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간기록문화
통합검색플랫폼

기관별 검색

검색 범위 지정 후 검색어를 넣지 않고 검색버튼을 클릭하면 분류 내 전체 자료를 볼 수 있습니다

전체 으로 검색된 결과 84193건입니다.

정렬갯수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운대가 어찌 조대보다 높으랴149) 雲臺爭似釣臺高 한나라의 스물여덟 장군150)세상을 뒤덮은 명성 준걸이라 칭해졌네동강 오두막의 일개 낚시하는 늙은이151)맑은 풍모 오랫동안 도도히 흐르네당시 만승의 천자를 한 번 굴복시켰으니탁월한 행적 운대보다 훨씬 높았도다선생은 일찍부터 유문숙152)을 알았으니반평생 속진 속에서 함께 노닐었지천지가 갑자기 진인153)의 손에 들어갔는데선생 집의 좋은 물건은 오직 작은 배 뿐이었네양 갖옷 처사의 몸에서 벗기지 못했고154)곤룡 무늬 천자의 옷에 새롭게 더해졌네같은 침상에서 비록 하룻밤 기쁨 나누었으나155)안개 낀 강 백구와 맺은 약속 이미 굳건했네156)차라리 기산 영수에서 소보와 허유를 배울 지언정157)어찌 조정에서 이윤과 고요158) 같은 신하 되랴돌아와 부춘산에 한가로이 누워새장 떠나버린 신선의 학처럼 지냈네중흥의 장수들이 또한 일시에운수에 응하여 다행히도 풍운과 만났도다159)용 붙잡고 봉황에 붙어 그 기세 당할 수 없었으니160)한나라를 보좌한 공 소하와 조참161)보다 높았네땅을 나누어 제후에 봉하는 것일 관심 없으니태상162)과 홍종으로 어찌 기릴 것 있으랴스물여덟 장군 초상 별자리에 따라 배열하니엄연히 영웅호걸의 진짜 모습 그려냈네오직 나머지 객성163)은 모사할 수 없었으니어찌 화공의 솜씨로 붓 휘두를 것 있으랴걸출한 모습 우뚝하여 지주164)와 같으니깎아지른듯 우뚝 서서 큰 파도와 다투네남궁 운대의 장군들 다 한 수 아래이니예전에 전장을 누비며 부질없이 수고했네몸소 수많은 전쟁 겪은들 끝내 무슨 보탬이랴한 가닥 낚시줄로도 오히려 금도를 부지할 수 있거늘165)동도의 절의166)는 이백 년 동안 이어졌는데업하에서 늙어 죽은 이는 누런 수염의 조조라167)누가 은자에게 공업이 없다 말하랴구정이 약해지면 기러기 털보다도 가볍다오아, 나는 문무(文武) 모두 이루지 못하고평생토록 부질없이 용호도168)만 읽었네지금 기린각에 걸릴 사람 따로 있으니육오169)가 떠받친 바다로 돌아가 낚시질하련다 漢家二十八將軍蓋世之名稱俊髦桐廬一介垂釣翁淸風千古江滔滔當年一屈萬乘主卓軌逈出雲臺高先生早識劉文叔塵埃半世同遊遨乾坤忽入眞人手自家長物惟輕舠羊裘不脫處士身龍袞新加天子袍同床雖做一宵懽白鷗烟波盟已牢寧從箕穎學巢由肯向廊廟爲伊臯歸來高臥富春山有如仙鶴辭籠絛中興諸將亦一時應運幸與風雲遭攀龍附鳳勢莫當佐漢功高蕭與曺分茅裂土等閒事太常洪鍾安足褒圖形四七應列宿儼然幻出眞英豪唯餘客星模不得豈容畵手煩揮毫高標落落砥柱同截然屹立爭洪濤南宮介冑盡下風汗馬從前徒自勞身經百戰竟何補一絲猶可扶金刀東都節義二百年鄴下老死黃鬚操誰言隱者無功業九鼎微爾輕鴻毛嗟余書釰兩無成平生浪讀龍虎鞱今代麒麟別有人歸釣滄溟連六鰲 운대가……높으랴 송나라 범중엄(范仲淹)의 〈조대시(釣臺詩)〉에 나오는 구절로, 공을 세우는 것보다 은거하여 한가로이 지내는 것이 낫다는 의미이다. 운대는 후한(後漢) 때의 공신각(功臣閣) 이름이고, 조대(釣臺)는 후한의 은사 엄광(嚴光)이 낚시하던 곳이다. 한나라의 스물여덟 장군 광무제(光武帝) 때 공을 세운 등우(鄧禹), 오한(吳漢) 등 28명의 공신을 말한다. 후한 명제(後漢明帝) 때 이들의 초상화를 그려, 남궁(南宮)의 운대에 28수(宿)의 순서대로 걸어 놓았다. 《後漢書 馬援列傳》 동강……늙은이 엄광을 가리키는 것으로, 엄광은 광무제의 출사 요청을 뿌리치고 부춘산(富春山)에서 은거하고 동려현(桐廬縣) 칠리탄(七里灘)에서 낚시를 즐기며 일생을 마쳤다. 유문숙(劉文叔) 문숙은 광무제 유수(劉秀)의 자이다. 엄광과 광무제는 어린 시절 함께 공부한 친구 사이였다. 진인(眞人) 진인은 천명을 받아 천하를 통일한 황제를 이르는 말이다. 《사기》 〈진시황본기(秦始皇本紀)〉에 "진 시황이 '나는 진인을 사모한다.'라고 하며, 자신을 진인이라 하고 짐이라고 하지 않았다.[始皇曰, 吾慕眞人, 自謂眞人, 不稱朕.]"라는 하였다. 여기서는 왕망(王莽)에게 찬탈당한 한나라를 재건한 광무제를 가리킨다. 양……못했고 광무제가 엄광을 벼슬에 나오게 하지 못했다는 의미이다. 광무제가 제위(帝位)에 오른 뒤 엄광은 이름을 바꾸고 숨어 살았는데, 광무제가 엄광을 찾기 위해 온 나라에 명을 내리자 제국(齊國)에서 "어떤 사람이 양 갖옷[羊裘]을 입고 못에서 낚시질합니다."