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진년(1664) 甲辰 1월 5일 무진(戊辰). 무망괘(无妄卦) 구오(九五) 소음(少陰)유생 홍일뢰(洪一耒)가 말하기를 "지난해 12월 24일에 중수하고 봉안하는 일을 의논하기 위한 황산 서원(黃山書院)의 모임에 저도 가서 참여했습니다."라고 하였다. 서원에서는 이전에 이 문원(李文元 이언적(李彦迪)), 이 문성(李文成 이이(李珥)), 성 문간(成文 성혼(成渾)) 세 분 선생을 배향하였다. 이번에 우암(尤菴) 송시열(宋時烈)이 중수하는 일을 주관하여 이문순(李文純 이황(李滉))과 조문정(趙文正 조광조(趙光祖)) 두 분 선생을 주향(主享)으로 하였다. 함께 모인 양호(兩湖) 지방의 인사가 200여 인인데 송 판서[송시열]가 수헌(首獻)하고 참의 이유태(李惟泰)가 부헌(副獻)하고 공주 목사(公州牧使) 정영한(鄭英漢)이 종헌(終獻)하였다. 송시열, 이유태 두 공은 심의(深衣)에 복건(幅巾)을 쓰고 제례를 거행하고 정군(鄭君)은 시복(時服) 차림으로 일을 거행하였다고 한다.1월 21일 갑신(甲申) 기제괘(旣濟卦) 구삼(九三) 소양(少陽)새벽에 일어나 제례를 행하였다. 이 지방은 선군자(先君子)께서 나고 자란 마을이라서 어버이의 넓고 큰 은혜가 평소보다 만 배나 크게 느껴진다. 이날 선조의 산소를 하나하나 배알하였고 벽송당(碧松堂)에서 형제와 조카들이 모여 하루를 묵었다.1월 27일 경인(庚寅) 가인괘(家人卦) 구삼(九三) 소양(少陽)서울의 사인(士人) 이로(李潞)가 나를 만나러 왔다. 전 이조 판서 조경(趙絅)의 외손자인데 말솜씨가 온당하여 예전에 송시열(宋時烈), 송준길(宋浚吉), 윤휴(尹鑴), 윤선도(尹善道), 허목(許穆)이 예를 논한 시말을 얘기할 수 있었다. 그의 외조부 역시 한마디 말을 한 뒤에 당시 사람들에게 배척을 받았는데 때마침 포천(抱川)의 촌사(村舍)로 물러나 지내고 있다고 하였다.또 말하기를, "숙부인 이군 성징(李君聖徵)이 현재 동래(東萊)의 이군 성징 임소(任所)에 있는데, 전해 겨울 진봉(進封)하는 행렬을 영솔해 온 왜인(倭人)을 접대할 때 주량을 다투느라 도리를 어기고 교만하였다. 이군이 시종일관 굽히지 않자 왜인이 검을 뽑아 난동을 부려 부산 첨사(釜山僉使)와 부사(府使)의 군관(軍官) 이하는 모두 달아나 숨고 하리(下吏) 1인만 죽음을 무릅쓰고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그리고 일이 진정되자 달려가 보고하였고, 첨사는 잡혀가 곧장 옥에 갇혔다."고 하였다.2월 2일 갑자(甲子) 손괘(損卦) 상구(上九) 소양(少陽)읍리(邑吏)가 다음 날 수령인 채후(蔡侯) 충립(忠立)의 여츤(旅櫬 객사한 사람의 널)이 내일 발인을 하여 돌아온다고 고하였다. 가서 만났더니 상주가 만사(挽詞)를 부탁하기에 그를 위해 율시 한 편을 지었다. 대체로 채후는 꾸밈이 없고 관대하고 검소하였지만 정사(政事)에는 재주가 없었다. 그래서 백성들이 그가 사납지 않은 것은 좋아했지만 융통성이 없는 것을 단점으로 꼽았다. 