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嘉慶三年戊午元月人日分財明文長子衿下 後坪莊字三夜味三斗落只卜數六卜四束果及李福八束庫果收字一夜味卜數十二卜三束庫果及莊字初頭泥畓一斗三升落只卜數六卜庫合七斗三升落只許給事又祭位付給家垈三卜九束庫果麻田一斗五刀落只五卜五束庫乙爲定事[着名]次子衿下 川过陽字一夜味二斗落只四卜五束庫果及莊字下片泥畓二斗落只九卜一束庫果又陽字綿田一斗五升落只五卜四束庫果又莊字籬下田一斗落只一卜二束庫乙許給事[着名]末兒 陽字二夜味二斗落只六卜九束庫果及莊字泥畓上片一斗五升落只七卜三束庫及同字楮田二斗落只六卜庫乙許給事[着名]女仙飛 涯畓一斗落只三卜二束庫乙許給事別家李氏衿 後坪川过畓三斗落只限終身收養者次知而及父三年喪同用事許給事[着名]又右後坪川过三斗流漏畓乙勿爲放賣而各一斗式次知事分財主父[着名]如是處置之後若有紛紜之弊則爲先不孝滋甚事又食器一件式錢五兩式分定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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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문기류

1840년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고문서-명문문기류-시장문기 崔圭翰 광주 민종기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840년(헌종6) 2월 10일에 회장주 유학 최규한(崔圭翰)이 전라도 동복현 내서면 학당동에 있는 회장을 방매면서 발급한 토지매매명문 1840년(헌종6) 2월 10일에 회장주(灰場主) 유학(幼學) 최규한(崔圭翰)이 전라도 동복현(同福縣) 내서면(內西面) 학당동(學堂洞)에 있는 회장을 팔면서 발급한 토지매매명문이다. 최규한은 자신이 매득하여 여러 해 수호(守護)해 오다가 긴요히 쓸 곳이 있어서 팔게 되었다고 방매사유를 밝혔다. 거래 토지는 저전(楮田) 산등성이를 가로지르는 길 위부터 서쪽 등성이에 있는 상사(桑査) 이상에 이르기까지의 산지이다. 이곳을 전문(錢文) 2냥을 받고 팔았다. 본문기(本文記: 이전 거래 및 소유 증명문서)에 대한 언급은 없다. 흥덕장씨 후손가에서 이 문서를 보관하고 있었으므로 흥덕장씨에게 판 것으로 추정된다. 토지소재지인 전라도 동복현 내서면 학당동은 현재 전라남도 화순군 이서면 장학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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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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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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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98년 흥성장씨(興城張氏) 부(父) 분재기(分財記) 2 고문서-명문문기류-분재기 父 4子女 及 李氏 광주 민종기 (재)한국학호남진흥원 HIKS_Z999_99_A02484_001 1798년(정조22) 1월 8일에 흥성장씨가 세 아들과 여식, 별가 이씨에게 재산을 나누어주면서 작성한 분재기 1798년 1월 8일에 흥성장씨(興城張氏) 아버지가 세 아들과 딸 1명, 별가(別家) 이씨(李氏)에게 재산을 나누어주면서 작성한 분재기이다. 분재서문 없이 곧바로 장자(莊字), 제위(祭位), 차자(次子), 말아(末兒), 여(女), 별가(別家) 이씨(李氏) 순으로 분재하는 토지를 기록하였다. 먼저 장자의 몫으로는 총합 7두락지의 전답을, 제위로 붙여 두는 재산으로는 가대(家垈) 3부9속과 마전(麻田) 1두5도락지를, 차자에게는 논 4두락지와 밭 2두5승락지를, 막내아들에게는 논 3두5승락지과 밭 2두락지를, 딸 선비(仙飛)에게는 논 1두락지를 분재하였다. 마지막으로 별가(別家) 이씨(李氏)에게는 논 3두락지를 살아있는 동안 수양자가 차지(次知)하고 아버지의 상에도 사용하도록 단서를 달고 주었다. 유루답(遺漏畓) 3두락지는 팔지 말고 각자 1년씩 돌아가면서 지어 먹도록 하라고 했다. 후록에는 이와 같은 분재에 만약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이 있다면 우선 불효(不孝)한 것으로 치부한다는 것, 식기(食器) 1건과 돈 5냥씩을 나누어 준다고 적었다. 본 문서의 재산 분재를 살펴보면 남녀 차별이 심하고 남자 형제간에는 크게 차이가 나지 않지만 태어난 순서대로 전답의 합이 7두락, 6.5두락, 5.5두락으로 형일수록 조금 더 많이 분재 받고 있다. 관련 문서들을 참고할 때 재산을 나누어준 아버지는 장한신(張漢臣)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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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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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문기류

