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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8년 안병현(安秉鉉) 서간(書簡)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安秉鉉 盧軫永 광주 민종기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938년 11월 말일, 제 안병현이 노진영에게 안부와 그의 아들의 학업 생활 등을 전한 서간. 1938년 11월 말일, 제(弟) 안병현(安秉鉉)이 노진영(盧軫永)에게 안부와 그의 아들의 학업 생활 등을 전한 서간이다. 경성부 내수정(內需町) 70-77에 사는 안병현(安秉鉉)이 노진영에게 답한 편지로 아직 답장을 하지도 못했는데 또 편지를 받았다며 어쩔 줄 몰라하는 인사로 편지를 시작했다. 추운 날씨에 상대의 안부가 어떠한지 묻고 자신은 우거하는 상황이 한 결 같이 힘들다는 것, 간간이 듣는 고향 소식이 평안하다고 하고, 나머지 가속들이 큰 탈 없어 다행이라고 했다. 상대의 아드님은 추위를 뚫고 서울에 돌아와서는 조금도 피곤한 기색 없이 이후로 매일 등교하여 열심히 공부한다는 것, 이것을 보면 평소 가정교육이 어떠했는지 알 수 있으며 자신이 가르칠 것이 없으니 참으로 축하할 일이라는 것, 두 명의 아이도 잘 하고 있다고 전한 내용이다. 이 편지에 적힌 별지에는 최근의 서울에 있는 고보(高普)로 전학하려는 세태와 움직임이 정말 심하다는 것을 전하고, 이는 세속의 흐름이고 돈이 최소 400여엔 이상 들고 지방에서 서울로 유학(遊學)하는 일은 이를 거행하는 수단이 약 2천여 엔(円)에 이르니 형은 그 속류에 편입하지 말기를 바란다는 내용이다. 상대가 자식의 전학(轉學)을 생각한데 대하여 답장한 편지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2고보(高普)로 가는 한 방도를 얻었는데 형이 하려 하신다면 양력으로 이달 27일 이내로 직접 와서 얼굴 보고 의논하기를 바란다고 했다. 또한 전학을 하기 위해 수행해야 하는 조건 2가지를 편지의 끝에 좌기(左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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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9년 노승현(盧承鉉) 서간(書簡)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盧承鉉 盧軫永 광주 민종기 (재)한국학호남진흥원 HIKS_Z999_99_A00880_001 1939년 12월 25일, 종생 노승현이 노진영에게 노진영 자손의 휴학중 생활을 당부하고 광산에 관한 일의 진행을 어찌 할지 답해 줄 것을 청하는 내용의 서간. 1939년 12월 25일, 종생(宗生) 노승현(盧承鉉)이 노진영(盧軫永)에게 노진영 자손의 휴학 중 생활을 당부하고 광산에 관한 일의 진행을 어찌 할지 답해 줄 것을 청하는 내용의 서간이다. 상대의 안부를 묻고 자신은 무사히 통근을 하고 있으며, 몸도 점차 회복되고 있다고 안부를 전하였다. 본론으로 상대에게 부탁할 일은 상대의 아들이 광주로 내려간 뒤에 특히 건강에 유의하면서 매일 규칙적인 생활을 계속하고 공부도 열심히 하도록 할 것을 당부하였다. 공부를 하는 구체적인 방식을 제시해 주었는데, 아침 먹기 전 2시간은 매일 국어(國語)와 독서를 하고, 점심 먹기 전 2시간쯤은 매일 글씨 쓰는 것과 작문 창작 연습을 하고 책을 읽을 것, 저녁 먹기 전 2시간쯤은 학교규정에서 내는 숙제를 열심히 하도록 하고, 저녁 먹고 1시간 뒤부터 10시까지는 작문(作文) 수험준비서를 연구하고 암송할 것, 국어의 의미 연구 등에 전심전력 하라고 전했다. 이와 같은 매일의 일과를 충실히 하면 건강도 증진되고 공부에 재미도 붙을 것이라며, 낮의 휴가 시간에는 되도록 산과 들을 걸으며 산책하도록 할 것을 당부했다. 다음으로 자신이 서울에 올라갈 때 말씀하셨던 광산(鑛山) 일에 대해서는 휴가를 이용하여 활동해 볼 것이니 어떻게 일을 진행할지 편지로 알려주기를 바란다고 했다. 