상(喪)을 치를 때 고을 사람인 윤선갑(尹先甲), 홍종화(洪鍾華)가 치상(治喪)을 주관했는데, 베로 만든 이불과 짧은 바지 외에는 관아에 보관된 옷이 없어 염관(斂棺)할 방도가 없었다. 향인(鄕人)들이 함께 부의(賻儀)를 보내 주어 이불과 바지를 사서 염하였다고 하였다. 그래서 내가 만사를 지었는데, 3, 4구는 "정사에 부드러운 채찍을 사용하여 은혜를 우러러보았으며, 관을 채울 옷이 없으니 비로소 청렴했음을 알겠구나.[政用鞭皮方仰惠 衣無充棺始知淸]"이고, 7·8구는 "제주배(齊州盃)87)의 물을 술잔에 붓고, 거듭거듭 만가(挽歌)를 부르며 떠나는 공을 전송하네.[酌彼齊州盃上水 紼謳三唱送公行]"이다. 대체로 사실을 기록한 것이다.2월 15일 정축(丁丑) 귀매괘(歸妹卦) 초구(初九) 대양(大陽)율지곡(栗枝谷)에서 외조부와 외조모의 묘소에 제사를 지냈다. 대체로 내 외조부께서 만년에는 번잡한 성시(城市)에 염증을 느껴 일년 내내 도촌면(道村面)의 농사(農舍)에 머무셨다. 대를 이을 자손이 없으며 숭정(崇禎) 연간 신미년(1631, 인조9년)에 돌아가셨다. 나는 어린 나이라서 고향에 반장(返葬)하지 못하고 이곳에 임시로 장사하였다. 나 또한 형제나 아들, 조카가 없어 봄가을로 성묘하되, 어버이의 산소가 멀리 있었기 때문에 절일(節日)에 제사를 치르지 못하고 흔히 하듯이 날짜를 가려 거행하였다. 나는 여덟 살에 처음으로 외조부에게 《천자문(千字文)》과 당송 시문(唐宋詩文)을 배웠다. 그해 12월에 돌아가셨지만 아직도 곧고 굳은 뜻과 고고한 자태를 우러러보고 있다. 오늘 향을 사르자니 처연한 감회가 마음에 가득하지만 또한 사람들이 내 마음을 알 수 없으니 서글프기만 할 뿐이다.윤6월 21일 신사(辛巳) 미제괘(未濟卦) 구이(九二)묘시(卯時)와 진시(辰時)에 햇무리가 졌다. 남풍이 천천히 불어오고 조금 지나서 북풍도 함께 일기 시작하였다. 남쪽과 북쪽 방향에서 구름이 일시에 풍산(楓山)의 서쪽으로 모였다. 내 집 동쪽에서 우레와 번개가 치더니 큰비가 쏟아 붓듯 하였는데 참으로 기이한 볼거리였다. 남쪽과 북쪽에서 바람이 마주하고 함께 불어와 사방의 구름이 한곳으로 모여들어 거센 빗줄기를 이루었다. 신의 공능(功能)과 귀신의 자취를 찬란하게 엿볼 수 있었다. 아, 그중에는 이 일을 주장하는 자가 없는 듯하건만, 호령하여 모였다 흩어졌다 하며 변화무쌍한 굴신(屈伸)이 어찌 이처럼 신묘할 수 있겠는가. 그러고 난 뒤 시원한 바람 소리가 들리더니 구름이 걷히고 비가 그치는데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아, 역시 신묘하였다. 그대로 묵묵히 바라보다가 적어 둔다.이날 이조 참판 유공 계(兪公棨)88)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유군(兪君)은 강직하고 학문을 좋아하였다. 일찍이 일 때문에 금산(錦山)으로 귀양을 가 골짜기에 직접 서까래 몇 개로 된 초가집을 지었고 기장밥과 나물국조차 아침저녁으로 잇지 못하였지만 독서를 멈추지 않고 편안하였다. 해배(解配)되어 돌아와서는 무안 현감(務安縣監)에 제수되었는데 청렴하고 근실하며 공정하고 검소함으로 칭송을 받았다. 