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모장군 남도포만호 양공 묘지명【병서】 禦侮將軍南挑浦萬戶梁公墓誌銘【幷序】 우리 고을의 어모장군 만호(禦侮將軍萬戶) 양공(梁公)이 세상을 떠난 뒤 장사를 며칠 앞두고 공의 적손고(適孫孤)인 유원(有源)씨가 나에게 묘지(墓誌)를 세우는 일을 도와달라고 부탁하였다. 내가 정의(情義)상 교분이 친밀하니 사양하지 못하고 대략 전말을 기록하여, 길이 보존하는 데에 만분의 일이라도 대비하였다.《동한사쇄(東韓史鎖)》를 살펴보건대, 양씨(梁氏)의 선계는 탐라(耽羅)에서 나왔고 【▣】부(婦)의 종(種)으로 마침내 양씨 계보의 비조가 되었다. 역사가가 이미 전기(傳紀)에 쓴 것은 해와 달처럼 밝아 동방 사람들의 이목에 비춰진 것이었으니 또한 어찌 억지로 기록하였겠는가. 후손에 이르러 휘 태시(泰始) 공이 백제에서 벼슬을 하면서 대방(帶方)201)에 대대로 거주하게 되었는데, 관향으로 용성(龍城)202)을 하사 받았고 그 후 광산(光山)으로 옮겨 살았다. 공의 증조인 직장공(直長公)에 이르러 육봉(六峯) 박우(朴祐)203) 선생과 함께 나의 선대에 사위로 들어와서 그대로 나주에 거주하게 되었는데, 바로 성균생원 김효상(金孝祥)의 사위이다. 고조의 휘는 현민(顯民)으로 통훈대부(通訓大夫) 홍문관 전한(弘文館典翰)을 지냈다. 증조의 휘는 철형(鐵衡)으로 선무랑(宣務郞) 사옹원 직장(司甕院直長)을 지냈다. 조부의 휘는 징(澄)으로 통훈대부(通訓大夫) 군자감 부정(軍資監副正)에 추증되었다. 부친의 휘는 복수(福壽)로 가선대부(嘉善大夫)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이고, 배위는 파주(坡州) 염씨(廉氏) 종사랑(從仕郞) 관(寬)의 따님으로, 명나라 만력(萬曆)기원 계유년(1573, 선조6) 정월 24일에 공을 나주(羅州)의 치소 남쪽 마산면(馬山面) 귀업리(龜業里) 별장에서 낳았으니 실로 우리나라 선묘조(宣廟朝) 6년이다.공의 휘는 시립(時立), 자(字) 【▣】이다. 공은 태어나면서부터 아름다운 자질이 있었고 기백과 풍도가 범상치 않았다. 성동(成童) 때부터 의젓하게 성인(成人)의 의기가 있었다. 임진년(1592, 선조25)에 이르러 국운이 중도에 비색(否塞)하여 섬 오랑캐가 밖에서 으르렁댔고, 6년이 지난 정유년(1597, 선조30)에는 왜적이 양호(兩湖)204)를 유린했다. 공의 일가 부자형제는 모두 적의 흉포한 칼날에 희생되었는데, 오직 공 한 사람이 천지가 화를 당한 가운데서도 생명을 겨우 홀로 보존하였다. 공은 이 때 나이 겨우 20여 세였는데 부모의 시신을 수습하여 선영 옆에 귀장(歸葬)하고 3년 거상(居喪)하면서 예절을 벗어나지 않았다.【'유(踰)'가 어떤 본에는 '위(違)'로 되어있다.】상을 마친 뒤에는 비분강개하여 무예에 뜻을 두고 문묵(文墨)에는 자잘하게 마음을 두려 하지 않았으니 대개 뜻한 바가 있어서였다. 4년이 지난 계묘년(1603, 선조36)에 국가에서 정시(廷試)를 치러 인재를 취할 때 공이 이 선발에 발탁되어 끼게 되었으니 전라병사(全羅兵使) 신경유(申慶裕)의 방하(榜下)였다.205)광해군 6년 계축년206)에 공은 수문장(守門將)에 제수되었고 어모장군(禦侮將軍)으로 가자(加資)되었다. 