라는 제보가 올라왔다. 《後漢書 嚴光列傳》 같은……나누었으나 광무제가 숨어 사는 엄광을 찾아내어 겨우 만나게 되었는데, 엄광이 광무제와 함께 잠을 자던 중에 광무제의 배에 다리를 올렸다. 그 다음날 태사(太史)가 아뢰기를 "객성(客星)이 어좌(御座)를 범하였습니다."라고 하니, 광무제가 웃으면서 "짐이 옛 친구인 엄자릉과 함께 잤을 뿐이다."라고 하였다. 《後漢書 嚴光列傳》 안개……굳건했네 백구와 벗하며 강호에서 은거하기로 결심했다는 의미이다. 송나라 육유(陸游)의 시 〈숙흥(夙興)〉 시에 "학의 원망은 누굴 의지해 풀거나, 백구와의 맹세 이미 식었을까 염려되네.[鶴怨憑誰解 鷗盟恐已寒]" 하였다. 기산……지언정 소보(巢父)와 허유(許由)는 요(堯) 임금 때의 고사(高士)로, 기산(箕山)에 들어가 숨어 살았다. 요 임금이 허유를 불러 구주(九州)의 장(長)으로 삼으려고 하자, 허유가 더러운 말을 들었다고 하면서 영수(潁水)의 물에다가 귀를 씻었다. 소보가 영수에 소를 끌고 와서 물을 먹이려고 하다가 허유가 귀를 씻은 이유를 듣고는, 소에게 이 물을 먹이면 소의 입이 더럽혀진다고 하면서 소를 상류로 끌고 올라가 물을 먹였다. 《高士傳 許由》 이윤(伊尹)과 고요(皐陶) 탕(湯)임금의 신하 이윤과 순(舜)임금의 신하 고요의 병칭으로, 재상을 뜻하는 말이다. 풍운과 만났도다 호걸이 훌륭한 임금을 만나 의기투합했다는 의미이다. 《주역》 〈건괘(乾卦) 문언(文言)〉의 "구름은 용을 따르고 바람은 범을 좇는다.[雲從龍, 風從虎.]"라고 하였다. 용……없었으니 당나라 두보(杜甫)의 〈세마행(洗兵行)〉 시에 나오는 구절로, 제왕을 도와 공업을 이루는 것을 비유한다. 소하와 조참 소하(蕭何)와 조참(曹參)은 한나라 건국 초기의 명재상이다. 태상(太常) 태상은 해와 달을 그린 왕의 정기(旌旗)로서, 거기에 공신(功臣)의 이름을 새겨 공을 기렸다. 《周禮 夏官司馬 司勳》 객성 엄광을 말한다. 지주 중국 삼협(三峽)의 지주산(砥柱山)을 말한다. 산의 형상이 황하의 세찬 물결에도 굽히지 않고 버티고 서 있으므로, 세상 풍파를 견디며 굳센 지조를 지키는 선비를 비유하는 표현으로 흔히 쓰이다. 한……있거늘 금도(金刀)는 한나라 왕실의 성인 '유(劉)' 자를 파자한 것으로, 엄광이 광무제의 부름을 거절하고 지조를 지킴으로써 한나라 선비들의 기개를 높여 나라를 지탱했다는 의미이다. 세상에서 엄광을 칭송하며 "동강의 한 가닥 낚싯줄이 한나라의 국통을 부지하였다.[桐江一絲, 扶漢九鼎.]"라고 하였다. 《古今源流至論後集 卷6 氣節》 동도의 절의 동도(東都)는 후한(後漢)의 도읍인 낙양(洛陽)이다. 후한 때에는 엄광(嚴光)을 비롯하여, 광무제 때의 주당(周黨), 환제(桓帝) 때의 진번(陳蕃)과 이응(李膺) 등 절의를 지킨 선비들이 있었다. 《後漢書 卷8 孝靈帝紀》 업하에서……조조라 업하(鄴下)는 위(魏)나라의 도읍이다. 누런 수염[黃鬚]은 성품이 강용(剛勇)함을 비유하는 말로, 조조(曹操)의 아들인 조창(曹彰)이 '황수아(黃鬚兒)'라 일컬어진 데서 유래하는데, 여기서는 조조를 일컫는 말로 쓰였다. 《三國志 魏志 任城威王彰傳》 용호도(龍虎鞱) 병법서를 말한다. 주나라 여상(呂尙)이 지은 병서 《육도(六韜)》에 〈용도(龍韜)〉과 〈호도(虎韜)〉라는 편명이 있다. 육오 육오(六鰲)는 바다에 삼신산을 머리로 이고 있다는 여섯 마리의 자라이다. 예로부터 섬이 바다에 떠 있는 것을 큰 자라가 아래에서 떠받치고 있는 것이라고 표현하였다.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제목 누락 題缺 오류선생 본래 산에 살았는데우연이 객이 되어 세상에 나왔다가돌아가 날마다 술에 취해 깨지 않으니버들 다섯 그루가 봄빛을 다투는 줄 몰랐네170)천년의 동방에 -원문 3자 결락-불상 앞에서 손가락 꼬며 –원문 2자 결락-171)근래 수염이 삼천 길이나 자라 나니큰 아이 작은 아이 모두 아버지 불러대누나애써 사립문 밖에 버들 다섯 그루 심어172)옛사람과 높은 명성 나란히 하려 하네옛사람은 벼슬 버리고 강호에서 은일했는데지금 사람은 참선 피해173) –원문2자 결락- 전하네도끼 잡고 나무 베어 땔나무 만들고콩죽과 명아주국 끓여 먹는 것만 못하니그렇지 않으면 아내가 집을 떠날 적에긴 가지 꺾어 이별의 정 나타냈겠지 五柳先生本在山偶然爲客人間行歸來日日醉不醒不知五柳爭春榮千載東方【三字缺】佛前撚指堅【二字缺】邇來長髮三千丈大兒小兒呼爺聲强裁五柳柴門外欲與古人齊高名古人投簪逸海山今人逃禪傳【二字缺】不如操斧斫爲薪煮取豆粥與黎羹不然生妻去室時折得長條表離情 오류선생……몰랐네 진(晉)나라 도연명(陶淵明)이 팽택 영(彭澤令)으로 있다가 뜻이 맞지 않아 그만두고 전원으로 돌아와 집 앞에 버드나무 다섯 그루를 심어 놓고 오류선생(五柳先生)이라 자칭하였다. 