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정사(杏亭祠) 도사의(道祀儀)로 승격성균관(成均館) 완문(完文)행정사 도사의성균관 완문답통(答通)이 글은 통문에 회답하기 위한 것이다. 지금 귀향의 유장(儒狀)을 살펴보았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강진의 현치(縣治) 북쪽 작천면(鵲川面) 군자리(君子里) 행정동(杏亭洞)에 행정사(杏亭祠)가 있는데, 이는 곧 강진의 망족(望族) 양산 김씨(梁山金氏) 삼현(三賢)에게 제사 지내는 곳입니다. 김씨의 선조 가운데 유항재(有恒齋) 선생 량(亮)이 있었는데, 중종(中宗) 때의 어진 신하였습니다. 어릴 적부터 학문에 뜻을 두어서 당대 석유(碩儒) 이 청련공(李靑蓮公)1)·백 옥봉공(白玉峰公)2)·최 고죽공(崔孤竹公)3) 등의 제현들과 함께 도의로 교유하며 자주 상종하여 성리학(性理學)을 토론하였고, 손에서 『심경(心經)』·『근사록(近思錄)』을 놓지 않았으며 세상의 이욕과 욕망에는 담담하였습니다. 일찍이 사마시에 입격하고 음직으로 직장(直長)으로 출사하였으나 또한 달가워하지 않았습니다. 만년에는 학업이 확충되고 행의가 드러났으며, 곤궁함을 굳게 지키고 가난을 편안히 여겨 조금도 방탕하고 사치한 마음이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유항재라는 호를 지은 것입니다. 이에 향인(鄕人) 중에 감화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으며, 그가 기거하던 곳을 '군자리'라고 명명하였는데, 지금도 그 이름으로 부르고 있습니다.게다가 선생의 증손 절효공(節孝公) 호광(好光)과 행정공(杏亭公) 신광(伸光)이 있는데, 이들은 모두 하늘에서 내린 효자입니다. 모친의 병환에 메추리 두 마리를 잡아서 올렸더니 위증(危症)이 한 달도 되지 않아 정상으로 회복되었습니다. 이에 향인들은 그 효성이 감응한 것이라고 칭송하였습니다. 절효공은 갑자년 이괄(李适)의 난에 저탄(猪灘)의 전투에서 순직하였고, 행정공은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에서 임금을 호송한 공적을 올렸는데, 단서 철권(丹書鐵券)에 모두 일등으로 올랐습니다. 위대하고도 아름답도다! 한 가문에서 삼대에 걸쳐 삼현으로 세대를 이어 함께 빛났으니, 이 어찌 세상에 드문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이 사당을 설립한 유래가 오래되었다 하겠습니다. 지난 가경(嘉慶) 기사년(1809)에 처음으로 창립되고 고종(高宗) 무진년(1868)에 이르러 훼철되었다가 지난 임인년(1962)에 다시 설립되어 향사의(鄕祀儀)로 지금까지 제사를 모시고 있습니다."생각건대, 선생의 도덕과 문장이 두 공의 충효·절의와 함께 이토록 탁월하고 남다르니 고상한 유풍이 세상에 전해진 것이 남주(南州)에 더욱 가득하다. 마땅히 도사의(道祀儀)로 제사 지내는 것이 옳은데, 지금도 향사의로 그친 것은 참으로 애석해할 만한 일이다. 그런데 지금 귀향의 유론(儒論)이 일치하고 이 사당의 향사를 도사의로 승격하고 제사를 지낼 계획을 세웠다고 하니 얼마나 다행인가. 이러한 소식을 들으니 감탄해 마지않는다. 대체로 어진 이를 추모하고 후인을 일깨우는 것은 사림의 책무이다. 내가 태학의 직임을 맡고 있으니, 이처럼 성대한 일에 어찌 찬동하지 않겠는가. 오직 바라건대, 여러 유림들이 서둘러 이 일을 마쳐서 천추의 땅에 풍화를 수립한다면 매우 다행이겠다.공자 탄강일 2545년 갑술년(1994) 모월 모일에 성균관장 김경수강진향교(康津鄕校) 전교(典校) 및 향유(鄕儒) 여러 회원에게 이 청련공(李靑蓮公) 이후백(李後白, 1520~1578)을 말한다.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계진(季眞), 호는 청련(靑蓮), 시호는 문청(文淸)이다. 1555년에 문과에 급제하였고 이후 이조 판서에 올랐으며 청백리에 녹선되었다. 함안(咸安)의 문회서원(文會書院)에 제향되었고, 저서로는 『청련집(靑蓮集)』이 있다. 백 옥봉공(白玉峰公) 백광훈(白玉峰, 1537~1582)을 말한다. 본관은 해미(海美), 자는 창경(彰卿), 호는 옥봉이다. 저서로는 『옥봉집(玉峯集)』이 있다. 최 고죽공(崔孤竹公) 최경창(崔慶昌, 1539~1583)을 말한다. 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가운(嘉運), 호는 고죽(孤竹)이다. 1568년에 문과에 급제한 뒤, 북평사(北評事), 정언, 영광 군수(靈光郡守), 대동도 찰방(大同道察訪), 종성 부사(鍾城府使) 등을 역임했다. 저서로는 『고죽유고(孤竹遺稿)』가 있다. 杏亭祠道祀儀昇格成均館 完文杏亭祠道祀儀成均館完文答通右文爲答通事 今按貴鄕儒狀 則康津治北鵲川面君子里杏亭洞有曰杏亭祠 卽康津望族梁山金氏三賢尸祝之所也金氏之先有曰有恒齋先生諱亮 中廟賢臣自幼有志學問與當世碩儒李靑蓮公白玉峰公崔孤竹公等諸賢爲道義交源源相從 討論性理之學 手不釋心經近思錄 於世利紛華淡泊如也 早登司馬 以蔭仕出爲直長 亦不屑焉 晩年學業擴充行義彪著 固窮安貧 少無放{忄+辟}〖辟〗奢侈之心 故有號有恒齋 鄕人莫不感化 而因其所居 曰君子里云 至今猶以其名稱之矣 况復有先生曾孫節孝公諱好光杏亭公諱伸光俱以出天之孝母患得雙鶉而進之 危症不月而復常 鄕人稱其孝感焉 乃節孝公則甲子适亂殉身於猪灘之戰 杏亭公則丙子胡亂效績於南漢之扈 丹書鐵券俱參一等 偉歟休哉 一門三代三賢聯世幷耀 是豈非爲世所稀者哉蓋此祠設立由來則久矣 越在嘉慶己巳始創 而至于高宗戊辰見毁 往在壬寅復設 以鄕祀儀奉祭 而至于今者也 竊念先生之道德文章與兩公之忠孝節義如彼卓異 其高尙遺風 播傳于世 彌滿于 南州 當以道祀儀祭之爲可 尙今以鄕祀儀止之者實可惜事也 何幸今者貴鄕儒論詢同 而此祠亨祀 以道祀儀躋序奉祀爲計云 聞之感歎無已 蓋慕賢牗後 士林之責務也 余責在首善之地 如斯盛擧 豈不贊同哉 惟冀僉儒林亟竣此事 以樹風化於千秋之地幸甚耳孔子誕降二千五百四十五年甲戌 月 日[成均館印]成均館長 金敬洙 [成均館長之印]康津鄕校 典校及鄕儒僉員 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