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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영변의 계축에 제하다 題寧邊契軸 관서는 멀리 오랑캐 땅과 이웃하고 있으니장성은 예로부터 사람에게 달렸어라장군은 절로 흉중에 철갑이 있고막객은 항상 좌상의 봄이 되누나한가한 날 계산에서 두루 유상하나니훗날 그 모습 그림으로 볼 수 있으리강주의 늙은 수령 어찌 그리 늦게 왔는고노둔하여 후배들에게 낄 수가 없구나 西土遙將虜境鄰長城從古在於人將軍自有胸中甲幕客常爲座上春暇日溪山遊賞遍他年面目畵圖新江洲老守來何暮駑劣無由仄後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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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호를 받고119) 느낌을 읊다 2수 증손 진사 집 延諡感吟【二首 曾孫 進士楫】 은혜롭게 연이어 내린 글 바삐 봉함 열어보니증조부께 시호 내려질 거라 알려 왔네다투어 피는 뜰의 꽃도 기쁜 마음 알고지저귀는 산새도 즐거운 심정 아네오늘 밤 잔약한 자손은 손뼉 치며 기뻐하니어느 때 영광스런 시호 공경히 맞이하려나이 늙은이의 짧은 여생 스스로 생각해보니소년들아 관직의 성취 기대한다 하지 말라일찍이 임진년과 계사년 변란 당한 선조홀로 무한한 북방의 공적 거두었네당시의 풍렬 아직까지 관북에 남아 있고여사로 지은 문장 해동 밝게 비추네선왕의 관작 추증 영광 이미 지극한데오늘 내리신 시호 은총 새롭고 성대하네임금의 은혜 갚고자 해도 나는 노쇠했으니아이들에게 각각 충성 바치라고 권할 뿐이네 惠連書倒坼緘忙報道曾公已易名爭笑庭花知喜氣解歌山鳥識歡情孱孫此夕惟忻忭榮號何時得祗迎自念老夫餘日短少年休說待官成先祖曾丁壬癸中獨收無限朔方功當時風烈留關北餘事文章照海東贈爵先朝榮已極易名今日寵新隆君恩欲報吾衰矣只勉兒曹各效忠 시호를 받고 계사년(1713, 숙종 39)에 '충의(忠毅)'라는 시호의 비준을 받았다. 《農圃集 年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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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계에서 경차관에게 주다 江界贈敬差官 근래 술에 젖어 해가 늦도록 잠을 자는데일어나 봄 경치 찾았으니 분수 넘어 드문 일이라네밤비는 방초에 흔적을 남기고저물녘 바람은 낙화를 하늘거리며 떨어지게 하누나경차관은 웃으며 말하니 따뜻한 옥과 같고곱게 단장한 기녀는 걸음걸음 연꽃 같아라다시 백 잔 술 들어 한 번 취하니내가 노강309)가에 있는 줄을 알지 못하겠구나 近來中酒日高眠起訪韶華分外鮮夜雨餘痕芳草地晩風新態落花天繡衣笑語溫溫玉粉面梳粧步步蓮更擧百杯成一醉不知身在魯江邊 노강 강계에 있는 독노강(禿魯江)을 가리킨다. 봄철의 유흥을 즐기니 변방에 와 있는 줄 알지 못하겠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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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동명장전 이계 홍양호 海東名將傳 【耳溪洪良浩】 정문부(鄭文孚)의 자는 자허(子虛)로 본관은 해주(海州)이다. 젊어서 독서를 좋아하였고 글을 잘 지었다. 선조 무자년(1588년)에 문과에 합격하여 괴원(槐院, 승문원)에 속하였다가 함경북도 병마평사(兵馬評事)로 나갔다. 임진란에 행장(行長)과 청정(淸正)이 임진강을 건너 임금의 수레가 혹시 북관(北關)에 들어간 것을 예상하고서 길을 나누어 갈 것을 약속하였다. 행장은 서쪽으로 향하여 가고 청정은 북쪽으로 향하여 가는데, 용맹은 왜적 중에 제일이며 거느린 병사는 더욱 날래고 사나웠다. 곡산(谷山)으로부터 노리현(老里峴)을 넘어 철령(鐵嶺)으로 나아가니 북방을 지키던 군사가 궤멸되었다. 청정은 하루에 수백 리를 다녀 형세가 비바람과 같았는데 지나간 곳은 노략으로 닭과 개는 물론 땅 위에 아무 것도 남겨 두지 않았다.감사(監司) 유영립(柳永立)은 산골짜기로 피하여 들어갔는데, 반민(叛民)들이 왜병을 인도하여 그를 붙잡았다. 북청부(北靑府) 사람 김응전(金應田)이 거짓으로 감사의 종[奴]이라고 칭하고 적중에 들어가 밤에 틈을 타서 업고 도망하여 행재소에 돌아왔다. 판관(判官) 유희진(柳希津)은 반민에게 잡혀 항복하였고, 병사(兵使) 이혼(李渾)은 갑산(甲山)으로 달아났으나 반민에게 죽음을 당하였으며, 갑산 사람들은 또 부사(府使)를 죽이고 왜적에게 항복하였다.왕자 순화군(順和君)이 철원(鐵原)에 들어갔다가 왜적이 강원도로 들어간다는 소문을 듣고 드디어 철령(鐵嶺)을 넘어 함경남도에 들어가 임해군(臨海君)을 따랐었다. 이에 이르러 두 왕자는 또 남도로부터 군사를 피하여 북도(北道)에 들어갔다. 청정이 함경북도에 들어오자 병사(兵使) 한극함이(韓克諴)은 전투에 패하여 포로가 되었고, 남병사(南兵使) 이영(李瑛)도 마천령(磨天嶺)에서 패하게 되자 주군(州郡)이 모두 함락되었다. 이전에 두 왕자는 사나운 종놈을 풀어서 민간을 소란스럽게 하여 민심을 크게 잃었는데, 회령(會寧) 향리 국경인(鞠景仁), 경성(鏡城) 관노 국세필(鞠世弼), 명천(明川) 사노(寺奴) 정말수(鄭末秀) 등이 각각 성을 점거하고 두 왕자 및 배신(陪臣) 김귀영(金貴榮), 황정욱(黃廷彧) 등 수십 명을 맞아들여 항복시킨 뒤에 붙잡아 두었다.청정이 승승장구하며 두만강에 이르러 육진(六鎭)의 성보(城堡)를 다 빼앗았다. 그리고 국 경인을 왜의 관직인 판형(判刑)으로 삼았고 국세필은 예백겸본도병사(禮伯兼本道兵使)로 삼았고 말수도 대장(大將)으로 삼아 북관을 나누어 통솔하게 하였다. 이때 정문부가 평사(評事)로서 경성(鏡城)에 있다가 난을 만나 탈출하여 산중에 숨어 있었는데, 경성 유생 이붕수(李鵬壽)와 최배천(崔配天)이 정문부를 보고 군사를 일으켜 적을 토벌할 것을 청하니 정문부가 흔연히 그 말을 따랐다. 드디어 정문부를 장수로 추대하고 토병(土兵)을 모집하였는데 장사(壯士)가 수백과 현지 수령의 변장(邊將)이 모두 그에게 모여들었다.북쪽 오랑캐가 기회를 틈타 여러 번 변방을 노략질하니 국세필은 근심하고 두려워하고 있었다. 최배천은 원래 국세필과 사이가 좋았으므로 혼자 말을 타고 가서 거짓으로 의탁하는 것처럼 하니 국세필의 어미가 경계하여 말하기를 "최생은 범상한 사람이 아니니 쉽게 여겨서는 안 된다."라 하였으나 국세필이 이를 따르지 않았다. 최배천이 틈을 타서 달래기를 "북쪽 오랑캐가 만약 크게 쳐들어오면 진실로 상대하기 어려울 것이다. 정 평사는 위엄과 덕망이 있으니 능히 맞아들여 함께 오랑캐를 지키면 그리 염려할 것이 없다."라고 하니, 국세필은 마음속으로 그렇게 여겼다. 최배천이 돌아와 정문부에게 고하니 정문부가 곧 격문을 보내어 타일렀다. 국세필이 의심을 하여 군사에게 엄명하고 기다리니 정문부가 군사를 거느리고 성 아래 이르러 국세필을 보고 친히 달래고 타이르니 국세필이 비로소 맞아들이고 병사의 부신(訃信)을 바쳤다. 그러자 정문부가 영을 내리기를 "높거나 낮은 백성과 병사들에게 예전에 법을 범한 것은 묻지 말라."라 하고 세필로 하여금 전같이 군사를 맡도록 하였다. 여러 장수들이 국세필을 죽이고자 하니 정문부가 허락하지 않았으며 또 반병(叛兵) 가운데 일찍이 자기를 쏘아 상처를 입힌 자를 발탁하여 비장(裨將)으로 삼았다. 그러나 국세필은 여전히 방심하지 않았으며 그 심복으로 하여금 정문부의 좌우에서 가까이 모시어 동정을 살피도록 하였다. 정문부가 이에 그 무리를 시켜 사졸과 함께 성에 올라 전투를 연습하게 했는데, 밤에 이르러 파하였으며 매일 이렇게 하였다.왜인이 경기병(輕騎兵)으로 문득 와서 성을 두드리거늘 정문부가 국세필을 시켜 왜장을 꾀어 문에 들어오도록 하여 그를 사로잡았다. 안원 권관(安原權官) 강문우(姜文祐)에 명령을 내려 나머지 병사들을 추격하게 하고 드디어 주군에 격문을 돌려 반병(叛兵)의 항복을 받았다. 육진(六鎭)에서는 정문부가 이미 배반한 자들을 석방하였다는 소문을 듣고 차례로 투항하였다. 이에 장수와 군사, 호걸들이 서로 다투며 모집에 응하였다. 이에 주변의 성보(城堡)를 다 회복하니 북도의 인심이 점차 안정되었다.정문부가 회령(會寧)에 격문을 보내 국경인에게 자신에게 와 항복하도록 타일렀으나, 국경인은 따르지 않고 길주에 주둔한 적과 더불어 경성을 협공하려고 꾀하였다. 한편 회령 사람 오 윤적(吳允迪) 등이 향교에 모여 국경인을 쳐서 정문부에게 호응할 것을 꾀하였다. 국경인이 염탐하여 알고는 급히 향교를 포위하고 주모자를 나오라고 위협하므로, 오윤적이 몸을 빼어 자수하니 국경인이 그를 체포하였다. 그런데 부(府)의 아전 신세준(申世俊)이 몰래 국경인의 요각(鐃角)을 훔쳐 객사 문 밖에서 부니 반병(叛兵)들은 국경인이 영을 내렸나하고서 일시에 모여드니 숲을 이룬 듯했다.신세준 등이 그들을 통솔하여 그의 영을 따르지 않는 자는 죽인 다음 여러 사람들을 고무시켜 나아가 국경인에게 말하기를 "성 안의 병사가 이미 다 나한테 귀속되었다. 네가 오윤적을 내놓으면 마땅히 군사를 파하겠다."라 하니, 국경인이 겁을 먹고 이를 따랐는데, 드디어 국경인의 참수하여 그 머리를 경성에 전해주었다. 오윤적이 군사를 거느리고 정문부에게 간 뒤에 명천 사람들이 자제를 단결시켜 말수를 치고서 정문부에게 응하기로 했는데 말수에게 패하였다. 정문부가 몰래 오촌 권관(吾村權官) 구황(具滉)과 안원 권관 강문우를 보냈다. 이들이 60여 기병을 거느리고 주야로 행군하다가 갑자기 명천(明川)에 쳐들어가니 말수가 겁을 내어 성을 버리고 도주하였지만 관군이 추격하여 사로잡아 죽였다. 이에 영북(嶺北)의 성과 읍은 다 회복하였으나 오직 길주만 왜적이 차지하고 있었다.정문부가 이에 군민(軍民)을 편안하게 모여 살게 하니, 모집된 병사가 3천여 명에 이르렀는데 여러 병사들이 다 적을 쳐서 자신의 목숨을 바치려고 하였다. 정문부가 이에 대장기를 세우고 남문루(南門樓)에 올라 여러 장수의 인사를 받으면서 말하기를 "이제 장차 왜적을 치려고 하는데 나라의 반적이 아직 군중(軍中)에 있으니 먼저 토벌하지 않을 수 없다."라 하였다. 드디어 앉은 자리에서 국세필을 체포하고 아울러 그 무리 13명의 목을 베어 여러 사람에게 조리돌리면서 말하기를 "당초에 앞장서서 반란한 놈들은 이 무리들이므로 나머지는 문책을 하지 않는다."라고 하니, 이것이 정문부가 본래 계획한 것이었다. 군대의 함성이 크게 진동하고 사기가 십 배나 되었는데, 곧 장계를 갖추어 최배천(崔配天)을 행재소로 보내어 아뢰니 주상이 이를 가상히 여기고 정문부에게 옷과 신, 환약을 내리었다.부사(府使) 정현룡(鄭見龍)이 경성에 머물러 틈을 기다리고자 하므로 정문부가 말하기를 "본래 의병을 일으킨 것은 국가를 위함이다. 이제 다만 스스로 지키기만 하고 병사를 진격하여 왜적을 격파하지 않으니 반도들을 본받으려 함인가? 여러 사람의 의견을 들어봅시다."라 하였다. 이튿날 아침에 여러 사람을 남문 밖에 모이게 하여 이 두 사람의 다툰 바를 말하고 누가 옳고 누가 옳지 않은가 결정하라 하니, 여러 사람이 다 정문부가 옳다고 하였다.이 당시 왜장 직정(直正), 도문(道文), 도관(都關), 여문(汝文) 등이 길주를 점거하여 주둔하고 또 영동(嶺東)에다가 군사를 배치하고 책(柵)을 설치하여 남북도의 길을 통하게 하고서 왕래하며 불 지르고 노략질하였다. 정문부가 소속된 군사를 거느리고 명천에 나아가 주둔하면서 고령 첨사(高嶺僉使) 유경천(柳擎天), 방원 만호(防垣萬戶) 한인제(韓仁濟), 종사관(從事官) 원충서(元忠恕)를 몰래 보내어 길주 성 밖 세 곳에 병사를 매복시키고 엿보게 하였다.병진일 먼동이 틀 무렵 왜적이 병사 6백 명을 거느리고 나가 가파리(加坡里)를 불 지르고 노략질하고서 노략질 한 것들을 핍박하며 돌아오는데, 원충서가 2백 명의 기마병을 거느리고 먼저 달려가 그들을 맞이하여 왜적의 선도(先導)를 격파하니 왜적이 놀라 달아났다. 이 때에 적의 대진(大陣)이 성 안에서 계속 지원하니 원충서는 산이 험한 곳으로 물러갔다. 한인제가 구 황, 강문우 등 3백여 기병으로 달려와서 원충서와 더불어 군사를 연합하여 크게 전투를 벌였는데, 직정(直正), 도관(都關), 여문(汝文)이 선봉의 정예 군사 4백 명으로 앞장서 올라가니 관군이 돌기병(突騎兵)으로 출몰하면서 격파하였다. 