현의 직임을 떠나서는 간관(諫官)에 제수되었다. 인조(仁祖)의 시호(諡號)를 올리는 날에는 직언하여 성상의 위엄을 범하면서도 뜻을 굽히지 않았다. 인산(因山) 뒤에 부령(富寧)으로 유배 되었다. 우재(尤齋) 송공(宋公 송시열(宋時烈))이 효묘(孝廟)를 뵙고 그의 죄가 아니니 풀어 주어 돌아오게 하도록 상소하였다. 곧이어 왕을 보필할 인재로 천거되어 차례차례 청요직(淸要職)에 올랐다. 금상이 왕위를 계승하자 오래도록 옥당(玉堂)에 있다가 부제학이 되었다. 참의로 이조에 들어가 참판에 제수되었으나 오래지 않아 체차되었다.유군(兪君)이 무안에 있을 때 내게 편지를 보낸 뒤 줄곧 왕래하면서 편지를 주고받은 것이 여러 해였다. 당시 내가 조모의 상을 당하여 장례와 제사 일에 얽매어있어서 찾아뵙고 만나기로 한 약속을 끝내 이루지 못하고 공은 관직을 그만두고 떠났다. 그래서 이름을 듣고 그 사람을 보기를 원하였는데 지금 그의 부고를 들으니 나를 처연하게 하였다.12월 14일 신미(辛未) 명이괘(明夷卦) 육이(六二) 소양(少陽)우재(尤齋) 송공(宋公 송시열(宋時烈))이 지방관을 매우 공경스럽게 대하여, 회덕 수령(懷德守令)과 청주 목사(淸州牧使)가 찾아오면 반드시 뜨락에 내려와 맞이하고 전송하며 용모와 말투가 매우 공손하였다고 들었다. 일찍이 말하기를, "성주(城主)가 군부(君父)에게 명을 받아 나를 다스리기 위해 왔으니, 성주에게 거만한 것은 곧 군부에게 거만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부인(夫人)의 조카가 서원현(西原縣)【청주(淸州)의 명호(名號)가 강등되었을 때이다.】을 다스릴 때 그가 찾아오자 역시 뜨락으로 내려와 맞이하고 전송하여 다른 사람을 대하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이는 대체로 속인이 아내의 조카를 자기 친족처럼 대하는 것과는 매우 달랐기 때문이다.12월 20일 정축(丁丑) 비괘(賁卦) 육이(六二) 소양(少陽)이계현(李啓玄)은 경기 고양(高陽)에 사는 상놈의 아들이다. 젊은 시절 승려가 되었고, 고(故) 상국(相國) 남이웅(南以雄)89)의 산재(山齋)에 우거하였다. 남 상국은 그가 지닌 재주를 아까워하여 독서를 권하였다. 한 번만 읽으면 바로 암기하였으며 많은 책을 널리 읽고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없자 남 상국이 그에게 환속(還俗)을 권하였다. 풍수학으로 시속(時俗)에 이름이 나자 어버이의 장례를 치르는 공경대부들이 앞 다투어 그를 맞이하였다. 정유년(1597, 선조30)에 전한(典翰) 이수인(李壽仁)의 집에서 북으로 돌아올 때 나도 조부의 장지가 길하지 않았기 때문에 옮겨 묻을 자리를 골라 달라고 하였지만 내 뜻에 만족스럽지 않아서 아직 그 자리를 사용하지 않았다.올해 서봉령(徐鳳翎)이 자기 부모를 이장하려고 경기, 강원 지역 등을 뒤져서 그를 맞이하여 왔다. 그의 사람됨을 보았더니 추위가 극성을 부리는 겨울인데도 홑옷만 입고도 추위를 느끼지 않았다. 