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안국76)이 《춘추집전》을 올린 것에 대한 전문 胡安國進春秋集傳箋 총명한 임금께서 번거로운 만기에 임하니경전 주석은 반드시 안사고에게 도움을 받았네.《춘추》는 백왕의 법이 되었는데강학은 은미함을 밝히는 것보다 중요한 게 없어라.이에 제가 들은 것을 드러내어감히 《집전》을 바치네.삼가 보건대 주나라의 수레가 돌아오지 않은 후로77)왕의 기강이 점차로 무너진 상태로 되었네.〈서리〉가 〈국풍〉으로 떨어지니오호라! 송성은 이윽고 끊어졌어라.78)전쟁으로 제향이 변하였으니다하였구나, 왕의 자취가 사라져버렸네.하늘이 그 사이에 성인을 낳아서이윽고 당대에 사문을 맡게 하였어라.무도함을 내가 바꿀 것이니사방의 법이 되길 바라네.행해지 않음을 내 아나니이에 만대에 모범을 드리우고 싶노라.이에 조화공의 붓을 휘둘러이에 사씨의 책을 정리하네.그 군주를 높이고 그 신하를 억누르니상하의 분수가 어지럽지 않게 되었고,오랑캐에 간략하고 중하에 자세하니내외의 구분이 엄격하였어라.그 서술 체제를 밝히면 기원으로 '년'을 삼았고대일통은 곧 달에 왕을 더하였네.재변을 기록하니 하늘과 사람의 이치가 다르지 않고봉함79)을 기롱하니 적처와 첩의 명분이 질서가 있어라.규구와 소릉80)을 칭송하니세상이 쇠한 것에 아파한 성인의 뜻에 근본 하였고,조돈과 허지81)를 단죄하였으니신하의 숨겨진 악을 처벌함에 엄격하였네.원수는 어찌 차마 하늘을 함께 이리오시해하면 반드시 토벌하기 전에는 장사 지내지 않음을 드러냈네.천자 이백 년 남면의 일을 대신 행하였으니애공 십사 년 서쪽으로 사냥할 때까지 이르렀네.성인의 마음으로 판단하였으니쓸 것을 쓰고 뺄 것은 빼었어라.한결같이 공의를 따랐으니옳은 것을 옳다고 하고 그른 것은 그르다고 하였네.간사한 자들은 심장이 서늘하였고난신적자들은 담이 오그라들었네.어찌 다만 죄를 토벌하는 부월 같을 뿐이랴아니 또한 의심을 결정하는 시귀라네.이 《춘추》에 어두우면 반드시 가장 나쁘다는 이름을 얻을 것이니82)신하된 자들은 반드시 배워야 할 것이며,그 말을 아는 자는 대사를 처리함에 무슨 어려움이 있으리오더구나 임금으로서 감히 소홀할 것인가.이는 참으로 백대의 스승과 같으니조금이라도 다른 의견을 용납하랴.지난번 잘못된 견해를 고집한 까닭으로드디어 세상과 관련된 대경을 배척하게 되었어라.경연에서 진독의 법을 폐하니위에서 옛날을 고찰할 토대가 없어지고,지공거가 선비 취하는 법에서 빼버리니아래에서 정도로 돌아갈 논의가 사라졌어라.세도가 어둡게 되어버려끝내 오랑캐가 침입하는 변란을 보게 되었네.생각이 이에 이르니저에 대해 다만 마음이 어찌하겠는가.삼가 생각건대, 상성의 자질로 중흥의 책임을 맡아옛날 왕실이 적천에 있다가 성주로 들어간 것83)을 생각하고지금 조정의 계책이 연운84)을 쓸어서 한업을 회복하려 하네.생각하시기를, 적을 이겨 영토 회복이 비록 무를 쓰는데 달렸지만경륜은 반드시 문을 높임을 먼저 해야 한다고.이에 적을 토벌하고 원수에 보복하는 시기에난을 다스려서 올바름으로 돌아가는 이 법을 중하게 여겼네.