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6년 류영구(柳永求) 등 편지(便紙)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개인-생활-서간 丙午年九月日 高興郡過驛面道川里 萬宗齋 發起人 永求 等 23名 丙午年九月日 [柳]永求 고흥 고흥류씨 류탁 후손가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966년에 만종재(萬宗齋) 발기인(發起人) 류영구(柳永求) 등 23명이 유허비(遺墟碑) 제막식(除幕式)과 만종재 보수에 참여를 요구하며 보낸 편지 1966년 9월에 만종재(萬宗齋) 발기인(發起人) 류영구(柳永求) 등 23명이 유허비(遺墟碑) 제막식(除幕式)과 만종재 보수에 참여를 요구하며 보낸 편지이다. 편지에 따르면 류씨 가문의 대동보를 중수하고 남은 금액으로 선조인 영밀공(英密公) 류청신(柳淸臣)의 유허비를 고흥 양류동(楊柳洞) 입구에 건립하여 선조의 무고를 밝힐 수 있었으니 자손 모두 기뻐할 일이다. 그러나 유허비의 완공을 계기로 자손들이 모이고자 했으나 경제난으로 인하여 불가능했고, 철문 또한 오랜 세월이 지나도록 열지 못하니 유감이라고 했다. 또 시중도(侍中島)의 만종재(萬宗齋)는 가까이 사는 자손들이 돌봐왔으나 이번 풍우에 훼손되었다며 유허비 제막식과 만종재 보수에 함께하여 유종의 미를 거두게 해달라고 요청하고 있다. 제막일시는 1966년 음력 10월 13일이며 장소는 고흥군 풍양면 양류동이다. 이 문서는 국한문 혼용문 인쇄본으로 복본 6장이 함께 남아있다. 류청신의 본관은 고흥(高興)이며 본래 이름은 비(庇)이다. 공민왕 때 좌정승을 지낸 유탁(柳濯)의 할아버지이다. 장흥부(長興府) 고이부곡(高伊部曲)에서 출생했으며, 선대는 대대로 그곳의 부곡리(部曲吏)였다. 몽골어를 잘해 여러 차례 원나라에 사신으로 내왕했고 그 공으로 충렬왕의 총애를 받았으며, 원나라 황제로부터 청신이라는 이름을 받아 개명하였다. 그의 유허비가 있던 고흥 양류동은 현재 전라남도 고흥군 풍양면 한동리이다. 만종재는 류승무(柳升茂)를 배향하기 위해 1872년에 만든 제각(祭閣)이다. 주 출입문 역할을 하는 백세문(百世門), 요사채 역할의 영수재(永修齋)와 모성재(慕誠齋), 향사를 지내는 본당인 만종재가 있으며, 중수 후 세운 비가 6기 존재한다. 만종재는 분방한 기질을 민중에 투사한 류몽인의 『어우야담(於于野談)』이 소장 보관되어 있던 곳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