휘문(徽文) 측의 운동 등은 휴가를 이용하여 연락해 볼 것이고, 시세에 맞는 운동을 선택해 볼 것이니 안심하라고 했다. 결과는 훗날에 말씀드리겠다며 편지를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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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봉_앞면)光州郡 芝山面 日谷里盧蘇海 鍾龍氏 宅回(피봉_뒷면)咸平郡 羅山面 黾山里盧永▣(源)(簡紙)春間拜別之懷, 隨昨恒切, 一雁傳書, 披玩再三, 感荷無比. 謹未審淸和僉體候連衛萬寧, 寶覃均安否.並仰溸區區, 不任勞祝. 族從等省狀印昔, 而惟幸渾門之無驚耳. 就拱惟我先壇義補事, 爲子孫爲先事實是當然之事也. 如我殘門夥多之義捐募貸之, 故去三月之行, 鄙門之形便査實一一稟告于 貴家之僉座矣. 示意中貳斗落代壹百貳拾圓云云, 是何故乎? 鄙等那時以六拾圓金額措處賜諾之意爲料而其額条, 如此窮節, 不勝一綿之力. 故帶推沒數持參爲計, 而 貴宗議擧員送之, 期於了刷, 無至起弊之地云云. 此義可謂恐生空費也. 自黾山門中言之則, 子孫之生活推世名, 然諸般困難, 不可成言, 何暇有意於爲先之道乎?但爲愧赦, 自歎自歎耳. 餘惟冀貴宗之處分. 謹不備謝禮.乙亥四月念五日, 族從 仁澤, 璟源, 永源 拜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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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봉_앞면)光州府 大正町 一一二番地盧 兄 軫永 氏[消印: 全南·長城 13.7.24 ][消印: 全南·長城 13. 7. 2?](피봉_뒷면)長城郡 北上面 鈤峴里金龍植氏方梁會得敬.(簡紙)日谷在天亡耶. 如是以間縮, 瞻悵有倍於他時. 謹不審春府丈, 隆老氣力對時康寧, 曁侍中體度益護萬重, 渾眷濟濟平善, 旣深仰祝. 弟狀今方滯在于長城郡金龍植氏家, 而送了夏日, 不家食情怳, 姑依前樣子, 他無可喩者耳. 就兄我間年來事, 鄙之累度所向意表出, 於不義中不啻, 亦出於不信之誼. 故到今慨難而已. 于先欲爲仰煩, 第營事年來幾多. 明日與 貴族永洙氏等覽于各勝地, 而占得於何處何山耶. 數三處占得料,想必存矣. 第推想時局, 于此營事,促進歲月也. 倘無轉眄無暇之日乎. 更爲勵志精慮, 無至於敀虛狼貝之地, 至祝至祝. 前者所送, 付之一笑, 更爲一者奉握, 是所祝企, 而未知 尊貴之意(同紙內 小字 書簡)一別修鬲之霜, 繼綣之意, 何日可已. 欲探高燭査, 若白雲深處, 只自咄悵矣. 謂外承惠感下不息耳.謹詢庚炎, 旅中侍體上淸珍, 而家音種種所承而亦得勻禧否. 慰溸之至. 弟省候粗保, 而外無足放道耳. 就近間看得幾據佳山麗水而占了幾個處利之過乎?願聞耳. 鄙則近來經於宗事, 無由淂到於山水之間, 悶悶耳. 那時更有光接引期乎. 企企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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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5년 보성향교(寶城鄕校) 통문(通文) 고문서-서간통고류-통문 寶城鄕校 羅州鄕校 寶城郡鄕校印(4.9×4.5), 寶城郡□□典校之章(2.5×2.5) 광주 민종기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965년 보성향교(寶城鄕校)에서 열부(烈婦) 장씨(張氏)의 행적을 알리며 포양(褒揚)의 은전을 받을 수 있도록 나주향교(羅州鄕校)에서 답문을 보내줄 것을 요청하는 내용의 통문 1965년 보성향교(寶城鄕校)에서 나주향교(羅州鄕校)에 보낸 통문(通文)으로, 보성의 열부(烈婦) 장씨(張氏)의 실제 행적에 대해 알리니 나주향교의 여러 집사(執事)께서 특별히 살펴보고 천양(闡揚)하는 답문(答文)을 보내달라는 요지이다. 보성향교에서 알리고자 하는 장씨는 문강공(文康公) 우산(牛山) 안방준(安邦俊 1573~1654)의 4남 안익지(安益之, 1608~1687) 호 야옹공(野翁公)의 부인으로, 충의공(忠毅公) 장윤(張潤)의 딸이다. 