전투가 날이 저물 때쯤 되자 왜적의 앞뒤 진들이 다 궤멸되었다. 유경천이 군사를 보내어 그 귀로를 차단하고 관군이 양쪽에서 협공하여 크게 격파하였다. 직정, 도관, 여문 등 다섯 장수의 목을 베었고 8백 여 수급(首級)과 군 장비 기계 1천여 점을 노획하였고, 노략당한 것을 다 빼앗아 돌아왔다. 구황과 강문우는 북방의 장수 가운데 가장 날래고 용맹한 자들이다.정문부가 싸움에서 이긴 여세를 타고 길주를 진격하는데 여러 날이 되도록 이기지 못하였다. 영동(嶺東)의 적이 대규모로 몰려오니 정문부는 쌍개포(雙介浦)에서 맞아 싸워 그들을 격파하였으며, 군사를 이동하여 영동책(嶺東柵)을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드디어 길주성 아래에 줄지어 진을 치고서 왜놈의 약탈을 막고 군량을 운반하는 길을 끊어 지구전을 꾀하였다.이보다 앞서 재신(宰臣) 윤탁연(尹卓然)이 왕자를 모시고 북으로 들어오다가 간사하게 남을 속이는 꾀로써 중도에 뒤쳐져 머물렀다가 방향을 틀어 갑산(甲山)으로 들어와 별해보(別害堡)에 이르렀는데, 행조(行朝)에서 윤탁연을 본도 감사로 삼았다. 이에 이르러 윤탁연은 정문부가 왜적을 물리친 공에 대해 듣고 시기하여 사실과 반대로 행조에 알렸으며, 또한 정문부의 병권을 빼앗고서 경성 부사 정현룡을 대신 북병장(北兵將)을 삼으니 군중(軍中)이 울분을 토하며 흩어져 떠나가 버렸다. 정문부가 드디어 병권을 놓고 북으로 육진을 순행하면서 군민(軍民)의 마음을 어루만지며 모여 살게 하였다. 북쪽 오랑캐들이 여러 번 변방에 들어와 약탈하므로 정문부가 매복했다가 그들을 격파하매 북쪽 오랑캐가 모두 귀순하였으니, 또 납지(蠟紙)로 그런 내용을 치계(馳啓)하였다.유생 이회록(李希祿)과 김응복(金應福)이 윤탁연에게 의병을 일으킬 것을 청하므로 윤탁연이 행조에 치계하고서 무과를 열어 백여 명을 취하였다. 무과 출신 유응수(柳應秀), 이유일(李惟一), 박중립(朴中立), 정해택(鄭海澤), 생원 한경상(韓敬商) 등이 군사 3천여 명을 모집하여 여러 번 싸워 다 승리하였다. 윤탁연이 말하기를 "이들이 능히 적을 토벌하였으니 적을 근심할 필요가 없다."라고 하였다. 갑산 부사 성윤문(成允文)으로 대장을 삼고 묘파(廟坡) 권관 백응상(白應祥)을 함흥 판관으로 삼아 모든 군사를 거느리고 독산(獨山) 아래로 나아갔는데, 왜적이 밤에 관군을 습격하니 성윤문이 어쩔 줄을 모르다가 몸을 빼내어 달아나니 일군(一軍)이 다 함락되었다.이유일, 유응수, 박중립, 정해택 등이 별도로 진을 치고 적을 치는데 간혹 돌격하여 왜놈의 머리를 베어왔다. 한인제(韓仁濟), 유응수, 이유일은 다 함흥 사람이다. 전공으로써 이름이 알려졌으니, 이들을 지목하여 함흥 삼걸이라 하였다. 한인제는 공으로써 북우후(北虞侯)가 되었다. 백응상은 연안(延安) 사람으로, 용맹함을 지녀 잘 싸웠는데 마침내 진에서 죽었다. 당시 북변을 수토하는 신하들은 물러서서 피하는 것이 상책이라 여기지 않는 이가 없었다. 그러나 단천 군수(端川郡守) 강찬(姜燦)은 남북의 사이에 끼어 사방을 돌아봐도 구원이 없으므로 군사를 모집하여 적을 쳤으니, 당시의 의론이 그를 가상하게 여겼다.윤탁연이 정문부의 군사를 빼앗고 자주 대장을 바꾸어 전투의 기회 그르친 것이 많았으니, 그는 죄를 얻을까 두려워하여 다시 정 문부를 기용하여 대장으로 삼았다. 정문부가 대장으로 직임에 나아가 사졸을 실컷 먹이고서 구황으로 하여금 2백 명의 기병을 선발하게 하여 단천 군수 강찬을 돕게 하니 그가 왜적 2백 명을 성 아래에서 죽이고 돌아왔으며, 원충서가 또 적장을 길주성 아래에서 죽였다.청정(淸正)이 행장의 패전한 통보를 듣고 경기(京畿)에 들어와서 장차 철군하여 돌아오려고 하였는데, 바야흐로 길주는 정문부에게 제압되어 스스로 빠져나올 수 없었다. 드디어 2만의 군졸로 마천령(摩天嶺)을 넘어 영동(嶺東)의 왜적과 더불어 군사를 합하여 와서 구원하는데, 정문부가 이를 염탐하여 알아내고 군사 3천여 명을 먼저 임명(臨溟)에 웅거하여 매복시켜 기다렸다. 계미일 날이 밝아올 때 왜적의 군대는 정문부의 군사가 적은 것을 보고서 돌아보지 않고 지나가므로 정문부가 군사를 움직여 그 뒤를 차단하고 좌우로 포위하여 날쌘 기병을 풀어서 내달리며 활을 쏘니 살상(殺傷)당한 자가 매우 많았고 피가 흘러 들이 벌겋게 물들었다. 이붕수와 이희당(李希唐)은 탄환에 맞아 죽었다.청정이 혈전을 벌이면서 퇴로를 열려고 관군과 더불어 60여 리에 걸쳐 접전을 벌였다. 이때 길이 막혀 황해도와 평안도의 소식이 두절되었는데, 정문부 등이 적의 형세가 다시 거세진 것을 보고 그들의 세력이 다시 쳐들어올까봐 걱정하여 명천(明川)으로 후퇴하여 주둔하였다. 이 날 밤 청정이 시체를 쌓아 불 지르고, 몰래 군사를 거두어 밤을 틈타 성을 넘어 밥 지을 겨를도 없이 달아나는데, 남쪽 우리 병사가 공격하여 퇴로를 끊을까 두려워하여 감히 함관령(咸關嶺)을 넘지 못하고 바다를 따라 달아났는데, 이유일이 병사를 거느려 그들을 추격하였다. 청정은 길성(吉盛)·중륭(重隆) 등과 함께 강원도의 모든 주둔군을 다 철수시켜 함께 한양에 모였다.정 문부가 장계를 올려 장수와 병졸에게 상 줄 것을 청하였는데, 윤탁연이 중간에서 저지하였다. 그러나 이유일은 군공(軍功)으로써 볼하 첨사(乶下僉使)가 되었고 유응수는 삼수 군수(三水郡守)에 임명되었으며 정문부는 통정 대부(通政大夫)에 승진되어 길주 목사(吉州牧使)로 임명되었다. 북로(北路)의 장사(壯士)들은 모두 의병을 풀고 떠났으며, 난이 평정됨에 정문부의 일을 말하는 사람이 없게 되었다. 정문부는 한직에서 한가하게 지냈다.인조 때에 이르러 북방의 경계46)가 발생하니 장수가 될 만한 인재를 천거하라 명하였는데 정문부를 원수로 천거하였다. 정문부가 이를 듣고 탄식하기를 "나는 죽을 것이다."라 하였다. 얼마 되지 않아 정문부가 지은 시를 습득하여 죄안(罪案)을 만들어 감옥에 가두고 고문을 가하다가 그를 죽였다. 이에 북방 사람들이 그것을 원통하게 여기지 않는 자가 없었다. 그 뒤 택당(澤堂) 이식(李植)이 북평사가 되어 북방 사람들의 칭송을 채집하여 조정에 알리게 되니, 공론이 비로소 돌아 그의 원통함을 씻고 그의 공을 포상하였으며, 북방 사람들이 경성(鏡城)에 나아가 사원을 세우고 제사지냈는데, 사액하기를 '창렬사(彰烈祠)'라 하였다. 鄭文孚, 字子虛, 海州人也。少好讀書, 善屬文。中宣廟戊子文科, 隸槐院, 出爲北道兵馬評事。壬辰之亂, 行長與淸正, 渡臨津, 慮車駕或入北關, 約分路, 行長向西, 淸正向北, 勇冠諸倭, 所領兵尤精悍。從谷山踰老里峴, 出鐵嶺, 北守兵潰。淸正日行數百里, 勢如風雨, 所過赤地, 鷄犬不遺。監司柳永立避入山峽, 叛民引賊兵襲執之。北靑府人金應田, 詐稱監司奴, 入賊中, 乘夜竊負, 逃歸行在。判官柳希津, 爲叛民所執降, 兵使李渾, 奔入甲山, 爲叛民所殺, 甲山人, 又斬府使而降賊。王子順和君入鐵原, 聞賊入江原道, 遂踰鐵嶺, 入咸鏡南道。隨臨海君。至是兩王子, 又自南道避兵入北道。淸正入咸鏡北道, 兵使韓克諴, 戰敗被擒, 南兵使李瑛, 亦敗於磨天嶺, 州郡皆陷。先是兩王子, 縱豪奴擾民間, 大失民心, 會寧鄕吏鞠景仁·鏡城官奴鞠世弼·明川寺奴鄭末秀等, 各據城, 迎降兩王子及陪臣金貴榮·黃廷彧等數十人被執。淸正長驅, 至豆滿江, 盡取六鎭城堡, 以鞠景仁爲倭官判刑, 鞠世弼爲禮伯兼本道兵使, 末秀爲大將, 分統北關。是時, 文孚以評事, 在鏡城, 遭亂脫身, 匿於山中, 鏡城儒生李鵬壽·崔配天, 見文孚請起兵討賊, 文孚欣然從之。遂推文孚爲將, 團集土兵, 壯士數百人, 所在守令邊將, 皆附之。北虜乘機, 屢掠邊境, 世弼憂懼, 配天素與世弼善, 單騎佯投之, 弼母戒曰: "崔生非凡人, 不可狎也。" 世弼不從。配天遂乘間說曰: "北虜若大至, 誠難與敵。鄭評事有威望, 苟能延入共守, 虜不足慮也。" 世弼心然之。配天歸告文浮, 卽馳檄諭之, 世弼持疑, 嚴兵以待。文浮率兵至城下, 見世弼親自說諭, 世弼始迎入, 納兵使符信。文浮下令曰: "大小民兵, 勿問舊犯。" 令世弼領兵如故。諸將欲斬世弼, 文浮不許, 又擢用叛兵嘗射己者爲裨將。世弼猶未放心, 使其腹心, 夾侍文浮左右, 伺察動靜。文浮乃使其屬幷士卒, 登城習戰, 至夜乃罷, 逐日如之。倭人以輕兵奄至叩城, 文浮命世弼誘倭將入門擒之, 令安原權官姜文祐, 擊走餘兵, 遂移檄州郡, 招降叛兵, 六鎭聞文浮已釋反側, 次第送款。將士豪傑, 爭先應募, 於是悉復緣邊城堡, 北道人心稍定。文浮移檄會寧, 諭敬仁來降, 敬仁不從, 與吉州屯賊謀夾攻鏡城。會寧人吳允迪等, 聚鄕校謀伐敬仁, 以應文浮, 敬仁諜知, 急圍鄕校, 脅出首唱, 允迪挺身自首, 敬仁囚之。府吏申世俊潛偸敬仁鐃角, 吹於客舍門外, 叛兵疑敬仁出令, 齊會如林。世俊等仍領之斬其不從令者, 鼓衆而前, 謂敬仁曰: "城中兵已盡歸我, 爾出吳允迪, 當罷兵。" 敬仁駭慄從之。遂斬敬仁, 傳首鏡城, 允迪領兵繼赴 後明川人團結子弟攻末守欲應文浮, 爲末守所敗, 文浮潛遣吾村權官具滉·安原權官姜文祐, 率六十餘騎, 晝夜幷行, 猝入明川末守惶怯, 棄城走, 官軍追擒斬之。於是嶺北城邑盡復, 惟吉州, 爲倭所據。文孚乃安集軍民, 募兵至三千餘人, 衆咸欲擊賊自效。文孚乃建大將旗, 上南門樓, 受諸將齊進曰: "今將討賊, 而國之叛賊, 尙在軍中, 不可不先討之。" 遂於坐席, 執世弼, 幷其黨十三人, 斬以徇衆曰: "當初首唱, 止此輩, 餘無問。" 此文孚本謀也。軍聲大振, 士氣十倍, 卽具啓遣崔配天, 聞行在, 上嘉之, 賜文孚衣履丸藥。府使鄭見龍欲住鏡城, 以俟釁, 文孚曰: "本興義兵, 爲國耳。今但自守, 不進兵擊賊, 欲效叛徒爲耶, 請聽于輿人。" 詰朝集衆南門外, 諭以兩人所爭, 孰可孰不可, 衆皆是文孚。是時倭將直正·道文·都關·汝文等, 屯據吉州, 又置兵設柵於嶺東, 以通南北路, 往來焚劫。文孚率所部, 進屯明川, 潛遣高嶺僉使柳擎天·防垣萬戶韓仁濟·從事官元忠恕, 設三覆於吉州城外, 以覘之。丙辰昧爽, 賊出兵六百, 焚掠加坡, 驅所掠而還, 忠恕率二百騎, 先馳邀之, 擊賊先導, 賊驚北。會, 賊大陣, 自城中繼援,忠恕退保山險。仁濟以具滉文佑等三百餘騎, 馳至與忠恕連兵大戰, 直正·都關·汝文, 以前鋒銳卒四百先登, 官軍以突騎出沒擊之。戰至日昏, 賊前後陣皆潰, 擎天遣兵截其歸路, 官軍兩面夾擊大破之, 斬直正都關汝文等五將, 獲首八百, 軍裝器械, 千餘計, 盡奪所掠而歸。具滉·姜文佑, 北將中最驍勇者也。文孚乘勝, 進攻吉州, 數日不克, 嶺東賊大至, 文孚邀于雙介浦敗之, 移兵攻嶺東柵, 又不克, 遂列屯吉州城下, 絶其剽掠, 阻其粮道, 以爲支久之計。先是, 宰臣尹卓然, 陪王子入北, 以詭計落留中道, 轉入甲山, 至別害堡, 行朝以卓然爲本道監司。至是, 卓然聞文孚成功嫉之, 反其功以聞, 又奪文孚兵懽, 以鏡城府使鄭見龍, 代爲北兵將, 軍中憤惋, 多散去。文孚遂釋兵, 北巡六鎭, 拊集軍民。蕃胡累寇邊, 文孚設伏破之, 胡蕃皆歸順, 又以蠟紙馳啓。儒生李希祿·金應福請卓然起義兵, 馳啓行朝, 設武科, 取百餘人, 武出身柳應秀·李惟一·朴中立·鄭海澤·生員韓敬商, 募兵得三千餘人, 屢戰皆捷, 卓然曰: "此輩尙能討賊, 賊不足憂也。" 以甲山府使成允文爲大將, 廟坡權管白應祥爲咸興判官, 統諸軍進于獨山下, 賊夜襲官軍, 允文不知所爲, 脫身逃走, 一軍盡陷。惟一·應秀·中立·海澤等, 別屯勦賊, 或突擊斬馘。韓仁濟·柳應秀·李惟一, 皆咸興人也。以戰功知名, 目爲咸興三傑, 仁濟以功爲北虞侯, 應祥, 延安人也, 勇果善戰, 竟殉於陣。當時北邊守土之臣, 莫不以退避爲得計, 而端川郡守姜燦, 介於南北之間, 四顧無援, 而能募兵討賊, 時論嘉之。尹卓然奪文孚兵, 數易將帥, 多誤戰機, 懼其得罪, 復起文孚爲將。將就職犒饗士卒, 使具滉簡二百騎, 往助端川郡守姜燦, 殺賊二百於城下而還, 元忠恕又擊殺賊將於吉州城下。淸正聞行長敗報, 入京畿將謀撤還, 吉州方爲文孚所扼, 不能自拔, 遂以二萬人踰磨天嶺, 與嶺東賊合兵來援, 文孚諜知之, 悉兵三千餘人, 先據臨溟, 設伏以待。癸未黎明, 賊兵見文孚兵少, 不顧而過, 文孚發兵, 截其尾, 繞左右, 縱輕騎馳射, 殺傷甚衆, 流血被野。李鵬壽·李希唐, 中丸而死。淸正血戰開路, 與官軍戰鬪六十餘里。時, 道梗, 兩西消息隔絶, 文孚等見賊勢更盛, 疑其再逞, 退屯明川。是夜, 淸正積尸燒之, 潛撤兵, 乘夜跳城, 不暇炊爨而走, 恐南兵勦絶, 不敢踰咸關嶺, 循海走。李惟一勒兵追之, 淸正又與吉盛重隆等, 盡撤江原道諸屯, 俱聚于京城。文孚又馳啓, 請賞將士, 而卓然從中沮抑, 李惟一, 以軍功爲乶下僉使, 應秀得拜三水郡守, 文孚陞通政拜吉州牧使。北路壯士, 無不解體, 亂平, 無人言文孚事者。優遊散地, 至仁祖朝有北警, 命擧將才, 有以文孚應元帥薦, 文孚聞之歎曰: "吾其死矣。" 未幾, 有摭文孚詩句, 成案逮獄栲死, 北人無不冤之。後澤堂李植爲北評事, 採北人之頌, 聞于朝, 公議始行, 雪其冤而褒其功, 北人就鏡城, 建祠祭文, 賜額曰彰烈祠。 