《古文眞寶 後集 卷2》 원문 2자 결락 '堅'은 원문의 문제로 번역하지 않았다. 심어 대본에는 '裁'로 되어 있는데, 문맥에 의거하여 '栽'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참선 피해 도선(逃禪)은 좌선(坐禪)을 도피한다는 뜻이다. 당 현종(唐玄宗) 때의 문신 소진(蘇晉)이 술을 매우 즐겨 마셨는데, 두보(杜甫)의 음중팔선가(飮中八仙歌)에 "소진은 수불 앞에서 장기간 재계를 했는데, 취중에는 가끔 좌선을 도피하기 좋아했다네.[蘇晉長齋繡佛前, 醉中往往愛逃禪.]"라고 하였다.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산수 사이에서 거문고를 타는 그림 山水彈琴圖 고요하면 깊은 못되고 울면 여울 되니거문고를 안은 사람 이 안에 앉아 있네이미 마음으로 소리 없음의 오묘함 깨달았으니아양 곡조193)를 탈 것 없다네 靜作深潭鳴作湍抱琴人坐此中間已將心會無聲妙莫把峨洋絃上彈 아양 곡조 아양곡(峨洋曲)은 백아(伯牙)가 탔던 금곡(琴曲)을 말한다. 옛날에 백아는 거문고를 잘 타고 그의 친구 종자기(鍾子期)는 그 소리를 잘 알아들었는데, 백아가 높은 산에 뜻을 두고 거문고를 타자, 종자기가 듣고 말하기를 "좋다, 높다란 것이 마치 태산과 같구나.[善哉, 峨峨兮若泰山!]"라고 하였고, 또 백아가 흐르는 물에 뜻을 두고 거문고를 타자, 종자기가 또 말하기를 "좋다, 광대한 것이 마치 강하와 같구나.[善哉, 洋洋兮若江河!]"라고 하였다. 종자기가 죽은 뒤로는 백아가 자기의 거문고 소리를 알아들을 사람이 없다 하여 마침내 거문고를 부숴 버리고 종신토록 다시는 연주하지 않았다고 한다. 《列子 湯問》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은계에서 묵고 철령을 넘으며, 다시 앞 시의 운자를 사용하여 지어서 최노첨에게 부치다 2수 宿銀溪 逾鐵嶺 復用前韻 寄魯詹【二首】 기러기는 금하246) 건너 오랑캐 활 피했으니그 울음소리 변경 하늘로 높이 들어가네이때 놀라 고향 그리는 꿈에서 깼으니날 밝도록 앉아서 잠들지 못하노라-원문 1자 결락247)-오솔길 시내 따라 활줄 처럼 곧고협곡 안은 둥근 동천248)인 듯하여라본래 가을산은 그림 속 풍경 같으니용면249)의 솜씨 빌려 베껴 그릴 필요 없네 鴈度金河避虜弦一聲高入塞天圓此時驚罷相思夢坐到天明不得眠【缺】逕沿溪直似弦峽中惟覺洞天圓自是秋山如畫裡不須摹寫借龍眠 금하(金河) 내몽고(內蒙古) 지역에 있는 강 이름으로, 지금은 대흑하(大黑河)라 한다 원문 1자 결락 '逕'은 원문의 문제로 번역하지 않았다. 동천 도가(道家)에서 신선이 사는 곳을 뜻하는 말이다. 인간 세상에 36개의 동천이 있다고 한다. 《述異記 卷下》 용면(龍眠) 송나라의 뛰어난 화가 이공린(李公麟)의 호이다.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연못가 조촐한 술자리에서 이원배의 시에 차운하다 蓮池小酌 次李源培韻 장난삼아 나비 따라 봉래산에 들어가니괜스럽게 선녀들이 내게 어디서 왔냐고 묻누나이십구 년간 속진 속에 있었으니번다한 시름 달랠 길 없어 술잔만 들었네 戱隨蝴蝶入蓬萊多事仙娘問我來二十九年塵土裡煩愁無賴酌金壘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서장관의 칠석 시에 차운하다 次書狀七夕韻 천상에 누가 은하수 흐르게 하였나선계에도 본래 이별의 시름 있어라남은 물결 내려와 용만의 강280) 되었으니동서로 떨어져 두 곳에서 가을 맞네 天上誰敎河漢流仙居亦自有離愁餘波下作龍灣水解隔東西兩地秋 용만의 강 용만은 의주(義州)의 별칭으로, 용만의 강은 압록강을 가리킨다.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연산관281)으로 가는 길에 連山道中 남쪽 사람 북으로 가면 근심 일어나고북쪽 나그네 남쪽 오면 떠돌이 신세 한탄하지본디 인정은 각기 고향 그리워하기 마련이니연산이 굳이 시름겹게 할 필요 없네 南人北去動離憂北客南來歎旅遊自是人情各懷土連山不必使人愁 연산관(連山關) 구련성(九連城)과 심양 사이에 설치된 여덟 군데의 역참(驛站) 중 하나이다. 현재는 요녕성 본계시(本溪市)에 위치하며, 동쪽으로 봉성시(鳳城市), 서쪽으로 요양시(遼陽市)를 접하고 있다.