장부인이 시집갔을 때 야옹공이 먼저 풍창(風瘡)을 앓아 농이 온몸에 흐를 정도였는데, 치료를 위해 별도의 방에서 동거하며 더러워진 옷과 이불을 몸소 세탁하여 집안사람들이 보지 못하도록 하였고, 밤낮으로 약을 달였으며, 오래도록 효험이 없이 마침내 위태로운 지경에 이르자, 장부인은 허벅지 살을 조금 베어 죽에 타서 먹게 하여 조금 효험을 보았고, 마침내 양쪽 허벅지가 뼈만 앙상해졌을 때 공이 완쾌되어 향년 83세를 누렸다고 한다. 부인이 죽어서 남편을 따른 경우는 있어도 돼지나 양의 살을 베는 것처럼 자신의 살을 베어서 남편의 병을 낫게 하였으니, 하늘을 감격시킨 이 행위는 옛 열부라도 드문 경우라고 평가하였다. 집안의 명성이 중간에 미약해져서 수백 년 동안 포양(褒揚)의 은전을 받지 못했으므로 유감이 없을 수 없다는 것이다. 장씨 부인의 실제 행적을 대략 써서 진달하니, 첨존(僉尊)께서 열부의 탁월함을 생각하여 다시 무너진 윤강(倫綱)을 붙들어서 천양하는 답문을 보내주기를 요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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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은경(盧殷卿) 간찰(簡札)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盧殷卿 盧軫永 광주 민종기 (재)한국학호남진흥원 HIKS_Z999_99_A00918_001 노은경(盧殷卿)이 노진영(盧軫永)에게 쌀을 보내준 것에 대해 감사를 표한 간찰 모년 2월 22일에 종생(宗生) 노은경(盧殷卿)이 노진영(盧軫永)에게 보낸 간찰이다. 보내준 서찰을 받으니 직접 얼굴을 뵌 것 같아 감사한데 더구나 쌀을 보내주어 썰렁한 주방에 연기를 피울 수 있게 해주어 말할 수 없이 감사하고 보답할 방도도 모르겠다고 하였다. 혹여 서신을 받고 답장을 하지 않으면 옥에 티가 될까 싶었다면서 상대방의 평안을 축원하며 마무리하였다. 또 은경이라는 이름은 소자(小字)였는데 지금은 정명(正名)으로 통용하고 있으니 허물하지 말아달라고 덧붙였다. 이 편지는 노상용(盧尙鏞)이 노진영에게 보낸 간찰과 합봉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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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상용(盧尙鏞) 간찰(簡札)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盧尙鏞 盧軫永 광주 민종기 (재)한국학호남진흥원 HIKS_Z999_99_A00918_001 노상용(盧尙鏞)이 노진영(盧軫永)에게 올해 농사 준비에 필요한 종자용으로 쓸 곡식을 도와달라고 당부하는 내용의 간찰 모년 3월 27일에 노상용(盧尙鏞)이 노진영(盧軫永)에게 보내는 간찰로 국한문 혼용으로 작성되었다. 지금 농사 준비를 하느라 분망한 시기에 아무 준비와 주선이 없어서 적수공권(赤手空拳) 형편에 몹시 딱한 형편이므로 지금 얼마간이라도 자신의 형편을 헤아려주어서 올해 농사에 지장이 없게 해달라고 간절히 부탁하고 있다. 혹시 준비가 어렵다면 무엇보다 긴급한 것이 종자(種子)이므로 색조(色租) 2석(石)을 반드시 빌려달라는 것이다. 빌려주지 않으면 사실상 올해 농사는 아예 시작하지 못하게 되므로 동정한다는 마음으로 빌려주시면 성심성의껏 갚겠다고 하면서 약한 사람을 도와주는 것도 사회사업가의 일이 아니겠냐고 하였다. 이 편지는 노은경(盧殷卿) 간찰(簡札)과 합봉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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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9년 장대영(張大榮) 등 고목(告目) 고문서-첩관통보류-고목 茂城書院 李生員 광주 민종기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929년 11월에 무성서원 서재 장대영 등 5인이 이 생원에게 무성서원의 집강에 추천되었으므로 삭분향에 와줄 것을 알리는 고목 1929년 11월 15일에 무성서원 서재(茂城書院西齋) 장대영(張大榮) 등 5인이 이 생원(李生員)에게 무성서원의 집강(執綱)에 추천되었으므로 삭분향(朔焚香)에 와줄 것을 알리는 고목이다. 