북방의 경계 이괄(李适)의 난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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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포도 발문 이득화 雙浦圖跋 【李得華】 옛날 임진(壬辰), 계사(癸巳)의 액운을 어찌 차마 말하리요. 이 한 폭의 그림은 바로 농포(農圃) 정공과 그리고 우리 선조 창주공(滄洲公)이 의병을 규합하여 옛 길주성에서 섬 오랑캐를 무찌른 유물이다. 내가 죄를 지엇 남쪽에 귀양 갔다가 이것을 농포공 후손 정게(鄭垍)씨의 집에서 얻었으니, 아! 참담한 그림의 모습을 보면 완연히 오랑캐가 눈앞에 있는 것같이 보인다.아득한 옛 성은 음산한 구름이 아직도 가리었고 끊임없는 바닷물에는 뿌려진 핏방울에 여전히 비린내가 나는 듯하다. 그때에 왜놈들이 혹은 울며 혹은 아우성치고 달아나기도 하다가 엎어지기도 하며 죽은 시체가 서로 베고 쌓여서 한 대의 수레도 돌아가지 못하였으니, 그날의 열렬했던 충성과 당당했던 기상은 늠름히 바람과 천둥을 타고 해와 달을 육박하는 듯하여 지금도 한 폭의 종이 위에 빛나고 빛난다.불초한 후생이 두 분 어른을 뵈는 듯한 마음47)에 손을 씻고 눈물을 닦는데, 더구나 이 해가 마침 다시 돌아오니 절로 슬퍼진다. 아! 관북의 높고 위대한 공열은 이미 역사가의 표창하는 기록에 갖추어져 벼슬과 시호를 내리고 제향을 지내 융숭하게 보답하니, 어찌 감히 내 의견을 붙여 스스로 참람한 죄를 범하겠는가. 다만 두 집안 후손들이 백 대를 두고 서로 우의를 다졌던 것은 여태껏 저 만시 한 편에서 거울로 삼을 수 있으리라. 往昔龍蛇之厄, 尙忍言哉。今玆一幅之繪, 卽農圃鄭公曁吾先祖滄洲公, 糾集義旅, 勦破島夷於古吉州遺蹟也。不侫以罪南遷, 得此於農圃公後垍氏家藏, 噫, 慘憺意匠, 宛然如虜在目中矣。莽蒼古壘, 陰雲尙曀, 不盡滄溟, 臊血猶腥。于斯時也, 倭奴之或啼或號, 且奔且蹶, 僵屍相枕, 隻輪不返, 則伊當日, 烈烈之忠, 堂堂之氣, 凜然若駕風霆薄日月, 至今炳炳於尺紙上矣。不肖後生, 盥手抆涕於羹墻之感, 而重自悲斯歲之適回也。烏呼, 關北之豐功偉烈, 旣備於太史氏表揚之筆, 贈以爵諡, 享以崇報, 則更何敢竊附已意, 自速僭越之誅哉。惟兩家後承之百世相好者, 尙可鑑於輓詩一篇矣夫。 뵈는 듯한 마음 '갱장(羹墻)'은 죽은 사람에 대한 간절한 추모의 정을 말한다. 요(堯) 임금이 죽은 뒤에 순(舜)이 3년 동안 사모하는 정을 이기지 못한 나머지, 밥을 먹을 때에는 요 임금의 얼굴이 국그릇 속[羹中]에 비치는 듯하고, 앉아 있을 때에는 담장[墻]에 요 임금의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듯했다는 고사가 있다. 《後漢書 卷63 李固列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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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천사33)에 도착해서 태수에 부치다 到法泉寺寄太守 바다의 객 자연스레 놀다가34) 사찰에 오니 海客天遊到梵宮만 겹의 붉은 비단이 앞산을 에워쌌네 萬重紅錦擁前峰풍류스러운 태수는 아름다운 계절 만나 風流太守佳期在계수나무 우거진 속에서 생각이 무궁하리 桂樹叢中思不窮 海客天遊到梵宮, 萬重紅錦擁前峰.風流太守佳期在, 桂樹叢中思不窮. 법천사 전남 무안군 몽탄면 승달산에 있는 사찰이다. 725년 서아시아 금지국(金地國)에서 온 정명(淨明)이 창건하였다. 1030년에 불에 탄 뒤 약 100년 동안 폐사로 남아 있던 것을 1031년에 원나라 임천사(臨川寺)에서 온원명(圓明)이 중창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 때 불에 타자 불상 등을 산내 암자인 목우암(牧牛庵)으로옮겼다. 1662년 영욱(靈旭)이 중창하였으나, 1896년 다시 폐허가되었으며 1913년 나주에서 온 정병우(丁丙愚)가 암자를 짓고, 1964년 활연(活然)이 법당을 짓는 등 불사를 진행하여 오늘에 이른다. 자연스레 놀다가 원문의 '천유(天遊)'는 아무런 거리낌 없이 자연스러운 상태로 노니는 것을 뜻하는 말로, 《장자》 〈외물(外物)〉에 "사람의 몸 안에는 텅 빈 공간이 있어 마음이 그 속에서 천리(天理)에 따라 자연스럽게 노닌다.[胞有重閬, 心有天遊.]"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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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시연120) 자리에서 느낌을 읊다 5대손 진사 한웅 延諡宴席感吟【五代孫 進士漢雄】 임진왜란 때 무공 떨쳤던 대장부 몇인가우리 선조 적은 군사로 북변 평정하였네기린각 공신 화상에 홀로 공훈 빠지니사헌부의 문자 화액 유독 치우쳤네두 구절 시호로 추증하여 공론 펼쳐주었고한 가지 선행121) 특별한 은장으로 성은 입었네백관이 감동하여 아름다운 일 듣던 날이니한 집안의 사사로운 영광일 뿐만이 아니네 龍蛇宣武幾男兒吾祖單師靖北陲麟閣丹靑勳獨漏烏臺文字禍偏奇貳句褒贈伸公議壹惠殊章荷聖慈百辟動容聞美日榮光非直一家私 연시연(延諡宴) 조상에게 내린 시호를 받고 경축하기 위하여 여는 잔치를 말한다. 정묘년(1747, 영조23) 3월에 서울 소격동(昭格洞) 집에서 잔치를 베풀고 시호를 하사한 교지를 맞이하였다. 《農圃集 年譜》 한 가지 선행 이는 시호를 내려 그 이름을 높이되 여러 가지 선행을 다 들기 어렵기에 가장 큰 것을 들어 요약한 것을 말한다. 《예기》 〈표기(表記)〉에 "선왕이 시호로써 이름을 높이고, 한 가지 선행으로써 요약했다.[先王諡以尊名, 節以壹惠.]"라고 한 데서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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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장사 시축에 읊다 題靈藏師詩軸 사람들은 영장이라고 나는 대사라고 하는데 人曰靈藏我曰師십년 전부터 해마다32) 글을 지어 주고받았네 十年前歲以書隨속세와 떨어진 산사의 창가에 달이 비추니 風埃一隔山寮月흰 얼굴과 푸른 눈썹을 꿈에서 보네 雪面靑眉夢見之 人曰靈藏我曰師, 十年前歲以書隨.風埃一隔山寮月, 雪面靑眉夢見之. 해마다 원문에는 '세(歲)' 아래에 "아마도 일(日) 자의 오류인 듯하다.〔恐日字之誤〕"라는 소주가 붙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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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환체(連環體)217) 連環體 하늘의 은하수 흰 명주처럼 맑고 평평하니두 난간머리에 밤기운이 맑네작은 봉우리에 숨어 빛이 쏘아 나오고넓은 들판과 이어져 그림자 어지럽네지나가는 선인(仙人) 흔적 없이 찾아오고봉황 소리 잘 내는 왕군(王君) 떠나갔어도 소리가 들리네218)눈은 형외(形外)의 부림을 당할 필요 없으니자족한 마음 드러내며 나의 삶 보내리라 天河漢練澄平二闌頭夜氣淸隱小峯光射出連大野影縱橫經仙人來無跡鳳王君去有聲目不須形外役章自足過吾生 연환체(連環體) 시의 마지막 구절을 다음 시의 첫 구절로 하여 짓는 시를 말한다. 회문시(廻文詩)라고도 한다. 앞 시구(詩句)의 끝글자를 다음 구의 첫자로 습용해서 내려 읽어도 말이 되고 거꾸로 읽어도 말이 되므로, 시종(始終)이 불분명하여 마치 동그라미가 연쇄식으로 이어져 있는 듯한 시체(詩體)를 말한다. 고리처럼 연하였으므로 연환체라 하기도 하고 다음 구의 첫 자가 위의 구 끝 자에 감추어져 있으므로 장두체(藏頭體)라고 하기도 한다. 봉황……들리네 주(周)나라 영왕(靈王)의 태자인 왕자교(王子喬)는 피리를 매우 잘 불어 피리로 봉황새의 울음소리를 낼 수 있었다. 뒤에 신선이 되어 떠난 지 30여 년 만에 하남성(河南省) 구지산(緱氏山) 정상에 백학(白鶴)을 타고 내려왔다가 며칠 머무른 뒤 사람들과 작별하고 다시 떠나갔다고 한다. 《列仙傳 王子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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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상계축도 塞上契軸圖 장사들이 죽음에서 살아나 壯士生於死누선36)에서 날카로운 무기 안고 있네 樓舡擁兌戈앞다투어 진나라 조적37)이 되어 爭爲晉祖逖함께 위나라 산하38)에 웅거하네 共據魏山河칼을 차니 고래39)가 울고 倚劍鯨鯢泣잔을 돌리니 초목도 평화롭네 飛觴草木和용면40)처럼 훌륭한 일을 전하니 龍眠傳勝事호방한 기상이 푸른 물결에 가득하네 豪氣滿滄波 壯士生於死, 樓舡擁兌戈.爭爲晉祖逖, 共據魏山河.倚劍鯨鯢泣, 飛觴草木和.龍眠傳勝事, 豪氣滿滄波. 누선 누각이 있어 사람이 들어가 비바람을 피할 수 있는 배로, 흔히 전선(戰船)을 말한다. 조적 266~321. 자는 사치(士稚)이다. 여러 관직을 역임한 뒤 혼란한 사회를 피해 남쪽으로 피난 갔다. 예주 자사(豫州刺史)가 되어 북벌을 주장하였으며 몇 년 만에 황하 이남 지역 대부분을 차지하였다. 당시 배를 타고 강을 건너면서 중원을 회복하겠다고 맹세한 일화가 전해진다. 위나라의 산하 위나라는 산천이 험하고 견고하여 적의 침략을 받기 어려웠다. 전국 시대 때 위나라 무후가 배를 타고 서하(西河)로 내려가다가 말하기를 "장하다, 산천(山川)이 험하고 견고하구나. 적국이 침범하기 어려우니 이것은 위국(魏國)의 보배로다."라고 하였다. 《史記 卷65 吳起列傳》 고래 원문의 '경예(鯨鯢)'는 각각 거대한 고래의 수컷과 암컷을 가리키는데, 작은 물고기들을 잡아먹기 때문에 악인(惡人)의 괴수를 비유한다. 《춘추좌씨전》 선공 12년조에 "옛날에 명왕(明王)이 불경한 자들을 정벌하여 그 경예를 잡아다가 죽여서 무덤처럼 쌓아 두어 크게 치욕을 주었다." 하였다. 용면 송(宋)나라 때의 유명한 화가 이공린(李公麟)의 호이다. 이공린이 벼슬을 그만두고 용면산(龍眠山)에 들어가 지내며 자호를 용면거사(龍眠居士)라 하였다. 여기서는 훌륭한 화가를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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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의정 두암 김응남41)을 애도하다 挽左相金斗巖應南 종묘사직이 존망하는 날이 宗社存亡日신민에게는 생사의 때네 臣民生死時나라의 동량이 갑자기 꺾였으니42) 棟樑忽自折조정을 마침내 누가 지탱할까 大廈竟誰支해역은 비가 막 개었으나 海域雨初霽강성에는 바람이 다시 불네 江城風更吹산인들이 끝없이 통곡하는 것은 山人無限哭비단 사사로운 정 때문만은 아닐세 不獨爲吾私 宗社存亡日, 臣民生死時.棟樑忽自折, 大廈竟誰支.海域雨初霽, 江城風更吹.山人無限哭, 不獨爲吾私. 두암 김응남 1546~1598. 본관은 원주(原州), 자는 중숙(重叔), 호는 두암, 시호는 충정(忠靖)이다. 1568년 증광 문과에 을과로 급제했다. 1583년 제주 목사(濟州牧使)로 좌천되었지만, 선정을 베풀어 기민(飢民)을 구휼하고 2년 뒤 우승지(右承旨)를 제수받았다. 임진왜란 때 선조를 호종했으며, 1594년 우의정, 1595년에 좌의정이 되었다. 1597년 정유재란 때 안무사(按撫使)로 영남에 내려갔다가 풍기(豐基)에서 병을 얻어 서울에 돌아온 뒤 관직을 사퇴하고 이듬해 세상을 떠났다. 나라의 …… 꺾였으니 좌의정 김응남이 죽은 것을 표현 것이다. 위개가 죽고 나서 사곤(謝鯤)이 그를 위해 통곡했는데, 어떤 사람이 통곡하는 이유를 묻자 사곤이 "기둥과 대들보가 꺾였으니, 나도 모르게 애통할 뿐이네.〔棟梁折矣, 不覺哀耳.〕"라고 대답한 고사가 있다. 