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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부

1638년 4월 11일 관문(關文) 崇德三年四月十一日 關文 055 의정부가 경기수군절도사 겸 삼도통어사 나덕헌에게 보낸 관문(關文): 직언(直言)을 구하는 전지(傳旨)를 잘 살펴서 시행하고 각 진포(鎭浦)에도 통지할 것.무인년 4월 18일 도착.의정부가 직언(直言)을 구하는 일 때문에 보낸다."주상께서 이르기를,'직언을 구하는 교서(敎書)는,「왕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내가 덕이 없는 사람으로서 역대 임금이 물려주신 큰 기업을 외람되게 지키고 있으므로 이를 감당할 수 없을까 항상 두려워하였다. 종일토록 애를 써서 저녁까지도 두려워하며 하늘을 공경하고 두려워하였으나100) 나의 정성이 하늘의 신뢰를 받지 못하여 하늘의 분노가101) 그치지 않았으며, 항상 두려운 마음으로 백성을 다친 사람이나 자식처럼 여겼으나102) 나의 은택이 아래까지 미치지 못하여 백성의 원망이 날로 불어났다. 재이(災異) 현상이 계속 나타나고 비통해하는 소리가 길에 가득하였으므로, 내가 측은하게 여기고 상심하여 자신을 반성해보니 얼굴이 붉어지도록 부끄러워서 임금 노릇하는 것이 즐겁지 않았다. 이제 봄과 여름이 교차하고 곡물을 파종하는 시기에 오래도록 가뭄이 들고 비가 내리지 않아, 양맥(兩麥 보리와 밀)은 메말라서 수확을 기대할 수가 없고 전답은 거북이 등처럼 갈라져서 농부들이 쟁기를 팽개쳐두었다. 봄철의 밭갈이를 이미 망쳤으니 가을의 수확을 어찌 바라겠는가! 가엾은 나의 백성만 거의 죽게 되었으니, 아! 인류가 멸망하게 생겼다.103) 여기까지 말을 하고 보니 마구 눈물이 쏟아진다. 그 원인을 따져보면 모두 내가 임금답지 못한 탓이니 오히려 누구를 원망하겠는가!더구나 이처럼 큰 난리를 겪고 난 끝에 고통스러운 상황이 바로 발생하여 고아와 과부가 의지할 수 없으며, 칙사(勅使)가 다녀가자마자 가난한 백성은 양식마저 다 떨어졌다. 굶주리고 목마른 다급한 상황조차도 구제하기 어려울까 걱정인데, 이렇게까지 재해가 닥치니 나는 감히 이유를 모르겠다. 나와 걱정을 분담하는 수령들이 나의 뜻을 깨닫지 못해서 백성이 몹시 착취를 당하고 있어서인가? 지방에 파견된 장수가 나의 뜻을 깨닫지 못해서 군병들이 뿔뿔이 흩어지는 사태가 있어서인가? 궁궐이 엄중하지 않아 부정한 통로가 열려 있거나, 관직 제수가 공정하지 않아 뇌물이 횡행하고 있어서인가? 형정(刑政)이 문란하여 옥사(獄事 형사 사건)와 송사(訟事 민사 사건)가 지체되거나, 상벌(賞罰)이 어긋나서 권장과 징계가 막혀서인가? 언로(言路)가 열리지 않아서 나의 과실을 듣지 못하거나, 선악(善惡)을 구별하지 않아서 어진 사람과 사악한 사람이 뒤섞여 나아와서인가? 붕당(朋黨)이 아직도 없어지지 않고 공정한 여론도 소통이 막혀 있어서인가? 사치스러운 풍조가 아직도 여전하여 몸소 실행하는 진심이 신뢰를 받지 못하거나, 명령에 모순이 있어서 솔선수범하는 효과가 나타나지 않아서인가? 아니면 음기(陰氣)는 성대하고 양기(陽氣)는 미약하여 내외(內外)의 구분이 일반적인 법칙을 상실해서 그런 것인가?길흉(吉凶)은104) 들어오는 문이 있는 게 아니라 오직 사람이 불러들이는 것일 뿐이고,105) 하늘은 모두 우리 백성을 통해 보고 들으니,106) 어찌 아득히 먼 하늘에다가 책임을 떠넘기고 나에게 있는 도리를 반성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내가 은(殷)나라 탕왕(湯王)과 노(魯)나라 소공(昭公)이 기우제(祈雨祭)를 지냈던 전례를 행하여 자신을 책망하고 하늘의 경고에 호응하는 실질적인 조치로 삼아야 한다.107) 그래서 이미 침전(寢殿)을 피하여 스스로 신칙하고 반찬의 가짓수를 줄이고 음주를 금하는 등 재이를 소멸시키는 방도에 최선을 다하였다. 나의 조정에 있는 신하와 초야에 있는 선비 중에는 틀림없이 마음속에 품고 있는 것을 말하고 싶은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나의 잘못된 정치와 과실 중에서 어떤 일은 백성을 상하게 할만한 일이고 어떤 일은 재이를 불러들일 만한 일인지를 각각 숨김없이 다 말하여 나의 부족한 점을 바로잡아서 하늘의 견책에 답하게 하라. 말이 정도에 지나치더라도 내가 죄를 묻지 않을 것이다. 아! 하늘이 높아도 낮은 곳으로부터 민심을 듣고 지극한 정성은 하늘을 감동시켜서, 말 한 마디가 끝나기도 전에 천 리에 걸쳐 큰 비가 내리기도 하니, 하늘이 감동하는 것은 마치 소리를 지르면 메아리가 울리는 것처럼 빠르다. 이것이 내가 허둥지둥 서둘러서 재이를 구할 직언을 기어이 들으려고 하는 이유이다. 한 해의 정무(政務)에 힘쓰고 있으니, 나의 지극한 뜻을 깨달으라.」라고 전국에 포고하도록 의정부에 내려주라.'라고 하였다. 숭덕(崇德) 3년(1638, 인조 16) 4월 11일에 행도승지(行都承旨) 신(臣) 이무(李楘)가 공경히 받든 전지(傳旨)의 내용을 잘 살펴서 시행하되, 도내 각 진포(鎭浦)에도 통지하라."4월 일.▶ 어휘 해설 ◀❶ 교서(敎書) : 국왕이 백성에게 널리 알려야 할 중대한 사안이 있어 다중(多衆)에게 반포하기 위해 발급하거나 특정한 사안과 관련하여 개인에게 발급하던 문서이다. 따라서 교서는 수취자가 다중이냐 개인이냐에 따라 다중에게 반포하는 교서와 개인에게 발급하는 교서로 나눌 수 있다. 다중에게 내리는 교서로는 국왕이 즉위할 때 전국의 신민에게 반포하던 즉위교서(卽位敎書), 국왕이 왕위를 세자(世子)에게 물려주면서 반포하던 전위교서(傳位敎書), 국왕이 세자나 세손(世孫) 등의 동궁(東宮)에게 대리청정(代理聽政)을 시킬 때 내리던 청정교서(聽政敎書), 세자, 세손, 왕비, 세자빈(世子嬪), 세손빈(世孫嬪) 등을 책봉할 때 내리던 책봉교서(冊封敎書), 국왕이나 왕비 등에게 존호(尊號)를 올릴 때 전국에 반포하던 상호교서(上號敎書), 국왕이 신하들에게 직언을 구할 때 내리던 구언교서(求言敎書), 역적을 토벌한 뒤 전국에 반포하던 토역교서(討逆敎書), 나라에 경사가 있어 사면령(赦免令)을 내릴 때 반포하던 사면교서(赦免敎書) 등이 있었다. 개인에게 내리는 교서로는 개국(開國), 토역(討逆), 반정(反正), 전란(戰亂) 등 국가적인 사건이 있을 때 공로를 세운 녹훈공신(錄勳功臣)에게 내리던 녹훈공신교서(錄勳功臣敎書), 각 왕의 재위 기간에 공로가 많았던 신하로 선발되어 종묘(宗廟)의 해당 국왕 신실(神室)에 배향(配享)된 종묘배향공신(宗廟配享功臣)에게 내리던 종묘배향공신교서(宗廟配享功臣敎書), 유학(儒學)의 학문적 수준과 도덕적 수양이 뛰어난 선비로서 문묘(文廟)에 종사(從祀)된 문묘종사공신(文廟從祀功臣)에게 내리던 문묘종사공신교서(文廟從祀功臣敎書), 관찰사(觀察使), 유수(留守), 절도사(節度使), 지방 군영(軍營)의 사(使) 등에 제수된 사람에게 발급하던 제수교서(除授敎書), 신하에게 궤장(几杖)을 하사할 때 발급하던 사궤장교서(賜几杖敎書), 국왕이 가례(嘉禮)를 행할 때 왕비의 집에 발급하던 가례교서(嘉禮敎書) 등이 있었다.❷ 전지(傳旨) : 국왕의 명령을 실행할 관사에 전달하기 위해 승정원이 작성한 문서를 가리킨다. 전지는 용도에 따라 분류하면 유음전지(流音傳旨)와 하음전지(下音傳旨)로 분류할 수 있고, 내용에 따라 분류하면 시상전지(施賞傳旨)와 징벌전지(懲罰傳旨)로 분류할 수 있다. 유음전지는 승정원의 승지가 국왕의 전교를 요약 정리하여 주서(注書)에게 주면 주서가 작은 글씨로 작성한 뒤 국왕의 재가를 받던 전지이고, 하음전지는 국왕의 재가를 받은 전지를 주서가 베끼고 관인(官印)을 찍으며 승지가 장함(長銜)을 적고 서명하여 담당 관사에 내려주던 전지이다. 시상전지는 자급(資級)을 올려주는 가자(加資), 승진시켜 임용하는 승서(陞敍), 임금의 이름으로 물품을 하사하는 사급(賜給) 등에 관한 전지이고, 징벌전지는 관원의 추고(推考), 파직(罷職), 삭직(削職), 탈고신(奪告身), 금추(禁推), 나추(拿推), 나문(拿問), 나국(拿鞫) 등에 관한 전지이다. 戊寅四月十八日到付議政府爲求言事."'「王若曰. 予以否德, 叨守祖宗丕基, 常恐不克負荷. 乾乾夕惕寅畏乎天, 而誠不上孚, 天怒未已; 凜凜如傷子視乎民, 而澤不下究, 民怨日滋. 災異畓至, 愁痛載路, 予用惻然疚懷, 反躬自省, 忸怩顔厚, 無樂爲君矣. 今者春夏之交, 播穀之節, 久旱不雨, 兩麥枯損, 無計收獲, 田疇龜拆, 耕夫釋耒. 旣失東作, 何望西成! 哀我赤子, 大命近止, 噫! 人之類滅矣. 興言及此, 流涕無從. 究厥所由, 皆予不辟之致, 尙誰怨尤! 況此大亂之餘, 瘡痍甫起, 孤寡靡依, 西使纔過, 蔀屋如罄. 飢渴之急, 亦患難救, 而災害此極, 予不敢知. 分憂之官, 不體予意, 而民有膏血之浚歟? 閫外之將, 不體予意, 而兵有離散之患歟? 宮闈不肅, 而有徑曲之開; 除拜不公, 而有苞苴之行歟? 刑政紊而獄訟滯, 賞罰舛而勸懲沮歟? 言路不開, 而過失罔聞; 薰蕕無別, 而賢邪雜進歟? 朋黨猶有所未祛, 公議亦有所雍閼歟? 奢侈猶夫前, 而躬行之實未孚; 號令有所乖, 而草偃之效未著歟? 抑或陰盛陽微, 內外之分, 失其常道而然歟? 夫休咎無門, 惟人所召, 天之視聽, 皆自我民, 則其可諉之於茫茫杳杳而不反在我之道乎! 予當以成湯之禱、魯昭之祈爲責躬應天之實. 旣已避殿自飭減膳禁酒, 其於弭災之道, 靡所不用其極. 凡我在朝臣僚、草野士庶, 必有中心所懷而欲言之者矣. 予之庇政闕失, 某事足以傷民、某事足以召災者, 其各盡言無隱, 匡救不逮, 以答天譴. 言雖過中, 予不爲罪. 噫! 天高聽卑, 至誠感神, 一言未竟, 大雨千里, 天之感動, 如響赴聲. 