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2년 정순묵(鄭淳默) 서간(書簡)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鄭淳默 盧鍾龍 광주 민종기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912년 6월 29일에 사생 정순묵이 사돈댁에 안부를 묻기 위해 노종룡에게 보낸 서간. 1912년 6월 29일, 사생(査生) 정순묵(鄭淳默)이 광주(光州) 일곡(日谷)에 사는 사돈 노종룡(盧鍾龍)에게 안부를 묻기 위해 보낸 서간이다. 초여름에 와 주셨던 것이 아직까지 감사하다는 인사로 편지를 시작하여 그 뒤로 갈수록 그리워졌는데 사람을 보내시어 편지를 주시니 마치 음성을 듣고 있는 듯 하고 함께 자리하고 있는 듯하다고 했다. 극렬한 더위에 사돈댁 어르신의 건강이 편치 않으시다니 걱정이 된다고 하였다. 경서를 읽으시는 사돈도 아드님과 가족들과 모두 평안하신지 묻고 자신집의 노인은 그럭저럭 지내시고, 아주 작은 우려로는 더운 계절의 예사스런 증세이니 어찌 하겠느냐고 했다. 금년의 농사는 자신의 농장으로 말할 것 같으면 큰 흉년을 면치 못할 것이라며 가뭄으로 시작해서 병충해로 끝날 것이니 앞으로의 걱정이 적지 않다고 했다. 그러나 하늘이 결정해주는 일을 말해서 무엇 하겠느냐고 탄식했다. 상대가 편지로 말한 것은 잘 알았다며 조금 서늘해지기를 기다렸다가 찾아뵙겠다고 했다. 중부(仲父)께서 성묘 행차를 가시어 아직 돌아오시지 않았다며 오시면 하나하나 말씀드려 물을 계획이라고 했다. 선(選) 아이의 다리에 조그마한 종기가 난 것은 아직 씻은 듯이 낫지 않았다고 말하며 자애(自愛)하시기를 바란다는 인사로 편지를 마쳤다. 본 간찰이 들어 있던 피봉의 뒷면에는 갑인년 12월 23일로 기록되어 있어 1912년(임자)과는 다른 시기에 작성된 것으로 판단된다. 발신자 정순묵은 ?승정원일기?에, 어의(御醫), 화순현감(和順縣監), 수안군수(遂安郡守), 나주영장(羅州營將), 내금위(內禁衛) 등에 임명된 사람으로 나온다. 간찰 피봉에 의하면 포평(蒲坪)에 살고 있었다. 수신자 소해(蘇海) 노종룡(盧種龍, 1856~1940)은 최익현(崔益鉉), 송병선(宋秉璿, 1836~1905) 등으로부터 학문을 배웠고, 구한말 스승의 뜻을 이어받아 여러 차례 상소를 올리면서 을사오적을 물리치고 나라를 보전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나 그 뜻을 이루지 못하자 고향인 현재의 광주광역시 북구 일곡동으로 와서 교육과 후진 양성에 힘썼으며, 1930년에 본인의 아호를 딴 소해정을 지었다. 소해정은 이후 1965년 그의 아들인 노진영이 같은 공간에 있는 만주사(晩州祠)의 강당으로 헌납하면서 경의재(敬義齋)로 이름을 바꾸었다고 한다. 만주사는 한말 문신이자 우국지사인 송병선과 노종룡을 배향한 사당으로 노종룡의 문인들과 고을 유림들이 송병선의 유풍을 추모해 1944년에 세운 사당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