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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갑진년(1664) 甲辰 1월 5일 무진(戊辰). 무망괘(无妄卦) 구오(九五) 소음(少陰)유생 홍일뢰(洪一耒)가 말하기를 "지난해 12월 24일에 중수하고 봉안하는 일을 의논하기 위한 황산 서원(黃山書院)의 모임에 저도 가서 참여했습니다."라고 하였다. 서원에서는 이전에 이 문원(李文元 이언적(李彦迪)), 이 문성(李文成 이이(李珥)), 성 문간(成文 성혼(成渾)) 세 분 선생을 배향하였다. 이번에 우암(尤菴) 송시열(宋時烈)이 중수하는 일을 주관하여 이문순(李文純 이황(李滉))과 조문정(趙文正 조광조(趙光祖)) 두 분 선생을 주향(主享)으로 하였다. 함께 모인 양호(兩湖) 지방의 인사가 200여 인인데 송 판서[송시열]가 수헌(首獻)하고 참의 이유태(李惟泰)가 부헌(副獻)하고 공주 목사(公州牧使) 정영한(鄭英漢)이 종헌(終獻)하였다. 송시열, 이유태 두 공은 심의(深衣)에 복건(幅巾)을 쓰고 제례를 거행하고 정군(鄭君)은 시복(時服) 차림으로 일을 거행하였다고 한다.1월 21일 갑신(甲申) 기제괘(旣濟卦) 구삼(九三) 소양(少陽)새벽에 일어나 제례를 행하였다. 이 지방은 선군자(先君子)께서 나고 자란 마을이라서 어버이의 넓고 큰 은혜가 평소보다 만 배나 크게 느껴진다. 이날 선조의 산소를 하나하나 배알하였고 벽송당(碧松堂)에서 형제와 조카들이 모여 하루를 묵었다.1월 27일 경인(庚寅) 가인괘(家人卦) 구삼(九三) 소양(少陽)서울의 사인(士人) 이로(李潞)가 나를 만나러 왔다. 전 이조 판서 조경(趙絅)의 외손자인데 말솜씨가 온당하여 예전에 송시열(宋時烈), 송준길(宋浚吉), 윤휴(尹鑴), 윤선도(尹善道), 허목(許穆)이 예를 논한 시말을 얘기할 수 있었다. 그의 외조부 역시 한마디 말을 한 뒤에 당시 사람들에게 배척을 받았는데 때마침 포천(抱川)의 촌사(村舍)로 물러나 지내고 있다고 하였다.또 말하기를, "숙부인 이군 성징(李君聖徵)이 현재 동래(東萊)의 이군 성징 임소(任所)에 있는데, 전해 겨울 진봉(進封)하는 행렬을 영솔해 온 왜인(倭人)을 접대할 때 주량을 다투느라 도리를 어기고 교만하였다. 이군이 시종일관 굽히지 않자 왜인이 검을 뽑아 난동을 부려 부산 첨사(釜山僉使)와 부사(府使)의 군관(軍官) 이하는 모두 달아나 숨고 하리(下吏) 1인만 죽음을 무릅쓰고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그리고 일이 진정되자 달려가 보고하였고, 첨사는 잡혀가 곧장 옥에 갇혔다."고 하였다.2월 2일 갑자(甲子) 손괘(損卦) 상구(上九) 소양(少陽)읍리(邑吏)가 다음 날 수령인 채후(蔡侯) 충립(忠立)의 여츤(旅櫬 객사한 사람의 널)이 내일 발인을 하여 돌아온다고 고하였다. 가서 만났더니 상주가 만사(挽詞)를 부탁하기에 그를 위해 율시 한 편을 지었다. 대체로 채후는 꾸밈이 없고 관대하고 검소하였지만 정사(政事)에는 재주가 없었다. 그래서 백성들이 그가 사납지 않은 것은 좋아했지만 융통성이 없는 것을 단점으로 꼽았다. 상(喪)을 치를 때 고을 사람인 윤선갑(尹先甲), 홍종화(洪鍾華)가 치상(治喪)을 주관했는데, 베로 만든 이불과 짧은 바지 외에는 관아에 보관된 옷이 없어 염관(斂棺)할 방도가 없었다. 향인(鄕人)들이 함께 부의(賻儀)를 보내 주어 이불과 바지를 사서 염하였다고 하였다. 그래서 내가 만사를 지었는데, 3, 4구는 "정사에 부드러운 채찍을 사용하여 은혜를 우러러보았으며, 관을 채울 옷이 없으니 비로소 청렴했음을 알겠구나.[政用鞭皮方仰惠 衣無充棺始知淸]"이고, 7·8구는 "제주배(齊州盃)87)의 물을 술잔에 붓고, 거듭거듭 만가(挽歌)를 부르며 떠나는 공을 전송하네.[酌彼齊州盃上水 紼謳三唱送公行]"이다. 대체로 사실을 기록한 것이다.2월 15일 정축(丁丑) 귀매괘(歸妹卦) 초구(初九) 대양(大陽)율지곡(栗枝谷)에서 외조부와 외조모의 묘소에 제사를 지냈다. 대체로 내 외조부께서 만년에는 번잡한 성시(城市)에 염증을 느껴 일년 내내 도촌면(道村面)의 농사(農舍)에 머무셨다. 대를 이을 자손이 없으며 숭정(崇禎) 연간 신미년(1631, 인조9년)에 돌아가셨다. 나는 어린 나이라서 고향에 반장(返葬)하지 못하고 이곳에 임시로 장사하였다. 나 또한 형제나 아들, 조카가 없어 봄가을로 성묘하되, 어버이의 산소가 멀리 있었기 때문에 절일(節日)에 제사를 치르지 못하고 흔히 하듯이 날짜를 가려 거행하였다. 나는 여덟 살에 처음으로 외조부에게 《천자문(千字文)》과 당송 시문(唐宋詩文)을 배웠다. 그해 12월에 돌아가셨지만 아직도 곧고 굳은 뜻과 고고한 자태를 우러러보고 있다. 오늘 향을 사르자니 처연한 감회가 마음에 가득하지만 또한 사람들이 내 마음을 알 수 없으니 서글프기만 할 뿐이다.윤6월 21일 신사(辛巳) 미제괘(未濟卦) 구이(九二)묘시(卯時)와 진시(辰時)에 햇무리가 졌다. 남풍이 천천히 불어오고 조금 지나서 북풍도 함께 일기 시작하였다. 남쪽과 북쪽 방향에서 구름이 일시에 풍산(楓山)의 서쪽으로 모였다. 내 집 동쪽에서 우레와 번개가 치더니 큰비가 쏟아 붓듯 하였는데 참으로 기이한 볼거리였다. 남쪽과 북쪽에서 바람이 마주하고 함께 불어와 사방의 구름이 한곳으로 모여들어 거센 빗줄기를 이루었다. 신의 공능(功能)과 귀신의 자취를 찬란하게 엿볼 수 있었다. 아, 그중에는 이 일을 주장하는 자가 없는 듯하건만, 호령하여 모였다 흩어졌다 하며 변화무쌍한 굴신(屈伸)이 어찌 이처럼 신묘할 수 있겠는가. 