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간기록문화
통합검색플랫폼

기관별 검색

검색 범위 지정 후 검색어를 넣지 않고 검색버튼을 클릭하면 분류 내 전체 자료를 볼 수 있습니다

전체 으로 검색된 결과 84193건입니다.

정렬갯수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찬 운창 박성양 贊 【芸窓 朴性陽】 문무의 재주를 겸하였고충효의 큰 인륜 갖추었네.관북을 거듭 회복하였고두목 청정(淸正)의 넋을 빼앗았어라.절재, 영평48)과누가 더 낫고 못할까.만년에 시안으로 죽으니무목49)보다 더욱 통탄스럽네. 文武全才忠孝大節重恢關北淸酋裭魄節齋鈴平孰爲優劣暮年詩案痛甚武穆 절재, 영평 절재는 김종서(金宗瑞)의 호이고 영평은 영평현개국백(鈴平縣開國伯)에 봉해진 윤관을 가리킨다. 무목 송나라의 충신 악비(岳飛)를 가리킨다. 가난한 농민 출신이지만 금(金)나라 군사의 침입으로 북송(北宋)이 멸망할 무렵 의용군에 참전하여 전공을 쌓았다. 북송이 망하고 남송 때가 되자 무한(武漢)과 양양(襄陽)을 거점으로 후베이[湖北] 일대를 영유하는 대군벌(大軍閥)이 되었다. 그의 군대는 악가군(岳家軍)이라는 정병(精兵)으로, 유광세(劉光世)·한세충(韓世忠)·장준(張俊) 등 군벌의 병력과 협력하여 금나라 군대의 침공을 화이허강[淮河], 친링[秦嶺] 선상(線上)에서 저지하는 전공을 올렸다. 당시 악비의 군대는 사기가 충천했고 금나라 군대는 점차 세력이 약화되어 갔다. 하지만 당시 남송 조정에서는 재상인 진회(秦檜)가 금나라와 화평론(和平論)을 주장하였으며 연일 승전보를 알려오는 악비를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주전파(主戰派)인 군벌과 이상파(理想派)의 관료들 사이에 분쟁이 지속되었고 1141년 금나라와 강화를 주장하였던 재상 진회는 군벌끼리의 불화를 틈타서 그들의 군대 지휘권을 박탈하고 중앙군으로 개편하였다. 이때 조정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은 악비는 무고한 누명을 쓰고 투옥된 뒤 39세의 나이에 살해되었다.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권6 卷六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부록 附錄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국승기략 國乘紀略 왜장(倭將) 가등청정(加藤淸正 가토 기요마사)이 북계(北界)에 침입하자, 회령(會寧) 사람들이 반란을 일으켜 두 왕자와 여러 재신(宰臣)을 잡아 왜적을 맞아 항복하자1) 관남(關南)과 관북(關北)이 모두 적에게 함락되었다.함경북도 병마 평사(兵馬評事)2) 정문부(鄭文孚)가 군사를 일으켜 경성(鏡城)을 수복하였다. 당시 북계(北界)의 수장(守將)들이 모두 토착민에게 붙잡혀 왜장에게 넘어갔는데, 도망친 자는 열에 한두 명도 안 되었다. 병마 평사 정문부는 교생(校生)들에게 글을 가르쳐 주었기에 변란이 일어난 뒤에 제자 몇 사람이 비호하여 빠져나올 수가 있었다. 교생들과 무사들 중에 식견이 있는 자가 정문부가 있는 곳을 듣고 모두 그에게 찾아갔고, 마침내 정문부를 추대하여 의병장으로 삼고 토병(土兵)과 장사(壯士) 수백 명을 모았는데, 경성 사람 전 만호(萬戶) 강문우(姜文佑)3)가 선두에서 거느리고 바로 부성(府城)에 도착하였다.이때 국세필(鞠世弼)4)이 '예백(禮伯)'이라 일컬으며 병사(兵使)의 인(印)을 가지고 부임하여 태연히 부(府)를 다스리고 있었는데, 갑자기 군사가 왔다는 소식을 듣고는 성문을 닫고 성에 올라가 항거하였다. 이에 강문우 등이 화와 복을 들어 위협하자 국세필이 대적하지 못할 것을 알고 성문을 열어 맞아들이고 병사의 인을 바쳤다. 정문부가 영을 내려 말하기를, "대소의 병민(兵民)에게 예전에 범한 죄를 문책하지 말라." 하고, 그대로 국세필에게 그전처럼 군사를 거느리게 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남북의 주보(州堡)에 격문을 전하여 병사 3천 명을 모으고, 또 그중에서 날래고 용맹스러운 돌격 기병을 뽑아 선봉으로 삼았다. 길주(吉州)의 왜적이 이 소식을 듣고 군사 백여 명을 보내어 정탐하게 하여 성의 서쪽에 이르렀는데, 강문우 등이 성문을 열고 나가 공격하여 수십 명을 베자 남은 적들이 도망갔다.함경북도 병마평사 정문부가 길주에서 적병(賊兵)을 크게 패배시키고 성을 포위하였다. 정문부가 백성을 편안하게 하여 안정되자, 군사들의 마음은 모두 적을 공격하여 스스로 목숨을 바치고자 하였다. 이에 출병할 날짜를 가려 출발하려고 할 때 장사들이 일제히 요청하여 말하기를, "왜적을 토벌하려고 하는데 나라의 역적이 아직도 진중(陣中)에 있으니, 먼저 토벌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였다. 이에 마침내 국세필 등 13명을 잡아서 목을 베어 군중에 조리를 돌리며 말하기를, "당초에 앞장선 사람은 이 무리뿐이며 이들 외에는 참여한 자가 없으니, 부인(府人)들은 의심하지 말라." 하니, 사람들이 모두 기뻐하였는데, 이는 정문부의 본래 계략이었다. 다시 육진(六鎭)에 격문을 보내어 먼저 반란에 앞장선 자의 목을 베게 하자, 회령의 유생 신세준(申世俊)이 군사를 일으켜 국경인(鞠景仁)5)의 목을 베었고 남은 진도 모두 수복되었으며, 반민(叛民)은 처형되기도 하고 도망하기도 하였다. 정문부가 군사를 고참역(古站驛)으로 진군시키고 군사를 보내어 명천(明川)의 반적(叛賊) 정말수(鄭末秀)를 주벌하고 그 성을 수복하였다.길주의 왜적이 마침내 사방으로 나와 불을 지르고 노략질을 했는데, 그 가운데 한 부대가 명천의 해창(海倉)을 노략질하기에, 정문부가 군사를 길주의 남촌(南村)에 진군시켜 돌아가는 길에서 요격하여 적병을 크게 패배시키고 6백 명의 수급을 베었다. 또 적의 한 부대가 마천령(摩天嶺) 아래 영동관(嶺東館) 책성(柵城)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임명촌(臨溟村)에 불을 지르고 노략질하였다. 이에 정문부가 군사를 돌려 추격하여 쌍포(雙浦)에서 전투하여 적병을 패주시키고 60명의 수급을 베었다. 이로부터 두 곳의 왜적이 주둔한 채 모두 굳게 지키고 나오지 않으므로 정문부가 군사를 나누어 포위하였다. 함경도 길주에 주둔한 적이 성을 버리고 도망하였다. 이에 정문부가 경성으로 돌아와 의병의 파병을 그만두고 북쪽으로 육진을 순행하여 반민(叛民)을 찾아내어 베었으며, 번호(番胡 여진족)를 진정시키고 여러 보(堡)를 수복하여 장수를 파견해 두어 북변이 복구되었으니, 모두 정문부의 노력이었다. ­이상은 《선묘보감(宣廟寶鑑)》에 나온다.­만력(萬曆) 20년 임진년(1592, 선조25) 7월에 평청정(平淸正)이 함경북도에 침입하였는데, 병사(兵使) 한극함(韓克諴)의 군사가 패하여 사로잡혔다. 회령 사람 국경인이 배반하여 가등청정에게 내응하여 왕자 임해군(臨海君)6)과 순화군(順和君)7)을 잡았다. 경성 사람 국세필과 명천 사람 정말수가 각각 성에 점거하여 왜군을 맞아 항복하니, 함경도의 주군(州郡)이 모두 함락되었다.이보다 앞서 임해군과 순화군이 회령에 오자 김귀영(金貴榮)이 편의를 봐주었고 부사 이영(李瑛)을 뽑아 남병사(南兵使)로 삼았는데, 이영이 마천령(磨天嶺)에서 청정의 군사를 만나 군대가 궤멸되어 돌아갔다. 북병사 한극함이 육진의 군사를 거느리고 역습하여 해정창(海汀倉)에서 역습하였는데, 북도의 군사들은 말 타고 활쏘기를 잘하기에 평지에 나아가 좌우로 번갈아 나와 말을 달리며 활을 쏘아대자 적이 패하여 해정창 안으로 들어갔다. 이때 날이 이미 저물어 제군(諸軍)이 잠시 쉬고자 하였으나, 한극함이 들어주지 않고 군사를 지휘하여 포위하게 하였다. 적들은 창고의 가마니를 꺼내 줄지어 쌓아 성을 만들어 화살과 투석(投石)을 피하면서 그 안에서 조총(鳥銃)을 마구 쏘았다. 그런데 우리 관군이 즐비하게 늘어서서 굴비를 묶어 놓은 것처럼 중첩되었기에 탄환에 맞으면 반드시 관통하여 혹 적의 총알 하나에 3, 4명씩 쓰러졌다. 이에 부령 부사(富寧府使) 원희(元喜)가 죽고 군사가 마침내 궤멸되자, 한극함이 군사를 거두어 고개 위로 물려 진을 쳤다. 밤에 적이 잠행하여 관군을 에워싸고 풀숲 사이에 흩어져 복병하다가 아침에 짙은 안개 속에 섞여 사방에서 크게 외치면서 돌격하였다. 이에 관군이 놀라 흩어져 적이 없는 곳을 향하여 달아나다가 모두 진창에 빠지자, 적이 뒤쫓아 와서 베었으니 죽은 자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한극함은 경성(鏡城)으로 달아났는데 그곳의 토착민이 잡아서 적에게 항복하였다.이때 임해군과 순화군이 사나운 종들을 풀어서 민간을 어지럽히니 크게 인심을 잃었다. 23일 경진(庚辰)에 회령의 향리 국경인은 왜적이 마천령을 넘었다는 말을 듣고, 성안에서 반란을 주동하였다. 이때를 당하여 이영(李瑛)의 수하에 아직도 용맹한 군관 수십 명이 남아있자, 고령 첨사(高嶺僉使) 유경천(柳擎天)이 말하기를, "반란자들이 비록 많을지라도 난을 도모한 자는 몇 사람에 불과하니, 청컨대 관군을 거느리고 그들이 처음 모여 어수선한 틈을 타서 우두머리를 쳐서 베면 잔당은 저절로 평정될 것입니다."라고 하였는데, 이영이 두려워하고 당혹해하여 따르지 못했다. 이에 국경인 등이 마침내 관군을 모두 죽이고, 이영 및 임해군·순화군과 호종하는 신하 김귀영(金貴榮)과 황정욱(黃廷彧) 등 수십 명을 잡아 가등청정을 맞이하여 항복했는데, 유경천은 빠져나갔다.김귀영의 부인이 나이가 젊었기에 국경인이 핍박하여 겁탈하려하자, 부인이 힘써 저항하다가 병풍 틀에 나아가 스스로 목을 매어 죽었다. 경성의 관노 국세필과 명천의 시노(寺奴) 정말수도 모두 성에 점거하여 난을 일으켜 호응하고, 각 읍의 군민(軍民)들이 사는 곳에서 향응(響應)8)하여 모두 수령과 진장(鎭將)을 잡아서 배반하였다. 가등청정이 승승장구하여 두만강(豆滿江)에 이르러 육진의 성보(城堡)를 모두 빼앗고 국경인을 왜관(倭官)의 형판(刑判)으로, 국세필을 예백 겸 본도 병사(禮伯兼本道兵使)로, 정말수를 대장으로 삼아 관북(關北)을 나누어 통솔하게 하였으며, 자신의 장수인 직정(直正)·거도문(巨道文)·도관여문(都關汝文) 등을 길주에 주둔하게 하고, 자신은 군사를 이끌고 북청(北靑)으로 돌아갔다.이때 육진의 오랑캐들이 난을 틈타 모두 배반하여 야인과 군사를 연합하여 변경을 침범하여 약탈하였는데, 오직 온성(穩城)의 오랑캐만이 배반하지 않았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가상하게 여겼다. 함흥의 토병(土兵) 함덕후(咸德厚)가 흩어진 백성을 앞장서서 거느리고 서수라보(西水羅堡)를 지키고 있었는데, 오랑캐 기병들이 사방으로 들어와 포위하기에 함덕후가 모두 항거하여 물리치고, 바로 건장한 병사들을 거느리고 적의 빈틈을 타서 강을 건너 그 부락을 공격하여 깨뜨리고 돌아왔다.함경북도 평사(咸鏡北道評事) 정문부가 의병을 일으켜 경성(鏡城)을 수복하고 육진을 타일러서 항복시켰다.처음에 북계(北界)의 수장(守將)들이 모두 반민(叛民)에게 붙잡혀 왜장에게 넘어갔고, 국경인·국세필·정말수는 각각 큰 성을 점거하여 왜적과 군사를 연합하여 도 전체를 위협하였다. 그런데 평사 정문부가 홀로 몸을 빼내어 산중으로 달아나 숨었는데, 경성의 유생 이붕수(李鵬壽)9)와 최배천(崔配天)10)이 정문부를 만나 의병을 일으켜 적을 치자고 청하자 선뜻 의견을 따랐다. 이에 마침내 정문부를 추대하여 대장으로 삼고 토착민과 장사(壯士) 수백 명을 모집하니, 그곳의 소재한 수령과 변장(邊將)이 모두 합류하였다.이때 북쪽 오랑캐들이 변방을 자주 약탈하기에 국세필이 매우 걱정하고 두려워했는데, 최배천이 평소 국세필과 잘 지냈기에 혼자서 말을 타고 가서 거짓으로 투항하였다. 