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7년 최운식(崔雲植) 편지(便紙)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개인-생활-서간 1977.10.18 崔雲植 1977.10.18 崔雲植 萬宗齋 고흥 고흥류씨 류탁 후손가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977년 10월 18일에 최운식(崔雲植)이 만종재(萬宗齋)에 보낸 편지. 1977년 10월 18일에 최운식(崔雲植)이 만종재(萬宗齋)에 보낸 편지이다. 본인은 『어우야담(於于野談)』을 연구하는 중인데 도서관에서 빌려보기가 번거로우니 책의 판매처와 가격을 알려달라는 내용이다. 만종재에서 어우야담 책 간행을 진행하였다. 『어우야담』은 조선 중기에 류몽인(柳夢寅)이 편찬한 설화집이다. 총 5권 1책으로 당초 10여 권이었으나, 저자가 모반의 혐의로 형사(刑死)됨에 따라 많이 산질되었다. 1832년(순조 32) 『어우집(於于集)』을 발간하면서 종후손(從後孫) 금(琹)이 『어우야담』의 유고를 수집하여 간행하고자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 뒤에도 줄곧 필사본으로 전하여 왔는데, 필사의 과정에서 여러 종류의 초사본(抄寫本)이 나타났다. 1964년 그의 종후손 제한(濟漢)이 가전의 잔존본에 여러 이본을 수집, 보충하고 부문별로 나누어 5권 1책으로 간행하였다. 책머리에는 유몽인의 영정과 유묵(遺墨), 이어 유영선(柳永善)의 서문, 성여학(成汝學)의 1621년(광해군 13)에 작성한 구서문(舊序文)과 연보가 실려있다. 책 끝에 종후손 제한의 발문이 붙어있다. 류몽인은 1559년(명종 14)에 태어났으며 1623년(인조 1)에 졸하였다. 자(字)는 응문(應文)이고, 호(號)는 어우당(於于堂), 간재(艮齋), 묵호자(默好子)이다. 시호(諡號)는 의정(義貞)이다. 조선시대 한성부좌윤(漢城府左尹), 대사간(大司諫) 등을 역임한 문신(文臣)이었다. 폐모론에 가담하지 않고 은거하였으나 1623년() 7월 현령 류응경(柳應泂)이 "류몽인이 광해군의 복위 음모를 꾸민다."고 무고해 국문을 받았다. 결국 역률(逆律)로 다스려져 아들 유약(柳瀹)과 함께 사형되었다. 이때 관작의 추탈은 물론 임진왜란의 공으로 봉해진 영양군(瀛陽君)의 봉호도 삭탈되었다. 정조 때 신원되고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류몽인을 기리며 전라도 유생들이 문청(文淸)이라는 사시(私諡: 개인의 시호를 국가에서가 아닌 사적인 방법으로 내림.)를 올리고 운곡사(雲谷祠)에 봉향하였다. 신원된 뒤에 나라에서도 의정(義貞)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운곡사를 공인하였다. 고산(高山)의 삼현영당(三賢影堂)에도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야담을 집대성한 『어우야담』과 시문집 『어우집』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