기미년(1619, 광해11)에 남도보 만호(南挑堡萬戶)로 제수되었고 신유년(1621, 광해13)에 체직되었다. 당시는 혼암한 조정이라서 권귀(權貴)들이 권력을 농락하고 여우처럼 아첨하는 자들이 요직을 담당하니 아부하여 요행을 바라고 이익을 취하려는 자들이 길에 가득하였다. 그러나 공이 홀로 호연히 초탈한 뜻을 갖고 선공(先公)이 경영하던 삼향(三鄕)의 별장으로 물러날 것을 결정하여 서호(西湖)의 물가에 집을 지었다. 세상일은 사절하고 휘파람불고 읊으면서 몸을 마치도록 변치 않을 것을 스스로 다짐하였다. 명나라가 남쪽으로 건너간207)지 4년 만에 위청(僞淸)이 참람하게 황제를 칭하고 개원(改元)208)하였는데, 순치(順治) 6년 무자년209) 6월 29일 삼향(三鄕)의 집에서 세상을 마쳤으니 향년 76세였다. 이 해 모(某) 월일에 화산(華山)의 선영에 귀장(歸葬)하였는데 묘역은 같으나 묘혈은 달리 하였고 모좌(某坐) 모향(某向)의 언덕이다.공은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과단했으며 의연히 뜻을 세운 바가 있었다. 악을 미워하고 선을 좋아 하며 소소한 예절에 구애받지 않았다. 중도에 불행을 만나서 한 집안의 부자(父子)가 전부 왜적의 손에 함몰되자 분연히 불공대천의 원수로 삼고 마침내 무예(武藝)로 몸을 일으킨 것이니 그 뜻이 어찌 작은 데 있었겠는가? 그러나 호산(湖山)에서 초탈하게210) 마치고 말았으니 아! 애석하도다.우승지 한호(閑好) 임련(林堜)211) 영공이 시를 지어 공을 애도하기를 "소년 시절에 붓을 던지고 봉후(封侯)에 뜻을 두고서,212) 남북의 비린내와 먼지213)를 깨끗이 소탕하려 했다네. 애석하다 초나라 벽옥214)을 알아주는 이 없으니, 차질을 빚어 흰머리 되도록 끝내 이루지 못했구나."라고 하였다. 대개 그의 지조와 절개를 한 시대 사대부들이 추앙함이 이와 같았던 것이다.공의 배위는 전의 이씨(全義李氏)로 통례원 인의(通禮院引儀) 섬(暹)의 따님이다. 5남 1녀를 두었다. 장남 열(悅)은 남평 문씨(南平文氏) 학생 홍검(弘儉)의 딸에게 장가들었는데 공보다 8년 먼저 세상을 떴다. 다음은 흘(忔)·협(協)·수견(秀堅)인데 후사가 없이 요절하였다. 막내아들 흡(恰)은 이천 서씨(利川徐氏) 학생 윤(玧)의 딸에게 장가들었다. 딸은 학생 나치소(羅致素)에게 시집을 갔는데 보은 현감(報恩縣監) 덕준(德峻)의 아들이다. 손자는 5남으로 유원(有源)·차일(次一)·후일(後一)은 장남 열(悅)의 소출이다. 후원(厚源)·달원(達源)·국일(國一)은 막내아들 흡(恰)의 소출이다. 손녀는 셋이다. 장손녀(長孫女) 하나는 사인(士人) 김숙(金俶)에게 시집을 갔고, 하나는 선전관(宣傳官) 최원립(崔元立)에게 시집을 갔고, 하나는 유학(幼學) 김상겸(金尙兼)에게 시집을 갔다. 계손녀(季孫女)는 몇이다.유원(有源)은 전취(前娶)가 당악 김씨(棠岳金氏) 학생 태협(泰浹)의 딸이고, 재취(再娶)는 조양 임씨(兆陽林氏) 첨지(僉知) 시윤(時潤)의 딸이다. 지금 적손(適孫)으로서 거상(居喪) 중인데 견문이 넓고 기억력이 좋으며 문장이 남보다 뛰어났다. 차일(次一)은 먼저 요절하였고, 후일(後一)은 아직 미혼이다. 후원(厚源)은 금성 오씨(錦城吳氏) 학생 이망(以望)의 딸에게 장가들었고, 달원(達源)은 광산 김씨(光山金氏) 유학(幼學) 상의(尙倚)의 딸에게 장가들었다.