국세필의 어머니가 늘 국세필에게 경계하며 말하기를, "내가 보기에 최생(崔生)은 비범한 사람이니, 친하게 지내서는 안 된다."라고 하였는데, 국세필이 따르지 않았다. 최배천이 마침내 틈을 타서 국세필을 달래며 말하기를, "북쪽 오랑캐들가 쳐들어오면 참으로 대적하기가 어려울 것인데 정 평사(鄭評事)는 위엄과 명망이 있으니, 오히려 그를 맞아들여 함께 지킨다면 오랑캐는 걱정할 필요 없을 것이네."라고 하니, 국세필이 내심 그 말을 옳게 여겼다. 최배천이 돌아와 정문부에게 고하니, 정문부가 바로 격문(檄文)을 급히 보내어 국세필을 알아듣게 타일렀는데, 국세필이 여전히 의심하고 군사를 엄하게 하여 기다렸다.16일에 정문부가 군사를 거느리고 성 아래에 이르러 국세필과 서로 만나고 친히 타이르자, 국세필이 비로소 맞아들이고 또 병사(兵使)의 관인(官印)을 바쳤다. 정문부가 이내 영을 내려 말하기를, "대소의 병민(兵民)에게 예전의 죄를 묻지 말라." 하고, 그대로 국세필에게 그전처럼 군사를 거느리게 하였다. 장수들이 국세필을 베고자 하였으나 정문부는 따르지 않고 말하기를, "성급하니 좋은 계책이 아니다." 하고, 또 자기를 활로 쏘았던 반병(叛兵)을 기용하여 비장(裨將)으로 삼았다.국세필이 자기 심복에게 정문부를 좌우로 곁에서 모시며 동정을 몰래 살피게 하였다. 이에 정문부가 자기 부하들에게 사졸(士卒)들과 함께 성에 올라가 전술을 익히게 하고, 밤이 되어서야 파하였는데 날마다 모두 이와 같이 하였다. 왜인들은 그것을 모르고 가볍게 무장한 소수의 병력으로 갑자기 와서 성문을 두들겼는데, 정문부가 국세필에게 왜장을 유인하여 성문으로 들어오게 하여 사로잡았다. 안원 권관(安原權管) 강문우(姜文佑)에게 남은 왜병을 공격하여 패주시키고, 마침내 주군(州郡)에 격문을 돌려 반민(叛民)들을 타일러 항복하게 하였다. 육진에서는 정문부가 이미 반란자11)들을 풀어주었다는 말을 듣고 차례대로 항복하고 장사와 호걸들이 다투어 와서 모병에 응하니, 이 때문에 변방의 성과 보(堡)가 이에 모두 수복되고 북도의 인심이 점차 안정되었다.회령(會寧) 사람들이 국경인을 공격하여 베었다.정문부가 회령에 격문을 돌려 국경인에게 와서 항복하라고 타일렀으나 따르지 않고, 길주(吉州)에 주둔하고 있는 왜장과 함께 경성을 협공하였다. 회령 사람 오윤적(吳允迪) 등이 향교에서 무리를 모으고 국경인을 쳐서 정문부와 호응하기를 도모하니, 국경인이 급히 향교를 포위하고 수창(首倡)한 자를 나오라고 위협하기에 오윤적이 몸을 빼서 자수하여 나갔다. 국경인이 그를 죽이려는데, 부(府)의 아전 신세걸(申世傑)이 국경인의 요각(鐃角)을 몰래 훔쳐 객사 문 박에서 불자, 반병(叛兵)들이 국경인이 명령을 내린 것으로 의심하고 일제히 모였는데 마치 수풀과 같았다. 신세걸이 그대로 그들을 거느리고 명령을 따르지 않은 자를 참수하였으며, 군중을 부추겨서 앞으로 나아가 국경인에게 이르기를, "성안의 병사들이 이미 나에게 모두 귀속되었으니, 네가 오윤적을 풀어주면 나도 마땅히 병사들을 해산할 것이다."라고 하니, 국경인이 놀라고 두려워하여 따랐다. 그리고 마침내 국경인을 쳐서 참수하고 그 머리를 경성에 전했으며, 오윤적 등도 군사를 거느리고 계속 나아갔다.정문부가 정말수와 국세필을 사로잡고, 길주에서 왜인을 크게 패배시켜 왜장 직정(直正)과 도관여문(都關汝文)을 참수했다.명천 사람들이 또 자제들을 단결하여 정말수를 공격하여 정문부에게 응하려 했는데, 정말수에게 패하였다. 이에 정문부가 오촌 권관(吾村權管) 구황(具滉) 및 강문우(姜文佑)를 몰래 보내어 기병 60여 명을 거느리고 밤낮으로 달려가 갑자기 명천으로 돌입하자, 정말수가 깜짝 놀라서 성을 버리고 달아났는데 관군이 추격하여 사로잡아 참수하였다. 이에 영북(嶺北)의 여러 보(堡)가 모두 수복되고 오직 길주만이 왜적에게 점거되었으며, 군민(軍民)들도 모두 안정되었고 군사가 3천여 명에 이르렀다.사람들이 모두 적을 쳐서 스스로 목숨을 바치려고 하자, 정문부가 바로 대장의 깃발을 세우고 남문의 망루에 올라 장수들을 불러들여 군례를 행하게 하였다. 장수들이 일제히 청하여 말하기를, "지금 왜적을 치려고 하는데, 나라의 반적(叛賊)이 아직도 군중(軍中)에 있으니 먼저 치지 않을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마침내 좌중에서 국세필과 그의 잔당 13명을 잡아 참수하여 군중에게 조리돌리며 말하기를, "맨 처음 반역을 창도한 이는 이 무리뿐이고 이외에는 무관하다."라고 하였으니, 이는 정문부의 본래 계략이었고 군성(軍聲)이 마침내 진작되고 사기는 10배 높아졌다.종성부사 정현룡(鄭見龍)12)이 경성을 보전하면서 틈을 엿보고자 하였다. 이에 정문부가 말하기를, "본래 의병을 일으킨 것은 나라를 위할 뿐입니다. 그런데 지금 스스로 지키기만 하고 병사를 진격시켜 적을 치지 않으니, 반란자들의 하는 짓을 본받고자 하십니까? 청컨대 사람들 의견을 들어보십시오."라고 하였다. 날이 밝자 군중을 남문 밖에 모아 놓고 두 사람의 논쟁 중에 누가 옳은지를 묻자, 사람들이 모두 정문부의 말이 옳다고 여겼다.이때 왜장 직정·거도문(巨道文)·도관여문 등이 길주에 주둔하여 점거하고, 또 영동(嶺東 마천령(磨天嶺) 동쪽)에 군사를 배치하고 목책(木柵)을 설치해서 남북의 길을 통하여 왕래하면서 불을 지르고 약탈하였다. 정미일(丁未日)에 정문부가 명천으로 나아가 진을 치고, 고령 첨사(高嶺僉使) 유경천(柳擎天)·방원 만호(防垣萬戶) 한인제(韓仁濟)·종사관 원충서(元忠恕)를 몰래 보내어 길주성 외곽 세 곳에 복병을 배치하여 엿보게 하였다.병진일(丙辰日) 그믐날 새벽에 적이 군사 600명을 출동시켜 가파(加坡)에 불을 지르고 약탈했는데, 해가 지자 약탈한 것을 몰고 돌아갔다. 이에 원충서가 부하 3백 명으로 먼저 달려가 이들을 요격하여 앞에서 길라잡이 왜적 2명을 참수하자 적이 놀라서 달아났는데, 마침 큰 진영에 있는 왜적이 성안에서 계속 지원하기에 원충서가 산세가 험준한 곳으로 물려서 지켰다. 그리고 한인제가 구황과 강문우 등 300여 명의 기병을 이끌고 달려와서 원충서와 군사를 연합하여 크게 싸웠다. 직정과 도관여문이 용감한 선봉대 400명으로 먼저 올라오기에 관군은 돌격 기병으로 출몰하면서 공격하였는데, 전투가 날이 어두워지자 적의 앞뒤 진(陣)이 모두 무너졌다. 유경천이 또 병력을 보내서 적의 퇴로를 끊자, 관군이 마침내 양면에서 협공하여 크게 패배시켰다. 직정과 도관여문 등 다섯 장수를 참수하였으며, 갑옷을 입은 병사 800명의 수급과 군장(軍裝)・기계(器械) 천여 점을 노획했고, 약탈한 남녀를 모두 빼앗아 돌아왔다.12월에 함경감사 윤탁연(尹卓然)13)이 정문부의 군사를 빼앗고, 종성부사 정현룡으로 북병장(北兵將)을 대신 삼았다.정문부가 승세를 타고 길주(吉州)로 진격하여 공격한 지 며칠 동안 이기지 못하였는데, 영동(嶺東)의 적이 또 길주에 이르자 정문부가 요격(邀擊)하여 쌍개포(雙介浦)에서 패배시켰다. 군사를 옮겨 영동의 목책을 공격했지만 또 이기지 못하여 마침내 길주 성 아래 줄지어 진을 치고, 왜적들이 약탈할 길을 끊고 또 군량을 원조받을 길을 막아서 지구전으로 곤궁하게 하였다. 처음에 재신(宰臣) 윤탁연이 왕자를 모시고 북변으로 들어와 갑산(甲山)으로 방향을 틀어 별해보(別害堡)에 이르렀는데, 행조(行朝)에서 그대로 윤탁연을 감사로 삼았다. 이때 와서 윤탁연이 정문부의 성공을 듣고 질투하여 그 실상과 정반대로 행조에 아뢰었다. 또 정문부의 군사를 빼앗아 반드시 군법으로 정문부를 얽어매어 죽이고자 장사(將士)들을 고문하자, 군중(軍中)에서 몹시 분하게 여겨 대부분 흩어져 떠나버렸다. 정문부가 마침내 병권을 내놓고 북쪽으로 육진(六鎭)을 순찰하며 군민(軍民)을 불러 모으고 장수를 파견해 두었는데, 오랑캐들이 자주 변경을 약탈하기에 정문부가 복병(伏兵)을 배치하여 그들을 패주시켰다.윤탁연이 다시 정문부를 북병장으로 삼자 가등청정과 모리길성(毛利吉盛 모리 요시나리)과 중륭(重隆 시게타카)이 군사를 거두어 경기(京畿)로 돌아갔다.처음에 윤탁연이 정문부의 군사를 빼앗고 또 장수를 자주 바꾸어 작전을 많이 그르치자, 공을 세우지 못할까 두려워 다시 정문부를 기용하여 장수로 삼았다. 정문부는 이에 군사를 돌려 사졸들을 먹이고, 구황(具滉)으로 하여금 기병 200명을 선발하여 단천 군수(端川郡守) 강찬(姜燦)14)에게 가서 돕게 하니, 적 200명을 성 아래에서 죽이고 돌아왔다. 원충서(元忠恕)도 적장을 길주성 아래에서 공격하여 베었다. 이때 평청정은 소서행장(小西行長 고니시 유키나가)이 패하여 경기(京畿)로 들어갔다15)는 말을 듣고 철수하여 돌아갈 것을 도모하려고 했는데, 길주의 적이 한창 정문부에게 막혀 있어서 스스로 빠져나올 수가 없었다. 마침내 2만 명으로 마천령을 넘어서 영동의 적과 군사를 합하여 와서 구원하였다. 이에 정문부가 정탐하여 자세히 알고 그의 군사 3천여 명이 먼저 임명(臨溟)을 점거하고 매복하여 기다리게 하였다.계미일(癸未日) 동틀 무렵에 적병이 들판을 뒤덮으며 오다가 정문부의 군사가 적은 것을 보고 돌아보지 않고 지나가자, 정문부가 복병을 보내 그 후미를 끊고 날랜 기병을 풀어 좌우로 에워싸며, 말달리고 활을 쏘아 살상한 것이 매우 많아 유혈이 들을 뒤덮었다. 별장 이붕수가 왜장 한 명을 쏘아 죽이고, 즉시 몸을 빼어 깃발 앞으로 나가다가 갑자기 탄환에 맞아 죽었다. 주을온 만호(朱乙溫萬戶) 이희당(李希唐)도 힘껏 싸우다가 탄환에 맞아 죽었다. 청정은 혈전(血戰)을 벌여 퇴로를 열고 관군과 함께 60여 리를 옮기며 싸우다가 날이 저물어서야 성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이때 도로가 아직 막혀 양서(兩西 황해도와 평안도)의 소식이 막연하여 통하지 못했는데, 정문부 등은 문득 적의 세력이 성대한 것을 보고 저들이 재차 쳐들어올까 의심하여 물러가 성보(城堡)를 지키면서 적을 기다리고자 하였다. 북우후(北虞侯) 한인제(韓仁濟)가 말하기를, "적이 돌아갈 뜻이 있는 듯하니 군사를 주둔시키고 때를 기다리는 것만 같지 못합니다."라고 하였는데, 정문부가 따르지 않고 물러나 명천(明川)에 진을 치고 머물렀다.한인제가 염탐하여 알아보니, 이날 밤에 가등청정은 시체를 쌓아 불태우고 성안의 군사를 몰래 거두어 밤을 틈타 달아났는데, 밥을 지어 먹을 겨를도 없이 도망갔다. 정문부가 급히 와서 한인제를 보고 치사하며 말하기를, "그대가 적군의 정세를 헤아리는 것이 어쩌면 그리도 신묘한가."라고 하였다. 한인제가 속히 진군할 것을 청했는데 정문부는 금방 오랑캐가 쳐들어온다는 경보가 있었기에 허락하지 않고, 한인제를 보내어 오랑캐를 쳐서 물리치게 하였다. 가등청정이 마침내 연도(沿道)의 여러 주둔군을 모두 거두었는데, 함경남도의 군사들이 절멸(絶滅)시킬까 두려워하여 감히 함관령(咸關嶺)을 넘지 못하고 바닷가를 따라서 달아났다. 이유일(李惟一)이 군사를 정돈하여 추격하려고 하였는데, 성윤문(成允文)16)이 허락하지 않고 그 군사를 빼앗았다.청정은 또 모리길성(毛利吉盛)·중륭(重隆) 등과 함께 강원도의 여러 주둔군을 모두 거두어 함께 경성(京城)에 모였다. 한극함(韓克諴)은 구금되었다가 양주(楊州)에 와서 도망쳐 돌아왔는데, 뒤에 조정에서는 적에게 아첨하여 몸을 빼냈다고 하여 마침내 사사(賜死)하고 그 아들까지 아울러 죽였다. 한인제는 웅위(雄偉)하고 원대한 생각이 있어 사람들이 장수의 재목이라고 일컬었는데, 조정에서는 당하관 우후(堂下官虞侯)의 지위와 명망이 본디 비천해서 오랑캐들에게 존중받을 수 없다고 여겨, 남우후(南虞侯) 한희길(韓希吉)과 직위를 바꾸어 차임하였고, 이유일은 군공으로 겨우 보을하 첨사(甫乙下僉使)로 삼았다. 