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7년 최정구(崔玎九) 등 상서(上書) 고문서-소차계장류-소지류 崔玎九 行官[着押] 5顆(7.2×7.6) 광주 민종기 (재)한국학호남진흥원 HIKS_Z999_99_A02609_001 1897년 11월에 전라도 남원에 사는 유학 최정구·안석문 등 유림 49인이 효자 이동우의 지극한 행실 및 열부 청주 한씨와 광주 이씨의 실적을 임금께 보고하여 정려 포상의 은전을 입을 수 있도록 해줄 것을 관에 청원한 상서 1897년(광무 1) 11월에 전라도 남원에 사는 유학 최정구·안석문(安錫文) 등 49인이 효자 이동우(李棟宇)의 지극한 행실 및 열부(烈婦) 청주 한씨(淸州韓氏)와 광주 이씨(廣州李氏)의 실적(實蹟)을 임금께 보고하여 정려 포상의 은전을 입을 수 있도록 해줄 것을 관에 청원한 상서이다. 왕지전방에 거주하고 있는 선비 이동우는 효령대군 보(補)의 15세손이자 호은공(壺隱公) 수(洙)의 11세손으로, 고관과 충효로 대대로 그 미덕을 계승하였다. 이동우의 어머니 청주 한씨는 시부모님을 모시면서 그 뜻을 봉양하고 맛있는 음식을 제공하는 효성을 극진히 하였으며, 남편이 병을 앓을 때 똥을 맛보고 손가락을 자르는 열행(烈行)을 이루었다. 이동우의 숙모인 광주 이씨 또한 효성의 절도가 한씨와 같았으며, 남편이 병에 걸렸을 때에 손가락을 잘라 남편 입에 피를 흘려 열흘 동안 회생시켰다. 이에 고을에서 여러 차례 청원하여 암행어사의 판결과 감영의 찬탄이 앞뒤로 있었으므로 속히 임금의 포상을 입었어야 하지만 아직까지 이루어지지 않고 있어, 공의(公議)가 억울해 하는 점이다. 이동우는 이러한 효열의 후사로, 태어난 지 3일만에 부친상을 당하여 홀어머니를 봉양하면서 아침에는 농사짓고 저녁에는 공부하여 가정의 가르침을 계승하였으며, 겨울에는 온돌을 따뜻하게 하고 여름에는 시원하게 해드리면서 모친의 안부를 안락하게 하였다. 모친이 병에 걸리자 단을 만들어 하늘에 자신이 대신 아프게 해달라고 빌었으며, 손가락을 잘라 쏟은 피를 모친 입에 넣어 회생시켰다. 모친상에는 달을 넘겨 집 가까운 5리 즈음에 장사지내고, 날씨에 상관하지 않고 한번도 빠짐없이 묘에 조석으로 문안하였으며, 거적자리를 깔고 흙덩어리를 베고 자면서 상복을 벗지 않았다. 그는 부모를 언급할 때마다 먼저 눈물을 줄줄 흘렸으니, 이 일은 이웃에서 목격한 것이고, 원근의 사람들이 전파한 소문이다. 단효(單孝)와 단열(單烈)도 세상에 드문 일인데 한 효자와 두 열부가 모두 한 집에서 나왔으니 참으로 그런 어머니 밑에 그런 아들이 있다고 할만하다. 이에 최정구 등은 이동우와 한 고을에 살고 있으면서 침묵할 수 없어, 이동우의 지극한 행실 및 한씨와 이씨의 실적(實蹟)을 관에 아뢰어 '사실을 취하여 부(府)에 보고해 임금께 계달(啓達)하여 한 효자와 두 열부에게 특별히 정포(㫌褒)의 은전을 내려 묻혀 사라지는 일이 없도록 해줄 것'을 청원하였다. 이 상서를 접수한 행관은 11월 18일에 '효열은 모두 한 가문을 빛내는 것이니 영지(靈芝)와 예천(醴泉)은 반드시 근원이 있다는 것을 알겠다. 듣고서 매우 흠탄하였으니 의당 표창이 있어야 하나 계문(啓聞)은 일의 체모가 중대하므로 갑자기 논의하기 어려운 점이 있으니 우선 회답을 기다릴 것'이라는 판결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