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光緖二十年甲午正月日前明文右明文事段 矣自起畓 數自耕爲多可 當此今春 私債許多 故不得島內西面伏在後江邊■斗五刀落折價錢文二十二兩五戔交易數依捧爲遣右人前此新文一張永永訪爲去日後若有相佑之端以此記考憑事買主新里內井洞張采守畓主秋文益[着名]證人金成詹[着名]筆執梁義賢[着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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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간통고류

1935년 김우영(金雨英) 서간(書簡)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金雨英 盧軫永 雨英(타원형) 광주 민종기 (재)한국학호남진흥원 HIKS_Z999_99_A00850_001 1935년 3월 27일, 김우영이 노진영에게 사촌을 부탁하면서 보낸 서간. 1935년 3월 27일, 김우영(金雨英)이 노진영(盧軫永)에게 사촌을 부탁하면서 보낸 서간이다. 앞머리에는 자신의 겨를 없는 생활을 전하고, 어른을 모시고 사는 상대와 가족의 안부를 물었다. 주요내용은 이번에 편지를 들고 찾아가는 사람이 자신의 종씨(從氏)라고 소개하고, 천대전(千代田) 생명보험 상호회사(生命保險相互會社) 대리점(代理店)을 설치하고자 한다는 것, 당신의 군(郡)에 살고 있는데 당신이 알선해 주지 않는다면 도저히 이룰 수가 없으니 성립할 수 있도록 도와주기를 청한다는 부탁의 내용이다. 발신자 김우영(1886~1958)은 일제강점기 관료로 경상남도 동래군(東萊郡) 복천동(福泉洞) 출신이다. 1919년 교토[京都]제국대학 법학과를 졸업한 뒤, 경성에서 변호사 사무실을 개업하였다. 1919년 10월부터 1921년까지 항일운동과 관련해 변호인으로 활동하며 명성을 쌓던 중, 1920년 신여성 나혜석(羅蕙錫)과 재혼하였다. 1921년 양재하(梁在河)와 함께 조선인 최초로 부영사로 임명되면서 중국 안동(安東: 현 중국 랴오닝성 단둥)주재 일본영사관에서 고위관료로 근무하게 되었다. 이후 1921년 10월 15일 변호사 등록을 취소하고 1927년부터 1929년까지 일본 정부의 배려로 미국 및 유럽의 각지를 여행하고 돌아왔으나, 1930년 부인 나혜석이 최린(崔麟)과 불륜사이로 밝혀져 이혼을 하였다. 1932년부터 1940년까지 전라남도 도이사관(道理事官)으로 재직하면서 전라남도 농촌진흥위원회 위원‧농촌진흥과장‧수산과장을 겸임하였고, 그 공로를 인정받아 일제로부터 1936년 훈6등 서보장(瑞寶章)과 1940년 훈5등 서보장을 받았다. 또한 중일전쟁에 협력한 공로로 1940년 훈6등 단광욱일장(單光旭日章)도 받았다. 이후 1940년부터 1943년까지 충청남도 참여관(參與官)으로 재직하면서 충청남도 농촌진흥위원회 위원‧충남어업조합연합회 이사장‧충청남도 방공(防共)위원회 위원 등을 겸임하였다. 재직 중 고등관 3등에서 고등관 2등으로, 정5위에서 종4위에 서위되었으며, 일본 정부로부터 훈4등 서보장을 받았다. 1943년 충청남도 참여관에서 퇴직함과 동시에 조선총독부 중추원참의(中樞院參議)에 임명되어 1944년까지 활동하였다. 또 1943년 임시특별지원병경성익찬회(臨時特別支援兵京城翼贊會) 지구별 위원회 회의에 동대문위원회 대표로 참석하여 전쟁에 나가는 학도병에 대한 행사와 지원을 위한 대책 등을 논의하였다. 1944년 5월에는 일본에 있는 조선인 징용 노동자들을 격려하고, 일본에 조선의 상황을 전하기 위해 국민총력조선연맹(國民總力朝鮮聯盟)의 명사 파견원이 되어 훗카이도[北海道]를 시찰하였다. 광복 후 1949년 1월 부산 부용동에서 중앙반민조사위원회(中央反民調査委員會) 김용희(金容熙) 조사관에게 체포되어 반민피의자로 특위(特委)에 구금되었으나 병으로 1949년 2월 12일 보석되었으며, 1958년에 생을 마감하였다. 편지를 쓰던 당시에는 전라남도 도이사관(道理事官)으로 재직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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拜啓盛炎尊體萬安 伏溸伏溸 就白本月拾日은 生의 家親生辰也 而略設小酌 故玆敢仰邀ᄒᆞ오니 當日午後四時迄 內村鄙邱로 掃萬光臨之地 千萬仰望ᄒᆞ나이다 餘謹不備上六月九日 生崔相培拜上殿【피봉】〈前面〉日谷里盧軫永氏〈後面〉陽山里崔相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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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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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간통고류