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면사포 쓴 아가씨 面紗娘 안개 속 꽃 보듯이 병든 눈 탄식하니푸른 깁 무슨 일로 다시 머리에 썼나흐릿해도 오히려 추파282) 던진 줄 아는데춘심을 팔려 해도 뜻대로 되지 않네 霧裏看花歎病眸碧紗何事更籠頭矇矓猶認秋波動賣與春心不自由 추파 미인의 눈빛을 비유하는 말이다.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백부 승지공이 차운한 시를 덧붙이다 2수 附伯父承旨公次韻【二首】 숲 정자 모여 얘기하다 돌아가길 잊으니돌 베고 누운 민둥머리 취한 뒤 들어보네봄꽃 피었다 다 졌어도 안타까워 마오뜰앞에 도성에서 옮겨 심어 놓았으니꽃이 진 사월에 옅은 녹음 있으니임하의 맑은 술동이 깊고 더욱 깊어라노래는 저녁에 부르게 하지 마오늙은이 고금의 감회 이기기 어렵다오 林亭會話却忘回枕石童頭醉後擡莫恨春花開落盡庭前移得洛陽栽無花四月有輕陰林下淸尊深復深歌曲莫敎當夕唱老翁難勝古今心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이덕재의 〈최노첨을 경계하다〉 시에 차운하다 次德哉警魯詹韻 노두가 어느 때에 〈북정〉을 읊었던가87)고향에선 봄빛이 매화를 저버렸네집 없이 삼 년이란 오랜 시간 객지살이 하였는데벗이 있어 그런대로 고향 그리는 정을 풀었노라돌아가는 꿈속에선 매양 하늘 밖에서 게으름 피웠는데여정은 대부분 눈 속에 가는구나서쪽 소식 누구에게 물을거나오직 변경 산에 뜬 밝은 조각달만 볼 뿐 老杜何時賦北征故園春色負梅兄無家久作三年客有友聊寬萬里情歸夢每從天外懶旅程多在雪中行西方消息憑誰問惟見關山片月明 노두가……읊었던가 노두(老杜)는 당나라 시인 두보(杜甫)의 별칭이다. 〈북정(北征)〉 시는 두보가 46세 때 지은 오언고시로, 안녹산(安祿山)의 난을 만났을 때 행재소(行在所)인 봉상(鳳翔)에서 처자가 있는 부주(鄜州)로 가는 동안의 정경과 감회를 읊은 시이다.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복숭아나무 접붙이기 接桃 봄바람이 네게 봄 꽃가지 하나 중매하니다른 나무에 시집가서 새 꽃을 피우네꽃은 말하지 않더라도 열매는 맺으니초궁의 식부인349)에게 비길 수 있겠네 東風媒汝一枝春嫁與他根作態新花縱不言猶有子楚宮堪比息夫人 초궁의 식부인 식부인은 식후(息侯)의 아내인 식규(息嬀)이다. 초자(楚子)가 식국(息國)을 멸망시킨 후 식규를 데리고 돌아왔다. 식규는 초나라로 온 뒤에 도오(堵敖)와 성왕(成王)을 낳았으나, 초자와 말을 하지 않았다. 초자가 그 이유를 묻자, 대답하기를, "나는 한 여자로 두 남편을 섬겼으니 비록 죽지는 못할망정 또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라고 하였다. 《春秋左氏傳 莊公 14年》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회남 벗에게 부치다〉 시에 차운하다 次寄淮南友韻 고향 그리는 마음에 높은 누각에 기대고봄 생각에 풀향기 나는 물가에 서 있노라가고자 하지만 갈 수 없으니잠깐 떠나왔는데 오래도록 떠돌게 되었네풍진 세상 고향과 떨어져 있고노래하고 춤추는 이들 청루에 흩어져있네세상사는 흐르는 물과 같으니흘러가 붙잡을 수 없으니 어이하랴 鄕心倚高閣春思立芳洲欲往不得往薄遊成久遊風塵隔故國歌舞散靑樓世事將流水如何去莫留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왕 한양에게 부치다〉 시에 차운하다 次寄王漢陽韻 남쪽 마을과 북쪽 성곽술 익자 서로 부를 줄 아네신 거꾸로 신고17) 맞이하는 주인 반가워하고옷깃 당기며 손 붙잡는 여자아이 어여쁘구나잔치를 열어 푸른 풀 속에 앉으니달을 기다리며 파란 하늘 바라보네크게 취하여 돌아오는 저물녘사립문 건너에 강이 멀리 흐르네 南隣與北郭酒熟解相邀倒屣主人喜牽衣兒女嬌開筵坐碧草待月望靑霄大醉歸來暮柴門隔水遙 신 거꾸로 신고 급히 손님을 맞이하러 나가느라 신발을 거꾸로 신는다는 뜻으로, 매우 반갑게 손님을 맞이하는 것을 형용하는 말이다. 《삼국지(三國志)》 권21 〈위서(魏書) 왕찬전(王粲傳)〉에 "왕찬(王粲)이 문에 있다는 말을 듣고 신발을 거꾸로 신고 달려가 맞이하였다[倒屣迎之]."라고 하였다.