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1년 간찰(簡札)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개인-생활-서간 辛巳七月旬二日 逋 辛巳七月旬二日 逋 고흥 고흥류씨 류탁 후손가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941년 7월 12일에 상중에 있던 朴璟鎭이 柳重憲에게 시문 2건과 함께 보낸 간찰 1941년 7월 12일에 상중에 있던 朴璟鎭이 柳重憲에게 시문 2건과 함께 보낸 간찰이다. 편지를 보낸 이와 받는 이가 적혀 있지 않아 명확히 알 수 없으나 편지 내용과 봉투, 연결문서를 통해서 짐작해 볼 수 있다. 받는 이의 경우는 편지봉투에 '松峴草堂 野山老 道幌下'라고 쓰여있고, 계유년(1933)에 환갑을 맞았다는 내용이 있어 野山 柳重憲으로 짐작된다. 보낸 이는 우선 자신을 哀子, 逋라고 표현하여 상중에 있는 사람임을 알 수 있다. 哀子는 부모의 상중에 있는 자식이 스스로를 칭하는 말로 부친상을 당했을 때는 고자(孤子)라고 하고, 모친상을 당했을 때는 애자(哀子)라고 한다. 그리고 편지 내용 가운데 경진년 초여름에 작성한 글을 보낸다고 쓰고 있는데 연결문서 중 '追祝 野山翁長筵文'에 庚辰首夏朴璟鎭謹祝이라고 적혀 있어 보낸 이가 朴璟鎭임을 알 수 있다. 이마를 조아리고 재배하고 말씀드린다고 하면서 서늘한 기운이 교외에 들어오니 道養하시는 氣力이 萬旺하시고, 가족들도 모두 편안한지 안부를 물었다. 자신은 세월이 머물러 주지 않아 어느덧 練祀를 지냈으며 사물의 변화를 보니 슬픈 마음을 지탱할 수 없다며 자신의 심정을 전하였다. 이어서 계유년(1933) 晬辰(생신)때 祝壽詩를 보냈는데 어찌 이것으로 만분의 일이라도 형용할 수 있겠냐고 하면서 지난해(1940) 초여름에 또 한 글을 써 놓고 오래되었는데 이제야 전해드린다고 하였다. 또 朴松泉은 효성과 우애가 있고, 온 힘을 쏟아 은혜를 베풀며 유림과 더불어 結社하고 금년에 회갑을 맞아 상금을 걸고 詩를 募集한다는 소식을 전하였다. 先賢이 이르길 頌祝에 있어서는 居屋者도 無妨하다고 하였으므로 濟弘의 이름으로 글을 보낸지가 이미 오래되었다고 말하고, 몰래 草錄하여 보내니 또 수정하신 뒤에 책망하지 않기를 바란다면서 편지를 끝맺고 있다. 연결문서로 시문 2건이 있는데, 하나는 庚辰년(1940) 초여름에 朴璟鎭이 쓴 '追祝 野山翁長筵文'이고, 또 다른 문서는 高興郡面虎東里 柳濟弘이라고 쓰인 '祝朴松泉壽筵' 이다. 이 시문 2건은 편지 내용에서 언급하고 있다. 박경진(朴璟鎭, 1884~1956)은 자가 사일(士一)이고, 호가 남죽(南竹)이며, 본관은 진원(珍原) 이다. 아버지 박중언(朴重彦)과 어머니 고령신씨 사이에서 고흥군 산양에서 태어났다. 송사 기우만(松沙 奇宇萬), 단운 민병승(丹雲 閔丙承), 석농 오진영(石農 吳震泳), 회봉 안규용(晦峰 安圭容), 극재 송병관(克齋 宋炳瓘), 동강 김영한(東江 金甯漢) 등과 교유하였다. 문집으로 ?남죽유고?3권2책(1958년간)이 있다. 野山 柳重憲과는 사돈관계이고, 류중헌의 아들인 류대석이 그의 사위이며, 손자는 柳濟洪이다. 류중헌은 자가 사집(士執), 호가 야산(野山), 본관이 고흥이다. 1873년에 태어나 1952년 에 사망하였다. 배우자는 南陽 宋冑僖의 딸이다. 품성이 영민하고 효성스러웠으며, 經史와 義理에 밝았다. 고조부 류일영이 편찬한 ?信庵實記?를 간행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