便聞 雖種種面晤 不能以時積衷之懷 以筆難旣 恪詢栗烈春府吾丈經體候衛道不甚損攝 曁兄體侍衛康穩 令抱善課 盡宵拱祝 實非紙上空言 情弟塊坐窮廬只喉莫及之歎外何煩浼 第所託倘不置忘而心定否 口而言書而託 似涉沒廉 左右之顧 冒廉之託 舍兄伊誰 勿以苦念 致之以施不費之惠 是所仰冀 適有便 多少留謹不備禮辛臘旬六日 鶴弟 拜手回示企仰【피봉】日谷盧兄軫永 侍座入納巨津謹候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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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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自汝離膝之後 消息無憑 心甚茹㭗際 此得見手滋 慰沃此懷 書后日富 其間客况 幸而無恙乎 遠慮不尠 父無事度了 婦阿與孫婦 並無大何曾燮男妹亦善 健幸萬萬凡服藥必先正其心 而且無勞精力調理可也 一劑藥似爲夥多 而日數亦遠 恐有變味之慮 則三分之一分捐送似好似好爾 族兄元五氏 近得安候否 忙未修幅 以此言及焉 餘擾甚不能一一卽父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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賻儀紙燭代金貳圓也庚辰五月二十六日李起澔謹呈【피봉】日谷蘇海亭 護喪所社町李起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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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간통고류

從兄世國氏室內夫人河東鄭氏以老患累日呻吟不幸於今月十七日午時棄世專人訃告辛巳十月十七日護喪 奇世豊 上【피봉】〈前面〉答 日谷里盧軫永氏〈後面〉孝?里訃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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道光十七年 月 日羅州牧考丁酉成籍戶口帳內荷衣島於㤙村住第一統第二戶閑良金聖仁年六十九己丑 本金海父閑良 弼奉祖閑良 尙巾曾祖閑良 延伯外祖閑良 金節順 本金海妻朴姓年六十二丙申 本密陽父閑良 得大祖閑良 敬漢曾祖閑良 桂春外祖閑良 林春逢 本羅州率子達五年二十九己巳等甲午戶口相凖 [周俠 字改印][羅州牧使之印]牧使[署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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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6년 나도신(羅燾臣) 처(妻) 유인정씨(孺人鄭氏) 칙명(勅命) 고문서-교령류-칙명 高宗 羅燾臣 妻 孺人鄭氏 施命之寶(10.0x10.0) 광주 민종기 (재)한국학호남진흥원 HIKS_Z999_99_A01117_001 1906년(고종43) 2월에 중학교 교관에 증직된 나도신의 처 유인 정씨를 의인에 봉작한 임명장 1906년(고종43) 2월에 중학교 교관에 증직된 나도신(羅燾臣)의 처 유인(孺人) 정씨(鄭氏)를 의인(宜人)에 봉작하는 임명문서이다. 의인은 조선시대 정·종6품의 문무관 부인 및 1865년(고종 2) 이후 정·종6품 종친 부인의 봉작에 사용한 칭호이다. 발급일자 좌방으로 '중학교 교관에 증직된 나도신의 처를 법전에 따라 종부직(從夫職)한다'라고 적혀 있다. 