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균관 통답품(通荅稟)이 글은 통문에 답변하기 위해 작성하는 것이다. 중화를 높이고 오랑캐를 물리치는 것이 주(周)나라를 위한 것이고, 사적을 올리는 것은 송(宋)나라를 사모하는 것이니, 이는 성세(聖世)의 분명한 경계이다. 은전을 내려 표창하고 의풍을 떨친 기록이 국사에 실려 있지만, 용이 형세를 잃어 연못의 물고기와 굴에서 함께 살고 호랑이가 실성하여 교활한 토기와 부류를 함께하니, 사람의 실상(實像)은 그림을 잘 그리는 화공을 부르지 않아 도리어 우리보다 못한 것이다. 일의 단서와 이치의 단서는 추천하는 것과 추천하지 않은 것과 관계되니, 오상(五常)과 삼강(三綱) 중에서 오직 효(孝)와 열(烈)보다 중대한 일이 없다. 물고기와 용이 때를 잃어 작은 동물과 부류를 함께 하는 것은 효자와 열녀가 추천되지 않는 것과 사물의 이치로써 보면 서로 같다. 합포(合浦)의 진주가 돌아오고 연산(連山)에서 종유석이 다시 나는 것1)은 선한 정치로 고을에 알려진 것이니 영탄함을 마지않는다.임금께서 "아, 짐은 동궁을 근심하도다. 임자년부터 삼강(三綱)의 어진 자루를 잃을까 두려워서 항상 이 사이를 염려하였다. 조서로 각 성(省)에 하교하여 명망이 높고 어질고 선량한 신하를 선택해서 여러 도에서 조서를 받들게 하고, 문집을 간행하는 공인이 하나하나 옷섶을 잡아서 구슬을 잃어버리는 탄식이 없게 하였으니, 침을 뱉어 놀라서 일어나게 하는 면책을 입겠는가. 말라 죽은 버들에서 새잎이 돋아나니 만년을 돌아보지 않겠는가? 공경심이 그치지 않는구나. 한스러움이 이로부터 생겨났다."라고 하였다.저희가 얼핏 들으니, 전라남도 광주군 삼소지면(三所旨面) 해산리(海山里)에 거주하는 고사(古士)의 족성은 허씨(許氏)이고 휘는 관(寬)이며 본적은 양천(陽川)입니다. 그는 동방의 거벽으로 충(忠)은 방현령(房玄齡)과 두여회(杜如晦)를 방불하고 학문은 정자(程子)와 주자(朱子)에서 근원하며 재주는 관중(管仲)과 제갈량(諸葛亮)과 흡사하니, 대대로 이 가문을 끊이지 않게 하였습니다. 그 명맥은 문경공(文敬公) 휘 공(珙)의 14대손이고 이조 판서, 홍문관 대제학을 역임한 휘 부(富)의 11대손이며 성균관 생원을 지낸 휘 창(淐)의 증손에서 나왔습니다.공의 학문과 행실은 여러 직책에서 알려져 감탄하고 흠모하였습니다. 음식이 옥쟁반에 놓였으니, 이를 모르는 자는 소경과도 같습니다. 귀 군의 유복(儒服)의 실상을 살펴보면, 주곡(周谷)의 정채(精彩)처럼 밝게 빛나 규옥은 깎이지 않고 거울은 때 묻지 않으며 색은 변하지 않으니, 이 사람의 모습과 이 사람의 절도는 물기(物機)와는 견줄 것이 없습니다. 과실이 없는 가지는 아래로 대광주리를 잡고 헛된 마음을 버릴 줄을 생각하고, 구슬을 꿰는 자리에서 그치지 않으며, 돈으로 보배를 맺고 사람으로 자루를 들어서 진정으로 정립한 정학(正學)을 헛되이 지키지 않고, "초나라는 보물로 삼는 것이 없고 오직 사람만을 보물로 삼는다."라고 하였습니다. 장차 천리를 비추는 것은 위나라의 네 신하인데, 지금 천리를 비추는 것은 우리나라의 한 사람입니다. 옛 나라의 네 신하를 어찌 지금 시대의 한 현인과 견주겠습니까? 우러러 앙모하는 심정이 그치지 않습니다. 예를 갖춤이 단간목(段干木)의 집이 아니라면2) 오직 허군의 거처일 것입니다. 점차 완화계(浣花溪)3)는 되지 못하지만 초택(草宅)과 광산(光山)의 택인(擇仁)4)이 될 것입니다.그 아내 김씨가 허씨의 가문에 시집갔는데 광산의 고적(故籍)이 문정공 휘 태현(台鉉)에게서 나왔고, 후손의 범절은 규문의 예법을 어기지 않아 어버이를 곁에서 함께 모셨습니다. 