무성서원의 원장(院長)과 원이(院貳)는 경재상(京宰相)이 맡고 집강·장의(掌議)·색장(色掌)·유사(有司)는 도내(道內) 지조 있고 신중한 선비에게 맡기는 것이 전래하는 규례이다. 이번 도회(道會) 때에 사림의 공의(公議)에 따라 이 생원을 집강으로 천망하여 망첩(望帖)을 올리니 이번 초하루 분향례(焚香禮)에 와서 배알하고 봉심(奉審)할 것을 아뢰는 내용이다. 무성서원은 전라북도 정읍시 칠보면 무성리에 있는 서원이다. 고려시대에 최치원(崔致遠, 857~?)의 생사당(生祠堂)으로 태산사(泰山祠)를 건립하였는데 1483년(성종 14)에 정극인(丁克仁)이 세운 향학당(鄕學堂)이 있던 지금의 자리로 이전하였다. 1549년(명종 4)에 신잠(申潛, 1491~1554)의 생사당을 짓고 향사하다가 1615년(광해군 7)에 태산서원으로 창립, 1696년(숙종 22)에 무성서원으로 사액 받았다. 1630년(인조 8)에 정극인(丁克仁, 1401∼1481), 송세림(宋世琳, 1479∼?), 정언충(鄭彦忠, 1706∼1771), 김약묵(金若默, 1500∼1558)을, 1675년(숙종 1)에 김관(金灌, 1575~1635)을 추가 배향하였다. 이 서원은 1868년(고종 5)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도 존속한 47개 서원 중의 하나이다. 1968년 12월 사적 제166호에 지정되고, 2011년 7월에 정읍무성서원(井邑武城書院)으로 이름이 바뀌었으며, 2019년 7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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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오년 박보규(朴甫奎) 간찰(簡札) 2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朴甫奎 광주 민종기 (재)한국학호남진흥원 병오년에 박보규(朴甫奎)가 형에게 보낸 간찰 병오년 9월 16일에 박보규(朴甫奎)가 형에게 보낸 간찰로, 자신을 아우라고 하였다. 부모를 모시고 지내는 형의 안부를 물었고, 자신은 별다른 일 없이 그대로 잘 지내고 있다고 하였다. 형이 지난달에 부탁한 작은 도끼 하나를 아직도 보내드리지 못하고 있는 것은 자신이 관심이 없어서가 아니라 어쩌다보니 그렇게 되었다고 용서를 구하고, 다음 달 3~4일 사이에는 꼭 부쳐드리겠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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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9년 박재빈(朴載彬) 준호구(準戶口) 고문서-증빙류-호적 康津縣監 朴載彬 康津縣監 <着押> 帖子印, 周挾字改印, □…□(적색, 정방형, 6), □…□(적색, 직방형,12.3×5.8) 광주 민종기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879년에 康津縣監이 幼學 朴載彬(51세)에게 발급한 準戶口. 1879년에 康津縣監이 幼學 朴載彬(51세)에게 발급한 準戶口. *父 學生 千益 祖 學生 碓俊 曾祖 學生 師正 外祖 學生 金龍郁 *주소: 古郡內面 朴東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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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2년 박이충(朴以忠) 준호구(準戶口) 고문서-증빙류-호적 康津縣監 朴以忠 康津縣監 <着押> 帖子印, 周挾字改印, □…□(적색, 정방형, 6) 광주 민종기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882년에 康津縣監이 鰥夫 幼學 