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손문서의 원운을 부기하다 附孫文恕韻 백만 호위군이 북쪽 변방을 진동시키니성대한 위엄을 먼저 길성 오랑캐에게 떨치네깃발은 동틀 무렵에 염천의 달을 가리고고각 소리는 새벽에 탑야의 산을 놀라게 하네군졸도 오히려 기꺼이 목숨 바쳐 싸우는데장군이 어찌 감히 살아서 돌아가려 하랴한나라의 옛 공업 이제부터 회복하리니미천한 신하 잠시도 한가롭지 못하다 어찌 한스러워하랴 百萬羽林動北關天聲先振吉城蠻旌旗曉蔽鹽川月鼓角晨驚塔野山士卒尙能甘死戰將軍何敢樂生還漢家舊業從今復肯恨微臣不暫閒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양황269)의 서당 梁榥書堂 양군의 식감으로 하늘이 숨겨 놓은 장소를 찾아내어깊은 숲에 자리 잡아 초당을 지었어라천 년의 구름과 이내는 학을 타던 곳이요한 지역 산수는 와룡의 집이라겹겹의 띠집이라 성난 가을바람 두렵지 않고푸른 나무라 긴긴 여름날에 정말 좋아라독서 이외에는 아무 일도 없나니제비의 진흙이 텅 빈 들보에서 떨어지는 것을 때로 보노라 梁君眼力破天藏爲卜林幽作草堂千載雲煙乘鶴地一區山水臥龍庄重茅不怕秋風怒綠樹偏宜夏日長除却讀書無一事燕泥時見落空樑 양황 1575~1597. 본관은 남원(南原), 자는 학기(學器)이고, 호는 진우재(眞愚齋)이다.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 양홍주(梁弘澍)의 아들이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18세의 나이로 아버지와 함께 의병을 일으켰다. 아버지는 경상도의 의병장 정인홍(鄭仁弘)에게로 가서 힘을 합하여 왜적을 물리치려고 했으나, 그는 몽진한 왕을 호종하는 것이 신하된 도리임을 역설하여 의주행재소에 가서 왕에게 가져간 곡식과 물품을 바쳤다. 이후 경상도초유사 김성일(金誠一) 휘하에서 공을 세웠으며, 가재를 팔아 많은 화살을 준비하여 군비확충에도 일익을 담당하였다.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다시 차운하되, 수구에는 운자를 쓰지 않다 再次 不用首韻 이번에 마천령 밖으로 가니시중대와 원수대184) 있다오밥 짓는 연기 예로부터 남쪽으로 통했으니봄빛이 어찌 북쪽 변방에 이른 적 없으랴세류에 군영 열었으니 적을 물리친 이 누구인가185)낙매곡 피리로 부니 향기 나지 않네186)무심히 오고가는 것 내 우스우니옛일에 감회 일고 이별이 슬퍼 애간장만 끊어지네 此去磨天大嶺外侍中元帥有臺隍人烟從古通南國春色何曾到北荒細柳開營誰却敵落梅吹笛未聞香等閒來往吾堪笑感舊傷離秪斷腸 시중대와 원수대 시중대(侍中臺)는 함경북도 북청(北靑)에 있는 누대이고, 원수대(元帥臺)는 함경북도 학포현(鶴浦縣)에 있는 누대이다. 세류에……누구인가 세류영(細柳營)의 고사를 인용한 것이다. 한 문제(漢文帝) 때 흉노가 침범하자 이를 물리치기 위해 주아부(周亞夫)가 세류(細柳)에 주둔했는데, 문제가 시찰을 왔을 때 군령(軍令)이 없다는 이유로 황제의 출입을 제지할 정도로 군율(軍律)이 엄격했다. 이후 군율이 엄격한 군영이라는 뜻에서, 군영을 세류영 또는 유영(柳營)이라 하였다. 《史記 絳侯周勃世家 周亞夫》 낙매곡……않네 매화가 떨어져 향기가 나지 않는다는 뜻이다. 낙매곡은 한나라 때 적곡(笛曲)에 〈매화락(梅花落)〉으로, 당나라 이백(李白)의 시에 "황학루 위에서 옥젓대를 부니, 강성 오월에 매화가 떨어지는구나.[黃鶴樓上吹玉笛, 江城五月落梅花.]"라고 하였다. 《李太白文集 卷20 與史郞中飮聽黃鶴樓上吹笛》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강계 부사의 시에 차운하다 次江界韻 높은 누대에 고금의 시름 다하지 않으니중화와 오랑캐 나누는 한 줄기 강 흐르네청해정은 만리 밖에서 불어 온 바람을 맞고백두산엔 천년토록 녹지 않는 눈 쌓여 있네장군은 본래 튼튼한 장성을 믿는데지사는 오히려 나라를 근심하네멀리 바라보니 도성 그 어디에 있는가구중궁궐에서 어전 젓가락 빌려 아뢸 길 없네187) 高樓不盡古今愁漢虜橫分一水流靑海亭臨風萬里白頭山戴雪千秋將軍自倚長城壯志士猶爲大國憂遙望日邊何處是九重無路借前籌 구중궁궐에……없네 임금 앞에서 계책을 아뢸 길이 없다는 뜻이다. 한 고조(漢高祖)가 식사하는 도중에 장량(張良)이 밖에서 들어와 배알을 하자 유방이 역생(酈生)의 말을 들려 주며 의견을 묻자, 장량이 "신이 앞에 있는 젓가락을 가지고 대왕을 위해 계책을 세워 보겠습니다.[臣請借前箸, 爲大王籌之.]"라고 하였다. 《史記 留侯世家》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다시 양포268)의 시에 차운하다 再次楊浦韻 강 위의 푸른 산, 산 위의 누대누대 앞에 달이 나와 강물에 비추누나사람은 오호의 일엽편주 타고 떠나는 객과 같고돛배는 강동 만 리 가을을 찾아가는 듯하네몸은 명성의 굴레에 얽어 묶여 있는 천리마와 같은데꿈에서 진세의 그물 벗어나 모래밭 갈매기 좇누나만약 향기로운 봄 술을 가져올 수 있다면흉중 만고의 근심을 깨끗이 씻어버릴 수 있을 텐데 江上靑山山上樓樓前月出見江流人如五湖扁舟客帆似江東萬里秋身絆名韁同縶驥夢超塵網逐沙鷗若爲換得芳春酒滌盡胸中萬古愁 양포 최전(崔澱, 1567~1588)의 호이다. 