그러고 난 뒤 시원한 바람 소리가 들리더니 구름이 걷히고 비가 그치는데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아, 역시 신묘하였다. 그대로 묵묵히 바라보다가 적어 둔다.이날 이조 참판 유공 계(兪公棨)88)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유군(兪君)은 강직하고 학문을 좋아하였다. 일찍이 일 때문에 금산(錦山)으로 귀양을 가 골짜기에 직접 서까래 몇 개로 된 초가집을 지었고 기장밥과 나물국조차 아침저녁으로 잇지 못하였지만 독서를 멈추지 않고 편안하였다. 해배(解配)되어 돌아와서는 무안 현감(務安縣監)에 제수되었는데 청렴하고 근실하며 공정하고 검소함으로 칭송을 받았다. 현의 직임을 떠나서는 간관(諫官)에 제수되었다. 인조(仁祖)의 시호(諡號)를 올리는 날에는 직언하여 성상의 위엄을 범하면서도 뜻을 굽히지 않았다. 인산(因山) 뒤에 부령(富寧)으로 유배 되었다. 우재(尤齋) 송공(宋公 송시열(宋時烈))이 효묘(孝廟)를 뵙고 그의 죄가 아니니 풀어 주어 돌아오게 하도록 상소하였다. 곧이어 왕을 보필할 인재로 천거되어 차례차례 청요직(淸要職)에 올랐다. 금상이 왕위를 계승하자 오래도록 옥당(玉堂)에 있다가 부제학이 되었다. 참의로 이조에 들어가 참판에 제수되었으나 오래지 않아 체차되었다.유군(兪君)이 무안에 있을 때 내게 편지를 보낸 뒤 줄곧 왕래하면서 편지를 주고받은 것이 여러 해였다. 당시 내가 조모의 상을 당하여 장례와 제사 일에 얽매어있어서 찾아뵙고 만나기로 한 약속을 끝내 이루지 못하고 공은 관직을 그만두고 떠났다. 그래서 이름을 듣고 그 사람을 보기를 원하였는데 지금 그의 부고를 들으니 나를 처연하게 하였다.12월 14일 신미(辛未) 명이괘(明夷卦) 육이(六二) 소양(少陽)우재(尤齋) 송공(宋公 송시열(宋時烈))이 지방관을 매우 공경스럽게 대하여, 회덕 수령(懷德守令)과 청주 목사(淸州牧使)가 찾아오면 반드시 뜨락에 내려와 맞이하고 전송하며 용모와 말투가 매우 공손하였다고 들었다. 일찍이 말하기를, "성주(城主)가 군부(君父)에게 명을 받아 나를 다스리기 위해 왔으니, 성주에게 거만한 것은 곧 군부에게 거만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부인(夫人)의 조카가 서원현(西原縣)【청주(淸州)의 명호(名號)가 강등되었을 때이다.】을 다스릴 때 그가 찾아오자 역시 뜨락으로 내려와 맞이하고 전송하여 다른 사람을 대하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이는 대체로 속인이 아내의 조카를 자기 친족처럼 대하는 것과는 매우 달랐기 때문이다.12월 20일 정축(丁丑) 비괘(賁卦) 육이(六二) 소양(少陽)이계현(李啓玄)은 경기 고양(高陽)에 사는 상놈의 아들이다. 젊은 시절 승려가 되었고, 고(故) 상국(相國) 남이웅(南以雄)89)의 산재(山齋)에 우거하였다. 남 상국은 그가 지닌 재주를 아까워하여 독서를 권하였다. 한 번만 읽으면 바로 암기하였으며 많은 책을 널리 읽고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없자 남 상국이 그에게 환속(還俗)을 권하였다. 풍수학으로 시속(時俗)에 이름이 나자 어버이의 장례를 치르는 공경대부들이 앞 다투어 그를 맞이하였다. 정유년(1597, 선조30)에 전한(典翰) 이수인(李壽仁)의 집에서 북으로 돌아올 때 나도 조부의 장지가 길하지 않았기 때문에 옮겨 묻을 자리를 골라 달라고 하였지만 내 뜻에 만족스럽지 않아서 아직 그 자리를 사용하지 않았다.올해 서봉령(徐鳳翎)이 자기 부모를 이장하려고 경기, 강원 지역 등을 뒤져서 그를 맞이하여 왔다. 그의 사람됨을 보았더니 추위가 극성을 부리는 겨울인데도 홑옷만 입고도 추위를 느끼지 않았다. 차가운 샘물에 들어가 목욕을 하기도 하고, 길을 갈 때는 말을 타지도 않고 하루에 수백 리를 달리고도 피곤을 느끼지 않았다. 사람이 살던 옛 마을이나 선산(先山)을 찾아가 지난 길흉을 말하면 마치 부절을 맞춘 듯이 정확하였다. 그래서 경사(卿士) 이하 사람들이 모두 그에게 미혹되어 도인(道人)이라 일컬었다. 내가 보기에는 잘못을 저지르는 경우가 많고 시골의 늙은 창기(娼妓)에게 빠져서 생각이나 행적이 모두 드러나 취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다만 풍수에 관한 술법이 평범한 지관(地官)들보다 조금 나을 뿐이었다. 이 때문에 나도 한두 번 그를 불러 선산(先山)을 점쳐 보았지만 역시 가볍게 믿을 수 없었다. 그래서 여전히 그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12월 30일 정해(丁亥) 기제괘(旣濟卦) 상육(上六) 소양(少陽)오늘은 섣달 그믐날이다. 일년 동안 있었던 일을 하나하나 헤아려 논해 보니, 봄과 여름이 교차할 때 비가 내리고 해가 뜨는 날이 심하게 어긋나지 않은 것이 남쪽 지방의 들판에 있는 약간의 고을뿐이었다. 7, 8월 간에는 윗사람들이 농가의 득실을 자세히 조사하지 않고 풍년이라고 일컬었다. 서리가 내린 뒤 벼가 태반은 여물지 않았건만 윗사람들이 또 자세히 살피지 않았다. 그래서 들판에는 흉년의 조짐이 있지만 부세는 풍년이 든 해처럼 징수하여 백성들의 고통과 원망이 많았다. 골짜기에 있는 군(郡)에서는 수재(水災)가 모두 심해서 백성들은 산이 무너져 압사당하고 오곡은 거센 계곡물에 떠내려가기까지 하였다. 