朴以忠(54세)에게 발급한 準戶口. 1882년에 康津縣監이 鰥夫 幼學 朴以忠(54세)에게 발급한 準戶口. *父 學生 信益 祖 學生 碓俊 曾祖 學生 師正 外祖 學生 金子雲 *주소: 古郡內面 朴東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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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봉_앞면)光州日谷盧監察宅 侍座下 入納潭陽山陰洞留 戚下生 謹拜上候書(피봉_뒷면)庚申三月二日 付便, 謹.(簡紙)謹再拜上候書向於舍弟便上書, 伏想入 燭矣시리이다. 伏未審春氣漸和,侍中氣體候連享萬安이시며 令胤安侍玉抱懋課, 大小諸節亦得均康하신잇가 倂伏慕區區無任下誠之至. 伏聞 戚丈主今月初旬間에作東酉蒲坪之行次하옵신단니 留屯峙로 若爲行次之作路신則 戚下生今年留連處山陰洞에 暫時枉駕하옵셔시기를 千萬伏望이로쇼이다. 戚下生이 伏悚有伏白之事이옵기에 玆以伏告하오니恕燭하옵셔 俾副微忱하옵쇼셔. 戚下生 眠食無恙에伏幸. 而今初六日은 舍弟在萬身死之日初回, 故로 痛割悲悽이옵고 初五日去松山而七八兩日間에야 來于山陰洞하것나이다. 其間에 若有 行次之駕신則 伏拜치못하올ᄭᅡ 伏慮하옵나이다. 恕燭하옵쇼셔. 餘在日間伏拜, 謹不備上候書.庚申三月二日, 戚下生 宋在讚 上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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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2년 김계현(金啓鉉) 준호구(準戶口) 고문서-증빙류-호적 和順縣監 金啓鉉 和順縣監 <着押> 周挾無改印, □…□(적색, 정방형, 6) 광주 민종기 (재)한국학호남진흥원 HIKS_Z999_99_A00786_001 1822년 호주 김계현의 요청으로 화순현에서 동년의 호적대장에서 해당 내용을 등서하여 발급해 준 준호구 1822년(순조 22) 호주 김계현의 요청으로 화순현에서 동년(同年)의 호적대장을 토대로 작성하여 발급해 준 등본 성격의 준호구이다. 김계현의 거주지는 화순현(和順縣) 동면(東面) 제11 물찬내마을[水冷川里] 제6통 1호이다. 직역은 유학(幼學)이고 올해 나이는 63세 경진생(庚辰生)이며, 본관은 광산(光山)이다. 김계현의 사조(四祖)는 아버지 학생 일해(日海), 할아버지 학생 석삼(錫三), 증조(曾祖) 학생 자광(自光), 외조(外祖) 학생 박인삼(朴仁森) 본관은 밀양(密陽)이다. 김계현의 아내 이씨(李氏)는 연령 63세 경진생(庚辰生)이며, 본적은 전주(全州)이다. 이씨의 사조는 아버지 학생 만영(萬榮), 할아버지 학생 우춘(遇春), 증조 진사(進士) 욱(旭), 외조 학생 김대백(金大白) 본관은 의성(義城)이다. 가족으로 어머니 박씨(朴氏)는 연령 82세 신유생(辛酉生)이고, 아들 동학(東學)은 개명(改名)하여 재우(在宇)이고 나이는 25세 무오생(戊午生)이며, 며느리 김씨(金氏)는 연령 25세 무오생이다. 소유하고 있는 여종 악춘(惡春)은 나이 21세 임술생(壬戌生)이다. 문서에는 화순 현감(和順縣監)의 관인(官印)과 주협무개인(周挾無改印) 및 현감의 서압(署押)이 찍혀있으며, 1819년 호적과 대조 확인을 마쳤다는 '기묘호구상준인(己卯戶口相凖印)'이 기재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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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 송재찬(宋在讚) 서간(書簡)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宋在讚 盧鍾龍 광주 민종기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920년 3월 2일에 척하생 송재찬이 노종룡에게 담양 산음동에 방문해 주기를 요청한 내용의 서간. 1920년 3월 2일에 척하생(戚下生) 송재찬(宋在讚)이 노종룡(盧鍾龍, 1856~1940)에게 담양(潭陽) 산음동(山陰洞)에 방문해 주기를 요청한 내용의 서간(書簡)이다. 