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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승훈랑 행 의금부도사 소포 나공 사실기 有明朝鮮國承訓郞行義禁府都事嘯浦羅公事實記 공의 휘(諱)는 덕명(德明)이고, 자는 극지(克之)이며, 호는 구암(龜巖) 또는 소포(嘯浦)이고, 성은 나 씨(羅氏)이며, 본관은 나주(羅州)이다. 고려 시대 나부(羅富)는 감문위(監門衛)1) 상장군(上將軍)으로 곧 공의 시조가 된다. 이후 공조전서(工曹典書) 나진(羅璡)에 이르러 매우 귀하게 되었다. 나진은 전농시(典農寺)2) 정(正) 나공언(羅公彦)을 낳았는데 홍무(洪武)3) 연간에 왜적을 물리친 공훈이 있어 대대로 호남의 명문집안이 되었다.증조 나일손(羅逸孫)은 전연사 직장(典涓司直長)을 지내고 승정원 좌승지(承政院左承旨)에 추증되었다. 조부 나질(羅晊)은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을 지내고 호조 참판(戶曹參判)에 추증되었다. 부친 나사침(羅士沈)은 이소재(履素齋) 이중호(李仲虎)를 스승으로 섬겼으며 지극한 행실로 세상에 알려져 중종(中宗) 때 정려를 세워 표창하고 조세와 부역을 면제를 받았다. 선조(宣祖) 초에 관찰사(觀察使)가 그의 어짊을 천거하여 여러 번 관직을 지냈고 벼슬이 이산 현감(尼山縣監)4)에 이르렀다. 그의 거사비(去思碑)5)에 다음과 같은 시가 있다.한 송이 시든 꽃 외로운 한 마리 학 倭花一朶鶴一隻쓸쓸한 행리에 고인의 풍모 있구나 行李蕭然古人風의정부 좌찬성(議政府左贊成)에 추증되었다. 첫째 부인은 파평 윤씨(坡平尹氏)로 부사(府使) 윤언적(尹彦啇)의 따님이다. 둘째 부인은 광주 정씨(光州鄭氏)로 사도 첨사(蛇渡僉使) 정호(鄭虎)의 따님이다. 각기 세 아들을 낳았기에 그들을 육룡(六龍)이라 불렀는데 공은 그 중 장자로 자질과 품성이 빼어나고 훌륭하여 식견을 지닌 자들은 원대한 그릇이 될 것으로 기대하였다.나이 8~9세에 길에서 고을 아전을 만난 적이 있었는데 아전이 예로써 대하지 않자 공은 이치를 들어 꾸짖으니 아전이 곧바로 숙연히 존경하는 마음으로 탄복했으니 소문을 들은 사람들은 모두 기특하게 여겼다.만력(萬曆)6) 기묘년(1579) 진사에 급제하니 때는 선조 12년이었다. 전조(銓曹)에서 공의 명성을 듣고 의금부 도사(義禁府都事)에 임명했는데, 임기가 끝나 고향으로 돌아올 때 화려한 명성이 있어 사람들로부터 칭송받았다. 두 아우 나덕준(羅德峻)과 나덕윤(羅德潤)은 정곤재(鄭困齋)7)의 문인으로 모두 훌륭하다는 명성이 있었지만 마침내 그들을 좋게 여기지 않은 자들의 시기를 받았다.기축년(1589) 겨울에 정여립(鄭汝立)8)이 난을 일으키려 한다고 아뢰는 자가 있어 위관(委官) 정철(鄭澈)9)이 기미를 틈타 있지도 않은 죄를 꾸몄다.10) 정암수(丁巖壽), 양천경(梁千頃), 홍천경(洪千璟) 등이 정철의 뜻을 받들어 무고하는 상소를 올려 세상의 유명 인사 30여명을 모함하였다. 또 공의 부자 이름을 거론하면서 "아무개의 아들 아무개 등이 정여립과 더불어 매우 친밀하게 교유를 하다가 화가 자기에게 미칠 것을 알고는 터무니없는 말을 꾸며 빠져나가려고 하니 모두 죄를 물어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공의 아우 나덕현(羅德顯)과 나덕헌(羅德憲) 등이 울분을 참지 못하고 소장을 심사하는 자리에 나가 큰 소리로 그들을 배척하였다.정암수의 상소가 임금에게 들어가기에 이르자, 임금께서 진노하며 "역적의 변란을 틈타 몰래 사악하고 간교한 상소를 올려 훌륭한 재상과 이름 있는 경들까지도 배척하지 않음이 없으니 반드시 나라가 텅 비게 한 이후에야 그만둘 것이다. 이는 반드시 간교한 사람의 사주를 따른 것이다."라고 하고 의금부에 명하여 정암수 등 10명을 잡아들이도록 하셨다. 이에 정철이 두려워 대관(臺官)과 태학생(太學生)들로 하여금 혹은 장계를 올리도록 하고 혹은 글을 올리도록 하여 임금의 명이 중단되었다.얼마 후 무안 유생 배명(裵蓂)이 곤재(困齋)와 공의 부자의 원통한 상황에 대해 매우 상세하게 상소하였으나 정철은 끝내 정암수의 상소를 저지한 것으로 죄목을 엮어 공의 여섯 부자가 일시에 심문을 받게 되었다.찬성공(贊成公)은 특별히 효로 용서받았고, 공은 경성(鏡城)11)으로 귀양 가게 되었으며, 여러 아우들은 각지에 나뉘어 유배 갔다. 공이 유배지에 이르러 시를 지어 아우에게 척강(陟岡)의 회포12)를 부쳤다.변방의 구름 높이 떠가고 기러기 무정한데 關雲迢遞鴈無情어느 곳 외로운 성에서 부모형제 그리나 何處孤城憶父兄촛불 깜박이는 깊은 밤 서리 맞은 잎 소리에 殘燭夜深霜葉響꿈속의 연못 풀은 자라나지 못하네 夢中池草不能生임진년(1592)에 섬나라 오랑캐들이 들끓어 적장 가등청정(加籐淸正)이 말을 달려 쳐들어오니, 북쪽 변방의 회령(會寧)13)사람 국경인(鞠景仁)14)이 마침내 난을 일으켜 왕자 임해군(臨海君) 이진(李瑱), 순화군(順和君) 이보(李?) 및 재신(宰臣) 김귀영(金貴榮),15) 황정욱(黃廷彧)16) 등을 잡아두고 왜적에게 대응하였다. 이에 진보(鎭堡)17)의 배반한 군졸들이 지키던 장수들을 다투어 결박하고 적들에게 항복했으니 종성(鍾城)18)사람 국세필(鞠世弼)이 바로 그들의 우두머리였다. 북평사(北評事) 정문부(鄭文孚)19), 전 감사(監司) 이성임(李聖任), 경원 부사(慶源府使) 오응태(吳應台), 경흥 부사(慶興府使) 나정언(羅廷彦), 수성 찰방(輸城察訪) 최동망(崔東望) 등이 의병을 일으킬 계획을 세우자, 공은 함께 귀양살이를 하고 있던 한백겸(韓百謙)20)과 함께 그들의 계획에 힘을 모으기로 찬성하였다. 종성 부사(鍾城府使) 정견룡(鄭見龍), 고령 첨사(高嶺僉使) 유경천(柳擎天) 등도 역시 와서 모여 적의 우두머리를 잡아 목을 베어 군성(軍聲)이 크게 떨쳐졌다. 이듬해 봄에 별장(別將) 이붕수(李鵬壽)21)와 만호(萬戶) 이희당(李希唐)이 왜적과 전투를 하던 도중 같은 날 죽었다. 공과 정문부가 시를 지어 이 일을 슬퍼했는데, 이 일은 택당(澤堂) 이식(李植)22)이 편찬한 《북관지(北關志)》23)에 실려 있다. 그해 공이 비로소 죄를 용서받고 풀려나 돌아왔다.병신년(1596)에 찬성공(贊成公)의 장례를 무안(務安) 주룡(住龍) 나루에서 치르고 묘 아래에서 시묘살이를 하였다. 정유년(1597)에 왜적이 다시 쳐들어오자 공이 여러 동생들과 함께 주룡으로부터 은적산(銀積山)24)으로 난리를 피하려할 때 고향사람 효자 이유경(李有慶)이 공과 함께 나루를 건너고자 하였다. 공이 이공에게 말하기를 "그대가 먼저 건너십시오."라고 하자, 이공이 사양하면서 "주객의 차이가 있으니 내가 비록 뒤에 떨어져 낭패를 당한다 한들 형세가 그러할 뿐입니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공이 "내가 만약 먼저 나루를 건너간다면 우리 집의 종들이 반드시 그대에게 정성을 다하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하면서 끝내 그를 먼저 건너게 하였다. 사람들은 위급한 상황에서 의리를 지키는 데 피차 양보함이 없음을 칭찬하였다. 난리가 평정되자, 주룡 소포 위에 정자를 짓고 편안히 즐기면서 일생을 마쳤다. 매번 선산을 성묘할 때면 회포를 노래하는 시를 지었는데 다음과 같다.아침마다 선산에 올라 朝朝上丘壟떠나려다 또 주저하네 欲去還躕踟모시기에 정성을 다하여 度幾侍誾誾늘 평생의 거동 보이리라 一見平生儀공은 가정(嘉靖)25) 신해년(1551)에 태어나 60세에 돌아가셨으니 만력(萬曆) 경술년(1610) 5월 28일이었다. 찬성공의 묘 아래에 장사 지냈다. 공은 키가 매우 크고 위용이 경외할만하여 그를 본 사람들은 산하 간의 기운을 얻었다고 생각하였다. 본주의 목사는 공과 나이가 비슷했으나 반드시 그를 '노형'이라고 불렀고, 대여섯 살 적은데도 반드시 '어르신'이라고 불렀으니 그 공경하고 예우를 받음이 이와 같았다. 고을 사람 문화(文化) 임환(林懽)은 재주와 기개로써 당세에 이름난 사람이었는데 공은 그와 더불어 잘 지냈다. 한번은 산사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는데 임공이 먼저 도착하여 마치 주변에 사람이 없는 듯 거침없이 담론하다가, 공이 뒤이어 이르자 임공은 자기도 모르게 기운을 잃고 공이 말하기만 하면 '예, 예' 하고 대답만 하였다. 당시 절의 승려 가운데 이를 목격한 자가 이 미담을 전하였다. 성품 또한 호방하여 작은 예절에 얽매이지 않았고 세상을 대수롭지 않게 여겨 사람을 인정하는 일이 거의 없었다. 하루는 화장실을 가려는데, 지주가 갑자기 이르렀다. 공이 가까스로 맞아 당에 오르고는 곧장 섬돌 위에다 볼일을 보고 태연하게 대처하며 말하기를, "이렇게 하는 것이 당상에 설사를 하는 것보다 낫습니다."라고 하자, 사람들이 그의 넓은 도량에 감복하였다.공은 이미 남쪽에서도 명성이 알려져 마음으로 존경하는 사람들 모두 일면식이라도 있기를 원하여 여러 벼슬아치들이 연이어 찾아왔는데 맞이할 때의 예모는 자못 단출하였다. 그러다 망우당(忘憂堂) 곽재우(郭再祐)26)가 영암(靈巖)에서 귀양살이를 하고 있을 때 주룡으로 공을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문에서 응대하는 자로 하여금 곽거사가 당도했음을 들어가 전하게 하자, 공은 허둥지둥 옷과 갓을 제대로 갖추지도 못한 채 당에서 내려와 그를 맞이하였다. 마을 사람들이 모두 놀라 말하기를 "공이 평소 남에게 굽히는 것을 본 적이 없는데, 어인 일로 거사에게만 공께서 지극히 공경하는 것이 이와 같습니까?"