이러한 명이 내려지자 군사들은 모두 해체되었고, 오직 유응수(柳應秀)만이 뒤에 도신 이희득(李希得)의 장계로 인하여 삼수 군수(三水郡守)에 제수되었다가 이윽고 다시 가선대부에 올랐으며, 구황(具滉)은 북변의 장수 중에서 가장 날래고 용감하다고 알려졌다. ­이상은 《선묘중흥지(宣廟中興誌)에서 나왔다.》­북평사 정문부가 의병을 일으켜 길주의 적을 토벌하여 크게 깨뜨렸다. 경성(鏡城)의 사인(士人) 등이 함께 정문부를 추대하여 의병을 일으켜, 먼저 북쪽 백성 가운데 반역하여 왜적에게 붙은 자와 국세필(鞠世弼) 등 13명을 토벌하여 죽이고, 왜병을 길주에서 격파하여 820여 명의 수급을 베니, 적이 모두 군대를 거두어 안변(安邊)으로 돌아갔고 관북이 모두 평정되었다. ­《소대연기(昭代年紀)에서 나왔다.》­북방의 목사와 군수들이 탐욕스럽고 방종하여 법도를 어기고 군사 대비가 해이했기에 다시 병마 평사를 설치하되, 반드시 전랑(銓郞) 및 옥당(玉堂)의 관원으로 차출하여 보내 통제하는 자리로 삼도록 했기에 평사 정문부가 임진년의 난을 당하여 북방에서 크게 공을 세웠다. 특명으로 이공(貳公 찬성(贊成))으로 월등하게 추증(追贈)하고 함께 일한 자들도 모두 추포(追褒)하도록 명하니, 그 일대가 고무되었다. ­〈현종대왕 행장(顯宗大王行狀)〉에서 나왔다.­ 倭將淸正入北界, 會寧人叛, 執兩王子、諸宰臣迎降, 關南北皆陷于賊。咸鏡北道評事鄭文孚, 起兵復鏡城。時北界守將, 皆被土民執與倭將, 逃出者十無一二。評事鄭文孚, 嘗授書校生, 故變作之後, 弟子數人, 庇護得脫。校生及武士有識者, 聞文孚所在, 皆就之, 遂推文孚爲義兵將, 團集土兵、壯士數百人, 鏡城人前萬戶姜文佑, 領率居前, 卽抵府城。鞠世弼方稱禮1)伯, 莅兵使印, 治府自若, 猝聞兵至, 閉門乘城拒之。文佑等脅以禍福, 世弼知不敵, 開門迎入納印。文孚下令曰: "大小兵民, 勿問舊犯。" 仍令世弼領兵如故。遂傳檄南北州堡, 合兵三千人, 又抄精猛突騎爲先鋒。吉州倭賊聞之, 遣兵百餘人哨探, 至城西, 姜文佑等, 開門出擊, 斬數十人, 餘賊遁。北道評事鄭文孚, 大敗賊兵于吉州, 圍其城。文孚安集旣定, 軍情皆欲擊賊自效。乃卜日出兵將發, 壯士齊請曰: "將討倭賊, 而國之叛賊, 尙在陳中, 不可不先討之。" 遂執鞠世弼等十三人, 斬以徇衆曰: "當初首倡止此輩, 此外無與也, 府人可勿疑。" 衆皆歡悅, 此文孚本謀也。復檄通六鎭, 誅首倡亂者, 會寧儒生申世俊, 起兵斬鞠景仁, 餘鎭皆復, 叛民或誅或逃。文孚進兵古站驛, 遣兵誅明川叛賊鄭末秀, 復其城。吉州賊遂四出焚掠, 一枝軍掠明川海倉, 文孚進兵吉州南村, 邀其歸路, 賊兵大敗, 斬六百級。賊一屯在磨天嶺下嶺東館柵城, 焚掠臨溟村, 文孚回兵擊之, 戰于雙浦, 賊兵敗走, 斬六十級。自是兩賊屯, 皆堅守不出, 文孚分兵圍之。咸鏡道吉州屯賊, 拔城遁。鄭文孚還鏡城, 罷遣義兵, 北巡六鎭, 搜誅叛民, 撫定番胡, 收復諸堡, 派置將領, 北邊復舊, 皆文孚力也。【以上出《宣廟寶鑑》。】萬曆二十年壬辰七月, 平淸正入咸鏡北道, 兵使韓克諴軍敗被擒。會寧人鞠景仁, 叛應淸正, 執王子臨海君、順和君。鏡城人鞠世弼、明川人鄭末秀, 各據城迎降, 咸鏡道州郡皆陷。先是臨海君、順和君來往會寧, 金貴榮便宜, 擢府使李瑛爲南兵使, 瑛遇淸正兵於磨天嶺, 衆潰而還。北兵使韓克諴, 率六鎭兵, 逆戰于海汀倉, 北兵善騎射, 就平地上, 左右迭出馳射, 賊敗入倉中。時日已暮, 諸軍欲少休, 克諴不聽, 揮兵圍之。賊出倉中穀石, 列置爲城以避矢石, 從其內亂發鳥銃, 官軍櫛比而立, 重疊如束, 中必貫穿, 或一丸斃三四人。富寧府使元喜死之, 軍遂潰, 克諴收兵, 退屯嶺上。夜賊潛行環官軍, 散伏草間, 朝乘大霧, 四面大呼突起, 官軍驚散, 向無賊處奔走, 悉陷泥淖, 賊追至芟刈, 死者無數。克諴走鏡城, 土民執以降賊。時臨海君、順和君, 縱豪悍奴僕, 擾民間, 大失人心。二十三日庚辰, 會寧鄕吏鞠景仁, 聞賊踰磨天嶺, 倡亂城中。當是時, 李瑛手下, 尙有壯勇軍官數十人, 高嶺僉使柳擎天曰: "叛徒雖衆, 謀亂者不過數人, 請率官軍, 乘其初集, 擊斬渠首, 則餘黨自定矣。" 瑛惶惑, 不能從。景仁等遂盡殺官軍, 執瑛及臨海君、順和君、從臣金貴榮、黃廷彧等數十人, 迎降于淸正, 擎天逸去。金貴榮夫人年少, 景仁欲逼辱之, 夫人力拒之, 就屛風機, 自縊而死。鏡城官奴鞠世弼、明川寺奴鄭末秀, 亦皆據城作亂以應之, 各邑軍民所在響應, 皆執守令、鎭將以叛。淸正長驅, 至豆滿江, 盡取六鎭城堡, 以鞠景仁爲倭官刑判, 鞠世弼爲禮2)伯兼本道兵使, 鄭末秀爲大將, 分統關北, 使其將直正、巨道文、都關汝文等屯吉州, 自引兵還出北靑。時六鎭蕃胡乘亂皆叛, 與野人連兵, 寇掠邊上, 惟穩城胡不叛, 人皆嘉之。咸興土兵咸德厚, 倡率散民, 獨保西水羅堡, 虜騎四入圍之, 德厚皆拒却之, 乃健率兒, 乘虛渡江, 攻破其部落而還。咸鏡北道評事鄭文孚, 起兵復鏡城, 招降六鎭。初, 北界守將, 皆被叛民執與倭將, 鞠景仁、鞠世弼、鄭末秀各據大城, 與倭連兵威脅一道。評事鄭文孚獨脫身, 走匿於山中, 鏡城儒生李鵬壽、崔配天見文孚, 請起兵擊賊, 頓然從之, 遂推文孚爲將, 團集土民、壯士數百人, 所在守令、邊將皆附之。是時北虜屢掠邊上, 鞠世弼頗憂懼, 崔配天素與世弼善, 單騎佯投之。世弼之母, 每戒世弼曰: "吾觀崔生非凡人, 不可狎也。" 世弼不能從。配天遂乘間說世弼曰: "北虜若至, 誠難與敵, 鄭評事有威望, 尙能延入共守, 虜不足憂矣。" 世弼心然之。配天歸告文孚, 文孚卽馳檄諭世弼, 世弼猶疑之, 嚴兵以待。十六日, 文孚率兵至城下, 與世弼相見, 親自說諭, 世弼始迎入, 又納兵使印。文孚乃下令曰: "大小兵民, 勿問舊犯。" 仍令世弼領兵如故。諸將欲斬世弼, 文孚不從曰: "遽也, 非計也。" 又用叛兵嘗射己者爲裨將。世弼使其腹心夾侍文孚左右, 伺察動靜, 文孚乃使其屬幷士卒, 登城習戰, 至夜乃罷, 逐日皆如是。倭人未知, 以輕兵奄至叩城, 文孚令世弼誘倭將入門而擒之, 令安原權管姜文佑擊走餘兵, 遂移檄州郡, 招降叛民。六鎭聞文孚已釋反側, 次第送款, 將士、豪傑爭來應募, 緣邊城堡於是悉復, 北道人心稍定。會寧人擊斬鞠景仁。鄭文孚移檄會寧, 諭景仁來降不從, 與吉州屯倭將協攻鏡城。會寧人吳允迪等, 聚徒鄕校, 謀伐景仁以應文孚, 景仁急圍鄕校, 脅出首倡, 允迪挺身自首而出。景仁將殺之, 府吏申世傑, 潛偸景仁鐃角, 吹之客舍門外, 叛兵疑景仁出令, 齊會若林。世傑仍領之, 斬其不從令者, 鼓衆而前謂景仁曰: "城中兵已盡歸我, 爾給吳允迪, 我當罷兵。" 景仁駭懼從之。遂擊景仁斬之, 傳首鏡城, 允迪等又領兵繼赴。鄭文孚擒鄭末秀、鞠世弼, 大敗倭人於吉州, 斬其將直正、都關汝文。明川人又團結子弟, 攻鄭末秀以應文孚, 爲末秀所敗, 文孚潛遣吾村權管具滉及姜文佑, 率六十餘騎, 晝夜幷行, 猝入明川, 末秀惶駭, 棄城走, 官軍追擒斬之。於是嶺北諸堡盡復, 惟吉州爲倭所據, 軍民亦皆安集, 兵至三千餘人。衆咸欲擊賊自效, 文孚乃建大將旗, 上南門樓, 召諸將入行禮, 諸將齊請曰: "今將討倭賊, 而國之叛賊, 尙在軍中, 不可不先討之。" 遂於座中, 執鞠世弼幷其黨十三人, 斬以徇衆曰: "當初首倡止此輩, 此外無與也。" 此文孚本謀也, 軍聲遂振, 士氣十倍。鍾城府使鄭見龍, 欲保鏡城以俟釁, 文孚曰: "本興義兵, 爲國耳。今但自守, 不進兵擊賊, 欲效叛徒爲耶? 請聽于輿人。" 詰朝集衆南門外, 諭以兩人所爭孰可, 衆皆是文孚。是時倭將直正、巨道文、都關汝文等, 屯據吉州, 又置兵設柵於嶺東以通南北路, 往來焚掠。丁未文孚進屯明川, 潛遣高嶺僉使柳擎天、防垣萬戶韓仁濟、從事官元忠恕, 設三伏於吉州城外以覘之。丙辰晦平明, 賊出兵六百, 焚掠加坡, 日晡驅所掠而還。元忠恕以所部三百先馳邀之, 斬先導兩賊, 賊驚北, 會賊大陣, 自城中繼援, 忠恕退保山險。韓仁濟以具滉、姜文佑等三百餘騎馳至, 與忠恕連兵大戰。直正、都關汝文以前鋒銳卒四百先登, 官軍以突騎出沒擊之, 戰至日昏, 賊前後陣皆潰。柳擎天又遣兵截其歸路, 官軍遂兩面夾擊大敗之, 斬直正、都關汝文等五將, 獲甲首八百、軍裝、器械千餘計, 盡奪所掠男女而還。十二月, 咸鏡監司尹卓然, 奪鄭文孚兵, 以鍾城府使鄭見龍代爲北兵將。文孚乘勝進攻吉州, 數日不克, 嶺東賊又至吉州, 文孚邀擊, 雙介浦敗之。移兵攻嶺東柵, 又不克, 遂列屯吉州城下, 絶其摽掠, 阻其粮援, 以持久困之。初, 宰臣尹卓然陪王子入北, 轉至甲山, 至別害堡, 行朝仍以卓然爲監司。至是卓然聞文孚成功嫉之, 反其實以聞行在, 又奪文孚兵, 必欲以軍法搆殺文孚, 榜掠將士, 軍中憤惋, 多散去。文孚遂釋兵, 北巡六鎭, 招集軍民, 派置將領, 蕃胡屢掠邊上, 文孚設伏兵走之。尹卓然復以鄭文孚爲北兵將, 平淸正、吉盛、重隆撤還京畿。初, 尹卓然奪鄭文孚兵, 又數易將帥, 多誤戰機, 懼不能成功, 復起文孚爲將。文孚乃還軍饗士卒, 使具滉簡二百騎, 往助端川郡守姜燦, 殺賊二百於城下而還。元忠恕又擊斬賊將於吉州城下。是時平淸正, 聞行長敗入京畿, 將謀撤還, 而吉州賊方爲文孚所扼, 不能自拔, 遂以二萬人踰磨天嶺, 與嶺東賊合兵來援。文孚諜知之悉, 其兵三千餘人先據臨溟, 伏以待之。癸未黎明, 賊兵蔽野而至, 見文孚兵少, 不顧而過, 文孚發伏兵截其尾, 自縱輕騎繞左右, 馳射殺傷甚衆, 流血被野。別將李鵬壽射一倭將殪之, 卽挺身出旗前, 忽中丸而死, 朱乙溫萬戶李希唐亦力戰, 中丸而死。淸正血戰開路, 與官軍轉鬪六十餘里, 日暮得入城。時道路尙阻, 兩西聲息邈然不通, 文孚等, 忽見賊勢浩大, 疑其再逞, 欲退守城堡以待之。北虞侯韓仁濟曰: "賊似有歸意, 莫若屯兵俟。" 文孚不從, 退屯明川而留。仁濟詗知之, 是夜淸正積屍焚之, 而潛撤城中兵, 乘夜跳城, 不暇炊食而走。文孚馳來, 見仁濟謝曰: "君之料賊, 何其神也?" 仁濟請亟進兵, 文孚以方有虜警不許, 而遣仁濟擊虜却之。淸正遂盡撤沿道諸屯, 恐南道兵勦絶, 不敢踰咸關嶺, 沿海而走。李惟一勒兵將追之, 成允文不許而奪其兵。淸正又與吉盛、重隆等, 盡掇江原道諸屯, 俱會于京城。韓克諴被拘, 至楊州逃歸, 後朝廷以爲媚賊脫身, 遂賜死而幷殺其子。韓仁濟雄偉有遠慮, 人稱有將帥材, 朝廷以爲堂下虞侯地望素卑, 非所以見重於胡人也, 以南虞侯韓希吉換差, 李惟一以功, 僅爲甫乙下僉使。命下, 士皆解體, 惟柳應秀, 後因道臣李希得狀啓, 得拜三水郡守, 俄又陞嘉善, 具滉北將中, 最以驍勇著。【以上出《宣廟中興誌》。】北評事鄭文孚, 起義兵討吉州賊, 大破之。鏡城士人等, 共推文孚起義兵, 先討北民之叛附倭賊者、鞠世弼等十三人誅之, 擊破倭兵于吉州, 斬八百二十餘級, 賊皆捲還于安邊, 關北悉平。【出《昭代年紀》。】北鄙牧守, 貪縱違度, 戎備解弛, 復設兵馬評事, 必以銓郞及玉堂官差送, 爲彈壓之地, 故評事鄭文孚, 當壬辰亂, 大有功於北方。特命超贈貳公, 同事者悉令追褒, 一方聳動。【出《顯宗大王行狀》。】 왜장(倭將)……항복하자 선조 25년(1592) 7월에 임해군(臨海君)과 순화군(順和君) 및 그들을 수행한 김귀영(金貴榮), 황정욱(黃廷彧), 황혁(黃赫) 등은 가등청정에게 쫓겨 회령으로 들어갔는데, 회령의 아전으로 있던 국경인(鞠景仁)이 반란을 일으켜 이들을 붙잡아 왜적에게 넘기고 항복하였다. 《宣祖修正實錄 25年 7月 1日》 《燃藜室記述 卷15 北道之陷鄭文孚收復》 병마 평사(兵馬評事) :병마 도사(兵馬都使)라고도 한다. 평안도·함경도에만 두는 병사(兵使)의 막료이다. 군기(軍機) 및 개시(開市)에 관한 일을 맡아보는 무관의 정6품 벼슬이다. 강문우(姜文佑) 본관은 진주(晉州)이고 자는 여익(汝翼)이다. 화담 서경덕의 문인이며 1558년(명종13) 별시 병과에 급제하여 만호(萬戶)를 거쳐 교서관 교리(校書館校理)를 지냈다. 국세필(鞠世弼) 경성부의 아전으로, 국경인의 숙부이다. 1592년 임진왜란 때 왜장 가등청정이 함경도로 침입하여 회령 가까이에 이르자, 국경인·정말수(鄭末守) 등과 함께 부민을 선동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국경인(鞠敬仁) ?~1592. 본래 전주에 살다가 죄를 지어 회령으로 유배되었다. 뒤에 회령부의 아전으로 들어가 재산을 모았는데, 조정에 대해서 원한이 많았다. 1592년 임진왜란 때 왜장 가등청정 함경도로 침입하자 경성부의 아전으로 있던 숙부 국세필, 명천 아전 정말수 등과 함께 부민을 선동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임해군(臨海君) 이진(李珒, 1574~1609)으로, 선조의 첫째 서자이다. 성질이 난폭하여 세자에 책봉되지 못했다. 1592년 임진왜란 때 근왕병을 모집하러 갔는데, 함경도 회령에서 국경인에 의해 가등청정에게 포로가 되었다가 협상을 통해 이듬해 풀려났다. 시호는 정민(貞愍)이다. 순화군(順和君) ?~1607. 선조의 아들로 순빈(順嬪) 김씨 소생이다. 임진왜란 때 함경도에서 민폐를 많이 끼쳐 백성들의 원성을 샀다. 국경인에 의해 왜군에 넘겨졌다가 이듬해 풀려났다. 시호는 희민(僖敏)이다. 향응(響應) 어떤 사람의 주창(主唱)에 따라 그와 행동을 같이 취하는 것을 말한다. 