담양 산음동에 머물고 있는 척하생 노종룡이 지난번에 사제(舍弟) 편에 보낸 편지는 읽어보셨을 것이라는 인사로 편지를 시작하여 봄기운이 점차 퍼지는 이때에 어르신 모시고 지내는 상대의 안부를 묻고 아드님은 함께 공부 잘 하고 있는지, 여러 분들도 모두 강녕한지 물었다. 듣자하니 이달 초순간에 척장(戚丈)께서 동유(東酉) 포평(蒲坪)에 행차 하신다는데 유둔치(留屯峙)로 길을 정해 오신다면 자신이 금년에도 연속해서 머물고 있는 산음동에 잠시 왕림해주시기를 간절히 바란다고 했다. 자신이 말씀드릴 사안이 있어 그러하다며 양해하시고 꼭 오시기를 바란다고 했다. 자신은 지내는 데는 문제없지만 이달 초6일이 자신의 동생 재만(在萬)의 첫 기일(忌日)이라고 하며, 때문에 5일에는 송산(松山)에 가고, 7~8일 사이에야 산음동으로 오니 그 사이에 오시게 되면 뵙지 못할 염려가 있음을 양해해 달라고 하며 편지를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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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5년 이종택(李鍾宅) 서간(書簡)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李鍾宅 盧鍾龍 광주 민종기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935년 6월 18일, 이종택이 노종룡에게 현와 고광선 문집 간행중에 자신의 소회를 전한 서간. 1935년 6월 18일, 봉산정사(鳳山精) 간소(刊所)에서 소제(小弟) 이종택(李鍾宅)이 노종룡(盧鍾龍)에게 현와(弦窩) 고광선(高光善)의 문집 간행에 참여하면서 자신의 소회를 전한 편지이다. 자신이 벽지(僻地)에서 소해(蘇海) 노종룡 노형(老兄)이 현사(賢仕)라는 소문을 들었다는 것, 자신은 예(禮)만 있지, 재물은 없다는 것, 다행히 중년(中年)에 담대헌(澹對軒)에서 뵙고 잠깐 의범(懿範)을 대하였을 뿐이라는 것, 금년 봄에 또 봉산정사에사 덕음(德音)에 대해 들었다는 것, 매번 암자에서 당신의 자가(自家)를 만나 기거하심을 묻지만 혹은 상세하고 혹은 대략적이어서 진면목을 얻을 수 없었다는 등의 상대방을 간절히 궁금해 하는 인사로 편지를 시작했다. 주요내용은 자신이 문고(文稿)를 기록하는 역을 받았지만 재주와 식견이 적어 여러 달 동안 한 일이 없이 쌀을 축내었을 뿐이라는 것, 돌아간다고 말하는 상황에서 한스러운 것은 서석(瑞石)을 만나지 못한 것이라며 있는 곳을 알고자 한다고 했다. 노형(老兄)에게 종이 한 장의 편지가 없을 수는 없기에 이렇게 편지한다며 죄를 따지지 말아 주기를 바란다고 인사했다. 마지막에는 서석(瑞石)과 함께 더욱 한 층 높아지기를 바란다는 인사로 편지를 가름했다. 편지 봉투의 발신자 정보는 보라색 잉크를 사용하여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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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1년 기종섭(奇鍾燮) 서간(書簡)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奇鍾燮 盧軫永 광주 민종기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931년 12월 6일에 제 기종섭이 노진영에게 장성 토지의 소작문제로 보낸 서간. 1931년 12월 6일에 제(弟) 기종섭(奇鍾燮)이 노진영(盧軫永)에게 장성(長城) 토지의 소작(小作)문제로 보낸 서간(書簡)이다. 겨울 들어서 소식을 가끔 자신의 족속인 운도(雲度)에게 대략 들었다고 말하며 요즈음 형과 가족들의 안부를 물었다. 자신은 노인(老人)께서 그럭저럭 평안하시며, 자신 집이 종기(腫氣) 때문에 몇 십일간 자리에 붙어 있다고 했다. 대단히 염려할 것은 아니지만 고통이 적지 않다고 했다. 다만 어떤 일이 있어 부득이 염치 불구하고 간청한다며 귀하의 면(面)에 살고 있는 오룡리(五龍里)의 김순좌(金舜佐)에게 귀하의 땅을 경작할 수 있게 해 주기를 청하였다. 