라고 하였다. 공은 마침내 곽공과 토론하며 회포를 풀었다. 그 뒤 곽공이 조정으로 돌아가 임금이 원수(元帥)의 재주를 가진 사람에 대해 묻자 공을 천거했다고 한다.공은 비록 초야에 있었지만 뜻과 절개로 시대를 걱정하여 하늘의 뜻을 감동시키고 사람들의 마음을 결집하는 방법을 상달하여 기축년(1589)에 원통하게 죽은 사람들을 신원할 것과 잘못된 정치를 혁파하고 고역을 균등하게 할 수 있는 계책을 청하였고 조목조목 나열한 바를 두어 각 영에 설치한 둔전을 폐지할 것을 청하였다. 이 병신년 상소와 기해년의 저촉은 병서와 그림을 통해 모두 징험할 수 있다.공이 한번은 여름날 주룡에서 낮잠을 자고 있었는데, 산모퉁이에서 큰 뱀이 기어와 배 위에 똬리를 틀고 있었다. 공이 잠에서 깨어 그것이 뱀인 줄 알고는 끝내 몸을 움직이지 않은 채 스스로 떠나가기를 기다렸으니 그 기량과 신중함이 이와 같았다. 또 장을 청소하는 방법에 능통하여 저녁마다 물은 한 그릇 마시고 다음 날 아침에 다시 토해내 반드시 그 그릇에 가득 찼다. 홍시 같은 과일도 삼켰다가는 한참 후에 씨와 벌레를 토해내니 사람들 중 기이하게 여기지 않은 이가 없었다. 시를 쓸 때는 반드시 웅대하면서도 맑고 씩씩하여 국한 되지 않는 훤칠한 기개가 있으나 이는 공에게 그저 여사(餘事)일 뿐이었다. 읊조린 시 몇 수가 있기는 하지만 글자에 잘못된 것이 많아 그 진수를 전할 수가 없으니 탄식할 만하다.공이 돌아가시자 아우 나덕윤(羅德潤)이 글을 지어 곡했으니 대략 다음과 같다.가슴에는 운몽을 삼키고27) 胸呑雲夢말은 보불을 토하도다28) 詞吐黼黻뜻은 우주를 넘고 志凌宇宙눈은 천지를 초월하네 眼空霄壤용처럼 강가에 누워 龍臥江潭자신을 관중과 제갈공명에 견주었네 自擬管葛공의 평소 뜻을 잘 묘사하였다고 할 것이다. 슬프다! 하늘이 공을 세상에 낼 때는 훌륭한 일을 하도록 한 것인데 끝내 한 번도 시험해 보지 못하였으니 운명이다. 공의 첫째 부인은 광산 김씨(光山金氏)로 문과에 급제하여 담양(潭陽) 부사(府使)를 지낸 김경헌(金景憲)의 따님이다. 둘째 부인은 문화 유씨(文化柳氏)로 유절(劉節)의 따님이다. 모두 나주(羅州) 장흥동(長興洞)에 장사를 지냈다. 아들 넷을 두었는데, 나이소(羅以素)와 나인소(羅因素)는 김 씨가 낳았고, 나성소(羅成素)와 나취소(羅就素)는 유 씨가 낳았다. 나성소는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이 되었다. 나이소는 네 아들을 두었는데 나유(羅褕), 나심(羅襑), 나규(羅袿), 나현(羅袨)이다. 나인소는 두 아들을 두었는데 나결(羅袺), 나격(羅䙐)이다. 딸 하나를 두었는데 유시화(柳時華)에게 시집갔다. 또 서자를 두었는데 나겹(羅裌)이다. 나성소는 딸 하나를 두었는데 참봉(參奉) 이소(李韶)에게 시집갔다. 또 서자로 아들 셋을 두었는데 나표(羅表), 나방(羅衤方 ), 나원(羅袁)이다. 나취소는 후손이 없다. 공의 자손이 대를 이어 점차 쇠락하다가 나결의 손주 나만영(羅晩榮)이 문과에 장원 급제하여 벼슬이 지평(持平)에 올라 집안의 명성을 다시 떨치니 이를 통해 남은 경사가 사라지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아! 공이 돌아가신 지 어느덧 106년이 되었다. 그 평생 행적이 반드시 여기에 그치지 않을 것이지만 세월이 오래되어 증험할 것이 없으므로 간략하게나마 보고 들은 것을 기술한다. 만에 하나라도 훗날 공에 대해서 더 논할 것이 있는 사람이 있다면 이 글을 통하여 공의 간략한 내용을 알 수 있을 것이다.숭정(崇禎) 병자년(1636) 이후 79년 을미년(1715) 7월에 종증손(從曾孫) 생원(生員) 나두동(羅斗冬)이 삼가 쓴다. 公諱德明, 字克之, 號龜菴, 又號嘯浦, 姓羅氏, 羅州人. 麗朝有諱富爲監門衛上將軍, 是公鼻祖也. 後至工曺典書諱璡, 最貴顯, 生典農寺正諱公彦, 洪武間, 有克倭功, 仍世爲湖之右族. 曾祖諱逸孫, 典涓司直長, 贈承政院左承旨. 祖諱晊, 司憲府監察, 贈戶曹參判. 考諱士忱, 師事履素齋李仲虎, 以至行聞, 中宗旌其閭復其戶. 宣祖初, 道臣薦其賢, 累除官至尼山縣監. 其去思碑有倭花一朶鶴一隻, 行李蕭然古人風之詩, 贈議政府左贊成. 前配坡平尹氏府使諱彦啇之女, 後配光州鄭氏蛇渡僉使諱虎之女, 各擧三男人, 以六龍目之, 公卽其冢嗣, 資稟魁偉傑特, 識者, 期以遠大器. 嘗在約年八九時, 路逢州吏, 吏不爲禮, 公擧理叱責, 吏乃肅然敬服, 聞者咸奇之. 萬曆己卯擧進士, 實宣祖十二年也. 銓曺聞公名, 除義禁府都事, 罷遞歸鄕時, 公蔚有聲華, 爲人所偢倈. 二弟德峻 德潤, 以鄭困齋門人, 俱有令名, 遂被不悅者所忌嫉. 己丑冬, 有鄭汝立上變事, 委官鄭澈, 乘機羅織, 丁岩壽 梁千頃 洪千璟等, 承澈旨, 投誣疏陷諸名流三十餘人, 而又擧公父子之名曰 : "某之子某等, 與汝立交至密, 知禍及己, 譸張救解, 皆宜罪." 公之弟德顯 德憲等, 不勝憂憤, 詣其疏會, 大言斥之. 及岩壽疏入. 上震怒曰 : "爲乘逆賊之變, 陰陳邪譎之疏, 賢相名卿, 無不指斥, 必欲空國而後已, 此必聽奸人指嗾." 命禁府, 拿鞫岩壽等十人. 於是, 澈懼使臺官及太學生, 或陳啓, 或上章, 寢其命. 俄而務安儒生裵蓂, 疏伸卞困齋及公父子寃狀甚悉, 而澈竟以謀沮岩壽疏, 搆成罪目, 公之六父子, 一時就理. 贊成公特以孝見原, 公謫鏡城, 諸弟等幷分配. 公到配, 吟詩寄弟, 以寓陟岡之懷曰 : "關雲迢遞鴈無情, 何處孤城憶父兄. 殘燭夜深霜葉響, 夢中池草不能生." 壬辰, 島夷充斥, 賊將淸正長駈至, 北邊會寧人鞠景仁, 遂作亂, 執王子臨海君珒 順和君?及宰臣金貴榮 黃廷彧等, 以應倭. 於是, 鎭堡叛卒, 爭縛守將, 相繼附賊, 鐘城人鞠世必, 卽其渠魁也. 北評事鄭文孚與前監司李聖任 慶源府使吳應台 慶興府使羅廷彦 輸城察訪崔東望等, 謀起義兵. 公與同謫人韓百謙, 協贊其謀. 鍾城府使鄭見龍 高嶺僉使柳擎天等, 亦來會, 捕得首惡者, 斬之, 軍聲仍以大振. 明年春, 別將李鵬壽 萬戶李希唐等, 與賊戰, 同日死. 公與文孚作詩, 以哀之事, 載李澤堂植小撰北關志. 其年, 公始得宥還. 丙申, 丁贊成公憂, 奉行襄禮于務安住龍渡, 仍居墓下. 丁酉, 倭賊更熾, 公與諸弟, 自住龍將避于銀積山, 同鄕孝子李有慶, 偕公舡欲渡, 公謂李公曰 : "君可先渡." 李公辭曰 : "主客有異, 吾雖落後狼狽, 理勢固然耳." 公曰 : "吾若先渡, 吾家奴必不致誠於君." 竟使之先渡. 人稱顚沛必是之義, 彼與此無讓矣. 亂定, 作亭于住龍嘯浦上, 優游以終老. 每省拜先壟有詠懷詩曰 : "朝朝上丘壟, 欲去還躕踟. 度幾侍誾誾, 一見平生儀." 公生于嘉靖辛亥年, 六十卒, 卽萬曆庚戌五月二十八日也. 葬贊成公墓下. 公體甚長大, 威容可畏, 見之者, 以爲得山河間氣. 本州牧與公年相敵者, 必稱老兄, 少五六歲, 必稱丈, 其見敬禮如此. 鄕人林文化懽, 以才智氣槪, 知名當世, 公與之相善. 嘗約會山寺, 林公先到, 談論自若傍若無人者, 及公追, 至林公, 自不覺沮喪, 公出言輒唯唯, 其時寺僧之目擊者, 傅以爲美談. 性又豪放, 不拘小節, 傲視一世, 於人少許可. 一日, 將如厠, 地主猝至, 公僅得延之上堂, 仍卽遺矢于堦上, 處之晏然曰 : "此愈於在堂上滑泄." 人服其廣度. 公旣名重南, 服人皆願一識, 使星冠蓋歷候者絡繹, 而迎接之除, 禮貌破簡. 至於郭忘憂堂再祐之謫居靈岩也, 訪公住龍, 使應門者入傳郭居士來到, 公顚倒衣冠, 下堂迎之, 一村人皆驚曰 : "公平生未嘗屈於人, 何狀居士, 能令公致敬若是哉?" 公遂與討論, 襟懷甚相得. 其後郭公還朝, 上問元帥才, 至以公薦剡云. 雖在草野, 志切憂時, 以感天意結人心之道, 有所上達, 而請伸己丑寃死之類, 以革弊政均賦役之策, 有所條列, 而請罷各營屯田之設, 此於丙申疏及己亥抵兵書畵中, 俱可徵也. 公嘗於夏日, 晝眠于住龍, 山隅有大蛇來, 蟠于腹上, 公覺來知其爲蛇, 終不動身, 以待其自去, 其器量凝重類如是矣. 又能通洗腸之術, 每夕飮水一器, 翊朝還吐, 必滿其器. 至於紅柿等物呑下, 良久吐其核與虫屑, 人莫不異之. 爲詩語必雄放淸健, 有不局底氣岸, 然此特公之餘事耳. 其所吟詠者, 有若干首, 而字多訛誤, 不得傳其眞, 可勝歎哉. 公之歿也, 弟德潤爲文, 哭之其略曰 : "胸呑雲夢, 詞吐黼黻, 志凌宇宙, 眼空霄壤. 龍臥江潭, 自擬管葛." 可謂摹得公之平生也. 惜乎! 天之生公, 宜若有爲, 而竟未克一試, 命也. 公先聘光山金氏文科潭陽府使景憲之女, 繼娶文化柳氏節之女, 俱葬羅州長興洞. 有四男曰以素 因素, 金氏出也, 曰成素 就素, 柳氏出也. 成素武科宣傳官, 以素有四男, 褕 襑 袿 袨. 因素有二男, 袺 䙐, 一女, 柳時華. 又有庶出子裌. 成素有一女, 李韶參奉. 又有庶出子表 衤方 袁 三人. 就素無後. 公之子孫, 連世陵替, 而袺之孫晩榮, 擢文科壯元, 官至持平, 能使家聲復振, 斯可見餘慶之未艾也. 嗚呼! 公之歿, 今已百有六年矣. 其平生行蹟, 必不止此, 而久遠無徵, 略述見聞記, 其萬一後之尙論公者, 亦可因此而得公之梗槪矣. 崇禎丙子後七十九年, 乙未七月日, 從曾孫生員斗冬, 謹記. 감문위(監門衛) 고려 시대 육위의 하나로, 정3품의 상장군(上將軍)과 종3품의 대장군(大將軍)의 통솔 아래 1영의 군대가 있었다. 전농시(典農寺) 고려 말기에 국가의 대제에 쓸 곡식을 관장하던 관서이다. 홍무(洪武) 중국 명나라의 초대 왕 홍무제(洪武帝) 주원장(朱元璋) 당시의 연호로, 1368년부터 1398년까지 사용되었다. 이산 현감(尼山縣監) 이산(尼山)은 충청남도 논산 지역의 옛 이름이며, 현감(縣監)은 종6품으로서 현의 수장이다. 거사비(去思碑) 전임 감사나 수령이 베푼 선정을 추모하여 백성들이 세운 비를 말한다. 만력(萬歷) 중국 명(明)나라 신종 때의 연호(年號)로서 1573년부터 1619년까지 사용되었다. 정곤재(鄭困齋) 1529~1590. 자는 의백(義伯), 이름은 개청(介淸)이다. 본관은 고성(固城)이다. 나주 출신으로서, 아버지는 정세웅(鄭世雄)이며, 어머니는 나 씨(羅氏)이다. 