더구나 목면(木綿)이 재해를 입어 손상된 것은 산이나 들판이나 똑같건만 대동미(大同米)를 포(布)로 환산하여 거두어들였으니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민심이 소란스럽고 몸에 제대로 된 옷을 걸치지 못하였다.상천(上天)이 경계를 보여 일월성신이 동요되고 서로 부딪치는 변화를 눈이 있는 자라면 모두가 보았으며, 산천초목과 짐승이 벌이는 괴이한 증상이 모두 드러났다. 인심이 놀랍도록 잘못되고 세도가 추잡하고 야박하기가 얘기할 가치도 없었다. 수령은 일락(逸樂)에 빠져 귀에 들리는 게 없는 듯하고 조정은 인원만 갖추었고 눈에 보이는 게 없는 듯하였다. 덕행을 갖춘 사대부들은 당론(黨論)만 숭상할 뿐이고, 혼탁한 관리들은 뇌물에만 힘쓸 뿐이어서 300년 종사(宗社)를 비호할 사람이 하나도 없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이것이 무슨 시대인가.민간의 비루한 사람인 데다 문지(門地)도 미천하고 자취도 소원하니 뜨거운 심정이 뱃속에 가득하여 분격하지 않은 날이 없지만 또한 어찌하지 못하였다. 오로지 날씨의 맑고 흐림을 적어 두는 조그만 책자 끝에다 오직 심정의 만 분의 일만 적으면서 마음에 쌓인 기분을 펼쳐 놓는다. 그렇다 하더라도 나라의 일은 나만 홀로 근심할 바도 아니고 또한 내 심력(心力)으로 미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나의 심신이 올바른지 그렇지 않은지, 수양이 됐는지 그렇지 않은지만이 내 분수에 해당하는 일이다. 1년 동안 있던 일을 돌이켜 보니 보아줄 만한 실상이 백에 하나도 없었다. 마음을 다스리는 도를 모르지도 않고 수신의 공부를 익히지 않은 것도 아니다. 그러나 마음과 일이 괴리되고 일상의 동정(動靜)이 어긋나 360일 가운데 헛되이 떠돌지 않는 날이 없었다. 내 나이를 손꼽아 보니 이미 42세가 되었다. 묵은해를 보내는 이 밤에 나도 모르게 놀라고 깨달아 삼가 여기에 적어 잘못을 바로잡고 자신을 꾸짖는 도구로 삼는다. 正月初五日。 戊辰。 无妄九五。 少陰洪儒一耒言: "前年十二月二十四日。 黃山書院重修奉安之會。 渠亦往參云。" 院前享李文元李文成成文三先生。 今宋尤菴時烈。 主事重修。 以李文純趙文正二先生主享。 兩湖人士會齊者。 二百餘人。 宋判書首獻。 李參議惟泰副獻。 公州牧鄭英漢終獻。 而宋李二公。 以深衣幅巾行祭。 鄭君以時服行事云。二十一日。 甲申。 旣濟九三。 少陽晨起行祭。 此地乃先君子榟桑之鄕。 昊天罔極。 萬倍于常。 是日歷謁先祖群塋。 兄弟侄子會宿于碧松堂。二十七日。 庚寅。 家人九三。 少陽京中士人李潞來見。 前吏判趙絅之外孫。 言語頗穩。 能道曩日二宋二尹一許論禮始末。 其外祖。 亦一言之後。 尙擯於時。 時方退居于抱川村舍云。 又言: "其叔父李君聖徵。 時在東萊任所。 去年冬。 倭人進封領來者接待時。 爭酒悖慢。 李君終始不屈。 倭人拔劍作亂。 釜山僉使及府使之軍官以下。 皆遁走。 惟下吏一人死守不去。 事定走聞。 僉使拿就繫獄云。"初二日。 甲子。 損上九。 少陽邑吏告明日主倅蔡侯忠立。 旅櫬發引而歸。 往見之。 喪主請挽辭。 爲賦一篇律語。 蓋蔡侯質朴寬儉。 而無才於政事。 故民雖愛其不猛。 而短其無變通。 及其喪也。 邑人尹先甲洪鍾華。 典治其喪。 布被短袴之外。 衙無所藏。 無以斂棺。 鄕人共賻。 買被與袴而斂之云。 故余挽辭三四云: "政用鞭皮方仰惠。 衣無充棺始知淸。" 其七八云: "酌彼齊州盃上水。 紼謳三唱送公行云。" 蓋記實矣。十五日。 丁丑。 歸妹初九。 大陽祭外祖考妣墓于栗枝谷。 蓋余外祖。 晩年厭煩城市。 終年於道村農舍。 旣無嗣胤。 而逝於崇禎辛未。 余在冲年。 不能返葬故山。 權窆于此。 余亦無兄弟子侄。 春秋掃塋。 以親塋遠在。 故不能行祭于節日。 例常擇日行之。 余於八歲。 初受千字文及唐宋詩文於外祖。 其年十二月下世。 猶及望見貞固之守介特之姿。 薰蒿今日。 凄感滿懷。 亦有人所不及知余意者。 可哀也已。閏六月二十一日。 辛巳。 未濟九二日卯辰。 南風徐徐而起。 俄而北風竝起。 南北方雲氣。 一時會翕于楓山之西。 我家之東。 雷電從中起。 大雨如注。 信奇觀也。 南北之風。 相對竝起。 四方之雲。 囊括一處。 合成沛然之澤。 神功鬼跡。 賁然可窺。 噫! 其中若無主張是者。 其號令聚散變化屈伸。 安能若是之神也? 旣然已。 爽風一聲。 雲捲雨收。 而斂無迹矣。 吁! 亦神矣。 仍默觀而記。 是日聞吏曹參判兪公棨之逝。 兪君剛直好學。 嘗以事謫錦山。 手結數椽草舍于峽中。 黍飯菜羹。 朝夕不給。 而不撤讀書怡如也。 放還調務安縣事。 以廉謹公儉稱。 去職拜諫官。 當仁祖進謚之日。 直諫觸犯雷霆之威而不撓。 因山後配富寧。 尤齋宋公。 遭遇孝廟。 䟽其非罪放還。 尋薦以王佐之才。 歷陟淸要。 今上嗣服。 久在玉堂。 爲副提學。 入東銓以參議。 拜參判。 未久而遞。 君之在務安。 以書抵余。 仍往來通簡數年。 而時余遭王母之喪。 罹葬祭之故。 未遂執贄相就之約。 而羆官而去。 故聞其名。 而求見其人。 今聞其訃。 令人悽然。十二月十四日。 辛未。 明夷六二。 少陽聞尤齋宋公於地主。 待之甚敬。 懷德倅淸州牧來謁。 必下庭送迎。 容辭極恭。 嘗曰: "城主受命君父。 來治我也。 慢城主。 卽慢君父也。" 夫人之侄。 治西原縣。【淸州降號時】來謁。 亦下庭送迎。 無異他人。 蓋甚非俗人之視妻侄如己族故也。二十日。丁丑。 賁六二。 少陽李啓玄。 京畿高陽常漢之子。 少時爲僧。 寓於故相國南以雄山齋。 南相惜其有才。 勸之讀書。 一覽輒誦。 博觀群書。 無不通焉。 南相勸之還俗。 以堪輿之術鳴於時。 公卿大夫之葬其親者。 爭延接焉。 丁酉年間。 自李典翰壽仁家北歸時。 余亦以祖考葬地不吉。 故邀占移樹之地。 不滿余志。 尙不用其地。 今年徐鳳翎。 欲移葬其親。 追蹤於京畿江原等地邀來。 看其爲人。 當冬盛寒。 衣單衣不寒。 或入洌泉浴焉。 行不騎馬。 日走數百里而不疲。 過人舊村先山。 已往吉凶。 言之若符契。 故卿士以下。 人皆惑焉。 以道人稱之。 以余見之。 所行多乖誤。 而近溺於鄕之一老娼。 心跡盡露。 無可取者。 但地術稍勝於庸士而已。 是以余亦一二邀占先山矣。 而亦不可輕信。 故尙不用其說矣。