인장으로는 어보인 '칙명지보(勅命之寶)'가 안보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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勅命孺人鄭氏封宜人者光武十年二月 日贈中學校敎官羅燾臣依法典從夫職[勅命之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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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9년 나도일(羅燾溢) 호구단자(戶口單子) 고문서-증빙류-호적 羅燾溢 羅州牧使 광주 민종기 (재)한국학호남진흥원 HIKS_Z999_99_A01120_001 1879년(고종16)에 나도일(羅燾溢, 27세)이 자기 호(戶)의 인적사항을 기록하여 나주목(羅州牧)에 제출한 호구단자 1879년(고종16) 나도일(羅燾溢)이 자기 호(戶)의 현황을 기록하여 나주목에 제출한 호구단자이다. 나주목 신촌면 용두리(현 전라남도 나주시 안창동)에 사는 나도일은 33세이고, 정미년(1847)생이며, 본관은 나주이다. 아버지는 나후집(羅厚集)이고, 조부는 나시완(羅時完)이며, 증조부는 나성채(羅聖采)이다. 외조부는 이현빈(李顯彬)이고, 본관은 함풍(咸豊)이다. 아내는 정씨(鄭氏)로, 33세이고, 정미년(1847)생이며, 본관은 나주이다. 정씨의 아버지는 정인혁(鄭仁赫)이고, 조부는 정기표(鄭基杓)이며, 증조부는 정인운(鄭麟運)이다. 외조부는 양석포(梁錫圃)이고, 본관은 제주이다. 어머니는 이씨(李氏)로, 나이는 56세이고, 갑신년(1824)생이며, 본관은 함풍이다. 노비는 앙역(仰役)노비 1명이고 이름은 영덕(永德)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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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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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간통고류

갑진년 한공기(韓公琦) 간찰(簡札)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韓公琦 査頓 광주 민종기 (재)한국학호남진흥원 갑진년 8월 20일에 학정 한공기가 장산서원에서 재계 중인 상대방에게 서원의 재석에 참석하고 싶지만 지팡이를 짚고 걸어야 해서 반드시 참석하겠다는 기약은 할 수 없다는 내용 등을 전한 답장 갑진년 8월 20일에 학정(鶴亭) 한공기가 장산서원(章山書院)에서 재계(齋戒) 중인 상대방에게 장산서원의 재석(齋席)에 참석하고 싶지만 지팡이를 짚고 걸어야 해서 반드시 참석하겠다는 약속은 할 수 없다는 내용 등을 전한 답장이다. 뜻밖에 멀리 궁벽한 산골 적막한 물가에 특별히 보낸 심부름꾼을 통해 편지를 받아보고 깊어가는 가을에 어버이 모시며 지내는 상대방과 여러분의 안부가 평안하다는 것을 알게 되어 간절히 위로되는 마음 참으로 빈 말이 아니라는 내용, 자신은 산골짜기에 사는 풍미가 갈수록 더 무료하던 중에 며늘아기의 병 때문에 염려가 깊다는 내용, 상대방의 장산서원의 재석에 참석하여 쌓인 회포도 함께 풀려고 하지만 쇠약하고 병든 다리로 지팡이를 짚고 걸어야 하므로 반드시 참석한다는 기약은 할 수 없다는 내용 등을 담았다. 상대방의 맏형은 근래 산장(山庄)에 있는지 묻고, 각각 안부 편지를 써야하지만 바빠서 뜻대로 하지 못해 매우 안타까우니 이 심정을 전달하여 편지를 함께 읽도록 해달라는 내용을 추신하였다. 장산서원(章山書院)은 현재 경주시 안강읍 옥산리에 있는 서원이다. 1780년(정조 4)에 지방 유림의 공의로 잠계(潛溪) 이전인(李全仁, 1516~1568)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경상북도 영천군 임고면 수성리에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해오던 중 1868년(고종 5) 대원군의 서원철폐로 훼철되었다가 후손들이 2006년 11월 현 위치에 복원하였다. 