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7년 허용(許鏞) 등 상서(上書) 고문서-소차계장류-소지류 許鏞 兼官[着押] 3顆(6.3×6.3) 광주 민종기 (재)한국학호남진흥원 HIKS_Z999_99_A02609_001 1897년 4월에 전라도 남원 왕지전 2리에 사는 허용·소화영 등 12인이 겸관에게 이동우의 효성과 청주 한씨의 열행을 감영에 전보하여 임금께 보고하게 하여 표창 받게 해 줄 것을 청원한 상서 1897년(광무 1) 4월에 전라도 남원 왕지전(王之田) 2리에 사는 허용·소화영(蘇鏵永) 등 12인이 겸관(兼官)에게 이동우(李棟宇)의 효성과 청주 한씨(淸州韓氏)의 열행(烈行)을 감영에 전보(轉報)하여 임금께 보고하게 하여 표창 받게 해 줄 것을 청원한 상서이다. 효라는 것은 인간의 떳떳한 본성이고, 천하의 아름다운 행실이니 누구나 이런 성이 있으나 그 천성을 온전히 할 수 있는 자는 드물고, 누구나 이런 행실이 있으나 그 덕을 보존 할 수 있는 자는 드물다. 왕지전 2리에 사는 선비 이동우는 효령대군 보(補)의 15세손이자 호은공(壺隱公) 수(洙)의 11세손으로, 태어난 지 3일만에 부친상을 당하여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커가면서 어머니를 기쁘게 해드릴 것을 위주로 하여 사소한 일이나 물건이라도 반드시 어머니에게 물은 뒤에 행하였으며, 아침에는 농사짓고 저녁에는 독서하였다. 모친의 병이 갑자기 위독해지자 항상 곁에서 문안하고 약시중을 들었으며, 하늘에 자신이 대신 아프게 해줄 것 빌었다. 창졸간에 별세하자 자신의 손가락을 잘라 쏟은 피를 모친 입에 넣어 곧바로 회생하였으나 바로 돌아가시자 가슴을 치며 울부짖었다. 장례는 모두 예절에 따라 치르고, 달을 넘겨 집에서 5리쯤 떨어진 곳에 안장(安葬)하였다. 춥든 덥든 매일 성묘하여 거적자리를 깔고 흙덩어리를 베고 자면서 상복을 벗지 않았으며, 부모를 언급할 때마다 먼저 눈물을 줄줄 흘렸다. 이동우의 어머니 청주 한씨는 열행(烈行)이 탁월하여 이미 각 방(坊)의 통문(通文)과 암행어사의 판결이 거듭 있었으나 아직까지 포상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하지만 한 집안에서 효열(孝烈)이 함께 온전한 경우는 드문 일이니, 참으로 그런 어머니 밑에 그런 아들이 있다고 할만하다. 이 일은 이웃에서 목격한 것이고, 원근의 사람들이 전파한 소문으로, 허용 등이 한 마을에 살고 있으면서 침묵할 수가 없어서 겸관에게 감영에 전보(轉報)하여 임금께 계달(啓達)하게 하여 이 실행을 밝혀서 드날리게 해 줄 것을 청원하였다. 이 상서를 접수한 겸관은 4월 18일에 '자모(子母)의 효열(孝烈)에 대해 들으니 매우 감탄스럽다. 속히 포앙(褒揚)해야 마땅하므로 전보하여 공천(公薦)에 보답해야 할 일'이라는 판결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