정여립(鄭汝立) 1546~1589. 1589년(선조 22)에 정여립의 모반사건이 일어났는데, 이를 역사에서는 기축옥사(己丑獄事)라고 한다. 이해 10월 황해감사 한준(韓準)이 임금만 볼 수 있는 비밀 장계(지방에 나간 관원이 글로 써서 올리던 보고)를 올렸고, 글 속에는 정여립이 주도하는 세력이 전라도와 황해도를 중심으로 반역을 꾀하고 있다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정여립은 사실을 미리 알고 피했으나, 진안현감 민인백(閔仁伯)이 관군을 끌고 와서 포위하여 자결하였다. 정철(鄭澈) 1536~1593. 자는 계함(季涵)이고, 호는 송강(松江)이며, 시호는 문청(文淸)이다. 1589년 우의정으로 발탁되어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사건을 다스리게 되자 서인(西人)의 영수로서 철저하게 동인 세력을 추방했고, 이듬해 좌의정에 올랐다. 1591년 건저문제(建儲問題)를 제기하여 광해군(光海君)의 왕세자 책봉을 건의했다가 선조의 노여움을 사게 되었다. 당시 선조는 인빈 김 씨에게 빠져 있던 터라 그녀의 소생인 신성군(信城君)을 세자로 책봉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이 일 때문에 정철은 파직되어 진주(晉州)로 유배되었다가, 이어 강계(江界)로 이배(移配)되었다. 있지도 …… 꾸몄다 원문 '나직(羅織)'은 죄가 없는 사람에게 죄가 있는 것처럼 꾸며 만드는 일을 말한다. 송나라 소식(蘇軾)의 〈재걸군찰자(再乞郡札子)〉에 "그 말을 살펴보건대 모두 나직(羅織)한 것들이니, 없는 것을 있다고 합니다.〔考其所言 皆是羅織 以無爲有〕"라고 하였다. 경성(鏡城) 함경북도 경성군을 말한다. 척강(陟岡)의 회포 원문 '척강(陟岡)'은 《시경》 〈척호(陟岵)〉에서 나온 표현으로, 행역(行役) 나간 효자가 "저 언덕에 올라 형을 바라보네.〔陟彼岡兮, 瞻望兄兮.〕"라고 한 것에서 파생하여, 부형을 그리워하는 심정을 노래함을 말한다. 회령(會寧) 전라남도 보성군 회천면의 옛 지명이다. 국경인(鞠景仁) ?~1592. 1592년 임진왜란 때 왜장 가토[加藤淸正]가 함경도로 침입하여 회령 가까이에 이르자 경성부의 아전으로 있던 작은아버지 국세필(鞠世弼), 명천아전 정말수(鄭末守) 등과 함께 부민을 선동, 반란을 일으켰다. 김귀영(金貴榮) 1520~1593. 자는 현경(顯卿), 호는 동원(東園).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 천도 논의가 있자, 이에 반대하면서 서울을 지켜 명나라의 원조를 기다리자고 주장하였다. 결국 천도가 결정되자 윤탁연(尹卓然)과 함께 임해군(臨海君)을 모시고 함경도로 피난했다가, 회령에서 국경인(鞠景仁)의 반란으로 임해군, 순화군(順和君)과 함께 왜장 가토[加藤淸正]의 포로가 되었다. 황정욱(黃廷彧) 1532~1607. 자는 경문(景文), 호는 지천(芝川).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호소사(號召使)가 되어 왕자 순화군(順和君)을 배종(陪從)해 관동으로 피신하였다. 여기서 의병을 모집하는 격문을 돌렸다. 그러나 왜군의 진격으로 회령에 들어갔다가 국경인(鞠景仁)의 모반으로 왕자와 함께 포로가 되어 안변의 토굴에 감금되었다. 진보(鎭堡) 진영(鎭營)과 보루(堡壘)를 함께 이르는 말로 대개 군대의 진영을 말한다. 종성(鍾城) 함경북도 종성군을 말한다. 정문부(鄭文孚) 1565~1624. 자는 자허(子虛), 호는 농포(農圃), 시호는 충의(忠毅)이다. 1592년, 회령의 국경인(鞠景仁)이 임해군(臨海君)과 순화군(順和君) 두 왕자와 이들을 호종한 김귀영(金貴榮), 황정욱(黃廷彧), 황혁(黃赫) 등을 잡아 왜장 가토(加藤淸正)에게 넘기고 항복하자, 이에 격분해 최배천(崔配天), 이붕수(李鵬壽)와 의병을 일으킬 것을 의논하였다. 한백겸(韓百謙) 1552~1615. 자는 명길(鳴吉), 호는 구암(久菴)이다. 이붕수(李鵬壽) 1548~1593. 본관은 공주(公州)이고, 자는 중항(仲恒)이다. 택당(澤堂) 이식(李植) 1584~1647. 본관은 덕수(德水)이며 자는 여고(汝固), 호는 택당(澤堂)이다. 1610년(광해군 2) 문과에 급제하여 7년 뒤 선전관이 되었으나 폐모론(廢母論)이 일어나자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여 택풍당(澤風堂, 양평군 향토유적 제16호)을 지어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북관지(北關志) 북관 각 군의 읍지(邑誌)를 개괄하여 편집한 책이다. 이식(李植)이 북평사로 있을 때에 함경도 북부 지방의 각 군읍지를 모아 편집에 착수한 것을 그 아들 이단하(李端夏)가 계승, 완성하였다. 은적산(銀積山) 황해북도 은파군(銀波郡)에 소재한 산이다. 가정(嘉靖) 명 세종(明世宗)의 연호로, 1522년(중종17)부터 1566년(명종21)까지 사용되었다. 망우당(忘憂堂) 곽재우(郭再祐) 1552~1617. 조선시대 임진왜란 당시 진주성전투, 화왕산성전투에 참전한 의병장이다. 가슴에는 …… 삼키고 광대한 포부가 있음을 말한다. 사마상여(司馬相如)의 〈상림부(上林賦)〉에, "초나라에는 칠택이 있고 그중에 하나인 운몽택은 사방이 9백 리인데, 운몽택 같은 것 여덟아홉 개를 삼키어도 가슴속에 조금도 거리낌이 없다.〔楚有七澤, 其一曰雲夢, 方九百里, 呑若雲夢者八九, 其於胸中曾不蔕芥.〕"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말은 …… 토하도다 벼슬할 만한 재주가 있음을 말한다. 보불(黼黻)은 임금이 대례(大禮)에 사용하던 제복(祭服)이다. 구장복(九章服)에 용(龍), 산(山), 화충(華蟲), 화(火), 종이(宗彛), 조(藻), 분미(粉米), 보(黼), 불(黻)의 그림을 수놓는다. 전하여 벼슬함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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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평사 숙필의 시에 차운하다 외재 이단하 次申評事叔弼韻【畏齋李端夏】 형양에서 영원할 훈명 세웠으니72)함께한 공들의 의로운 명성 드러났네묘우에 새로운 시 썼다는 말 듣고한마디 말로 다시 장성73)에게 응수하네 滎陽千載樹勳名同事諸公著義聲聞道新詩題廟宇一言應復敵長城 영원히……세웠으니 한(漢)나라 유방이 형양(滎陽)에서 항우에게 포위당해 위급해졌을 때, 기신(紀信)이 한나라 왕 행세를 하면서 항우에게 항복하고 유방을 탈출하게 하였는데, 항우가 그 사실을 알고 불태워 죽였다. 《漢書 卷1 高帝本紀上》 장성(長城) 중후한 사람이나 견고하여 꺾을 수 없는 역량을 비유한 말이다. 여기서는 평사 신숙필(申叔弼)의 시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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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회를 적어 촉룡서당의 제군들에게 보내다 외재 이단하 感懷書寄燭龍堂諸君案下【畏齋】 궁벽하고 외진 변방 이곳이 내 고향인가지난날 골짝을 구르던 생활 잊지 않았네쫓겨나74) 오히려 고향 땅으로 돌아왔으니촉룡서당에서 다잡은 초심 저버렸네­공의 자주(自註)에 이르기를, "내가 북평사(北評事)로 있을 때 이미 정공의 사당을 세웠고, 또 사당의 담장 밖에 서당을 짓고 있었다. 어느 날 병사(兵使)에게 가서 보자고 요구하자, 병사가 웃으면서 '나는 이 일을 하느라 고생했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대답하기를, '내가 내 집을 지은 것은 훗날 귀양살이할 곳을 마련하기 위해서입니다.'라고 하고, 이어서 골짜기에서 지낼 때를 잊지 못한다는 말도 했는데, 제군들이 함께 들었으니 또한 반드시 기억할 것이다. 지금 죄를 지어 쫓겨났는데도 오히려 고향에서 편안히 지내고 있으니, 이는 지난날에 스스로 기약한 것이 아니므로 이 절구 한 수를 읊은 것이다."라고 하였다.­ 窮荒絶塞是吾鄕邱壑從來意不忘放逐尙還狐首地初心孤負燭龍堂【公自註云"生在北幕時, 旣營鄭公祠宇, 又營書堂于祠墻外。一日要兵使往見, 兵使笑'我勤苦於是役', 對以'吾營吾舍, 以備他日謫居之所', 仍有不忘在邱壑之語, 諸君同聽, 亦必記取矣。今得罪放黜, 猶得偸安田里, 非向時所自期者, 故占此一絶矣"。】 방축(放逐) 1674년에 숙종이 즉위하였는데, 외재가 서인으로서 제2차 복상문제로 숙청당한 의례제신(議禮諸臣)의 처벌이 부당하다고 상소하다가 파직되어 이듬해에 삭직 당한 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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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암242) 兄弟巖 아우가 형을 업신여기지 않고 형은 침해하지 않으니같은 뿌리에서 나누어져 반씩 산그늘 만드네단단한 암석이 풍교에 관계된 줄 누라 알랴비슷한 사물 살펴보니 바야흐로 조화옹의 마음 알겠네 弟不凌兄兄不侵同根分作半山陰誰知頑石關風敎觸類方看造化心 형제암(兄弟巖) 함경도 부령부(富寧府)에서 남쪽으로 20리쯤 되는 곳에 있다. 