三十日。 丁亥。 旣濟上六。 少陽今日。 歲除日也。 歷計一年已然之事而論之。 春夏之交。 雨暘無甚愆忒者。 南中野邑若干地而已。 七八月之間。 上之人。 不詳考驗農家之得失。 而以豐年稱之。 至於霜降之後。 嘉糓過半不實。 而上之人。 亦不審察。 故野有凶歉之象。 而賦有豐年之徵。 民多苦怨。 至於山峽之郡。 水災備甚。 人民壓死於山崩。 五糓漂淪於激湍。 而况木綿災損。 山野同然。 而大同米作布之擧。 民心騷然。 體無完衣矣。 上天示警。 日月星辰。 震蕩相薄之變。 有目皆覩。 山川草木鳥獸之怪。 莫不畢見。 而人心之駭僻。 世道之汚澆。 有不足言者。 守令荒淫。 而耳若無聞。 朝廷備員。 而目若無見。 淸流之所尙。 黨論而已。 濁吏之所務。 財賂而已。 至於三百年宗社。 無一人顧護者。 此何時哉? 山野陋人。 地賤迹踈。 滿腹丹悃。 無日不激。 而亦無如之何矣。 聊書萬一于記陰晴小冊之末。 以敍五內之積氣焉。 雖然。 國家之事。 非吾之所獨憂。 而亦非吾之心力所可及矣。 若夫吾之一箇身心正不正治不治。 乃吾分內事也。 而回首一年之事。 百無可觀之實。 治心之道。 非不知也。 正身之學。 非不講也。 而心與事乖。 動與靜違。 三百六十。 無非浮泛底日子。 屈指吾年。 已至四十二矣。 送舊此夕。 不覺驚悟。 謹書于此。 以爲補過自訟之具焉。 제주배(齊州盃) 제주(齊州)를 다스리면서 청렴함으로 이름 높았던 조궤(趙軌)의 고사를 빌린 시어(詩語)이다. 《隋書 趙軌列傳》 유공 계(兪公棨) 1607~1664. 본관은 기계(杞溪), 자는 무중(武仲), 호는 시남(市南)이다. 김장생(金長生)의 문인으로 예학과 사학에 정통하였다. 송시열(宋時烈), 송준길(宋浚吉), 윤선거(尹宣擧), 이유태(李惟泰) 등과 더불어 충청도 유림의 오현(五賢)으로 일컬어졌다. 남이웅(南以雄) 1575~1648. 본관은 의령(宜寧), 자는 적만(敵萬), 호는 시북(市北)이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남한산성까지 왕을 호종했고 그 공으로 좌찬성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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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누락 題缺 땅이 비옥해 잎 길게 자라나고비 흠뻑 내려 싹이 돋아나네굳이 금단을 단련할 것 없으니도랑물 삼켜 흑발 남기네 土肥抽葉長雨足生芽茁不必鍊金丹呑渠留漆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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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운한 시를 부기하다 김현래 附次韻 金玄來 삽 메고 영험한 뿌리 베어광주리에 잘 자란 풀 담는다체에 걸러 비결대로 하니거울 속에 흰머리 없어졌네 帶鍤斲靈根領筐貯肥茁篩和依秘方鏡裏除華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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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찰 이붕수209)를 애도하다 哀李監察鵬壽 문에 들어서자 혼백이 아른아른하는데늙은 형을 남겨두고 어머니도 저버렸구나천년 뒤의 장순과 허원210)이니구중의 저승길 혹여 함께 가려나 入門魂魄想依依有老兄存母亦違千載張巡與許遠九重泉路倘同歸 이붕수(李鵬壽) 1548~1593). 본관은 공주(公州)이며 자는 중항(仲恒)이다. 그의 형인 李麒壽와 함께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활약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함경북도병마평사(咸鏡北道兵馬評事) 정문부(鄭文孚)를 대장으로 추대하고 별장(別將)이 되어 부령(富寧)을 수복하고 반역자 국경인(鞠景仁) 등을 처형하였다. 이듬해 패퇴하는 왜적을 추격하여 옥탑평(玉塔坪)에서 싸우다가 유탄(流彈)에 맞아 전사하였다. 장순과 허원 장순(張巡)과 허원(許遠)은 당나라 현종(玄宗) 때의 인물이다. 장순은 안록산의 난에 군사를 일으켜 적을 토벌하는 데 많은 공을 세웠다. 당시 수양 태수(睢陽太守)였던 허원은 수양성으로 온 장순에게 자신이 통솔하던 병사와 물자를 모두 넘겨주고 함께 수양성을 지켰다. 적에게 포위되어 물자가 부족한 상황에서 몇 달을 버티었으나 끝내 적에게 함락되어 함께 사절(死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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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주의 객관에 지달원211)과 머무르며 吉州客館 留池達源 관문에 정오되자 한낮의 닭이 우니꼬끼오 소리 한밤중 닭소리와는 사뭇 다르네진나라의 법이 주법보다 엄하였다면응당 관문 열고 맹상군 내보내지 않았으리212) 關門日午午鷄鳴咿喔殊非夜半聲秦法若嚴於酒法不應開出孟嘗行 지달원(池達源) 1566~1638. 함경북도 경성(鏡城) 사람으로 본관은 충주(忠州), 자는 사진(士進)이다. 임진왜란 때 정문부(鄭文孚)를 따라 활약했으며, 이때의 공으로 참봉에 제수되었다. 맹상군……않았으리 맹상군(孟嘗君)은 전국 시대 제나라 사람이다. 진(秦)나라에서 도망쳐 나올 때 함곡관(函谷關)에 도착하였으나 한밤중이어서 관문이 열리지 않았는데, 마침 식객(食客) 한 사람이 닭 울음소리를 잘 흉내 내어 성문을 열게 한 덕분에 무사히 탈출했다. 