《晉書 卷36 衛玠列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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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7 卷之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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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 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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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잡저】 傳【雜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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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손항전【병서】 公孫航傳【並序】 공손항(公孫航)24)은 강동인(江東人)이다. 혹자는 육인(六人)이라고도 한다. 자는 해경(海卿)으로 황제(黃帝)의 아들이다. 황제는 형호(荊湖)25)에서 솥을 주조하였다. 공고(共鼓)와 화적(化狄)26)이 따르고 있었는데, 호수 가운데 뜬 잎을 보고 황제가 감응하여 항(航)을 낳아서 두 사람으로 하여금 스승이 되게 하였다. 황제가 용을 어거하여 멍에하고 하늘로 올라가자27) 항은 호해(湖海) 사이에 살면서 공손(公孫)이라는 성(姓)을 썼다.우(禹) 임금 때 이르러 우 임금을 도와 물길을 유도하는 데 공적이 있었고, 용문(龍門)을 뚫은 일28)과 물길을 강한(江漢)으로 흘러가게 하는 데29) 항의 공적이 많았다. 우 임금은 현규(玄圭)를 올려 치수의 완성을 아뢰고30) 항을 임명하여 구주(九州) 통진백(通津伯)으로 삼았다. 일찍이 우 임금과 강을 건너는데 배가 황룡의 등에 얹히는 바람에 거의 건널 수 없게 되었다. 항이 웃으면서 말하기를 "선제(先帝)께서 정호(鼎湖)에서 용을 어거하였는데 나 또한 용의 등에 얹혔으니 어찌 운명이 아니겠는가?" 하면서 안색을 변치 않았는데 곧 용이 사라지고 말았다.항이라는 사람은 신장이 수 십 장(丈)이요 몸집의 크기가 백 여 아름인데 헌걸차고 씩씩하니 맨 발로 황하를 건널 힘과 바다를 항해할 위력이 있었다. 그 성품은 능히 세상과 함께 부침할 수 있으며 사람을 대하는데 선악 귀천을 구분하지 않고 귀의한 자들을 모두 수용하였다. 다만 산을 유람하며 육지로 다니는 것은 좋아하지 않았다.우 임금이 붕어하고 하(夏)나라의 덕이 쇠퇴하자 항 또한 늙었다. 이계(履啓)31)가 즉위하여서는 날마다 음란과 포학을 일삼으면서 항과 함께 주지(酒池)에서 밤새도록 즐겼다. 항의 아들인 도(刀)가 간언을 했으나 듣지 않으니, 도는 무광(務光)32)과 함께 강호로 들어가서 끝내 나오지 않았다. 탕(湯)이 걸(桀)을 주벌하게 되자 항은 초택(楚澤)33)으로 달아났다. 주(周)나라 소왕(昭王)이 남방을 순수(巡狩)하여 초나라에 이르렀는데 초택에서 같이 배를 탔다가 왕과 함께 익사했다.34)항은 세 아들을 두었다. 장남은 함(艦), 막내는 방(方)이고, 도(刀)는 바로 가운데 아들이다. 은(殷)나라 말기에 도(刀)는 여상(呂尙)과 동해에서 낚시를 하고 살았는데 서백(西伯)이 사냥을 나가서 여상이 주(周)나라로 귀의하자35) 도는 정색하며 불쾌해하고 강 입구 맑은 물가를 오가다가 그 몸을 마쳤다. 그 자손은 천택(川澤)에 흩어져 살았는데 모두 청고(淸高)하게 스스로 면려하면서 벼슬자리에 나간 적이 없었으니 모두 도의 유풍(遺風)이었다. 그 뒤에 월(越)나라 범려(范蠡)·한(漢)나라 엄자릉(嚴子陵)·진(晉)나라 도원량(陶元亮)·당(唐)나라 장지화(張志和)·송(宋)나라 임군복(林君復) 같은 청절지사 들이 모두 도의 자손들과 함께 어울렸다. 항의 막내아들인 방(方)은 별다른 기예나 능력이 없어 대대로 나루터 관리가 되어 그 삯을 취하여 살아갔다.장남 함(艦)은 사람됨이 굉걸(宏傑)하고 관대하며 원대한 지략이 있었는데 아버지 항을 따라서 초나라에서 살았다. 진시황(秦始皇) 때 서불(徐市)과 서로 좋게 지면서 서불에게 말하기를 "시황이 탐욕스럽고 포학하여 백성들을 들볶으니 물이 더욱 깊어지는 것 같은데36) 그대는 어찌하여 신선술로 황제를 설득해서 도생(圖生)의 바탕으로 삼지 않는가." 하였다. 서불이 이에 서쪽으로 관문에 들어가 황제를 뵙고 청하기를 "동남동녀(童男童女) 3천 명과 함께 바다로 들어가 삼신산(三神山)의 불사약을 구하겠습니다." 하였다. 황제는 바야흐로 신선술을 찾고 있었기에 서불의 말을 믿고 따라주니 서불은 함과 함께 3천명을 싣고 바다 섬으로 들어가 살았다. 산동(山東)의 호걸들이 모두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는 그 무리 수 천 명과 함께 해안을 따라 황하에 도착해서, 장차 패공(沛公)과 병력을 합쳐 관중(關中)으로 들어가려 하였다. 이 때 장한(章邯)37)이 조(趙)나라를 공격하자 초(楚)나라가 구원하였다. 항적(項籍)은 경자관군(卿子冠軍)38)을 살해하고 군대를 거느려 황하에 도착하였다. 함이 항우(項羽)를 설득하며 말하기를 "장한을 공격할 것도 없다. 조고(趙高)39)가 궁중에서 권력을 휘두르고 있는데 장한과 틈이 벌어졌으니 이는 안과 밖이 서로 맞지 않는 것이다. 지금을 위한 계책으로는 나와 함께 황하로 떠가서 직접 함곡관에 이르러 패공와 합세하여 진(秦)나라를 공격하는 것이 좋다. 뿌리를 제거하고 나면 장한은 공격할 것도 없다." 하였다.항우가 노하여 말하기를 "내가 바야흐로 십만의 무리를 통솔하여 무도한 진(秦)나라를 공격하려는데 함이 얄팍한 꾀로 나를 흔들어 대고 병사들의 마음을 꺾는다." 하면서 함을 황하에 가라앉히고 그의 무리 수천 명도 모두 가라앉혔다.40) 함은 몰래 탈출하여 그의 무리와 함께 남쪽으로 장강(長江)과 한수(漢水)로 흘러가서 장차 한왕(漢王)과 합종하려 하였다. 마침 항우가 강 가운데서 의제(義帝)를 시해하자, 한왕이 삼로(三老)의 계책41)을 써서 흰 상복을 입고 항우를 주벌하고 남쪽으로 장강과 한수로 배를 타고 내려왔다.함은 비장(裨將)인 소(艘)로 하여금 십만의 무리를 이끌고 왕을 따라 팽성(彭城)으로 내려가게 하였다. 함은 황하로부터 관중(關中)으로 들어가서 소하(蕭何)와 더불어 육로와 수로로42) 군량을 운송하니 시종 식량이 끊어지지 않았다. 한나라가 이로써 천하를 얻을 수 있었다. 고조(高祖)는 함을 봉하여 하간왕 겸 전운사(河間王兼轉運使)로 삼았다. 무제(武帝)가 사방 오랑캐를 정벌할 때에는 모두 육군으로 승리를 취했는데 함은 육상전투를 익히지 않았으므로 공적이 없었다.예관(兒寬)과 복식(卜式)43)의 무리가 소금과 철로 이익을 삼기에 미치자 함은 군량 운송으로 공을 세워 크게 총애를 받았다. 마침내 그의 죽음에 미쳐서 그의 아들 축(軸)은 광무제(光武帝)가 호타하(滹沱河)를 건널 때 미처 따라가지 못했고 이 때문에 축출을 당했다.44) 촉한(蜀漢)의 적벽(赤壁) 전쟁에서는 와룡(臥龍)45)을 따라서 큰 공을 세웠다. 이 때부터 그 자손은 대대로 수군의 장수가 되었고 공을 세운 자도 이루 다 기술할 수가 없다.가장 애석한 것은 송(宋)나라 때 애산(崖山)의 전쟁46)이다. 축(軸)의 자손 만여 무리가 장세걸(張世傑)의 통솔을 받았는데 세걸의 전략이 뛰어나지 못하여 마침내 수만의 무리를 견양(犬羊) 같은 적에게 먹히게 하고 말았으니 하늘에 사무치는 통분이 어찌 끝이 있겠는가? 그래서 그 자손으로 사방의 오랑캐 땅에 흩어져 사는 자가 천하에 가득했다. 다만 북호(北胡)의 땅에서는 살지 않았는데 북호는 또한 외축(畏縮)되어 감히 그 틈을 탈 수가 없었다. 상고시대 신명(神明)의 종족으로 아! 기특하도다.사관은 판단하여 말한다."인재를 쓸 때 신중하지 않을 수 없다. 위에 있는 자가 잘 쓰면 천하에 어질지 않은 자가 없고 잘 쓰지 못하면 천하에 악하지 않는 자가 없다. 공손항은 한 몸이로되 우임금을 도와 공을 세우고 물과 땅을 평정하였으니 걸출하여 볼 만하였으나, 끝내는 걸임금과 음탕에 빠졌고 결국 초택(楚澤)에서 아교가 풀리어47) 죽었으니 어찌 그리도 잘못되었던가!또한 출신을 가지고 인재를 써서는 안 된다. 항의 아들 도(刀)는 청고(淸高)함이 비할 바가 없었고, 함(艦)은 웅장한 지략이 매우 뛰어났으며, 방(方)은 나루터 아전으로 늙어 남에게 부림을 받았다. 한 뿌리에서 나왔으나 현우(賢愚)와 청탁(淸濁)이 이렇게 현저히 다르다. 이 때문에 선왕(先王)이 대대로 봉록은 주되 대대로 관직을 주지는 않았던 것이니 인재를 쓰는 자는 신중해야 하지 않겠는가? 나는 도(刀)의 후손으로 이름이 부(桴)48)인 자와 가장 친한데 장차 그와 함께 타고 바다에 뜰 뜻49)이 있다. 그래서 그의 세계(世系)를 특히 자세하게 기술하는 바이다." 公孫航江東人也。 或曰六人。 字海卿。 黃帝子也。 帝鑄鼎於荊湖。 共化狄從焉。 見浮葉在湖中。 帝感而生航。 使二人爲傅。 及帝御龍駕而賓天。 航乃居于湖海間。 ▩公孫姓。 至禹時。 佐禹導水有功。 龍門之役。 江漢之注。 航之功居多焉。 及禹玄圭告成。 拜航爲九州通津伯。 嘗與禹濟江。 爲黃龍所負。 幾不渡。 航笑曰: "先帝御龍於鼎湖。 予又爲龍所負。 豈非命歟?" 顔色不變。 俄而龍乃去。 航爲人身長數十丈。 大可百餘圍。 軒騰磊落。 有憑河之力駕海之威。 其性能與世浮沉。 接人不分善惡貴賤而皆受容歸。 但不喜遊山與陸行矣。 及禹崩夏德衰而航亦老矣。 履啓卽位。 日事淫虐。 與航爲長夜之樂於酒池中。 航之子刀諫不聽。 刀與務光走于江湖終不出。 至湯伐桀。 航走于楚澤。 周昭王南廵至楚。 同載于楚澤中。 與王同溺焉。 航有三子。 長曰艦。 季曰方。 刀乃其中子也。 殷末刀與呂尙釣于東海。 及西伯將獵。 呂尙歸周。 刀愀然不悅。 去來江口淸涯。 以終其身。 其子孫散居川澤者。 皆以淸高自厲。 未嘗至於宦海要津。 盖刀之遺風也。 其後越范蠡·漢嚴子陵·晉陶元亮·唐張志和·宋林君復淸節之士。 皆與刀之子孫同遊焉。 季子方無他技能。 世爲津吏。 以取其直爲生。 其長子艦。 爲人宏傑寬大有大略。 從父航居於楚。 秦始皇時。 與徐市相善。 謂市曰: "始皇貪戾暴虐。 生民煎熬。 如水益深。 子何不以神仙之術說上。 仍爲圖生之地?" 市乃西入關。 見上請與童男女三千人。 入海求三神山不死藥。 上方求仙術。 信市言從之。 市乃與艦載三千人入居海島。 聞山東豪傑並起。 與其徒數千。 沿海至河。 將與沛公合兵入關。 時章邯擊趙。 楚救之。 項籍殺卿子冠軍。 以兵至河。 艦說羽曰: "邯不足擊也。 趙高用事于中。 與邯有隙。 是內外不相應也。 爲今之計。 不若與艦浮于河。 直抵函谷關。 與沛公合勢攻秦。 根本旣鋤則邯不足擊也。" 羽怒曰: "我方率十萬之衆。 攻無道秦。 艦乃以淺謀撓我。 以沮士卒心。" 乃沉艦于河。 其徒數千皆沉焉。 艦潛出。 與其徒南流江漢。 將與漢王合從。 會羽弑義帝於江中。 漢王用三老策。 縞素伐羽。 南浮江漢而下。 艦使裨將艘將數十萬衆。 從王下彭城。 艦自河入關。 與蕭何轉漕運糧。 終始不絶。 漢以此得天下。 高祖封艦爲河間王兼轉運使。 至武帝征伐四夷。 皆以陸軍取勝。 艦不習陸戰。 故無功。 及兒寬卜式之徒。 以塩鐵爲利。 艦以轉漕立功。 大得寵焉。 及卒其子軸當光武渡滹沱河時。 不及從焉。 以此見黜。 及蜀漢赤壁之戰。 從臥龍大有功焉。 自此其子孫世爲水軍帥。 立功者不可勝記。 惟最可惜者。 宋崖山之戰。 軸之子孫萬餘衆。 統於張世傑。 世傑謀猷不長。 竟使數萬之衆。 爲犬羊之所呑。 通天之痛。 曷其極哉? 故其子孫散居四方外夷者。 彌漫天下。 而獨不居北胡之地。 北胡亦畏縮不敢乘其間。 上古神明之種。 吁亦奇矣。 史斷曰: "用人材。 不可不愼也。 在上者能用之則天下莫不賢。 不能用之則天下莫不惡。 航一軆也。 佐禹立功。 平定水土。 傑然可觀也。 卒與桀沉淫。 竟死於楚澤之解弛。 何其累也! 亦不可以世類用人材也。 航之子刀淸高莫比。 艦壯略魁偉而方老津吏。 爲人所役。 一本之出而賢愚淸濁若此懸絶。 此先王之所以世祿而不世官者也。 用人材者。 可不愼歟? 余與刀之族裔名捊1)者最相親。 將有同載浮海之志。 故述其世傳獨加詳焉。" 공손항전 우임금이 탔던 배[航]를 의인화하여 쓴 것이다. 형호(荊湖) 형산(荊山) 아래 있는 정호(鼎湖)를 가리킨다. 옛날 황제(皇帝)가 여기에서 솥을 주조하였던 곳이다. 《史記 封禪書》 공고(共鼓)와 화적(化狄) 황제의 신하로 배와 노를 만든 사람들이다. 《설문(說文)》 〈주부(舟部)〉에 "옛날에 공고와 화적이 나무를 깎아 배를 만들고 나무를 깎아 노를 만들어서 통하지 못했던 곳을 건넜다.[古者共鼓,貨狄刳木爲舟, 剡木爲楫, 以濟不通.]"