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유년 삼도주박영국선탐정기(三島注泊英國船探情記) 초(抄) 고문서-치부기록류-역사기록 사회-역사-역사기록 乙酉六月日 乙酉六月日 고흥 고흥류씨 류탁 후손가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885년 6월에 흥양현 삼도(三島, 거문도)에 정박해 있는 영국 배의 정황을 기록한 탐정기(探情記) 1885년 6월에 흥양현 삼도(三島, 거문도)에 정박해 있는 영국 배의 정황을 기록한 탐정기(探情記)이다. 표제는 '을유년 6월 삼도에 정박한 영국 배 정탐기[乙酉六月三島注泊英國船探情記]'라 쓰고, 이후 7개 항으로 관련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1885년 3월 1일, 영국이 거문도를 불법 점령했다. 영국은 거문도를 해밀턴항이라 부르고 요새를 구축했다. 얼지 않는 항구를 노리는 러시아가 거문도로 남하할 것으로 예측하고 취한 조치였다. 청나라가 중재에 나서 러시아로부터 거문도를 점령하지 않는다는 약속을 이끌어내자, 영국은 1887년 2월 거문도에서 철수했다. 조선에서는 고종 22년(1885) 영국이 거문도(巨文島)를 점령한 사건에 대하여 《전라좌수영계록》에 전라 병영에서 7차례에 걸쳐 중앙에 보고한 내용이 확인된다. 영국 배의 정황을 기록한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지난달 16일 穆參判(뮐렌도르프〔穆麟德 : Möllendorf, Paul George von〕 )이 同事로 蘇士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과 말을 타고 大輪船에 도착하여 長村 앞바다에서 招諭하여 伯民으로 하여금 安接하게 한 후에 다음날 出去함. 1. 덕흥리(德興里) 앞 남쪽 수구(水口)에 가로질러 막은 뗏목과 철삭(鐵索)에 대해, 해당 마을 백성들이 어채(漁採)하기에 불편하여 뿔뿔이 흩어지고 말 것이라는 모양으로 누누이 함장(艦長)에게 간청하여 서쪽 10여 파(把)까지는 비로소 철거해 주어 겨우 어채선(魚採船)이 왕래할 길이 뚫림. 1. 왜도(倭島, 거문도)에 이미 집 한 채를 지었음. 장식은 매우 화려하고 건물 안에서부터 포변(浦邊)에 이르기까지 전선(電線)을 매설하여 동 포수(浦水) 밑에서 곧바로 중국에 이르고, 중국에서 또 영국에 이르러 잠통(潛通)한다는 성식(聲息)이 있다고 함. 1. 왜도(倭島, 거문도)에 새로 지은 屋舍 한 채는 우리나라의 假家와 비슷함. 다만 앞에 垈田 7石의 땅이 있음. 매 1石의 禾價는 銀 1錢 혹 1전 2, 3푼의 定價로 얻음. 船倉에서 雇人을 매일 2~30명 또는 50명을 고용하여 돌을 운반하여 쌓음. 1. 동쪽 수구 水雷砲는 전에 매립한 것에 의하여 선창에 쌓았으며 모두 비바람을 입어 훼손된 뒤에는 다시 고치지 않음. 1. 유촌(柚村) 뒤 포구의 주변에 철관혁(鐵貫革)을 설치한 다음 매일 5, 60명이 각각 총과 화약ㆍ탄환을 가지고 나와서 언덕에 의지해 엎드려 있다가 2명씩 조를 지어 사격을 시험하였는데, 솜씨가 좋은 자는 열 번 쏘아 열 번을 명중하고 조금 못한 자는 열 번을 쏘아 8, 9번을 명중하였음. 1. 북쪽 수구 뗏목에 철삭(鐵索)은 그 사이 풍랑으로 인해 양쪽가에 부딪쳐 뗏목이 이미 훼손되었음. 저들이 함께 大輪船을 타고 와서 훼손된 곳을 다시 設役하여 견고하게 막았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