道光二十年庚子二月初十日幼學 前明文右明文事 學堂洞灰場 自己買得 累年守護是如可 要用所致 自楮田嶝橫路上 至西邊嶝桑査以上 價折錢文貳兩 依數捧上爲遣 右前永永放賣爲去乎日後如有爻象 則持此文告官卞呈事灰場主 幼學 崔圭翰[着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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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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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부기록류

戊午和順式榜目 上試睦仁會初場 終場曺珣承 和順 梁瓚英 綾州趙鼎錫 順天 宣寅黙 寶城朴在應 綾州 許菡 順天李九鉉 昌平 李楫 光州鄭在運 綾州【會入】 安正煥 寶城鄭海最 昌平【會入】 韓泰弘 龍潭崔東翼 南原【會入】 李僖錫 順天高時言 昌平 宋樸浩 興陽金象鉉 光州 朴寅陽 羅州張季膺 求禮 金熊弼 茂朱尹範琦 光州 鄭初明 潭陽丁載寧 昌平 吳鎭徽 和順梁杓 綾州 宋獜萬 寶城崔漢慶 南平 徐光郁 同福【會入】李敎升 谷城 安{玉+奕} 寶城【會入】尹相琦 古阜 金以瓘 光州李灃葉 金堤 張龍煥 鎭安林元植 潭陽 裴鍾吉 康津金再奎 南原 徐啓煥 康津金璋黃 任實 李敎龜 寶城奇晉衍 長城【會入】 金成根 古阜李承溥 南原 宋相鎭 潭陽崔練 南原 金相凞 益山許綺 南原 高肯鎭 昌平趙在繡 南原 李秉禹 淳昌尹相珉 興德 申彦求 長城李奭儒 寶城 崔聖祚 玉果金昌休 鎭安 高泰淳 昌平朴斗煥 玉果 金在其 長水孫敬壽 龍潭 成聲鎬 玉果金時休 淳昌 鄭鍾吉 茂長鄭鍾台 茂長 高洪鎭 昌平鄭慶致 茂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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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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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부기록류

1861년 순창식(淳昌式) 방목(榜目) 고문서-치부기록류-방목 광주 민종기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861년(철종12)에 순창에서 설행된 식년시의 합격자 방목 1861년(철종12)에 순창에서 설행된 식년시의 합격자 방목이다. 상시관(上試官)은 김직연(金直淵)이라고 기재되어 있는데, 신유년인 1861년 《승정원일기》 철종12년 1월 22일 기사에서 김직연이 전라도경시관(全羅道京試官)으로 임명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초장(初場)과 종장(終場)으로 나뉘어 각각 합격자의 성명과 거주지를 기재하였다. 문서 오른편에는 다른 시험의 합격자 명단이 일부 점련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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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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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차계장류

1837년 양직영(梁直永) 등 소지(所志) 초(草) 고문서-소차계장류-소지류 化民 梁直永 等 陵州牧使 광주 민종기 (재)한국학호남진흥원 HIKS_Z999_99_A02535_001 1837년(헌종3) 11월에 능주목 하동면에 사는 양직영·양주영·양상필 등 3인이 남준옥과의 산송 문제로 능주목사에게 올리는 소지의 초본 1837년(헌종3) 11월에 능주목 하동면(下東面)에 사는 양직영(梁直永)·양주영(梁柱永)·양상필(梁相必) 등 3인이 남준옥과의 산송(山訟) 문제로 능주목사에게 올리는 소지의 초본(草本)이다. 지난 을사년(1785)에 남준옥의 조부 남위익(南爲翼)이 후사 없이 죽은 종자(從子)를 투장한 일이 있어 굴이(掘移)를 한 곳에 올해 남준옥(南俊玉)이 죽은 어머니를 투장하였고, 8월에는 또 죽은 아버지를 어머니 묘소로부터 수십걸음 되는 아래에 계장(繼葬)을 하였기에 영문(營門)에 정소(呈訴)한 결과 그를 가두고 굴거(掘去)한 후에 보고하도록 뎨김을 받았으므로 그해 12월 12일에 남준옥이 부모의 상하 무덤을 즉시 굴거했다며 이전 산송 상황을 아뢰었다. 이와 같은 일이 문서에 훤히 기록되어 있는데 자신들의 산지에 자신들의 중형(仲兄)을 입장(入葬)하려고 하자 남준옥이 금장(禁葬)하는 일이 벌어졌다며 산의 형세로 보아도 동쪽은 자신들의 종가(宗家) 기지(基址)이고, 서쪽은 본촌(本村)의 가장동(假葬洞)이라서 문제가 없다는 것, 오히려 남가가 중부 무덤이라고 주장하는 무덤은 그의 후사 없는 5촌숙을 빈장해 놓은 곳에 가토를 해 놓고는 무덤이고 자신들의 땅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라고 전후 문기를 점련하여 호소하니 잘 살피시어 처분해 주시기를 바란다고 하였다. 써 놓기만 하고 관에 제출하지 않은 미발문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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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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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차계장류