고 하였는데 서개계(徐鍇繫)의 전(傳)에 "공고와 화적 두 사람은 황제의 신하이다.[共鼓,貨狄二人, 黃帝臣也.]" 하였다. 하늘로 올라가자 원문의 '빈천(賓天)'으로, 하늘의 손님이 되었다는 뜻인데 존귀한 사람의 죽음을 뜻한다. 용문(龍門)을 뚫은 일 '용문'은 산 이름이다. 《사기(史記)》 〈이사열전(李斯列傳)〉에 "우 임금이 용문을 뚫고 구하(九河)를 소통시킬 때 손발이 부르트고 얼굴이 누렇게 초췌하였다.[禹鑿龍門, 疏九河, 手足胼胝, 面目黧黑.]" 하였다. 강한(江漢)으로……데 '강한(江漢)'은 장강(長江)과 한수(漢水)를 이른다. 《서경》 〈우공(禹貢)〉에 "파총산에서 양수를 유도하여 동쪽으로 흘러 한수(漢水)가 되게 하며……남쪽으로 강수(江水)에 들어가게 하셨다.[嶓冢導漾, 東流爲漢……南入于江.]" 하였다. 현규(玄圭)를……아뢰고 '현규'는 검은 옥이다. 순(舜) 임금이 우(禹)에게 권한을 맡겨 수토(水土)를 평정하게 하였는데 "우가 현규를 올려 그의 성공을 순 임금에게 아뢰었다.[禹錫玄圭, 告厥成功.]" 하였다. 《書經 禹貢》 이계(履啓) 하(夏)나라의 폭군인 걸(桀)의 이름이다. 무광(務光) 탕(湯) 임금이 하(夏)나라를 멸망시킨 뒤에 왕위를 그에게 양보하려 했던 인물이다. 《莊子 讓王》 초택(楚澤) 옛날 초(楚)나라 지역에 운몽(雲夢) 등 7개의 연못이 있었다. 주(周)나라……익사했다 소왕이 초(楚) 땅을 순수하다가 강가에서 배를 타게 되었는데 초나라 사람들이 미워하여 아교로 접합시킨 배를 바치니 이에 소왕이 이 배를 타고 강을 건너다가 '아교가 녹아 배가 해체되어[膠液船解]' 물에 빠져 죽은 일이 있다. 《帝王世紀 周》 서백(西伯)이……귀의하자 서백(西伯)은 주 문왕(周文王)을 말한다. 서백(西伯)이 사냥을 나갔다가 위수 가에서 낚시를 하고 있던 여상을 만나 함께 돌아와 사(師)로 삼았다. 《史記 齊太公世家》 물이……같은데[如水益深] 학정이 더욱 심해진다는 말이다. 《孟子 梁惠王下》 장한(章邯) 진섭(陳涉)을 멸망시키고 항량(項梁)과 위구(魏咎)를 격파한 진(秦)나라의 맹장(猛將)이었다. 그런데 간신 조고(趙高)의 전횡에 실망하여 그 후 항우(項羽)에게 항복하여 옹왕(雍王)이 되었다가 유방(劉邦)에게 패하여 자살하였다. 《史記 項羽本紀》 경자관군(卿子冠軍) 초(楚)나라 회왕(懷王)의 상장군(上將軍)인 송의(宋義)를 가리킨다. 진(秦)나라 장감(章邯)이 황하를 건너 조(趙)나라를 공격하여 거록(鉅鹿)을 포위하자 회왕은 송의를 상장군으로 삼고 항우(項羽)를 차장(次將)으로 삼아 조나라를 구원하게 하였다. 송의가 안양(安陽)에 이르러 46일간을 형세만 엿보며 공격하지 않자, 답답하게 여긴 항우는 송의가 제(齊)나라와 모의해 초나라를 배신하려 한다며 그를 살해하였다. 《史記 項羽本紀》 조고(趙高) 진(秦)나라 때 환관이다. 진 시황(秦始皇)이 죽자 승상(丞相) 이사(李斯)와 거짓 조서를 만들어 장자(長子) 부소(扶蘇)에게 죽음을 내리고 이세(二世) 호해(胡亥)를 세웠으며, 이사를 죽이고 승상이 되어 대소사를 제멋대로 하다가 진나라를 멸망에 이르게 하였다. 함을……가라앉혔다 항우(項羽)가 진(秦)나라와 싸우러 가면서 하수(河水)를 건넌 뒤 '배를 모두 가라앉히고[沈船破釜甑]' 솥과 시루를 깨뜨리고, 막사를 불태우고, 사흘 양식을 지니고서 사졸에게 반드시 죽을 것임을 보여 주었던 것을 비유한 것이다. 《史記 項羽本紀》 삼로의 계책[三老策] 삼로(三老) 동공(董公)의 계책을 말한다. 항우가 의제(義帝)를 시해한 사실을 알게 된 유방(劉邦)이 삼로(三老) 동공(董公)의 진언을 받아들여 의제를 위해 상(喪)을 발표하고 통곡한 다음, 군사들에게 소복을 입히고 천하의 제후들에게 항우를 토벌할 것을 호소하자, 많은 제후들이 이에 호응하였다. 유방은 이들을 거느리고 항우를 죽이고 천하를 통일하였다. 《漢書 高帝紀上》 육로와 수로로 원문의 '전조(轉漕)'로 식량을 운반할 때, 육로(陸路)를 통해 수레로 운반하는 것을 전(轉)이라 하고, 수로(水路)를 이용하여 배로 운반하는 것을 조(漕)라 한다. 예관(兒寬)과 복식(卜式) 예관과 복식은 한(漢)나라 무제(武帝) 신하들이다. 축출을 당했다 이때는 배를 쓰지 않았다는 뜻이다. 와룡(臥龍) 와룡은 제갈량(諸葛亮)의 호이다. 애산(崖山)의 전쟁 '애산(崖山)'은 광동성(廣東省) 신회현(新會縣) 남쪽 큰 바다 가운데 있는 산인데, 형세가 험하기로 유명하다. 남송 말기에 원병(元兵)의 공격을 받았을 때, 보강군 승선사(保康軍承宣使) 장세걸(張世傑)이 위왕(衛王) 병(昺)을 모시고 애산으로 가 있었다. 원병이 다시 애산을 공격해 오자, 장세걸은 군함 10여 척을 가지고 도망을 쳤고, 좌승상(左丞相) 육수부(陸秀夫)는 형세가 어찌할 수 없음을 간파하고 마침내 위왕 병을 등에 업고 바다에 뛰어들어 자결하였다. 한편 장세걸은 뒤에 다시 애산에서 군졸을 수습하여 송나라 황실의 후예를 찾아서 황제로 추대하려고 했는데, 갑자기 바다의 큰바람을 만나서 익사하고 말았다. 이로써 남송은 완전히 멸망하였다. 《宋史 忠義列傳》 아교가 풀리어 아교로 접합시킨 배를 탔다가 아교가 풀리고 배가 해체되어[膠液船解] 물에 빠져 죽은 것을 말한다. 《帝王世紀·周》 부(桴) 원문은 '捊'로 되어 있는데 공손항의 후손들의 이름은 모두 '배'와 관련된 것이므로 '桴'의 잘못이다. 바다에 뜰 뜻 '부해(浮海)'는 은거하겠다는 뜻이다. 《논어》 〈공야장(公冶長)〉에 공자가 천하가 어지러움을 탄식하여 "도가 행해지지 않으니 뗏목을 타고 바다에 뜨리라.[道不行, 乘桴浮于海.]" 하였다. 捊 공손항의 후손들의 이름은 모두 '배'와 관련된 것이므로 '桴'의 잘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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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편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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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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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매 선생전【병서】 梅先生傳【並序】 매(梅) 선생은 나의 허물없는 벗이다. 그 이름은 옥화(玉和)인데 세칭 정백공(貞白公)이라고 한다. 나는 알봉(閼逢)50)의 해에 상제로부터 명을 받고 대지에 내려와서 동방의 바다 근처에서 산다. 장려(瘴癘)51)가 핍박하고 구름과 노을이 습하며 누런 갈대와 참 대를 아침저녁으로 맞는다. 함께 얼굴을 펴고 마음을 토로할 자가 없었는데 우연히 선생을 대 울타리 아래에서 만나 흔연히 세상을 초월한 교분을 맺었다.그 자질과 품성이 특출하고 탁월하며 순수하고 온윤하다. 맑은 향이 사람을 감싸고 온화로운 기운이 만물을 생동하게 한다. 옥병에서 얼음이 생기고 섬궁(蟾宮)52)에서 눈이 빛나는 듯 투명하고 맑아서 형산(荊山) 박옥(璞玉)53)의 실질과 담담한 아취를 지니고 있다. 그윽하고 깊은 곳에서 만나니 향기에는 지란(芝蘭)의 빼어남과 정결(貞潔)한 자태가 있었다.그 실행(實行)에 있어서는 바깥은 둥글고 안은 어질며 몸은 작으나 뜻은 원대하다. 맵고 신 기운과 맛은 사람의 이를 시리게 하니 세속의 사람들과 속된 선비들은 모두 침을 흘리며 말을 하지 못한다. 그러나 부귀한54) 대인들이 들어다가 솥에 넣어서 오미(五味)를 각각 바르게 하고 태갱(大羹)55)을 조화롭게 하여 교묘(郊廟)에 올리고 조야(朝野)에 베푼다면 진실로 적합하지 않음이 없을 것이다. 이렇게 선생은 꽃과 열매 둘 다를 갖춘 것이다.아! 세상에서 맛있는 고기56)를 실컷 먹는 자들은 한갓 고량진미만을 일삼아서 선생을 쓸쓸히 황량한 초야에 서 있게 하고 나무꾼과 목동도 모두 쉽게 여기니 어찌 슬프지 않겠는가? 그러나 선생이 어찌 오랫동안 울타리 아래에 머물겠는가? 반드시 황금 화분에 올리는 자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교분을 맺고 그의 전(傳)을 대략 서술하여 그 사실을 다음과 같이 드러내는 바이다.태사공은 말한다."선생의 선조는 상(商)나라 고종조(高宗朝)에 원기(元氣)를 조화하는 임무에 쓰였다.57) 그 후세에는 높여 쓴 자가 없다가 송(宋)나라 임화정58)이 벗으로 삼고 믿어 주었다. 그러나 한갓 그 유한(幽閑)한 아취만 섬겼을 뿐이요 대미(大味)59)를 조화하는 것에 대해서는 전혀 알려진 바가 없다. 비록 그렇지만 임화정의 뒤에는 그 유한한 아취마저도 아울러 버렸으니 슬프도다! 그렇다면 능히 선생을 벗으로 삼아 나와 함께 할 자는 몇이나 될 것인가!"【임진년(1652, 효종3) 5월 단오일 밤에 꿈을 꾸었다. 내가 열천(洌泉) 가에서 노닐고 있는데 어떤 흰 옷을 입은 사자(使者)가 나에게 읍을 하며60) 말하기를 "상제로부터 명을 받고 족하(足下)에게 글을 구합니다."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이른 바 글이라는 것은 어떤 글을 말합니까?" 하였다. 그가 답하기를 "매 선생전(梅先生傳)입니다." 하였다. 내가 살펴 짓다가 홀연 깨어나니 바로 한 바탕 꿈이었다. 이에 괴이하게 여겨서 바로 그 전을 짓고 아울러 그 일을 아래에 썼는데 기이한 일을 기록한 것이지 감히 속인 것은 아니다.】 梅先生。 余之爾汝友也。 其名曰玉和。 世稱謂貞白公。 余以閼逢之歲。 受命于帝。 降來大塊。 住近東海。 瘴癘所逼。 雲霞所濕。 黃蘆苦竹。 朝暮延接。 無與開顔寫意。 偶逢先生於竹籬之下。 欣然作世外交。 盖其質品挺特不羣。 純粹溫潤。 淸香襲人。 和氣動物。 冰生玉壺。 雪暎蟾宮。 精瑩秀澈。 有荊璞之實。 而淡然之趣。 遇之幽邃。 薰芳有芝蘭之秀而潔貞之態焉。 若其實行則外圓而內仁。 體小而意遠。 辛酸氣味。 使人寒齒。 塵人俗士無不沫出而結舌。 然若使鍾鼎大人擧而措之鼎鼐之間。 能令五味各正。 大羹調和。 薦之郊廟。 施之朝野。 莫不允偕。 此先生華實兩全者也。 噫! 世之大嚼芻豢者。 徒事珍膏。 而使先生踽踽焉植立於荒草之野。 而樵牧者皆得而慢易之。 豈不悲哉? 然先生豈久住籬落下哉? 必有薦之金盤者矣。 故余定交而略叙其傳。 以見其事實云。 太史公曰: "先生之先。 在商高宗朝。 見用於調和元氣之任。 其後世無尊而用之者。 及宋林和靖友而信之。 然徒事其幽閑之趣。 而及其調和大味則蔑乎無聞矣。 雖然和靖之後。 幷其幽閑之趣而棄之。 悲夫! 然則能友先生。 同余者幾人!" 【壬辰五月端午夜夢。 余遊於洌泉之邊。 有白衣使者楫余而言曰: "受命于上帝。 求文于足下。" 余曰: "所謂文者甚文字歟?" 答曰: "梅先生傳矣。" 余診製而忽覺。 乃一夢也。 仍怪而乃作其傳。 幷書其事于下云。 盖記異也。 非敢誕也。】 알봉(閼逢) '알봉'은 고갑자(古甲子)로 '갑(甲)'을 말하는데, 여기서는 김만영 자신이 태어난 갑자년(1624)을 말한다. 장려(瘴癘) 산천의 나쁜 기운인 장기(瘴氣)로 인해 생기는 병이다. 섬궁(蟾宮) 두꺼비가 살고 있다는 달을 의미한다. 형산(荊山) 박옥(璞玉) 원문의 '형박(荊璞)'은 전국시대 초나라 형산(荊山)에서 나온 박옥(璞玉)으로, 천하의 보물인 화씨벽(和氏璧)이다. 《韓非子 和氏》 부귀한 원문의 '종정(鍾鼎)'은 종명정식(鐘鳴鼎食)으로, 사람이 많아서 식사 때가 되면 종을 쳐서 여러 사람들에게 식사 시간을 알리고 솥을 벌여 놓고 먹는다는 뜻이다. 왕발(王勃)의 〈등왕각서(滕王閣序)〉에 "마을에 들어찬 집들은 종을 치고 솥을 늘어놓고 먹는 집들이다.[閭閻撲地, 鍾鳴鼎食之家.]"라고 하였다. 태갱(大羹) 본래는 조미료를 첨가하지 않은 육즙(肉汁)을 말하는데 여기서는 음식을 가리킨다. 《예기》 〈악기(樂記)〉에 "성대한 제향의 예에서는 현주를 높이 치고, 제기에 생선을 바치며, 태갱은 조미를 하지 않으니, 다하지 않은 맛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大饗之禮, 尙玄酒而俎腥魚, 大羹不和, 有遺味者矣.]"라고 하였다. 맛있는 고기 원문의 '추환(芻豢)'으로, 가축 가운데 풀을 먹고 자라는 소와 양 같은 가축을 '추(芻)'라 하고, 곡식을 먹고 자라는 개와 돼지 같은 가축을 '환(豢)'이라 한다. 