《史記 孟嘗君列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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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성에서 〈향사당에서 활 솜씨를 겨루다〉 시에 차운하다218) 5수 穩城射堂挑戰韻【五首】 강한 힘 지닌 그대는 함곡관 가진 듯하고승리 취한 나는 북산을 차지한 듯하네219)다만 날 저물면 한 번 겨루길 기다리니황금을 걸더라도 또한 어찌 아까우랴한 번 가서가 동관을 잃은 뒤로220)오랑캐 말을 오산에 세우도록 내버려 두었네어여뻐라, 서북쪽 중흥의 땅은하늘이 우리 동방 성군을 위해 아껴둔 곳이로다앞에 늘어선 용사 장비와 관우 같으니한량 없는 술과 안주 산해진미로다붉은 색 보고 푸르다 하는 지경221)에 이르렀으니구기자와 국화로 가난을 읊지 말라222)옥문관에 들어오지 못한 반초 같은 신세요223)산에서 제사 지낸 곽거병 같은 공 없네224)남아로 나라에 충성 바치는 것 평소 뜻이니일편단심 아끼지 않고 바치리한양의 형승 변경보다 나으니억 길 높은 성에 만길 산이로다그 당시 조정에서 좋은 계책 없었으니경예225)에게 빌려주고 조금도 아끼지 않았네 負強君似擁函關取勝吾如據北山直待晩來爭一戰黃金爲注亦何慳一自哥舒失潼關從敎虜馬立吳山可憐西北重興地天爲吾東聖主慳猛士羅前張與關酒肴無量海兼山到得看朱成碧處休將杞菊賦寒慳身似班超未入關功微去病可封山男兒報國平生志輸了一丹心不慳漢都形勝勝秦關億丈高城萬仞山當時廊廟無長策借與鯨鯢不少慳 온성……차운하다 국립도서관에 소장된 《농포집》 후쇄본에는 제목이 〈덕재의 '향사당에서 활솜씨를 겨루다' 시에 차운하다[次德哉射堂挑戰韻]〉로 되어 있고, 5수 중 제1수와 제2수만 실려 있다. 북산을 차지한 듯하네 조나라 장수 조사(趙奢)가 진(秦)나라 대치하고 있을 때, 군사(軍士) 허력(許歷)이 조사에게 "먼저 북산(北山)에 올라가서 점거하는 자는 이기고 뒤에 오는 자는 패할 것입니다."라고 말하자, 조사가 그 말을 따라 먼저 북산을 차지하여 대승을 거두었다. 《史記 廉頗藺相如列傳》 한……뒤로 가서는 돌궐 출신의 장군 가서한(哥舒翰, ?~757)이고, 동관(潼關)은 당나라 수도인 장안(長安) 가까이에 있는 지역이다. 안녹산(安祿山)이 일어났을 때 병마부원수 가서한이 동관을 지키고 있다가 안녹산의 군대에게 대패하여, 적에게 항복하고 적중에서 죽었다. 붉은……지경 안화(眼花)로 인해 색을 구별하지 못하는 것을 형용하는 말인데, 여기서는 술에 취해 눈이 어른거리는 것을 의미하는 듯하다. 구기자와……말라 구기자와 국화는 은자의 소박한 음식을 일컫는 말로, 송사나 소식(蘇軾)이 당나라 육귀몽(陸龜蒙)의 〈기국부(杞菊賦)〉를 모방하여 〈후기국부(後杞菊賦)〉를 지었다. 옥문관에……신세요 정문부가 외직에 있다는 말이다. 반초(班超)는 후한의 장군이고, 옥문관(玉門關)은 서역(西域)으로 통하는 중요한 관문인데, 반초가 서역을 평정하여 공을 세운 뒤 정원후에 봉해져 19년 동안 서역에 있었는데, 훗날 고향 생각이 나서 황제에게 글을 올려"신은 주천군(酒泉郡)에 이르기를 원하지 않고 다만 살아서 옥문관에 들어가기를 원합니다."라고 하였다. 《後漢書 班超列傳》 산에서……없네 변경을 지키는 관리로서 큰 공을 세우지 못했다는 의미이다. 곽거병(霍去病)은 한 무제(漢武帝) 때의 명장으로, 수십만 명의 대군을 거느리고 대군(代郡)으로 나가 흉노를 크게 물리치는 공을 세운 뒤 낭거서산에 올라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돌아왔다. 《한서》 〈곽거병전(霍去病傳)〉에 "낭거서산에 돌라 하늘에 제사지내고, 고연산에서 봉선(封禪)을 했다.[封狼居胥山, 禪於姑衍.]"라고 하였다. 경예 경(鯨)과 예(鯢)는 둘 다 작은 물고기를 잡아먹는 고래인데, 악인의 괴수나 약소국을 병탄하려는 무도한 나라에 비유된다. 여기서는 임진왜란을 일으킨 일본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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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기. 요동성에서 감회가 일어 追記 遼城有感 한 조각 외로운 성에 석양이 비추니지금 남겨진 성첩에 나는 까마귀만 보이네만약 선학을 다시 찾아오게 한다면사람이 변했을 뿐 아니라 성도 또한 변했네263)-성첩(城堞)이 무너졌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이다.- 一片孤城當落暉只今殘堞見烏飛若令仙鶴重來訪不獨人非城亦非 선학이……변했네 정령위의 고사를 끌어와 쓴 것이다. 한나라 때 요동(遼東) 사람인 정 영위(丁令威)가 도를 닦아 신선이 되어 떠난 지 천년 만에 학으로 변하여 돌아와 화표주(華表柱)에 앉아 시를 지었는데, 그 시에 "성곽은 의구한데 사람은 모두 옛사람 아니구나, 어찌 신선술 안 배우고 무덤만 이리도 즐비한고.[城郭如故人民非, 何不學仙冢纍纍.]"라고 라고 하였다. 《搜神後記 卷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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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장관의 시에 차운하다 이때 연산관(連山關)의 경보를 들었다. 次書狀韻 時聞連山警報。 