 판관에 올랐다. 경선(景善)은 호조 참판에 올랐고 수남(秀男)은 한성부윤에 이르렀다. 택선(宅善)은 성균관 진사에 올랐고 안선(安善)은 중추부사에 올랐으며 지현(知鉉)은 무과로 어모장군 부사과에 올랐다. 호광(好光)은 무과로 갑자년 이괄의 난에 참전하다 순절하였으니, 녹권이 있고 행정사에 배향되었다. 신광(伸光)은 무과로 인묘조 삼란(三亂)에서 전쟁의 공적을 많이 세워 일등의 공훈에 오르고 행정사에 배향되었다.아, 남은 경사가 있는 곳에는 문무 관헌(文武官憲)이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지만 위와 같이 개괄한다. 슬프다, 천하의 이치가 밝게 드러나고 감추어지며 낮이 되기도 하고 밤이 되기도 하는데 이 모두 음양이 성하고 쇠퇴한 정리(定理)이니, 이는 사람의 지력으로 미치지 못한다. 이제 양산씨는 양(陽)과 밝음이 돌아왔으니, 13대 사단을 영원토록 수호하고 제사를 받들어 선조를 계승하여 후손에게 복을 끼치게 하고 조상을 높이고 일족을 화목하게 하는 데 정성과 노력을 바친다면, 앞날이 창대할 것은 첨윤(詹尹)1)에게 점치지 않아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어서 명사(銘詞)를 쓴다.천 길의 흙도 능히 양옥(良玉) 빛을 못 가리고,만 길의 물도 능히 명주 빛을 못 가리네.양산씨가 이제 와서 밝게 빛나 꽃이 피네.13대 단위를 설치하는 것을 양산씨에게서 보았구나.거창한 추원(追遠) 사업을 다른 가문에서는 못 보아라.하늘이 상서로움을 내려 후예들이 창대하리.기묘년(1999)년 12월 일에 유주(儒州) 류한상(柳漢相)이 삼가 짓고,양산 김철순(金哲淳)이 삼가 쓰다.이상은 양산 김씨 대종회(大宗會)에 공경히 회답한다.경진년(2000)년 4월 일에 성균관장 최창규(崔昌圭) 첨윤(詹尹) 초(楚)나라 때의 태복(太卜) 정첨윤(鄭詹尹)을 말한다. 그는 점을 잘 치기로 유명하여 굴원(屈原)이 자신의 진퇴를 알아보려고 찾아간 일이 있다.(『楚辭』 「卜居」) 成均館通章右文通諭之事는 貴門始祖以下十二代祖를 設壇設享키로 하고 祠壇事蹟碑를 建立香火를 받들고저함은 至極한 慕先之誠으로 다음의梁山金氏梁山君以下十二代祀壇事蹟碑銘幷序康津金門의 重煥君은 事理에 밝은讀書士이다 與余로 晩契가 있어 情若弟兄인데 日에 그先代의 家狀과家牒을 가지고 漢相을 瑞石僑居에찾아 寒暄禮畢에 泫然이 말하기를우리 麗韓列先祖의 昭穆과 官職과事行은 昭詳이 載傳되여 있으나 但配位와 墓所는 無傳이오니 이 모두가 門衰祚薄의 所致이외다 그러므로 數百年 동안에 香火를 받들지 못하여 雨露가 젖으고 霜雪이 내리면悽愴怵惕의 마음과 風樹의 느낌을이기지 못하여 痛恨이 쌓여옴이 오래였습니다 今秋宗會에서 問議가雷同齊發되여 始祖以下十二代를設壇設享하기로 決議하고 推進委員會를 構成하여 壇所는 우리 先祠인 杏亭祠後麓冶嶝艮坐原에 占定하고 限庚辰四月하여 壇役을 竣工키로 하오나 寒門殘族으로 事巨力綿이 憂惧莫甚이외다 敢請하오니吾丈의 一言으로 우리 列先祖의 事蹟을 文而潤之하시와 闡明하여 주시면 殘門의 幸甚이 莫大하겠습니다 한다내人微文拙로 敢히 金石文字에 犯手堪當키 어려워 辭讓하나 請益勤故로 辭不獲하고 家狀과 家牒을 按驗하여 삼가 쓰노니 梁山金氏의 鼻祖인 諱衍은 號宜春堂이니 高麗惠宗朝에 通事舍人으로 梁山君에 封爵되여 得貫祖이고 그 아들諱贄는景宗朝給事로 翰林院을 兼職하고그 아들諱猛은 穆宗戊戌九九八年에 登第하여 左拾遺를 歷任하고 顯宗丙辰一○一六年에 中樞直學士에 除授되여 使節로 奉朝于宋하고吏部侍郞을 거처 中樞使太子少傅에 이르고 己丑一○二五年에 封爵되어 食邑三百戶를 下賜받았고 參知政事에 除授되여 同年十二月에卒하고 文宗朝에 太子太師門下侍中에 贈職되여 文定公으로 賜諡되고 忠南天原郡大弘里弘慶寺의 碑碣國寶七號에 公의 功蹟이 登載되있다 그 아들 諱德符는 文宗庚戌一○七○年에 太子賓客卷을 거처 壬戌一○八二年에 左僕射에 除授되고同年六月에 卒하다 그아들諱余興은 平章事이고 諡는 文益公이다 그子諱琮은 仁宗朝에 官門下侍中인데 鄭仲夫의 亂에 良州로 遯跡하다그아들諱義成은 高宗朝에 門下侍郞尙書令이고 그아들諱理範은 元宗朝에 神虎衛中郞將이니 