此予之所以遑遑汲汲必欲聞救災之言也. 勖歲政旨, 體予至意.」 布告中外爲只爲, 下議政府爲良如.' 崇德三年四月十一日, 行都承旨臣李楘敬奉傳旨內事意, 奉審施行爲乎矣, 道內各浦良中, 知委向事."四月日.❶ 怒 : 저본에는 원문이 '恕'로 되어 있으나, 전후의 문맥에 의거하여 수정하였다.❷ 滅 : 저본에는 원문이 '感'으로 되어 있으나, 전후의 문맥에 의거하여 수정하였다.❸ 休 : 저본에는 원문이 '咻'로 되어 있으나, 『서경(書經)』 「주서(周書)」 〈홍범(洪範)〉에 의거하여 수정하였다. 『주역(周易)』 「건괘(乾卦)」의 효사(爻辭)에 '군자가 종일토록 부지런히 애쓰고 저녁까지도 두려워하면 위태로우나 허물이 없다.[君子終日乾乾夕惕若厲無咎']라고 한 말과 『서경(書經)』 「주서(周書)」 〈무일(無逸)〉에 주공(周公)이 성왕(成王)에게 은(殷)나라 중종(中宗)의 덕을 칭찬하면서 '엄숙하고 공경하고 삼가고 두려워하였다.[嚴恭寅畏]라고 한 말을 인용한 것이다. 저본에는 원문 '怒' 1자가 '恕' 1자로 되어 있으나, 전후의 문맥에 의거하여 수정하였다. 『맹자(孟子)』 「이루 하(離婁下)」에 '문왕은 백성을 다친 사람처럼 여기셨다.[文王視民如傷]'라고 한 말과 『서경』 「주서」 〈강고(康誥)〉에 '백성을 갓난아이 보호하듯이 하면 백성들이 편안히 다스려질 것이다.[若保赤子惟民其康乂]'라고 한 말을 인용한 것이다. 저본에는 원문 '滅' 1자가 '感' 1자로 되어 있으나, 전후의 문맥에 의거하여 수정하였다. 저본에는 원문 '休'가 '咻' 로 되어 있으나, 『서경(書經)』 「주서(周書)」 〈홍범(洪範)〉에 의거하여 수정하였다. 『서경』 「주서」 〈홍범〉에서는 '왕자(王者)의 잘잘못은 한 해를 기준으로 증명하고, 경사(卿士)의 잘잘못은 한 달을 기준으로 증명하며, 사윤(師尹)의 잘잘못은 하루를 기준으로 증명한다. 비옴[雨]·볕남[暘]·따뜻함[燠]·추움[寒]·바람[風] 등 다섯 가지의 길흉[休咎]은 한 해의 이해(利害)와 관계되고 한 달의 이해와 관계되며 하루의 이해와 관계된다.'라고 하였다. 『서경』 「주서」 〈태서(泰誓)〉에서는 '하늘이 볼 때에는 우리 백성을 통해서 보고, 하늘이 들을 때에는 우리 백성을 통해서 듣는다.[天視自我民視天聽自我民聽]'라고 하였다. 은(殷)나라 탕왕(湯王)이 하(夏)나라 걸(桀)을 정벌한 뒤로 7년 동안 혹독한 가뭄이 들었는데, 태사(太史)가 점을 치고서 '사람을 희생으로 바치고 비를 빌어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탕왕 자신이 희생이 되겠다고 자청하여, 재계(齋戒)하고 모발과 손톱을 자르고 소거(素車)에 백마(白馬)를 타고서 자신의 몸을 흰 띠풀[白茅]로 싸서 희생의 모양을 갖추고 상림(桑林)의 들에 가서 세 발 달린 정(鼎)을 놓고 산천에 기도하면서 자책하니, 기도가 끝나기도 전에 큰비가 내렸다. 노(魯)나라 소공(昭公)은 25년 7월의 상순과 하순의 각 신일(辛日)에 거듭 기우제를 지냈다. 『事文類聚前集』 「天道部」 〈禱雨〉; 『春秋左氏傳』 昭公 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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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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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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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부

1638년 4월 7일 관문(關文) 崇德三年四月初七日 關文 056 병조가 경기수군절도사 겸 삼도통어사 나덕헌에게 보낸 관문(關文): 양성(陽城)과 진위(振威)의 자모수군(自募水軍) 등이 잃어버린 군기(軍器)를 비변사의 관문에 따라 회수하지 말고 감면해줄 것.무인년 5월 11일 도착.병조가 살펴서 시행할 일 때문에 보낸다."이번에 도착한 화량첨사(花梁僉事)의 첩정(牒呈)에 이르기를,'본진(本鎭)에 소속된 양성(陽城)과 진위(振威) 등 고을에 사는 자모수군(自募水軍) 명의로 바친 의송(議送)에 의거하면,「전쟁이 일어났을 때 주었던 활과 화살을 턱없이 징수하는 것은 너무나 애매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 의송에 대한 제사(題辭)에 이르기를,「병조가 보낸 공문에 이르기를,〈난리를 겪고 난 뒤에, 각 도(道) 각 진(陣)의 군병 등에게 주었던 군기(軍器)를 전투에 나아갔을 때 잃어버렸으면 감해주어야 하지만, 흩어져 도망한 군졸로서 받았던 군기이면 거두어들여서 회록(會錄)하라.〉라고 하였으니, 본영(本營)이 멋대로 경감할 일이 아니다. 너희들이 진을 치고 있던 곳에서 서로 싸우다가 잃어버린 군기이면 감해주어야 할 대상에 포함되지만, 도피한 산골짜기에서 잃어버린 것이라면108) 병조가 회부(會付)한 군기를 틀림없이 감해주지 않을 것이다. 본진(本鎭)이 사실대로 조사한 뒤 원문서를 첨부하여 공문을 보낼 수 있도록 2건의 첩정(牒呈)을 올려 보고하라.」라고 제사를 써서 보냈습니다. 그래서 살펴보았는데, 저의 임기 중에 있었던 일이 아니라 상세히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대체로 군기를 주었던 수군들도 같은 해 12월 27일에 남양(南陽)에 나아갔고, 남양부에서 군인들을 위로하던 중에 청나라의 마병(馬兵)이 뜻하지 않게 남양부에 들이닥쳤는데, 남양부사(南陽府使)가 살해될 때에 그들을 영솔하던 초관(哨官)과 군병들도 일부는109) 살해되었습니다.」라고 본진에 남아있던 사람들이 한 입에서 나온 것처럼 증언하였으므로 이러한 연유를 원문서를 첨부하여 첩정을 올립니다.'라고 하였다. 그래서'적지 않은 군기를 본조(本曹)에서 멋대로 감해주기는 어려우니, 어떻게 처리할지를 지시해주소서.'라고 낱낱이 거론하여 비변사에 보고하였다. 이번에 도착한 비변사의 관문에 이르기를,'난리 중에 잃어버린 군기를 징수하는 것은 원통할 것 같으니, 분간하여 감해주라.'라고 하였다. 그러니 살펴서 시행하라."숭덕(崇德) 3년(1638, 인조 16) 4월 7일.▶ 어휘 해설 ◀❶ 자모수군(自募水軍) : 전투에 나아가겠다고 자원한 수군(水軍)을 가리킨다. 인조반정(仁祖反正), 정묘호란(丁卯胡亂), 병자호란(丙子胡亂) 등이 있을 때 전투에 나아가겠다고 자원한 군병을 자모군(自募軍)이라고 불렀다.❷ 의송(議送) : 백성이 관찰사(觀察使)나 절도사(節度使) 등에게 억울한 사정 등을 호소할 때 올리던 청원서이다. 문서 형식은 소지(所志)와 유사하나, 당사자가 거주하던 고을의 수령에게 바치지 않고 그보다 상급 기관에 바치던 문서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❸ 회록(會錄) : 금전, 곡물, 물품 등을 국가가 관리하는 회계 장부에 기록하는 것을 가리키며, 회부(會付)라고도 하였다. 따라서 회록한다는 것은 개인이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가 소유하고 관리한다는 의미가 되었다. 『만기요람(萬機要覽)』 「재용편(財用編)」 〈회록(會錄)〉에는 균역법(均役法)을 시행하는 과정에서 새로 생긴 회록 제도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이때의 회록은 군포(軍布) 2필을 1필로 감해주면서 생긴 재정 손실을 메꾸는 방안의 하나로, 감영(監營)·병영(兵營)·수영(水營)의 여유 자금, 비변사의 군작미(軍作米), 호남(湖南)의 검영미(檢營米) 등에서 일부를 떼어 원금을 마련한 뒤 이를 환곡(還穀)으로 운영하여 받은 모곡(耗穀)의 전부 또는 일부를 회계 장부에 기록해두는 것을 가리킨다. 균역법의 시행에 따라 국가의 수입은 줄어들었으나 기존에 지출하던 비용은 크게 변하지 않았기 때문에 군포의 감면에 따라 부족해진 지출 비용을 국가가 마련해서 대주는 것을 급대(給代)라고 하였는데, 회록에 의해서 마련된 자금도 급대할 비용에 보탰다.❹ 회부(會付) : 금전, 곡물, 물품 등을 국가가 관리하는 회계 장부에 기록하는 것을 가리키며, 회록(會錄)이라고도 하였다. 戊寅五月十一日到付.兵曹爲相考事."節到付花梁僉事牒呈內, '本鎭屬陽城、振威等官居自募水軍名呈議送據, 「兵亂時所授弓箭乙, 生徵, 天下曖昧.」是如呈議送題音內, 「〈經亂之後, 各道各陣軍兵等所授軍器乙, 赴戰時閪失, 則應減, 散亡餘卒以授軍器, 則收捧會錄.〉事, 兵曹行移已到, 非本營擅自蠲減是置. 汝矣等, 若陣上相戰所失軍器, 則在於應減之中, 若失於逃避山谷者, 則兵曹會付軍器乙, 必不減下. 本鎭從實査覈, 粘移次, 兩件牒報向事.」題送是置有亦. 相考爲乎矣, 非僉使等內之事以, 未能詳知是在果. 「大槪軍器所授水軍等亦, 同年十二月二十七日, 進到南陽, 府良中, 犒軍爲如可, 馬兵不意突入同府, 府使被殺時, 所領哨官及軍兵段置, 除除良亦爲被殺.」是如, 鎭下餘存人等, 如出一口爲乎等以, 如此緣由粘牒.'是置有亦. '不小軍器, 自本曹擅減爲難, 處置指揮.'事, 枚擧報備邊司爲有如乎. 節到付備邊司關內, '亂中散失軍物徵納, 似寃, 分揀減下向事.'關是置有良旀. 相考施行向事."崇德三年四月初七日.❶ 失 : 저본에는 원문이 '背'로 되어 있으나, 전후의 문맥에 의거하여 수정하였다.❷ 除 : 저본에는 원문이 누락되어 있으나, 전후의 문맥에 의거하여 보충하였다. 