차가운 샘물에 들어가 목욕을 하기도 하고, 길을 갈 때는 말을 타지도 않고 하루에 수백 리를 달리고도 피곤을 느끼지 않았다. 사람이 살던 옛 마을이나 선산(先山)을 찾아가 지난 길흉을 말하면 마치 부절을 맞춘 듯이 정확하였다. 그래서 경사(卿士) 이하 사람들이 모두 그에게 미혹되어 도인(道人)이라 일컬었다. 내가 보기에는 잘못을 저지르는 경우가 많고 시골의 늙은 창기(娼妓)에게 빠져서 생각이나 행적이 모두 드러나 취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다만 풍수에 관한 술법이 평범한 지관(地官)들보다 조금 나을 뿐이었다. 이 때문에 나도 한두 번 그를 불러 선산(先山)을 점쳐 보았지만 역시 가볍게 믿을 수 없었다. 그래서 여전히 그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12월 30일 정해(丁亥) 기제괘(旣濟卦) 상육(上六) 소양(少陽)오늘은 섣달 그믐날이다. 일년 동안 있었던 일을 하나하나 헤아려 논해 보니, 봄과 여름이 교차할 때 비가 내리고 해가 뜨는 날이 심하게 어긋나지 않은 것이 남쪽 지방의 들판에 있는 약간의 고을뿐이었다. 7, 8월 간에는 윗사람들이 농가의 득실을 자세히 조사하지 않고 풍년이라고 일컬었다. 서리가 내린 뒤 벼가 태반은 여물지 않았건만 윗사람들이 또 자세히 살피지 않았다. 그래서 들판에는 흉년의 조짐이 있지만 부세는 풍년이 든 해처럼 징수하여 백성들의 고통과 원망이 많았다. 골짜기에 있는 군(郡)에서는 수재(水災)가 모두 심해서 백성들은 산이 무너져 압사당하고 오곡은 거센 계곡물에 떠내려가기까지 하였다. 더구나 목면(木綿)이 재해를 입어 손상된 것은 산이나 들판이나 똑같건만 대동미(大同米)를 포(布)로 환산하여 거두어들였으니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민심이 소란스럽고 몸에 제대로 된 옷을 걸치지 못하였다.상천(上天)이 경계를 보여 일월성신이 동요되고 서로 부딪치는 변화를 눈이 있는 자라면 모두가 보았으며, 산천초목과 짐승이 벌이는 괴이한 증상이 모두 드러났다. 인심이 놀랍도록 잘못되고 세도가 추잡하고 야박하기가 얘기할 가치도 없었다. 수령은 일락(逸樂)에 빠져 귀에 들리는 게 없는 듯하고 조정은 인원만 갖추었고 눈에 보이는 게 없는 듯하였다. 덕행을 갖춘 사대부들은 당론(黨論)만 숭상할 뿐이고, 혼탁한 관리들은 뇌물에만 힘쓸 뿐이어서 300년 종사(宗社)를 비호할 사람이 하나도 없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이것이 무슨 시대인가.민간의 비루한 사람인 데다 문지(門地)도 미천하고 자취도 소원하니 뜨거운 심정이 뱃속에 가득하여 분격하지 않은 날이 없지만 또한 어찌하지 못하였다. 오로지 날씨의 맑고 흐림을 적어 두는 조그만 책자 끝에다 오직 심정의 만 분의 일만 적으면서 마음에 쌓인 기분을 펼쳐 놓는다. 그렇다 하더라도 나라의 일은 나만 홀로 근심할 바도 아니고 또한 내 심력(心力)으로 미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나의 심신이 올바른지 그렇지 않은지, 수양이 됐는지 그렇지 않은지만이 내 분수에 해당하는 일이다. 1년 동안 있던 일을 돌이켜 보니 보아줄 만한 실상이 백에 하나도 없었다. 