使節로如于宋하고 그아들諱徵은 錄事參軍이고 配는許氏이다 그아들諱希盈은 忠定王朝에 右軍萬戶이고 그子諱孝安은 以子貴로 贈資憲大夫하고 그아들諱致賢은 朝鮮燕山丙辰一四九六年에 文科에及第하여三司를 거처 黃海監司에 除授되고그아들諱自禎은 通德郞이고 事行無傳이요 配는道康金氏이니 康津入鄕祖이다 墓는康津邑松峴里로記錄되였으나 失傳되다 今番에 梁山金門이 始祖인 梁山君을 비롯하여 康津入鄕祖까지 十三代를 設壇設享케 되었다 그家牒을 보건대 名功巨卿과 圭組冠冕이 麗韓兩朝에輩出되어 三韓의 名門華閥인데 이제와서 遐鄕의 片班寒族으로 稱詡되고 있으니 참으로 可悲也可歎也이요 感古傷今할 뿐이다 後孫에 顯達한 이를 略擧하면 諱命璋은 戶曹參判이오 諱亮은 進士인데 李靑蓮崔孤竹白玉峯林石川과 道義交가있었고 享于杏亭祠하다 諱昶은 文科로 綾州牧吏이고 諱應虎는 天文習讀官이고 諱應寅은 文科로 弘文館敎理이고 諱應彪는 內資寺直長이요 諱應麟은 全州判官이다 諱景善은 戶曹參判이고 諱秀男은 漢城府尹이요 諱宅善은 成均進士이고諱安善은 中樞府事이요 諱知鉉은武科로 禦侮將軍副司果이다 諱好光은 武科로 甲子适亂에 參戰殉節하니 有錄券하고 配食杏亭祠하다諱伸光은 武科로 仁廟朝三亂에 多立戰績하여 參勳一等하고 配食杏亭祠하다 噫라 餘慶所在에 文武官憲이 車載斗量이오나 槪括如右하다 슲으다 天下의 理致가 有明有晦하고 有晝有夜하니 이 모두 陰陽盛衰의 定理이니 이는 사람의 智力으로 不及한 바이다 이제 梁山氏는 陽과 明이 돌아왔으니 十三代祀壇을永世토록 守護하고 香火받들어 承先裕後하고 崇祖穆族에 殫誠竭力한다면 앞날의 昌大할 것은 詹尹에게 占하지 않아도 可히 알 수 있으리로다이어 銘詞를 쓰노니千길의 흙도 能히良玉빛을 못 가리고萬丈의 물도 能히明珠빛을 못 가리네梁山氏 이제 와서光華이뤄 꽃이 피네十三代 壇位 設定梁山氏에 보았구나巨創한 追遠 事業他門에는 못 보아라하늘이 降祥하사後裔들이 昌大하리歲己卯之蜡月 日儒州 柳漢相 謹譔梁山 金哲淳 謹書右梁山金氏大宗會에 敬答합니다歲庚辰二千年四月 日成均館長 崔昌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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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사묘정비건립(杏亭祠廟庭碑建立) 청원문(請願文)우리 양산김씨대종회(梁山金氏大宗會)에서는 삼가 이 글을 성균관장님께 올립니다. 우리 행정사는 순조 경진년에 당시 태학관(太學館)과 여러 고을의 향교의 통장(通章)을 받아 창건한 곳으로, 우리 양산 김씨 선조이신 유항재(有恒齋) 량(亮)·절효공(節孝公) 호광(好光)·행정공(杏亭公) 신광(伸光) 삼위(三位)를 일실(一室)에 향사하였습니다. 그러다가 고종 경진년(1880)에 훼철령에 따라 폐쇄되었지만 이후에 다시 설립된 뒤 향사하고 있습니다. 유항재 선생의 크고 높은 학덕과 절효·행정 두 공께서 충·효를 겸비하여 진무영국원종일등공신녹권(振武寧國原從一等功臣錄券)을 받은 행의를 흠모하여 다음의 비명을 짓습니다.행정사묘정비명 【서문 병기】도가 땅에 떨어지지 않아 인륜이 넘어지는 것을 붙잡아 일으켰고, 하늘이 사문(斯文)을 망하지 않게 하였기에 묘우(廟宇)가 빛나는 것을 보았다. 공손히 상고해 보건대, 여기 행정사는 김 유항재(金有恒齋)·김 절효(金節孝)·김 행정(金杏亭) 세 선생을 모신 사당으로 유항재 선생은 출생 때부터 기이한 조짐을 보였다. 어머니가 무후(武侯, 제갈량(諸葛亮))가 나타나는 꿈을 꾼 뒤에 선생이 태어나서 선생의 이름을 량이라고 지었다. 타고난 자질이 영민하고 성품이 순수하여 부모를 섬기는 데 정성을 다하였고 자제를 가르치되 엄격하게 하셨다. 어릴 적부터 학문에 뜻을 두고 청련(靑蓮) 이후백(李後白)·고죽(孤竹) 최경창(崔慶昌)·옥봉(玉峰) 백광훈(白光勳) 같은 명사 석학들과 종유하면서 날마다 강석에서 성리의 학설을 토론하고 『심경(心經)』·『근사록(近思錄)』을 손에서 놓지 않고 강마하였으며, 언제나 침착하고 마음이 담박하여 세상의 명리와 화려하고 사치한 것에는 욕심이 없었다.