밤에 느릅나무 잎 우수수 떨어지는 소리 들렸으니새벽에 일어나 칼집 속 칼을 새로 가네연산의 가을풀 난 길 잘 아니오랑캐 이제 막 활 당기고 말도 이제 날뛰는구나 夜聞楡葉墜蕭蕭曉起新磨匣裏刀慣識連山秋草路虜弦初勁馬初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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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주하 八洲河 가을 강은 맑고 얕으니 참으로 좋아할 만한데게다가 그물에 걸린 은빛 물고기도 신선하네문득 생각건대, 한강의 낚시질하는 벗들몇 사람이나 달밤에 배에 올랐을거나 秋河淸淺正堪憐更有銀鱗入網鮮却憶漢濱釣魚侶幾人乘月上江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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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상촌 흠 의 원운296)을 부기하다 附申象村 欽 元韻 세상사 분분하여 몹시 쉬지 못했는데중양절에 입직하니 더욱 시름겨워라사람에게 풍계동을 다시 생각나게 하니단풍잎 국화로 가을빛 가득할테지 世事紛紛苦未休重陽滯直更堪愁令人却憶楓溪洞赤葉黃花滿意秋 상촌 신흠의 원운 《상촌고(象村稿)》 권19에 〈중양절에 입직하면서 김상헌에게 부치다[重陽滯直寄仙源]〉라는 제목으로 수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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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산 승려의 시축에 차운하다 2수 次金剛僧軸韻【二首】 꿈속에서 금강산 몇 번째 봉우리 갔는가깨고 보니 진경이 별안간 허상이 되었네세상에 그 무엇이 실체가 있다 하랴묘하게 깨닫는 것은 오직 선가와 취옹이라흰 구름 일 많아 기이한 봉우리 만드니본디 비어있는 선심에는 미치지 못하네구하는 바 없다면서 시구 다급히 구하니나는 농포이지 어찌 시 짓는 늙은이랴 夢到金剛第幾峰覺來眞境忽成空世間何物能爲有妙悟惟禪又醉翁白雲多事作奇峰不及禪心本自空可是無求求句急我爲農圃豈詩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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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려 시축에 짓다 題僧軸 우리의 유도(儒道)는 참으로 큰 길과 같으니또한 황로학이 무엇이며 신선이 무엇인가세간에 작은 길 많은 것 안타까우니다시 산림에서 그릇되게 선학을 배우는구나 吾道眞如大路然亦何黃老亦何仙世間若恨多磎逕更向山林枉學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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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서로 사람을 보내며 送人關西 관서까지 천 리 먼 길 아득하니시든 풀 쓸쓸한 구름 시야 가득 가을이라그대 이별한 뒤에 자주 돌아볼 줄 알겠으니밝은 달밤에 홀로 어느 누각에 오르려나 關西千里路悠悠衰草寒雲滿目秋知君別後頻回首明月獨登何處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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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 응제 迎祥應製 새벽 대궐에 자욱하게 아침 이내 깔려 있는데인풍이 화창하여 옷깃에 퍼지네태평성대 문명의 교화 알고자 하면태사의 신년 점괘에 규성에 모일 조짐362) 있다네 曉闕葱葱曉靄迷仁風條暢播襟黎欲知昭代文明化太史新年占聚奎 규성에 모일 조짐 북송(北宋) 5년에 금(金), 목(木), 수(水), 화(火), 토(土)의 오성이 규성(奎星)에 모이는[五星聚奎] 길조가 있었다. 오성이 문창성(文昌星)인 규성(奎星)에 모이면 문운(文運)이 크게 번창한다고 한다. 《宋史 卷1 太祖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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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의 〈원일의 아침 조회〉 시에 차운하다 次稼亭元日早朝韻 임금께서 구중궁궐에 팔짱 끼고 계시니38)백관이 함께 칼과 패옥 차고 조회에 나왔네화려한 의장 그림자 섬돌 위아래로 옮겨가고상서로운 구름 빛이 전각 동서에 반짝이네봄은 버들빛이 맑은 경치에 알맞도록 재촉하고향기는 매화 흔들어 어둑한 바람 속에 풍겨오누나참으로 궁전에 즐거운 일 많으니임금께서 하늘과 나란히 만수무강 하시리 玉旒深拱九重宮列辟趨朝釰佩同綵仗影移階上下祥雲光閃殿西東春催柳色宜晴景香動梅花裊暗風正是金宮多樂事齊天聖壽保無窮 구중궁궐……계시니 성군(聖君)이 무위지치(無爲之治)를 펴는 것을 의미한다. 《서경》 〈무성(武成)〉에 "의상을 드리우고 팔짱을 끼고 있으면서도 천하가 잘 다스려졌다.[垂拱而天下治.]"라고 하였으며, 《주역》 〈계사전 하(繫辭傳下)〉에도 "황제와 요순은 의상을 드리우고 있으매 천하가 다스려졌으니, 건괘, 곤괘에서 취하였다.