마음을 다스리는 도를 모르지도 않고 수신의 공부를 익히지 않은 것도 아니다. 그러나 마음과 일이 괴리되고 일상의 동정(動靜)이 어긋나 360일 가운데 헛되이 떠돌지 않는 날이 없었다. 내 나이를 손꼽아 보니 이미 42세가 되었다. 묵은해를 보내는 이 밤에 나도 모르게 놀라고 깨달아 삼가 여기에 적어 잘못을 바로잡고 자신을 꾸짖는 도구로 삼는다. 正月初五日。 戊辰。 无妄九五。 少陰洪儒一耒言: "前年十二月二十四日。 黃山書院重修奉安之會。 渠亦往參云。" 院前享李文元李文成成文三先生。 今宋尤菴時烈。 主事重修。 以李文純趙文正二先生主享。 兩湖人士會齊者。 二百餘人。 宋判書首獻。 李參議惟泰副獻。 公州牧鄭英漢終獻。 而宋李二公。 以深衣幅巾行祭。 鄭君以時服行事云。二十一日。 甲申。 旣濟九三。 少陽晨起行祭。 此地乃先君子榟桑之鄕。 昊天罔極。 萬倍于常。 是日歷謁先祖群塋。 兄弟侄子會宿于碧松堂。二十七日。 庚寅。 家人九三。 少陽京中士人李潞來見。 前吏判趙絅之外孫。 言語頗穩。 能道曩日二宋二尹一許論禮始末。 其外祖。 亦一言之後。 尙擯於時。 時方退居于抱川村舍云。 又言: "其叔父李君聖徵。 時在東萊任所。 去年冬。 倭人進封領來者接待時。 爭酒悖慢。 李君終始不屈。 倭人拔劍作亂。 釜山僉使及府使之軍官以下。 皆遁走。 惟下吏一人死守不去。 事定走聞。 僉使拿就繫獄云。"初二日。 甲子。 損上九。 少陽邑吏告明日主倅蔡侯忠立。 旅櫬發引而歸。 往見之。 喪主請挽辭。 爲賦一篇律語。 蓋蔡侯質朴寬儉。 而無才於政事。 故民雖愛其不猛。 而短其無變通。 及其喪也。 邑人尹先甲洪鍾華。 典治其喪。 布被短袴之外。 衙無所藏。 無以斂棺。 鄕人共賻。 買被與袴而斂之云。 故余挽辭三四云: "政用鞭皮方仰惠。 衣無充棺始知淸。" 其七八云: "酌彼齊州盃上水。 紼謳三唱送公行云。" 蓋記實矣。十五日。 丁丑。 歸妹初九。 大陽祭外祖考妣墓于栗枝谷。 蓋余外祖。 晩年厭煩城市。 終年於道村農舍。 旣無嗣胤。 而逝於崇禎辛未。 余在冲年。 不能返葬故山。 權窆于此。 余亦無兄弟子侄。 春秋掃塋。 以親塋遠在。 故不能行祭于節日。 例常擇日行之。 余於八歲。 初受千字文及唐宋詩文於外祖。 其年十二月下世。 猶及望見貞固之守介特之姿。 薰蒿今日。 凄感滿懷。 亦有人所不及知余意者。 可哀也已。閏六月二十一日。 辛巳。 未濟九二日卯辰。 南風徐徐而起。 俄而北風竝起。 南北方雲氣。 一時會翕于楓山之西。 我家之東。 雷電從中起。 大雨如注。 信奇觀也。 南北之風。 相對竝起。 四方之雲。 囊括一處。 合成沛然之澤。 神功鬼跡。 賁然可窺。 噫! 其中若無主張是者。 其號令聚散變化屈伸。 安能若是之神也? 旣然已。 爽風一聲。 雲捲雨收。 而斂無迹矣。 吁! 亦神矣。 仍默觀而記。 是日聞吏曹參判兪公棨之逝。 兪君剛直好學。 嘗以事謫錦山。 手結數椽草舍于峽中。 黍飯菜羹。 朝夕不給。 而不撤讀書怡如也。 放還調務安縣事。 以廉謹公儉稱。 去職拜諫官。 當仁祖進謚之日。 直諫觸犯雷霆之威而不撓。 因山後配富寧。 尤齋宋公。 遭遇孝廟。 䟽其非罪放還。 尋薦以王佐之才。 歷陟淸要。 今上嗣服。 久在玉堂。 爲副提學。 入東銓以參議。 拜參判。 未久而遞。 君之在務安。 以書抵余。 仍往來通簡數年。 