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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거시작정규약(鄕去時酌定條件) 고문서-치부기록류-계문서 사회-조직/운영-계문서 고흥 고흥류씨 류탁 후손가 (재)한국학호남진흥원 마을에 들어올 때 작정(酌定) 조건(條件). 마을에 들어올 때의 작정(酌定) 조건(條件)이다. 정해(丁亥) 2월에 정해진 마을에 들어와 머물고자 할 때 지켜야 할 규칙에 대해 적어둔 내용이다. 마을의 규약 및 내야 하는 세금이나 쌀의 양에 관하여 총 15가지 항목으로 정리되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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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영휴(申泳休) 회갑시(回甲詩) 고문서-시문류-시 교육/문화-문학/저술-시 豊陽面竹川里 申泳休 野山 [1933] 申泳休 柳重憲 고흥 고흥류씨 류탁 후손가 (재)한국학호남진흥원 申泳休이 野山 柳重憲의 晬宴을 축하하기 위해 작성한 詩 申泳休이 野山 柳重憲의 晬宴을 축하하기 위해 작성한 詩. *野山晬宴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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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안(先生案) 피봉(皮封) 고문서-치부기록류-선생안 정치/행정-조직/운영-선생안 全北扶安郡 柳任相 柳任相 고흥 고흥류씨 류탁 후손가 (재)한국학호남진흥원 全北扶安郡 柳任相에게 보내는 名單皮封 全北扶安郡 柳任相에게 보내는 名單皮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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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복록(問卜錄) 고문서-치부기록류-문복록 종교/풍속-민간신앙-점복자료 [辛亥] 고흥 고흥류씨 류탁 후손가 (재)한국학호남진흥원 陰陽消長의 상태와 모든 길흉화복의 상징성이 함축된 八卦를 설명한 책 陰陽消長의 상태와 모든 길흉화복의 상징성이 함축된 八卦를 설명한 책. *앞표지: 乙卯至月 *속표지: 辛亥夏 *뒤표지: 題松峴 *1冊 24張이 假綴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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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3년 송기호(宋箕浩) 회갑시(回甲詩) 고문서-시문류-시 교육/문화-문학/저술-시 癸酉十月五日 耕讀齋 宋箕浩 柳斯文士集 癸酉十月五日 宋箕浩 柳重憲 고흥 고흥류씨 류탁 후손가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933년 宋箕浩가 柳重憲의 壽宴을 축하하기 위해 작성한 詩 1933년 宋箕浩가 柳重憲의 壽宴을 축하하기 위해 작성한 詩. *謹次柳斯文士集回甲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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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년 오진영(吳震泳) 신암실기서(信庵實記序) 고문서-시문류-서 교육/문화-문학/저술-서 辛巳閏六月首陽 吳震泳 辛巳閏六月首陽 吳震泳 고흥 고흥류씨 류탁 후손가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941년 윤6월에 오진영(吳震泳)이 신암일기(信庵實記)에 쓴 서(序). 1941년 윤6월에 오진영(吳震泳)이 신암일기(信庵實記)에 쓴 서(序)이다. 서문을 쓰게 된 이유는 고흥 유생 류중헌(柳重憲)씨가 와서 신암실기(信庵實記)를 보여주며 신암(信庵)은 고려조 대신(大臣) 류청신(柳淸臣)으로 충렬왕, 충선왕, 충숙왕을 대대로 섬겼으며, 그가 죽은 후 원 황제의 명으로 李師僧을 불러 화상(畵像)을 그리게 하고 한림학사 조맹부(趙孟䫍)가 찬하였으며 뒤에 또 영밀의 시호를 받았다고 하였다. 조선 태조 때에는 용흥(龍興)에 중신을 보내 그의 묘를 치제하고 영의정을 증직(贈職)받았는데 오직 정인지가 찬한 고려사 본전에만 잘못 기록되어 있다는 사실을 전하였다. 이에 비로소 실기(實記)를 엮었으나 아직 책으로 간행하지 못하여 서문을 얻고자 하니 마침내 짓게 되었다고 하였다. 류청신이 고려조에 시호를 받고, 조선 태조 때 그의 묘에 중신을 파견하여 제사를 지내고 영의정에 증직된 사실을 기록하고, 이색(李穡)과 권근(權近)이 그에 대해 명망이 있었으며 사직에 공이 있었다고 한 말을 인용하여 모함되었음이 명백하니 고려사에 기록이 잘못되어 있음을 서술하였다. ?신암실기?