산기슭에 두 바위가 마주 보고 섰는데, 하나는 크고 하나는 작으며, 작은 시내가 그 사이로 흘러내린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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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동에서 천추사의 시에 차운하고, 먼저 떠나는 이들을 송별하다 遼東 次千秋韻 先行送別 객이었다가 다시 객의 행렬 전송하게 되었으니이별함이 그 누가 서쪽으로 가는 나만 하랴이 뒤에 만난 날 알고자 한다면북경에서 한양으로 돌아갈 때이리라 作客翻成送客行別離誰似我西征欲知此後相逢處待到燕京返漢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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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서 사람을 만나다 그 아버지가 요동 유격(遼東遊擊)이다. 逢峽西人【其親爲遼東遊擊】 그대는 산 서쪽 지방의 제일가는 명사요나는 저 멀리 해동 구성 사람이라오요양성 밖에서 마찬가지로 객살이 하니하늘 끝 양쪽 땅의 근심을 나누어 가졌구나 君是山西第一流儂家遙隔海東陬遼陽城外同爲客分占天涯兩地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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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주 부윤이 천추사 서장관을 증별하며 지은 시에 차운하다 次義尹贈別千秋書狀韻 그대에게 먹인 술을 내가 어찌 사양하랴술자리 떠나자 곧바로 길 갈라지네갈림길에서 이별하는 서글픔 표현할 수 없으니술 깬 뒤에 시 읊는 것이 어찌 취하여 시 없는 것만 하랴 飮君之酒我何辭離却樽前便路岐岐路別愁摸不得醒吟爭似醉無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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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함의 시에 차운하다 2수 次汝涵韻【二首】 압구정 가 달 밝은 가을에마름 끝에 맑은 바람 일어 객선 보내네세상에 오늘 밤처럼 술 마실 날 없으랴만평생에 이런 곳에서 노닐기는 어렵다오기이한 돌 높다란 벼랑 고목에 가을 드니깊은 밤 풍로 속에 돌아오는 배 가득하네달 밝은 삼경에 긴 피리 소리 들려오니봉래산 섬 속에 들어와 노니는 듯하여라 狎鷗亭畔月輪秋蘋末淸風送客舟人世豈無今夜飮百年難向此間遊奇石巉巖老樹秋夜深風露滿歸舟一聲長笛三更月疑入蓬萊島裏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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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국의 시에 차운하다 2수 次尹國韻【二首】 동한의 장사 모두 서쪽 변방으로 가니아녀자들 멀리 남편 걱정에 애 타리라무슨 일로 산중에서도 이별이 있는가하의를 백의로 바꿔 입고 길 떠나네318)왕의 군대가 오랑캐 소탕한다 들었으니나라 은혜 받고서 어찌 사정 돌아보랴이제부터 오랑캐 사로잡을 날 점칠 수 있으니백면서생도 칼 지니고 길 떠나는구나 東韓壯士盡西征可是閨人惱遠情底事山中亦有別荷衣換着白衣行聞道王師有濯征國恩那得顧私情從今可卜擒胡月白面書生杖劍行 하의(荷衣)를……떠나네 하의는 연잎으로 만든 옷으로 은자의 옷차림을 뜻하며, 백의(白衣)는 벼슬하지 않는 일반 백성의 옷차림을 뜻한다. 은거하던 사람도 일반 백성으로서 전장에 나아간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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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봉유사》의 뒤에 쓰다 題錦峰遺事後 나의 외가인 나주 나 씨(羅州羅氏) 상사(上舍)84) 나두동(羅斗冬) 종형과 삼종 나두흥(羅斗興) 아우가 함께 나에게 보낸 편지를 보니, 선고조(先高祖) 금호공(錦湖公), 증조 금암공(錦巖公), 금봉공(錦峰公) 형제의 행적에 대해 추술(追述)한 일을 더욱 잘 알 수 있었다. 이에 나는 지극한 뜻과 부지런하고 정성스러움에 감동하여 감히 임자가 아니라는 핑계로 감히 사양할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보내준 여러 기록을 상고하여 외람되이 그 사이를 고쳐85), 금호와 금암 2대의 〈사실기(事實記)〉를 지었다. 돌아보건대 금봉의 사적은 상사 종형이 장초(狀草)한 것으로 절로 편의 체제를 이루어 처음과 끝이 차서가 있고 어의(語義)에 흠이 없었다. 끝부분에 증조 금암공의 제문을 인용하고 그에 대하여 "여러 번 이 글을 읽어보니 나도 모르게 엄숙한 마음이 들어 눈물이 흐른다."라고 쓴 글 또한 사람들을 감동시키기에 충분하였다. 다만 도외시하지 않는 뜻에서 그 가운데 나아가 더러는 한 글자를 빼기도 하고 더러는 한 글자를 바꾸기도 한 곳이 약간 있었을 뿐이니 어찌 굳이 고칠 필요가 있겠는가.삼가 살펴보건대 금봉은 금암보다 네 살 어린 동생이지만, 부친에게 가르침을 받은 것이 같고, 스승을 따른 바가 같고, 추구한 바의 뜻이 같고, 강론한 바의 학문이 같고, 힘쓴 바의 행실이 같고, 세상의 변란을 만난 바와 어려움을 겪은 바도 같다. 어려서는 공손하고 장성해서는 글을 짓고 늙어서는 덕을 쌓아 당세 훌륭한 사람과 군자들에게 어질다는 칭송을 들었는데 처음부터 끝까지 다름이 없었으나, 다른 것이라고는 생사의 연월과 벼슬 경력과 계급 차서에 불과하였다. 옛날 이천 선생(伊川先生)86)이 명도(明道)87)의 행장(行狀)을 쓰고 문인들에게 "나의 도는 거의 명도와 같으니 나를 알고자 하는 사람은 이 글에서 구하는 것이 옳다."라고 하였다. 지금 금봉의 뜻과 학업, 품행과 도의는 그 평생을 개괄해 볼 때 실로 금암과 같다. 나는 금암의 사실기를 지은 뒤 또 붓을 옮겨 금봉의 사실기를 짓고자 했으나 한 편의 같은 글로 귀결되었다.나는 상사 종형에게 장초한 글의 제목을 고칠 것을 청하며 "금봉의 사실기와 금암의 사실기가 모두 전하니,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두 글을 합하여 서로 참고하여 보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라고 하고 마침내 이러한 말을 책 뒤에 써서 돌려보낸다. 나는 금암의 생증손(甥曾孫)이다.임인년(1662) 봄 3월 하순에 외손 팔계(八溪) 정중원(鄭重元) 쓰다. 吾外氏錦城羅上舍斗冬從兄曁三從斗興弟, 幷抵重元書, 見層以先高祖錦湖公 曾祖錦巖 錦峰兄弟公行蹟追述事. 重元感至意勤懇, 不敢辭以非其人, 按所寄示諸錄, 猥檃括其間, 爲錦湖 錦巖兩世事實記. 顧錦峰事, 上舍兄所爲狀草, 自成篇體, 首尾有次, 語意無欠, 至末端引祭曾祖錦岩公文而爲之語曰 : "三復斯言, 不覺潛然出涕"云者, 亦足令人感動. 第以不自外之意, 就其中或有省一字易一字若干處而已, 何必改作爲哉. 竊觀錦峰少錦岩四歲爲弟, 受庭訓同, 遊師門同, 所求之志同, 所講之學同, 所勉之行同, 遭罹世變, 履險涉艱又同. 幼而遜弟, 長而有述, 老而蓄德, 于躬爲當世鉅人君子之所賢, 始終無不同, 其所不同者, 不過生卒年月官歷階次焉耳矣. 昔伊川先生狀明道行, 與門人言 "我之道, 蓋與明道同, 欲知我者, 求之此文, 可也." 今夫錦峰之志業行誼, 槪其平生, 實與錦巖同. 重元旣爲錦巖事實記, 又轉其筆, 欲爲錦峰有所云云, 則歸疊一件文字也. 已請以上舍兄所爲狀草改題目曰 : "錦峰事實記與錦巖事實記, 俱傳, 使觀者, 合兩文有以互看參考之爲善也." 遂以是說書其後歸之. 重元, 錦巖之甥曾孫也. 歲壬寅春三月下澣, 外後屬八溪鄭重元題. 상사(上舍) 생원이나 진사를 일컫는 말이다. 고쳐 원문 '은괄(檃括)'은 기울어지고 굽은 것을 바로잡는 기구를 말하니, 여기에서는 다소의 수정을 가했다는 의미로 쓰인 것이다. 굽은 것을 잡는 것을 은(檃)이라 하고, 모난 것을 잡는 것은 괄(括)이라 한다. 《회남자(淮南子)》에, "그 굽은 것이 발라지게 되는 것은 은괄의 힘이다.〔其曲中規, 櫽括之力.〕" 하였다. 이천 선생(伊川先生) 자는 정숙(正叔), 호는 이천(伊川)으로, 정이(程頤, 1033~1107)를 말한다. 북송(北宋) 중기의 유학자이다. 명도(明道) 자는 백순(伯淳), 호는 명도(明道)로, 정호(程顥, 1032~1085)를 말한다. 북송(北宋) 중기의 유학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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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록보유 【경신년 추가 간행】 附錄補遺 【庚申追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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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년에 의병을 일으킨 일을 기록하다 【택당(澤堂) 이식(李植)1)】 記壬辰擧義事 【澤堂李植】 만력 20년 【선종 26년이다.2)】 인 임진년 6월에 왜장 가등청정(加等淸正)이 먼 길을 내달려 북으로 쳐들어오자, 병마사(兵馬使) 한극함(韓克諴)이 마천령(磨天嶺)을 지켜 관북(關北)을 보호하고자 했는데 군대가 궤멸되자 달아났다. 