일찍이 사마시에 참방하여 음사로서 차례로 올라가 내자시 직장에 이르렀으나, 벼슬에 연연하지 않고 낙향하여 이청련·최고죽 등과 함께 공부하였던 박산(博山)의 이순당(邇順堂)에서 후학들을 계도하는 한편 위기(爲己)의 학문에 더욱 정진하였으니 행의가 드러나고 언제나 한결같아서 세상에서 유항재 선생이라 하였다.인조 2년 갑자년(1624)에 이괄(李适)이 병란을 일으키자 선생의 증손 김호광(金好光)이 분연히 일어나서 금남군(錦南君) 정충신(鄭忠信)의 막하에 종군하여 저탄(猪灘)에서 싸우다가 군량이 떨어지자 여기저기 주선하여 쌀을 모아 먹었으며, 싸움터에 나가 적을 꾸짖고 적진에 뛰어들어 힘을 다해 싸우다가 적에게 결박되었다. 이괄의 무리가 동참을 종용하자 호통치며 "신하는 충절을 위해 죽는 것이 떳떳한 일인데, 너희 역적들은 부끄럽지도 않으냐!" 하고 꾸짖다가 적들에게 난자를 당하여 장렬하게 죽었으니 당시 나이는 24세였다. 이듬해 7월 26일에 김류(金瑬) 등과 함께 진무원종일등공신(振武原從一等功臣)으로 책록되었는데, 공은 효자로서도 이름나서 절효공(節孝公)이라 하였다.그의 아우 김신광(金伸光)도 타고난 효자로 남다른 공적이 있었고 이괄의 난에서는 17세의 소년으로 형을 따라 정충신(鄭忠信)의 막하에 들어가 저탄에서의 싸움과 경도(京都) 수복 등 많은 공을 쌓았다. 병자호란에서는 인조대왕이 남한산성으로 몽진하실 때 겸사복(兼司僕)의 벼슬을 띠고 호종하였다. 인조 22년 갑신년에는 심기원(沈器遠) 등의 역모를 미연에 막은 공으로 영국원종일등공신(寧國原從一等功臣)에 책록되어 녹권을 받았고, 박천·희천·충주·영천의 수령을 역임하면서 애민선정(愛民善政)을 베풀어 도처에 송덕비가 세워졌다. 만년에는 고향으로 내려와 은행나무 아래에 정자를 짓고 망북정(望北亭)이라고 하였으니, 사람들이 공의 호를 행정(杏亭)이라 하였다.아, 사람이 충과 효를 겸하기는 지극히 어려운데, 양산 김씨의 삼현(三賢)이 이토록 우뚝하니 모두가 함께 제향하여 남국의 토기(土氣)를 진작시키는 것이 합당하다. 순조 9년 기사년(1809)에 유림에서 발의하자 이론이 없었고 여러 고을의 유림이 메아리처럼 호응하니 강진군 작천면 군자리 행정에 사우를 세워 향사를 지내왔다. 이제 그 묘정비를 세우려고 원임 류한상(柳漢相)과 임원 정길태(丁吉泰)·공련웅(孔鍊雄), 본손 철순(哲淳)·중환(重煥) 군이 나를 찾아와 글을 청하였는데, 나는 그 재목이 아니라며 거듭 사양하다가 간략히 서술하고 이어서 명을 쓴다.명사 석학들과 종유하던 유항재 선생 마음이 맑아서 물욕을 멀리했네.학문에 정진하니 행의는 따라 드높았고 만사에 자강하여 종시 한결같았네.절효공이 의리를 떨쳐 역적을 꾸짖다가 죽음이 오히려 영원한 삶 되었어라.슬프다, 오직 공은 힘이 부족하여 잡혔어도 당당한 그 지조 꺾이지 않았었네.행정공이 뒤를 이어 삼란에 공이 높았고 거쳐 간 고을마다 송덕비 빛이 났도다.묘정비(廟庭碑)를 세워 후손과 많은 선비가 본받도록 우러러 고합니다. 관장님께서는 김씨 삼대 절행의 탁월함을 가상히 여겨 그 행적이 민몰되지 않도록 해주시면 무척 다행이겠습니다. 삼가 외람됨을 무릅쓰고 청합니다.신사년 12월 일 서기 2001년 양산김씨대종회장 김중환(金重煥)성균관장 좌하께杏亭祠廟庭碑建立 請願文우리梁山金氏大宗會에서는 삼가 이글을 成均館長任게 올리나이다 우리杏亭祠는 純祖庚辰에 當時太學館과列郡鄕校의 通章을 받아 創建 우리梁山金氏先祖이신 有恒齋諱亮節孝公諱好光幸亭公諱伸光三位를 一室에亨祀하여오다가 高宗庚辰毁撤令에따라 閉鎖되었으나 그後復設享祀하고있습니다 有恒齋先生의크고높은學德과節孝杏亭兩公게서 忠孝를 兼備하셔 振武寧國原從一等功臣錄券을 받은 行義를 欽慕하여 다음과 같이杏亭祠廟亭碑銘 幷序道가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니 人倫이넘어지는 것을 붙잡아 이르켰고 하늘이 斯文을 亡하지 않게 하였기에 廟宇가 빛나는 것을 보겠다 恭遜히 詳考하건데 여기杏亭祠는 金有恒齋金節孝金杏亭세先生을 모신祠宇로서 有恒先生은出生時부터 奇異한 조짐이 있어서 어머니가 武侯를 現夢하시고 태어나니 이름을 亮이라 하였거니와 天資가英敏하고 