저본에는 원문 '失' 1자가 '背' 1자로 되어 있으나, 전후의 문맥에 의거하여 수정하였다. 저본에는 원문 '除' 1자가 누락되어 있으나, 전후의 문맥에 의거하여 보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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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墓表 艮齋田先生 身任世道 講明性學 於是四方從師者 無慮千百 而31)彬彬多文學之士 惟精毅齋李公 以簡質老成 見稱焉 公歿之四年 其子時澤 謁余以墓文 余平生 不肯作此等文者 懼其爽實 而如公之德則 又何須牢辭也 公諱驥魯 字德夫 瀛州人也 生而岐嶷 莊重寡默 書籍之外 無佗嗜好 孝友之性 出於天植 嘗以歉歲 喪斂未盡情 爲終身憾 間日省基 老亦不弛 族隣之來學者 至誠敎導 不以勞倦 素性眞率 不餙邊幅 人無親疎 接以和顔 然有不正者 疏斥之 有語及時政闕失人事毁短則 不答焉 家貧屢空 亦不稱貸曰 與其逋人財而爲不義之生 無寧守吾本分而死 自世變以來 王綱陵夷 邪說譸張 公以寒後 扁其堂 蓋自期以歲寒松柏也 乙巳 贄謁艮翁 得精毅之錫號 退而集合洙泗言仁諸說 使讀者 參究源委 蓋憂仁說多歧而成編也 座揭聖賢要言 以寓警省 庭列花卉羣芳 以資怡養 其爲學 專用心於内 故不事著作 而其發於吟咏者 多出於愛君憂國忠憤惻恒焉 壬戌 遭師喪 守心制如禮 有爭事功違師訓而 以認稿爲時義者 公與諸友累會 我議事於玄洞齋 且居首於聲討之章 以明師門大義 公可謂不負寒後精毅之號矣 鳴呼 夫君父師 無所逃於天地之閒 而報生以死 人之道也 公旣有孝親憂國之實 而又辨師誣 以嚴衛闢 其視貪利悖義怙終稔惡者 豈可同日而語哉 公之生卒及先系孫錄 已有狀碣之詳 故特擧其本末大體 俾表墓左如此云上章敦牂臨月除夕 完山崔秉心撰 "而"는 정서본이 완성된 후 누군가가 써넣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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挽章 精毅平生實踐形 古家文獻不虛名百年歸後多餘慶 應使蕞蘭萬世榮高興 柳挺一萬疊逢壺毓氣靈 碩人存沒摠由靈可憐石佛一坏土 不埯先生精毅靈高興 柳興善惟一惟精强且毅 心常顧諟篤言行木里間雲高士處 不求聞達自含章光山 金永憲溫溫德性是天眞 行蹟何斯孝且仁手澤存書難讀子 心懷著筆易知人百世高風山水綠 一生固節柏松新曾年落在塵間士 去作今朝上帝臣瑞興 金在鉉人間行樂七旬餘 絃絶琴床淚滿裾風尙寬和公自若 躬修恭儉孰能如裕後克戒文學業 奉先僻置義田廬天堂或問平生事 世債了來莫過余竹山 安鳳輝伎心炳德老於是 晩歲令交上友疇慕得前賢能賦恕 受藏遺訓幸齊修年將大耋云阿攞 行聞一鄕合佼婁忍挩白箋臨紫界 薤歌疎雨暮山陬平康 蔡東夏惟公單訣毅而精 鑽仰臼山期畢生老且嗜書因體泰 貧猶樂道卽心平混中誰識全瑜美 寒後方看古栢貞當日補仁吾敢負 不辭執弗引前程然無憾歸仙路白 雲歸今成乎古歸同門後學 平康 蔡東建40)天步艱難道理窮41) 又喪南國毅齋翁閑聖淑民功未就 遽然齎志黃壤中同門後學 耽羅 高東是師生重誼可相同42) 聞訃當時恨不窮處世無關榮辱事 居家有遺學行風非徒德業傳孫後 自是衣冠守我東一曲哀詞先痛哭 蒼凉遠樹夕暉紅金海 金鍾炳憶昔追陪杖屨遊 鷄山空自白雲留飄然仙敍歸公道 痛矣遐齡感海篈蘭禧蕙情蒙蔭地 金昆玉或繼箕裘靈輀旣駕薤歌訣 往跡悽凉落月秋43)全州 李起胤十室從容穆尙村 鄕隣宗族吊靈魂庭學應無墻面立 家齊曾以道心存壽過古稀仁可必 躬行今是德何論吾東儒業誰能繼 愁雲慘月寂斯門驪陽 陳榮錫齋高精穀隱名聲 訓誥淳淳每有情仁壽延長天定數 道源遠達世眞淸悲雲散合牛眼處 爽魄降昇鶴駕城追憶從師如昨日 輀歌一曲各幽明金海 金秉斗賢士吾鄕有一人 終無好惡善持身簡寬處世宜惇族 誠敬根天克孝親年至八旬仁必壽 心存三樂德爲隣薤露南山松柏下 風悲雲慘淚沾巾族姪 廷基非仁莫壽壽應仁 今日乃知享福人蹤跡疑隨蓬海棹 靈魂必伴赤松隣誘掖盡心誠敦族 送終竭力克思親一幅丹旌歸去路 後生孰不淚盈巾族姪 彩基精毅先生毓海東 獨存今日儒家風心靈常守公明上 事業不離道理中衆孫克肖能承祖 三子惟賢了債翁疑難問答從何受 却使後生泣不窮族姪 碩基蓬海神靈降此仁 生來率性自天眞持心堅固成儒業 處世安間種德隣凄音切切寒琴曲 和氣瀜瀜寶樹春邈矣儀容今永訣 斜陽故路淚沾巾族叔 東述自天降矣亦順天 遐福尤稱八耋年胎厥嘉猷安素履 受其遺訓保靑氈龜頭靈跡雲林下 鶴背仙緣玉宇邊寶樹香蘭永訣路 護從孰不轉澘然族姪 順基忽聞音訃覺斯眞 八十光陰玉洞春明訓家庭書月郞 處仁鄕里士風新功名可惜靑年日 公道其何白髮辰蒼翠森松先壠下 輀歌數曲淚沾巾族姪 坤基精毅攸齋有是賢 安知虎逝遇今年賓筵讓揖儀文備 丈席据衣道鉢傳茁蘭庭下長留馥 鳴瑟堂中持拂絃後生從比誰承誨 感望泉臺淚自漣族姪 賢基白髮平安八十翁 終身不在是非中繞院菊松君子趣 滿庭詩禮古家風萬死常存心穀直 一生何患運窮通爲公今日誰無涕 雲不靈東出祖東族姪 灒基堂堂事業學先賢 德冠鄕隣性本天頂針敎訓終難繼 薤露斜陽涕淚漣族弟 炳梓先生文與德 曾聞海中州宦榮已斷絶 經術老無休能繼先人跡 不懈後學求一夕謦咳遠 木中春色幽千里承訃晩 入門餘恨悠族孫 邦宇公之在世七十七歲 其受氣也 固是厚 其持養 亦不苟 中身以後 親有道存乎中者可謂醇 如著於外者 亦見燦然 此所以壽躋隆耋 又爲鄕黨之所稱頌 天以淸貧 享其一生 而庸玉其成 又錫以嘉子秀孫 不匱其後 玄宰之厚 於公異乎人者 遠矣 嗚呼 吾於公 非特族誼之親 其受薰炙 亦多 敢述數行 以勖引紼族孫 鍾貴可惜文章一代師 忽聞襄禮使人悲孤魂瀛海雲歸處 往跡禴齋月上時子姪滿堂傳後事 圖書掛壁遠前期丹旌遙指泉臺路 涕淚漣漣日影遲族孫 鍾澤憶昔先生尙德仁 應知仙窟降情神寬心鍾地能敦族 眞性率天克孝親餘壽終敎賢閤享 遺訓盡屬渾家陳如斯處世如斯逝 寶樹庭前萬歲春靑松 沈宜奎天奪毅翁道益窮 殆如昏夜老須逢身任繼開功未遂 空齎遺恨九原中族孫 仁洙聞道平生性率眞 艮門高足乃如人精徵經旨須深頤 毅訥文辭庶近仁床瑟偕嗚期百年 庭蘭交翠帶三春村閭敎訓鄕黨譽 追慕當年若見親耽津 安東觀純古匪今精毅翁 惟中執得一心公仁從實地開安宅 孝是根天養美風胡爾奪斯君子速 飄然遊彼帝鄕同後生何處尋紗帳 哀淚春阡恨未窮同門後學 商山 金秉植 이 만사의 내용에도 수정 흔적이 많다. 추가 확인이 필요할 듯하다. 정서본을 보면 "難"과 "道" 사이에 "吾"를 넣으라고 되어 있다. 하지만 이는 오류임이 분명하다. 그렇게 하면 글자의 수도 맞지 않을 뿐만 아니라 文脈이 통하지 않기 때문이다. 정서본을 보면 "師生重誼可"에 대해 "刪"이라는 표식이 있다. 지우라는 의미일텐데 그러면 글자 수가 맞지 않는다. 따라서 일단 지우지 않았다. 이 만사에 대해 "刪"이라는 표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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讀精毅齋遺稿 有感 漢植嘗謂 爲詩與爲文 皆在知要而務實 何如矣 今讀精毅齋李先生遺稿 誠所謂知要而務實者也 先生以忠厚慷慨之資 濟仁義道德之學 發於詩 著於文者 多愛國憂道之語 若使後之人讀此稿而有所感發與起焉則 有功於斯文 世敎者 豈尠少也哉 於是乎 書以寓景仰之思云爾同門後學 全州 崔漢植 謹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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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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實記 精毅齋李處士實記44)洛婺遠而吾道東 栗翁 講明性理之學 尤翁 闡明麟經大義 艮齋田先生 繼栗尤講學明義於旺嶝繼華之間 從學之士 千百其多 而飮河之腹 各充洪鍾之鳴 隨叩其充足 大叩者 處士李公精毅齋 其一也 余方爲世矢的 抱經待盡於扶風山下 公胤時澤 過余曰 先考講修之德之行 莫不散在於族姪 陽山鍾坤所撰行錄45) 後滄金友澤述所撰行狀 而遠齋李公爲之46)撰碣銘 欽齋崔丈撰墓表 晦峯高公述墓誌 然余素乏記性 且才經喪威 十忘八九 不得盡載 便作千古之恨吾言之予記之 作實記一通 俾後裔冀有參考 余辭以不敢 督之不已 烏敢終辭 公諱驥魯 字德夫 其先瀛州47)人 以勝國文憲公諱敬祖爲始祖 本朝執義諱伯瞻 光廟改玉 棄官自靖48) 諱克守號小心齋 師事尤翁 學識著名 是中葉顯祖 諱崇 諱鎭燁 高與曾祖 諱萬綠 號桐塢 以孝命旌 考諱東益 號直齋 有至行著于世 妣扶寧金奉珏女 有四德譽 哲廟辛亥五月三日 擧公于扶安郡乾先面木上里 生而顔如白玉 聲若洪鍾 脩幹豊額 眼爍背直 端重雅飭 異凡兒 稍長 就三從叔山塢公東顯學 深寬寡黙 書籍之外 舞他嗜好 公深許之 復就山塢胤南岡公泰魯學 公素愛質美性敏 誘掖 激勵不已 文義日就 辭章富瞻 有欲罷不能之微義49) 性孝根天 事無大小 必先意承順 有不安節 煎藥煉粥 必身親任 彈力竭誠 而不委婢僕 沐浴拜廟 以祈永年 與二兄 友悌篤至 凡有異味 不進則雖小50) 不先入口 非有外事 日侍坐子舍 或講磨道理 或討論古今家國興亡俗尙美惡 或誦諷經子書數篇 以與起向善懲惡之心 丙寅 遭內艱 躃踊哭泣 襲歛51)饋奠 一遵禮制 三年食素 柴毁骨立 過祥廬墓 終不服闇 戊子 丁外憂時 値大無 勢且艱難 哀慼雖有餘 送終之禮 未免儉略 而以是爲終身恨 至老衰 鮮御酒肉 凡當忌辰 沐浴遷坐 必致如在之誠 考妣墓 曾在百里之地 恐他日省埽之不虔 移于先塋下 日必52)拜省 不以雨雪老衰廢 設私塾 敎族子鄕秀 不問敏鈍 因其村而誠心導率 以爲己任而不憚勞苦 乙已 艮翁痛宗國淪喪 華夏改顔 將乘桴入西 溟駕暫住蓬萊山下 遂具摯贄53) 納拜以爲依歸 且正所學 先生憂厚善有餘 而明健不足 僅守氣質之偏而未能進於義理之正也 以精毅 名其講學之室 蓋人纔有一毫鹿疏之心 便察理未明 故要精密 纔有一毫懦弱底心便守道未確 故要剛毅 是乃嚴師敎人之過慮也 公以爲余 自早年不知有爲己之學 荏苒蹉過 晩而從學 恐心鹿力懦 不能硏幾而致極 擔重而致遠 遂劂精毅 揭壁上 日坐其下 時時舊勵曰 聖賢敎人 雖千言萬語 其用功54) 必自明 善誠身始而其要在精毅 余雖老昏 刻若做去 可入聖門 又曰 吾年多精短 不宜涉躐群書 只宜從切要處下手 而切要者 其論語乎 遂將論語一部 尊閣丌上 日常愛讀首尾二十篇 如誦己言 而惟於仁說 益致意焉 蓋伊時仁說多岐 先生每深慮焉故耳 於是集合孔孟言仁諸說 合爲一篇 名曰 洙泗言仁錄 使讀者知所自究而不事紛爭 