적들이 마침내 길주(吉州), 명천(明川), 경성(鏡城), 부령(富寧) 등의 진(鎭)에 침입하고 회령(會寧)에 침입하여 왕자들을 붙잡았으며 강을 건너 노토부락(老土部落)3)을 공격하고 노략질하였다. 돌아오는 길에 종성(鍾城)과 문암(門嚴)을 거쳐 강을 건너 온성(穩城), 경원(慶源), 경흥(慶興)의 바닷길로 두루 침입하고는 경성으로 내달렸다. 이에 진보(鎭堡)의 배반한 군사들이 앞다투어 수장(守將)을 포박하고 성을 바쳐서 적에게 붙었다. 경성에서 사노(寺奴) 국세필(鞠世弼) 【세필은 곧 관노(官奴)이다. '사(寺)' 자는 오자(誤字)인 듯하니, 아마 사노였다가 관노로 이속되었을 것이다.】 이 우두머리가 되어 왜서(倭署)를 받아 관호(官號)를 두어 명성과 위세가 더욱 커져갔다. 8월에 가등청정이 편장(偏將) 한 명으로 하여금 수천 명의 보병을 이끌고 길주를 점거하여 여러 진(鎭)을 모두 거느리게 하고 자신은 남도(南道)로 돌아가면서 북청(北靑)과 안변(安邊)에 각각 강한 군대를 두어 성원하였다. 이때 대장부터 대부에 이르기까지 난리를 피해 북쪽으로 달아났던 자들이 적의 수중에 떨어져 거의 다 죽었지만, 오직 평사(評事) 정문부(鄭文孚)는 오래전부터 그곳의 토박이 유생들과 잘 지냈던 까닭에 여러 번 어려움을 겪었으나 모면하였다. 마침내 전 감사(監司) 이성임(李聖任), 경원 부사(慶源府使) 오응태(吳應台), 경흥 부사(慶興府使) 나정언(羅廷彦), 수성 찰방(輸城察訪) 최동망(崔東望), 유배객 한백겸(韓百謙) 및 나덕명(羅德明) 등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부성(府城)에 들어가 점거하였다. 국세필이 적의 세력을 믿고 공갈협박을 하자 모두 이리저리 흩어졌는데, 어떤 이들은 샛길을 따라 남쪽으로 달아나기도 하였다.정문부는 다시 상황이 어려워져 어란리(禦亂里)4)에 숨자, 민가의 유생들이 소문을 듣고 달려왔다. 정문부가 해도(海道)를 경유하여 남쪽으로 돌아가려고 하자 유생들이 다시 함께 의병을 일으키자고 요청하였다. 정문부는 그들에게 진실한 마음이 있는지 살피다가 그들이 강청한 뒤에야 허락하였다. 곧장 몇몇 무리로 하여금 근처에 있는 오응태 등과 종성 부사(鐘城府使) 정현룡(鄭見龍), 고령 첨사(高嶺僉使) 유경천(柳擎天)을 불러오게 하니 모두 와서 모였다. 정문부가 정현룡에게 맹주(盟主)를 양보했지만 정현룡도 단호하게 사양하였다. 사민(士民)들도 정문부에게 소속되기를 원하자 마침내 그를 추대하여 대장으로 삼고 정현룡과 오응태는 차장(次將)으로 삼으니 흩어져 도망쳤다가 차츰 모인 이들이 모두 300여 명이었다. 9월 15일에 병사들을 이끌고 부성(府城)에 도착하였다. 국세필이 성의 현문(懸門)에 들이지 않으며 질책하기를 "너희들은 우리의 곡식을 축내려고 하느냐! 빨리 떠나라!"라고 하였다. 정문부가 한편으로는 협박하고 한편으로는 달래자 국세필이 갑자기 성안으로 그들을 맞아 들였다. 여러 장수들이 먼저 국세필을 베려고 하자 정문부가 "급작스레 처단하는 것은 계획된 일이 아니다."라고 하고는 국세필에게 명하여 관아의 일을 담당하게 하였고 또 예전에 화살을 쏴서 자기에게 상처를 입혔던 반병(叛兵)을 등용하여 비장(裨將)으로 삼았다. 【'비장' 두 글자는 초본에 먹으로 지웠는데 고쳐 쓴 글자가 없다. 그래서 우선 이렇게 그대로 둔다.】얼마 지나지 않아 왜적 1백여 명이 노략질을 하다가 성의 남쪽에 이르렀다. 정문부가 군사들에게 문을 열라 명하고 적 몇 명의 목을 베자 적들이 달아났다. 육진(六鎭) 정문부가 배반한 자들을 풀어 줬다는 소식을 듣고 앞다투어 투항하자 민심이 조금은 안정되었다. 이에 비로소 장졸들을 보내어 반란의 우두머리를 쫓아가 토벌하게 하니, 명천(明川)의 말수(末秀)와 회령의 국경인(鞠景仁)이 연달아 붙잡혔다. 마침내 국세필 등 13인을 모두 베어서 여러 진에 보였다. 병사들이 모집에 꽤 응하여 그 무리가 6천 명에 이르자 정현룡이 경성을 지키면서 틈을 노리려고 하니, 정문부가 "본래 의병을 일으킨 것은 나라를 위해서였을 뿐입니다. 그런데 지금 그저 자신을 지킬 뿐 나아가 적을 공격하지 않으니 배반한 무리를 본받으려는 것입니까. 여론을 들으십시오."라고 하였다. 이른 아침에 남문 밖에 사람들을 모아 두 사람의 논쟁에 대해 누가 옳은지 물었더니 사람들은 모두 정문부를 옳게 여겼다.10월 2일에 명천과 길주의 경계로 진병(進兵)하였다. 이때부터 연달아 적과 싸워 장덕산(長德山)에서 크게 이기고 쌍개포(雙介浦)에서 재차 이겼으며 길주성과 영동책(嶺東栅)을 여러 겹으로 포위하고 고개를 넘어 단천군(端川那)을 구한 뒤 가등청정과 백탑교(白塔郊)에서 전투를 벌여 전후로 1천여 명의 목을 베었다. 이 사실은 《길주사적(吉州事績)》에 실려 있다. 이때 관찰사(觀察使) 윤탁연(尹卓然)5)이 정문부의 명성과 공적이 자기보다 뛰어남을 질시하여 큰소리로 다투며 "정문부는 본래 한 장수의 막좌(幕佐)로 스스로 대장이 되어서는 안 되기에 자기의 절도를 어긴 것이다."라고 하였다. 정문부가 사양하지 않자 윤탁연은 매우 화를 내며 사실과 반대로 행재소(行在所)에 알리고 수급(首級)을 모조리 노략질하여 휘하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어 뇌물 보낼 일을 도모하였다. 또 정현룡 등을 격려하여 정문부의 군대를 맡게 하고 장군을 여섯 번이나 바꾸자 군인들이 그때마다 흩어져 달아나 어쩔 수 없이 정문부를 일으켜 그들을 거느리게 하였다. 그사이 전기(戰機)를 그르친 일이 많았던 것은 이 때문이었다. 정현룡이 처음에는 겁을 먹어서 앞장서려고 하지 않았는데, 공을 세우게 되자 다시 정문부와 틈이 생겼다. 이에 앞서 약탈을 당한 사대부들이 많이 정문부에게 나아가 재산과 보물을 찾아서 돌려 달라고 요구하였으나, 정문부는 백성을 동요시킬까 염려하여 허락하지 않았다. 사대부들이 다시 정현룡에게 요구하니 그가 듣고서 허락하였는데, 정문부가 또 책망하며 그만두게 하였다. 사대부들이 마침내 유언비어를 날조하는 데 참여하고 관찰사가 몰래 그 일을 주관하여 매번 군법에 따라 정문부를 죽이고자 하니, 정문부의 장좌(將佐)가 이따금 불려가 매질을 당하여 거의 죽을 지경이 되었으나 군정(軍情)은 더욱 격분하여 공도 없이 해를 입었다는 이유로 정문부를 배반하지 않았다.이듬해 조정에서는 정현룡을 방어사(防禦使)로 발탁하고 이윽고 절도사(節度使)로 삼았다. 정문부가 비로소 군병을 해산하고 북쪽으로 육진에 가서 변방의 오랑캐들을 타일러 투항하게 하고 배반한 무리를 찾아 죽이자 관북이 마침내 평정이 되었으니, 대개 모든 것이 그의 힘이었다. 아! 관북은 풍속이 본래 오랑캐와 같고 길이 멀고 험하여 절로 한 구역이 되니 옛날 이른바 '병목의 요새'였다. 그럼에도 가등청정이 정예병으로 그 입구를 움켜쥐고 배반한 적들이 성읍(城邑)으로 연대해서 짝을 이루어 합세하니 사람 하나 땅 한 자도 이미 우리의 소유가 아니었다. 그러나 서너 명의 유생들이 한 사람의 종사관을 잘 추대할 줄 알았기에 달아나 숨어 있던 중에도 위험을 무릅쓰고 적은 수로 많은 무리를 공격하여 빈기(邠歧)6) 같은 옛 영 영토가 오랑캐의 땅7)이 되지 않게 하였다. 그러니 그 공을 충분히 이야기할 만하고 우리나라가 문치(文治)를 닦아 풍속을 변화시킨 효험 또한 볼 수 있다.그러나 정문부는 역적 국세필을 죽인 공로로 회령 사람들과 함께 겨우 3품에 오르고 어려운 일에 따른 병사들은 한 사람도 고신(告身)8)도 받지 못한 채 도리어 모욕을 당한 것이 오늘날에 이르렀다. 이에 사람들이 울분을 느끼고 한탄하며 왕사(王事)를 이룰 수 없을 것이라고 하니 어찌 애석하지 않겠는가! 애당초 조정은 거리가 멀어서 그를 무고하는 한두 장계에만 근거하여 그대로 믿어 버렸는데 그 뒤 20년간 사신이 행차하여 묻는 일이 없지 않았으나 으레 이전의 일을 마음에 두지 않고 간혹 조정의 허튼 소문에 미혹되어 끝내 그 실상을 기록한 자가 없었다. 근래 일을 마친 여가에 늙은 군교 및 퇴역한 병졸들에게 묻기를 좋아하여 깊은 산속과 궁벽한 변방에까지 이목(耳目)이 두루 미쳤는데 들어 알게 된 바가 한결같았으니 비록 윤탁연과 정현룡의 무리에게 좌우되는 사람들일지라도 감히 더하거나 꾸미지 못할 것이었다. 그런 뒤에 단연코 의심하지 않게 되었으니, 그 개략을 간략하게 써서 사적의 끝에 외람되이 붙인다.무릇 정문부와 함께 의병을 일으킨 사람은 다음과 같다. 서울 사람 권관(權管) 고경민(高敬民), 봉사(奉事) 오대남(吳大男), 경성(鏡城) 출신 권관 강문우(姜文佑), 훈도(訓導) 이붕수(李鵬壽) 【전사하였다.】, 박은주(朴銀柱), 유생 최배천(崔配天), 지달원(池達源), 박유일(朴惟一), 김여광(金麗光) 【전사하였다.】, 오윤적(吳允迪), 부령(富寧) 출신 차응린(車應麟), 박극근(朴克謹), 유생 김전(金銓), 김경(金鏡), 차득도(車得道), 경원(慶源) 사람 정윤걸(鄭允傑)과 정응성(鄭應聖) 부자(父子), 경성 출신 김사주(金嗣朱), 최경수(崔敬守), 남계인(南繼仁) 【본래 관노였다.】 온성(穩城) 여정(余貞) 【본래 관노였다. 계미년(1583, 선조16)에 신립(申砬)을 따라 전공을 세웠다. 이때 영동(嶺東)의 전투에서 죽었다.】 萬曆二十年 【宣宗二十六年】 壬辰六月, 倭將淸正長驅寇北, 兵馬使韓克諴欲守磨天嶺, 以保關北, 軍潰而走. 賊遂入吉 明 鏡 富等鎭, 入曾寧, 擄王子, 從渡江, 攻掠老土部落. 還由鍾城門巖渡江, 歷入穩城 慶源 慶興 沿海路, 還趨鏡城. 於是, 鎭堡叛兵, 爭縛守將, 擧城附賊. 