稟質이純粹하여 父母를 섬김에 精誠을 다하고 子弟를 가르치되 嚴하게하였다 少時적부터學問에뜻을두고李靑蓮後白崔孤竹慶昌白玉峯光勳같은名士碩儒들과從遊하면서날마다講席에서 性理의學說을討論하고 心經近思錄을손에서 놓지않고 講磨하였으며 언제나沈着하고마음이淡泊하여世上의名利와華麗하고奢侈한것에는慾心이없었다일찍이司馬試에參榜하여蔭士로서차례로올라가內資寺直長에이르렀으나 벼슬에연연하지아니하시고落鄕하여 어릴때李靑蓮崔孤竹등과함께공부하였든博山의邇順堂에서 後學들을啓導하는한편 爲己의學問에더욱精進하니 行義가드러났고 언제나한결같으매 世上에서有恒先生이라하였다仁朝二年甲子에李适이兵亂을이르킴에先生의曾孫金好光이奮然히이러나 錦南君鄭忠信의幕下에從軍하여猪灘에서 싸우다가 軍糧이 떨어지자 여기저기周旋하여 쌀을모아먹였으며 싸움터에나가 賊을꾸짓고 敵陣에뛰어들어힘을다해 싸우다가 賊에게 結縛되었는데 李适의 무리가 同參을종용하자 호통치며 臣子는忠節을위해 죽는 것이 떳떳한 일이거늘 너희逆賊들은부끄럽지도 않느냐하고꾸짓다가 賊들에게 亂刺當하여 壯烈하壯烈하게죽으니 當時의 나이는二十四歲였다 이듬해 七月二十六日金瑬등과함께 振武原從一等功臣으로 策錄되었거니와 公은孝子로서도 이름나서 節孝公이라하였다그의 아우 金伸光도出天의孝로異蹟이있었고 李适의亂에는 十七歲의 少年으로 兄을따라 鄭忠信의幕下에들어가 猪灘에서의싸움과 京都收復등에많은功을쌓았다 丙子胡亂에는 仁祖大王이南漢山城으로蒙塵하심에兼司僕의 벼슬을띠고 扈從하였고 仁祖二十二年甲申에는 沈器遠등의 逆謀를未然에막은功으로 寧國原從一等功臣에策錄되여 錄券을받았으며博川煕川忠州永川의守令을歷任하면서 愛民善政을배풀어 到處에頌德碑가새워젔다 晩年에는 故鄕으로내려와 은행나무아래亭子를짖고이름을望北亭이라 하니 사람들이 公의 號를 杏亭이라 하였다嗚呼라 사람이 忠과孝를 兼하기는 至極히 어려운 바이거늘 梁山金氏의 三賢이저토록卓然하니 一體同享하여南國의士氣를 振作시킴이 合當하다하고 純祖九年己巳에 儒林에서 發議하자 異論이없었고 列郡의儒林들이響應하니 康津郡鵲川面君子里杏亭에祠宇를새워 享祀하여왔다 이제 그廟宇碑를새우려고 院任柳漢相과任員丁吉泰孔鍊雄本孫哲淳重煥甫가나를 찾아와 글을 請하매 나는 그材木이아니라고 거듭辭讓하다가 簡略히敍述하고 이어서 銘을 하니名士碩儒들과從遊하던有恒先生마음이 맑아서 物慾을 멀리했네 學問에 精進하니 行義는따라드높았고萬事에自强하여 終始한결같았네節孝公이奮義하여 逆賊을꾸짖다가죽음이 오히려永遠한 삶되었어라슲으다 오직공은 힘이 부처잡혔어도堂堂한 그志操꺾이지 않았었네 杏亭公이 뒤를 이어 三亂에功이높았고거처가신고을마다 頌德碑빛이난다의廟庭碑를새워 後孫과多士들이본받고저仰告하오니 館長任게서는金氏三世節行의卓越함을嘉賞히여기사 그行蹟이泯沒되지않도록하여주시면幸甚이겠습니다 삼가외람함을무릅쓰고 청하옵니다辛巳年十二月 日 西紀二千一年梁山金氏大宗會長[梁山金氏大宗會之印]金重煥成均館長座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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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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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문서

1993년 외삼문(外三門) 건립경리부(建築經理簿) 고문서-치부기록류-근현대문서 강진 군자서원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993년에 행정사 外三門 건립에 관련된 수입과 지출 내역을 정리한 장부. *張數: 2張 *형태사항: 성책(假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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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근현대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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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형 :