어려서부터 이이의 문하에 들어가 수학하였고 재주가 뛰어나 신동이라 불렸으며, 학문의 진도가 남달리 빨라 스승으로부터 크게 총애를 받았다. 1585년(선조18) 18세에 진사시에 입격하여 시문과 박학으로 사람들의 기대를 크게 모았으나 벼슬길에 오르지 못하고 21세에 요절하였다.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외재15)가 조정으로 돌아와 북방의 일에 대해 아뢴 소장 畏齋還朝陳北事疏 신이 삼가 살펴보니, 북방 지역은 백성들에게 끼치는 폐해에 대해 중신(重臣)이 이제 막 탐문을 마쳤고 또한 지금 관찰사가 두루 묻고 살펴서 여러 고을의 큰 폐단을 빠트린 것이 없는데 그 대강은 이미 장계(狀啓)로 알렸으니, 신이 지금 세세한 일까지 낱낱이 거론하여 다시 전하의 귀를 더럽히지 못하겠습니다. 다만 오늘날 국가의 현재의 근심거리는 참으로 북쪽 변방에 있으니 사람들이 가장 걱정하는 것이며 군정(軍政)은 그 다음입니다.지금 도신(道臣)의 장계를 보니, 그 글에서 임진년의 의사들을 추포(追褒)하여 백성들의 마음을 단단하게 결속하라고 요청하였습니다. 이는 참으로 신이 아뢰고 싶은 말로, 또한 일찍이 도신과 함께 토론하여 확정한 것입니다. 백성들의 마음에 대해 걱정할 만한 상황은 이미 장계에서 자세히 말씀드렸으니 신이 다시 아뢸 필요가 없으나, 다만 정문부(鄭文孚)에 관한 일은 신이 그 전말을 대단히 상세하게 알고 있습니다. 대개 신의 부친 신 이식(李植)은 일찍이 만력 병진년(1616년)에 북평사(北評事)가 되어 함경도 남북의 사실을 널리 채집하여 〈북관지(北關志)〉를 찬술하였지만 잃어버렸는데, 다만 손수 초를 잡은 잡기(雜記) 두어 장만 남겨지게 되었으니, 바로 정문부가 창의하여 왜적을 토벌한 일을 기록한 것이었습니다.'당시에 북도의 성읍은 모두 반란의 역적들이 차지하여 원융(元戎) 이하 장수와 관리들은 적에게 함락되어 거의 죽음을 당하였는데, 유독 정문부만이 죽음을 면하고서 유생들과 모의하여 의병을 일으켜 우선 경성(鏡城)을 회복하고 반란의 역적들을 죽이고 왜구들을 물리쳤다. 또한 장수와 병사를 선발하여 보내서 여러 고을의 반란의 괴수를 추격하여 토벌하고 아울러 13명의 목을 참수하여 군중에 조리를 돌렸다. 마침내 명천(明川), 길주(吉州) 지역까지 군사를 진격하여 연달아 적과 만나 싸웠으며 장덕산(長德山)에서 큰 전과를 올렸고 쌍개포(雙介浦)에서 다시 승전하였다. 길주성(吉州城)과 영동책(嶺東柵)을 수차례 포위하였으며 고개를 넘어 단천군(端川郡)을 구하였고 가등청정(加藤淸正)과 백탑교(白塔郊)에서 전투를 벌여 앞뒤로 천여 명의 목을 베었다. 이 당시 관찰사인 윤탁연(尹卓然)은 정문부의 업적이 자신보다 앞서는 것을 시기하여 그 실상과 반대로 행재소에 알렸으며, 항상 군법으로 정문부를 죽이려고 하였고 정문부의 장수와 보좌관들은 이따금 추포(追捕)되어 매로 고문을 당하여 죽을 위기에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군사들의 사기는 더욱 높아갔으니, 공을 인정받지 못하고 고통만 당하면서도 정문부를 배반하지 않았다. 정문부가 또다시 북쪽 육진(六鎭)으로 가서 변방의 오랑캐를 불러 복종시키고 반당(叛黨)을 찾아 주벌하였으니, 관북이 마침내 평정된 것은 모두 그의 공이었다. 그러나 정문부는 역적 국경인(鞠景仁)을 주벌한 공으로 회령(會寧) 사람들과 함께 3품의 자급에 겨우 올랐고, 그를 따라 난리에 참여했던 군사들은 한 명도 고신(告身)을 얻지 못하였으니, 지금까지도 사람들이 억울하게 생각하며 왕사(王事)가 완성되지 못하였다고 여긴다.'신의 부친이 기록한 바는 대략 이와 같습니다. 신이 북쪽으로 들어간 이후에 도내의 여론을 들으니, 모두 정문부의 공열을 칭송하면서 침이 마르도록 그치지 않습니다. 또한 북방 사람들이 정문부를 위해 사우를 건립하여 당시에 창의하여 죽음으로 절개를 바친 유생을 배향하려고 하지만, 정문부가 역옥에서 장살 당해 죽은 소식을 듣고서 감히 어찌하지 못하고 있다고 합니다.신이 편지로 조정 안의 친구들에게 탐문하여 정문부가 죽을 당시의 실상에 대해 알아내었는데, 그의 죽음은 참으로 지극히 원통합니다. 