측실에 5남 1녀가 있는데 첫째는 수()·둘째는 경(憬)·셋째는 운(惲)·넷째는 칙(恜)·다섯째는 변(忭)이다. 딸은 김덕승(金德昇)에게 시집갔다. 집에서 유원(有源)씨가 손수 기록한 가장(家狀)에 따라 대략 서술하고 명을 붙인다. 명은 다음과 같다.영해215)의 신령한 기운과방장216)의 순정한 정신 지녔으니공은 백대토록그 향기 영원하리라의연히 굳세고 과감하며걸연히 빼어나고 특출했는데칠순을 호수와 산에서맑은 복을 누렸구나신세를 돌아보니육십에도 한관이라사람들이 공을 애석해 했으나공은 도리어 편안히 여겼네화산의 옛 언덕금리의 새 묘도에사라지지 않은 영혼이 계셔서천만년 함께 하리라 吾鄕之禦侮將軍萬戶梁公下世之後。 襄事將有日。 公之適孫孤有源甫。 屬于不佞以相樹誌之使。 不佞以情義分密。 莫能辭。 略誌顚末。 以備不朽之萬一。 竊按東韓史鎖。 梁氏之先。 出于耽羅。【缺】婦之種。 遂爲梁係之鼻祖。 史氏已書于傳紀。 昭然若日月而照于東土人耳目。 又何强記? 逮至後昆。 有諱泰始公仕于百濟。 世居帶方。 賜貫龍城。 其後移居于光山。 至公曾王父直長公。 與六峯朴先生祐。 贅入于吾先代。 仍居于羅州。 乃成均生員金孝祥之女婿也。 高王父諱顯民通訓大夫弘文館典翰。 曾王父諱鐵衡宣務郞司甕院直長。 王父諱澄贈通訓大夫軍資監副正。 考諱福壽嘉善大夫同知中樞府事。 配坡州廉氏從仕郞寬之女。 以皇明萬曆紀元癸酉正月二十四日。 生公于羅州治南馬山面龜業里別墅。 實我國宣廟朝六年也。 公諱時立字【缺】。 公生有美質。 氣度不羣。 自在成童。 儼有成人之意氣。 及至壬辰之歲。 國祚中否。 島夷外狺。 越六年丁酉。 賊兵蹂躙兩湖。 公之一家父子兄弟盡衂兇鋒。 惟公一人僅獨保生於乾坤瘡痏之中。 公時年才二十有餘。 收拾父母軆骸。 歸葬于先塋之側。 居憂三年。 不踰【一作違】禮節。 服闋慨然以弓馬爲意。 不肯屑屑留心於文墨之上。 盖意有所在也。 越四年癸卯。 國家設廷試取人。 公擢參是選。 全羅兵使申慶裕榜下也。 至光海六年癸丑。 除公守門將。 加資禦侮將軍。 己未除南挑堡萬戶。 辛酉遞職。 時當昏朝。 權貴弄柄。 狐媚當途。 阿幸市利者盈路。 而公獨浩然脫意。 卜藏于先公所營三鄕別業。 築室于西湖之涯。 謝絶世事。 嘯詠自許終其身而不變。 至皇明南渡四年。 僞淸僭號改元。 順治六年之戊子六月二十九日。 卒于三鄕第。 享年七十六歲。 是年某月日。 歸窆于華山先塋。 同兆異穴。 某坐某向之原。 公自小少。 聰明果斷。 毅然有立。 疾惡好善。 不拘小節。 中遭不幸。 一家父子全陷于賊手。 憤然以爲不共戴天之讎。 而竟以弓馬發身者。 志豈在小? 而本以湖山實4)宕見終。 嗚呼惜哉! 右承旨林閑好令公堜作詩挽公曰: "少年投筆封侯志。 南北腥塵擬掃淸。 可惜無人知楚璧。 蹉跎白首竟無成。" 盖其志槩。 爲一時士大夫所推許者如此。 公配全義李氏通禮院引儀暹之女。 有丈夫子五女子一。 長曰悅娶南平文氏學生弘儉之女。 先于公八年而卒。 次曰忔曰協曰秀堅。 無後而夭折。 季曰恰娶利川徐氏學生玧之女。 女適學生羅致素。 報恩縣監德峻之子。 孫男五人曰有源曰次一曰後一。 長子悅之出。 曰厚源曰達源曰國一。 季子恰之出。 孫女三。 長孫女一適士人金俶。 一適宣傳官崔元立。 一適幼學金尙兼。 季孫女幾。 有源前娶棠岳金氏學生泰浹之女。 再娶兆陽林氏僉知時潤之女。 今以適孫居憂。 博聞强記。 英藻過人。 次一先夭。 後一未娶。 厚源娶錦城吳氏學生以望之女。 達源娶光山金氏幼學尙倚之女。 側室子五人女子一。 一曰二曰憬三曰惲四曰恜五曰忭。 女適金德昇。 家旣仍有源甫手錄之狀。 略叙而係之銘。 銘曰: 瀛海靈氛。 方丈精純。 惟公百代。 乃永厥芬。 