蓋倣南軒舊轍而仍以爲名者也 或疑聖賢言仁處 固是仁 而其餘許多說話 莫非仁則 今此之錄 不其近於擧一而廢百耶 曰子之疑 誠然然 仁有體用而做工當自 切要處 始顧此 老昏與其泛及餘說而無得 不若專究切要處有得之爲愈也 故有是錄 然使學者 求仁止於此而已 而不復致博於其餘則 未免擧一廢百之累 而非吾所集之意也 自宗國運否 外夷憑陵 揭寒後扁其堂 以寓微意 卽夫子所謂 歲寒後凋之義 而寒松老栢 未嘗摧折於大冬酷雪者 有似乎 君子之不變 素履55)於患亂顚沛之中 故取之列書聖賢格言至論 附于座右 以爲警省之資 作砌庭除 列植群芳 以爲玩意適情之資 卽昔賢銘訂頑觀庭草之意也 嫉世俗謀利之刻酷 憫殘民保生之艱難 每對老少 擧仁義道德之說 反覆曉諭 卽仁人君子回淳反朴之志也 常戒諸子曰 人之處世 自有無限好道理 須是從勤謹中做去 當躋古賢堂室 家甚貧窶 不許家人借貸曰 與其逋人財而爲不義之生 不若守吾本分而死 衣服飮食 先須節儉 量入以爲出 或絶火至屢 頓堅坐看書 人不見其飢容 性賦眞率 不事邊幅 平居喜怒不形56) 無疾言遽色 不問親疎貴賤 接之以和顔有語 及時政得失人物長短者 嘿無酬答 至若尊攘衛闢之辨 必一刀兩殷 而少不容貸 且其學問思辨 專用心於內 故著於文辭者小 而文則不加藻餙 精簡雅直 有上古之味 詩則 隨其感觸而發者 皆愛國憂道忠憤惻恒之辭 而或慘而爲悲風凄雨 或舒而爲春花秋月 有離騷之味 其亦衰世之意歟 丙寅臘月 示憊 翌年正月望 潻祟命 辨喪具 念五日夜半 呼家人 問曰 今日 何日 曰 二十五日戌時 曰 吾命 休矣 屛婦人 去舊衣 著新衣 進藥水悠然而逝 距其生七十有七 葬于本郡下西面書堂洞先塋面癸57)原 從遺命也 前配義城金璜載女 早卒無育 繼配高興柳容58)奎女 克配君子 育三男三女 時澤 時寬 時{金+憲} 過房男也 適義城金鏞采 淳昌薛載澤 延安李東寧 女也 鍾珍 鍾熺 元鍾 長房出 鍾奎 平康蔡奎鎬 水原金絅達妻 次房男女 鍾培 鍾玹 祥 鍾黙 嫁善山金東吉者 過房男女 升59)洛 臻洛 宗60)洛 金婿出啓錄 薜婿出 嗚呼 公以淳古淸厚之資 有外柔內剛之質 以闇然自修之工 兼到老彌篤之誠 本之以孝悌 補之以經史 淳古而淸厚 故每日淸晨 盥櫛衣冠 歛容端坐 對書潛玩 威儀棣棣 望之自有可近 不可犯之思 外柔而內剛 故接人以和顔 而無疾言遽色 然至若闢異端攘夷狄斥邪 說明辨痛 絶不遺餘力 闇然自修 故一部論語 如誦己言 而辨論文義 如河決竹破 而無餘蘊然 至若著述 不屑屑於發揮 至老而彌篤 故早襲庭訓 晩師艮翁 以誠正修治 迢凡做聖爲自期 而不知老之衰焉 本之以61)孝悌 故養生以敬 而定省溫凊 靡不用極 而志體俱養 敬如嚴父 保如幼兒 而怡怡如也 補之以經史 故學而助其行 行而驗其學 行合體經言 輒證書而著於咳唾之餘者 有數十篇 其論敬義 兩進曰 內而立心 正而直之 然後外而制事 敏而方之 此所謂敬以直內義 以方外也 是乃終身事業 非一朝一夕而可到 論仁曰 仁 是人心之全德 純然天理 而無一毫人欲之雜者也 爲仁而至無一息間斷 無一物不存兼該 萬善而眼前道理 無非這氣 脈則聖矣 言本然性曰 性是天命 而卽心之理仁義禮智信是也 言氣質性曰 性本純粹至善而未嘗有惡 然但爲氣稟所拘 物欲所蔽則 有時而不善 然惟其本體之善 亦不改頭幻面 故君子學問思辨 明其固有之善 而變革其氣稟物欲則 可復其初 釋心曰 心卽天之所以與我而者 我得以具衆理應萬事者也 又曰 心之爲物 最虛最靈 神明不測 而常爲一身之主 提撕萬事之綱 不可頃刻而不存 然一不自覺而馳騖飛揚 以徇物欲於軀殼之外則 一身無主 萬事無綱 雖其俯仰顧眄之間 自不覺其身之所在 故孟子有操存求放之訓 學者 必以敬爲主 講究主一無適 整齊嚴肅之義 收歛放失惺惺昏昩之要 革舊染 去拘蔽則 其心 庶幾至善 論時義出處曰 夫子曰 天下有道則見 無道則隱 而篤信好學 守死善道 若吾輩者 只是一介讀書士 而至於撥亂救世 非惟才力不足 亦勢無所乘 只有忍痛舍寃 抱經林下 以身殉道而已 詩多於文 而令人讀之向善懲惡之義 油然而生 自不覺消融其汙濁之念 脫却其塵累之態 入於間靜淸高之域 君子不屑屑之敎 其如斯夫 艮翁所許 父子讀書 書聲盈屋 世務不到 自有眞趣 不覺神往 遠齋李公62)所謂 襟懷淡間 志尙邃古 資以經籍 而繹其實際 晩師艮翁 而正其趨向 菀然爲儒門宿德 淡淡乎慕人之勢利 悠悠然不與世而營逐 惟知在我者之可求 老不休而彌篤 自鞱其美 而晦養見畸於世 而勉加修飭端潔之器宇 使麤梗者 自戢淵冰之趣 非淺劣者 所測 晦峯高公所謂 身任經籍心不解63) 開蒙峨冠博帶 實古人之風儀 簡言質行 非世人之儔擬 欽齋崔丈所謂 素性眞率 不飾邊幅 人無親疎 接以和顔 然有不正者 疎斥之不容 金後滄所謂 淳古淸厚 外柔內剛 有闇然自修 到老罙篤之工 李陽山所謂 志尙高邁 講學有序 律己有法 出言有章 畏利而趨義 尊華而攘夷 有補於斯文 世道大矣者 皆實際語而不阿其所私也 故並書之序次如右 使其64)子孫門人 知希賢希聖 必自公言行 始焉歲閼逢涒灘重坤興龍節 耽羅 高東是 謹撰 이 실기는 원래 精毅齋遺稿의 정서본에 있던 글이 아니었다. 별도로 있던 것을, 정의재유고의 정서본이 완성된 후 이를 포함시킨 것이었다. 하지만 내용으로 보면 이 실기는 당연히 정의재유고에 들어와야 했다. 또 당초에는 그럴 계획이었으리라 짐작된다. 다만 정서 과정에서 누락되었다가 나중에 이를 알고 추가로 포함시킨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家狀"으로 썼다가 이를 "行錄"으로 고친 흔적이 있다. "之"는 정서본이 완성된 후 누군가가 써넣은 것이다. 원래는 "高阜"로 썼지만 정서본이 완성된 후 "瀛州"로 고친 흔적이 있다. "棄官"은 정서본이 완성된 후 누군가가 써넣은 것이다. "義"는 정서본이 완성된 후 누군가가 써넣은 것이다. "雖小"는 정서본이 완성된 후 누군가가 써넣은 것이다. "歛"은 정서본이 완성된 후 누군가가 써넣은 것이다. "必"은 정서본이 완성된 후 누군가가 써넣은 것이다. "贄"는 정서본이 완성된 후 누군가가 써넣은 것이다. "功"은 정서본이 완성된 후 누군가가 써넣은 것이다. "履"는 정서본이 완성된 후 누군가가 써넣은 것이다. "不形"은 정서본이 완성된 후 누군가가 써넣은 것이다. "子"로 썼다가 지운 후 다시 쓴 흔적이 있다. 그러니까 "癸"와 "子"가 모두 나오고 있는 셈이다. "煥"으로 썼던 것을 정서본이 완성된 후에 고친 것이다. "鼎"을 고쳐 쓴 것이다. "元"을 고쳐 쓴 것이다. "以"는 정서본이 완성된 후 누군가가 써넣은 것이다. "李公"은 정서본이 완성된 후 누군가가 써넣은 것이다. "經籍心不解"는 정서본이 완성된 후 누군가가 써넣은 것이다. "其"는 정서본이 완성된 후 누군가가 써넣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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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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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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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祭文 維歲次 戊辰正月壬戌朔十九日庚辰 同門李憙璡 謹以脯果 告于精毅齋李公靈筵 嗚呼 公之聲音絶於耳 儀形邈乎目 歲倏忽其一周 日月若是其疾促 余寄在于斯世 誰與談討 誰與遊息 竊惟公淡淡乎不慕人之勢利 悠悠然不與世而營逐 惟知在我者之可求 老不休而彌篤 自鞱其美 而益密晦養 見踦於世而勉加修飭端潔之器宇 使麤梗者自戢 淵冰之趣味 非淺劣者所測 今旣與形而俱化 何處覿其彷彿 公雖無意於塵寰 其奈世道之岌岌 悶余獨抱殷憂 助玄宰急此陽復 告此衷丹 靈其昭格 嗚呼 尙饗維歲次 戊辰正月壬戌朔二十四日乙酉 族孫鍾坤 敢昭告于精毅齋處士象生之靈筵曰 嗚呼 人之生也 有爲邦國之棟樑者 有爲士林之領袖者 有爲一門之矜式者 隨其成就之高下 有稱道之優劣焉 故人之死也 有邦國之不幸者 有士林之愛惜者 有一門之慟歎者 嗟 吾先生 德行學識 能承六世之文獻 其於承先裕後之功 實爲一門之矜式 就正有道 守死善道 其於衛正闢邪之功 實有辭於士林 假使試用於世則 其於樹風立俗之功 或有補於邦國矣 然士之用行舍藏 有時焉 有命焉 豈以爵祿之不及 有損益於先生哉 况且享年八耋 是其壽 仁之一驗 而爵祿 蓋非亂邦之所安也則 今於先生之歿 復有何憾 然在後生 不無遺憾 鍾坤受學于門下者 十餘年矣 一無笞楚之施 亦無叱怒之責 諄諄然敎導 惓惓然開導 以若樗櫟之不材 不能成器 是爲入髓之所恨 以家學之不墜 丁寧囑託 至於臨終 猶不已 而以若滅裂之淺見 不能繼業 亦爲刻骨之攸憾 屬纊如昨 祥朞在明 聲容永隔 幽明乃分 是爲臨時之所感 謹具酒果 敢告衷情 庶幾格思 鑑此衷情 嗚呼 哀哉 尙饗維歲次 己巳正月丙戌朔二十三日戊申 族孫鍾坤 謹以酒果 再拜 哭告于精毅齋先生之靈筵曰 嗚呼 養子而後 知父母劬勞之恩 敎人而後 知師傅敎導之功 小子 以十策一步之質 九歲始受訓于門下 至于十年之久 諄諄然眷眷然敎誘 未嘗有笞楚之嚴叱咤之誚 於今 始覺涵養之有素 敎導之有術也 小子 雖不能盡弟子之職 堪承敎導之萬一 然於其化導之妙 陶鑄之恩 敢不服膺而慕仰乎 吾家 以小心齋以來 世襲文獻 爲人稱藉 而先生常恨其不能繼 然以若先生之學而有此者 以其謙虛自處而然也 以賤見思之 先生志尙之高邁 講學之有序 律己之有法 出言之有章 畏利而趨義 尊華而攘夷 其有功於斯文 有補於世道者 豈可謂承先業而已哉 實有辭於後日矣 但先生歿後 靑氈舊業 有誰而復能紹述耶 平日屢託於不肖 然志不尙而和於流俗 學不進而畫於刻圈 况賤齒五旬 百病交侵 未知亦將以模樣度了一生 而受他日泉臺之責否 是爲小子區區之恨 庶其黙佑 使此賤疾 快爲蘚完 使之永年 則學之進不進 業之繼不繼 惟在小子 是爲區區之望 庶幾遂願否 嗚呼 哀哉 尙饗維歲次 己巳正月丙戌朔九日甲午 同門晩生平康蔡東建 謹具薄醪 蕪詞哭告于精毅齋李公象設之筵曰 嗚呼 愷悌君子 淳古處士 近仁流亞 致道淸髓 天性厚善 師門稱美65) 精毅命扁 深厥意旨66) 精爲見道 毅是進德 慥慥白首 老而好學67) 遠老接隣 輔益親切 不知年數 已到八耋 頤養有素 需用愈密68) 考經依傳 會萃仁說69) 意在精耗 惟從要約 又觀居庭 孝友爲律70) 蒔花培草 趣味雅潔 痛彼戎世71) 綱常斁絶72) 寒後揭隅 