그러나 나를 알고 나를 죄준다는 깊은 뜻85)을실로 어리석은 선비가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반드시 자신의 마음으로 그 마음을 헤아려서 그 뜻을 드러냄은모름지기 석유를 기다린 뒤에 성취할 수 있누나.신의 경우는 천 번 생각해야한마디 말을 놓을 수 있네.삼가 생각건대, 받은 품성이 다만 용렬하여도를 보아야 실천하는 정도라네.내가 가르침을 받은 바 있어공손홍의 곡학아세는 비록 부끄럽게 여기지만,네86)가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니동중서의 재이론87)으로 흘러갈까 두려워라.외람되이 주석을 찬집하라는 명을 받들었는데저술의 능치 못해 부끄러워라.선택이 정밀치 않고 말이 자세하지 않으니비록 말 너머에서 뜻을 얻지는 못하지만,그 말을 인하여 그 뜻을 구한다면역사 너머 전하는 마음을 거의 잃지 않을 것이라.연석을 보관한 것88)과 절로 같으며곧 요동 돼지를 바친 것89)을 본 뜬 것이라.혹여 전하께서 들어봐 주신다면초동 같은 말을 굽어 재택해주소서.학문은 반드시 강론해야 밝혀지니어찌 다만 궁리정심의 중요한 도뿐이랴.일은 마땅히 의로써 판단해야 하니실로 경세안민의 큰 기틀과 관련되누나. 四聰莅萬機之煩制治必資於師古一經爲百王所法講學莫要於明微玆效孤聞敢進集傳竊觀姬轍之不返馴致王綱之漸頹黍離降國風嗟呼頌聲之旣絶干戈變俎豆已矣王迹之云亡天生將聖於其間已任斯文於當世無道吾易也冀可爲法於四方不行我知之乃欲垂範於萬代爰揮化工之筆載修史氏之書尊其君抑其臣上下之分不紊略於夷詳於夏內外之辨式嚴明其用則紀元爲年大一統則加王於月記灾變而天人之理無間譏賵含而嫡妾之名有倫善葵丘善召陵本聖人衰世之意罪趙盾罪許止嚴臣子隱惡之誅讐豈忍於共天弑必著於不地行天子二百載南面之事至哀公十四年西狩之時斷自聖心筆則筆而削則削一徇公義是曰是而非曰非奸究寒心亂賊破膽豈但討罪之鈇鉞抑亦決疑之蓍龜昧是經則必蒙首惡之名在人臣猶必學也知其說者於處大事何有況國君其敢忽諸是固百世同師可容一毫異議頃緣執拗之謬見遂斥關世之大經經筵廢進讀之規上無稽古之地貢擧祛取士之式下蔑歸正之論馴致世道之昏終見胡塵之變言念至此彼獨何心欽惟以上聖資任中興責念昔王室居狄泉而入成周在今廟謨掃燕雲而恢漢業謂克復雖在於用武而經綸必先於崇文乃於討賊復讐之秋重此撥亂反正之典然知我罪我之蘊奧實非蒙士之可通必以心度心而發揮須待碩儒而能就如臣千慮可措一辭伏念賦性惟庸見道實淺曰吾有受雖恥公孫弘之曲阿非爾所知恐流蕫仲舒之灾異叨承纂集之命愧之著述之能擇不精語不詳縱未能言表得意因其辭究其旨庶不失史外傳心自同燕石之藏輒效遼豕之獻倘垂荃聽俯擇蕘言學必講而明豈特躬理正心之要道事當斷以義實關經世安民之大機 호안국 자는 강후(康侯), 시호는 문정(文定)이다. 왕안석(王安石)이 《춘추(春秋)》를 폐하여 학관(學官)의 대열에 끼지 못한 데서 《춘추》의 학문이 쇠퇴한 것을 탄식했다. 이 책을 연구하는 데 20여 년을 보내며 《춘추호씨전(春秋胡氏傳)》 30권을 저술하였다. 주나라의……후로 주(周)나라 평왕(平王)이 견융(犬戎)을 피해 동쪽 낙읍(洛邑)으로 수도를 옮긴 동천(東遷)을 말한다. 이후를 동주(東周) 혹은 성주(成周)라고 하며, 이를 기점으로 춘추 시대(春秋時代)가 전개되다가, 위열왕(威烈王) 23년에 한(韓), 위(魏), 조(趙)를 제후로 임명하면서 전국 시대(戰國時代)로 돌입한다. 