벼슬을 추증할 당시의 경연 대화 贈職時筵說 을사년(1665년) 12월 27일 인견할 때 영의정 정태화(鄭太和)가 다음과 같이 아뢰었다.'수찬(修撰) 이단하(李端夏)의 상소 가운데 정문부(鄭文孚)의 일은 문자로 전례에 따라 회계(回啓)22)할 수 없으니, 지금 마땅히 어탑 앞에서 아뢰겠습니다. 일찍이 함경도 감사(咸鏡道監司) 민정중(閔鼎重)의 장계로 인하여 정문부와 함께 의병에 참여했던 여러 사람 가운데 어떤 이는 벼슬이 추증되었고 어떤 이는 그 자손을 녹용하였으며, 그 가운데 천역에 종사하는 자손들은 면천하라는 것은 이미 전하께서 결정을 내리셨는데, 정문부만은 유독 융숭히 장려하는 은전을 베풀지 않았으니 전하의 어진 정치에 흠결인 듯합니다.임진왜란 때 북도의 백성들이 왕자와 대신을 붙잡아 왜적에게 내어준 뒤에 주군(州郡)을 장악하였는데, 그 당시 정문부는 북평사(北評事)로서 의병을 일으켜 왜적을 토벌하고 그 군현을 수복하였으니 그 공이 큽니다. 그러나 실권을 잡은 사람에게 미움을 당하여 공이 크게 드러나지 못하였습니다. 혼조(昏朝, 광해군)에 이르러 향촌에서 한가롭게 지내다가 반정한 이후에 곧바로 전주 부윤(全州府尹)에 제수되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모친상을 당하였습니다. 여막에 거처할 때 어떤 훈신이 그를 찾아갔다가 일찍이 정문부가 읊었던 〈영사시(詠史詩)〉가 벽 위에 도배된 것을 보고 사람들에게 전파하였습니다. 그가 역옥에 연루되어 잡혀 들어갔다가 장차 풀려날 때 대간이 그 시의 의미가 가리킨 저의가 있다고 하여 다시 신문할 것을 논하여 장형(杖刑)을 맞다가 죽었습니다. 고 상신(相臣) 조익(趙翼)23)이 당시 문사낭청(問事郞廳)으로 있었기에, 일찍이 그 억울한 상황을 잘 알고서 자주 언급하였습니다.'부제학(副提學) 조복양(趙復陽)24)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신의 부친이 자주 그 억울한 상황을 말하였기에 신 또한 익히 들었습니다. 정문부의 이름이 역적의 공초(供招)에서 나와 체포됨을 면하지 못하였으니, 이는 박홍구(朴弘耇)의 옥사입니다. 그의 아들 박지장(朴知章) 등의 공초에서 또한 '정문부가 장수의 재목이기에 뜻을 두고 찾아가 만났으나 말을 꺼내지 못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신의 부친이 문사낭청으로 있었기에 또한 그 억울한 상황을 국청 당상관(鞫廳堂上官)에게 말하였는데, 끝내 혼조(昏朝) 때 지은 시로써 대간에서 계를 올려 억울하게 죽었습니다."우의정 허적(許積)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정문부의 임진년 공적은 혁혁하게 사람들의 이목에 남아 있으며 자신의 죄가 아닌 것으로 죽은 정상(情狀)을 또한 사람들이 모두 알고 있습니다. 설령 그 시가 반정 이후에 지어졌다고 하더라도 다만 역사를 읊은 것에 지나지 않으니, 어찌 은밀히 내포하는 뜻이 있겠습니까. 특별히 벼슬을 추증하여 북방 사람들을 격려하시는 것을 그만 둘 수 없을 것 같습니다."영의정 정태화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정문부는 장형을 받다가 죽었을 뿐 죄적(罪籍) 가운데에 이름이 있지 않는데 별도로 신원한 일이 없습니다. 다만 같이 의거하였던 사람은 이미 판서 급에 추증되었으니, 그렇다면 정문부의 첫 번째 가는 공은 더욱 마땅히 관직을 추증하고 자손은 녹용하는 것이 마땅합니다."이에 주상께서 "품계를 뛰어넘어 관직을 추증하고 그 자손을 녹용하는 것이 좋겠다."라 전교하였다. 乙巳十二月二十七日引見時, 領相鄭太和所啓, '修撰李端夏上疏中鄭文孚事, 不可以文字循例回啓, 今當陳達於榻前矣。曾因咸鏡監司閔鼎重狀啓, 與鄭文孚同事諸人, 或贈職, 或錄用其子孫, 其中子孫之爲賤役者, 免賤等事, 已爲定奪, 則文孚獨無崇奬之典, 果似欠缺。壬辰之亂, 北道之民, 執王子大臣, 投賊之後, 因據州郡, 其時文孚以北評事, 倡義討賊, 復其郡縣, 其功大矣, 而見忤於當路之人, 而功不大顯。及至昏朝, 棲遲州縣, 反正之後, 卽除全州府尹, 未幾遭其母喪。居廬之時, 有一勳臣, 往見其壁間所塗文孚曾所賦〈詠史詩〉, 傳說於人矣。及其被逮逆獄, 將釋之時, 臺諫以其詩意有所指, 論啓刑訊, 死於杖下。故相臣趙翼爲問事郞廳, 嘗知其冤枉之狀, 常常言之矣。' 副提學趙復陽曰: "臣父常言其冤狀, 臣亦聞之矣。文孚名出賊招, 不免被逮, 此是朴弘耇獄事也。朴知章等招辭中, 亦言'知文孚之有將材, 故有意往見, 而不得發言云云。' 臣父爲問事郞廳, 亦言其冤狀於鞫廳堂上, 而竟以昏朝時所賦之詩, 因臺啓冤死矣。" 右相許積曰: "文孚壬辰之功, 赫赫在人耳目, 死於非罪之狀, 亦人所共知也。設令其詩作於反正之後, 不過詠史而已, 有何指斥之意乎。特爲贈職, 激勸北路之人, 似不可已也。" 領相曰: "文孚死於杖下而已, 不在罪籍中, 別無伸冤之事。但同事之人, 旣贈判書, 則文孚以首功, 尤當贈職, 子孫亦宜錄用矣。" 上曰: "超品贈職, 錄用其子孫, 可也。" 회계(回啓) 임금의 물음에 대(對)하여 신하(臣下)들이 심의하여 대답(對答)하는 것을 이른다. 조익(趙翼) 1579~1655. 본관은 풍양(豊壤), 자는 비경(飛卿), 호는 포저(浦渚)·존재(存齋), 시호는 문효(文孝)이다. 1611년(광해군 3) 수찬(修撰)으로 있을 때 이황(李滉) 등의 문묘종사(文廟從祀)를 반대한 정인홍(鄭仁弘)을 탄핵하다 고산도찰방(高山道察訪)으로 좌천, 이듬해 사직하였다. 1649년 좌의정이 되어 이이(李珥)·성혼(成渾)의 문묘종사를 상소하였으나, 허락되지 않자 사직하였다. 김육(金堉)의 대동법(大同法) 시행을 적극 주장하였고, 성리학의 대가로서 예학(禮學)에 밝았으며, 음률·병법·복서(卜筮)에도 능하였다. 조복양(趙復陽) 1609~1671. 본관은 풍양(豊壤), 자는 중초(仲初), 호는 송곡(松谷),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조익의 아들이며 김상헌(金尙憲)의 문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