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순(柳淳) 유사(遺事) 및 비음기(碑陰記) 초(抄) 고문서-시문류-문 교육/문화-문학/저술-문 고흥 고흥류씨 류탁 후손가 (재)한국학호남진흥원 柳淳의 사적을 적은 遺事 및 碑陰記를 필사한 문서. 류순(柳淳)의 사적을 적은 遺事와 碑陰記를 필사한 문서이다. 문서에는 崔夢嵒이 찬술한 '宣武原從功臣中訓大夫行宗簿寺主簿柳公遺事'와 1842년 8세손 柳志浩가 찬술한 '中訓大夫行宗簿寺主簿柳公碑陰記'가 함께 필사되어 있다. 이 문서의 내용은 류순의 世系와 행적, 성품 등이 기록되어 있다. 문서 내용에 따르면 류순의 자는 호숙(灝叔), 호는 송암(松巖), 본관은 흥양(興陽)이다. 자태가 빼어났고 성품은 효성스러웠다. 시문(詩文)을 잘하였고 천거로 사옹원직장(司饔院直長)을 받았다. 임진왜란 때 왕을 용만(龍灣)까지 호종(扈從)하였고, 남쪽으로 돌아와 원수(元帥) 권율(權慄)의 막하에 나아가 행주(幸州) 싸움에서 수십 명을 참획하였다. 명군(明軍)이 원병으로 나와 양곡을 서쪽으로 옮길 때를 만나 공은 3종질인 독운관(督運官) 몽사(夢獅)와 함께 10여 만곡(斛)을 선천(宣川)으로 운송하여 군수(軍需)로 제공하였다. 정유재란 때는 이순신에게 방법과 계략을 도와주기도 하였다. 주부(主簿) 벼슬을 받고 선무원종공신에 녹훈(錄勳)되었다. 광해군 때 귀향을 결심하고 시(詩)를 지어 세상을 등지고 은둔하려는 자신의 뜻을 보였다. 1566년 3월 10일 흥양현 호산에서 태어나 1612년 11월 17일 향년 47세로 생을 마쳤다. 배우자는 영광정씨이다. 그런데 문서 첫머리 아랫쪽에 '高興郡高興面虎山 柳重益 碣'이라고 쓰여 있는데, 후손 류중익이 비석을 세웠다는 말인지 아니면 다른 의미인지 정확히 알 수 없다. 최몽암(崔夢嵒, 1718~1802)의 자는 乃說, 본관은 낭주로, 영암 사람이다. 아버지는 華宗, 어머니는 廣州 李漢衡의 딸이다. 1750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장령, 동지의금부사, 공조 참판 등을 지냈다. 류지호(柳志浩)는 柳淳의 8세손으로 자가 通吾이고, 호가 農隱이며, 본관은 고흥이다. 1793년에 태어나 1856에 사망하였다. 배우자는 여산송씨이다. 흥양현 읍내면 虎山東邊里에 살았다. 고흥류씨의 가계를 살펴보면 류순(柳淳) → 류우룡(柳遇龍) → 류하(柳河) → 류동기(柳東起, 1656~1713) → 류성갑(柳星甲, 1679~1725) → 류희탄(柳希綻, 1705~1753) → 류경(柳坰, 1738~1785) → 류일영(柳日榮, 1767~1837) → 류지호(柳志浩)로 이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