정문부의 충절은 위란의 시기에 밝게 드러났으며, 혼조(昏朝, 광해군)에 있을 때 비록 벼슬을 하였지만 전부 외직이었으며 조금도 더러운 일은 하지 않았습니다. 반정 후 원수(元帥)에 천거되어 조정에서 크게 쓰려 할 때에 마침 박래장(朴來章)의 옥사16)에 무고되어 끌려들어갔는데, 대질 심문에서 해명하여 무죄가 밝혀졌습니다. 석방하려 할 때에 마침 시안(詩案)을 가지고 깊이 논의하는 대간이 있었으므로 끝내 억울하게 형틀에서 죽고 말았습니다. 이른바 시안이란 문부가 창원 부사(昌原府使)로 있을 때에 지은 영사(詠史)라는 시를 말하는데, 그 가운데 한 수는 초회왕(楚懷王)의 일을 읊었으니, 그 시는 다음과 같습니다.초 비록 세 집만 남더라도 진을 멸망시키리라 楚雖三戶亦秦亡예언한 남공의 말17) 맞는 것 아니었네. 未必南公說得當무관에 들어가자18) 백성은 절망하였는데 一入武關民望絶여린 손자 어이 또 회왕이 됐다더냐.19) 孱孫何事又懷王이는 본래 혼조 때에 지은 것으로 마침 이때에 발견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시를 반복해 읽어보아도 의심스러운 점을 찾을 수 없습니다. 그가 원통하게 죽은 것을 나라 사람들이 다 슬퍼하였습니다.정축년(1637)의 난리20) 이후에 이름이 단서(丹書)21)에 올라간 사람들은 그 죄를 전부 씻어주었는데, 정문부도 또한 그 안에 들어 있지만 별다른 은전은 없었다고 합니다. 북방 사람들이 이런 실상을 알고서 여론이 더욱 격렬하여 감사(監司)에게 글을 올렸으며, 감사는 이에 대신(大臣)에게 의논한 뒤에 허락을 받아 도내 의사의 사적을 탐문하였습니다. 이에 이렇게 계문(啓聞)하오니, 청컨대 휼전(恤典)을 더해 주시면 한 도의 백성의 마음을 위로할 수 있을 것입니다.다만 생각건대 정문부의 큰 공은 이미 당시에 가려졌었고 또한 원통함을 안고서 죽었는데 아직 신원하는 은전이 없으니 또한 어떻게 북방 사람들의 추모하는 정성을 깊게 위로하며 후대에 권면할 수 있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특별히 이 의논을 묘당에 물어서 먼저 정문부의 억울함을 풀어주시고 이어서 높은 직급을 포증하라고 명하시고 여러 의사들에게 뒤미처 베푸는 휼전을 동시에 거행하게 한다면, 장차 북방에 교화가 수립되는 것을 볼 것이며 어리석은 백성들의 마음을 감복시키고 지사(志士)의 기운을 감격시킬 것이니, 백성의 마음을 단단히 묶는 계책에도 적지 않은 보탬이 될 것입니다. 臣竊觀北路纔經重臣採訪民弊, 又今按道之臣咨諏, 殆無所遺列邑大段弊瘼, 槩已啓聞, 臣今不敢毛擧細故, 更瀆於宸聽也。惟是國家今日之憂, 正在北邊, 而人心最可憂, 軍政次之。今見道臣狀啓請追褒壬辰義士, 以爲固結人心之本, 此正臣所欲陳者, 而亦嘗與道臣而商確者也。人心可憂之狀, 已悉於其狀啓中, 不須臣更達, 而第惟鄭文孚事, 臣最詳顚末。蓋臣父臣植, 曾於萬曆丙辰歲, 爲北評事, 博採南北道事實, 述〈北關志〉而見佚, 適手草雜記數紙見遺, 卽記文孚倡義討賊事者也。'當此時, 北道城邑, 悉爲叛賊所據, 元戎以下將吏, 陷賊殆盡, 獨文孚脫免, 乃與儒生謀起義兵, 先復鏡城, 誅叛賊却倭寇。又發遣將士, 追討列邑叛魁, 倂斬十三人以徇。遂進兵明吉界, 連與賊遇, 大輮于長德山, 再捷于雙介浦, 屢圍吉州城及嶺東柵, 踰嶺救端川郡, 與淸正戰白塔郊, 前後斬千餘級。是時觀察使尹卓然嫉文孚聲績掩己, 反其實以聞行在, 每欲以軍法殺文孚, 文孚將佐, 往往被追, 榜掠危死, 然軍情愈奮, 不以無功受毒, 貳於文孚也。文孚又北行六鎭, 招服藩胡, 搜誅叛黨, 關北卒就平定, 大抵皆其力也。然文孚僅以誅鞠賊功, 與會寧人同陞三品秩, 從難之士, 不得一告身, 至于今, 人情憤惋, 以爲王事不可成。' 臣父所記, 大略如此。臣入北後, 聽於道內輿論, 咸誦文孚功烈, 嘖嘖不已。又北人欲爲文孚立祠宇, 以當時倡義死節之儒生配之, 而聞文孚死逆獄杖下, 以此不敢云。臣以書求訪于朝中親舊, 得文孚死時實狀而來, 其死誠爲至冤痛矣。文孚忠節, 素著於危亂之際, 其在昏朝, 雖或從仕, 皆是外任, 少無染汚之事。反正後被元帥薦, 朝廷將大用, 而朴來章之獄, 適被誣引, 置對辨明, 將見釋, 而適又臺諫, 有以詩案深論者, 竟不免梧棘之冤。所謂詩案, 卽文孚曾爲昌原府使時, 有詠史十絶, 其一卽楚懷王事, 而其詩曰: "楚雖三戶亦秦亡, 未必南公說得當。一入武關民望絶, 孱孫何事又懷王云云。" 此本昏朝時所作, 而適發於是時耳。又況反覆其詩意, 未見其有可疑者。其死之冤, 國人莫不傷之。丁丑亂後, 凡名在丹書之類, 悉加蕩滌, 文孚亦必在其中, 而別無顯典云矣。北人得此實狀, 羣議益激, 呈文于監司, 監司仍通議于大臣而後許之, 仍採訪道內義士事蹟, 有此啓聞, 請加恤典, 庶可慰一道人心, 而獨念文孚大功, 旣被掩蔽於當時, 又抱冤而死, 未有伸雪之典, 則亦何以大慰北人追慕之誠, 而激勸於方來也。