서리가……끊어졌어라 《맹자(孟子)》 〈이루 하(離婁下)〉에 "왕도 정치의 자취가 종식됨에 시가 없어졌으니 시가 없어진 후에 춘추가 나왔다.[王者之迹熄而詩亡, 詩亡然後春秋作.]"라고 하였다. '왕도 정치의 자취가 종식되었다'는 것은 주(周)나라 평왕(平王) 때 동쪽으로 천도한 후 주나라의 정교(政敎)와 호령(號令)이 천하에 미치지 못하게 된 것을 이르고, '시가 없어졌다'는 것은 《시경(詩經)》의 〈서리(黍離)〉가 강등되어 국풍(國風)이 되면서 아송(雅頌)이 없어진 것을 이른다. 봉함 봉부증함(賵賻贈含)을 가리킨다. 이 네 가지는 모두 상가(喪家)에 물품을 보내는 것인데, 봉은 거마(車馬)를 보내는 것이고, 부는 재화(財貨)를 보내는 것이고, 증은 의복(衣服)을 보내는 것이고, 함은 주옥(珠玉)을 보내는 것이다. 상례에 임금이 내린 물품을 기록하여 적첩의 대우가 어긋난 것에 대해 기롱함을 의미한다. 규구와 소릉 규구의 회맹은 주(周)나라 양왕(襄王) 원년에 있었던 일로, 제(齊)나라 환공(桓公)이 제후(諸侯)를 규구에 모아서 수호(修好)하고 왕실(王室)에 충성을 다할 것을 맹세하였다. 《孟子 告子下》 소릉의 맹약은, 제 환공이 초(楚) 나라를 공격하여 초나라의 사자 굴완(屈完)과 소릉에서 맺은 맹약이다. 이때 환공은 초 나라가 주(周) 나라 왕실에 공물(貢物)을 바치지 않고 남쪽으로 정벌을 계속하는 죄를 물었다. 《春秋左氏傳 僖公4年》 조돈과 허지 춘추 시대 진(晉)나라 선공(宣公) 2년에 조돈(趙盾)의 사촌인 조천(趙穿)이 영공(靈公)을 도원(桃園)에서 시해하였는데, 조돈은 아직 국경인 산을 넘지 않았을 때 되돌아왔더니, 태사(太史) 동호(董狐)가 '조돈이 그 임금을 시해하였다.'고 쓰고 그것을 조정(朝廷)에 내보였기 때문에 조돈은 "그렇지 않다."고 하였으나, 동호는 "당신은 한 나라의 정경(正卿)이면서 달아났으나 미처 국경을 넘지 못했고, 돌아와서도 역적을 토벌하지 않았으니, 당신이 아니라면 누구이겠는가?"라고 대답하였다. 《춘추》 소공(昭公) 19년 조에, 허(許) 나라 도공(悼公)이 학질을 앓아서 그 아들 지(止)가 약을 지어 드렸더니 도공이 죽었다. 그 사건에 대해 공자가 《춘추》에, "허(許) 세자 지가 그 임금을 죽였다."라고 쓴 것은, 아들이 어버이의 병에 약을 먼저 맛보고 드리는 법인데 허지가 약맛을 보지 않고 드렸으므로 이 도공이 죽었다고 본 것이다. 춘추에……것이니 《사기》 〈태사공자서〉에 "남의 군부(君父)가 되어 《춘추》의 의리에 통달하지 못하면 반드시 최악의 이름을 얻을 것이요. 남의 신자(臣子)가 되어 《춘추》의 의리에 통달하지 못하면 반드시 찬역과 시해의 죄에 빠진다."라고 하였다. 왕실이……것 노(魯)나라 소공(昭公) 22년에 주나라 경왕(景王)이 죽자 왕자 조(朝)가 변란을 일으켰고, 이에 경왕의 적자(嫡子)인 왕자 맹(猛)이 황(皇) 땅으로 파천하였다가 죽었다. 《춘추(春秋)》에서는 이에 대해 기록하기를 "왕실에 변란이 일어나자 유자(劉子)와 선자(單子)가 왕자 맹을 모시고 황(皇)에서 거주하였다. 