이전인은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 1491~1553)의 서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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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簡札)日長如少年 政是吾儒做業之辰也 謹詢此際堂上鼎茵 神佑康泰 侍中棣履 一衛崇寧 區區慰祝 聞以雇奴見闕 躬執來鋤 夙夜靡懈云 此乃吾們活生涯也 尤庸健艶 大堯之黝瘦 神禹之胼胝 周公之旡逸 是皆聖人之代天理物 至誠無息 與太和元炁 同其流行 此乃天理在吾 吾不得不然者也 如吾蠢蠢者視聖人 不啻鳳鷟之蠛蠓耳 雖千吾齡而萬吾力猶恐不逮其萬一 況偸逸肆妄 餒其炁而死其心 自陷於暴棄之科乎 故曰 人勞則思 思則善心生 逸則淫 淫則忘善 沃土之民 不材 淫也 瘠土之民 莫不嚮義 勞也 敬姜此言 實千古閨房之冠冕也座右之服勤習勞 其亦有服於斯訓也歟尊先祖考滴翠公手墨朱子語二十四字 示警者至矣 夫大而天下之存亡 小而一身之得失 何莫不由一■(身)〔心〕之操舍哉 試將斯訓 以觀今日變怪 可謂有先見之智矣 窃有所傷感者 叵耐五神之抑欝而噴薄爲一語 以控之○覧之酬應 怡渙于○雅衷也 中暑呌囈 去閻府才一髮間耳 然篤保斯心 守死善道毋負四大生成之重 此乃蓋棺前 心切切也苟非同志 安能吹吷乃爾乎哉 餘不備戊申七夕 老弟 安曅 二拜陽叔兄所遭 不勝悼䀌 而中阜老少候 大都平安否(皮封)萬吾 侍棣史 敬展凡儂候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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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유년 안엽(安曅) 간찰(簡札)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安曅 광주 민종기 (재)한국학호남진흥원 HIKS_Z999_99_A01016_001 기유년 11월 25일에 금당에 머물고 있는 범농 안엽이 옥산에 사는 상대방 형제들에게 방지(芳旨) 마을의 벗 최 씨의 변고를 언급하고, 보내준 남쪽 차에 대한 감사 인사 등을 전한 답장 기유년 11월 25일에 금당(襟堂)에 머물고 있는 범농 안엽이 옥산(玉山)의 상대방 형제들에게 방지(芳旨) 마을의 벗 최 씨의 변고를 언급하고, 보내준 남쪽 차에 대한 감사 인사 등을 전한 답장이다. 세월은 빠르게 흘러 만나지 못한지 1년이 다 되어 가는데 그리운 상대방을 만날 길이 없어 두보의 「비 내리는 강가에서 전설 정박을 생각하며[江雨有懷鄭典設]」 시의 '언덕은 높고 양수(瀼水)는 흘러내려 동서를 가로막고 있네'라는 싯구만 읊조리며 탄식하였다는 내용, 뜻밖에 상대방이 보낸 편지를 받고 손을 들어 반복해서 읽다 보니 직접 만난 것과 다름 없다는 내용, 11월 추운 날씨에 상대방 부친의 병환이 한 달이 넘도록 완쾌되지 못하고 있다고 하니 걱정스럽다는 내용, 방지 마을의 벗 최 모의 참혹한 소식은 너무 기가 막혀 그 재앙을 뭐라 비유할 수가 없으며, 겨울밤이 긴 요즈음 학문에 몰두하고 있는지 안부를 묻는 내용, 늙은 자신은 추위에 신음하며 칩거하고 있으며, 장차 조그만 오막살이를 빌릴 계획인데 경제적 여유가 전혀 없다는 내용, 남쪽의 차를 보내주셔서 매우 감사하고 긴 밤을 보낼 매우 좋은 재료이며, 자신은 보답할 물건이 없어 부끄럽다는 내용 등을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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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차계장류

임신년 서영수(徐永修) 의송(議送) 1 고문서-소차계장류-소지류 徐永修 巡使道 巡使道 <着名> □…□ 5顆(적색, 정방형, 8) 광주 민종기 (재)한국학호남진흥원 HIKS_Z999_99_A00769_001 임신년 6월에 곡성현 예산면에 사는 서영수가 도순찰사에게 간교한 향리들에 의해 고마청에 속공된 자신의 산지를 내어 줄 것을 청원한 의송 임신년 6월에 곡성현(谷城縣) 예산면(曳山面)에 사는 서영수가 도순찰사(都巡察使)에게 간교한 향리들에 의해 고마청(雇馬廳)에 속공(屬公)된 자신의 산지를 내어 줄 것을 청원한 의송(議送)이다. 청원한 사건의 경위와 내용은 다음과 같다. 예산면 연안 십여 리에 있는 나뭇갓[柴塲] 일대는 임자년부터 예산면 내에서 순산(巡山)으로 정하고 힘을 모아 수호하면서 해마다 땔나무를 내다 팔아서 민역(民役)에 보충해서 쓰고 남은 돈으로는 전답 몇 섬지기를 사두었다. 