下東面 化民梁直永梁柱永梁相必等右謹言 伏以民之仲兄入葬于民等之宗家家後世守之地是乎所 大抵葬地 則去乙巳年分南俊玉之祖父爲翼偸葬其無後從子于此地是如可 呈 官掘移文記昭然 且乙未年分同俊玉偸葬其亡母於此地是遣 八月分又復偸葬其亡父於此地數十步之下是如可 民等呈疏狀之囚之終不掘去 故更爲呈 營是乎則 題內 偸葬於旣掘之地 又復継葬於落訟之後 其習誠甚可駭 南民爲先捉囚 待掘去後 報來事敎是故 是年十二月十二日良中南俊玉卽掘渠奚父母上下塚 而文記昭然是乎則 渠何敢禁民之入葬乎 此不過落訟之餘憤也 果如是則 營門題决前 官處决似無憑處 論其地形 則山之東卽民等之宗家基地也 山之西卽本村之假葬洞 而壽明父塚段置 乙亥年假殯而未葬者也 渠矣無後五寸叔因殯加土之地 稱以渠矣仲父塚是如乎尼 此不過誣 官亂倫之漢也 前後文記帖連仰龥 伏乞孝理之下 一一洞燭其前後文記敎是遣 特爲 處分之地 千萬望良只爲行下向敎是事城主 處分丁酉十一月 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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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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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빙류

1864년 양호묵(梁昊默) 준호구(準戶口) 고문서-증빙류-호적 綾州牧使 梁昊默 牧使[着押] *周挾字改印, 1顆(墨印, 14.8×4.2)*1顆(7.0×7.0) 광주 민종기 (재)한국학호남진흥원 HIKS_Z999_99_A02554_001 1864년 능주목에서 유학(幼學) 양호묵(梁昊默, 37세)에게 발급한 준호구(準戶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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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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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빙류

立宗嗣明文 辛酉十月二十八日伏以繼絶存亡有國之重典立嗣定倫有家之大政先聖先王皆兢兢而不敢忽焉惟我繼高祖嗣孫大基氏 無育早世 宗嗣靡託 門論齊發 命炳基之第二子相善 立爲其後 俾奉享祀 於情於義 俱不敢辭 而見今宗社爲墟 未得告君成鈄 不得已遵尤菴先生遇人有變 令告廟立繼代述其文之遺規 以待天日之再明 嗚呼父子人之大倫也 移天事天 人道之至變也 以至變處大倫故致嚴致愼父命之然後 始得移大倫於他人 所以無父母者 不可以私自出後 有父命者 亦不可以私自罷繼者也 奧我國典 父母俱歿者勿聽 情理可矜則因一邊父母門長上言 許令立後云 我從兄雖夫妻俱亡無可受者 而謹從情理可矜之律文玆以成給明文日後若有異說則以此文記辨正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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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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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빙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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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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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7년 양호묵(梁昊默) 준호구(準戶口) 고문서-증빙류-호적 綾州牧使 梁昊默 牧使 1顆(6.9×6.9) 광주 민종기 (재)한국학호남진흥원 HIKS_Z999_99_A02554_001 1867년 능주목에서 유학(幼學) 양호묵(梁昊默, 40세)에게 발급한 준호구(準戶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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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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乾隆四十九年甲辰十二月二十六日 宣順興處明文右明文事段 自己買得是如可要用所致以 伏在學堂村莊字垈田三斗落其卜數十卜五束㐣果 及同字畓三刀落其卜數八束庫乙 價折錢文十二兩 依數捧上爲遣 右處永永放賣爲乎矣 本文記段他田畓幷付仍于 不爲出給爲去乎 日後如有雜談是去等 持此文卞呈事田主 喪人 張漢佐筆 幼學 金德兼[着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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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오년 사주단자(四柱單子) 고문서-서간통고류-혼서 광주 민종기 (재)한국학호남진흥원 신랑측에서 신부측에 보낸 임오생 신랑의 사주단자 신랑측에서 신부측에 보낸 사주단자이다. 신랑의 생년월일시는 임오년 12월 1일 묘시이다. 피봉에 쓴 성첩(星帖)은 사주(四柱)·사성(四星)·주단(柱單)·단자(單子)라고도 한다. 양가에서 중매인을 통하여 의사를 교환한 뒤 혼인하기로 결정하면, 처음 보내는 서신이 사주이다. 사주에는 신랑의 생년월일을 간지(干支)로 적고, 그것을 다섯 번 접어 봉투에 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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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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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봉]星帖壬午十二月初一日卯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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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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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간통고류