이붕수(李鵬壽) 1548~1593. 본관은 공주(公州), 자는 중항(仲恒)이다. 정문부의 별장으로 많은 전공을 세웠다. 길주 장평(長坪), 쌍포(雙浦)에서 대승을 거두었으며, 1593년(선조26) 1월 함경북도 단천(端川) 전투에서 승리하였다. 왜적이 후퇴하자 이를 추격하여 싸우다가 적의 탄환에 맞아 전사하였다. 경성의 창렬사(彰烈祠)에 배향되었다. 최배천(崔配天) 본관은 강릉(江陵)이고 자는 중립(仲立)이다. 판관(判官)에 증직되었으며, 사복시 정(司僕寺正)에 추증되었다. 반란자 원문의 '반측(反側)'은 두 마음을 품고 난을 일으킨 자를 가리킨다. 정현룡(鄭見龍) 1547~1600. 본관은 동래(東萊)이고 자는 운경(雲卿)이다. 1593년(선조26) 종성부사로 역임하면서 경원 부사 오응태(吳應台)‧고령 첨사 유경천(柳擎天)과 함께 길주에 머무르고 있던 왜적을 토벌하여 잡았고, 곧바로 영동(嶺東)으로 이동하여 2백여 명의 왜병을 쫓아냈다. 1595년 함경북도 병마절도사 재임 중에 사망하였다. 윤탁연(尹卓然) 1538~1594. 본관은 칠원(漆原), 자는 상중(尙中), 호는 중호(重湖)이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왕을 모시고 북으로 가던 도중 검찰사(檢察使)에 임명되었다. 함경도에 피난했던 임해군과 순화군이 적의 포로가 되자 왕명으로 함경도 순찰사가 되어 의병을 모집하고 방어할 계획을 세우던 중 객사하였다. 저서에 《계사일록(癸巳日錄)》이 있다. 시호는 헌민(憲敏)이다. 강찬(姜燦) 1557~1603. 본관은 금천(衿川), 자는 덕휘(德輝), 호는 동곽(東郭)이다. 고려 시대 문하시중을 지낸 강감찬(姜邯贊)의 후손이다. 임진왜란으로 두 왕자가 포로가 되자 의병을 모아 싸우고, 행조(行朝)에 결사대를 파견하여 회령사태를 보고했다. 봉산(鳳山)의 충렬사(忠烈祠)에 배향되었다. 소서행장(小西行長)……들어갔다 1593년(선조26) 1월 6일부터 8일까지 3일간의 평양성 전투에서 소서행장이 이끄는 부대가 이여송(李如松)이 이끄는 명군과 조선군에게 패배하여 한성으로 후퇴한 것을 가리킨다. 《宣祖實錄 26年 1月 6日·7日·8日·9日》 성윤문(成允文) 본관은 창녕(昌寧)이다. 1591년(선조24) 갑산 부사(甲山府使)로 부임하여 재직하였다. 이듬해 임진왜란을 당하여 함경남도 병마절도사 이영(李瑛)이 임해군·순화군 두 왕자와 함께 왜적에게 잡혀가자 그 후임이 되었다. 그러나 부하 장수의 전공을 시기한 나머지 과감한 공격을 제지하여 큰 전과를 올리지 못하였다. 禮 대본에는 '體'로 되어 있는데, 《선조수정실록(宣祖修正實錄)》 25년 9월 1일 기사에 근거하여 고쳤다. 禮 대본에는 '體'로 되어 있는데, 《선조수정실록》 25년 9월 1일 기사에 근거하여 고쳤다.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제가의 기술 諸家記述 우리나라의 주군(州郡)이 임진왜란 초기에 힘이 모자라 함락되기도 하고, 패주하고 궤멸되어 지키지 못한 일은 있었지만, 한 사람도 적에게 항복하여 붙은 자는 없었다. 그런데 오직 회령의 토병(土兵) 국경인(鞠景仁)만이 반역하여 부성(府城)을 점거하고 두 왕자와 재신 김귀영(金貴榮)·황정욱(黃廷彧), 북병사 한극함(韓克諴), 회령 부사 이영(李瑛) 등 수십 명을 잡아 적을 맞이하여 항복하였다. 왜적은 국경인을 회령 부사로, 국세필을 경성 부사로 삼고 길주(吉州)로 물러가 점거하였다. 이에 평사 정문부가 의병을 일으켜 국경인을 토벌하여 죽인 뒤에야 비로소 평정되었으니, 강하고 사나워 제어하기 어려운 북도의 인심을 알 수 있다. ­《지봉유설(芝峯類說)》­공이 북쪽에서 돌아올 때 회양(淮陽) 수령에게 술을 청하자, 수령이 몇 잔의 술을 보내오기에 공이 연구(聯句) 한 수를 지어 "회양은 박하지 않은데 인정은 박하고, 철령은 높지 않은데 술값은 높다.[淮陽不薄人情薄, 鐵嶺非高酒價高.]"라고 하였다. ­상동(上同)­임진년에 여러 도에서 의병을 일으켜 적을 토벌한 자가 매우 많지만, 함경북도에서는 평사 정문부와 훈융 첨사(訓戎僉使) 고경민(高敬民)의 공이 가장 많다. ­서애(西崖 유성룡(柳成龍))의 《징비록(懲毖錄)》­어느 날 차오산(車五山 차천로(車天輅))이 공에게 말하기를, "내가 우연히 '바람은 발 하나 없이 천 리를 간다.[風無一足行千里]'라는 구절을 얻었는데, 여러 날 동안 깊이 생각해도 그 대구(對句)를 완성하지 못했습니다."라고 하였다. 공이 즉시 소리에 응하여 대답하기를, "어째서 '달은 외바퀴로 하늘을 돈다.[月有孤輪轉九天]'라고 말하지 않았습니까?"라고 하니, 오산이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혀를 내두르며 거의 내려가 절을 하려고 하였다. ­《어우야담(於于野談)》­공이 전주 부윤(全州府尹)이 되었을 때17) 간사한 거간꾼이 훈귀(勳貴 공훈을 세운 귀족)와 교제하여 공금을 많이 빌려 쓰고 오래도록 갚지 않았다. 이에 공이 엄하게 가두어 추징하자, 박정(朴炡)이 간사한 거간꾼을 위하여 풀어달라는 편지를 열흘에 3번이나 공에게 보냈다. 그러나 공은 끝내 들어주지 않고 더욱 독촉하여 여러 해 포흠(逋欠)18)한 것을 열흘이나 한 달 사이에 모두 거두어들이자, 박정은 이로 말미암아 크게 원한을 품었다.19) 공이 전주에서 관을 받들고 돌아가자20) 간사한 거간꾼이 때를 틈타 원한을 갚고자 하였는데, 판관 김영구(金永耈)가 이를 듣고 이졸(吏卒)을 많이 동원하여 직접 호상(護喪)하여 공주읍(公州邑)에 이르자, 간사한 거간꾼이 감히 손쓰지 못했다. ­《미수기언(眉叟記言)》­사관이 일컫기를 '두자미(杜子美 두보(杜甫))는 시가(詩歌)를 짓되 자신의 나약함을 슬퍼하고, 마음으로 임금을 잊지 않기에 사람들이 그 충심을 어여삐 여긴다.'라고 하였다. 두보의 시21) 가운데 '관중의 소인배가 기강을 무너뜨리니[關中小兒壞紀綱],22) 장후23)는 즐겁지 않고 임금24)은 몹시 바쁘네.[張后不樂上爲忙] 다만 가렴주구 혁파하지 못할까 두렵거늘[但恐誅求不改轍], 총애받는 간신배 목숨 보전한다 들었네.[聞道嬖孼能全生]25)'같은 부류는 지나간 조정이나 당저(當宁 금상(今上))의 일을 지적하여 꺼리는 바가 없는데, 당시에 그 죄를 논하거나 후대 사람들이 비난했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다.그런데 정문부의 '육리의 청산은 천하가 웃는데[六里靑山天下笑]'26), 와 '잔약한 후손은 무슨 일로 또 회왕이 되었는가.[孱孫何事又懷王?]'27)라고 한 구절은 물론 우연히 역사를 읊은 것이니 조정의 일과 무슨 상관이겠는가. 설사 참으로 비난하고 풍자한 뜻이 있더라도 또한 두자미가 말한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계해년(1623, 인조원년)의 첫 정사에서 중흥(中興)하리라 외쳤지만 조정의 처사가 이와 같았으니, 병자년(1636)과 정축년(1637)의 호란이 어찌 운수(運數)를 탓할 수 있겠는가. ­《서포만필(西浦謾筆)》­정농포(鄭農圃)가 관북에서 세운 공과 강수은(姜睡隱)28)이 왜진(倭陣) 중에 보인 절개는 모두 탁월하다. 그러나 실상이 가려져 표장(表章)한 바가 없고, 당시 선조의 성명(聖明)으로 여러 명공(名公)의 보필을 받았는데도 일이 이처럼 되었으니 매우 탄식할 만하다. 농포는 백면서생으로서 좌막(佐幕)의 하료(下僚)로 있으면서 많은 병사를 규합하여 미쳐 날뛰는 왜적을 토벌하여 한 지방을 편안하게 하였다. 그런데 그 포상은 한 자급에만 그치고, 측근과 고관들의 이름만 높이 운대(雲臺)29) 위에 나열되었다. 당시에 순절한 의사로 송동래(宋東萊 송상현(宋象賢))와 조중봉(趙重峯 조헌(趙憲)) 같은 뛰어난 자가 많았으니, 수은은 장차 그들에게 가려진 것인가. 세상에서는 죽어야만 고귀하게 여기니 죽음은 진실로 고귀하게 여길 만하지만, 절개를 세우되 반드시 모두 죽을 필요가 없다는 것을 전혀 알지 못한다. 수은의 사적이 주소장(朱少章)30)과 모두 동일하니 우재(尤齋 송시열(宋時烈))가 상세히 논하였다.31) 두 공이 가려져서 드러나지 않은 것은 다름이 아니라 세력이 없기 때문이다. 큰 공과 큰 절개에 대해서도 다만 그 형세의 유무만 따져보니, 세상사가 으레 이와 같구나! ­북헌(北軒)32)의 《노산취필(蘆山醉筆)》­정농포가 공이 있으면서도 포상을 받지 못한 것은 이미 한스러운 일인데, 끝내 죄가 없는데도 화를 당하니 더욱 원통하다. 이는 계해년(1623, 인조원년) 이후의 일이다. 예로부터 원통하게 죽은 자가 어찌 끝이 있겠는가마는, 농포의 일은 가장 납득할 수가 없다. 그의 〈영사(詠史)〉 시에 "초나라에 비록 세 집만 남아 있더라도 진나라는 망하리라[楚雖三戶亦秦亡], 예언한 남공의 말33)이 꼭 맞지 않네.[未必南公說得當] 한 번 무관34)에 들어가자 백성의 희망 끊겼는데[一入武關民望絶]35), 잔약한 후손은 무슨 일로 또 회왕이 되었는가.[孱孫何事又懷王]36)"라고 하였는데, 이것이 그가 연좌된 죄안(罪案)이다. 비록 이 시를 왜곡하여 견강부회(牽强附會)할지라도 끝내 죄가 될 사안은 보이지 않는다. 아마도 견강부회한 자들이 농포가 공이 있는데도 포상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선조를 원망하여 이에 회왕에 견주고, 인조를 잔약한 후손이라고 여긴 것은 아니겠는가. 그러나 이것도 말이 되지 않는다. 선조가 어찌 일찍이 무관(武關)에 들어간 일이 있었으며, 인조의 즉위가 어찌 회왕의 손자인 심(心)에게 견줄 일인가? 당시 옥사를 다스린 자가 이 당시 원훈(元勳)이었고, 처음에 그 시를 벽 사이에서 발견한 자도 훈신 중의 한 사람이었다.37) 그러니 택당(澤堂 이식(李植))이 문사 낭청(問事郞廳)38)으로 구원해 보려고 아무리 애를 써도 어찌 그 사이에서 풀려날 수 있었겠는가. 계해년 이후로 사대부들이 공신에게 붙지 않아서 곤액을 당한 자가 많았는데, 농포처럼 화를 면하지 못하였다. 그 당시에 고변(告變)이 그치지 않아 고발당한 자가 풀려나는 일이 적었으니, 이는 시세가 그러했던 것이지만 농포의 화가 어찌 원통하지 않겠는가. ­상동(上同)­ 我國州郡, 於壬辰變初, 或力屈被陷, 或奔潰不守則有之矣, 無一人降附于賊者。惟會寧土兵鞠景仁, 叛據府城, 執二王子及宰臣金貴榮、黃廷彧、北兵使韓克諴、會寧府使李瑛等數十人, 迎款于賊, 賊以景仁守會寧, 鞠世弼守鏡城, 退據吉州。評事鄭文孚, 起兵討景仁誅之, 然後始定, 可見北道人心之强悍難馭也。【《芝峯類說》】公自北歸時, 乞酒於淮陽倅, 倅送酒數盃, 公有一聯曰: "淮陽不薄人情薄, 鐵嶺非高酒價高。" 【上同】壬辰諸道, 起義兵討賊者甚衆, 而其在北道評事鄭文孚、訓戎僉使高敬民功最多。【西崖 《懲毖錄》】一日, 車五山語公曰: "我偶得風無一足行千里之句, 累日沈思, 未成其對。" 公卽應聲對曰: "何不道月有孤輪轉九天?" 五山瞠眼吐舌, 殆欲下拜。【《於于野談》】公尹全州也, 有姦儈交通勳貴者, 多貸公貨, 久而不償。公嚴囚以徵, 朴炡爲姦儈, 以救解之書, 一旬三抵於公, 而公終不聽, 愈督責之, 積年逋欠, 旬月之間畢捧, 炡由是大啣之。公自全州奉喪而歸, 姦儈者欲乘時報怨, 判官金永耈聞之, 多發吏卒, 躬自護喪, 至公州邑, 姦儈者不敢動。【《眉叟記言》】史稱"杜子美爲歌詩, 傷其撓弱, 情不忘君, 人憐其忠"云。而其詩如"關中小兒壞紀綱, 張后不樂上爲忙。但恐誅求不改轍, 聞道嬖孽能全生"之類, 指斥先朝、當宁事, 無所忌諱, 未聞當時論其罪, 後人以爲非也。鄭文孚"六里靑山天下笑, 孱孫何事又懷王?"之句, 無論偶自詠史。何與於朝家事? 設令眞有譏諷意, 亦與子美所云, 何異? 癸亥初政, 號稱中興, 而廟堂擧措如此, 丙丁之厄, 何可諉以天數。【《西浦謾筆》】鄭農圃關北之功、姜睡隱倭中之節, 皆卓矣。然掩昧而無所表章, 當時以宣廟之聖, 輔以諸名公, 而事乃如此, 甚可歎也。農圃以白面書生, 佐幕下僚, 乃能糾衆兵, 討狂賊以安一方。然其賞止於一階, 而宦侍、巨達, 巍然列於雲臺之上矣。