特勵士節73) 信乎我公 允和不流 後人考德 由斯可求 如我顓蒙74) 猶知好賢 况在同門 遊從多年 謬被德愛75) 規箴殷宣 風潮浪裏 庶幾保全76) 或誦曩哲 又示言志 顧甚顓蒙 豈無勉圖 心期千載 脚立遠途 公今厭世77) 翛然乘雲 拜師淸都 可續誾誾78) 吾門紛競79) 冥佑是勤80) 我惟失誨 悵私罔云 誠通神明 靈或冥相 又望龥帝 挽回道喪 駒光不留 奄周二朞 撤象靡遐81) 悵私岡云82) 數文登哭 庶格玆尊83) 意雖無窮 辭不能施 嗚呼哀哉 尙饗 "師稱珍重"을 이렇게 고친 흔적이 있다. "夙夜祗奉"을 이렇게 고친 흔적이 있다. "常悔晩學"을 이렇게 고친 흔적이 있다. "體康用適"을 이렇게 고친 흔적이 있다. "編稡仁說"을 이렇게 고친 흔적이 있다. "孝友家法"을 이렇게 고친 흔적이 있다. "痛彼世亂"을 이렇게 고친 흔적이 있다. "綱墜怪作"을 이렇게 고친 흔적이 있다. "特勵堅節"을 이렇게 고친 흔적이 있다 "如我傝{宂+辱}"을 이렇게 고친 흔적이 있다 "幸蒙見愛"를 이렇게 고친 흔적이 있다. "規箴"부터 "보전"까지는 원 문장을 지우고 새로 쓴 흔적이 있다. "公厭濁世"를 이렇게 고친 흔적이 있다. "相樂無垠"을 이렇게 고친 흔적이 있다. "門戶紛競"을 이렇게 고친 흔적이 있다. "亦論慇懃"을 이렇게 고친 흔적이 있다. "撤床靡遐"를 이렇게 고친 흔적이 있다. "悲復何涯"를 이렇게 고친 흔적이 있다. "厄"을 "尊"을 고친 흔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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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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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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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四月三日風乎瓮巖山頂 快披胸襟立暮天 蒼茫水色半空連良辰適値淸和日 勝賞何如少壯年依斗北望多嶺海 背山西看隔雲烟坐陰招鶴歸笻晩 倦踏斜陽影在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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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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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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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부

1637년 9월 18일 장계(狀啓) 崇德二年九月十八日 狀啓 022 경기수군절도사 겸 삼도통어사 나덕헌이 인조에게 보낸 장계(狀啓): 경기수영(京畿水營)과 5곳 진보(鎭堡) 수군의 생존 숫자와 탈이 생긴 숫자 등을 정리한 책자를 올려보냄.〈피봉〉 승정원(承政院)이 개봉할 것."본영(本營)에 소속된 5곳의 진보(鎭堡)와 각 고을로부터 먼저 받았던 수군의 생존 여부를 정리한 책자의 숫자는 비변사(備邊司)로 올려보냈다고 급히 보고하였습니다.57) 추후에 도착한 생존 수군과 사망 수군의 수효도 모두 받았으므로 본영 및 5곳 진보의 원래 군병 중 현재 남아있는 숫자 및 사로잡혀간 사람, 살해된 사람, 도망하거나 죽은 사람 등 잡탈(雜頉)의 숫자를 모두 분류하여 정리한 책자를 비변사로 다시 올려보냈습니다. 이러한 연유를 급히 보고합니다. 잘 아뢰어 주시기 바랍니다."숭덕(崇德) 2년(1637, 인조 15) 9월 18일. 承政院開拆."本營所屬五鎭堡·各邑水軍存沒成冊先捧數段, 備邊司以上送事, 已爲馳啓爲白有如乎. 追乎到付存沒數畢捧是白乎等以, 本營及五堡元軍時存及被擄、被殺、逃故雜頉數, 幷以秩秩成冊, 備邊司以更良上送, 緣由馳啓爲白臥乎事是良厼. 詮次善啓向敎是事."崇德二年九月十八日. '004 나덕헌의 장계'와 '006 나덕헌의 첩정'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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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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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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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부

1637년 9월 22일 장계(狀啓) 崇德二年九月二十二日 狀啓 023 경기수군절도사 겸 삼도통어사 나덕헌이 인조에게 보낸 장계(狀啓): 철곶[鐵串]의 진보(鎭堡)를 설치하는 일이 지연되고 있으므로 비변사에서 대책을 마련하여 지시해줄 것.〈피봉〉 승정원(承政院)이 개봉할 것."전에 도착한 비변사가 회계(回啓) 결과를 통지한 관문(關文) 내용을 요약하면,'삼도통어사(三道統禦使)의 서장(書狀)에 아뢰기를,「초지(草芝)와 제물(濟物) 두 곳의 옛 진보(鎭堡)는 철거하였으나 철곶[鐵串]의 새로운 진보는 설치되지 않아 철곶첨사[鐵串僉使]가 백성의 집에 들어가서 거처하고 있으니 오래도록 유지할 수 있는 방도가 너무나 아닙니다.」58)라고 하였습니다. 경기수사(京畿水使)가 직접 순행하면서 진보를 설치할 곳의 형세를 살펴보고 상세히 주상께 보고하게 한 뒤 그에 의거하여 처리하도록 하소서.'59)라고 하였습니다. 신이 비변사의 관문에 의거하여 즉시 순행하면서 살펴야 할 일이었으나, 부임한 즉시 본영(本營)의 전선(戰船),병선(兵船), 사후선(伺候船) 등을 제작하는 공사가 거창해서 이제야 일을 마쳤습니다. 더욱이 칙사(勅使)가 행차하는 시기와 겹쳐서 본부(本府)를 광주(廣州) 대신 부칙사(副勅使)를 접대할 곳으로 바꾸어 정하였으므로, 역참(驛站)의 각종 휘장(揮帳)과 기물(器物), 숙소 건물의 수리가 몹시 긴요하고 다급하여 다방면으로 애써 마련하고 밤낮없이 준비해서 연속 역참으로 실어 보내느라 거의 틈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해당 철곶진[鐵串鎭]을 살펴보는 일은 이달 20일에서야 신이 직접 철곶에 도착하여 철곶첨사를 데리고서 살펴보았는데, 철곶첨사가 진보를 설치할만 하다고 하였습니다. 장신(張紳)이 강화유수(江華留守)로 있을 때 전(前) 경기수사 신(臣) 신경진(申景珍)과 함께 만나 적간(擲奸)한 적이 있었는데, 주상의 결정을 받은 곳은 철곶첨사가 현재 백성의 집에 들어가서 거처하고 있는 곳이고, 이른바 진보를 설치하기에 합당하다고 한 곳은 모두 백성의 전답이었습니다.60) 따라서 국가에서 대가를 지급하고 매입한 뒤에야 진보를 설치할 수 있었으므로 그러한 연유를, 백성의 전답 숫자를 조목조목 열거한 책자와 함께 비변사로 올려보냈습니다. 애당초 초지와 제물 두 진포(鎭浦)를 합쳐서 하나의 진보로 설치하도록 한 사안에 대해 장신이 급히 보고한 것에 의거하여 병조가 복계(覆啓)한 문서를 살펴보았는데, 그 내용을 요약하면,'이번에 두 옛 진포를 철거하고 새로운 진포를 설치하는 공사는 매우 중대하니 반드시 시기를 정해서 완료하도록 분부하여 재촉해서 거행한 뒤에야 추워지기 전에 공사를 완료할 수 있는 상황입니다. 조정의 분부에 따라 신속히 철거하여 옮겨 설치하라고 시급히 통지하소서.'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해당 제물과 초지 두 진포의 관아 건물을 즉시 철거하여 진보를 옮겨 설치할 철곶으로 옮겨 두었으나, 난리를 겪던 중에 해당 목재와 기와를 일부는 잃어버리고 나머지는 현재 백성의 전답에 방치해두고 있습니다. 애당초 두 진보를 철거하고 합쳐서 철곶을 만들고 호칭을 승격시켰던 일은 그럴만한 취지가 있는 것인데, 시일을 지연시키는 바람에 진보 설치할 곳을 여태까지 마무리하지 못해서 첨사가 현재 백성의 집을 빌려서 거처하고 있으니 타당치 못한 일입니다. 묘당(廟堂)에서 신속히 처리하도록 해주소서. 차례대로 잘 아뢰어 주시기 바랍니다."숭덕(崇德) 2년(1637, 인조 15) 9월 22일.▶ 어휘 해설 ◀❶ 적간(擲奸) : 관원의 근무 상태나 특정 장소의 상황 등을 살펴서 문제점을 적발하는 것을 가리킨다. 承政院開拆."前矣到付備邊司回啓關內節該, '統禦使書狀內, 「草芝、濟物舊鎭旣撤, 新堡未設, 入接民家, 殊非可久之道.」 水使親爲巡歷, 審其設堡形勢, 詳細啓聞, 以憑處置向事.'回啓關是白有亦. 臣依備局移文, 卽爲看審事是白乎矣, 到任卽時, 本營戰、兵、伺候船等功役浩大, 今始畢役. 而又値勅使之行, 本府乙, 廣州代移定副天使支待是白乎等以, 站上各樣供帳·器俱、館宇修理, 萬分緊急, 多般拮据, 罔夜措置, 連續輸送站上乙仍于, 殆無暇日. 同鐵串鎭看審事乙, 今月二十日沙, 臣親到鐵串, 僉使率良遣看審, 可以爲設鎭是如. 張紳留守時, 與前水使臣申景珍眼同擲奸, 定奪處, 則僉使時方借入民家, 而所謂可合設鎭之處, 皆是民田. 自公家給價買得, 然後設鎭緣由乙, 備邊司以, 民田庫數條列成冊, 上送爲白在果. 