鏡城則寺奴鞠世弼 【世弼, 乃是官奴, 寺字, 或誤, 疑卽寺奴, 而移屬官奴】 爲首, 受倭署, 置有官號, 聲勢尤張. 八月, 淸正使一偏將分領數千步兵, 據吉州, 以總攝諸鎭, 身歸南道. 北靑 安邊 各置重兵, 以爲聲援. 當此時, 自大將以下至士夫, 避亂落北者, 陷賊殆盡, 獨評事鄭文孚, 以故與土居儒生相善, 故累窘迫獲脫免. 遂與前監司李聖任 慶源府使吳應台 慶興府使羅廷彥 輸城察訪崔東望 謫人韓伯謙 羅德明等, 起義兵, 入據府城. 世弼挾賊勢恐喝, 皆潰散, 或從間道南奔. 文孚復窘, 匿禦亂里, 民家儒生等, 聞而赴之. 文孚欲由海道南還, 儒生要與復興義兵. 文孚察其有忱懇, 強而後許. 乃使數輩, 號召近境吳應台等, 及鍾城府使鄭見龍 高嶺僉使柳擎天, 皆來會. 文孚讓見龍主盟, 見龍固辭. 士民亦願屬文孚, 遂推爲大將, 見龍 應台爲次將, 散亡稍集, 幷三百餘人. 九月十五日, 引兵到府城. 世弼懸門不納, 叱曰, "爾輩欲耗我糧耶! 亟去!", 文孚且脅且誘, 世弼遽迎納. 諸將欲先斬世弼, 文孚曰, "遽也, 非計也." 仍命世弼句管官事, 又用叛兵嘗射傷己者, 爲裨將. 【裨將二字, 本草以墨抹去, 而無改下字, 故姑此仍存.】 未幾, 倭賊百餘人, 掠至城南. 文孚命軍士開門, 擊斬數人, 賊退走. 六鎭聞文孚且釋反側, 爭相送款, 人情稍定. 始發遣將士, 追討反魁, 明川末秀 會寧鞠景仁, 連次就執, 遂幷世弼等十三人斬, 以徇諸鎭. 兵頗應募, 衆至六千人, 鄭見龍欲保鏡城以俟釁, 文孚曰 : "本興義兵, 國耳, 今但自守, 不進擊賊, 欲效叛徒爲耶. 請聽于輿人." 詰朝集衆南門外, 諭以兩人所爭孰可, 衆皆是文孚. 十月二日, 進兵明吉界. 自是, 連與賊遇, 大蹂于長德山, 再捷于雙介浦, 屢圍吉州城及嶺東栅, 踰嶺救端川郡, 與淸正戰白塔郊, 前後斬千餘級, 語在吉州事蹟. 是時, 觀察使尹卓然嫉文孚聲績掩己, 嘖言'文孚本一將幕佐, 不當自爲大將, 違已節度.' 文孚不爲遜, 卓然大怒, 反其實以聞行在, 盡抄其首級, 分與麾下人, 以謀賂遺, 又激見龍等主文孚軍, 六易將, 軍人輒散去, 不得已起文孚領之. 其間誤戰機多, 以此故. 見龍初恇怯, 不欲爲標首, 及有功, 又與文孚相郤. 先是, 被掠士大夫多就文孚, 求搜還財寶. 文孚慮擾民不許, 又求於見龍, 見龍聽許. 文孚又訶止之. 遂與造飛語, 觀察使陰主之, 每欲以軍法殺文孚, 文孚將佐往往被追, 榜掠危死, 然軍情益激, 不以無功受毒, 貳於文孚. 明年, 朝廷擢見龍防禦使, 俄遷節度使. 文孚始釋兵, 北行六鎭, 招服藩胡, 搜誅反黨, 關北卒就平定, 大抵皆其力也. 嗚呼, 關北俗, 本戎羯, 地深阻, 自爲一區域, 古所稱甁項塞, 而淸正以勝兵, 扼其口, 叛賊連帶城邑, 雌雄合勢, 一人尺土, 已非我有, 而數三儒生, 能知推擧一介, 從事於逋竄之中, 抵觸危險, 以少擊衆, 使邠岐舊疆, 免淪於左袵, 其功有足談者. 我國家修文變俗之效, 亦可覩矣. 然文孚僅以誅鞠賊功, 與會寧人, 同陞三品秩, 從難之士, 未得一告身, 反被僇辱, 至于今, 人情憤惋, 以爲王事不可成也, 豈不惜哉. 當初朝問隔遠, 只據一二誣啓爲信, 厥後二十年間, 非無原濕諮詢, 而例不以前事爲意, 或爲內朝浮聞所惑, 終未有紀其實者. 頃於從役之假, 竊好問老校退卒, 深山窮塞, 耳目殆遍, 而所聞知如一, 雖爲卓然見龍輩所左右者, 亦不敢有所增飾, 然後斷然不疑, 略書其槪, 僭付于事蹟之末. 凡同文孚起兵者, 京人權管高敬民, 奉事吳大男, 鏡城出身權管姜文佑, 訓導李生鵬壽 【戰死】 朴銀柱, 儒生崔配天 池達源 朴惟一 金麗光 【戰死】 吳允迪, 富寧出身車應麟 朴克謹, 儒生金銓 金鏡 車得道, 慶源人鄭允傑 應聖父子, 鏡城出身金嗣朱 崔敬守 南繼仁 【本官奴】, 穩城余貞, 【本官奴, 癸未從申砬有戰功, 至是死於嶺東之戰】 택당(澤堂) 이식(李植) 1584~1647. 자는 여고(汝固)이며, 호가 택당(澤堂)이다. 장유와 더불어 당대의 이름난 학자로서 한문4대가의 한 사람으로 꼽힌다. 선종 26년이다 선조(宣祖) 25년으로, 오기(誤記)이다. 노토락부(老土部落) 《승정원일기》, 《일성록》 등에는 '노토부락(老兔部落)'으로 되어 있다. 어란리(禦亂里) 경성부(鏡城府) 남쪽 100리 지점에 있다. 윤탁연(尹卓然) 1538∼1594. 자는 상중(尙中), 호는 중호(重湖). 퇴계 이황의 문인이다. 임진왜란 때 왕의 특명으로 함경도 도순찰사가 되어서 의병을 모집하고 왜군 방어 계획을 세우는 등 시국 타개를 위해 노력하다가 그곳에서 죽었다. 시문에 능하여 송익필(宋翼弼)·이산해(李山海) 등과 함께 팔문장가로 꼽혔다. 저서에 《계사일록(癸巳日錄)》이 있다. 시호는 헌민(憲敏)이다. 빈기(邠岐) 주나라 태왕(太王) 고공단보(古公亶父)는 원래 빈(邠)에 도읍하였는데, 북적(北狄)의 침공을 받아 기산(岐山) 아래로 천도하였다. 주나라는 뒤에 이곳을 근거로 왕업(王業)을 이루었다. 후에 제왕의 발상지를 이르는 말로 쓰였는데, 여기서는 이성계의 고향 영흥(永興)이 있는 함경도를 가리킨다. 영흥(永興)에는 그의 어진(御眞)을 모신 준원전(濬源殿)이 있다. 오랑캐의 땅 원문의 '좌임(左衽)'은 옷깃을 왼쪽으로 여미는 오랑캐의 풍속을 말한다. 고신(告身) 조선시대에 관원에게 품계와 관직을 수여할 때 발급하던 임명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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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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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장계 초 【농포 정문부】 狀啓抄 【農圃 鄭文孚】 장계의 대략은 다음과 같다."병조 좌랑(兵曹佐郎) 서성(徐渻)과 정배인(定配人) 나덕명(羅德明)이 외촌(外村)에서 마을에 사는 군정(軍丁)들을 잘 타이른다고 하더니, 이번에는 모두 성 【즉 경성(鏡城)이다.】 으로 들어갔습니다. 【만력 20년인 임진년 10월 14일이다.】신이 대장에서 체직된 뒤에 회령 부사(會寧府使) 정현룡(鄭見龍)을 대신 대장(大將)으로 삼았습니다. 지난해 12월 그믐께 정현룡이 겸절도사(兼節度使)에 차임되어 육진(六鎭)을 순하였고 다시 경원 부사(慶源府使) 오응태(吳應台)로 대장을 개정(改定)하였습니다. 금년 정월 13일에 도착한 순찰사(巡察使)의 관문(關文)에 오응태를 대장에서 체차(遞差)하고 전처럼 평사(評事)를 다시 대장으로 정하라고 하였습니다. 이달 10일에 도착한 전 대장 오응태의 첩정(牒呈)에, 겸 절도사 정현룡이 대장에서 체차되어 북쪽으로 들어갈 때 육진의 정예병 1백여 명을 모두 거느리고 돌아갔다고 하였습니다. 이에 절도사가 왜적을 토벌하는 정예병을 자기가 거느리기는 하지만 마음대로 거느리고 가서 내보내지 않았습니다. 날씨가 따뜻해져 왜적의 세력이 점점 커지는 이러한 때 왜적을 토벌하는 일이 지극히 염려되므로 신도 관문을 보내어 병사를 모아야 합니다. 조정에서는 각별히 사목(事目)을 주어 그 숫자대로 병사를 모으게 하는 일로 누군가를 방어사(防禦使)라 칭하여 정현룡에게 내려보내시기 바랍니다. 이번에 언뜻 들으니 팔도 중 남도(南道)에서는 이미 과거가 시행되었다고 하는데 유독 이 북도(北道)에서는 과거를 보러 갈 수 없으니 진작시키려는 본래의 뜻에 어긋나는 듯합니다. 그러나 순찰사가 임금께 아뢰어 처치해 달라고 청하지 않은 일에 대하여 변변찮은 소관(小官)이 임금께 아뢰어 청하기는 어렵습니다. 도내(道內)에서 의병을 일으킨 우두머리인 경성에 사는 전 훈도(訓導) 이붕수(李鵬壽), 좌수(座首) 서수(徐遂)와 이기수(李驥秀), 경성에 정배(定配)되었다가 풀려난 전 도사(都事) 나덕명(羅德明), 부령(富寧) 좌수 김전(金銓) 등이 온 힘을 다하여 내달려 어리석고 완악한 사람들을 잘 타일렀으니 지금까지 일을 거행하고 있는 것은 참으로 그들의 공에 힘입은 바입니다.지난번에 상(賞)을 논할 때 과거(科學)에 응시하려고 준비하던 유생들 가운데 금위(禁衛)를 임명한 일을 원통하게 여기는 듯하여 감히 알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경성 판관(鏡城判官)에 송안정(宋安廷)을 임명했다고 하는데 어느 곳에 머물러 있는지 아직 부임하지 않았습니다. 본부 역시 큰 도회지라서 적을 토벌하는 여러 도구를 태반이나 마련하는데 진에 머물고 있는 가장(假將)인 전 감찰(監察) 오명수(吳命壽)만은 책응(策應)하는 데 협조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니 송안정을 재촉하여 부임하게 하거나 조정에서 따로 처치해 주기를 바랍니다. 이러한 까닭으로 잘 아뢰어 주소서. 만력(萬歷) 21년 계사(1593), 1월 16일." 略曰 兵曹佐郞 徐渻 定配人 羅德明 在外村, 曉喩村居軍丁爲白如乎, 節段竝只入城 【卽境城】 爲白有齊云云. 【萬曆二十年壬辰十月十四日】 自臣遆大將後, 會寧府使鄭見龍乙用良, 代爲大將爲白有如可. 前年十二月晦間, 鄭見龍差兼節度使, 巡行六鎭亦爲白遣, 更以慶源府使吳應台, 改定大將爲白有如乎. 今年正月十三日, 到付爲白在巡察使關內, 吳應台大將遆改, 依前評事, 以還定大將, 亦爲白臥乎在亦. 本月初十日, 到付爲白, 在前大將吳應台牒呈內, 兼節度使鄭見龍, 遆將入北之時, 盡率六鎭精兵百餘名, 入歸是如爲有臥乎所, 節度使稱云, 討倭精兵乙, 自己所率是如, 任意率去, 不爲出送爲白在如中. 當此日氣向暖, 倭勢漸張之時, 討賊之事, 極爲加慮爲白昆, 臣段置, 通關徵兵爲良音可爲白在果, 朝廷以各別授事目依數徵兵事, 防禦使稱號爲白在. 鄭見龍處下送爲白乎去望良白乎旀節. 仄聞爲白乎矣, 八道南道, 至亦已爲科擧是如爲白去等, 獨此北道未得赴擧, 似乖聳動之本意爲白良置, 巡察使不爲啓請處置事良中, 幺麽小官, 啓請爲難爲白齊. 道內倡義首人鏡城居前訓導李鵬壽, 座首徐遂 李麒壽, 鏡城定配蒙宥前都事羅德明, 富寧座首金銓等, 極力奔走, 曉喩愚頑, 到今擧事, 實賴其功. 