그 이유는 자신과 김순좌가 서로 땅을 교환하여 경작하면서 각 토지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고 있었는데 김순좌가 소작하던 땅을 지난 겨울에 빼앗겼다며 그것은 곧 자신의 토지가 빼앗김을 당한 것과 같기 때문에 김순좌가 농사를 지을 수 있도록 형이 소유한 장성면(長城面) 삼태구(三台區)에 있는 토지 4~5두락을 김순좌가 소작할 수 있도록 명의를 변경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그리고 서로 친하게 지내는 사이에도 처음에는 이 상황을 발설하지 않고 싶었는데 지금은 부득이 하여 말씀 드린다며 형이 다른 곳에 말하지 않아 주기를 청했다. 세로 괘선이 있는 규격지 3장을 이용하여 한문으로 작성하였다. 병중에 있어 간략히 쓴다고 인사하고 편지를 마쳤다. 발신자 기종섭은 담양 수북 대방리에 살았다. 기종섭의 족속(族屬)이 되는 기운도(奇雲度, 1882~1949)의 본관은 행주(幸州), 자(字)는 공룡(公龍), 호(號)는 소석(小石)이다. 아내는 죽산안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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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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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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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간통고류

(피봉_앞면)光州郡 本村面 日谷里盧軫永 氏(피봉_뒷면)潭陽 水北 大舫里奇鍾燮(簡紙)(제1장)冬來寒喧, 頃頃槩聆於鄙族雲度矣,旋已多時. 更伏問,兄體承歡萬裕, 眷內吉迪, 仰用溸禱, 日夕動止. 弟老人粗安, 但身家以腫氣, 箕旬貼席.雖非大段念慮, 而其爲苦痛, 則不少矣. 第有勢, 不得已冒廉仰恳者, 貴面內五龍里金舜佐與弟交換田土耕作, 盖非各自所有借(제2장)人權利, 而金舜佐小作今冬見奪, 則弟之小作, 亦將次第移去矣.兄之所有長城南面三台區土地四五斗落間小作移錄於舜佐, 千萬切仰. 此非舜佐之所請, 亦非舜佐之私情, 直接弟之耕作所關故耳. 弟今舜佐交換小作九斗落則畢竟見奪, 事勢良貝.(제3장)兄須軫念, 勿以等閒聽過, 期於必施, 若何若何. 相親之地, 初不欲發說矣. 今不得已仰瀆, 此意 兄或垂諒耶? 病中草草. 不備禮.辛未十二月六日, 弟 奇鍾燮 拜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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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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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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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간통고류

(피봉_앞면)光州 日谷里盧 蘇海 先生 經座下(피봉_뒷면)光州郡 西倉面 鳳山精舍弦窩高先生遺稿刊所(簡紙)僻在塵境, 聞蘇海老兄之賢, 於人者最大二事. 白首封章, 辭甚憤潡, 知有團令不知有已.緇衣好賢, 這甚懇到, 知有禮而不知有財, 此豈易事耶? 求之於古, 實尠其儔,願享而未之得心帶紆鬱. 幸而中年獲拜於澹對軒, 乍對懿範而已. 今春又承於鳳山舍畧聞德音而已. 時日不爲饒待, 遽爾分張, 無乃緣薄之致歟. 每逢省菴君之自家, 而回必問起居, 或詳或畧未得眞面, 聖人所謂慮是遠而歎如之何弦. 玆文稿謂承■(校)役, 而但才短識涉數月間空索, 鳳山米人謂我,何可悚悚不幾似好. 告歸所恨者, 端石不見也. 或請知處不得尋訪也. 於老兄不可無一紙, 故玆敢替伸不罪否.瞻仰昊天, 曷惠其■〔寧〕, 此則人人同情, 奈何.惟祝 難老增慶, 與瑞石更高一層耳. 餘不備上.