考諸當初草芝、濟物兩浦以爲一鎭張紳馳報據該曹覆啓公事節該, '今此兩浦撤舊營新之役, 極爲重大, 必須刻日分付催促擧行, 然後未凍之前, 勢可完役. 依朝廷分付, 急速撤毁移設之意, 星火知委.'亦爲白有等以. 同濟物、草芝兩浦公廨乙, 卽時撤毁, 移置於鐵串移鎭處, 亂離中, 同材瓦乙, 除除良散失, 方爲棄置民田爲白有臥乎所. 當初撤破兩鎭合爲鐵串陞號, 其意有在, 而遷延時日, 設鎭處乙, 迄未究竟, 僉使時方借入民家, 事未妥當. 令廟堂急速處置爲白只爲. 詮次善啓云云."崇德二年九月二十二日. '007 나덕헌의 장계' 참조. '013 비변사의 관문' 참조. 장신(張紳)은 장유(張維)의 아우로, 인조 14년(1636, 인조 14) 3월 9일에 강화유수(江華留守)에 제수되었으나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강화를 지키지 못하고 함락당한 책임을 물어 이듬해 3월에 사사(賜死)되었다. 『승정원일기』를 비롯한 관찬사료에는 장신이 철곶[鐵串]의 설치와 관련하여 올린 장계와 비변사의 회계(回啓) 등은 보이지 않는다. 『승정원일기』 인조 6년 5월 16일, 14년 3월 9일, 15년 2월 22일, 3월 18·20일; 『인조실록』 15년 1월 22일(임술), 2월 22일(임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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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7년 9월 25일 관문(關文) 崇德二年九月二十五日 關文 025 비변사가 경기수군절도사 겸 삼도통어사 나덕헌에게 보낸 관문(關文): 교동부(喬桐府)의 육군(陸軍) 48호(戶)를 수군(水軍)이 복구될 때까지만 상번(上番)을 면제하고 선박 제작하는 일을 도와주게 할 것.정축년(1637, 인조 15) 9월 29일 도착.비변사가 소식을 알리는 일 때문에 보낸다."이번에 재가하신 이달 18일에 성첩(成貼)한 본영(本營)의 서장(書狀) 내용을 요약하면,'난리를 겪고 난 뒤에 본영(本營)의 수군은 사로잡혀가기도 하고 살해되기도 하고 도망하거나 사망하기도 하였습니다. 본부(本府)의 육군(陸軍) 48호(戶)는 모두 바다의 섬에서 수산물을 채취하여 생계를 유지하는 사람들로 전선(戰船)이 정박해있는 곳에 거주하고 있으니, 이들 육군으로 수군이 복구될 때까지만 상번(上番)을 면제해주고 선박 제작하는 일을 도와주게 하는 사안을62) 묘당(廟堂)에서 참작하여 처리하게 해주소서.'63)라고 하였다. 그 서장에 의거하여 본사(本司)가 올린 계목(啓目)에 아뢰기를,'재가받은 문서를 첨부하였습니다. 본사가 예전에 전(前) 경기수사(京畿水使) 변흡(邊潝)의 장계(狀啓)로 인하여 본부의 속오육군(束伍陸軍)과 출무(出武) 등을 수군에 전적으로 소속시켜 징발하여 쓰게 하는 일에 대해 주상께 여쭈어 결정하였습니다. 그런데 육군이 옛 규례를 그대로 답습한 채 해마다 상번시키고 있으니 이는 주상께 여쭈어 결정한 본래의 취지가 아닙니다. 현재 선박을 정리하는 공사가 한창 성대하게 진행되고 있으며, 게다가 48호의 육군은 그다지 많은 숫자도 아니고 모두 수산물을 채취하여 생계를 유지하는 사람으로 전선이 정박해있는 부근에 거주하고 있으니, 장계에서 아뢴 대로 수군이 복구될 때까지만 상번을 면제하고 선박을 제작하는 일을 도와주게 하는 것이 편리하고 합당할 듯합니다. 이러한 내용으로 병조에도 아울러 분부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고 하니, 숭덕(崇德) 2년(1637, 인조 15) 9월 24일에 좌부승지(左副承旨) 신(臣) 김휼(金霱)이 담당하여,'「아뢴 대로 윤허한다.」라고 재가받았다.'라고 판부(判付)하였다. 판부의 내용을 잘 살펴서 시행하라."숭덕 2년 9월 25일.▶ 어휘 해설 ◀❶ 성첩(成貼) : 문서를 첩자(帖子) 형식으로 만드는 것을 가리킨다. 첩자란 일정한 간격으로 접어서 만든 문서를 가리킨다. 성첩하는 방식은 두 가지가 있었다. 하나는 병풍처럼 두 쪽씩 서로 마주 볼 수 있게 일정한 간격으로 접는 방식이고, 또 하나는 문서의 뒷부분부터 일정한 간격으로 두루마리처럼 안쪽으로 감아가며 접는 방식이다. 전자를 작첩(作帖)이라 하였고, 후자를 주첩(周帖)이라 하였다. 계본(啓本), 계목(啓目), 차자(箚子), 정사(呈辭), 전문(箋文), 상언(上言), 단자(單子) 등은 작첩 형식으로 성첩하였고, 초기(草記), 장계(狀啓), 관문(關文), 첩정(牒呈) 등은 주첩 형식으로 성첩하였다. 丁丑九月二十九日到付備邊司爲知音事."節啓下敎本月十八日成貼本營書狀內節該, '經亂之後, 本營水軍被擄、被殺、逃故. 本府陸軍四十八戶, 皆是海島水業之人以, 居在戰船所泊之處, 若以此陸軍, 限水軍蘇復間, 使之除上番, 添助舟楫事, 令廟堂參酌處置.'事據司啓目, '粘連啓下是白有亦. 本司曾因前水使邊潝狀啓, 本府束伍陸軍、出武等, 專屬水營, 使之調用事, 已經定奪, 而陸軍, 因循舊例, 每年上番, 已非定奪本意是白在果. 目今整理船艦, 其役方殷, 且四十八戶之軍, 不至甚多, 而皆以爲水業之人, 居在戰船近處, 則依狀啓限水軍蘇復間, 除上番添助舟楫役, 似爲便當. 以此意, 該曹良中, 幷爲分付, 何如?' 崇德二年九月二十四日, 左副承旨臣金霱次知, '啓, 「依允.」'敎事是去有等以. 敎旨內事意, 奉審施行向事."崇德二年九月二十五日.❶ 助舟楫 : 저본에는 원문이 결락되어 판독할 수 없으나, '021 나덕헌의 장계'에 의거하여 보충하였다. 저본에는 원문 '助舟楫' 3자가 결락되어 판독할 수 없으나, '021 나덕헌의 장계'에 의거하여 보충하였다. '021 나덕헌의 장계'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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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본(啓本) 啓本 062 경기수군절도사 겸 삼도통어사 나덕헌이 인조에게 보낸 계본(啓本): 각 진포(鎭浦)의 첨절제사(僉節制使)와 만호(萬戶) 등에 대한 올해 춘하등포폄(春夏等褒貶)의 등제(等第).경기수군절도사 겸 삼도통어사 신(臣) 나덕헌이 포폄(褒貶) 결과를 보고하는 일 때문에 삼가 올립니다."도내 각 진포(鎭浦)의 첨절제사(僉節制使)와 만호(萬戶) 등에 대한 올해 춘하등포폄(春夏等褒貶)을 관찰사 겸 순찰사 신 김남중(金南重)과 함께 논의하여 등제(等第)하고 삼가 격식을 갖추어 보고합니다."화량진수군첨절제사(花梁鎭水軍僉節制使) 이인노(李仁老) : 상(上).덕포진수군첨절제사(德浦鎭水軍僉節制使) 최준천(崔峻天) : 상(上).철곶진수군첨절제사[鐵串鎭水軍僉節制使] 박한남(朴翰男) : 상(上).정포수군만호(井浦水軍萬戶) 정연(鄭?) : 상(上).영종포수군만호(永宗浦水軍萬戶) 최형립(崔亨立) : 상(上). 京畿水軍節度使兼三道統禦使臣羅謹啓爲褒貶事."道內各鎭浦僉節制使、萬戶等矣今春夏等褒貶乙, 觀察使兼巡察使臣金南重同議等第, 謹具啓聞."花梁鎭水軍僉節制使李仁老 : 上.德浦鎭水軍僉節制使崔峻天 : 上.鐵串鎭水軍僉節制使朴翰男 : 上.井浦水軍萬戶鄭? : 上.永宗浦水軍萬戶崔亨立 : 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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心字釋義 謹按此心 包得五行之妙 而五常之德 具焉 何以言之 心即天之所以與我者 而我得而具衆理應萬事者也 蓋嘗論之 太極動而生陽 動極而靜 靜而生陰 靜極而復動 一動一靜 傷變陰合 而水生木 木生火 火生土 土生金 金生水 而水火木金土 質具於地 而氣行於天 化生萬物 此乃天地之心也 而萬物之中 惟人也 得其秀而生 以爲心而性 即心所具之理也 由此觀之 天地之太極 即吾之性也 天地之動靜陰陽 卽吾之心也 水火木金土 即仁義禮智信之氣也 而惻隱羞惡辭讓是非之心 隨時發見 而信以進德者也 且夫天一生水而有潤下之象 天三生木而有曲直之形地二生火而有炎上之氣 天五生土者 居中 地四生金者 居終 故曰 體得五行之妙 而五常之德 具焉者也 蓋心之爲物 㝡虚最靈 神明不測 動靜有時 常爲一身之主 而提撕萬事之綱 不可頃刻而不存者 然一不自覺而馳騖飛揚 以循物欲於軀殼之外 則一身無主 萬事無綱 雖其俯仰顧眄之間 自不覺其身之所枉 故孟子有燥存求放之訓 學者 必於是 以敬爲主 而講究其主一無適 整齊嚴肅之義 與夫收歛放失惺惺昏昧之要 革舊染去拘蔽 則其心也 庶幾至善矣 噫 余學識空疏 未嘗治性理之說 然見今叔季人 異於禽性獸心者 幾希 不可不喚我主人翁曰 惺惺耶否 拘蔽耶否 以爲自警也 故著爲一說 書諸座右 以爲寓目之資心包性情 而性是體 情是用 而心爲性情之田地 故性情 皆從心心本活物 能憂勤惕 厲則不死 不然則人欲肆 而天理亡 身雖存 而心則死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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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7년 7월 16일 관문(關文) 崇德二年七月十六日 關文 017 군기시(軍器寺)가 경기수군절도사 겸 삼도통어사 나덕헌에게 보낸 관문(關文): 정포(井浦), 덕포(德浦), 철곶[鐵串] 등의 진보(鎭堡)에 통지하여 어교(魚膠)를 시급히 상납하게 할 것.정축년(1637, 인조 15) 7월 20일 도착.군기시(軍器寺)가 살펴서 시행할 일 때문에 보낸다."본도(本道)가 올려보낸 어교(魚膠 민어의 부레를 끓여서 만든 풀) 7근은 정축년 몫으로 수량대로 받았고, 도내의 화량진(花梁鎭)과 영종포(永宗浦)도 어교를 상납하였다. 