《孟子 告子上》 선생의……쓰였다 《서경》 〈열명 하(說命下)〉에, 상나라 고종(高宗)이 재상 부열(傅說)에게 "만약 간을 맞춘 국을 만들거든, 네가 소금과 매실이 되어야 한다.[若作和羹, 爾惟鹽梅.]"라고 부탁한 말이 나온다. 임화정(林和靖) 화정은 송나라 임포(林逋)의 시호(諡號)이다. 명리(名利)를 구하지 않고 서호(西湖)의 고산(孤山)에 은거해 살면서 매화나무를 심고 학을 기르면서 지냈다. 《宋史 隱逸列傳 林逋》 대미(大味) 지순(至純)한 맛을 말한다. 나에게 읍을 하며 원문의 '楫余'는 '揖余'의 잘못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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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 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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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졸을 효유하는 격문61) 喩氣卒檄 유년월일에 단양(丹陽) 도총대장(都總大將) 지수(志帥)는 기졸(氣卒) 군인 등에게 반포하여 고하노라. 준동하는 4적(四賊)의 추한 무리는 실로 칠전(七田)62)의 모얼(耗孼)이다. 벌과 전갈과 짐새의 독,63) 사나운 말과 날선 칼날 같은 것들이어서 나의 빈틈을 엿보다가 이렇게 지키지 않는 틈을 타서 공격한다. 처음에는 우씨(虞氏)에게 길을 빌리듯 사사로운 것으로 점차 설득하고64) 끝내는 험윤(玁狁)이 태원(大原)을 점거하듯65) 도리어 포학을 자행하며, 산택(山澤)을 마시고 불어댈 듯 순식간에 천 개의 쇠뇌를 쏘고 풍운을 질타하듯 잠깐사이에 만 가지 변화를 어지럽힌다. 오는 것은 번개를 놀라게 하고 가는 것은 강물을 모는 것 같다. 안택(安宅)66)을 점거하여 위태롭게 하고 예문(禮門)67)을 타고 난을 일으키니, 불이 아니어도 뜨거워져서 집이 불타고 얼음이 아니어도 차가워져서 계곡이 언다.이에 나의 주군(主君)68)은 기산(岐山)의 한 모퉁이에서 형세가 급박하여 태왕(太王)이 어려운 것 같고,69) 서촉(西蜀)의 삼위산(三危山)에서 사태가 위급하여 상황(上皇)이 피난을 간 것 같다. 뜨거운 화로를 설치해도 하늘을 덮는 흰 눈을 녹이기 어렵고 현석(玄錫)의 공을 이루지 못해 황하가 땅을 가르며 흐르는 것을 여전히 볼 수 있다.70) 누가 능히 이 음험하고 흉악한 것들을 쓸어버리고 주군의 얼굴을 다시 볼 것인가? 흰 무지개가 해를 범하니71) 진(秦)나라 군대가 승기를 탔고, 누런 안개가 들판을 덮으니72) 한(漢)나라의 태양이 밝지 못했다.주수(主帥)는 한 편의 의성(意城)이요 삼전(三田)73)의 주장(主將)으로, 산하가 옛날과 다르니 백인(伯仁)의 흐르는 눈물을 몇 번이나 닦았던가.74) 그리하여 처첩들을 항오에 편입시키고 제나라 사람처럼 판자와 삽을 놓지 않았다.75) 한 밤중에 종치는 소리를 듣자 마음이 추향하는 바가 이미 밝아지고, 관중(關中)에 물기(勿旗)76)를 세우자 흉악한 무리의 안색이 변하니 오히려 차마 적과 양립하랴, 한 하늘을 같이 이지 않을 것을 맹세한다.이에 바로 옛 성인의 계책을 계승하고 천명을 받들어 하늘의 토벌을 행하여 삼부(三符)가 이미 수립되니 부죽(剖竹)의 형세가 이뤄지고, 일기(一機)가 이에 펼쳐지니 균석(鈞石)77)도 뽑을 수가 있다. 육비(六轡)78)가 손에 있으니 사마(駟馬)가 어긋나게 달리지 않고, 사유(四維)79)가 앞에 펼쳐지니 수레가 질서를 어지럽히지 않는다. 반드시 적을 섬멸하여 남겨 기르는 일이 없으니80) 어찌 남은 싹이 있게 하겠는가?아! 나의 기졸(氣卒) 군인 등은 구태를 혁파해 제거하고 새로운 명을 모두 따르라. 옛날에는 마음이 외물에 변화되었음을 깨닫고 오늘엔 하늘에 통함을 각성하여, 칼날을 맹렬히 갈아 적세(賊勢)의 요충을 끊고 문호를 한결같이 지켜서 외객(外客)이 와서 엿보는 것을 막아라. 신(神)이 지키는 고을을 영원히 귀신이 엿보는 집이 되지 하지 말라.81) 만약 나와의 약속을 따르지 않으면 반드시 하늘이 처벌을 명할 것이다. 너희가 혹시 나의 말을 믿지 못한다면 천군(天君)의 기상을 와서 보라. 이는 나의 충고이니 격문이 이르는 대로 글과 같이 시행하라. 維年月日。 丹陽都總大將志帥。 頒告于氣卒軍人等。 蠢爾四賊醜儔。 實是七田耗孼。 蜂蠆鴆毒。 悍馬銛鋒。 覘我空虛。 乘此不守。 初虞氏之假道。 漸喩以私。 卒玁狁之據原。 反肆其虐。 呴噓山澤。 放千弩於斯須。 叱咤風雲。 紛萬變於頃刻。 來如驚電。 去若驅河。 據安宅而爲危。 乘禮門而作亂。 非火而熱。 室廬斯焚。 不冰而寒。 谿壑乃凍。 肆我主君。 岐山一隅。 勢迫太王之艱難。 西蜀三危。 事急上皇之播越。 紅爐雖設。 難消白雪之蔽天。 玄錫未功。 尙見黃河之擘地。 誰能掃此陰獰。 重見主君容顔? 白虹犯陽。 秦兵乘勝。 黃霧蔽野。 漢日難明。 主帥一片意城。 三田主將。 山河異昔。 幾拭伯仁之涕流。 妻妾編行。 不釋齊人之板鍤。 聞扣鍾於夜半。 所嚮已明。 立勿旗於關中。 兇徒變色。 尙忍與賊兩立。 誓不共戴一天。 玆乃繼往聖謨。 奉命天討。 三符旣立。 剖竹勢成。 一機斯張。 鈞石可拔。 六轡在手。 駟不詭馳。 四維張前。 車不亂序。 必殲滅無遺育矣。 焉使其有餘㕀哉? 咨! 我氣卒軍人等。 革去舊塵。 咸聽新命。 悟昔時之物化。 覺今日之天通。 勇礪劒鋩。 割賊勢之要路。 一守門戶。 防外客之來窺。 毋使神守之鄕。 永作鬼瞰之室。 若不從我約束。 必有天命誅譴。 爾倘不信我言。 來見天君氣象。 是余忠告。 檄到如章。 기졸을 효유하는 격문 〈喩氣卒檄〉 지(志)를 장수(將帥)로 기(氣)를 군졸(軍卒)로 의인화하여 쓴 격문이다. 4적(四賊)의……칠전(七田) '4적'은 미상이고, '칠전'은 칠정(七情)을 비유한 듯하다. 짐새의 독[鴆毒] 짐조(鴆鳥)의 깃을 술에 담가 마시면 그 독이 사람을 죽인다고 한다. 《춘추 좌씨전(春秋左氏傳)》 민공(閔公) 원년에 "안일함은 짐새의 독이니, 그것을 생각해서는 안 된다.[宴安鴆毒, 不可懷也.]"라는 말이 나온다. 우씨(虞氏)에게……설득하고 '우씨'는 '우공(虞公)'을 말한다. '가도멸괵(假道滅虢)'의 고사를 말한 것이다. 희공(僖公) 2년에 진(晉)나라가 순식(荀息)이 굴(屈)에서 나는 네 필의 말과 수극(垂棘)에서 나는 옥을 우(虞)나라에 뇌물로 주고서 길을 빌려 괵(虢)나라를 쳐서 하양(下陽)을 멸망시키고, 희공(僖公) 5년에 다시 길을 빌려 괵(虢)을 취하고, 돌아오는 길에 우(虞)까지 멸하는 내용이 나온다. 《春秋左氏傳 僖公 2年, 5年》 험윤(玁狁)이 태원(大原)을 점거하여 '험윤(玁狁)'은 북방 오랑캐이다. 《시경》 〈유월(六月)〉 제5장에 "잠깐 험윤을 쳐서 태원에 이르렀으니 문무를 겸비한 길보여, 만방이 법으로 삼도다.[薄伐玁狁, 至于大原. 文武吉甫, 萬邦爲憲.]" 하였다. 안택(安宅) 인(仁)을 뜻한다. 《孟子 離婁上》 예문(禮門) 예(禮)를 말한다. 《맹자》 〈만장 하(萬章下)〉에 "의(義)는 사람이 걸어가야 할 길이고, 예(禮)는 사람이 출입하는 문이니, 오직 군자만이 이 길을 다닐 수 있고 이 문을 출입할 수 있다.[夫義, 路也, 禮, 門也. 惟君子能由是路, 出入是門也.]" 하였다. 주군(主君) 마음을 가리킨다. 기산(岐山)의……같고 주 태왕(周太王) 고공단보(古公亶父)가 빈(邠) 땅에 있을 때 적인(狄人)이 쳐들어오자 백성을 해치지 않기 위해 빈을 버리고 기산(岐山) 아래로 옮겨 갔다는 고사를 말한다. 《孟子 梁惠王下》 현석(玄錫)의……있다 마음이 안정되지 못한 상황을 비유한 것이다. 현석(玄錫)은 순(舜) 임금이 우(禹)에게 권한을 맡겨 수토(水土)를 평정하게 하였는데 "우가 현규를 올려 그의 성공을 순 임금에게 아뢰었다.[禹錫玄圭, 告厥成功.]" 한 것을 말한다. 《書經 禹貢》 흰……범하니 불길한 징조이다. 진 시황(秦始皇)을 암살하기 위해 형가(荊軻)가 떠날 때, 연나라 태자 단(丹)이 흰 무지개가 해를 꿴 것을 보고 실패를 예견하였다. 《사기(史記)》 〈추양열전(鄒陽列傳)〉에 "옛날에 형가가 연나라 태자 단의 의리를 사모했는데, 흰 무지개가 해를 꿰니 태자가 두려워했다.[昔者, 荊軻慕燕丹之義, 白虹貫日, 太子畏之.]" 하였다. 누런……덮으니 불길한 징조이다. 《한서(漢書)》 〈성제기(成帝紀)〉에, 한 성제(漢成帝) 원년에 공이 없는 태후의 여러 아우들을 후(侯)로 봉하자 "여름 4월에 누런 안개가 사방을 가득 메웠다. [夏四月, 黃霧四塞.]"라고 보인다. 이에 대해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에서 "간대부 양흥 등이 대답하기를 '(누런 안개가 가득 메운 것은) 모두 음이 성하여 양을 침해한 기운입니다. 고조의 약속에 공신이 아니면 후를 봉하지 않기로 하셨는데, 지금 태후의 여러 아우들이 모두 공이 없이 후가 되었으니, 외척이 〈후에 봉해진 것은〉 일찍이 없었던 일입니다.' 하였다.[諫大夫楊興等, 對皆以爲陰盛侵陽之氣也. 高祖之約, 非功臣不侯, 今太后諸弟, 皆以無功爲侯, 外戚, 未曾有也.]"라는 내용이 보인다. 삼전(三田) '삼단전(三丹田)'으로 도가에서 말하는 세 곳의 단전인데, 마음을 비유한 것이다. 산하가……닦았던가 어지럽혀진 마음을 빼앗긴 산하에 비유한 것이다. 백인(伯仁)은 동진(東晉) 사람 주의(周顗)의 자이다. 《세설신어(世說新語)》 〈언어(言語)〉에 다음과 같은 고사가 전한다. 서진(西晉)이 유송(劉宋)에게 쫓겨 장강(長江)의 동남쪽으로 건너가 동진(東晉)이 되었는데, 신하들이 신정(新亭)에서 술을 마시던 중에 주의가 "풍경은 다르지 않으나 산하는 정히 절로 다름이 있구나.[風景不殊, 正自有山河之異.]"라고 하자, 좌중이 서로 바라보며 눈물을 흘렸다. 처첩들을……않았다 마음을 다잡고 해이해진 의성(意城)을 다시 쌓는 것을 비유한 것이다. 전국 시대의 제(齊)나라 장군 전단(田單)이 연(燕)나라와 전쟁을 할 때에 '몸소 판자와 삽을 잡고 병사들과 함께 일을 하였고 처첩(妻妾)들을 군대의 항오에 편입시키고[乃身操版揷, 與士卒分功, 妻妾編於行伍之間, 盡散飮食饗士.]' 음식을 모두 풀어 병사들을 먹여서 연나라와의 전쟁에서 승리하였다. 《史記 田單列傳》 물기(勿旗) '사물(四勿)'의 깃대[旗]라는 뜻이다. 《주자어류(朱子語類)》 권41 〈안연편(顔淵篇)〉에서 '비례물시(非禮勿視)'를 논하면서 "《설문해자(說文解字)》에 '물(勿) 자는 깃발과 비슷하여, 이 기를 한 번 흔들면 삼군(三軍)이 모두 물러난다.'라고 하였으니, 공부는 단지 이 '물' 자에 달려 있다.[說文謂勿字似旗脚, 此旗一麾, 三軍進退, 工夫只在勿字上.]" 하였다. 균석(鈞石) 고대 무게의 단위로 가장 무거운 저울추이다. 《서경》 〈하서(夏書) 오자지가(五子之歌)〉에 "통용되는 석과 공평한 균이 왕부에 있다.[關石和鈞, 王府則有.]" 하였는데, 채침의 주에 "균과 석은 5권 중에 가장 무거운 것이다.[鈞與石, 五權之最重者也.]" 하였다. 육비(六轡) 여섯 개의 말고삐라는 말인데, 네 필 말의 고삐 여덟 개 중에서 양편 참마(驂馬)의 두 고삐는 식(軾)의 고리 속에 넣고 손에는 여섯 개의 고삐만 쥐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다. 《시경》 〈사철(駟驖)〉에 "검붉은 네 필의 말 통통하게 살졌나니, 여섯 개의 고삐를 손 안에 쥐었도다.[駟驖孔阜, 六轡在手.]"라는 말이 나온다. 사유(四維) 나라의 벼리가 되는 4가지로 예(禮)·의(義)·염(廉)·치(恥)를 말한다. 《管子 牧民》 섬멸하여……없으니 《서경》 〈반경(盤庚)〉에 "불선하고 무도한 자들이 타락하여 공손하지 않거나 잠시 만남에 간악한 짓을 하는 자가 있으면 나는 이들을 남기어 기르지 않고 코를 베고 죽여서 새 도읍에 그 종자를 퍼트리지 못하게 할 것이다.[乃有不吉不迪, 顚越不恭, 暫遇姦宄, 我乃劓殄滅之無遺育, 無俾易種于茲新邑.]" 하였다. 신이……말라 '경(敬)'으로 마음을 수양해야 한다는 말이다. 주희(朱熹)의 제자인 임용중(林用中)이 지은 〈주일명(主一銘)〉에 "마음에 주재가 있으면 텅 비게 되니, 신이 그 성곽을 지키고, 주재가 없으면 실하게 되니, 귀신이 그 집을 엿본다.[有主則虛, 神守其都, 無主則實, 鬼闞其室.]"라고 한 데서 온 말로, 귀신이 집을 엿본다는 것은 곧 마음에 사욕(邪慾)이 들어옴을 의미한다. 