乙亥六月十八日, 小弟 李鍾宅 拜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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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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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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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빙류

1939년 노진영(盧軫永) 간찰별지(簡札別紙)_우편물수령증(郵便物受領證) 고문서-증빙류-영수증 1939 盧軫永 安秉鉉 광주 민종기 (재)한국학호남진흥원 HIKS_Z999_99_A00880_001 1939년 5월 15일, 노진영이 안병현으로부터 받은 소포의 우편물 수령증. 1939년 5월 15일, 광주(光州) 대정전(大正町)에 사는 노진영이 서울의 안병현(安秉鉉)으로부터 받은 소포의 우편물 수령증이다. 수령은 1건이며, 우편료는 14전(錢)이다. 영수증의 발행장소는 광주 대정정에 있는 '우편국소/우편취급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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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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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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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간통고류

(피봉_앞면)全南 光州府 大正町 一一二番地盧軫永 氏 必親鑒書留(피봉_뒷면)京城府 內需町 七0,ノ七七安秉鉉(簡紙)1.阻違洽滿月餘에 未修一字候音하니 非徒日怠慢이라 依托子姪於 尊座受敎之地에 誠意滅矣요 道禮無矣라. 如是懶散之踪이 安敢望受 賜於當世之 君子乎, 難以措辞發明也.謹惟淸和貴體候度不以公務致勞하고 寶覃面面吉慶가.區區禱祝이 不能食息少弛라. 生은 省候依昔하고 外無大警하니 遠念之澤으로 압니다. 鄙孫地燮은勿論, 指導하심을 바다 日日登校함을 認識하나 素無敎導凡節에 極爲愧赦이나 然而從今無庚者은 貴座의 敎授하심을 바다 他口에魚燮成龍을 不待詹尹知之 而預切欣感萬萬耳. 餘惟祝貴體萬祉 而更■(預)以私自顒祝者은 特加垂念於鄙之穉孫ᄒᆞ시와 答之敎之耳.2.去今一週日前, 出脚他方, 再昨乘暮歸巢於光州蓬戶, 則 惠電來墜産案, 卒未得解■(語)語意中, 且郵卒累來索引云, 翌日果然投一緘書索引, 忙手披讀, 乃是吾 仁兄惠我, 而德音者也.滿紙提喩如弟愚頑足以想到於君子之復,萬一而廢一曰, 世上事運也之敎, 非好非好之辞耶.兄之中間立場, 神勞身苦, 弟是詳解, 而弟之當事, 朔望心熱腦煎, 兄亦諒燭矣.但於吾 仁兄, 自不勝未安, 千萬千萬.示中例条三回分, 旣爲消費也. 無足更論, 而二回分亦活動中消費之物, 各爲出資云, 還爲未安未安, 都是由我嫌也. 不是爲 兄咎也. 且兄之難顔面於某方者大矣. 玆以還呈, 査領傳致, 如何如何. 弟當晋 軒謝禮, 人事之當然, 而事3.有掣肘, 姑未遂素, 而限三四介月內, 期於晋軒修人事於吾 仁兄與某方計耳. 恕燭如何如何. 惠示 ■■■絶對責任云事, 聞之自不勝舞之蹈之. 然 兄之過去奪鬪勞力, 若是其未安無他, 而更以何廉恥, 敢望於吾 仁兄哉.然世上事, 先爲失敗, 後日成功之源也. 若吾 兄以育英之本位, 更以收容, 則■■■■(私幸何極)去番反還物, 臨時保管■■(自料)耳. 周周諒燭, 企仰企仰. 寒喧姑閣, 而惟仰問者,吾兄萬齡, ■…■趁爲遂洗完企耶. 以是裕.五月十五日, 弟 盧軫永 二拜.非但成事之幸也, 鄙家擧門之大運也. 則 諒此殘門之情勢如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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