이번에 무고(武庫)의 군기(軍器)를 깡그리 써버리고 난 끝에 화살 하나조차 없으므로 현재 각종 군기를 특별히 제조하고 있는데, 부족한 것은 어교이다. 도내의 정포(井浦), 덕포(德浦), 철곶[鐵串] 등의 진보(鎭堡)에 관문이 도착하는 대로 즉시 통지하여 상납하지 않은 어교를 시급히 상납하게 하라. 그러므로 관문을 보낸다."숭덕(崇德) 2년(1637, 인조 15) 7월 16일. 丁丑七月二十日到付軍器寺爲相考事."本道上送魚膠柒斤, 以丁丑條, 依數捧上爲在果, 道內花梁鎭、永宗浦魚膠, 亦爲上納爲有如乎. 節武庫蕩失之餘, 無一介箭乙仍于, 時方各樣軍器, 別造爲乎矣, 所乏者, 魚膠是去乙. 道內井浦、德浦、鐵串等鎭良中, 未納魚膠乙, 到關卽時知委, 急急上納向事. 合行云云."崇德二年七月十六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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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8년 5월 6일 관문(關文) 崇德三年五月初六日 關文 057 병조가 경기수군절도사 겸 삼도통어사 나덕헌에게 보낸 관문(關文): 별파진(別破陣) 고남(高男)의 파견에 대해 군기시(軍器寺)에 공문을 보내도록 재가받음.무인년 5월 14일 도착.병조가 살펴서 시행할 일 때문에 보낸다."이번에 재가하신 본도(本道)의 서장(書狀)에 의거하여110) 본조(本曹)가 올린 계목(啓目)에 아뢰기를,'재가받은 문서를 첨부하였습니다. 별파진(別破陣) 고남(高男)을 군기시(軍器寺)에서 시급히 독촉하여 보내주게 하라고 본시(本寺)에 공문을 보내 시행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고 하니, 숭덕(崇德) 3년(1638, 인조 16) 5월 3일에 우부승지(右副承旨) 신(臣) 김광황(金光煌)이 담당하여,'「아뢴 대로 윤허한다.」라고 재가받았다.'라고 판부(判付)하였다. 판부한 내용대로 잘 살펴서 시행하라."숭덕 3년 5월 6일. 戊寅五月十四日到付.兵曹爲相考事."節啓下敎本道書狀據曹啓目, '粘連啓下是白有亦. 別破陣高男, 令軍器寺急急督送事, 移文本寺, 使之施行, 何如?' 崇德三年五月初三日, 右副承旨臣金光煌次知, '啓, 「依允.」'敎事是去有等以. 敎旨內貌如, 奉審施行向事."崇德三年五月初六日. '054 나덕헌의 장계'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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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8년 5월 9일 관문(關文) 崇德三年五月初九日 關文 059 경기관찰사 겸 순찰사 김남중(金南重)이 경기수군절도사 겸 삼도통어사 나덕헌에게 보낸 관문(關文) : 충청감사(忠淸監司) 정태화(鄭太和)의 장계(狀啓)에 따라 진관(鎭管)의 중군(中軍) 이하를 등제(等第)하는 일은 수사(水使)가 직접 행할 것.무인년 5월 14일 도착.경기관찰사 겸 순찰사가 살펴서 시행할 일 때문에 보낸다."이번에 도착한 병조의 관문에 이르기를,'이번에 재가하신 충청감사(忠淸監司) 정태화(鄭太和)의 장계(狀啓)에 아뢰기를,「관찰사와 절도사의 직임은 각각 관장하는 일이 있습니다. 근년 이래로는 관찰사에게 순찰사의 호칭을 겸하게 하였기 때문에, 조정의 본래 의도는 도내의 군정(軍政)을 총괄적으로 알고 있다가 비상 사태가 발생한 날에는 통제하게 하려던 의도였지, 원래 사안에 따라서 관직만 구비해두려던 의도가 아니었습니다.113) 만약 관찰사가 체면만 알고 매번 제재할 생각을 하여 예사로운 군무(軍務)조차도 병사(兵使)에게 전적으로 위임하지 않는다면, 정무(政務)를 시행할 수 없을 듯합니다.114) 그래서 신이 부임한 이후로는 항상 병사와 수사(水使)에게 신의 이러한 뜻을 알도록 하여 방해되는 사태가 없게 하였습니다.〈심지어 각 진관(鎭管)의 중군(中軍) 이하에 대한 포폄(褒貶)을 다른 도에서는 병사가 마련하여 주상께 보고한다.〉라고 하는데, 본도(本道)의 근래 규례는 근무 상태에 대한 진관의 보고에만 근거해서 등제(等第)하여 보고하니, 몹시 불성실한 일입니다. 병영(兵營)에서 주상께 보고하는 것이 참으로 사리에 합당합니다. 이번 6월부터 시작하여 이대로 시행할 것을 병조에서 주상께 아뢰어 결정을 받게 해주소서.」라고 하였다. 그 서장(書狀)에 의거하여 본조(本曹)가 올린 계목(啓目)에 아뢰기를,「재가받은 문서를 첨부하였습니다. 옛날에 관찰사의 호칭만 가지고 있을 때에는 병사와는 상호간에 관문을 사용하였고 수사는 첩정(牒呈)을 사용하였는데, 당시에는 순찰사라는 호칭을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병사가 통제를 받는 일이 없었고115) 모든 군무에 관한 사안은 병사가 전적으로 관장하여 담당하게 하였습니다. 순찰사는 총괄적으로 관리하기만 해야 순찰사라는 체모에 맞는 것인데, 근래에는 순찰사가 체면만 스스로 지키려고 하고 병사에게는 예사로운 군무조차도 스스로 전담할 수 없게 하며, 심한 경우에는 병영에 전해져오던 당연히 사용해야 할 물품마저도 빼앗아 감영(監營)에 소속시키고, 봄과 가을의 시재(試才)를 시행하기 위한 순행도 순찰사의 분부가 아니면 마음대로 나갈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각 도(道)가 똑같이 그처럼 방해되는 폐단이 있습니다. 군무가 허술해지는 이유는 모두 참으로 여기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충청감사 정태화가 이와 같은 폐단을 깊이 알고서 사유를 갖추어 주상께 급히 보고하였는데, 진관의 중군 이하 근무 상태를 등제하는 일도 장계에서 아뢴 대로 함께 시행하라고 각 도에 아울러 공문을 보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고 하니, 숭덕(崇德) 3년(1638, 인조 16) 5월 5일에 동부승지(同副承旨) 신(臣) 최유연(崔有淵)이 담당하여,「〈아뢴 대로 윤허한다.〉라고 재가받았다.」라고 판부(判付)하였다. 판부의 내용을 잘 살펴서 시행하되, 수사에게도 아울러 통지하여 시행하게 하라.'라고 하였다. 관문 안의 내용을 살펴서 시행하라. 그러므로 관문을 보낸다."숭덕 3년 5월 9일.▶ 어휘 해설 ◀❶ 진관(鎭管) : 진관은 두 가지의 의미로 나누어볼 수 있다. 하나는 전국의 행정 조직인 읍(邑)을 군사 조직인 진(鎭)으로 편성하여 관할하던 체제를 가리킨다. 진관 체제에서는 각 도의 군사 조직을 각각 주진(主鎭), 거진(巨鎭), 제진(諸鎭)으로 나누고, 주진이 거진을 통솔하고 거진이 제진을 통솔하도록 하였다. 거진은 각 도의 절도사(節度使)가 있는 군영(軍營)을 가리키고, 거진은 각 도의 고을이나 진포(鎭浦) 중 중심이 되는 몇몇 고을과 진포로 지정된 군영을 가리키며, 제진은 거진에 소속된 고을이나 진포의 군영을 가리킨다. 또 하나는 거진을 가리킨다. 거진으로 지정된 곳은 고을이나 진포의 이름 아래에 '진관' 2자를 붙여 거진임을 나타내었다. 『대전통편(大典通編)』 「병전(兵典)」 〈외관직(外官職)〉에 수록된 경기의 진관을 예로 들면, 광주진관(光州鎭管), 수원진관(水原鎭管), 양주진관(楊州鎭管), 월곶진관[月串鎭管], 덕포진관(德浦鎭管) 등이 있었다. 그중 월곶진관과 덕포진관은 수군(水軍)의 거진이고, 나머지는 육군(陸軍)의 거진이다.❷ 시재(試才) : 지방 특수군의 장교(將校)와 군병(軍兵)을 대상으로 해마다 1, 2차례씩 정기적으로 시행하던 과시(科試)의 일종이었다. 시재는 시행 지역과 응시 대상에 따라 강화부(江華府)의 장의려시재(壯義旅試才), 개성부(開城府)의 선무군관시재(選武軍官試才), 통제영(統制營)의 장사시재(將士試才), 동래부(東萊府)의 별기위시재(別騎衛試才), 남한산성(南漢山城)의 군관시재(軍官試才), 수원(水原)과 파주(坡州)의 별효기사시재(別驍騎士試才), 제도(諸道)의 마병시재(馬兵試才) 등이 있었다. 戊寅五月十四日到付.兼巡察使爲相考事."節到付兵曹關內, '節啓下敎忠淸監司鄭太和狀啓內, 「觀察、節度之任, 各有所掌. 近年以來, 令觀察使兼巡察使之號, 故朝廷本意, 欲使摠知道內兵政節制有事之日, 元非隨事備官之意. 徒知體面, 每思裁制, 尋常軍務, 亦不專委於兵使, 則恐不能展布政事. 臣到任以後, 常使兵、水使知臣此意, 俾無掣肘之患爲白在果. 〈至於各鎭管中軍以下褒貶乙, 他道, 則兵使磨鍊啓聞.〉是如爲白乎矣, 本道近例, 只憑鎭管勤慢之報, 等第以啓, 殊不着實. 自兵營啓聞, 實合事理. 今六月爲始, 依此施行事乙, 令該曹定奪.」事書狀據曹啓目, 「粘連啓下是白有亦. 在昔觀察使時, 則與兵使通關, 水使牒呈矣, 以無帶巡察使之號, 故兵使無受制之事, 而一應軍務之事, 則使兵使專掌次知. 巡察使只統領而已, 乃巡察之得體, 而近來巡察使, 徒能自存體面, 使兵使, 尋常軍務, 亦不得自專, 至於甚者, 流來兵營應用之物, 亦爲奪屬監營, 春秋試才, 非巡察分付, 則不得任意出巡. 故其掣肘之弊, 各道同然. 兵務虛疎, 無非實由於此是白如乎. 忠淸監司鄭太和深知如許之弊, 具由馳啓爲白有昆, 鎭管勤慢等第之事乙良置, 依狀啓一體施行之意, 各道幷以行移, 何如?」 崇德三年五月初五日, 同副承旨臣崔有淵次知, 「啓, 〈依允.〉」敎事是去有等以. 敎旨內事意, 奉審施行爲乎矣, 水使處, 幷以知委施行向事.'關是置有亦. 關內辭緣, 相考施行向事. 合行云云."崇德三年五月初九日.❶ 政 : 저본에는 원문이 '停'으로 되어 있으나, 전후의 문맥에 의거하여 수정하였다.❷ 無 : 저본에는 원문이 '有'로 되어 있으나, 전후의 문맥에 의거하여 수정하였다. 