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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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부기록류

1738년 양산김씨(梁山金氏) 족계좌목(族契座目) 고문서-치부기록류-계문서 梁山金氏門中 강진 군자서원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738년에 작성한 梁山金氏族契문서. *계원의 생몰년을 추적하여 발급시기를 산정함. *계원 명단 다음에 乙巳 10월 15일의 完議와 협약시기를 알 수 없는 완의가 기록되어 있음. *張數: 16張 *형태사항: 성책(假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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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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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鶴陰齋次韻【原韻見上】 李綾州廣度崔嵬鶴岫鎭綾陽中有閒人一草堂初計鵬程誇北學生涯鳩拙臥東岡披襟恰受雲霞氣開戶常參水月光攻玉經冬文史足山家無事日偏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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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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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追次 三從孫俊默玄鶴之陰華鶴陽南來爲卜一茅堂玉軸金箱三古籍雲屛霧帳萬重岡書帶三春生物色奎星千載降精光行藏筮得中孚義棲息仙庄日月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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晩羲齋次韻【原韻見上】 趙相公寅永有客扣門雪正深淸儀一見可知心羲文易學多探古江鮑詩才亦有今嗟晩雲程登健武又因機務强酬吟林泉歸臥藏修處好是名鄕竹樹陰朴尙書綺壽完山倡和隔年深相對衰翁愴舊心聽漏丹門朝復暮窮經白首古猶今過在遺珠元自訟懽成倚玉可無吟悤悤敍別緣何事庭樹蟬鳴已夕陰柳校理幼麟棠岳相離歲月深白門聽雨更論心詞場渡灞還如昨宦路尋津愧至今萍水寧知他日事桃瓊聊和暮春吟聞君易學探幽賾陽亦迴時變太陰李承旨源益暮年易學獨鉤深可見吾儒衞道心文藝況兼無愧古經綸爲問足施今三年北客由先事再訪南崖共短吟臨別驪駒還悵惘浮生安得駐光陰金綾州鎭華昨見長文玩繹深是知經學得於心絶編聖訓應追昔呑畫靈機亦有今落落雲程知舊契時時風月等閒吟春光已老跫音寂賓榻徒懸竹樹陰李綾州玄五三年東閣夜燈深千里從遊故舊心河洛理明追旣往由夷行潔見於今雲林視作棲身所風月無非玩世吟吾亦賦歸將隱矣龍門山下萬樹陰李綾州章愚黃鶴山前洞府深主人卜築悟眞心一窓容膝安行止萬卷貯胷識古今白首荊圍存宿計靑春花鳥費長吟百年堂構傳裕後手種庭槐自作陰李綾州廣度幾歲桐鄕托契深知君如見伏羲心開成物務元從古張翕機緘式至今身臥邱園非遯世詩因花草偶成吟豫章賓榻緣誰解偶坐東軒綠竹陰再從姪相晤一理陰陽萬象深箇中親見伏羲心窮通此世殊先後事業吾家續古今琴酒不嫌閒處樂溪山那識老來吟文章未足爲身計廣濟經綸每惜陰族姪相鼎占取溪山窈且深結來茅屋養眞心暮年杖屨隨安靖映世文章振古今承誨恒思仁里接繾情遙龢短篇吟聖朝何晩茅茹拔第看陽春遍谷陰安橚華鶴崢嶸淨舍深焚香獨坐玩眞心工程格致推而廣事業繼開古與今棲躅幽林聊得樂譚詩平日素耽吟碧梧翠竹停鸞鵠爲賀先生種德陰閔哲邦幸接隣芳五柳深元知行義不欺心玄經屬草將垂後白髮侵人已到今書笈幾多薰炙益郵筒無絶往來吟吾鄕風俗因君厚祭社他時誦德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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申孟敎 