[黃帝、堯、舜垂衣裳而天下治, 蓋取諸乾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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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곡역의 제영시에 차운하다 次磨谷驛題咏韻 관산을 두루 다님에 만사가 뜬구름과 같으니천리의 풍광이 상세한 논의에 들어오네꽃은 눈물 흔적을 띠고 촉백을 슬퍼하고134)풀은 이별의 한 더해져 왕손을 원망하네135)하늘 높이 솟은 고목 벼랑길 따라 있고강 저편 외로운 연기는 강기슭 곁 마을이라고향을 돌아보아도 돌아가지 못하니남쪽으로 가는 건 오직 꿈속의 넋뿐이로구나 關山踏盡萬事雲千里風烟入細論花帶啼痕傷蜀魄草添離恨怨王孫參天古木緣崖路隔水孤烟傍岸村回望故園歸不得南飛惟有五更魂 꽃은……슬퍼하고 두견화 고사를 차용하여 고향으로 돌아가고픈 마음을 표현한 것이다. 촉백(蜀魄)은 두견새의 별칭으로, 촉나라 망제(望帝)가 죽어서 두견새가 되었는데 항상 한밤중에 피를 토하면서 불여귀(不如歸)라고 하는 듯한 소리를 내며 몹시 슬피 울었다고 한다. 그리고 두견새가 토한 피가 묻어 붉게 된 꽃을 두견화라고 한다. 《華陽國志 卷3 蜀志》 풀은……원망하네 고향 떠난 사람의 수심을 불러일으키는 정경을 형용한 것이다. 〈초은사(招隱士)〉에 "왕손이 떠나가 돌아오지 않으니, 봄풀은 자라서 무성하도다.[王孫遊兮不歸, 春草生兮萋萋.]"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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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해관 山海關 뛰어난 지형 예로부터 가장 명성 독차지했으니요동과 연경의 옛 경계 여기서 서로 부딪쳤지하늘은 삼천 리 발해에 닿아 있고땅은 일만 겹 음산에 접해 있네태평성대엔 진시황처럼 원망 쌓을 것 없고204)뛰어난 공업은 도리어 한 무제 등봉을 비루하게 여기네205)관문 방비할 자 지금 누구일꼬듣건대 수만 군대가 소범의 흉중에 있었다지206) 形勝從來最擅雄遼燕舊界此交衝天連渤海三千里地接陰山一萬重聖代不勞秦築怨豐功還陋漢登封關門鎖鑰今誰是見說兵藏小范胸 태평성대엔……없고 진 시황(秦始皇)처럼 굳이 만리장성을 쌓을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진 시황이 만리장성을 쌓느라 백성들을 고된 부역에 동원하자 이를 원망하는 사람이 많았다. 뛰어난……여기네 등봉(登封)은 황제가 산에 올라가 봉선하는 것을 가리키는 말로, 한 무제(漢武帝)가 봉선(封禪) 많이 행한 것을 비루하게 여긴다는 뜻이다. 한 무제는 거액의 비용을 들여 태산(泰山)에서 봉선 의식을 거행하였으며, 그밖에도 사방 여러 곳에서 봉선 의식을 거행했다. 《漢書 卷6 武帝紀》 수만……있었다지 소범(小范)은 송나라 인종(仁宗) 때의 명신 범중엄(范仲淹)을 일컫는다. 범중엄이 지연주(知延州)에 제수되어 서하(西夏)를 방비할 계책을 갖추자, 서하 사람들이 "연주에 뜻을 두지 말라. 지금 소범노자(小范老子)의 가슴속에는 수만의 군대가 있으니[胸中自有數萬甲兵], 대범노자(大范老子) 범옹(范雍)처럼 속일 수 있는 상대가 아니다."라고 말하며 경계했다고 한다. 《宋史 范仲淹列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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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해루. 서장관의 시에 차운하다 觀海樓 次書狀韻 만리장성 앞 백 척 높이 누대객이 올라 바라보니 아득하여 시름을 더하는구나요동과 연경이 할거하니 산하는 그대로 있고진나라 한나라가 경영했으니 세월 아득하여라넓은 바다 저 먼 끝에 오직 태양 떠오르고푸른 하늘 나직한 곳에 더이상 모래섬 없네취기 올라 갑자기 일어서니 추사에 슬퍼지고서풍에 고개 돌리니 흘러가는 강 보이네 萬里城頭百尺樓客來登眺逈添愁遼燕割據山河在秦漢經營歲月悠滄海窮邊惟日出碧天低處更無洲酒酣忽起悲秋思回首西風見水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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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덕원에 대한 만사 林德源輓 당당하고 장대한 평생의 뜻구구한 책상물림이 아니어라고기 먹을 호랑이 머리270)인줄 일찍이 알았는데원숭이 팔뚝으로 제후에 봉해지지 못할 줄271) 뉘 알았으리늙어 외려 죽기 각오하니272) 장군은 건장하였고청렴함은 현어273)에 비교되니 태수는 뛰어났어라남긴 한은 방촌의 인끈 버리지 못한 것이니꿈속에서 금산으로 몇 번이나 돌아갔던가 昂昂落落平生志不是區區翰墨流早識虎頭當食肉誰知猿臂未封侯老猶裹革將軍健淸比懸魚太守優遺恨未抛方寸印幾回歸夢錦山秋 고기……머리 후한(後漢) 반초(班超)가 집이 가난해서 관청의 문서를 베껴 쓰며 모친을 봉양하던 중에, "그대는 제비의 턱에 범의 머리라서 날아다니며 고기를 먹는 상이니, 이는 곧 만리후가 될 상이다.[燕頷虎頭 飛而食肉 此萬里侯相也]"라는 관상가의 말을 듣고 분발한 결과, 서역(西域)에 나아가 큰 공을 세워 정원후(定遠侯)에 봉해진 고사가 있다. 《後漢書 卷47 班超列傳》 원숭이……줄 원비는 원숭이 처럼 팔이 길어서 무릎 아래로 내려온다는 뜻으로, 활을 잘 쏘는 위엄 있는 무부(武夫)를 지칭할 때 흔히 쓰는 표현이다. 