前日論賞之時, 擧業儒生內, 禁衛差下, 似爲冤悶, 不敢不聞爲白乎旀. 鏡城判官段置, 宋安廷差下是如爲白乎矣, 某處留在爲白有臥乎喩, 迄未赴任, 本府亦都會大處, 以討賊諸具太半辦出爲白去等, 留鎭假將前監察吳命壽叱分, 以策應齟齬爲白昆, 同宋安廷乙, 催促赴任敎是去乃, 朝廷以別樣處置爲白乎去望良臥乎事是良厼, 詮次以善啓向敎是事. 萬曆二十一年癸巳, 正月十六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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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니산 어른의 만사 挽羅尼山丈 【김익성, 자는 유응(裕應)이며 광산 사람으로, 고을의 성서에 거주하였다, 광해군 때 과거공부를 그만두고 시를 짓고 술을 마시는 것으로 즐거움을 삼았다.】사람들은 생전이 귀하다지만 人也生前貴공은 돌아가신 뒤에 영예롭네 公惟死後榮사 씨 집안의 쌍벽을 하찮게 여기고 謝家雙璧賤순호의 팔룡도 가볍게 여겼지 荀戶八龍輕땅은 시서의 차례를 덮었고 地閉詩書秩하늘은 예의의 밝음을 감췄다네 天慳禮義明평생 충과 효로 행동하셨으니 百年忠孝事바람이 백양79)에 소리 내어 하소연한다네 風訴白楊聲 【金益成, 字裕應, 光山人, 居州之城西. 光海朝, 廢科, 詩酒自娛.】人也生前貴, 公惟死後榮.謝家雙璧賤, 荀戶八龍輕.地閉詩書秩, 天慳禮義明.百年忠孝事, 風訴白楊聲. 백양 백양(白楊)은 무덤을 가리킨다. 도잠(陶潛)의 〈만가시(輓歌詩)〉에 "황량한 풀은 어이 그리 아득한가, 백양나무 또한 쓸쓸하기만 하네."라고 하였다. 《陶靖節集 卷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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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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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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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우록 師友錄 이소재(履素齋) 선생은 휘가 중호(仲虎)이고, 자는 풍후(風后)이다. 종실인 고안(高安)80) 정(正) 이정(李精)의 아들이며, 효령대군(孝寧大君) 정효공(靖孝公) 이보(李補)81)의 현손이다. 어머니는 성산 이씨(星山李氏)로, 태종 때 좌의정(左議政) 충경공(忠景公) 이직(李稷)의 후손이다. 고안 정(正) 이정이 아내로 맞이하여 정덕(正德)82) 임신년(1512) 9월 무자일에 선생을 낳았다. 일찍이 부모를 잃었고, 장성함에 뜻을 엄하게 하여 문장을 지음에 그 문체가 기이하고 우뚝함을 숭상하여 모재(慕齋) 김안국(金安國)83)이 보고 칭찬하여 말하기를, "귀신이 아니면 저렇게 잘할 수 없다."라고 하였다. 서봉(西峰) 처사 유우(柳藕)84)에게 학업을 전해 받았는데 서봉은 바로 한훤당(寒暄堂)의 문인이니, 그 학문은 대개 연원이 있다. 일찍이 《맹자》를 읽다가 '사람들 모두 요순이 될 수 있다.'85)라는 구절에 이르러 마침내 깨닫는 바가 있어 과거공부를 그만두고 개연히 도를 구할 뜻을 두고는 낮에는 외우고 밤에는 사색하여 잠자고 밥 먹는 것조차 잊기에 이르렀다. 죽간에 구용(九容)과 구사(九思)86)를 새겨 혁대에 꿰어 차고 종신토록 지녔다. 아무리 추운 겨울이나 아무리 더운 여름이라 할지라도 의관을 단정히 하고 띠를 묶어 종일 강론하고 정미하게 분석하니, 서화담(徐花潭)87)이 그와 함께 수일을 강론하고 감탄하며 "미칠 수 없다."라고 하였다.기묘사화(己卯士禍)88) 이후 《소학》의 가르침이 세상에서 크게 금지되자, 선생은 문을 닫고 후학을 가르치니 학도들이 모여들자 반드시 《소학》을 먼저 가르치고 다음으로 《근사록》을 가르친 뒤 점차 여러 경전에까지 이르렀다. 논의가 뛰어나 배우는 사람들의 학문을 북돋아 진작하는 효과가 있기에 전조(銓曹)에서 교직(敎職)에 천거하였으나 번번이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만년에는 병이 심해져 장차 고향으로 돌아가려 했으나 언관(言官)들이 그의 품행과 도의를 칭송하여 계속 서울에 머물도록 청하자 명종이 이를 가상히 여겨 6품의 관직을 내렸지만 몇 달도 되지 않아 세상을 떠났으니 바로 가정(嘉靖) 갑인년(명종 9, 1554) 11월 26일로 향년 43세였다. 문인들이 그의 상례를 다스리고 이듬해 정월 25일에 양주(楊州) 송산(松山) 선영에다 장사지냈다. 그의 저술은 〈심성정도(心性情圖)〉, 〈성리명감(性理明鑑)〉, 자경(自警)의 시문 수백 편이 있으며 선기옥형(璇璣玉衡)의 제도에 이르기까지 깊이 생각하여 곧장 이해해서 직접 제작한 물건이 조금도 도수가 어긋나지 않았다. 【〈이소재묘지유사(履素齋墓誌遺事)〉와 박상 세채(朴相世采)의 〈동유사우록(東儒師友錄)〉에 보인다.】남봉(南峰) 정지연(鄭芝衍)은 자가 연지(衍之)이고, 동래(東萊) 사람이다. 봉상시 정(奉常寺正)89) 정유인(鄭惟人)의 아들이고, 영의정 문익공(文翼公) 정광필(鄭光弼)의 증손이다. 가정(嘉靖) 을유년(1525)에 태어나 융경(隆慶) 기사년(1569)에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우의정(右議政)에 이르렀다. 만력(萬曆) 계미년(1583)에 세상을 떠났으니 향년 59세였다.범애(汎愛) 유조인(柳祖訒)은 자가 인지(訒之)이고, 진주(晉州) 사람으로, 서봉(西峯) 선생 유우(柳藕)의 아들이다. 가정 계사년(1533)에 태어났다. 어릴 때 의뢰할 곳이 없어 다소 무리배였으나 훗날 뜻을 고쳐 이소재의 문하에서 배워 학업에 뜻을 둔 것이 남달랐고 특히 예(禮)에 밝았으며 각기 남봉(南峯) 정지연(鄭芝衍), 퇴암(退菴) 박응남(朴應男), 월담(月潭) 최황(崔滉) 등 막역한 교우를 맺었다. 만력 계미년(1583)에 남봉이 우의정에 있으면서 공을 천거하여 충과 효와 큰 절개가 있어 삼군(三軍)의 장군이 될 만하다고 하니 마침내 출사하게 되었다. 임진왜란 때 임금의 행차가 서쪽으로 행행(行幸)하자, 공은 식구들을 거느리고 걸어서 임금을 따라가 2년을 지냈다. 두암(斗巖) 김응남(金應南)90)은 총재(冢宰)로서 공의 충성과 절개를 알려 통정(通政)91)으로 품계가 올랐으며 호조 참의(戶曹參議)에 제수되었다. 기해년(1599)에 세상을 떠났으니 향년 67세였다. 【《동유사우록(東儒師友錄)》92)에 보인다.】홍용(洪溶)은 남양(南陽) 사람으로, 판관(判官) 홍필세(洪弼世)의 아들이고 공조 판서(工曹判書) 익원군(益原君) 홍경림(洪景霖)의 손자이다. 벼슬은 장례원 사의(掌隸院司議)에 이르렀다.정유신(鄭惟愼)은 동래(東萊) 사람으로, 돈녕부(敦寧府) 정(正) 정익겸(鄭益謙)의 아들이고 참봉(參奉) 정위겸(鄭撝謙)의 양자이며, 문익공(文翼公) 정광필(鄭光弼)의 손자이다. 벼슬은 청풍 군수(淸風郡守)에 이르렀다.지봉(芝峰) 이수광(李晬光)93)의 《지봉유설(芝峰類說)》을 살펴보니 "이소재는 기묘사화 이후에도 스승의 도를 자기의 책임으로 삼으니 옷자락을 공손히 치켜들고94) 수업을 받는 사람들이 날마다 수백 명이나 되었다."라고 한다. 그렇다면 당시 그 문하에서 배움을 청한 선비들이 이처럼 많았을 것이나 문인 가운데 우리 선조께서 크게 인정했던 이들로는 다만 남봉, 범애, 홍공, 정공 네 사람뿐이므로 위와 같이 선별하여 기록한다.현손(玄孫) 나두동(羅斗冬)이 삼가 쓰다. 履素齋李先生, 諱仲虎, 字風后, 宗室高安正精之子, 孝寧大君靖孝公補之玄孫. 妣星山李氏, 太宗朝左議政忠景公稷之後也. 高安正竝娶焉, 以正德壬申九月戊子生先生. 早失怙, 及長勵志, 爲文章, 體尙奇偉, 金慕齋安國見而奇之曰 : "非鬼神, 不能!" 受業於西峯柳處士藕, 而西峯卽寒暄堂門人也. 其學蓋有所淵源焉. 嘗讀孟子, 至人皆可以爲堯舜, 遂有所悟屛棄科業, 慨然有求道之志, 晝誦夜思, 至忘寢食, 刻九容九思於竹簡, 串以革帶, 終身佩服, 雖隆寒盛暑, 整冠束帶, 講論終日, 剖於精微, 徐花潭與之講論數日歎曰 : "不可及也." 自己卯士禍以後, 小學之敎, 爲世大禁, 而先生能杜門敎誨, 學徒坌集, 必先小學, 次及近思錄, 漸達諸經. 論議超詣, 致有聳動振作之效, 銓曺薦爲敎職, 累辭不就. 晩年病痼, 將欲歸田, 言官稱其行誼, 仍請留洛, 明廟嘉之, 授六品職, 不數月而歿, 卽嘉靖甲寅十一月二十六日也. 享年四十三. 門人經紀其喪, 明年正月二十五日, 葬于楊州松山先塋. 所著有心性情圖 性理明鑑 自警詩文數百篇. 至於璿璣玉衡之制, 致思輒解, 手自裁造, 度數不差. 【見履素齋〈墓誌遺事〉, 及朴相世采〈東儒師友錄〉】鄭南峰芝衍, 字衍之, 東萊人, 奉常寺正惟仁之子, 領議政文翼公光弼之曾孫也. 生于嘉靖乙酉, 隆慶己巳登第, 官至右議政. 萬曆癸未卒, 年五十九.柳汎愛祖訒, 字訒之, 晉州人. 西峯先生藕之子也. 生于嘉靖癸巳, 少無賴, 後折節, 爲學游履素齋門, 志業兼人, 尤以知禮各與鄭南峯芝衍 朴退菴應男崔 月潭滉爲莫逆交. 萬曆癸未, 南峯以右相薦公, 有忠孝大節, 可將三軍, 始出仕. 壬辰倭亂, 車駕西幸, 公適家食徒步追, 至居二年. 金斗巖應南, 以冢宰白公忠節, 陞階通政, 拜戶曹參議. 己亥卒, 年六十七. 【見東儒師友錄】洪溶, 南陽人, 判官弼世之子, 工曺判書益原君景霖之孫也. 官至掌隷院司議.鄭惟愼, 東萊人, 敦寧府正益謙之子, 參奉撝謙之繼子, 文翼公光弼之孫. 官至淸風郡守.按李芝峯睟光類說曰 : "履素齋當己卯士禍之後, 以師道爲己任, 摳衣受業者, 日數百人."