高門孝友出於天三棣元來一氣連庭畔芝蘭春滿砌枕頭琴曲夜聞泉遠方朋友來尋處積案詩書詠吟邊福里人和亭不老芳名世世好相傳【大邱市達西一區松峴洞一九一七의三六】 靜隱平山申孟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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姜熙均 三棣扁楣揭碧天賢儒碩學往來連岫雲日日奇形態林鳥時時浴去泉唐宋文章吟律裡魯鄒名士誦經邊滿堂貴客多稱賀華閥令門永燿傳【安東郡祿轉面元川二洞】 月塘晉州姜熙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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姜大鎬 翬飛亭閣半空天絶景東南上下連崇祖餘陰金榻石仍孫積善玉林泉一家巨筆唐虞裡十世文章魯宋邊美蹟萬邦宣布頌成均褒賞永相傳【安東郡祿轉面沙川里】 蒼軒晉州姜大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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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부기록류

1919~1989년 행정사(杏亭祠) 묘현안(墓賢案) 복사본 고문서-치부기록류-계문서 梁山金氏門中 강진 군자서원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919~1989년에 작성한 杏亭祠 墓賢契案의 복사본. *기미년은 1919년, 기사년은 1989년으로 확인. *형태사항: 성책(복사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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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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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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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부기록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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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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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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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부기록류

임인~정축년 양산김씨(梁山金氏) 종계집강안(宗契執綱案) 고문서-치부기록류-계문서 梁山金氏門中 강진 군자서원 (재)한국학호남진흥원 임인~정축년 양산김씨종계의 公司員 및 典校 등 명단을 기록한 문서. *張數: 37張 *형태사항: 성책(線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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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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