각 도(道)의 관찰사(觀察使)에게 순찰사(巡察使)를 겸하게 한 것은 임진왜란이 일어난 직후부터 시작되었다. 선조 25년(1592) 5월 6일(을축)에 황해감사(黃海監司) 조인득(趙仁得)에게 순찰사를 겸하게 하였고, 이후로 필요한 도에는 관찰사가 순찰사를 겸하게 하였다. 『선조실록』 25년 5월 6일(을축), 7월 12일(기사)·17일(갑술), 10월 29일(을묘); 『광해군일기』 1년 3월 10일(신묘). 저본에는 원문 '政' 1자가 '停' 1자로 되어 있으나, 전후의 문맥에 의거하여 수정하였다. 저본에는 원문 '無' 1자가 '有' 1자로 되어 있으나, 전후의 문맥에 의거하여 수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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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8년 5월 4일 관문(關文) 崇德三年五月初四日 關文 060 호조가 경기수군절도사 겸 삼도통어사 나덕헌에게 보낸 관문(關文): 화량첨사(花梁僉使)가 사용한 군량(軍糧)도 회감(會減)할 것.호조가 살펴서 시행할 일 때문에 보낸다."이번에 도착한 화량첨사(花梁僉使)의 첩정(牒呈)을 첨부한 경기수사(京畿水使)의 관문 내용을 요약하면,'덕포첨사(德浦僉使)와 정포만호(井浦萬戶) 등은 사용한 군량(軍糧)을 회감(會減)하였으나 화량(花梁)만 회감하지 않았으므로, 이러한 연유를 다시 첩정을 첨부하여 관문을 보냅니다.'라고 하였다. 보고한 대로 시행하라."숭덕(崇德) 3년(1638, 인조 16) 5월 4일. 같은 달 21일에 도착함. 戶曹爲相考事."節到付使關粘連花梁僉使牒呈內節該, '德浦僉使、井浦萬戶等段, 用下軍糧, 已爲會減, 花梁耳亦, 不爲會減乙仍于, 以此緣由, 更良粘移.'事粘關是置有亦. 依所報施行向事."崇德三年五月初四日. 同月二十一日到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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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8년 6월 19일 장계(狀啓) 崇德三年六月十九日 狀啓 064 경기수군절도사 겸 삼도통어사 나덕헌이 인조에게 보낸 장계(狀啓): 전선(戰船)과 병선(兵船) 4척은 공사를 완료하였고, 군량미(軍糧米) 400섬 등을 별도로 갖추어 대변고(待變庫)에 들여놓았으므로 호조에서 회록(會錄)하게 해줄 것.〈피봉〉 승정원(承政院)이 개봉할 것."신이 작년 6월에 부임하여 본영(本營)의 전선(戰船), 병선(兵船), 사후선(伺候船) 등을 하나하나 점검해보니, 제작한 지가 오래되어 썩은 것이 있었으므로 전선 2척, 병선, 사후선은 즉시 썩은 부분을 철거하여 차례대로 개조하고 그러한 연유를 주상께 급히 보고하였습니다.116) 그리고 비변사가 복계(覆啓)한 결과를 통지한 공문에 따라 모두 양남(兩南)에서 선박을 제작하는 제도에 따라 전선을 새로 제작해서 경기의 전선을 제작하는 표준으로 삼으려고 계획하였습니다.117) 그런데 작년 가을과 겨울에 칙사(勅使)를 접대하는 일 때문에 선박을 제작할 여력이 없다가, 얼음이 녹자마자 바로 올해 1월 20일에 요포(料布)를 모으고 군관(軍官)을 별도로 정해 안면곶[安眠串]으로 내려보내면서'솜씨 좋은 선박의 장인(匠人)과 이장(耳匠)을 모으고 선박 목재를 산에서 끌어내릴 군인 등을 고용하여 기한을 정해놓고서 공사를 독촉하고, 제작을 마치면 돌아와서 정박시키라.'라고 분부하였습니다. 그런데 안면곶에 사는 백성이 전에는 선박을 제작하는 일에 고용되어 생계를 유지하다가, 올봄부터는 안면곶 안에 염장(鹽場)을 설치하였기 때문에 모두 소금 굽는 일에 의탁하여 소속되었으므로 모집할 군인을 얻기가 어려웠습니다. 먼 지역의 공사를 신이 직접 감독하는 것이 아니라서 제때에 제작하지 못하고, 3개월째가 되어서야 겨우 제작을 마치고 돌아와서 정박시켰습니다. 배 위에 판옥(板屋)을 장치하는 일은 신이 직접 감독하여 별도로 제작하였는데, 공장(工匠)과 역군(役軍) 등의 요포로 쌀 57섬과 무명 10동(同) 반을 들여 겨우 완료하였습니다. 대체로 본영의 전선은 평상시에는 밀물과 썰물이 드나드는 곳에 정박해있는데, 물이 빠질 때면 선체가 큰 전선을 강가에 매어두고 있으며 전선을 숨겨둘 장소가 별달리 없었습니다. 그래서 마지못해 봄과 가을에 수영(水營) 소재지에 사는 약간의 군병과 백성으로 으레 포구를 파내게 하였는데, 한 달 안에 전선이 물에 떠 있는 시기는 적고 매어 두는 시기가 많습니다. 선박 위에 설치할 방패(防牌)와 각종 기구들을 모두 옛 선박의 제도에 따라 제작하면 체제가 무겁고 크므로, 잘못되어 바람에 요동칠 경우에는 반드시 손상되어 파괴될 듯하였습니다. 그래서 그 안에서 두께를 참작하여, 선박 위에 설치할 방패는 걸어둘 수도 있고 뉘여 놓을 수도 있게 별도로 제작해서 바람을 피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기타 회부(會付)한 병선들도 신이 개삭(改槊)하였을지라도 삼판(杉板)이 견고하지 못하였으므로, 해당 병선 3척을 모두 전선과 함께 일시에 삼판을 개조하여 4척의 선박은 공장들이 이미 완성하였습니다. 본영의 회부한 전선과 병선 등 각종 선박 15척 안에서 2척은 전(前) 경기수사 신경진(申景珍)이 새로 제작하였고, 그 나머지 13척은 개삭할 시기가 되었기 때문에 신이 부임한 뒤에 새로 제작하기도 하고 나무를 덧대 개삭하기도 하여 모두 공사를 마쳤습니다. 본영의 회부한 군량미(軍糧米)는 원래 수량 900섬 안에서 연전에 전쟁이 일어났을 때 413섬은 군병 등에게 급료로 지급하고 회감(會減)하였고, 현재 남아있는 군량미는 526섬뿐이어서, 잘못되어 비상 사태가 발생하면 군병에게 급료를 지급할 때 부족할 우려가 있을 듯하였습니다. 그래서 신이 부임한 초기부터 오늘까지 쌀과 베, 소금과 장(醬) 등의 물품을 애써 마련하여 모으고 군량미 400섬을 별도로 갖추어 대변고(待變庫)에 들여놓았으니, 호조에서 회록(會錄)하여 시행할 것을 아울러 급히 보고합니다. 차례대로 잘 아뢰어 주시기 바랍니다."숭덕(崇德) 3년(1638, 인조 16) 6월 19일에 봉해서 올림.▶ 어휘 해설 ◀❶ 염장(鹽場) : 소금을 만들기 위하여 바닷물을 끌어들여 논처럼 만든 곳으로, 염전(鹽田)이라고도 하였다. 바닷물을 여기에 모아서 막아 놓고, 햇볕에 수분을 증발시켜서 소금을 얻었다.❷ 판옥(板屋) : 전선의 지붕을 널빤지로 덮은 것을 가리킨다.❸ 삼판(杉板) : 선박의 좌우 뱃전에 붙이는 널빤지를 가리킨다. 承政院開拆."臣上年六月到任, 本營戰·兵船、伺候船等乙, 一一點檢, 則年久腐朽者有之, 故戰船二隻、兵船、伺候船段, 卽爲撤罷鱗次改造, 緣由已爲馳啓爲白有在果. 因備邊司覆啓行移, 一依兩南船制, 新造戰船, 以爲畿輔戰船之標的事是白乎矣. 上年秋冬, 以勅使支待, 力未遑於造船, 解氷卽時, 今正月二十日, 鳩聚料布, 別定軍官, 安眠串下送, '募得善手船匠、耳匠及雇立船材曳下軍人等, 使之刻期督役, 畢造回泊.'亦分付爲白有如乎. 安眠串居民, 在前段, 造船傭役資生爲白如可, 今春始叱, 串內設鹽場乙仍于, 盡爲投屬鹽役是白乎等以, 募軍難得. 遠地之役, 非臣親自監督, 未能及時造作, 第三朔, 僅以畢造回泊爲白有去乙. 船上板屋粧修事段, 臣親自監董, 別樣制作, 而工匠、役軍等料布段, 米五十七石、木十同半以, 僅僅完了爲白有齊. 大槪本營戰船, 常時留泊於潮汐出入之處, 水落之時, 則體大戰船, 掛置江邊, 而他無藏船之所. 不得已春秋若干營下軍民, 例爲堀浦爲白乎矣, 一朔之內, 浮水之時少, 掛置之日多. 船上防牌、各樣諸具乙, 一依古船制造作, 則體制重大, 脫有風擺, 必致傷破落是白乎去. 其間參酌厚薄, 船上防牌乙, 或掛或臥, 以爲別制避風之地爲白有齊. 其他會付兵船等段置, 臣已爲改槊爲白乎喩良置, 杉板不爲牢固是白乎等以, 同兵船三隻乙, 竝只戰船一時改造杉板, 四隻之船, 工已斷手爲白有在果. 本營會付戰兵各樣船十五隻內二隻, 前水使申景珍新造, 其餘十三隻段, 改槊當次乙仍于, 臣到任之後, 或新造, 或添木改槊, 竝爲畢役爲白有齊. 本營會付軍糧米, 元數九百石內, 年前兵亂時, 四百十三石段, 軍兵等放料, 已爲會減爲白有遣, 時留在軍糧, 只五百二十六石是白去等, 脫有緩急, 軍兵放料之際, 恐有缺乏之患. 臣自到任之初至于今日, 斗米、尺布、鹽醢等物乙, 拮据收合, 別備軍糧米四百石, 入置待變庫爲白有置, 令該曹會錄施行事, 幷以馳啓爲白臥乎事是良厼. 詮次善啓云云." 崇德三年六月十九日封. '005 나덕헌의 장계' 참조. '010 비변사의 관문'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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贊 渾然天資 精毅簡讜 漉落器宇 允矣 風光月霽之精神 明徹胸襟 依然海闊 天高之氣像 窮尋遺經 實踐力行 施諸事業 盡夫蠶絲牛毛之義 發爲文章 燦然84)布帛菽粟之精 淵源眞的上泝朱栗 造詣極致 下啓後學孔夫子誕降二千四百八十二年辛未 濟州高東是 謹書 "宛成"을 이렇게 고친 흔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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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笏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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