當時死節之士, 如宋東萊、趙重峰卓卓者多, 睡隱將爲其所揜耶? 世俗以死爲貴, 死固可貴, 殊不知立節, 不必皆死。睡隱事, 無不與朱少章同者, 尤齋論之詳矣。兩公之掩昧無他, 以無形勢故也。於大功、大節, 獨視其形勢有無, 世間事例如此矣!【北軒 《蘆山醉筆》】鄭農圃有功不賞, 已可恨, 而終至無罪而被禍尤冤矣, 此則癸亥後事也。自古冤死者何限, 而農圃事, 最未可曉。其《詠史》詩曰"楚雖三戶亦秦亡, 未必南公說得當。一入武關民望絶, 孱孫何事又懷王", 此其所坐之案也。雖以此詩曲爲傅會, 終未見其爲罪。無乃傅會者, 以爲農圃有功不賞, 故怨望宣廟, 乃比於懷王, 而以仁廟爲孱孫云爾耶? 此不能成說。宣廟何嘗有入武關之事? 而仁廟之立, 豈比孫心耶? 當時按獄者, 當是元勳, 而初見其詩於壁間者, 亦勳臣中人也。澤堂以問事郞齟齬救解, 烏能得於其間哉? 癸亥後, 士大夫以不附功臣, 而坎坷者多, 而如農圃不免於禍。其時告變不止, 而被告者鮮得脫, 此則時勢然也, 而農圃之禍, 豈不冤哉? 【上同】 공이……때 정문부는 계해년(1623, 인조원년) 4월에 전주 부윤에 임명되었다. 《農圃集 年譜》 포흠(逋欠) 관가(官家)의 물건을 빌려서 사사로이 써 버리거나 숨기고서 돌려주지 않는 행위, 국가의 조세(租稅)를 납부하지 않는 것, 환곡을 상환하지 못한 것, 혹은 이러한 미납으로 인한 결손액을 말한다. 박정은……품었다 박정(朴炡, 1596~1632)의 자는 대관(大觀), 호는 하석(霞石)이다. 1623년 인조반정에 참여해 정사(靖社) 3등 공신에 책록되었다. 사헌부의 장령·집의 등을 역임하였다. 박정은 간사한 거간꾼의 일로 인해 원한을 품고 있다가 1624년에 대관(臺官)이 되었는데, 정문부가 창원에 있을 때 공무의 여가에 역사에 대해 읊은 10수의 시에 무슨 목적이 있다 하여 문초하였고, 결국 정문부는 문초를 받다가 죽게 되었다. 《農圃集 年譜》 공이……돌아가자 공은 1623년 7월에 모친상을 당하여 관을 모시고 서울로 돌아갔다. 《農圃集 年譜》 두보의 시 〈억석 이수(憶昔二首)〉라는 시에 들어 있는 내용이다. 관중의……무너뜨리니 관중의 하찮은 소인은 당나라 숙종 때의 환관 이보국(李輔國, 704~762)이다. 병권을 장악하고 대궐의 실권을 장악하여 전횡을 일삼다가 대종(代宗)이 보낸 자객에게 살해되었다. 장후(張后) 당 숙종(唐肅宗)의 폐후(廢后)로 이보국 등에 의하며 살해되었다. 上 당나라 숙종황제(肅宗皇帝)를 말한다. 총애받는……있네 원문의 '폐얼(嬖㜸)'은 당나라 숙종(肅宗)과 대종(代宗) 때의 환관 정원진(程元振)으로 정권을 농단한 인물이다. '능전생(能全生)'은 대종이 정원진을 죽이지 않고 살려준 것을 가리킨다. 육리의……웃는데 원문의 '율리청산(六里靑山)'은 전국 시대에 장의(張儀)가 초나라 회왕에게 상오(商於)의 땅 6백 리를 바치겠다고 약속했다가 나중에 이를 6리로 번복하여 초나라 회왕을 속인 고사에서 온 말이다. 당(唐)나라 때 최도융(崔道融)은 〈초회왕(楚懷王)〉 시에서 "육리의 청산은 천하가 웃는데, 장의는 용이하게 갔다가 다시 오네.[六里靑山天下笑, 張儀客易去還來.]"라고 하였다. 잔약한……되었는가 잔약한 후손은 전국 시대 초 회왕(楚懷王)의 손자인 심(心)을 말한다. 진말(秦末)에 범증(范增)이 초나라의 후손을 세워야 민심을 얻을 수 있다고 항량(項梁)을 설득하자, 초 회왕의 손자인 심을 찾아 회왕으로 세웠다. 그러나 후에 항적(項籍)에게 피살되었다. 《史記 卷7 項羽本紀 卷84 屈原列傳》 강수은(姜睡隱) 강항(姜沆, 1567~1618)으로, 수은은 그의 호이다. 자는 태초(太初)이고 영광 출신이다. 1597년 정유재란 때 영광에서 가족과 함께 해로로 탈출하려다가 포로가 되어 일본으로 압송되었다. 포로 생활 동안 일본의 역사·지리·관제 등을 알아내어 《적중견문록(賊中見聞錄)》에 수록하여 본국으로 보내기도 했다. 저서로는 《운제록(雲堤錄)》과 《수은집(睡隱集)》 등이 있다. 운대(雲臺) 공신의 초상(肖像)을 걸어 놓은 곳을 말한다. 후한(後漢) 때 한 명제(漢明帝)가 영평(永平) 3년(60)에 광무제(光武帝)의 공신 28인을 그려 이곳에 봉안하였다. 주소장(朱少章) 주변(朱弁, 1085~1144)으로, 소장은 그의 자이다. 남송 고종(高宗) 때의 사람으로, 호는 관여거사(觀如居士)이고 문장에 뛰어났다. 주희(朱熹)의 작은 할아버지이다. 통문 부사(通問副使)로 금(金)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16년 동안 구류되었는데, 금나라에 신하 되기를 한사코 거절하며 절의를 지켰다. 수은의……논하였다 《宋子大全 卷137 序 睡隱集序》 참조. 북헌(北軒) 김춘택(金春澤, 1670~1717)의 호이다. 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백우(伯雨), 시호는 충문(忠文)이다. 《노산취필》은 김춘택이 1715년(숙종41)에 노산(蘆山)에 있을 때 지은 우리나라 역사에 대한 논평집이다. 예언한 남공(南公)의 말 남공이 예언한 말은 《사기(史記)》 권7에 "초나라에 비록 세 집만 남아 있더라도 진나라를 망하게 하는 것은 반드시 초나라일 것이다.[楚雖三戶, 亡秦必楚也.]"라고 한 것이다. 남공은 초나라의 도사(道士)로 음양에 밝은 자였다고 한다. 무관 섬서성(陝西省) 상남현(商南縣)의 북서쪽에 있는 관(關)으로, 진 소왕이 초 회왕을 만나자고 하여 진나라로 끌고 간 곳이다. 한 번……끊겼는데 전국 시대 초 회왕(楚懷王)은 진 소왕(秦昭王)이 혼인을 약속하고 만나기를 희망하자 굴원(屈原)의 간언을 듣지 않고 무관에 들어갔는데, 진나라 군대에 의해 강제로 진나라로 끌려갔다. 끝내 진나라에서 돌아오지 못하고 죽었다. 《史記 卷40》 잔약한……되었는가 앞의 〈제가기술(諸家記述)〉의 《서포만필(西浦謾筆)》 출처 주 참조. 처음에……사람이었다 1624년(인조2)에 최내길(崔來吉, 1583~1649)이 농포를 찾아왔을 때, 상중에 휴지와 함께 섞여 벽에 발려져 있는 이 시를 그가 보고 가서 친구들에게 전파하였다. 《農圃集 年譜》 문사 낭청(問事郞廳) 죄인의 심문서를 작성하여 읽어주는 일을 맡아 하는 임시 벼슬이다.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두보 초당122)의 〈무후묘〉 시123)에 차운하여 삼가 창렬사 벽에 쓰다 족증손 사성 광운 次杜草堂〈武侯廟〉詩 敬題彰烈祠壁上 族曾孫 司成廣運 위대한 자취 믿을 만한 사적에서 찾았으니위풍당당한 충렬 눈앞에 환하게 펼쳐지네산하는 아직도 우뚝한데 경관124)은 쌓여 있고원학도 여전히 들판의 곡소리에 애처로워하네의리 사모하여 지금까지 향기로운 제수 올리니돌아보건대 그날 공훈 결코 마음에 두지 않았네변방 백성도 스스로 울음 삼키며 지나가는데나라고 어찌 눈물이 옷소매 적시지 않겠는가 壯蹟曾從信史尋堂堂忠烈眼中森山河尙屹京觀築猿鶴猶哀野哭音薦苾于今由慕義顧勳當日定非心邊氓亦自呑聲過我淚如何不滿襟 두 초당(杜草堂) 당(唐)나라 두보(杜甫)를 말하는 것으로, 두보가 성도(成都)의 완화계(浣花溪) 가에 초당을 짓고 살았던 데에서 연유한 것이다. 무후묘시(武侯廟詩) 두보의 〈무후묘(武侯廟)〉 시가 《전당시(全唐詩)》 권229에 실려 있는데, 이 시는 오언절구이고 운자도 맞지 않아 착오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두보의 〈촉상(蜀相)〉 시가 《어정전당시(御定全唐詩)》 권226에 실려 있는데, 이 시가 칠언율시이고 원문의 운자와도 맞다. 경관(京觀) 전공(戰功)을 과시하기 위해 전쟁이 끝난 뒤에 적의 시체(屍體)를 쌓아 올리고 흙을 덮은 큰 무덤을 말한다. 경구(京丘)라고도 한다.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아버지의 명으로 목백 임윤신53)의 시에 대신 차운하다 以嚴君命代次牧伯任公允臣韻 수령54)이 금각55)을 떠나 鳧舃辭琴閣표연하게 산수의 사이에 있네 飄然水石間안개와 노을 낀 기다란 길 고요하고 煙霞脩逕靜술동이 있는 작은 집 한가롭네 樽酒小齋閑하늘의 밝은 태양 얼마나 아득한가 白日天何逈들녘의 푸르른 모가 스스로 위로하네 靑秧野自寬쇠약한 백성들은 흰 머리 흩날리며 殘民揚素髮두 손으로 빛나는 안장에 절을 하네 雙手拜華鞍 鳧舃辭琴閣, 飄然水石間.煙霞脩逕靜, 樽酒小齋閑.白日天何逈, 靑秧野自寬.殘民揚素髮, 雙手拜華鞍. 임윤신 1529~1588. 본관은 풍천(豐川), 자는 경룡(景龍)이다. 1559년 기미년 정시문과(庭試文科)에 병과(丙科)에 급제하고 부제학, 동래부사를 지내다가 1587년 나주목사를 역임하였다. 수령 원문의 '부석(鳧舃)'은 신선들이 신는 신발을 말하는데, 여기서는 지방의 수령들을 가리키는 뜻으로 쓰였다. 《후한서(後漢書)》 〈방술열전 상(方術列傳上) 왕교전(王喬傳)〉에 "왕교는 하동(河東) 사람인데 현종(顯宗) 때 섭현 영(葉縣令)이 되었다. 왕교는 신술(神術)이 있어서 매달 삭망(朔望)에 대(臺)에 나와 조회하였다. 황제가 그가 자주 오는데도 수레가 보이지 않는 것을 괴이하게 여겨 태사(太史)로 하여금 몰래 엿보게 하니, 태사가 그가 올 때에는 두 마리의 오리가 동남쪽에서 날아온다고 하였다. 이에 오리가 오는 것을 보고 그물을 펴서 잡으니, 단지 신발 한 짝만 있었다. 상방(尙方)에 명하여 자세히 살펴보게 하니 전에 상서원(尙書院)의 관속들에게 하사한 신발이었다." 하였다. 금각 수령이 정사하는 곳을 말하는데 금당(琴堂)이라고도 한다. 옛날 복자천(宓子賤)이라는 어진 수령이 선보(單父)라는 고을을 다스릴 때 거문고를 타면서 마루 아래에 내려온 일이 없었으나 선보현은 잘 다스려졌다는 고사에서 유래한 말이다.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발문 跋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발문1) 跋 선조(先祖)의 유집(遺集)과 부록은 지난 무자년(1708, 숙종34)에 좌윤 오중주(吳重周)2) 공이 통제사(統制使)로 있을 때 선인(先人 정구(鄭構))께서 일찍이 청하여 간행하였다. 그러나 태상시(太常寺)의 시장(諡狀)3)은 바로 그 뒤에 이루어졌고, 게다가 서문(序文)이 없었기에 항상 함께 간행하지 못한 것을 한스럽게 여겼다. 그러다가 지난해에 내가 민중승(閔中丞)의 서문4)을 얻어 드디어 장문(狀文) 및 선조의 격문(檄文) 중 잃어버렸다가 뒤늦게 찾아낸 것을 합쳐 이어서 간행하여 선인의 뜻을 이루고자 했지만, 다만 개인적인 힘으로는 성취하기 쉽지 않았다. 그런데 마침 좌윤 공의 세질(世姪) 오혁(吳)5) 공이 다시 통제사가 되었기에 내가 또 선인께서 좌윤 공에게 청했던 식으로 공에게 청했더니, 공이 이내 판재(板材)와 조수(雕手 각수(刻手))를 모두 마련해 주어 열흘을 넘겨 일을 마쳤다. 이 문집이 마침내 완전하게 정돈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전후에 오공(吳公)께서 힘써주신 덕분이니, 내가 어찌 감동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또 선조께서 전란 중에 세운 공렬은 문집 속 제공(諸公)의 기록이 참으로 상세하고 확실하지만, 아직도 다 천명하지 못한 것이 있음을 한스러워하는 것은 아마도 함께 대항한 적장(賊將)을 거논하지 않았기 때문인 듯하다. 당시에 적장은 가등 청정(加藤淸正 가토 기요마사)과 소서 행장(小西行長 고니시 유끼나가) 두 놈이 수괴였는데, 가등 청정이 소서 행장에 비해 더욱 용맹하였다. 훗날 진양(晉陽 진주(晉州))을 격파한 것과 한산도(閑山島)를 더럽힌 것6)은 모두 가등 청정이 한 짓이니, 몹시 난폭하고 사나운 것이 이와 같았다. 그들이 병력을 나누어 공격하고 북쪽 지역으로 침입하여 일대를 짓밟고 해칠 때, 얼수(臬帥)7)와 진재(鎭宰)들이 달아나 숨거나 사로잡히다 보니 아무도 감히 어찌하지 못하였다.