임신년 연길단자(涓吉單子) 고문서-서간통고류-혼서 광주 민종기 (재)한국학호남진흥원 신부 집에서 신랑 집에 납폐와 전안 일자를 택일하여 보낸 연길단자 임신년 1월 26일에 신부 집에서 신랑 집에 보낸 연길(涓吉)로, 혼례 날짜를 임신년 1월 26일로 택일하여 보낸 것이다. 납폐(納幣)는 혼인의 육례(六禮)의 하나로 정혼의 징표로 신랑 집에서 신부 집에 예물을 보내는 것을 말하고, 전안(奠鴈)은 혼례 때 신랑이 기러기를 갖고 신부집에 가서 상 위에 놓고 절하는 예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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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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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차계장류

1835년 양시영(梁始永) 등 의송(議送) 고문서-소차계장류-소지류 梁始永 全羅監史 使[着押] 6顆(8.0×8.1) 광주 민종기 (재)한국학호남진흥원 HIKS_Z999_99_A02535_001 1835년(헌종1) 11월에 능주 하동면에 사는 양시영(梁始永)·양직영(梁直永)·양주영(梁柱永)·양상후(梁相垕) 등 4인이 남준옥의 투장사건으로 전라감사에게 올린 의송 1835년(헌종1) 11월에 능주(綾州) 하동면(下東面)에 사는 양시영(梁始永)·양직영(梁直永)·양주영(梁柱永)·양상후(梁相垕) 등 4인이 남준옥의 투장사건으로 전라감사(全羅監司)에게 올린 의송이다. 남준옥이 몇 백 년을 내려오는 대종가 사당의 70보 이내에 을사년에 투장을 한 후에 그 후 산송으로 인하여 낙송을 하여 굴거를 지시 받은 곳에 또 그 어머니를 투장하였다고 호소하였다. 그로 인해 여러 차례 관에 정소하고 관의 제음이 있었는데도 관의 분부를 어기고 가두면 도망가는 등의 지극히 완악한 행동을 하는 남준옥을 엄히 다스리고 즉시 2총의 묘를 굴거해달라는 내용의 청원이다. 이에 대하여 관에서는 '투장을 하여 이미 굴거한 곳에 또 다시 계장(繼葬)을 하다니 그 습성이 매우 놀랍다. 남민(南民)을 우선 잡아 가두고 굴거하기를 기다린 후에 보고하라'고 산재관(山在官)에게 초6일에 판결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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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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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간통고류

右通告事伏以在昔盛峕敎化大行倫綱極備臣不失臣道子不失子道婦不失婦道少不凌長責善輔仁若盡其道則士林薦聞君上褒揚或旌其閭或贈其爵風聲所及天下歸仁悲風凄雨五十年呼寒啼飢奔走於穀絲之曲逕能盡其職者盖鮮矣本郡士人達城裵益洙妻林氏兆陽閥閱故家女稟賦貞淑端一幼能事父母以孝有行以父母事舅姑舅姑安其養如待大賔承君子君子宜其室夫有事于丘壠勞悴成疾不起時年二十二一子呱呱不以哀慽見於面送終如禮撫孤以恩家人常慮其經情日居月諸小祥祭誠床撤燈滅形影香然夫弟澤洙憂其不憂索之大急已懸身於後園樹梢摘軆救急斷續眼淸澤洙伏地泣曰令名百世烈則烈哀彼孑孑誰依誰托蕭瑟寒廚孰主張是相向痛哭惻隱之心感于中回心就穀立家聲於將來保白首於貞節事實合於昭代盛典之可獎可褒而時異法久泯滅無聞無所慍而天年終於丁酉冬月孝子秉周不忍掩其美而終黙扶杖帶衰泣訴其實秉彝所同不勝慨然玆敢發告伏惟 僉君子同聲賛揚樹風聲於奔蕩之際使期要無行愧其心而汗其顙則扶正倫綱世道幸甚天下幸甚聖誕二千五百十年三月 日[金溝鄕校]羅州鄕校儒林 僉尊座下金溝鄕校典校 林鍾鎬掌議 景寅根 同 宋 烘 同 金榮煥 同 安鍾千儒林 崔泳述 同 宋泳熙 同 鄭雲顥 同 金聲基 同 朴榮洙儒林 李鍾厚 同 鄭昌朝 同 林鍾大 同 李晙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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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차계장류