또 예를 집행하고 여막에 사는 절차에서는 온갖 기송(杞宋)의 상례 절차에 한결같이 힘써서 홀로 정신을 차리기를 그치지 않았고, 아송(雅頌)의 제절(祭節)은 염락십철(濂洛十哲)을 본받았으니, 이와 같은 열행(烈行)을 어찌 천양하는 자리에서 아뢰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저희는 공께서 선행을 포창할 인물을 추천할 때 어찌 그 행적을 아뢰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즉시 포창하여 세풍(世風)이 백세토록 전해지기를 몹시 바랍니다. 이상은 여러 첨좌하께 공경히 통문한 것입니다.이 장문을 읽어보니, 두 가지 효열(孝烈)을 공경하고 가상할 만합니다. 즉시 정려문을 세워서 동방의 백성들이 눈을 뜨게 하는 것이 의당할 것. 24일 합포(合浦)의……것 청렴한 정사를 펼친 것을 말한다. 동한(東漢) 때 맹상(孟嘗)이 합포 태수(合浦太守)로 부임하여 폐단을 개혁하고 청렴한 정사를 펼치자, 생산되지 않던 진주(珍珠)가 다시 나오기 시작했다는 고사가 전하고, 영주(永州) 영릉현(零陵縣)에서 종유석(鐘乳石)이 생산되는데, 나라에서 공물을 착취하자 지방민들이 종유석이 바닥났다고 보고하였다가 최민(崔敏)이 선정(善政)을 베풀자 그곳 백성들이 종유석이 다시 난다고 보고한 고사가 전한다.(『후한서』 권 76 「순리열전(循吏列傳)」,『류하동집(柳河東集)』「영릉복유혈기(零陵復乳穴記)」) 예를……아니라면 위 문후(魏文侯)는 전국(戰國) 시대의 은자였던 단간목(段干木)의 마을을 지날 때 수레의 횡목(橫木)을 잡고 몸을 굽혀 예를 표한 고사를 말한다.(『呂氏春秋』 「期賢」) 완화계(浣花溪) 사천성(四川省) 성도현(成都縣)의 서쪽에 있는 곳으로, 골짜기가 깊고 물이 맑아 두보(杜甫)가 이곳에서 살았다. 택인(擇仁) 인후한 풍속을 지닌 마을을 골라서 사는 것을 말한다. 舘通荅稟 覧此狀文 則兩間孝㤠 欽仰嘉尙 卽立旌閭 俾此海東之民開眼宜當者 卄四日右文爲荅通事 尊攘爲周 進蹟慕宋 聖世之昭界也 褒典揚義 載在於國史 而龍之失勢 與池魚同穴 虎之失性 與狡兎知類 人之實像 不招摸工 還下於鄙等者 事之端理之端係於薦不薦 是五常三綱 惟孝惟烈 爲大事莫於斯也 以魚龍失時 與小物同類也 以孝裂不薦 以物理渠亦相似 合?浦歸連山乳復 以善聞於郡 永欽不已 王若曰嗚呼 朕憂東宮 奧自壬子恐失三綱之賢柄 常念在玆間 詔下敎於各省 擇望重賢良之臣 奉勅于列道 以剞劂之工一一執秹 而無遺珠之嘆矣 被唾起之責耶 枯楊生梯 不顧乎晩 欽不止十 恨自此生矣 鄙等傾聞全羅南道光州郡三所旨面海山里居古士族姓曰許氏 諱曰寬 籍曰陽川也 以東邦之巨擘 忠或房杜 學源程朱 才或管葛 世世不絶于此也 裔脉出於文敬公諱珙十四代孫吏曹判公弘文舘大提學 諱富之十一代孫成均舘生員諱淐之曾孫也 公之學行聞於列座 嘆哉欽哉 飯飡置玉 不識者盲杖也 覽此貴郡之儒服實像暎照于周谷之精彩也 圭之不磨 鏡之不埋 色之不變 斯人之形斯人之節莫比於物機矣 無果之枝 下執筐思捨虛心 不止貫珠之席上 以緡結宝 以人擧柄 不虛守眞立正學 曰楚國無以爲宝 惟人爲宝 將照千里者魏之四臣 今照千里者 吾邦一人也 以古國四臣何當於今世一賢 景仰不已 式庐非段干木之門 惟許君之居 漸作伐籬之剖 不爲花溪之卜 聞君草宅光山之擇仁也 其妻金氏及笄於許氏之門 而以光山故籍出文正公諱台鉉 裔儀範不下於閨門之禮 同待親側 又在執禮居庐之節 如一勵百杞宋喪節 獨醒不已 以雅頌祭節效於濂洛十哲 如此烈行 豈不聞於薦揚哉鄙等擧公褒善之地何不揚蹟哉 頃刻卽褒 世風傳於百世之地 幸甚右敬通于僉尊座下 甲辰 八月 日太學舘稟通前吏曹判書 金宗漢 前吏曹參判 尹相翊 前進士 徐祥浩前成均舘 生員 泮首 申榮雨 前參奉 崔永祚 前禮曹參判 金宗【今益】昇 前牧使 朴濟俊