만일 공이 백도(白徒)8)를 규합하여 거느리고 몽둥이를 만들어 떨쳐 일어나 날카로운 부리와 뒷발톱을 뽑아내고 발톱과 날개를 베지 않았다면, 적이 여러 차례 승리한 위세를 타고 석천(射天)9)할 계획을 실행하여 압록강을 건너 곧장 서쪽으로 쳐들어가서 요동(遼東)과 광녕(廣寧)의 경계를 두렵고 놀라게 했을 것이니, 그렇게 했더라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끝내 빙빙 돌고 머뭇거리다가 달아나 숨을 겨를도 없게 되었다. 수많은 적을 섬멸하는데 이르러서는 더욱 여러 군진(軍陣)에서 최고였으니, 비록 평양(平壤)의 승전이라도 겨우 600명을 참수하였고 행주(幸州)와 연안(延安)10)도 더욱 이보다 적었다. 그런데 공의 장평(長坪)의 대첩(大捷) 같은 경우 한 번의 전투에서 참수한 것이 이미 800여 수급(首級)을 넘었고, 쌍포(雙浦)에서 적을 모조리 죽인 용맹은 사람들이 그림을 그려 전하기까지 하였으니, 그 공렬이 참으로 탁월하다.대개 적이 강한가 약한가에 대해서는 그 장수를 따져봐야 하니, 장수가 진실로 강하면 이기기 어렵지 않다. 그러므로 무후(武侯 제갈량(諸葛亮))가 노성(鹵城)에서 사마의(司馬懿)를 패퇴시킨 것에 대해 주자(朱子)가 특별히 이를 써서 그 어려움을 보였다.11) 그렇다면 공이 가등청정을 쳐부순 것이 또한 어찌 아주 어려운 상대를 이긴 경우가 아니겠는가. 충분히 전승(全勝)을 거두었는데도 누구 하나 여기에 대해 언급한 사람이 없으니, 이것이 개탄스러워할 만하다. 감히 권말(卷末)에 이와 같이 드러내니, 보는 자는 후손의 사사로운 말이라 여기지 말고 부디 이로써 공의 큰 공적을 더욱 알 수 있다면 다행이겠다.황명(皇明) 갑신년(1644) 뒤 115년 무인년(1758) 3월 상순에 현손 상점(相點)이 삼가 쓰다. 先祖遺集與附錄, 往歲戊子, 左尹吳公重周之莅統藩也, 先人蓋嘗請而登諸梓。太常之狀, 卽其後所成, 且未有弁卷之文, 常以不得幷刊爲恨。頃年, 相點求得閔中丞之序, 遂幷狀文及先祖檄文見佚而追得者, 欲繼入刊以遂先志, 顧私力未易就矣。適左尹公之世姪, 復持是節, 余又以先人之所以請於左尹公者請焉, 公乃倂惠板材與雕手, 踰旬而功訖。斯集之竟得完整, 皆賴於前後吳公之力, 余烏得無感哉? 且先祖龍蛇之烈, 集中諸公所記, 固爲詳實, 尙恨有未盡闡者, 蓋不論所與抗之賊將耳。當時賊將淸正、行長二酋爲魁, 而淸正視行長尤雄焉。異日晉陽之破, 閑山之衊, 摠淸正爲之, 其鷙悍有如是矣。而方其分攻北入, 蹂殘一路, 臬帥、鎭宰竄伏縛執, 無敢誰何。儻非公糾率白徒, 制梃1)奮呼, 落觜距而剪爪翼, 則賊乘累勝之威, 售射天之計, 渡江直西, 震驚乎遼廣之境, 亦無異矣, 而卒回翔躑躅, 逃遁而不暇焉。至於殲賊之夥, 尤爲諸陣最, 雖以平壤之勝, 斬馘僅六百, 幸州、延安又復下焉, 而若公長坪之捷, 一戰所斬, 已過八百餘級, 雙浦鏖殺之壯, 人至畵圖而傳之, 其功烈誠卓矣。夫敵之堅脆, 當論其將, 將苟强焉, 其勝莫難。故武侯鹵城之敗司馬懿, 朱子特書之以見其難。然則公之摧敗淸正者, 亦豈非於其莫難克者? 能取全勝, 而一無有論及此者, 是可慨也。敢於卷尾, 著之如此, 覽者勿以子孫之私言, 而尙克以是益知公之鴻績則幸矣。皇明甲申後百十五年戊寅暮春上澣, 玄孫相點, 謹識。 대본에는 제목이 없지만, 이 발문은 정문부의 현손 정상점(鄭相點)이 1758년에 추각(追刻)하고 붙인 것이다. 정상점은 초간(1708) 이후 충주 허창(許昶)의 집에서 추득(追得)한 〈倡義討倭諭咸鏡道列邑守宰及士民檄〉, 1712년에 민진후(閔鎭厚)가 지은 시장(諡狀), 1750년에 민우수(閔遇洙)에게 부탁하여 받은 서문(序文)과 1758년에 자신이 지은 발문을 추각하였다. 오중주(吳重周) 1654~1735. 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자후(子厚), 호는 야은(野隱), 아버지는 오두흥(吳斗興)이다. 1680년(숙종6) 무과에 급제하여 여러 벼슬을 역임하였다. 1728년 이인좌(李麟佐)의 난이 일어나자, 영남 안무사 박사수(朴師洙)의 요청으로 통제사가 되어 난의 평정에 공을 세우고 사퇴하였다. 태상시(太常寺)의 시장(諡狀) 태상시는 제사와 시호의 추증에 관한 일을 맡아보는 관청이다. 1712년에 예조 판서 민진후(閔鎭厚)가 지은 시장을 말한다. 민중승(閔中丞)의 서문 중승은 사헌부 집의를 가리킨다. 1750년에 사헌부 지평 민우수(閔遇洙)가 지은 〈농포집서(農圃集序)〉를 말한다. 오혁(吳) 1709~1769. 본관은 해주(海州)이고 자는 대이(大而)이다. 지평 오핵(吳翮)의 증손이다. 1734년(영조10) 무과에 급제하였다. 1752년에 충청도 수사, 1754년에 전라도 병사·삼도수군통제사·훈련대장 등을 두루 역임하였다. 한산도(閑山島)를 더럽힌 것 가등 청정이 한산도(閑山島)를 습격하여 격파하고 군세(軍勢)를 떨쳐 다시 쳐들어와 그 선봉이 호서(湖西) 지역에 이른 것을 말한다. 《宣祖實錄 30年 11月 10日》 얼수(臬帥) 평안도와 함경도의 병마절도사와 수군절도사를 통틀어 이르던 말로, 곤수(閫帥)라고도 한다. 백도(白徒) 훈련을 거치지 않은 병졸 또는 임시 소집된 장정을 말한다. 석천(射天) 하늘을 쏜다는 뜻으로, 중국을 해치는 것을 말한다. 은왕(殷王) 무을(武乙)이 무도하여 가죽 주머니에 피를 담아 매달고 천신(天神)이라 하면서 올려다보며 쏘았다는 고사에서 나왔다. 《史記 殷紀》 연안(延安) 임진왜란 때인 1592년 8월 28일부터 9월 2일에 걸쳐 초토사 이정암(李廷馣)이 의병을 이끌고 황해도 연안성(延安城)에서 구로다[黑田長政]의 왜군을 물리친 전투를 말한다. 무후(武侯)가……보였다 231년 여름 5월에 제갈량이 위(魏)나라의 사마의를 노성(鹵城)에서 패퇴시키고 그의 장수 장합(張郃)을 죽였다고 하는 주자의 기록이 있다. 《資治通鑑綱目 15卷 上》 梃 대본에는 '挺'으로 되어 있는데, 문맥을 살펴 고쳤다.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유선당에 쓰다 【당은 복암에 있다.】 題留仙堂 【堂在伏巖】 가을날 칠월 십육일 秋七月旣望손님이 강가의 집에 왔는데 客來江上家주인은 달빛 비추는 모래사장에 누웠고 主人臥沙月잠자는 백로는 갈대꽃 곁에 있구나 宿鷺傍蘆花팽택 동산 가운데 버드나무 같고50) 彭澤園中柳고산 눈 속51)51) 고산 눈 속 : 고산(孤山)은 송(宋)나라 임포(林逋)가 은거하던 곳으로, 그는 이곳에 매화를 많이 심고 학을 길렀기 때문에 사람들이 매처학자(梅妻鶴子)라고 불렀다. '고산의 눈'은 고산에 핀 눈처럼 흰 매화를 말한다.의 매화나무 같네 孤山雪裡槎내일 아침 다시 머리를 돌려 明朝更回首서쪽 적성의 노을52)을 보리라 西見赤城霞 秋七月旣望, 客來江上家.主人臥沙月, 宿鷺傍蘆花.彭澤園中柳, 孤山雪裡槎.明朝更回首, 西見赤城霞. 팽택 …… 같고 은자적 삶의 모습을 읊은 것이다. 팽택(彭澤)은 도잠(陶潛)을 가리킨다. 도잠은 집 앞에 버드나무 다섯 그루를 심었기에 이렇게 말한 것이다. 《晉書 卷94 陶潛列傳》 적성의 노을 적성은 중국 천태산(天台山) 남쪽에 있는 산 이름으로, 토석의 색깔이 붉어 항상 노을이 낀 것 같으며, 산의 모양이 성첩과 같이 생겼으므로 이런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진(晉)나라 손작(孫綽)의 〈천태산부(天台山賦)〉에 "적성에 붉은 노을이 일어 표치를 세우고, 폭포는 날아 흘러서 길을 나누었도다.[赤城霞起而建標, 瀑布飛流以界道.]"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음복연 시에 차운하다 次飮福宴韻 천재일우의 성세 오현금 연주하니303)봉황이 와서 춤추며 우는구나이제부터 큰 밝음이 두루 비추니만방이 시간을 다투며 즐거워하네 千年之會五弦琴祥鳳來儀噦噦音自是大明照臨遍萬邦歡樂競渾陰 오현금 연주하니 태평성세를 의미한다. 순임금이 오현금(五弦琴)을 타며 〈남풍가(南風歌)〉를 불렀다는 고사가 있다. 《孔子家語 辯樂解》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덕만의 시에 차운하다 次德萬韻 변방에서 오랑캐 쫓아낸 지 몇 해 되었는가군복은 도리어 중유의 헤진 솜옷233) 같아라곤두선 머리털이 관을 삼천 길 높이 찔렀는데234)오랑캐 땅 지형 익히느라 이미 백발이 되었네 逐虜關河問幾秋蒙戎還似弊袍由衝冠壯髮三千丈學得胡山已白頭 중유의 헤진 솜옷 중유(仲由)는 공자의 제자 자로(子路)를 가리킨다. 공자가 이르기를 "해진 솜옷을 입고[衣敝縕袍] 여우 갖옷, 담비 갖옷 입은 사람과 같이 서 있어도 부끄러워하지 않는 사람은 유(由)뿐이로다."라고 하였다. 《論語 子罕》 곤두선……찔렀는데 기개가 씩씩하고 늠름한 것을 비유한 말이다. 당나라 양형(楊炯)의 〈수주장강현선성공자묘당비(遂州長江縣先聖孔子廟堂碑)〉에 "공은 웅심을 품어 찢어지는 눈초리로 노려보고, 곤두선 머리털이 관을 찔렀다.[壯髮衝冠]"라고 하였다.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중추절에 선영을 바라보며 생각하다 中秋望 憶先壠 중추 보름날은 한식과 같으니나라 풍속에 집집마다 묘에 제사하러 돌아간다네해마다 소나무 산 언덕에서 눈물 흘리니연경의 객은 갑접은 더 눈물로 옷 적시누나 中秋望日如寒食國俗家家祭墓歸歲歲松山壠上淚燕京爲客倍沾衣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서장관의 〈중추월〉 시에 차운하다 2수 次書狀仲秋月韻【二首】 지난해 이맘때는 고향에 있었으니달 밝은 밤 화려한 난간 곁에서 술잔 들었지형이 따라주고 아우가 권하고 실컷 즐겼는데서글프게도 오늘 밤에는 객사에 있구나항상 이지러지지도 않고 항상 둥글지도 않으니거울 같기도 빗 같기도 한 모습 누가 그리 만드는가한번 집 떠나온 뒤로 전혀 상관치 않으니여관 창에서 오직 등잔을 벗삼아 잠드노라 去歲玆辰在故鄕月明尊酒畵欄傍兄酬弟勸饒行樂惆悵今宵是客堂不常爲缺不常圓如鏡如梳孰使然一自離家渾未管旅窓惟有伴燈眠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이덕재300)가 보여준 시에 차운하다 3수 도총부(都摠府) 직소(直所)에서 지었다. 次李德哉見示韻【三首 在摠府直所】 대궐 숙직 때 분명 꿈에 야정 보았는데깨고 나니 산빛이 눈에 푸르게 들어오네이를 용면거사301)에게 말해 그리게 하고픈데다만 돌아가고픈 마음은 형언할 수 없네높은 소나무 긴 대나무 모두 꼿꼿하니굳은 절조로 세모에도 푸를 수 있구나우리 두 사람 지금 –원문 1자 결락302)-젊을 적 품은 심지가 노년에 드러나네관새에서 예전 여관에 묵었을 적에몇 번이나 함께 등잔을 밝혔던가도성의 백일과 홍진 속에서이르노니, 그리워하다 이미 늙었다오 禁直分明夢野亭覺來山色眼中靑欲將說與龍眠畫惟有歸心不可形長松脩竹共亭亭苦節能於歲晩靑吾兩人今不【缺】此少年心膽老年形關塞曾年宿旅亭幾回同伴夜燈靑長安白日紅塵裏報道相思已換形 이덕재 이성길(李成吉, 1562~1621)로, 본관은 고성(固城), 자는 덕재(德哉), 호는 창주(滄洲)이다. 용면거사(龍眠居士) 송나라 때의 유명한 화가 이공린(李公麟)의 호이다. 이공린이 벼슬을 그만두고 용면산(龍眠山)에 들어가서 지내며 '용면거사'라 자호(自號)하였다. 원문 1자 결락 원문은 '不【缺】此'이다. '不'와 '此'은 원문의 문제로 번역하지 않았다.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별폭【이름이 무엇인지 자세히 알지 못하는 사람이 의심스러운 예에 대해 질문한 것이다】 別幅【未詳名何人之問疑禮】 혹독한 질병으로 휴식을 한 뒤에 상에 임하여 성복(成服)하는 자는 《가례(家禮)》 분상조(奔喪條)에 '만약 할 수 없으면' 이하의 예절과 같을 듯합니다. 상(殤)의 요질(腰絰)68)은 그 띠를 묵지 않고 대공(大功)이하는 흩어 드리운다는 뜻으로 미루어 본다면 이는 아직 성인이 되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강쇄(降殺)한 것일 것입니다.기제(忌祭)를 지내기 하루 전날이 속절 묘제(俗節墓祭)를 지낼 날이면 자제들에게 묘제(墓祭)를 행하도록 하여야 할 듯합니다. 