1888년 김윤택(金潤澤) 등 등장(等狀) 고문서-소차계장류-소지류 金潤澤 全羅都巡察使 都使[着押] 3顆(9.5×9.5) 광주 민종기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888년 3월에 전라도 무장현 장자산면에 사는 김윤택·강기두 등 주민 20인이 도순찰사에게 5, 6백냥에 불과한 경비전을 이미 혁파한 영비와 뒤섞어 장자산면에 2,500냥을 함부로 분배한 정낙원의 횡포를 고발하고, 무장현에 관문을 보내 죽게 생긴 자신들에게 다시 살아갈 희망을 갖도록 해줄 것을 청원한 등장 1888년(고종 25) 3월에 전라도 무장현(茂長縣) 장자산면(莊子山面)에 사는 김윤택·강기두(康基斗) 등 주민 20인이 도순찰사(都巡察使)에게 5, 6백냥에 불과한 경비전(京費錢)을 이미 혁파한 영비(營費)와 뒤섞어 장자산면에 2,500냥을 함부로 분배한 정낙원의 횡포를 고발하고, 무장현에 관문을 보내 죽게 생긴 자신들에게 다시 살아갈 희망을 갖도록 해줄 것을 청원한 등장이다. 무장현의 훈련원 둔전에 관한 일은 이미 앞의 의송에서 모두 말한 것처럼 훈련원 둔전은 성동면(星洞面)·원송면(元松面)·장자산면 등지에 있는데 지난 봄에 성동면에 사는 정낙원 등 세 사람이 경감 영리(京監營吏)와 다투다가 발생한 비용이 장자산면을 핍박하였다. 이미 둔전이 장자산면에 있다고 하면서 두 세 번 경비를 징수한 것이 이미 4, 5백냥이나 된다. 앞서 재앙을 입어 주민들이 지탱하지 못하고 있는데 정낙원의 탐욕이 끝이 없어 영비를 핑계로 비용의 수효를 허황되게 부풀렸다. 이 때문에 지난 해에 어쩔 수 없이 의송하여 엄한 제사(題辭)를 받들어 이미 공정한 판결이 났다. 그런데 뜻밖에 지금 정낙원 등 세 사람이 무장현의 훈련원 둔전이 서울에서 순조롭게 해결되었다고 운운하고, 또 경비전은 관가를 기망하여 제사(題辭)를 받았다고 핑계 대면서 이런 춘궁기에 주민의 형편을 고려하지 않고 곤궁한 주민들을 위협하여 지난 해에 혁파한 영비를 경비전과 뒤섞어 매 결당 12냥씩을 장자산면에 분배하여 2,500여 냥에 이르게 되었다. 이를 정낙원 도당 수십명이 밤낮없이 독촉하여 거둬들이는 통에 공납(公納)에 급급한 주민들이 넋을 잃고 집집마다 울부짖으며 다른 관으로 이전하거나 다른 면으로 피신하는 자들이 생겨났다. 곧 모내기철인데 면 안에 한 사람도 농사지을 뜻이 없어 장차 텅 빈 땅이 되고야 말 것이기 때문에 며칠 전에 관아에 청원하였더니 정낙원이 주변에 사주하여 결국 퇴짜를 맞았다. 경비전으로 말하자면 3인이 네 다섯 달 소요되므로 경비는 많아야 5, 6백냥에 불과한데도 처음에는 6천냥이라고 했다가 중간에는 4천냥이라고 하더니 마지막에는 3천냥이라고 하였으니 그 협잡(挾雜)을 알 수 있다. 이미 혁파한 영비를 경비전과 뒤섞어 사사로이 함부로 분배하여 장자산면의 부담금이 2,500냥에 이르게 되었으니 그들의 법이 없음을 알 수 있다. 이에 장자산면 주민들은 도순찰사에게 '즉시 통촉하여 해당 고을에 별도로 관문(關文)을 보내 구덩이에 뒹구는 이 무고한 백성들이 다시 살 희망을 갖도록 해 줄 것'을 청원하였다. 이 의송을 접수한 도순찰사는 3월 17일 무장현감에게 '정낙원을 잡아와 엄히 다스려서 폐단을 막을 것'이라는 판결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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