毅然剛果。 傑然英特。 七旬湖山。 能享淸福。 顧閱身世。 六秩寒官。 人爲公惜。 公反爲安。 華山舊隴。 錦里新阡。 不泯者存。 於千萬年。 대방(帶方) 전라도 남원(南原)의 옛 이름이다. 용성(龍城) 역시 전라도 남원(南原)의 옛 이름이다. 육봉(六峯) 박우(朴祐) 육봉은 박우(朴祐, 1476~1547)의 호이다. 본관은 충주(忠州), 자는 창방 (昌邦)이다. 1510년 식년 문과에 급제하였다. 좌승지·강원도 관찰사·개성 유수 등을 지냈다. 양호(兩湖) 충청도와 전라도를 말한다. 신경유(申慶裕)의 방하(榜下)였다 '신경유(申慶裕)'는 '신경유(申景)'의 잘못인 듯하다. '방하'는 같은 방(榜)에 하위로 급제한 사람을 가리킨다. 《선조수정실록》 1603년 1월 1일 기사에 "정시(庭試)를 실시하여 문과(文科) 이명준(李命俊) 등 10인과 무과(武科) 신경유(申景) 등 1천 6백여 인을 선발하였다."라고 한 기록이 보인다. 광해군 6년 계축년 원문에 '光海六年癸丑'으로 되어 있으나 광해군 6년은 계축(癸丑)이 아니고 '갑인(甲寅)'이니, 착오가 있는 듯하다. 명나라가 남쪽으로 건너간 1644년 북경이 청(淸)에 의해 함락되자 명(明) 왕실의 일족이 화중 (華中)·화남(華南)에 남명(南明)을 세운 것을 말한다. 위청(僞淸)이……개원(改元) '위청(僞淸)'은 청(淸)나라를 거짓된 왕조로 폄칭한 것이다. '개원'은 연호를 바꾸는 것을 말한다. 순치(順治) 6년 무자년 '순치(順治)'는 청(淸)나라 세조(世祖)의 연호로, 1644~1661년이다. 순치 6년은 기축년(1649)이고, 무자년(1648)은 순치 5년이다. 연호와 간지에 착오가 있는 듯하다. 호산에서 초탈하게 끝마쳤으니 원문의 '本以湖山實宕見終'에서 '本'의 뜻은 미상이다. '實'은 '佚'의 잘못인 듯하다. 한호(閑好) 임련(林堜) 한호(閑好)는 임련(林堜, 1589~1648)의 호이다. 본관은 나주(羅州), 자는 동야(東野)이다. 사간·집의·우승지 등을 역임하였다. 붓을……두고서 문(文)을 버리고 무(武)에 종사하는 것을 가리킨다. 《후한서(後漢書)》 〈반초전(班超傳)〉에 "반초는 집안이 가난해 항상 관리에게 고용되어 글 써주는 일로 먹고 살아 오랫동안 수고로웠다. 한번은 일을 그만두고 붓을 던지면서 탄식하며 말하기를 '대장부가 다른 뜻과 지략이 없으면 오히려 부개자와 장건을 본받아 이역에서 공을 세워 봉후의 자리에 올라야 하거늘, 어찌 오래 붓 잡는 일에 종사한단 말인가'라고 하였다.[超家貧, 常爲官傭書以供養, 久勞苦. 嘗輟業投筆, 歎曰, 大丈夫無他志略, 猶當效傅介子張騫立功異域, 以取封侯, 安能久事筆硯間乎.]" 하였다. 비린내와 먼지 원문의 '성진(腥塵)'으로, 누린내 나고 더럽다는 말로 오랑캐를 가리킨 것이다. 초나라 벽옥 '초벽(楚璧)'은 양시립을 비유한 것이다. 춘추 시대 초(楚)나라 사람 변화(卞和)가 초왕(楚王)에게 바쳤다는 보옥(寶玉)을 가리킨다. 《韓非子 和氏》 영해(瀛海) 큰 바다를 가리킨다. 《사기(史記)》 〈맹자순경열전(孟子荀卿列傳)〉에 "이러한 주가 아홉 개가 있고 영해가 그 밖을 에워싸고 있다.[如此者九, 乃有大瀛海環其外.]" 하였다. 방장(方丈) 신선이 산다는 산이다. 《史記 秦始皇本紀》 實 '佚'의 잘못인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