만일 자제가 없거나 묘소가 먼 경우에는 고인(古人)들이 사당을 중요시하고 묘소를 가볍게 여기던 뜻으로 미루어서 묘제는 혹 폐하여도 될 듯합니다.묘제를 지낼 때에 천둥이 치고 비가 내리는 경우에는 《예기》 〈증자문(曾子問)〉의 일식(日食)이 일어나면 제사를 중지한다는 글로 미루어 보면 근거로 삼을 만합니다. 서인(庶人)은 다만 부모에게만 제사를 지내니, 얼자(孼子)는 장방(長房)으로 체천(遞遷)69)할 수 없을 듯합니다.어떤 이가 사계(沙溪)에게 묻기를 "외숙의 처에 대해서는 복(服)이 없는데 국제(國制)에는 시마복을 입으니, 어느 복을 따라 입어야 합니까?"라고 하자, 답하기를 "외숙의 아내를 외숙모라고 한다. 옛날의 예는 미루어 볼 수 없고, 《개원례(開元禮)》70)와 국제에는 모두 시마복을 입도록 하였으니, 후한 쪽을 따라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을 듯하다."라고 하였습니다."봉양하는 데 필요한 도구를 진설하기를 모두 평소와 같이 한다."라고 하였고, 선정(先正)71)이 말하기를, "사람이 막 죽었을 때에는 예로써는 그 새로운 것을 따를 겨를이 없고, 정으로써는 옛것을 다 바꾸지를 못한다. 그러므로 찬장에 남아있던 포와 육장을 제수를 올린 뒤에 올린다."라고 하였으니, 이 말로 살펴보건대 《가례(家禮)》에 "습례(襲禮)를 행한 뒤에 전(奠)을 설치하며 성복(成服)한 뒤에 상식(上食)을 베푼다."고 한 것은 차례와 조리(條理)에 있어 반드시 깊은 뜻이 있을 것입니다. 지식이 얕은 후학(後學)이라 미처 선정의 예제(禮制)의 본뜻을 깊이 궁구하지 못하였으니, 우선 그 이미 이루어진 절목(節目)에 따라야 할 것이요, 그리하여 스스로 학문이 진보되고 식견이 투철해지게 되는 날을 기다린다면 그 은미한 뜻이 반드시 제 마음에 밝게 드러날 것이니, 어찌 굳이 먼저 천착(穿鑿)을 하겠습니까.무릇 사당에서 신주를 모시고 나올 때에는 각기 한 상자씩을 사용하여 모시니, 기제(忌祭)에 한 신위(神位)만 모시고 올 때에도 독에서 신주를 꺼내어 받들어서 상자에 담아가지고 와도 될 듯합니다. 그러나 정자(程子)의 함께 제사 지낸다는 설을 따라 후하게 하여야 할 듯합니다.72)제사에는 기름으로 지진 음식은 쓰지 않는 것이 비록 옛날의 예이기는 하나, 세속의 사람들이 이 예를 쓴 지가 오래되었으니, 갑자기 변하기는 어려울 듯합니다. 그러나 예를 좋아하는 선비가 용감한 뜻으로 옛날의 예를 따르는 것이 또한 어찌 불가하겠습니까.주부재배(主婦再拜)]는 주인(主人)에 대한 글을 이어받았으니, 사배(四拜)로 바로잡아야 할 듯합니다. 여러 형제들이 이미 주인과 함께 애곡(哀哭)을 한 뒤에 또 주인과 함께 배례(拜禮)를 행하는 것은 불가하지 않을 듯합니다.윗옷의 앞쪽 옷섶을 끼운다는 것은 《가례》의 주(註)에 '삽상임(扱上袵)이란 윗옷의 앞쪽 섶을 띠에 끼우는 것을 이른다.'라고 하였으니, 이는 윗옷의 앞쪽 섶을 띠에 끼우는 것인 듯합니다.분묘(墳墓)에 화재가 난 경우에 대해서, 예에 사당을 지나면 수레에서 내리고 묘소를 지나면 경의를 표한다고 하였는데, 모든 묘제(廟祭)와 묘제(墓祭)에 어떤 일이 생기면 모두 강쇄(降殺)함이 있으니, 묘소와 사당에 화재가 났을 때에도 강쇄하는 것이 분명할 듯하나, 어떠한지 알지 못하겠습니다.참배(參拜)하는 예와 사신(辭神)73)에 대해서, 《가례》 〈참례의(參禮儀)〉에 신주를 꺼낸다는 문장은 있고 신주를 거둔다는 조항은 없으니, 상세하지 못한 듯합니다. 우제(虞祭)에는 먼저 신주를 거둔 뒤에 절한다고 말한 것을 따르는 것이 온당할 듯합니다.발인(發引)하는 날 아침에 상식을 올리는 것에 대해서, 《문공가례(文公家禮)》의 주에 '묘소가 멀면 머무는 곳마다 조석으로 상식을 올린다.'고 하였으니, 이것으로 미루어 보면 발인은 평조(平朝) 뒤에 있으니 그 전에 아침에 상식을 올릴 조항이 없겠습니까. 조효(早曉)에 발인을 하게 되면 미처 상식을 하지 못하니, 묘소가 멀면 길에서 상식하는 때에 널 앞에다 자리를 마련하고 상식의 예절을 행하여야 할 듯합니다. 그러나 어떠한지 알지 못하겠습니다.동자(童子)가 제사를 주관하는 것에 대해서, 비록 동자라도 축판(祝板)에 이미 자명(子名)을 썼으면 자식이 초헌(初獻)을 행하여야 합니다. 형의 상(喪)에 형의 아내가 살아 있는 경우에 대해서, 그 아내가 살아 있으면 아우가 제사를 받들어서는 안 됩니다.아우에게 고하고 아들에게 고하는 것에 대해서, 아내는 '상향(尙饗)'을 써야 하고 아우와 자식은 써서는 안 될 듯합니다. 《상례비요(喪禮備要)》의 내용이 이와 같으니, 의심할 만합니다.죽은 자가 자기와 대등한 자 이하이면 전(奠)을 올리며 절을 하는 것에 대해서, 아내는 절하여야 하고 자식과 아우는 절을 해서는 안 됩니다. 분묘에 흙을 돋우지 않는 것에 대해서, 자식의 지극한 정으로는 옛날의 예를 따를 겨를이 없을 듯합니다.개장복(改葬服)을 입는 기간 내에 제사를 지내는 것에 대해서, 옛날에는 복을 입은 사람이 장례 전에는 감히 상차(喪次)를 떠날 수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또한 감히 흉(凶)을 지니고 길(吉)을 제사할 수 없었습니다. 지금은 개장과 초상(初喪)이 같지 않아 시제(時祭)를 지내지 않으니, 어떠한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다시 상세히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일 년이 지나 장례를 지내는 자가 초기(初忌)가 되었을 경우에 대해서, 사람의 정으로 헤아려보건대, 이미 초기가 되었으면 비록 장례를 지내지는 못했다 하더라도 이날을 차마 그냥 보낼 수는 없을 듯합니다. 간략하게나마 전의(奠儀)를 베푸는 것은 예에 비록 이에 관한 글은 없으나 정을 폐할 수 있겠습니까. 이러한 일은 자식의 지극한 정으로 미루어 보아야 합니다. 厲疾止息後。入臨成服者。似與奔喪條若未得以下之儀同。殤之經不絞其帶。以大功以下散垂之義推之。爲其未成人。故殺之耶。忌祭前一日。値俗節墓祭。則似當令子弟代行墓祭。而若無子弟而墓遠。則以古人重廟輕墓之義推之。墓祭或似可廢耶。墓祭雷雨。以曾子問日食廢祭之文推之。似有可據。庶人只祭考妣則孼子恐不可以長房遞遷。或問于沙溪曰舅之妻無服。國制緦。當從何服。答云舅之妻謂之舅母。古禮推不去。開元禮及國制皆緦。從厚恐不妨云云。奉養之具。皆如平昔云云。先正有言曰人之始死。以禮則未暇從其新。以情則未盡易舊。故以閣上所餘脯醢。爲奠於旣奠之後。以此言觀之。家禮自襲後設奠。成服後設上食。次第絛理。必有深意。後學識淺。未及深究先正禮制之本意。則姑當從其已成之節目。以待自已學進見透之日。則其微意必逞露於吾心矣。何必經先穿鑿也。凡奉主出廟。各用一笥奉之。則忌祭一位奉來。恐可奉主出櫝。奉之以笥而來。然當從程子幷祭爲厚。膏煎不用。雖是古禮。世俗襲用已久。恐難卒變。然好禮之士。勇意從古。亦何不可。主婦再拜。蒙主人之文。恐當以四拜爲正。衆兄弟旣與主人同叙哀哭。則又與主人同行拜禮。恐無不可。扱衣前襟云云。家禮註云扱上袵。謂扱衣前襟之帶。恐是衣之前襟?帶。墳墓火云云。禮過廟則下。過墓則式。而凡廟祭墓祭。皆有降殺。則墓火廟火。亦似有殺明矣。未知如何。參禮辭神云云。家禮參禮儀。有出主之文而無斂主之節。似欠詳盡。倣虞祭先斂後拜云者。恐爲便當。發引之日。朝奠上食云云。文公家禮註云若墓遠則每舍朝夕奠上食。以此推之。發引在平朝之後。則其前烏可無朝奠上食之節也。發引在早曉。未及上食。而墓遠則似當於道上食時。設座於柩前而行上食之節。未知如何。童子主祀云云。雖童子祝板旣用子名。則子當行初獻。兄喪妻在云云。其妻在則弟不當奉祀。告弟告子云云。妻則似當用尙饗。弟與子。似不當用。而備要如此可疑。死者敵已以下。奠而拜云云。妻則當拜。子與弟不當拜。墳墓不培云云。人子至情。似不暇從古禮。改葬服內行祭云云。古者服人未葬之前。不敢違離喪次。故亦不敢冐凶祭吉。今改葬與初喪不同。不行時祭。未知如何。更詳之。周而葬者初忌云云。規之人情。旣遇初忌。雖未克葬。似不忍虗過此日。略設奠儀。禮雖無文。情可廢乎。如此等事。當推以人子之至情。 상(殤)의 요질(腰絰) 원문은 '殤之經'이다. 문맥에 근거하여 '經'을 '絰'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장방(長房)으로 체천(遞遷) 장방은 최장방(最長房), 곧 4대 이내의 자손 중에 항렬과 나이가 가장 높은 사람으로, 봉사손(奉祀孫)에게 대수(代數)가 다한 신주를 모셔다가 제사를 받드는데, 이를 체천이라고 한다. 《개원례(開元禮)》 《대당개원례(大唐開元禮)》를 말한다. 당(唐) 나라 초기에 태종(太宗)이 방현령(房玄齡)을 명하여 수(隋) 나라의 예에 의하여 예문(禮文) 1백30편을 편수하여 《정관례(貞觀禮)》를 만들고, 고종(高宗)이 또 장손무기(長孫無忌)를 명하여 거듭 편찬하여 《현경례(顯慶禮)》 1백30권을 만들고, 현종(玄宗)이 또 서견(徐堅), 이예(李銳)를 명하여 거듭 1백50권으로 찬정(撰定)해서 《개원례》를 만들어 시행하였다. 내용은 서례(序例)로 나누어 길례(吉禮), 빈례(賓禮), 군례(軍禮), 가례(嘉禮), 흉례(凶禮)까지 있다. 《唐會要 三十七 五禮篇目》 선정(先正) 방각(方慤, ?~?)을 가리킨다. 방각은 자는 성부(性夫), 송나라 동려(桐廬) 사람으로, 《예기집해(禮記集解)》를 지은 인물이다. 무릇……듯합니다 《송자대전(宋子大全)》 권102 〈답이백첨(答李伯瞻)〉. 우암은 당시 '병제고비(並祭考妣)'의 설과 '제일위(祭一位)'의 설이 있으니, 고비에 모두 제사 지내는 것이 옳다면 신위가 각기 다른 독(櫝)에 모셔져 있더라도 두 독을 함께 받들고 나옴을 의심할 것이 없고, 일위(一位)에만 제사를 모셔야 한다면 합독(合櫝)이라 할지라도 한 분의 신위만 따로 빈 독에 모셔 나옴을 꺼려할 것이 없는데, 주자의 《가례》에는 합독이 정식이므로 이를 어길 수 없다고 하면서 예를 아는 자에게 다시 물어야 한다고 결론을 유보하였다. 사신(辭神) 제사를 마치고서 신주를 거두어 신주를 넣어 두는 궤인 주독(主櫝)에 넣는 일이다.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삼략(三略)》219)을 읽고 讀三略書 남자다운 마음과 여자 같은 용모220)왕교(王喬)221)와 같은 자품으로 기(夔)와 용(龍)222)처럼 되기를 허락하였네처음 천하를 평정할 적에는 황석공(黃石公)에게 배웠고223)만년에 공명(功名)을 이루고서는 적송자(赤松子)를 벗하였네224)한(漢)과 초(楚)의 흥망(興亡) 세치 혀에서 판가름 났고225)진(秦)과 한(韓)의 묵은 원한 긴 병기(兵器) 하나로 보여 주었네226)썰렁한 서재【'한(寒)'은 어떤 본에는 '한(閑)'으로 되어 있다.】에서 당시의 비결(秘訣)을 다 보고나니나도 모르게 천지의 장대한 기운이 따라 일어나네 男子心胷女子容王喬身世許夔龍初平天下師黃石晩遂功名友赤松漢楚興亡三寸舌秦韓讎怨一長鋒寒【寒一作閑】齋閱盡當年訣不覺乾坤壯氣從 삼략(三略) 한(漢)나라의 장량(張良)이 황석공(黃石公)에게서 받았다고 하는 병서(兵書)로, 상략(上略), 중략(中略), 하략(下略)의 세 권으로 되어 있다. 남자다운……용모 사마천(司馬遷)이 장량(張良)을 평한 말에, "나는 그 사람이 체격이 크고 기이하게 생긴 줄 알았는데, 그의 화상(畫像)을 보니, 마치 아름다운 여인(女人)과 같았다."라 하였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이다. 《史記 卷55 留侯世家》 왕교(王喬) 왕자교(王子喬)를 가리킨다. 유향(劉向)의 《열선전(列仙傳)》에 의하면, 왕자교는 주(周)나라 영왕(靈王)의 태자 진(晉)으로, 피리 불기를 좋아하였는데 피리를 불면 봉황새 우는 소리가 났다. 이수(伊水)와 낙수(洛水) 사이에서 노닐다가 도사(道士) 부구공(浮丘公)을 만나 숭산(嵩山)에서 신선술을 배웠고, 30여 년 뒤에 흰 학을 타고 구씨산(緱氏山) 꼭대기에 내려와 신선이 되었다고 한다. 장량 역시 공업(功業)을 이른 뒤에 적송자(赤松子)를 따라 노닐고자 하였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이다. 기(夔)와 용(龍) 순(舜) 임금의 어진 두 신하를 말한다. 