그런데 지난겨울에 간교한 향리들이 나뭇갓 유사(有司) 몇 사람이 역을 성실히 거행하지 않았다고 관에 고하여 나뭇갓과 전답을 모두 빼앗아 고마청에 속공하고 유사들은 죄를 판결하여 석방하였다. 그런데 서영수를 요호부민(饒戶富民)이라며 갖가지로 위협하며 빙정조(氷丁租) 60섬과 진상에 쓰는 장빙(蔵氷) 값 120냥을 이유 없이 부담하게 하고 또 속전(贖錢) 60냥을 공연히 책납(責納)하게 하였다. 하지만 가장 원통한 것은 서영수의 선영(先塋)이 순산(巡山) 구역 안에 있어 용호육곡(龍虎六谷)에 약간의 송추(松楸)가 심어진 곳을 논 일곱 말과 30냥을 면에 납부하고 명문을 작성하여 사들인 뒤 금양(禁養)하였는데, 이곳까지 모두 속공에 섞여서 귀속된 것이다. 이에 여러 차례 청원하였으나 결정되지 않다가 전임 수령이 돌아갈 때 다시 소지를 올려서 비로소 서영수의 뜻대로 제사(題辭)를 받았는데 소지가 갑자기 사라져 한창 찾고 있을 때 좌수(座首) 정인국(鄭仁國)이 서영수에게 자신이 힘쓰겠다며 70냥을 바로 상납하면 소지를 내주겠다고 하기에 수령을 잘못되게 하고 백성을 좀먹는 습성을 꾸짖은 후 버려두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그날 밤에 병방군관(兵房軍官) 여선묵(吕善黙)이 관의 명령을 칭탁하여 장교를 보내 서영수를 잡아가 소지를 내보이면서 '소지는 내 손에 있으니 30냥을 빨리 가지고 오라'고 하자 서영수가 크게 웃으며 '소지의 제사에 무슨 값이 있느냐'며 꾸짖어 몰아냈다. 전임 수령이 출발한 뒤 가서 소지를 찾으니 여선묵이 전임 수령에게 돌려주었다고 핑계 대고 끝내 내주지 않았다. 이에 서영수는 위 산지는 애당초 매득한 사실이 명백하므로 소지의 유무와는 상관없으니 그 산지에 대한 완문(完文)을 내어 주라는 뜻의 제사를 내려주시고 모두 사실을 조사해 환징(還徵)하여 자신의 억울함을 풀어달라고 청원하는 내용이다. 이 의송에 대해 도순찰사는 6월 24일에 '내역을 상세히 조사하고 본 명문을 상고하여 찾아내 줄 수 있는 것은 찾아내 주고 징급(徵給)할 것은 징급하라'는 처분을 곡성 겸관(兼官)에게 내렸다. 도순찰사는 지방에 큰일이 생겼을 때 재상으로서 왕명을 받들어 파견된 임시 관원으로, 『속대전』에 따르면 재상으로서 군무(軍務)를 받으러 사신으로 나간 자가 의정이면 도체찰사, 종1품 이하면 도순찰사, 종2품이면 순찰사, 종3품이면 찰리사(察理使)라고 하였다. 곡성현감이 임기를 마치고 돌아간 뒤 후임관이 아직 부임하지 않은 상황이므로 이웃 고을의 수령이 곡성현의 수령을 겸임[겸관]하고 있어 도순찰사가 겸관에게 제사를 내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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光武六年壬寅十二月 日 右人前明文右明文事段矣自起畓累年耕食是如可所用最急故西面大坪里防下橋伏在麗字畓二斗落價文柒拾兩果同字畓■根伏在二斗落價文參拾兩合壹百代執典是矣報期來明年十二月晦內報給若過此限永爲次知爲遣禾穀以賭租前例與受而日後若有言端以此文記憑考事自筆畓主張明化[着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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光武七年癸卯二月日右人前明文右明文事段矣自起畓累年耕食是如可至于今年勢不得島內西面內井洞伏在霜字丁壹斗肆升落折價錢文肆拾壹兩交易依數捧上爲遣右人前以新文一丈永爲放賣爲去乎日後若有子孫中相左之弊則以此文記告 官卞呈事【新里內井洞】畓主張明化[着名]證人金如星[着名]趙元兼[着名]筆執禹仁坪[着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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曳山面新基里居化民徐璟淳右謹言事民以邑先生之子孫世居玆土門衰祚薄戶不滿十數皆是貧寒僅僅資生矣千萬意外今春正月良中道上面平地村居李基荗〖茂〗爲名人則京債敗家之人也路店酒筵之■(席)〔上〕招引民之堂侄延國酬酌曰今番京試同行云云則民之堂侄言內吾則貧寒無分錢路資未爲同行云則同基荗〖茂〗笑曰男兒出世則多錢與吾上京則得給京債五六百又得給武科先達請路云云而在傍聞人則但知戲謔之言矣至今弄假成眞同心作伴今月十二日豫爲發行是乎所㦖迫緣由仰訴爲去乎 洞燭敎是後 傳令于京主人處以防錢路以爲日後公私間俱便之地千萬伏祝行下向敎是事城主 處分壬戌二月 日〈題辭〉當以此念〖意〗傳令于邸吏向事 十日[官印]官[署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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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간통고류

