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0년 송철감(宋喆鑑) 등 상서(上書) 고문서-소차계장류-소지류 宋喆鑑 禮曹判書 禮曹[着押] 3顆(7.8×8.0) 광주 민종기 (재)한국학호남진흥원 HIKS_Z999_99_A02591_001 1840년 2월에 전라도 금구현 유림 유학 송철감·장우일 등 16인이 예조에 효성과 우애가 돈독한 곽영춘의 실행을 임금께 아뢰어 포양해 줄 것을 청원한 상서 1840년(헌종 6) 2월에 전라도 금구현(金溝縣) 유림 유학 송철감·장우일 등 16인이 예조에 효성과 우애가 돈독한 곽영춘(郭永春)의 실행(實行)을 임금께 아뢰어 포양(褒掦)해줄 것을 청원한 상서이다. 하늘이 낸 효성과 세상에 드문 행실을 지니고 있는데도 먼 지방 궁벽한 골짜기에 있는 탓에 포상의 은전을 입지 못한 경우에는 산에 있는 옥과 골짜기에 있는 향기로운 난초를 보고 감동한 사림들이 옥을 품고 와서 바치고, 난초를 보고 천거하지 않을 수 없는 것과 같은 것이다. 전라도 금구현에 사는 선비 곽영춘은 본관이 현풍(玄風)으로 충효(忠孝)를 세습(世襲)하였다. 정의공(正懿公) 경(鏡, 1117~1179)의 후손으로, 청백리 안방(安邦)의 14세손이고, 임진 호성원종공신(扈聖原從功臣) 반송당(伴松堂) 흥무(興懋, 1554~1613)의 7세손이며, 정려 효자(旌閭孝子) 청계당(聽溪堂) 후태(后泰)의 5세손이다. 윗물이 맑으면 아랫물도 맑고, 뿌리가 깊으면 가지도 무성한 것이 이치인지라, 곽영춘은 가풍(家風)을 이어받아 효행(孝行)으로 세상에 이름을 알린 자이다. 순수한 성품을 지닌 곽영춘은 어렸을 때부터 어버이께 효도하고 어른을 공경하였다. 그의 늙은 모친이 몇 달 동안 병을 앓았는데 온갖 약이 효험이 없어 거의 죽을 지경이 되자 자신의 손가락을 찢어서 그 피를 어머니 입속에 흘려 넣어 회생시켰다. 또 늙은 아버지가 숙병으로 몇 년 동안 병상에 앓아 누워 있었으나 지극정성으로 부지런히 봉양하였고, 아버지의 차도를 확인하기 위해 똥을 맛보았으며, 밤낮으로 하늘에 자신이 대신 아프게 해달라고 빌었다. 이밖에도 봉양하는 데 맛있는 음식을 제공하여 지극한 정성으로 자식의 직분을 다하였다. 또한 동생 영복(永福)과 우애가 매우 돈독하여 애초 서로의 구분이 없어, 의식(衣食)과 재물을 서로 양보하였다. 이에 그의 부모는 항상 "내 아들은 효자"라고 말하였으며, 마을 사람들도 모두 "곽 효자의 효성과 우애는 옛사람들도 능가하지 못한다"고 칭찬하였으니, 이를 통해 그의 진실한 마음과 행동을 알 수 있다. 부모 곁에서 약시중을 할 때마다 으레 똥을 맛보는 것을 일상의 일로 삼고, 위급한 순간에 손가락을 찢는 것을 항식(恒式)으로 삼았던 그의 순수하고 지극한 성심(誠心)과 하늘을 감동시킨 효성이 아니었다면 죽어가는 자를 회생시킬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아름다운 효행이 먼 지방에서 일어난 탓에 포상을 받지 못하였기에 금구현 유림들이 예조에 상서를 올려 '그의 효행 실적을 임금께 계달(啓達)하여 은미한 것을 드러내고 숨겨진 것을 밝혀줄 것'을 청원하였다. 이 상서를 접수한 예조는 2월 14일에 '듣고서 매우 가상했다. 포양(褒揚)의 절차는 오직 식년(式年)에만 있으니 도계(道啓)할 것'을 판결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