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7년 성도수(成道修) 등 등장(等狀) 고문서-소차계장류-소지류 成道修 全羅都巡察使 都使[着押] 4顆(9.2×9.4) 광주 민종기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887년 12월에 전라도 무장현 장자산면에 사는 성도수·오시일 등 주민 33인이 도순찰사에게 특별히 무장현에 관문을 보내 죄인 정낙원이 저지른 교임의 죄와 부비전 6천여 냥을 함부로 분배하여 거둔 죄를 엄중하게 단죄하고, 부비전은 즉시 환수하여 다른 범죄자들에게 책임지게 해 줄 것을 청원한 등장 1887년(고종 24) 12월에 전라도 무장현(茂長縣) 장자산면(莊子山面)에 사는 성도수·오시일(吳時一) 등 주민 33인이 도순찰사(都巡察使)에게 특별히 무장현에 관문(關文)을 보내 죄인 정낙원(鄭洛源)이 저지른 교임(校任)의 죄와 부비전(浮費錢) 6천여 냥을 함부로 분배하여 거둔 죄를 엄중하게 단죄하고, 부비전은 즉시 환수하여 다른 범죄자들에게 책임지게 해 줄 것을 청원한 등장이다. 무장현의 성동면(星洞面)·원송면(元松面)·장자산면 안에 훈련원 둔전의 결세(結稅)[訓屯結]가 있는데 그곳이 애초에는 황무지였다가 점차 주민의 힘을 빌려서 차례대로 개간하여 약간의 들녁을 얻게 되었다. 이 때문에 중고(中古)에 특별히 편의책을 써서 도조(賭租)를 세미(稅米)에 부쳐서 함께 상납하였는데 원납미(元納米)는 매 결두당 19말로 마련하였다. 그러나 지금은 23말씩 상납하고 있으니 이 23말에는 둔세(屯稅)가 함께 부과되어 상납했다는 것을 명확이 알 수 있다. 그런데 작년 겨울에 경감(京監)의 영리(營吏)라고 칭하면서 둔전을 측량하여 이미 마련한 둔세 외에 또 도조를 정하여 중첩해서 징수하려고 하였다. 그렇다면 백성을 위하는 도리에 있어 억울함을 호소해서 바로 잡는 것이 합당한 일인데도 성동면의 정낙원 등이 일의 상황을 생각하지도 않고 성동과 원송 두 면의 무리를 불러 모은 뒤에 밤중에 돌입하여 경감을 구타하고 용품을 빼앗았다. 이 범죄로 빼앗은 용품값과 경감의 영리에게 들어간 비용 천여 냥을 세 면에 나누어 징수할 때에 장자산면은 족히 400여 냥을 부담하였다. 그날 밤 소란을 일으킬 때 장자산면은 전혀 알지 못했는데도 둔결(屯結)에 관계된 것이라고 핑계 대고 삼통(三統)에 포함시켜 이처럼 멋대로 징수하여 장자산면 주민들은 매우 원통하였다. 올봄에 정낙원 등이 친군영(親軍營)의 관문(關文)으로 인하여 나주 우진영(右鎭營)으로 옮겨 가두고서 불법으로 소란을 피운 죄를 엄히 조사하여 속죄(贖罪)하는 사이에 이른바 발생한 경비가 비록 없지 않다고 하더라도 법을 어긴 자가 부담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정낙원이 이번 8월에 무장현으로 환수(還囚)된 뒤로 그의 죄명이 아직까지 혐의를 벗지 못하고 있는데 한 고을에 권력을 행사하고자 교관의 엄숙함을 생각하지 않은 채 지레 교임(校任)을 도모하여 성전(聖殿)을 더럽혔다. 한번 교임(校任)을 도모한 뒤로는 주변을 견제하며 '이번 우진영 관련 발생 비용이 6천여 냥이니 매 결당 3냥씩을 민간에 분배하여 징수한다'고 하였다. 가령 우진영 관련 발생 비용으로 말하자면 천금에 불과하다. 또 둔결로 말할 것 같으면 성동과 원송 두 면은 모두 둔결인데, 장자산면은 5, 60결에 불과하니 많고 적음이 구별되는데도 모두 원래 부과된 결세 306결 80부(負)를 통틀어서 부과하였다. 이미 죄를 범하여 징계 당했다면 스스로 멈춰야 하는데도 둔전비를 빙자하여 이처럼 협잡해 죄없는 주민들에게 계속 부담하게 하는 짓에 억울한 장자산면 주민들이 도순찰사에게 '특별히 무장현에 관문을 보내 임금의 재가를 받은 죄인 정낙원이 감히 교임을 도모하고 교관을 더럽힌 죄에 대해 엄하게 처단하고 교관직을 해임한 뒤에 부비전 6,000여 냥을 함부로 결두(結頭)에 분배하여 평민들을 괴롭힌 죄 또한 법률에 따라 징계하되 부비전은 즉시 환수하여, 다른 범죄자들에게 책임지도록 해 줄 것'을 청원하였다. 이 의송을 접수한 도순찰사는 1일에 장수현감에게 '정낙원이 허황되게 주장하는 부비전을 기어이 백성들에게 거두려고 했으니 매우 놀랍다. 관에서 잡아 가두고 엄히 단속하여 일벌백계(一罰百戒)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경감(京監)은 조선 시대에 군수품의 출납 및 관리를 맡아보던 관아로, 지금의 서울특별시 태평로 1가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