而時余遭王母之喪。 罹葬祭之故。 未遂執贄相就之約。 而羆官而去。 故聞其名。 而求見其人。 今聞其訃。 令人悽然。十二月十四日。 辛未。 明夷六二。 少陽聞尤齋宋公於地主。 待之甚敬。 懷德倅淸州牧來謁。 必下庭送迎。 容辭極恭。 嘗曰: "城主受命君父。 來治我也。 慢城主。 卽慢君父也。" 夫人之侄。 治西原縣。【淸州降號時】來謁。 亦下庭送迎。 無異他人。 蓋甚非俗人之視妻侄如己族故也。二十日。丁丑。 賁六二。 少陽李啓玄。 京畿高陽常漢之子。 少時爲僧。 寓於故相國南以雄山齋。 南相惜其有才。 勸之讀書。 一覽輒誦。 博觀群書。 無不通焉。 南相勸之還俗。 以堪輿之術鳴於時。 公卿大夫之葬其親者。 爭延接焉。 丁酉年間。 自李典翰壽仁家北歸時。 余亦以祖考葬地不吉。 故邀占移樹之地。 不滿余志。 尙不用其地。 今年徐鳳翎。 欲移葬其親。 追蹤於京畿江原等地邀來。 看其爲人。 當冬盛寒。 衣單衣不寒。 或入洌泉浴焉。 行不騎馬。 日走數百里而不疲。 過人舊村先山。 已往吉凶。 言之若符契。 故卿士以下。 人皆惑焉。 以道人稱之。 以余見之。 所行多乖誤。 而近溺於鄕之一老娼。 心跡盡露。 無可取者。 但地術稍勝於庸士而已。 是以余亦一二邀占先山矣。 而亦不可輕信。 故尙不用其說矣。三十日。 丁亥。 旣濟上六。 少陽今日。 歲除日也。 歷計一年已然之事而論之。 春夏之交。 雨暘無甚愆忒者。 南中野邑若干地而已。 七八月之間。 上之人。 不詳考驗農家之得失。 而以豐年稱之。 至於霜降之後。 嘉糓過半不實。 而上之人。 亦不審察。 故野有凶歉之象。 而賦有豐年之徵。 民多苦怨。 至於山峽之郡。 水災備甚。 人民壓死於山崩。 五糓漂淪於激湍。 而况木綿災損。 山野同然。 而大同米作布之擧。 民心騷然。 體無完衣矣。 上天示警。 日月星辰。 震蕩相薄之變。 有目皆覩。 山川草木鳥獸之怪。 莫不畢見。 而人心之駭僻。 世道之汚澆。 有不足言者。 守令荒淫。 而耳若無聞。 朝廷備員。 而目若無見。 淸流之所尙。 黨論而已。 濁吏之所務。 財賂而已。 至於三百年宗社。 無一人顧護者。 此何時哉? 山野陋人。 地賤迹踈。 滿腹丹悃。 無日不激。 而亦無如之何矣。 聊書萬一于記陰晴小冊之末。 以敍五內之積氣焉。 雖然。 國家之事。 非吾之所獨憂。 而亦非吾之心力所可及矣。 若夫吾之一箇身心正不正治不治。 乃吾分內事也。 而回首一年之事。 百無可觀之實。 治心之道。 非不知也。 正身之學。 非不講也。 而心與事乖。 動與靜違。 三百六十。 無非浮泛底日子。 屈指吾年。 已至四十二矣。 送舊此夕。 不覺驚悟。 謹書于此。 以爲補過自訟之具焉。 제주배(齊州盃) 제주(齊州)를 다스리면서 청렴함으로 이름 높았던 조궤(趙軌)의 고사를 빌린 시어(詩語)이다. 《隋書 趙軌列傳》 유공 계(兪公棨) 1607~1664. 본관은 기계(杞溪), 자는 무중(武仲), 호는 시남(市南)이다. 김장생(金長生)의 문인으로 예학과 사학에 정통하였다. 송시열(宋時烈), 송준길(宋浚吉), 윤선거(尹宣擧), 이유태(李惟泰) 등과 더불어 충청도 유림의 오현(五賢)으로 일컬어졌다. 남이웅(南以雄) 1575~1648. 본관은 의령(宜寧), 자는 적만(敵萬), 호는 시북(市北)이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남한산성까지 왕을 호종했고 그 공으로 좌찬성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