임술년 이술상(李述祥) 등 3명(名) 간찰(簡札)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李述祥 광주 민종기 (재)한국학호남진흥원 임술년 10월 9일에 경주 양동 마을에 살고 있는 이술상·이재영·이능섭이 옥계의 친족들에게 그들의 선조 봉사공의 묘도에 비석을 세운 날은 원전에 모여 제사 지내는 날과 겹치고, 이어서 문중 어른의 장례가 있어 참석하지 못하고 부조금으로 돈 한 꿰미만 보낸다는 내용을 전한 답장 임술년 10월 9일에 경주 양동 마을에 살고 있는 이술상·이재영(李在永)·이능섭(李能燮)이 옥계(玉溪)의 친족들에게 그들의 선조 봉사공(奉事公)의 묘도(墓道)에 비석을 세운 날은 원전(達田)에 모여 제사 지내는 날과 겹치고, 이어서 문중 어른의 장례가 있어 참석하지 못하고 부조금으로 돈 한 꿰미만 보낸다는 내용을 전한 답장이다. 그동안 소식이 끊겨 서운했는데 오늘 상대방들이 보낸 편지를 받고 여러분 모두 잘 지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어 매우 위로된다는 내용, 상대방 선조인 봉사공의 묘도에 비석을 세운다고 하는데 여러분의 정성스러운 뜻을 알 만하니 매우 축하드린다는 내용, 자신들도 마땅히 비석을 세우는 날에 모두 참석해야 하지만 원전에 모여 제사 지내는 날과 서로 겹치고, 이어서 문중 어른의 장례가 앞뒤로 서로 방해가 되어 뜻대로 할 수 없으니 매우 한스럽다는 내용, 돈 한 꿰미를 보내 조금이나마 비용에 돕고자 하니 용서하고 받아 주시라는 내용을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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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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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간통고류

기해년 박천흠(朴天欽) 간찰(簡札)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朴天欽 광주 민종기 (재)한국학호남진흥원 기해년 4월 13일에 봉곡에 살고 있는 박천흠이 옥계에 사는 사돈 형제들에게 며늘아기의 상을 당한 자신의 상황 등을 전한 간찰 기해년 4월 13일에 봉곡(蓬谷)에 살고 있는 박천흠이 옥계(玉溪)에 사는 사돈 형제들에게 며늘아기의 상을 당한 자신의 비통한 상황 등을 전한 간찰이다. 지난 겨울에 달성(達城, 현 대구)에서 잠깐 만났던 일은 한바탕 꿈을 꾼 듯하며, 지금 소식이 끊겨 예전에 비해 곱절로 조바심이 난다는 내용, 초여름에 어버이 모시며 지내시는 상대방 형제들과 식구들은 모두 평안한지 안부를 물으며 그리운 마음을 가누지 못하겠다는 내용, 며느리상 중인 자신은 집안이 불행하여 며늘아기가 요절한 탓에 비통한 심정인데 상대방들도 아마 자신과 같은 마음일 것이라는 내용, 시아버지와 며느리는 서로 아끼는 관계로 자나깨나 며느리가 자녀를 낳아 자신의 가업(家業)을 보존시켜 주기만을 바랐는데 뜻하지 않게 이런 일이 생겼으니 갑자기 지난날을 생각하면 자신도 모르게 가슴이 막히고 분통하다는 내용, 불행중 다행으로 어린 손자는 별 탈 없이 잘 자라고 있어 위안된다는 내용, 자신의 아들을 만사 제쳐 두고 상대방에게 보내는데 아들이 무슨 면목으로 뵐 수 있을지, 안사돈의 심정은 감당하기 어려울 듯하며, 상대방을 만날 기약이 언제 있을지 모르겠다, 편지를 쓰고 있자니 서글픈 마음만 더한다는 내용을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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