《性理大全 권32 性理4 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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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광주 나주 양 고을의 문예를 겨루기를 요청한 격문 光羅兩邑戰藝檄 삼가 생각건대, 폐읍은 탄환만한 한 작은 현이지만 다행히 귀주(貴州)와 경계를 접하여 닭 울음소리가 서로 들리고 개의 이빨처럼 서로 맞물려 있다. 서악(瑞嶽)82)의 신령한 빛이 항상 금수(錦峀)83)를 끌어당길 듯하고, 영탄(靈灘)84)의 상서로운 기운이 멀리 낙포(樂浦)로 통한다. 산천은 아름답고 인물은 많아 곧바로 상하(上下)를 가릴 수 없다. 명공(名公)과 거경(巨卿)·석덕(碩德)과 홍유(鴻儒)가 전후로 배출되어 역사를 빛낸 사람도 우열을 가릴 수 없다. 호중(湖中) 천리 땅에 바둑알처럼 펼쳐진 군들이 어찌 한량이 있겠는가마는 명승을 칭할 때 광주(光州)와 나주(羅州)를 나란히 세는 것이 어찌 우연이겠는가.더구나 옛적 태평시절 수백 년 동안에 문물이 부려(富麗)하고 신성하신 조종(祖宗)의 단비와 같은 교화로 걸출한 준재들이 이 두 고을에 모여서 사철로 기쁘게 노닐며 서로 어울려 즐긴 것은 시례(詩禮)의 가르침과 현송(絃誦)의 아름다움이 아님이 없었으니, 우리 두 고을 간의 백전(白戰)85)의 놀이는 여기에서 비롯되었던 것이다. 긴급한 주장(奏章)과 격문(檄文)이 대열을 짓고 줄을 이루어 일진일퇴하고 일승일패하면서 자웅이 가려지고 성패가 나뉘었다. 마치 두 적이 서로 맞서 깃발과 북이 진을 이루고 기문(奇門)86)과 정법(正法)으로 각기 그 능력을 결판 짓는 것과 비슷한 점이 있었다. 그래서 이름을 '전(戰)'이라고 하였으니 대개 희언(戱言)이었다.임진년(1592, 선조25)과 정유년(1597) 뒤에 군무와 국정에 어려움이 많아지면서 문명(文明)한 모임이 폐지되고 강론하지 않은 지도 수십 년이다. 지난 만력(萬曆)과 숭정(崇禎) 연간에 나라가 중흥하여 바르게 다스려지고 백가지 폐지된 일이 모두 진작되자 사문(斯文)의 이 거동도 더욱 경장(更張)되었으며 예악의 풍도와 재예(才藝)의 풍성함에 아직도 혹 미치는 자들이 있었다. 아! 식양(息壤)이 저기에 있고87) 맹단(盟壇)도 옛 그대로인데 희생(犧牲)을 진설하는 글을 폐기하고 강론하지 않은 것이 지금 몇 년이나 되었도다. 말이 여기에 미치니 장탄식을 금할 수 없다.지난번 우리 명부(明府)의 이(李) 사문(斯文) 선생이 귀주(貴州)에 공문을 보내 옛 의리로 권면을 하였다. 그런데 귀주의 군자들은 숨을 죽이고 움츠리면서 성벽을 견고히 하고 굳게 지키니, 동주(東周)가 합종(合縱)을 맺어88) 연합을 하자 함곡관(函谷關)의 진(秦)나라 군대가 나가지 않은 것 같았다. 그랬으니 폐읍에서는 마땅히 부녀자가 쓰는 두건과 머리 장식물을 만들어 사마중달(司馬仲達)89) 같은 겁쟁이의 나약함을 깊이 꾸짖었던 것이다.그러나 어진 장수는 용서하는 일이 많아서 궁지에 처한 사람을 곤란하게 하지 않고, 병가(兵家)는 정도(正道)를 귀하게 여겨서 불능한 자를 긍휼히 여기고 위태로운 자는 붙들어 주니 각기 강역을 지키면서 예로써 서로 구휼하는 것만 못하였다. 그러므로 양계(兩階)에서 회군을 하여 문무(文舞)를 춘90) 것이 오래 되었는데 지금 또 생각해보니 한 걸상을 벗어나 강남에서 잠이나 자는 것을 어찌 오랫동안 용납하겠는가? 원컨대 여러 군자와 더불어 문예를 겨뤄야 하지 않겠는가?2월 25일 계유(癸酉)는 수신(受脤)91)하기에 좋은 날이다. 폐읍은 바야흐로 시례(詩禮)를 군율로 삼고 예악(禮樂)을 깃발로 삼는다. 고허(孤虛)·왕상(旺相)92)의 천시(天時)는 《주역》을 쓰고 상벌(賞罰)·여탈(予奪)의 권한은 《춘추》를 법으로 삼는다. 대장기는 장원봉(壯元峯) 아래에 세우고 육화진(六花陣)93)은 인덕지(仁德池) 가에 펼친다. 사자(四子)94)의 엄밀함과 칠서(七書)95)의 책략에 예의(禮儀) 삼백과 위의(威儀) 삼천96)을 겸하여 모두 거두어 함께 들어서 좌우로 배열하여 정렬하고, 연후에 중군의 장수로 아름답게 있는97) 자는 반마(班馬)와 장한(莊韓)98)이고 용기를 사서99) 남보다 먼저 오른 자는 이두(李杜)와 구소(歐蘇)100)이다. 산경(山經)과 지지(地誌)101)의 백가(百家)들에 이르러서는 양식을 나르고 군량을 실으며 군수물자를 공급하기를 청하지 않음이 없다. 또한 헌창(軒倉)의 육체(六體)102)·이채(李蔡)의 팔분(八分)103)·종장(鍾張)과 왕조(王趙)104)의 수백 수천 형태의 글자는, 비단을 펴고 흰 배를 펼쳐놓고 팔뚝을 걷어붙여 휘갈겨 쓰며 혹 명령을 받아 격문을 기초하고 혹 나무를 깎아 흰 바탕에 쓰니,105) 붕새가 묵지(墨池)106)에서 날고 용이 붓끝에서 뛰어오른다. 이것이 대략 폐읍의 군대 진용이다.또 순풍(淳風)107)에게 점대를 뽑게 하니 효상(爻象)이 모두 길하고 초공(焦貢)108)에게 거북껍질을 지지게 하니109) 조짐도 좋다. 원컨대 여러 군자는 속히 행장을 꾸려 음주례와 조도제(祖道祭)110)를 행하고 대오(隊伍)를 지어서 오라. 한(韓)·조(趙)에 지원을 청하고 제(齊)·초(楚)에 구제를 구하라. 손빈(孫臏)의 십만 개의 아궁이111)·항적(項籍)의 사흘 치 식량112)·전단(田單)의 죽기를 각오한 마음113)·맹시사(孟施舍)의 두려움 없는 의지114)로 당당하게 깃발을 끌고 정연하게 출병하라. 한 띠 같은 영강(榮江 영산강)의 만경창파를 장강(長江) 같은 천연의 참호로 여겨서 건너기 어렵다고 스스로 제한하지 말라. 천 길이나 되는 금악(錦嶽 금성산)의 구름 속 하늘로 솟은 봉우리를 팔공산(八公山)115) 같은 산색으로 보지를 말고 저상된 기운을 진무하라. 일곱 번 놓아주고 일곱 번 붙잡은 것은 서촉(西蜀)의 형세요116) 세 번 싸워 세 번 패배한 것은 동오(東吳)의 형세이다.117)폐읍(弊邑)을 위한 계책으로는 우리의 군대를 정비하고 우리의 문덕(文德)을 펼쳐서, 귀주(貴州)가 무장을 해제하고 붓을 던지며 우리의 춘풍(春風) 같은 은택에 모여들게 하는 것이 상책이다. 만약 부득이 하책을 내야한다면, 맑은 휘파람 한 소리로 돌아가려 생각하는 무리를 앉아서 물러가게 하는 것이 좋을 것이요, 옥 같은 모습에 몇 마디 말로 온 진(秦)나라의 군대를 쓸어버리는 것이 좋을 것이다. 또한 만약 성도(成都)의 노장(老將)118)이 먼저 항복 깃발을 세운다면 쇠고기와 술로 대접하여 보살피고 위로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사로잡고 풀어주며 붙잡고 버리는 것은 내 손바닥 안의 일처럼 쉬우니 어찌 넉넉히 여유가 있지 않겠는가?아! 앞의 말은 희언일 뿐이고 또한 한결같은 법칙이 있다. 모(某) 등이 평일에 옥녀봉(玉女峯) 아래로 길을 가다가 포충사우(褒忠祠宇)119)를 쳐다보니 문장과 절의가 늠름하여 엊그제 같았다. 망천산(望川山) 앞을 지나다가 존재(存齋)120) 서원(書院)의 뜰에서 재배를 올리니 학문(學文)과 종파(宗派)를 거슬러 올라갈 수 있을 듯하였다. 더구나 만취(晩翠) 평원에 유지(遺址)가 여전히 남아있으니 한 줄기 맑은 얼음이 황연히 정신을 접한 듯하고, 천 길 비단 봉우리에 눈과 달이 서로 빛나니 창의(倡義)의 충심이 백대를 격동시킨다. 그러니 우리 문도된 자들은 주선읍양(周旋揖讓)하면서 정학(正學)을 격려하고 책선보인(責善輔仁)121)해야지 문(文)으로써만 벗을 모은다면 옳겠는가?122) 술잔을 잡고 필묵을 희롱하며 오로지 꾸밈만을 일삼아 장단(長短)을 다퉈 겨루며 한묵(翰墨)으로만 각축을 벌인다면 옳겠는가? 그 반드시 변별할 사람이 있을 것이다.바라건대 모름지기 여러 군자가 강회(講會)하는 날에, 정숙자(程叔子)가 시험을 고쳐 과제물로 하는 것으로123) 마음을 세우고 호 문정(胡文定)이 소호(蘇湖)에서 가르쳤던 경의(經義)를 규칙으로 삼아서124) 걸음걸이 하나도 법도에 맞게 하고 오르내릴 때 예로써 하되, 고하(高下)를 살펴 평가하거나 교졸(巧拙)을 비교해 재는 데는 관심을 두지 말아야 한다. 바라건대 정학일통(正學一統)의 종지(宗旨)를 높이고 삼사(三舍)가 경박하고 사치스럽다는 비난을 면해야 한다. 그런다면 농담을 잘 하면서도 지나치지는 않고125) 늦추고 당기는데 법도가 있으며126), 문장과 덕행 두 가지를 행하는데 어긋나지 않고 전현(前賢)에게 부끄러울 바가 없어서 후세에게 길이 교훈을 드리울 것이다. 원하노니 여러 군자는 부디 또한 힘쓸지어다! 竊惟弊邑。 以彈丸一小縣。 幸得接壤於貴州。 鷄鳴相聞。 犬牙互錯。 瑞嶽神光。 常挹于錦峀。 靈灘休氣。 遠透於樂浦。 山川之美。 人物之庶。 直不相上下。 而名公巨卿。 碩德鴻儒。 前後輩出。 炳耀竹帛者。 亦不相優劣。 則湖中千里地。 列郡碁布者何限。 而稱之名勝。 並數光羅者。 豈偶然哉? 况在昔者昇平數百年。 文物富麗。 聖祖神宗。 時雨之化。 而髦俊傑出之才。 萃於玆二邦。 四時嬉遊。 相與娛樂者。 無非詩禮之敎。 絃誦之懿。 則吾二邑白戰之戲。 於是焉肇矣。 馳章走檄。 列隊成行。 一進一退。 一勝一負。 雌雄判矣。 成敗分焉。 有似乎兩敵相對。 旗鼓成陣。 奇門正法。 各決其能。 故名之曰戰。 盖戲之也。 壬丁之後。 軍國多艱。 文明之會。 廢而不講者凡數十年。 往在萬曆崇禎間。 中興正治。 百廢具振。 斯文此擧。 又得更張。 禮樂之風。 才藝之富。 尙或有因及之者矣。 嗚呼! 息壤在彼。 盟壇依舊。 而載牲之書。 棄而不講者。 今幾年矣。 興言及此。 不勝長息。 頃在我明府李斯文先生。 移書貴州。 勖以古義。 而貴州僉君子屛氣脅息。 堅壁固守。 東周之約從纔合。 而函關之秦兵不出。 則弊邑當製巾幗婦人之服。 深責仲達之㥘弱。 而仁將多恕。 不困人於竆。 兵家貴正。 矜不能而持危。 不若各守封壃。 以禮相恤。 故班師兩階。 舞文舞者有年矣。 今又思之。 一榻之外。 豈可久容江南之盰睡哉? 願與僉君子其肯戰否乎? 二月十五日癸酉。 乃受脤之佳期也。 弊邑方將以詩禮爲師律。 禮樂爲旌。 孤虛旺相之天時。 用大易。 賞罰予奪之權衡。 法春秋。 建大將旗於壯元峯下。 布六花陣于仁德池邊。 四子嚴密。 七書方略。 兼之以禮儀三百威儀三千。 具收幷擧。 左右排行。 然後中軍而作好者。 班馬莊韓。 賈勇而先登者。 李杜歐蘇。 至於山經地誌百家。 莫不輸糧載糗。 請供軍需。 又若軒倉六軆。 李蔡八分。 鍾張王趙千狀百態者。 陳縑布素。 奮臂揮灑。 或承令草檄。 或斫樹白書。 鵬飛墨池。 龍躍毫戈。 此弊邑軍容之大槩也。 又使淳風抽筳。 爻象並吉。 焦貢灼繩2)。 兆體亦賢。 願僉君子。 速裝飮祖。 結什而來。 請援於韓趙。 求救於齊楚。 孫臏十萬之竈·項籍三日之糧·田單有死之心。 孟施無懼之志。 堂堂引旗。 整整行師。 榮江一帶碧萬頃。 勿以長江天塹。 難以飛渡自畫。 錦嶽千丈聳雲霄。 勿視八公山色而撫喪氣。 七縱七擒。 西蜀之勢也。 三戰三北。 東吳之形也。 爲弊邑計者。 整我師旅。 敷我文德。 貴州解甲投筆。 囿我春風者上計也。 若不得已出於下策。 則淸嘯一聲。 坐退思歸之衆可也。 玉貌片言。 却掃全秦之師可也。 亦若使成都老將先竪降幡。 則餉以牛酒。 存撫而慰諭之亦可也。 擒縱操捨。 吾掌中事。 豈不綽綽然有餘裕哉? 嗚呼! 前言戲耳。 抑有一規。 某等平日路出玉女峯下。 瞻仰褒忠祠宇。 則文章節義。 凜若隔晨。 經由望川山前。 再拜存齋院庭。 則學文宗派。 若或可泝。 况乃晩翠平原。 遺址尙存。 而淸冰一條。 怳接精神。 錦峯千仞。 雪月交輝。 則倡義忠肝。 能激百代。 爲吾徒者周旋揖遜。 勉勵正學。 責善輔仁。 文以會友可乎? 操觚弄墨。 專事雕篆。 爭長競短。 馳逐翰墨可乎? 其必有能辨之者矣。 幸須僉君子講會之日。 以程叔子改試爲課立心。 胡文定蘇湖經義爲規。 繩趍尺步。 升降以禮。 無庸關心於考定高下。 較量巧拙。 庶幾崇正學一統之宗。 免浮靡三舍之譏。 則善戲不謔。 弛張有道。 詞文德行。 兩行不悖。 無所愧於前脩。 永垂訓於來世。 竊願僉君子。 尙亦勖哉! 서악(瑞嶽) 서석산(瑞石山) 즉 광주(光州)의 무등산(無等山)을 말한다. 금수(錦峀) 전라도 나주(羅州)의 금성산(錦城山)을 말한다. 영탄(靈灘) 광주와 나주를 경유해 흐르는 영산강(榮山江)을 말한다. 백전(白戰) 시인(詩人)들이 서로 재능을 겨루는 것을 말한다. 본래 송(宋)나라 구양수(歐陽脩)가 특정한 어휘를 쓰지 못하게 하고 시를 짓게 한 것에서 비롯되었다. 기문(奇門) 기문둔갑(奇門遁甲)으로 길흉을 점치는 술수(術數)의 일종인데, 흔히 병법에 많이 이용되었다. 식양(息壤)이 저기에 있고 굳게 맹세한 일을 가리킨다. 식양은 전국(戰國) 시대 진(秦)나라의 읍명(邑名)이다. 진나라 무왕(武王)이 장수 감무(甘茂)에게 의양(宜陽)을 정벌하게 하였는데, 감무는 왕이 도중에 후회할까 염려하여 식양에서 굳게 맹세하게 하였다. 후에 왕이 정벌에 대해 회의를 느끼자, 감무가 글을 올려 "식양이 저기에 있습니다.[息壤在彼.]"라고 하였고 드디어 의양을 함락시켰다. 