云云, 則當時踵門請益之士, 若是其多矣, 而同門人中, 吾先祖所與之最相推許者, 只是南峯 汎愛 及洪公 鄭公四人, 故抄錄如右. 玄孫斗冬謹書. 고안(高安) 경기도 용인군 내사현의 옛 이름이다. 이보(李補) 1396~1486. 자는 선숙(善叔), 호는 연강(蓮江)으로, 태종(太宗)의 둘째 아들이다. 형인 양녕대군(讓寧大君)과 함께 충녕대군(忠寧大君)인 세종(世宗)에게 세자의 지위를 양보하고 출가하여 많은 불사를 주관하여 불교의 보호와 진흥에 크게 공헌하였다. 시호는 정효(靖孝)이다. 정덕(正德) 명 무종(明武宗)의 연호로, 중종 원년(1506)~16년(1521)까지이다. 모재(慕齋) 김안국(金安國) 1478~1543. 자는 국경(國卿)이다. 본관은 의성(義城)이다. 김굉필(金宏弼)의 문인이고, 1503년 문과에 급제하였다.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파직되어 고향인 이천의 주촌(注村)과 여주의 천녕현(川寧縣) 별장에서 20여 년 동안 은거하면서 후진들을 가르쳤다. 서봉(西峰) …… 유우(柳藕) 1473~1537. 자는 양청(養淸)이며, 서봉(西峰)은 그의 호다. 김굉필(金宏弼)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갑자사화로 스승이 죽음을 당한 뒤에는 벼슬을 단념하고 학문 연구와 후학 교육에 전심하였다. 사람들 …… 있다 《맹자》 〈고자(告子)〉하 제2장을 말한다. 구용(九容)과 구사(九思) 구사(九思)는 《논어》 〈계씨(季氏)〉에 나오는 군자의 아홉 가지 생각으로, '볼 때는 밝게 보기를, 들을 때는 밝게 듣기를, 얼굴빛은 온화하기를, 용모는 공손하기를, 말할 때는 충성스럽기를, 일할 때는 조심하기를, 의심날 때는 묻기를, 분노할 때는 어려움을, 얻을 것을 보고서는 마땅히 가질 것인가를 생각하는 것을 말한다. 〔視思明 聽思聰 色思溫 貌思恭 言思忠 事思敬 疑思問 忿思難 見得思義〕'이다. 구용(九容)은 《예기》 〈옥조(玉藻)〉에 나오는 군자가 수행(修行)하고 처신함에 있어서 응당 지켜야 할 아홉 가지 자세로, '걸음걸이의 모양은 무게가 있어야 하고, 손놀림의 모양은 공손해야 하고, 눈의 모양은 단정해야 하고, 입의 모양은 조용해야 하고, 목소리의 모양은 고요해야 하고, 머리 모양은 곧아야 하고, 기상의 모양은 엄숙해야 하고, 서 있는 모양은 덕스러워야 하고, 얼굴빛은 장엄해야 한다.〔足容重 手容恭 目容端 口容止 聲容靜 頭容直 氣容肅 立容德 色容莊〕' 등을 말한다. 서화담(徐花潭) 서경덕(徐敬德, 1489~1546)으로, 자는 가구(可久), 본관은 당성(唐城), 화담은 그의 호이다. 저서로는 《화담집(花潭集)》이 있으며, 시호는 문강(文康)이다. 기묘사화(己卯士禍) 1519년(중종 14) 남곤(南袞) 홍경주(洪景舟) 등의 훈구파에 의해 조광조(趙光祖) 등의 신진 사류들이 숙청된 사건을 말한다. 봉상시 정(奉常寺正) 조선시대 제사(祭祀)와 시호(謚號)의 의정(議定)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봉상시(奉常寺)의 정삼품(正三品) 관직이다. 두암(斗巖) 김응남(金應南) 1546~1598. 본관은 원주(原州). 자는 중숙(重叔), 호는 두암(斗巖)이다. 1604년 호성공신(扈聖功臣) 2등으로 원성부원군(原城府院君)에 추봉되었다. 시호는 충정(忠靖)이다. 통정(通政) 조선조 정3품 당상관(堂上官)의 품계를 말한다. 동유사우록(東儒師友錄) 조선 후기 박세채(朴世采, 1631~1695)가 신라시대부터 조선 선조까지 유학자들의 사우 연원을 밝혀놓은 책이다. 지봉(芝峰) 이수광(李晬光) 전형적인 선비의 풍모를 보인 학자로 실록에 기록되어 있으며, 저술로는 문화백과사전의 성격을 띠는 《지봉유설》과 사후에 그의 글들을 모은 《지봉집》이 전한다. 옷자락을 …… 치켜들고 원문 '구의(摳衣)'는 스승이나 어른에게 공경하는 마음으로 행동하는 것을 말한다. 《예기》 〈곡례 상(曲禮上)〉의 "어른이 계신 방 안으로 들어갈 때에는 옷자락을 공손히 치켜들고 실내 구석을 따라 종종걸음으로 얼른 가서 자리에 앉은 다음에 응대를 반드시 조심성 있게 해야 한다."라는 말에서 나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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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읊다 吟雪 세밑의 강 하늘에 눈이 펑펑 쏟아지니천지가 모두 수정 주머니 속에 들어갔네눈발 흩날리는 푸른 바다 은색 용이 꿈틀대고눈 날려 떨어지는 단산(丹山)273) 옥봉(玉鳳)이 높이 나네만 그루 배꽃 희고 고운 자태 뽐내고천 줄기 대나무 잎 푸른빛을 잃었네양원(梁園)에서 눈 읊기에는 재주가 비록 부족하나274)파수(灞水)에서 매화 찾으니 흥이 다시 생겨나네275) 歲暮江天雪正雱乾坤盡入水晶囊飄零碧海銀龍動飛落丹山玉鳳翔萬樹梨花誇素艶千竿竹葉失靑光梁園賦雪才雖短灞水尋梅興更長 단산(丹山) 봉황이 산다는 전설적인 산으로, 단혈(丹穴)이라고도 한다. 《산해경(山海經)》 〈남산경(南山經)〉에, "단혈의 산에……새가 사는데, 그 모양은 닭과 같고 오색 무늬가 있으니, 이름을 봉황이라고 한다.[丹穴之山……有鳥焉 其狀如雞 五采而文 名曰鳳皇]"라 하였다. 양원(梁園)에서……부족하나 서한(西漢)의 양 효왕(梁孝王) 유무(劉武)가 양원(梁園)이란 호사스러운 자신의 원림(園林)에서 세모(歲暮)에 사마상여(司馬相如)‧매승(枚乘)‧추양(鄒陽) 등과 함께 주연(酒筵)을 베풀고 놀다가 눈이 오자 흥에 겨워 먼저 시를 읊고는 종이를 주면서 사마상여에게 시를 짓게 하였다는 고사가 있다. 진(晉)나라 사혜련(謝惠連)이 이 일을 〈설부(雪賦)〉라는 제목의 부로 읊었다. 《文選 卷13 謝惠連 雪賦》 파수(灞水)에서……생겨나네 당(唐)나라 시인 맹호연(孟浩然)이 나귀를 타고 매화를 찾아 눈발 휘날리는 파교(灞橋)를 지나다가 그럴 듯한 시상(詩想)을 떠올렸다는 '답설심매(踏雪尋梅)'의 고사를 전거로 한 말이다. 《全唐詩話 卷5 鄭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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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조125)의 은전을 축하하는 자리126)의 시에 삼가 차운하다 7대손 정언 지선 敬次不祧典慶宴韻【七代孫 正言志善】 왕가의 제사 지내는 법 옛 사적에 상고하니부조는 충량한 선조를 기리기 위해서이네세상에 드문 깊은 은혜에 비구름마저 감동하고유묘에 은택 다했지만 초주127) 아직 향기롭네역사에 전해진 훌륭한 공적 주나라 고명128) 같고높은 공명 그림 ­원문 1자 결락­129) 에 걸렸네훈신은 대대로 복록 받는다 그 누가 말했던가재배하고 영원히 이 술잔 올릴 생각이네 祀典王家稽古方不祧所以褒忠良恩深曠代風雲感澤盡遺祠椒酒香嘉績簡垂周誥命丕名圖載漢□光勳臣世祿人誰說再拜千秋侑此觴 부조(不祧) 묘제(廟制)에 친진(親盡)이 되면 신주를 체천(遞遷)하는 것이 상례이지만, 나라에 공이 있는 사람의 위패를 조천(祧遷)하지 않고 영구히 사당에 모시게 하는 것이다. 축하하는 자리 기유년(1789, 정조13) 4월 25일에 신주를 고쳐 쓰는 행사를 하고, 진주 가곡리(佳谷里) 집에서 경축하는 잔치를 베풀었다. 《農圃集 年譜》 초주(椒酒) 산초나무의 열매를 섞어서 빚은 술이다. 이 술로 새해 아침에 조상을 숭배하며 제사를 지내거나 웃어른에게 바쳐 축수하며 올린다. 주나라 고명(誥命) 《서경》의 〈주서(周書) 대고(大誥)〉·〈주서 강고(康誥)〉 등과 〈주서 필명(畢命)〉·〈주서 고명(顧命)〉 등을 가리키는 말로, 만세에 교훈으로 남을 만한 글이라는 뜻이다. 원문 1자 결락 원문은 '漢□光'이다. '漢'과 '光'은 원문의 문제로 번역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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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하여 읊다 醉吟 흰 갈매기가 백발을 보고 白鷗見白髮스스로 환영 속 저라고 말하네 自謂影中渠날아왔다가 날아가지 않으니 飛來不飛去나 또한 세상과 멀어졌네 我亦世情疎 白鷗見白髮, 自謂影中渠.飛來不飛去, 我亦世情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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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난삼아 짓다 戱題 희황씨가 죽지 않아 羲皇氏不死태고적 바람이 길게 불어오네5) 太古風長吹우습구나 어찌하여 可笑何爲者나는 이 시대에 태어났는지 謂余生此時 羲皇氏不死, 太古風長吹.可笑何爲者, 謂余生此時. 희황씨가 …… 불어오네 희황씨는 복희씨(伏羲氏)의 별칭이다. 도연명(陶淵明)이 전원생활을 즐기면서 "여름철 한가로이 북창가에 잠들어 누웠다가 삽상한 바람이 불어와 잠을 깨고 나면 문득 태곳적의 사람인 것처럼 느껴지곤 한다.〔夏月虛閑, 高臥北窓之下, 淸風颯至, 自謂羲皇上人.〕"고 한 데에서 유래한 것으로 전원에서 한가로이 즐기는 은일(隱逸)의 정취를 말한다 《晉書 隱逸傳 陶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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