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7년 이최선(李最善) 등 상서(上書) 고문서-소차계장류-소지류 李最善 全羅都巡察使 使[着押] 3顆(9.4×9.5) 광주 민종기 (재)한국학호남진흥원 HIKS_Z999_99_A02572_001 1877년 1월에 전주도회소 유생 진사 이최선·최준익 등 36인이 전라도순찰사에게 고부군에 사는 선비 정은필의 지극한 효성과 돈독한 실적을 조정에 알려 그의 행실을 드러내고 등용시켜줄 것을 청원한 상서 1877년(고종 14) 1월에 전주도회소 유생(全州道㑹所儒生) 진사 이최선(李最善, 1825~1883)·최준익(崔俊翼) 등 36인이 전라도순찰사에게 고부군(古阜郡)에 사는 선비 정은필(鄭溵弼)의 지극한 효성과 돈독한 실적을 조정에 알려 그의 행실을 드러내고 등용시켜줄 것을 청원한 상서이다. 정은필은 충효의 가풍이 있는 명망의 집안으로, 어렸을 때부터 어버이를 섬기는 도리와 어른을 공경하는 법도를 스스로 깨우쳤다. 15살 즈음에 집안이 너무 가난하여 낮에는 농사짓고 저녁에는 베를 짰으며, 겨우 몇 두둑 전답을 얻어 늙은 어버이에게 의식(衣食)을 봉양하는 데에 게을리하지 않았다. 이는 『맹자』에서 말한 '하늘의 운행을 쓰고 땅에서 나는 이익을 이용한 효도'이다. 20살 즈음에는 어버이가 여러 해 동안 병을 앓았는데 그 곁을 떠나지 않았으며, 똥을 맛보는 정성과 잠자리에 부채질하는 도리는 옛 효자의 실적(實蹟)에 못지 않았다. 부모상을 당하여서는 피눈물을 흘려 낯빛이 검어지고, 슬픔으로 몸이 상한 것이 예제보다 지나쳤으며, 시묘살이 3년 동안 소식(素食)을 행하고 죽을 먹으며 담사(禫祀)까지 잘 마쳤다. 지금 70세가 되어가는데도 초하루와 보름에 성묘를 다녀 산골짜기에 길이 만들어졌고, 선조와 부모 기일 때마다 소식과 죽을 먹는 것을 초상 때처럼 행하였다. 근검 절약하고 말과 사특한 생각을 매우 조심하며, 명예를 피해 은둔하고 안빈낙도하는 그를 사방의 이웃 고을에서 모두 '영주 처사옹(瀛州處士翁)'이라 일컬었다. 정은필은 집안을 다스리고 자녀를 훈계할 때 모두 주자의 『가훈(家訓)』을 따라 덕을 숭상하였다. 또 종친을 돈독히 대하고 곤궁한 자를 구휼하였으며, 보답하지 못할 곳과 하소연할 곳이 없는 자에게 은혜와 덕을 베풀어 향촌에서 일제히 논의가 일었다. 전주유향소 유생들은 그의 순수한 효성과 독실한 행실을 듣고서 한 성에 살고 있는 입장에서 이 일을 침묵할 수 없었다. 이에 관찰사에게 은둔한 정은필의 실적을 조정에 계달(啓達)하여 그 행실을 드러내고, 그를 발탁시켜줄 것을 청원하였다. 이 상서를 접수한 전라도순찰사는 1월 28일에 '뛰어난 행실이 매우 가상하다. 일의 중대함을 계문(啓聞)할 것이니 더욱 공의(公議)를 기다릴 것'이라는 판결을 내렸다. 이최선(李最善, 1825~1883)은 조선 후기 유학자로 본관은 전주이고, 자는 낙유(樂裕), 호는 석전경인(石田耕人)이다. 추성군(秋城守)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규형(奎亨)이고 어머니는 상산김씨(商山金氏)이며, 담양에서 살았다. 15세에 아버지의 친구인 기정진(奇正鎭)의 문하생이 되어 40여 년 동안 받들었다. 1859년에 사마시에서 2등으로 합격하여 증광진사가 되었고, 1864년에 초시에 합격했으나 복시에서 문제가 마음에 들지 않아 응시하지 않았다. 1874년에 문과에 불합격한 뒤 과거시험을 단념하였다. 그는 늘 현실문제에 관심을 갖고 1862년 진주민란 때에 「삼정책(三政策)」으로 상소하였으나 전달되지는 못하였으며, 1866년 병인양요 때에는 격문을 보내 의병에 직접 참여하는 등 주리설을 바탕으로 한 위정척사를 실천하였다. 전라남도 장성군의 고산서원에 배향되었으며, 저서로 『석전집(石田集)』 4권 2책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