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7년 전주수장관(全州首長館) 통문(通文) 고문서-서간통고류-통문 全州首長館 古阜儒林 1顆(墨印, 7.0×5.1) 광주 민종기 (재)한국학호남진흥원 HIKS_Z999_99_A02572_001 1877년 1월 전주수장관 선비 15인이 고부유림에 작은 고을의 충신과 한 고을의 선의인 정은필을 위해 순찰사에게 연명으로 상서할 생각이므로 한 목소리로 호응해 줄 것을 촉구한 통문 1877년(고종 14) 1월 전주수장관 선비 15인이 고부유림(古阜儒林)에 작은 고을의 충신(忠信)과 한 고을의 선의(善義)인 정은필(鄭溵弼)을 위해 순찰사에게 연명으로 상서할 생각이므로 한 목소리로 호응해 줄 것을 촉구한 통문이다. 고부군에 사는 선비 정은필은 동래 정씨로 예문관 대제학 겸 응교 승보(承甫)의 16대손, 대호군 인(絪)의 15대손, 이조판서 승(昇)의 14대손, 예조판서 가종(可宗)의 13대손, 이조판서로 임금께 하사받은 호 풍천(楓川) 수홍(守弘)의 12대손, 병조판서 걸(傑)의 11대손, 생진사 효손(孝孫)의 10대손, 참봉 확(確)의 9대손, 갑산부사(甲山府使) 집(緝)의 8대손으로 명망과 절개가 있는 고가이다. 정은필은 겨우 열 살에 부모가 늙고 집이 가난하여 변변치 못한 음식도 올리지 못하자 낮에는 농사짓고 밤에는 베를 짜서 겨우 몇 고랑 되는 밭을 얻어 음식 바치는 도리를 극진히 하여 한결같이 어버이의 뜻을 받들어 즐겁게 하였다. 부모가 몇 년 동안 병을 앓자 그 곁을 떠나지 않고 매일 약수발을 드는 등 옛 효자의 실적에 부합하였다. 부모상을 당하자 피눈물을 흘려 낯빛이 검게 변하였고 슬픔으로 몸을 상한 것이 예제보다 지나쳤다. 3년 동안 여묘살이 할 때 아침 저녁으로 애달프게 곡하며 삭전(朔奠)과 망제(望祭)를 성실히 지냈다. 나이 근 칠순인데도 매일 성묘하여 산골짜기에 길이 생겼으며, 선조와 부모 기일 3일 전부터 소식(素食)과 죽을 먹으며 모두 예제를 따랐다. 그는 어려서부터 늙을 때까지 분수를 알고 도를 즐기면서 검소하고 절약하였으며, 말과 삿된 뜻을 굳게 단속하였다. 자연 속에 은둔하여 송죽의 절개에 취미를 부쳤으며, 처사의 지조는 군자의 기상이었다. 집안을 다스리고 자질들을 가르치는 방도와 종족을 돈독히 하고 손님을 접대하는 여러 절도에 조금도 마땅함을 잃지 않아, 작은 고을의 충신(忠信)과 한 고을의 선의(善義)를 정은필에게서 다시 보았다. 이에 한 도의 공의가 일제히 일어, 순찰사에게 연명으로 아뢸 생각이므로 이 통문을 보내 여러 집사들에게 한 목소리로 호응해 줄 것을 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