가을에 유자와 선자가 왕자 맹을 모시고 왕성으로 들어갔는데, 10월에 왕자 맹이 졸하였다.[王室亂, 劉子單子以王猛居于皇. 秋劉子單子以王猛入于王城. 冬十月王子猛卒.]"라고 하였다. 이듬해에 경왕(敬王)이 즉위하였다가 쫓겨나 적천(狄泉)에 나가 있게 되었고, 그 틈을 타 윤씨(尹氏)가 왕자 조를 왕으로 세웠다. 《춘추》에서는 이에 대해 기록하기를 "천왕이 적천(狄泉)에 거주하였다. 윤씨가 왕자 조를 세웠다.[天王居于狄泉. 尹氏立王子朝.]"라고 하였다. 그 뒤 26년에 진(晉)나라 군대가 경왕을 복귀시키자 왕자 조와 윤씨 일족이 초(楚)나라로 도망쳤다. 《춘추》에서는 이에 대해 "겨울 10월에 천왕이 성주(成周)로 들어가고 윤씨와 소백(召伯), 모백(毛伯)이 왕자 조와 함께 초(楚)나라로 도망쳤다.[冬十月天王入于成周, 尹氏召伯毛伯以王子朝奔楚.]"라고 기록하였다. 여기서는 왕실의 중흥을 말한다. 연운 연운(燕雲) 16주를 가리킨다. 이는 10세기에 요(遼)가 후진(後晋)에서 할양받아 지배한 곳으로 연(燕)은 연경을 중심으로 한 하북(河北) 북부, 운(雲)은 운주(雲州)를 중심으로 한 산서(山西) 북부를 말하는데 연운은 이 두 주(州)를 중심으로 한 만리장성 주변 지역에 해당한다. 휘종은 금(金)나라와 맹약을 맺고 남북으로 요(遼)나라를 협공하여 빼앗겼던 연운(燕雲) 16주를 수복하고자 하였으나, 이 과정에서 군사력의 약체를 드러내고 만다. 이를 간파한 금나라는 요나라를 멸망시킨 후, 전쟁 배상금 지불을 미루고 금나라에 대한 도발과 견제를 지속하던 송나라를 치기 위해 군사를 일으켜 남하하였다. 나를……뜻 《맹자》 〈등문공 하(滕文公下)〉에 "《춘추(春秋)》는 천자가 하는 일이다. 이 때문에 공자가 말하기를, '나를 알아주는 것도 오직 《춘추》이며 나를 죄주는 것도 오직 《춘추》이다.' 하였다.[春秋天子之事也 是故孔子曰 知我者 其惟春秋乎 罪我者 其惟春秋乎]"라고 하였다. 네 여기서는 자신을 가리킨다. 동중서의 재이론 동중서는 한나라 초기의 학자이다. 그가 주장한 재이론의 요지는 '하늘이 재이를 내려서 군주를 경계시키되, 재이를 여러 차례 내려서 경고해도 태도를 뉘우치지 않으면 덕 있는 사람에게 개명(改命)하도록 한다.'라는 것이다. 《資治通鑑綱目 卷37中》 연석을 보관하는 것 비슷하지만 가짜인 것, 즉 사이비(似而非)라는 뜻이다. 연석(燕石)은 연산(燕山)에서 나오는 돌인데, 옥과 비슷하지만 옥이 아니다. 옛날 송(宋)나라의 어리석은 사람이 이 돌을 오대(梧臺)의 동쪽에서 얻고는 큰 보물이라 여겨 비단으로 몇십 겹을 싸서 잘 보관하였으나 결국 돌멩이로 밝혀져 비웃음을 샀다고 한다. 《琅琊代醉編 燕石》 요동……것 식견이 천박해서 부끄럽다는 뜻의 겸사이다. 요동(遼東)의 돼지가 머리가 흰 새끼를 낳자, 주인이 기이하게 여겨 조정에 바치려고 길을 떠났다가, 하동(河東)에 와서 돼지가 모두 흰 것을 보고는 부끄럽게 여겨 돌아갔다는 요동시(遼東豕)의 고사가 전한다. 《後漢書 卷33 朱浮列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