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8년 이이두(李以斗) 등 상서(上書) 고문서-소차계장류-소지류 李以斗 全羅都巡察使 使[着押] 3顆(9.2×9.6) 광주 민종기 (재)한국학호남진흥원 HIKS_Z999_99_A02572_001 1878년 12월에 진사 이이두·나시찬 등 전라도 유생 18인이 전라도순찰사에게 고부군에 사는 선비 정은필의 지극한 효성과 뛰어난 행실을 특별히 계달하여 은전을 입게 해줄 것을 청원한 상서 1878년(고종 15) 12월에 진사 이이두(李以斗)·나시찬(羅時鑽) 등 전라도 유생 18인이 전라도순찰사에게 고부군(古阜郡)에 사는 선비 정은필(鄭溵弼)의 지극한 효성과 뛰어난 행실을 특별히 계달(啓達)하여 은전을 입게 해줄 것을 청원한 상서이다. 정은필은 충효가 있는 유서 깊은 집안과 고관의 후예로 인효(仁孝)하고 근신(謹愼)하는 성품을 지녔다. 어버이가 늙고 집안이 가난하여 낮에는 나가서 농사짓고 저녁에는 들어와서 베를 짰으며, 겨우 몇 두둑 전답을 얻어 조상을 받들고 부모를 봉양는 도리를 실천하였다. 갑자기 어버이의 병이 위독해지자 백방으로 약물을 구하여 성심껏 치료하였으며, 똥을 맛보는 정성과 잠자리에 부채질하는 도리는 황향(黃香)과 검루(黔婁)의 효에 못지 않았다. 부모상을 당하여서는 슬픔으로 뼈만 앙상해졌으며, 여묘살이 3년 내내 채식하여 낯빛이 검게 변하였다. 장차 70세가 되어가는데도 초하루와 보름에 성묘를 다녀 산골짜기에 길이 만들어졌으며, 부모기일 때마다 안팍으로 목욕재계하고, 초상 때처럼 슬퍼하고 그리워하였다. 젊어서부터 늙을 때까지 천명(天命)을 두려워하고 남의 뜻에 화합하며, 입조심하고 사욕을 굳게 억제하였다. 명예를 피해 은둔하고 안빈하며 만족할 줄 알고 분수를 편안히 여겼다. 자연 속에 살면서 70살 나이에 빛이 나, 사방의 이웃 고을에서 모두 '영주산처사옹(瀛州山處士翁)'이라 일컬었으며, 가정을 다스리고 자질들을 훈육하는 방법으로 옛 성현의 유훈을 따랐다. 이에 군수와 순찰사의 제사(題辭)와 향도(鄕道)의 논의가 예전부터 있었으나 이제야 예식을 갖추고 가려서 다시 아뢰어, 정은필의 지극한 효성과 뛰어난 행실을 특별히 계달하여 뽑아 보고하는 은전을 입게 해줄 것을 청원하였다. 이 상서를 접수한 전라도순찰사는 12월 23일에 '일의 중대함을 계문(啓聞)할 것이니 공의(公議)를 더욱 탐문할 것'이라는 판결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