는 고려 때 재상을 지냈던 류청신(柳淸臣, 1257~1329)의 행적이 《고려사》 기록에 간신으로 왜곡되어 있음을 보고 후손 류일영(柳日榮)이 변고(辨誣)하기 위해서 편찬한 책이다. 이 책은 류청신이 간신이라는 주장에 대하여 여러 사료를 고증하여 충실한 반론을 펴고 있다. 오진영(1868~1944)은 충청북도 진천(鎭川) 출신으로 본관이 해주(海州)이고, 자가 이견(而見)이며 호는 석농(石農)이다. 아버지는 오기선(吳驥善)이고, 어머니는 전주이씨이다. 간재(艮齋) 전우(田愚) 문인으로, 스승의 학통을 수립하는 데 진력했다. 10세에 사서육경을 통달하고, 20세 이전에 여러 책을 두루 익혀 문장이 널리 알려졌다. 사학(史學)에 정통하여 역사의 대가인 육당(六堂) 최남선(崔南善)도 경의를 표하였다고 한다. 관직에는 뜻이 없고 오직 성리학을 연구하며 교육에 잠심(潛心)하다가 77세로 세상을 떠났다. 저서로 『석농집(石農集)』이 있으며, 『대동사감(大東史鑑)』을 감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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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복문(占卜文) 고문서-시문류-문 교육/문화-문학/저술-문 고흥 고흥류씨 류탁 후손가 (재)한국학호남진흥원 太乙經 등을 발췌하여 베낀 文 太乙經 등을 발췌하여 베낀 文. 太乙經 등 점술 관련 글을 발췌하여 抄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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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8년 류중섭(柳重燮) 행장(行狀) 초(草) 고문서-시문류-행장 개인-전기-행장 戊寅四月 族孫 重燮 戊寅四月 柳重燮 고흥 고흥류씨 류탁 후손가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938년에 족손(族孫) 류중섭(柳重燮)이 작성한 류영시(柳永蒔) 행장(行狀)의 초(草) 1938년 4월에 족손(族孫) 류중섭(柳重燮)이 작성한 류영시(柳永蒔) 행장(行狀)의 초(草)이다. 류영시의 세계(世系), 가족관계, 생애(生涯) 등을 서술하였다. 류영시와 부인이 죽은 날짜, 자손들의 이름 등이 공란으로 남아있으며, 본문에 수정의 흔적이 남아 있다. 문서의 앞부분에 '河 訓鍊院 參判 子 遇龍 右副將 副司果 子 星甲 通德郞'이라 적혀 있는데 이는 '遇龍 訓鍊院 參判 子 河 右副將 副司果', '星甲 通德郞'을 잘못 적은 것으로 추측된다. 류영시(柳永蒔)의 자는 자여(子汝)이며, 호는 죽와(竹窩), 본관은 고흥(高興)이다. 1833년에 태어나 1918년에 사망하였다. 배우자는 영광정씨(靈光丁氏)이다. 용의(容儀)가 엄중(嚴重)하고 덕행(德行)이 유망(有望)하며, 효성스러워 부모를 섬기는데 정성을 다하였다. 예학에 밝았으며 청백(淸白)을 숭상하며 평생을 인묵(忍黙)하여 빠른 말과 급한 안색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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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지호(柳志浩) 등 연보(年譜) 고문서-치부기록류-보첩류 사회-가족/친족-족보 고흥 고흥류씨 류탁 후손가 (재)한국학호남진흥원 柳地浩와 柳永蒔의 생애를 간략히 기록한 年譜 아버지 柳地浩와 아들 柳永蒔의 생애를 간략히 기록한 年譜이다. 연보에 따르면 류지호는 정조 계축(1793)년 3월 4일에 태어났으며, 자가 通吾이고, 호가 農隱이며, 본관은 고흥이다. 滄溟公(柳日榮)의 장자로 성품이 매우 후하고 가학을 이었으며 孝友가 도타웠다. 글은 자못 博洽하고 글씨를 잘 썼으며, 장옥(場屋 과거장)에 들어가지 않았는데도 오로지 彛倫에 힘썼으며, 유고 한 권이 남아있다고 하였다. 류영시는 순조 계사(1833)년 11월 22일에 태어났으며, 자가 子汝이고, 호가 竹窩이며, 본관은 고흥이다. 滄溟公(柳日榮)의 손자로 타고난 기품이 남달랐다. 또 효성스러워 부모를 섬기는데 정성을 다하였으며, 전후로 부모의 상을 당해서는 삼년을 行素(비통한 생각에 고기는 먹지 않고 채식만 하는 것을 이름)하였다. 문학을 즐겼고 문자는 반드시 그 義理를 말하였으며, 스스로 標榜하지 않았다. 평생 淸白을 숭상하고 분수 밖의 것을 바라지 않았으며 남을 비평함에 있어서는 풍도(風度)로써 許하였다고 하였다. 고흥류씨 滄溟公 柳日榮의 가계는 忠定公 柳濯으로부터 12세 柳好澤‧‧‧‧‧‧14세 柳忠禮‧‧‧‧‧‧16세 柳遇龍 → 17세 柳東起 → 19세 柳星甲 → 20세 柳希綻 → 21세 柳坰 → 22세 柳日榮(1767~1837) → 23세 柳志浩(1793~1856) → 24세 柳永蒔(1833~1918) → 25세 柳敬浚(1855~1935) → 26세 柳重憲(1873~1952) → 27세 柳大錫으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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