기(夔)는 음악을 담당하였고, 용(龍)은 간언(諫言)을 담당하였다. 한 고조(漢高祖) 유방(劉邦)의 신하가 된 장량을 이들에 빗댄 것이다. 처음……배웠고 장량이 하비(下邳)의 다리에서 황석공(黃石公)이라는 노인을 만났는데, 노인이 다리 밑으로 떨어진 신을 주워달라고 하였다. 장량이 신을 주워 공손히 신겨주자, 노인은 그에게 강태공의 병법서를 주었다. 장량은 이를 익혀 고조를 도와 천하를 통일하였다. 《史記 卷55 留侯世家》 만년에……벗하였네 '적송자(赤松子)'는 전설상의 신선 이름이다. 장량은 천하가 통일된 뒤 자신의 몸을 보전하기 위하여 고조(高祖)에게 "인간사를 버리고 적송자를 좇아 놀기를 원합니다.[願棄人間事 欲從赤松子遊]"라 하였다. 《史記 卷55 留侯世家》 한(漢)과……났고 장량이 한 고조(漢高祖) 유방(劉邦)의 모신(謀臣)으로 활약하며 한(漢)나라가 초(楚)나라에게 승리를 거두는 데 많은 공을 세웠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이다. 진(秦)과……주었네 장량은 선조가 한(韓)나라 사람이었는데, 진(秦)나라에 의해 한나라가 멸망당하자 그 원수를 갚기 위해 창해역사(滄海力士)로 하여금 철퇴를 들고 박랑사(博浪沙)에서 진시황을 저격하게 한 일이 있었다. 그러나 철퇴가 빗나가 진 시황이 탄 마차를 맞히지 못하고 다음 수레를 치고 말았다. 《史記 卷55 留侯世家》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한가로이 거닐며 閒行 난초 언덕과 푸른 이끼 모두 밟고서봄빛을 찾아 높은 누대에 오르네오솔길 방초(芳草)와 이어지니 향기가 나막신에서 생겨나고사람이 푸른 소나무에 의지하니 푸른빛이 잔에 스며드네십 리의 물결 빛깔 상과 도마에 일렁이고온 산의 꽃기운 술동이를 이끄네얼큰히 취해 동풍(東風)을 마주하니천 송이 만 송이의 희고 붉은 꽃들 저마다 활짝 피어 있네 踏盡蘭臯與碧苔行尋春色上層臺逕連芳草香生屐人倚靑松翠入盃十里波光搖案俎一山花氣惹樽罍薰然醉對東風面萬白千紅自在開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중간 발문(1)12) 重刊跋(1) 대개 문학(文學)과 충량(忠良)은 바로 나라의 정간(楨幹)13)이다. 옛날에 뛰어난 문장과 탁월한 절개가 백대에 빛나는 자가 있으면 태사씨(太史氏 사관(史官))가 동관(彤管)14)으로 먼저 능연각(凌煙閣)15)과 죽백(竹帛 사서(史書))에 기록하여 천지와 더불어 영원하게 하였다. 또 그 자손 된 자가 혹 판각하여 길이 전하고 활자(活字)로 간행하여 세상에 널리 배포하여 그 영광과 그 공렬을 해와 달처럼 빛나게 하고 서리와 눈처럼 늠름하게 하였으니, 어찌 천년 뒤에 죽은 사람을 되살렸다고 이르는 것이 아니겠는가.아! 생각건대 나의 9대조 충의공(忠毅公) 농포(農圃) 선생은 풍부한 문학으로 일찍 갑과(甲科)에 급제하였다. 선묘조(宣廟朝) 임진년(1592)을 당하여 북쪽 지역을 안정시켰으니, 곧은 충정은 백세토록 빛나서 국사(國史)에 밝게 드러날 뿐만이 아니라고 이를 만하다. 또 전후로 기실(記實)을 찾아내고 채집하여 여러 선생이 집필한 글에 자세히 갖추었으니, 이제 후손의 좁은 소견을 어찌 감히 그사이에 덧붙이겠는가.아! 나의 5대조 불우헌공(不憂軒公 정상점(鄭相點))은 바로 선생의 현손이다. 일찍부터 강개한 마음을 가지고 조상을 위한 일에 정성을 다하였으니, 선생이 평소 집에 소장하고 있던 본초(本草)와 유사(遺詞) 및 일고(逸稿)를 좀먹거나 교감(校勘)16)한 뒤에 수습하고, 병란과 환란을 겪은 뒤에 모아서 주선하여 판각한 것이 바로 두 권의 책17)이다. 간행하여 세상에 전한 지가 100여 년에 이르렀으며, 각판(刻板)은 진주(晉州) 용암(龍巖)의 재실(齋室)에 보관되어 있기에 이로 인해 사모하는 마음을 부친 지가 오래되었다.그러다가 근래에 경향(京鄕)의 세가(世家)와 북쪽 지방의 유생들이 소중하게 보관한 것을 널리 채집하고 두루 찾아서 또 몇 권을 문집에 편입(編入)하였기 때문에 지금은 바야흐로 활자로 간행하여 널리 배포하고 있다. 그런데 만약 예전대로 구집(舊集 정상점 간행본)을 속간(續刊)한다면 책 모양의 크기, 목판과 활자의 자체(字體)와 편차(編次)의 선후에 착란의 잘못이 있기 때문에 부득이하게 전부 활자로 하기로 논의를 결정하였다. 구집의 각판은 자연스럽게 존각(尊閣)18)에 돌려놓았을 따름이니, 우리 불우헌공의 자손이 된 자라면 누구인들 애석하게 여기지 않겠는가. 그렇지만 나의 5대조께서 조상을 위한 일에 깊이 생각할 겨를이 없었으니, 결국에는 계술(繼述)하는 도리에 있어서 완집(完集)을 간행하는 것이 도리어 구집을 속간하는 것보다 좋은 점이 있다 하겠다.숭정(崇禎) 기원후 5번째 경인년(1890) 3월 하현(下弦)에 9대손 혁교(奕敎)가 두 손 모아 절하며 삼가 쓰다. 蓋夫文學、忠良, 卽國之楨幹也。古有偉文、卓節, 光耀於百世者, 則太史氏彤管, 先以凌烟、竹帛, 而與天地相終焉。且爲其子孫者, 或鋟梓壽傳, 印鑄廣布, 使其光其烈, 煥乎若日月, 凜乎若霜雪者, 豈非起死人於千載之下云者乎? 噫! 唯我九代祖忠毅公農圃先生, 以贍實文學, 早登甲科, 當宣廟朝壬辰歲靖北, 貞忠可謂百世光耀, 而不但於炳著國乘。又前後採訪記實, 備悉於諸先生秉筆之下, 則今以後孫之管見, 何敢贅附於其間哉? 粵我五代祖不憂公, 卽先生之玄孫也。夙抱慷慨, 殫誠爲先, 先生之平日家藏本草與遺詞、逸稿, 收拾於蠹食、偏傍之餘, 裒葺於兵燹、患亂之後, 而周旋剞劂者, 乃兩卷冊子也。刊行傳世, 至於百有年所, 而刻板則藏于龍巖齋室, 仍以寓慕者久矣。近於京鄕世家與北儒珍藏, 博採旁搜者, 又爲數卷編集, 故今方印鑄布行, 而若仍舊續集, 則冊樣大小, 板鑄字體, 編次先後, 有失於舛錯, 故不獲而全以活字歸論。而舊集板刻, 自然歸之於尊閣而已, 則爲吾不憂公子孫者, 孰不慨惜? 而以吾祖爲先, 未遑底意, 究竟則其在繼述之道, 印行完集, 反有賢於續舊也哉。崇禎紀元後五庚寅暮春下弦, 九代孫奕敎, 拜手謹識。 대본에는 제목이 없는데, 이 중간 발문은 정문부의 9대손 정혁교(鄭奕敎)가 1890년에 7권 4책으로 편차한 뒤에 활자본으로 중간하고 붙인 것이다. 정간(楨幹) 정은 담의 양쪽 끝에 세우는 나무이고 간은 양면에 세우는 나무로, 사물의 근본을 비유하는 말이다. 동관(彤管) 자루가 붉은 붓으로, 사필(史筆)을 가리킨다. 옛날 주(周)나라 때 여사(女史)가 이러한 붓을 가지고 궁중의 정령(政令)이나 후비(后妃)의 일을 기록하였다. 《詩經 邶風 靜女》 능연각(凌煙閣) 당 태종이 정관(貞觀) 17년(643)에 장손무기(長孫無忌)와 두여회(杜如晦) 등 훈신(勳臣) 24명의 초상화를 그려서 여기에 걸어 놓게 하였다. 《新唐書 卷2 太宗皇帝本紀》 교감(校勘) 초고(草稿)를 정리하여 간행하는 과정 중에 글자의 변(偏)과 방(傍)이 비슷한 속자(俗字)를 교감하여 수정하는 작업을 가리킨다. 두 권의 책 1758년에 정상점(鄭相點)이 간행한 것을 말한다. 존각(尊閣) 존경각(尊經閣)의 준말로, 지방 향교나 서원의 장서각(藏書閣)을 말한다.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중간 발문(2)19) 重刊跋(2) 농포 정공(鄭公)은 왜적이 날뛰던 때에 북병사(北兵使)의 좌막(佐幕)이었는데, 유아(儒雅)한 몸으로 사시(蛇豕)의 돌진20)을 가로막아 세상에 드문 기이한 공을 세우고도 끝내 시안(詩案)의 화를 당하였다. 애석하다! 하늘이 이미 공에게 문무를 겸비한 재능을 부여하여 태어나게 하였는데, 큰 난리로 곤액(困厄)을 겪게 하고 깊은 원통함에 빠지게 한 것은 도대체 또 무슨 의도인가. 옛날에 악 무목(岳武穆)이 '막수유(莫須有)'라는 세 글자 때문에 죽자21) 세상 사람들이 슬퍼하였으니, 공의 충성과 원통함이 거의 옛사람과 결과가 같아 영원히 지사(志士)의 눈물을 자아내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열성조(列聖朝)께서 원통함을 씻어주고 공적을 포상하여 선양해 준 것에 대해서는 진실로 남은 유감이 없으니, 그 성대한 조우(遭遇)가 어찌 생사에 차이가 있겠는가.공의 유문(遺文)은 화환(禍患) 중에 잃어버려 매우 희소하지만, 그 말씀과 공업(功業)은 진실로 모두 여기에 남아있으니, 잘 관찰하는 자가 여기에 나아가 이를 반복해서 본다면 또한 평소의 모습을 대략 알 수 있을 것이다. 후손이 장차 이 문집을 다시 간행하고자 하여 나에게 권미(卷尾)에 한마디 말을 써넣도록 하였다. 아, 경송(勁松)22)은 덩굴지지 않고 빛나는 해는 요기(妖氣)가 없으니, 이와 같지 않다면 그의 강직한 성정이 어떻게 흘러나왔겠는가? 나의 선자(先子)이신 문정공(文正公 송시열(宋時烈))께서 일찍이 그 사업을 논하면서 사당터를 하사받은 곳에 제사 지내는 것을 허락하였다.23) 아름다운 칭송 같은 것에 대해서도 민 문간공(文簡公 민우수(閔遇洙))의 서문에 빠짐없이 서술하였으니, 또 어찌 나의 군더더기 말을 기다리겠는가. 그럭저럭 마음에 느낀 바를 써서 돌려주었다.숭정 기원후 5번째 경인년(1890) 초봄에 덕은(德殷) 송병선(宋秉璿)이 발문을 쓰다. 農圃鄭公, 佐幕北閫於島夷陸梁之日, 以儒雅之身, 橫蛇豕之衝, 建立不世寄功, 而卒罹詩案之禍。惜乎! 天旣以文武全才乎公而生, 阨之以大亂, 沈之以幽寃者, 抑又何意歟? 昔岳武穆死於莫須有三字, 天下悲之, 則公之爲忠爲寃, 殆與古人同歸, 而足以釀千古志士之淚矣。然列聖之湔滌褒顯, 固無餘憾, 則其遭遇之盛, 奚間於生死也哉? 公之遺文, 逸於禍患, 雖甚寂廖, 而其言語也事功也, 固皆在於斯矣, 善觀者卽此而反覆之, 亦可以槪其雅素矣。後孫將欲重刊是集, 而俾余置一言於卷尾。噫! 勁松不蔓, 光日無氛, 不如此, 其何以爲剛腸之所流出哉? 吾先子文正公, 嘗2)論其事業, 許以俎豆於受賜之地。至如稱述之美, 閔文簡3)公序殫矣, 又何待余言之贅? 聊書所感於中者以歸之。崇禎紀元後五庚寅孟春, 德殷宋秉璿, 跋。 대본에는 없는데, 《연재집(淵齋集)》 권28에 근거하여 보충하였다. 사시(蛇豕)의 돌진 큰 멧돼지와 긴 뱀[封豕長蛇]과 같이 끝없이 탐욕을 부리면서 포학한 짓을 하는 왜적이 함경도로 돌진하는 것을 말한다. 옛날에……죽자 무목(武穆)은 남송(南宋) 때 충의가 뛰어난 명장 악비(岳飛)의 시호이다. '막수유(莫須有)'는 '아마도 있을 것이다.'라는 뜻으로, 분명하고 확실하지 않은 사실을 개연성만으로 있을 것이라고 추단(推斷)하여 근거 없이 무함하는 것을 말한다. 진회(秦檜)가 충신 악비를 죽이려고 무함하여 "악비의 아들 운(雲)이 장헌(張憲)에게 편지를 보냈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사체로 보면 아마도 있을 것이다."라고 하자, 한세충(韓世忠)이 "'막수유' 세 글자가 어떻게 천하를 복종시키겠는가."라고 한 데서 나왔다. 《宋史 卷365 岳飛列傳》 경송(勁松) 서리나 눈에도 시들어 죽지 않는 강(強)한 소나무로, 정신(貞臣)을 비유하는 말로 사용된다. 문정공(文正公)이……허락하였다 《송자대전(宋子大全)》 권48 〈이계주에게 답함[答李季周]〉에 "고서(古書)에 '큰 난을 막은 자가 있으면 이를 제사지낸다,'고 한 글이 있으니, 지금 이로써 사당터를 하사받은 곳에 제사 지내는 것을 어찌 의심하고 의심하겠는가.[古書, 有抗大難則祀之之文, 今以此俎豆於受賜之地, 何疑何疑?]" 하였다. 1665년에 외재(畏齋) 이단하(李端夏)가 단천(端川) 군수 홍석구(洪錫龜)와 경성(鏡城) 어랑리(漁郞里)에 사당터를 정하고, 이해 4월 26일에 공사를 시작하여 9월에 공사를 마쳤다. 어랑리는 바로 농포 정문부가 이붕수(李鵬壽)와 의병을 일으켰던 곳이다. 《農圃集 卷7 年譜》 嘗 대본에는 '常'으로 되어 있는데, 《연재집》 권28에 근거하여 고쳤다. 簡 대본에는 '元'으로 되어 있는데, 1758에 문간공(文簡公) 민우수(閔遇洙)가 지은 서문(序文)에 근거하여 수정하였다.

상세정보
84193건입니다.
/4210
상단이동 버튼 하단이동 버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