한 문제(漢文帝) 때 이광(李廣)은 '원비장군(猿臂將軍)'으로 불렸는데 북평 태수(北平太守) 등 여러 변방의 태수를 지냈고, 특히 대장군(大將軍)으로서 흉노(匈奴)와 70여 차례의 전쟁을 하여 매우 큰 공훈을 세웠다. 그러나 그의 부하 장수들 모두가 제후로 봉해졌는데도 정작 그만은 끝내 높은 관작에 봉해지지 못했으므로, 운명의 탓으로 돌리며 탄식을 금하지 못했다는 '이광미봉(李廣未封)'의 고사가 전한다. 《史記 卷109 李將軍列傳》 죽기 각오하니 원문의 '과혁(裹革)'은 가죽에 싼다는 뜻으로, 전장에서 나라를 위해 장렬하게 싸우다가 전사한 뒤 말가죽에 싸여 돌아오는 것을 말한다. 후한(後漢)의 복파장군(伏波將軍) 마원(馬援)이 "사나이라면 마땅히 전쟁터에서 죽어 말가죽에 시체를 싸서 돌아와 묻혀야 하니, 어찌 아녀자의 손에 죽을소냐.[男兒當以馬革裹尸還葬, 安可死於兒女手乎?]"라고 한 데에서 유래하였다. 《後漢書 卷24 馬援列傳》 현어 생선을 걸어 놓는다는 뜻으로, 관리의 청렴결백을 비유하는 말이다. 후한(後漢)의 양속(羊續)이 남양 태수(南陽太守)로 있을 적에 요속(僚屬)이 생선을 바치자, 이 생선을 뜰에 걸어 놓아 다시는 바치지 말라는 뜻을 보인 고사에서 유래한 것이다. 《後漢書 卷31 羊續列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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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척에 대한 애사 申滌哀詞 천상에 누대가 완성되자 적선이 돌아가니279)시혼은 지금 옥황상제의 앞에 있어라양주의 학280)이 떠나자 구름은 부질없이 서늘하고오동나무 난새 외로워지자281) 달은 홀로 둥글구나안개 속에서 몇 해나 범의 가죽을 윤택하게 하였는가282)갑 속 세 척의 용천검은 울어대누나283)영여에 멍에를 매던 날 내 장차 보내려니젊어서 종유했던 이들 가련하게 여기는 세상을 부끄럽게 여기네 天上樓成返謫仙詩魂今在玉皇前楊州鶴去雲空冷梧樹鸞孤月獨圓霧裏幾年鞱豹炳匣中三尺吼龍泉靈輿駕日吾將送少小從遊辱世憐 천상의……돌아가니 진(晉)나라 때 소소(蘇韶)가 죽은 뒤에 넋이 돌아와 그의 아우에게 "저승에 갔더니 공자의 제자 안회와 복상(卜商)이 지금 지하 세계의 조정에서 수문랑을 맡고 있더라."한 고사와 당(唐)나라 이하(李賀)가 27세로 병들어 죽으려 하는데 갑자기 하늘에서 붉은 옷을 입은 사람이 붉은 용을 타고 내려와 "옥황상제가 지금 그대를 불러와 새로 지은 백옥루(白玉樓)의 기문을 짓게 하라 하였소." 하고서 천상으로 데리고 갔다는 고사를 인용한 것이다. 흔히 문인 재사(才士)가 일찍 죽은 것에 대한 아쉬움을 달래는 뜻으로 쓰인다. 《太平廣記 卷319 鬼四 蘇韶》 《李義山文集箋註 卷10 李賀小傳》 양주의 학 인간이 바라는 여러 가지 것을 신척이 다 지닌 것을 말한다. 예전에 사람들이 모여서 각자 소원을 말하였는데, 한 사람은 많은 돈을 갖는 것이 소원이라 하였고, 한 사람은 학(鶴)을 타고 하늘에 오르는 것이 소원이라 하였고, 한 사람은 경치 좋은 양주의 자사(楊州刺史)가 되는 것이 소원이라 하자, 이를 듣고 있던 한 사람이 많은 돈을 허리에 차고서 학을 타고 양주 고을의 하늘을 날아오르는 것이 소원이라 했던 데서 나온 말이다. 《淵鑑類函 鳥部三 鶴》 오동나무 난새 외로워지자 신척을 사별한 뒤 부인이 홀로 슬퍼하며 지냈다는 말이다. 옛날에 계빈왕(罽賓王)이 난새 한 마리를 잡았는데, 난새가 우는 소리를 매우 듣고 싶었으나 울게 할 방도가 없었다. 금으로 된 울타리를 쳐주고 진귀한 먹이를 주어도 시름시름 앓기만 하고 삼 년 동안을 울지를 않았다. 그러자 계빈왕의 부인이 말하기를 "새는 자기 무리를 본 뒤에 운다고 들었는데, 어찌하여 거울을 걸어서 비치게 하지 않습니까?"라고 하였다. 이에 왕이 그 말에 따라 거울을 걸어 주었더니, 난새가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을 보고는 하늘에 사무치도록 슬피 울다가 숨이 끊어졌다는 고사가 전한다. 후에 이를 '난경(鸞鏡)' 또는 '고란조경(孤鸞照鏡)'이라 하여 금슬 좋던 부부가 배우자를 사별(死別)한 뒤 쓸쓸하게 지내는 것을 비유하게 되었는데, 여기에서 온 말이다. 《太平御覽 卷916 鸞鳥詩序》 안개……하였는가 한나라 유향(劉向)의 《열녀전(列女傳)》 〈도답자처(陶答子妻)〉에 도답자가 도(陶) 지역을 다스린 지 3년이 되었는데, 명성은 들리지 않고 집안의 재산만 세 배로 늘었다. 그의 아내가 간하기를 "남산에 검은 표범이 사는데, 안개가 끼거나 비가 내리면 칠일 동안 먹이를 먹으러 내려오지 않으니, 그것은 그 털을 윤택하게 하여 표범의 무늬를 만들기 위함입니다. 개와 돼지는 음식을 고르지 않고 먹어서 그 몸을 살찌우지만 앉아서 죽음을 기다릴 뿐입니다."라고 하였다. 갑……울어대었네 용천검이 주인을 잃고 우는 것으로 신척의 죽음을 비유하였다. 진(晉)나라 때 장화(張華)가 일찍이 두성(斗星)과 우성(牛星) 사이에 자기(紫氣)가 감도는 것을 보고 예장(豫章)의 점성가(占星家) 뇌환(雷煥)에게 물으니, 보검의 빛이라 하였다. 이에 풍성(豐城)의 감옥 터에서 춘추 시대에 만들어진 전설적인 보검인 용천검(龍泉劍)과 태아검(太阿劍)을 발굴했다고 한다. 《古文眞寶 後集 卷2 滕王閣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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