伏願殿下特將此議, 下詢于廟堂, 先伸文孚之冤, 仍命褒贈崇秩, 與諸義士追恤之典, 一時擧行, 則將見風聲樹立於北方, 愚民之心, 有所鎭服, 志士之氣, 有所感勵, 其爲固結根本之圖, 非少補也。 외재 이단하(李端夏, 1625~1689)의 호이다. 그의 본관은 덕수(德水)이며 자는 계주(季周), 호는 송간(松磵)으로, 택당 이식(李植)의 아들이다. 1662년(현종 3)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북평사(北評事)가 되었으며 1669년에 훈련별대(訓鍊別隊)의 창설을 제안하였다. 좌의정에 올랐으며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박래장의 옥사 인조 2년 10월 박홍구의 조카인 박윤장이 이대온, 이대윤, 이필헌 등과 발의하였고, 박홍구의 아들 박지장, 박래장과 조카 박진장, 박성장, 박일장 등이 모두 참여한 반란이다. 기찰하는 무리를 먼저 제거하고서 반란이 성사 뒤에는 광해군을 상왕으로 받들어 인성군(仁城君)에게 전위하게 하고 광해군으로 하여금 중국의 승인을 받도록 하는 계획을 세웠다. 《조선왕조실록 인조2년 11월 8일》 예언한 남공의 말 남공(南公)은 초나라의 도사(道士)로 음양에 밝은 자였다고 한다. 삼호(三戶)에 대해서는 세 가구[戶]라는 설, 지명(地名)이라는 설, 초나라의 삼대성(三大姓)이라는 세 가지의 설이 있는데, 번역은 세 가구라는 설에 따랐다. 남공이 예언한 말은 《사기(史記)》 권7에 "초수삼호 망진필초야[楚雖三戶 亡秦必楚也]"라 하였다. 무관에 들어가자 초 회왕은 위왕(威王)의 아들로 이름은 웅괴(熊槐)이다. 진 소왕(秦昭王)이 혼인을 약속하고 만나기를 희망하자 굴원(屈原)의 간언을 듣지 않고 무관에 들어갔는데, 진나라 군대에 의해 강제로 진나라로 끌려갔다 끝내 진에서 돌아오지 못하고 죽었다. 《사기(史記)》 권40. 여린 손자 어이 또 회왕이 됐다더냐 전국 시대 초 회왕의 손자인 심(心)을 말한다. 진말(秦末)에 범증(范增)이 초나라의 후손을 세워야 민심을 얻을 수 있다고 항양(項梁)을 설득하자 초 회왕의 손자인 심을 찾아 회왕으로 세웠다. 후에 항적(項籍)에게 피살되었다. 《사기(史記)》 권7. 정축년의 난리 인조가 남한산성에서 청나라에 항복한 것을 이른다. 단서 옛날 제왕이 공신에게 대대로 면죄(免罪) 등의 특권을 부여할 때 내리던 증서이다. 붉은 글씨로 썼기 때문에 이렇게 칭한 것이다.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백수로 함께 밤에 숙직하다 문신 정시의 장원 작품 白首同夜直 文臣庭試壯元 회상해보니, 예전 남쪽으로 갔을 때 나와 공은계산을 지척에 두고 동과 서에 있었지.맑은 술동이 미주(美酒)로 흉금을 토로하고오래된 웅장한 검에 간담을 함께 의지했네.떠돌아다니느라 선실330)이 멀어져 오랫동안 탄식하였는데이름이 올라가 지금 다시 궁궐로 돌아왔어라.남쪽의 물고기 북쪽의 새처럼 중년에 이별하였다가상서성의 화로를 오늘밤 함께 하누나.담소하는 사이에 근심은 천리 밖으로 사라지고십년 전의 일은 꿈속 같구나.근심하니 이미 천 가닥 머리 희게 되었지만군주 사모하여 아직도 일편단심의 충정이로다.기이한 만남은 참으로 가로막은 안개를 열어젖힌 듯하고살아 돌아옴은 바로 임금 총명에 힘입음이라.흉금을 여니 완연히 황학루의 달을 대한 것 같고흥을 타니 더욱 적벽의 바람이 생각나누나.어촉의 빛을 나눠 주어 옥전에서 내려오고선호의 술을 하사하여 금궁에서 나오네.임금 은혜 갚으려 해도 방법이 없으니앉아서 남은 시간 헤아리며 부질없이 몸을 어루만지는구나. 憶昨南遷我與公溪山咫尺占西東襟期共付淸樽美肝膽同憑古釰雄浪跡久歎宣室遠策名今復紫宸通南鱗北羽中年別畵省香爐此夜同千里外愁談笑裏十年前事夢魂中憂時已白千莖髮戀主猶丹一片衷奇遇正如披霧隔生還自是荷天聰開襟宛對黃樓月乘興還思赤壁風御燭分光來玉殿仙壺賜醞出金宮皇恩欲報知無路坐數殘更浪撫躬 선실 한(漢)나라 미앙궁(未央宮)의 정전(正殿)이다. 가의가 좌천되어 장사왕의 태부로 있다가 1년 남짓 만에 소명(召命)을 받고 조정으로 돌아오니, 문제(文帝)가 선실에 있다가 그에게 귀신의 본원(本源)에 대해 물었다. 이에 가의가 귀신의 유래와 변화 등을 자세히 이야기하다가 한밤에 이르자 문제가 그 이야기에 빠져서 자기도 모르게 자리를 앞으로 당겨 가의 가까이로 다가왔다 한다. 《史記 卷84 賈生列傳》 여기서는 궁궐을 뜻한다.

상세정보
84193건입니다.
/4210
상단이동 버튼 하단이동 버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