《戰國策 秦策》 합종(合縱)을 맺어 원문의 '약종(約從)'으로, 전국 시대의 대표적인 유세객인 소진(蘇秦)이 강성한 진(秦)나라를 두려워하는 산동 지역의 제후국을 찾아다니며 6국(六國)의 연합으로 진나라에 대항하자는 합종설(合縱說)을 주창하였다. 이에 대항하여 진나라의 장의(張儀)가 여섯 나라가 동맹을 깨고 진나라를 섬기자는 연횡책(連橫策)을 폈다. 장의의 계책대로 여섯 나라가 각각 분리되어 결국 진나라에게 모두 멸망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史記 권70 張儀列傳》 부녀자가……사마중달(司馬仲達) 원문의 '건괵(巾幗)'으로, 부녀자들의 두건과 머리 장식인데, 못난 사내를 부인에 빗대는 경멸의 뜻을 내포하고 있다. 사마중달은 사마의(司馬懿)의 자(字)이다.촉한(蜀漢)의 제갈량이 위(魏)나라 사마의(司馬懿)와 대적할 때 아무리 싸움을 걸어도 사마의가 응하지 않으므로 일부러 '부녀자가 쓰는 장식물[巾幗婦人之飾]'을 보내 조롱하였다. 《晉書 宣帝紀》 양계(兩階)에서……춘 양계(兩階)는 주인과 손님의 섬돌인데, 여기서는 모여서 문장을 겨루던 회합 장소를 말한다. 《서경》 〈대우모(大禹謨)〉에 "(禹가) 회군을 하고 군대를 거두자 순 임금이 문덕을 크게 펴고 방패와 깃을 들고 두 섬돌 사이에서 춤을 추었는데, 70일 만에 유묘가 귀순해왔다.[班師振旅, 帝乃誕敷文德, 舞干羽于兩階, 七旬有苗格.]" 하였다. 문무(文舞)는 칼이나 창을 들지 않고 문관(文官)의 차림으로 열을 지어 추는 춤이다. 수신(受脤) 제사 고기를 받는 것으로, 출병(出兵)하는 것을 뜻하는데, 여기서는 문예를 겨루는 것을 비유한 것이다.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민공(閔公) 2년 조에 "군대를 거느린 자는 종묘에서 명령을 받고 사에서 제육을 받는다.[帥師者, 受命於廟, 受脤於社.]" 하였다. 고허(孤虛)·왕상(旺相) 술법가에서 날과 계절의 길흉을 따지는 방법이다. '고허'는 일진(日辰)에 기운이 완전하지 않음을 이르는바, 예를 들면 갑자일(甲子日)로부터 계유일(癸酉日)까지가 10일간인데, 여기에는 지지(地支) 중 술(戌)과 해(亥)가 빠지므로 술과 해는 고(孤)가 되고, 술과 해의 반대 방향인 진(辰)과 사(巳)는 허(虛)가 되는 따위이다. '왕상'은 기운이 왕성하고 딴 기운이 도와줌이 있음을 이른다. 이를테면 봄에는 나무의 기운이 왕성하여 목왕(木旺)이고 화상(火相)이며, 여름에는 불의 기운이 왕성하여 화왕(火旺)이고 토상(土相)인 것과 같은 경우이다. 육화진(六花陣) 제갈량(諸葛亮)의 팔진법(八陣法)에 기초하여 당(唐)의 이정(李靖)이 만든 진법이다. 사자(四子) 사자서(四子書)의 준말로, 공자(孔子)·증자(曾子)·자사(子思)·맹자(孟子)의 언행록이라 할 《논어》, 《대학》, 《중용》, 《맹자》를 지칭한다. 칠서(七書) 중국의 병법(兵法)에 관한 7종의 병서(兵書)이다. 《손자(孫子)》·《오자(吳子)》·《육도(六韜)》·《사마법(司馬法)》·《삼략(三略)》·《울료자(尉繚子)》·《이위공문대(李衛公問對)》이다. 예의(禮儀)……삼천 큰 예와 작은 예를 말한 것이다. 《중용장구》 제27장에 "크고 넉넉하도다. 예의가 3백 가지요, 위의가 3천 가지로다.[優優大哉, 禮儀三百, 威儀三千.]"라는 말이 나온다. 예의(禮儀)는 기본적인 대강령(大綱領)인 경례(經禮)를 말하고, 위의(威儀)는 구체적인 소절목(小節目)인 곡례(曲禮)를 말한다. 《예기》 〈예기(禮器)〉에 "경례가 3백 가지요, 곡례가 3천 가지인데, 그 정신은 하나이다.[經禮三百, 曲禮三千, 其致一也.]"라는 말이 나온다. 중군의……있는 《시경》 〈정풍(鄭風) 청인(淸人)〉에 "청읍 사람이 축 땅에 있으니, 네 마리 갑옷 입힌 말이 유유자적하도다. 왼쪽 사람은 수레를 돌리고 오른쪽 사람은 칼을 뽑거늘, 중군의 장수는 아름답게 있도다.[淸人在軸, 四介陶陶, 左旋右抽, 中軍作好.]"라고 한 구절을 인용한 것이다. 반마(班馬)와 장한(莊韓) '반마(班馬)'는 반고(班固)와 사마천(司馬遷)의 병칭이다. '장한(莊韓)'은 장주(莊周)와 한비자(韓非子)의 병칭이다. 용기를 사서 원문의 '고용(賈勇)'으로, 춘추 시대 제(齊)나라 사람 고고(高固)가 진(晉)나라 군대 속으로 돌진하여 위세를 떨치고 돌아와서 자기 군사의 용기를 북돋워 주기 위하여 "용맹을 떨치고 싶은 사람이 있거든 나에게 남아 있는 용기를 사 가라.[欲勇者, 買余餘勇.]"라고 외쳤던 고사에서 온 말이다. 《春秋左氏傳 成公2年》 이두(李杜)와 구소(歐蘇) '이두(李杜)'는 이백(李白)과 두보(杜甫)의 병칭이다. 구소(歐蘇)는 구양수(歐陽脩)와 소식(蘇軾)의 병칭이다. 산경(山經)과 지지(地誌) 산경(山經)은 산맥과 지리를 기록한 책을 말한다. 지지(地誌)는 방역(方域), 산천(山川), 풍속, 산물(産物) 등을 기록한 책을 말한다. 헌창(軒倉)의 육체(六體) '헌창(軒倉)'은 고대 글자를 만들었다는 창힐(倉頡)을 말한다. '육체(六體)'는 서체를 가리킨다. 이채(李蔡)의 팔분(八分) '이채(李蔡)'는 이사(李斯)와 채옹(蔡邕)이다. 이사는 진나라 때의 재상으로 문자를 통일하기 위해 대전(大篆)에 바탕을 두고 소전(小篆)을 제정했다고 한다. 채옹은 후한 말기의 문신이자 서법가(書法家)로 전서(篆書)와 예서(隷書)에 뛰어났으며, 팔분체(八分體)와 비백체(飛白體)의 창시자로 알려져 있으나 확실하지 않다. '팔분(八分)'은 서체(書體)의 하나로, 예서 (隷書)와 전서(篆書)를 절충하여 만든 서체이다. 종장(鍾張)과 왕조(王趙) '종장(鍾張)'은 삼국 시대 위(魏)나라의 종요(鍾繇)와 동한(東漢)의 장지(張芝)로, 이들 두 사람은 모두 글씨를 잘 쓰기로 이름 높았다. '왕조(王趙)'는 서예에 뛰어났던 동진(東晉)의 왕희지(王羲之)와 원나라의 조맹부(趙孟頫)의 병칭이다. 나무를……쓰니 전국 시대 제(齊)나라 손빈(孫臏)이 위(魏)나라 방연(龐涓)과 싸울 때 손빈이 방연을 마릉(馬陵)의 좁은 길로 유도한 다음 그곳에 복병(伏兵)을 설치하고서 큰 나무의 껍질을 하얗게 깎아 내고 거기에 쓰기를, "방연이 이 나무 밑에서 죽을 것이다.[龐涓死于此樹之下.]" 하였는데, 과연 방연이 밤에 도착하여 깎아낸 나무에 쓰인 흰 글자를 보다가[龐涓果夜至斫木下, 見白書.] 기습을 받아 대패하고 자신은 목을 찔러 자결한 일을 말한다. 《史記 孫子吳起列傳》 묵지(墨池) 진(晉)나라 때 왕희지(王羲之)가 붓을 씻었다는 연못이다. 송(宋)나라 증공(曾鞏)의 〈묵지기(墨池記)〉에 의하면, "신성가에는 우묵하게 패여 있는 장방형의 못이 있는데 이곳은 왕희지의 묵지라고 한다.[新城之上, 有池窪然而方以長, 曰王羲之之墨池者.]" 하였다. 순풍(淳風) 당(唐)나라 이순풍(李淳風)으로 박학하였는데, 특히 천문(天文)과 역산(曆算) 및 음양(陰陽)의 학문에 더욱 정통하여 혼천의(渾天儀)와 황도의(黃道儀) 등을 만들었다. 초공(焦貢) 전한(前漢) 소제(昭帝) 때의 역술 이론가로, 초공(焦贛)이라고도 한다. 거북껍질을 지지게 하니 점을 친 것이다. 원문의 '灼繩'은 '灼龜'의 잘못인 듯하다. 조도제(祖道祭) '조(祖)'는 길을 떠날 때에 길신(神)에게 지내는 제사이다. 손빈(孫臏)의……아궁이 손빈이 제(齊)나라의 군사를 거느리고 위(魏)나라의 장수 방연(龐涓)과 싸우게 되자 첫날에는 취사하는 아궁이를 10만 개 만들었다가 이튿날엔 5만 개로 줄이고 또 그 이튿날엔 3만 개로 줄여 도망친 것처럼 위장하였다. 이에 방연이 방심하고 추격을 하다 마릉(馬陵)에서 손빈의 복병을 만나자 자결하였다. 《史記 孫子吳起列傳》 항적(項籍)의……식량 결사의 각오로 싸우겠다는 결의를 비유한 것이다. 항적이 진(秦)나라와 싸우러 가면서 하수(河水)를 건넌 뒤 "배를 모두 가라앉히고, 솥과 시루를 깨뜨리고, 막사를 불태우고, 사흘 양식만 지니고서 사졸에게 필사적으로 싸워야 함을 보여준 것[沈船破釜甑, 燒廬舍, 持三日糧, 以示士卒必死]"을 말한다. 《史記 項羽本紀》 전단(田單)의……마음 전단은 전국(戰國) 시대 제(齊)나라의 명장(名將)이다. 노중련(魯仲連)은 전단이 즉묵(卽墨)에서 승리했던 이유를 들면서 "그 때에는 장군은 죽으려는 마음이 있었고 군사들은 살려는 기운이 없었다.[當此之時, 將軍有死之心, 而士卒無生之氣.]" 하였다. 《戰國策 齊策6》 맹시사(孟施舍)의……의지 맹시사(孟施舍)는 싸움에서 비록 승리하지 못하더라도 오직 두려움이 없기만을 기필하는 용기를 가진 사람이다. 《孟子 公孫丑上》 팔공산(八公山) 전진(前秦) 왕 부견(苻堅)과 동진(東晉)의 장수 사석(謝石)과 사현(謝玄)이 대전을 펼친 산이다. 부견이 대패하고 팔공산을 바라보니, 두려운 나머지 산의 초목들이 모두 진나라 군대로 보였다고 한다. 《晉書 권114 苻堅載記下》 일곱……형세요 원문의 '칠종칠금(七縱七擒)'으로, 촉나라 후주(後主) 건흥(建興) 3년(225)에 제갈량이 군대를 이끌고 남이(南貳)를 평정하면서 맹획(孟獲)과 싸우면서 일곱 번 놓아주고 일곱 번 생포하여 심복케 한 일을 가리킨다. 《三國志 권35 蜀書 諸葛亮傳》 세……형세이다 전국시대 월나라가 오나라를 패배시킨 일을 말한다. 《국어(國語)》 〈오어(吳語)〉에 "오(吳)나라 군대가 월(越)나라에게 세 번 싸워 세 번 패배하자 마침내 월(越)나라 군대가 오나라에 들어가게 되었고 곧장 오나라의 국도(國都)에 진입하여 왕궁(王宮)을 포위하였다.[三戰三北, 乃至於吳, 越師遂入吳國, 圍王宮.]" 하였다. 성도(成都)의 노장(老將) 후한(後漢)의 엄안(嚴顔)을 가리키는 듯하다. 그는 유장(劉璋)의 부하 장수로 파군 태수(巴郡太守)로 있다가 장비(張飛)에게 잡혔는데 "우리 파주에는 머리 잘리는 장군은 있을지언정 항복하는 장군은 있지 않다.……목을 치려면 칠 것이지 어째서 성을 내는가."라고 의연하게 대답을 하자, 장비가 장하게 여겨 풀어 주고 빈객으로 대접했던 고사가 전한다. 《三國志 권36》 포충사우(褒忠祠宇) 포충사로, 임진왜란 때 순절한 고경명 고종후 고인후 3부자와 유팽로 안영 등 5인의 충절을 기리기 위한 사액 사당이다. 존재(存齋) 기대승(奇大升, 1527~1572)의 호이다. 본관은 행주(幸州), 자는 명언(明彦),호는 고봉(高峯) 또는 존재(存齋)이다. 1558년 식년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1572년 성균관 대사성에 임명되었고, 대사간·공조 참의를 지냈다. 책선보인(責善輔仁) 선한 행동을 권하고 어진 품성을 돕는다는 말로 벗 사이의 바른 도리를 말한다. 《맹자》 〈이루 상(離婁上)〉에 "아비와 자식 사이에는 선을 권하지 않는다.[父子之間不責善]" 하였고, 《논어》 〈안연(顔淵)〉에 "군자는 글로 벗을 모으고, 벗으로 어짊을 돕는다.[君子, 以文會友, 以友輔仁.]" 하였다 문(文)으로써만……옳겠는가? 문장만이 아니라 덕행도 중시해야한다는 말이다. 정숙자(程叔子)가……것으로 송(宋)나라 유학자 정이(程頥)를 가리키는데, 그의 자가 정숙(正叔)이므로 존칭하여 그렇게 부른다. 그가 학제(學制)를 자세히 살핀 뒤에 시험을 월과(月課)로 고치고, 향공(鄕貢)의 진사(進士) 수를 줄이도록 철종(哲宗)에게 건의한 것을 가리킨다. 《小學 善行》 호 문정(胡文定)이……삼아서 호 문정(胡文定)은 호 안정(胡安定)의 잘못인 듯하다. 호 안정은 송(宋)나라 학자 호원(胡瑗, 993~1059)으로 안정은 호이다. 그는 소주(蘇州)와 호주(湖州)에서 교수로 생도들을 가르쳤는데 가르칠 때는 사제의 예를 엄하게 하였으며, 사람을 가르치는 법에 있어 과조(科條)를 자세하게 구비하고 경의재(經義齋)와 치사재(致事齋)로 나누어 가르쳤다. 경의재에는 소통하고 기국이 있는 자를 선발하여 거처하게 하고, 치사재에는 사람마다 각각 한 가지 일을 전공하게 하고 도 한 가지 일을 겸하여 익히게 하였다. 《宋元學案 권1 安定學案》 농담을……않고[善戲不謔] '謔'은 '虐'의 잘못인 듯하다. 농담을 하면서도 절도가 있음을 말한 것이다. 《시경》 〈기욱(淇奧)〉에 "농담을 잘 하되 지나치지는 않는구나.[善戱謔兮, 不爲虐兮.]" 하였다. 늦추고……있으며 본래 활줄의 이완과 긴장을 조절하는 것을 가리키는데, 일을 조화롭게 처리하는 것을 말한다. 《禮記 雜記下》 灼繩 '灼龜'의 잘못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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