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2년 오진영(吳震泳) 죽와류공묘갈명병서(竹窩柳公墓碣銘幷序) 고문서-시문류-문 교육/문화-문학/저술-문 壬午歲端陽節 首陽吳震泳 壬午歲端陽節 고흥 고흥류씨 류탁 후손가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942년 오진영(吳震泳)이 류영시(竹窩 柳永蒔)의 일생을 정리하여 적은 묘갈명(墓碣銘) 1942년 端陽節 首陽에 오진영(吳震泳)이 류영시(柳永蒔)의 일생을 정리하여 적은 묘갈명(墓碣銘)이다. 묘갈명의 내용을 살펴보면 무오년(1918) 6월 28일에 柳永蒔의 자는 자여(子汝), 호는 죽와(竹窩)로 향연 86세로 돌아가셨다. 돌아가신 뒤 35년 뒤인 임오년(1942)에 손자 柳重憲이 문서를 들고 千里의 나를 찾아와 마침내 묘도에 비석을 세울 수 있게 되었다고 하였다. 이어서 선조인 류청신, 류탁의 공훈과 명절이 크게 드러난다고 언급하면서, 이후 濕, 東起, 日榮, 志浩 등 선조의 내력을 서술하였다. 류영시는 순조 계사년(1833) 11월 2일에 태어나 타고난 기품은 淳厚하고, 일찍이 빠른 말과 급한 안색이 없었으며, 효성스러워 부모를 섬기는데 정성을 다하였고, 예학에 깊었다고 하였다. 배필은 靈光丁氏로 婦德이 있었으며 임진년(1832)에 태어나 갑인년(1914) 6월 29일 향년 83세로 돌아가셨으며 묘는 합장하였다. 敬浚 외 2녀를 두었으며, 손자는 重憲 등 1남 2녀이며 증손은 기록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오진영(吳震泳, 1868~1944)은 충청북도 진천(鎭川) 출신으로 본관이 해주(海州)이고, 자가 이견(而見)이며 호는 석농(石農)이다. 아버지는 오기선(吳驥善)이며, 어머니는 전주 이씨이다. 어려서부터 재예가 뛰어나고, 학문이 깊어 간재(艮齋) 전우(田愚)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0세에 사서육경을 통달하고, 20세 이전에 여러 책을 두루 익혀 문장이 널리 알려졌다. 사학(史學)에 정통하여 역사의 대가인 육당(六堂) 최남선(崔南善)도 경의를 표하였다고 한다. 관직에는 뜻이 없고 오직 성리학을 연구하며 교육에 잠심(潛心)하다가 77세로 세상을 떠났다. 저서로 『석농집(石農集)』이 있으며, 『대동사감(大東史鑑)』을 감수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