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7년 최경렬(崔敬烈) 등 상서(上書) 고문서-소차계장류-소지류 崔敬烈 全羅都巡察使 使[着押] 3顆(9.5×9.4) 광주 민종기 (재)한국학호남진흥원 HIKS_Z999_99_A02591_001 1857년 12월에 전라도 금구현유림 유학 최경렬·송하원 등 18인이 전라도순찰사에게 곽영춘의 효행에 대한 공의를 널리 채집해 천양하여 풍속의 교화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게 해줄 것을 청원한 상서 1857년(철종 8) 12월에 전라도 금구현유림(金溝縣儒林) 유학 최경렬(崔敬烈)·송하원(宋夏源) 등 18인이 전라도순찰사에게 곽영춘(郭永春)의 효행에 대한 공의(公議)를 널리 채집해 천양(闡掦)하여 풍속의 교화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게 해줄 것을 청원한 상서이다. 금구현에 사는 선비 곽영춘은 정의공(正懿公) 경(鏡, 1117~1179)의 후손이자 청백리 안방(安邦)의 14세손이며, 계보가 현풍(玄風)에서 나와 대대로 충효(忠孝)를 이어온 집안으로, 국사(國史)에 모두 실려있다. 곽영춘은 어렸을 때부터 가법(家法)을 잘 알았다. 어버이를 섬기는 절도가 지극한 성품에서 나와 부모의 뜻을 받들어 그 용모를 유순히 하였다. 아버지가 병들자 똥을 맛보고 자신이 대신 아프길 바랐으며, 어머니가 거의 죽게 되자 손가락을 찢어 그 피를 어머니 입에 흘려 회생시켰으니, 세습한 집안의 행실과 타고난 지극성 성품이 아니었다면 이런 효를 행하지 못했을 것이다. 마을의 노인과 노파들이 자식을 교육할 때 항상 '곽영춘처럼 하라'고 말하였으며, 길거리 아이들과 나무꾼도 어버이를 모시는 모든 절도에 곽영춘을 공경하여 앙모하였다. 이렇듯 사방 이웃에서 모두 감복하고, 온고을이 모두 칭찬하므로 금구현 유림들이 이를 보고 듣고서 침묵할 수가 없었다. 이에 금구현령에게 청원하여 '과연 청원서 내용과 같다면 곽영춘의 효성과 우애가 옛사람에 부끄러울 것이 없다. 내가 가상히 여겨 일의 중대함을 감영에 보고할 것이니, 다시 공의(公議)를 기다려라'라는 처분을 받았다. 이 때문에 다시 순찰사에게 청원하였더니 처분 내용에 '효행을 듣고 매우 가상하다'고 하여 예조판서에 청원하니 '듣고서 매우 가상하였다. 포양(褒掦)하는 절차는 식년(式年)에만 있으니 도계(道啓)할 것'이라는 처분을 내렸다. 이에 암행어사에게 청원하였더니 처분 내용에 '뛰어난 행실이 매우 감탄스럽다. 계문(啓聞)할 것이니 헤아려 처분할 때까지 기다릴 것'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금구현 유림은 근래에 와서 습속(習俗)이 점점 낮아지고 있기 때문에 허황된 미화(美化)가 어지럽게 일어나고 실행(實行)이 사라지는 것이며, 이같은 훌륭한 행실이 아직도 포양(褒掦)되지 못하고 있어 풍속의 교화가 크게 손상된다고 생각하였다. 이에 순찰사에게 공의를 널리 채집하여 드러내 밝혀서 풍속의 교화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게 해줄 것을 청원하였다. 이 상서를 접수한 순찰사는 12월 19일에 '듣고서 매우 가상하였다. 포양(褒掦)의 은전은 우선 훗날을 기다릴 것'이라는 처분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