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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일 初十日 추웠다. 저녁 무렵 내려왔다. 청파에서 묵었다. 寒。 夕間下來。 靑坡留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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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일 十一日 흐리고 추웠다. 청파에서 머물렀다. 陰而寒。 留靑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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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일 二十一日 이날은 바로 영감(令監)의 생신이다. 술상을 차려 민 영장(閔營將)과 유 고성(柳固城) 등 여러 사람과 함께 배불리 먹고 파하였다. 是日卽令監晬日也。 有盃盤, 與閔營將、柳固城諸人, 同爲飽喫而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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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일 十七日 아침을 먹기 전에 내 생일이라고 하여 내간(內間, 안채)에서 술과 안주를 갖추어 대접하니 매우 감격스러웠다. 저물녘에 근동(芹洞)에 가서 술과 고기를 실컷 먹고 왔다. 朝前謂我晬日, 自內間具酒饌以饋之, 伏感伏感。 晩後往芹洞, 飽喫酒肉而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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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일 十一日 이른 아침에 정 진사(丁進士)의 사관(舍館)에 갔다. 박종수(朴宗壽)와 삼청동(三淸洞)에 가서 판서(判書) 이헌기(李憲綺)16)를 들어가 뵈었다. 먼저 한포재(寒圃齋)17) 선생의 서원을 건립하는 일에 대해 말을 꺼내니, "본손(本孫)이 선조(先祖)의 서원 건립을 주선하는 것은 매우 온당한 일이 아닙니다."라고 답하였다. 다음에 말한 우리 선조의 사액(賜額)을 청한 일은 대사(大事)가 속히 이루어져 갑자기 쉽지 않다고 하였으므로 이번 길에 예조에 올려 재록하려는데, 부족한 것은 대감(大監)이 예조 판서로 있을 때 일을 하는 것이 구차하지 않고, 이번에는 구차한 계책이 많이 있다 하니 답하기를, "아무 때에 재록(載錄)하는 것도 다행입니다. 이는 사액(賜額)을 청하는 계제(階梯)이니 더욱 다행한 일입니다."라고 하였다.아래 사랑(舍廊)으로 가서 그의 아우 한림(翰林) 헌위(憲緯)와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다. 오는 길에 재동(齋洞)의 임실(任實) 종인(宗人) 주인집에 들러 예조에 소장 올리는 일을 논의하였는데, "소장을 써 줄 사람이 없어서 애초에 성사가 안됐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급히 묘동(廟洞)의 귀환(龜煥) 주인집에 가서 상의하였는데 또한 걱정스럽다고 하면서, "아무쪼록 상의하기로 약속하였으니 반드시 소장을 얻어야 일이 성사될 수 있을 것입니다. 부디 흘려 듣지 마십시오."라고 하였다. 온 힘을 다해 이 석사에게 주선하는 방도에 대해 누누이 부탁하려고 하였으나, 이 석사가 출타하여 만나지 못하였다.저물녘에 경주인(京主人) 집에 가서 경주인과 상의해 보니 '어찌할 방법이 없다. 오늘 내일 사이에 곧장 강문명(姜文明)을 찾아가 2백여 냥의 돈을 받아 올라오는 길에 그 중 50냥을 떼어 쓰는 것이 좋겠다.' 하고, '나머지 액수는 경주인의 이름으로 보증하여 일을 처리하겠다.' 하였다. 이에 급히 재동(齋洞)으로 가서 여해(汝海)와 상의하였더니 그러면 안 된다고 하였으므로 저녁에 경주인 집으로 돌아왔다. 일이 급박하게 되었는데 끝내 변통할 방도가 없으니, 이를 장차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다. 동행과 그대로 주인집에 머물렀다. 早朝往丁進士舍館。 與朴宗壽, 往三淸洞, 入謁李判書 憲綺。 先言寒圃齋先生建院事, 則答曰: "以本孫其先祖建院, 周旋極未安。 " 次言生之先祖請額事, 則大事速成, 猝難不易云, 故今行呈禮曹載錄, 而所欠者, 大監 禮判時做事, 則不爲苟且, 今番多有苟且之計, 則答曰: "某時載錄, 亦可幸矣, 此則請額之陛梯也, 幸幸。"云矣。 往下舍廊, 其弟翰林 憲緯暫敍。 來路入齋洞 任實宗人主人家, 論其呈禮曹事, 無入手之地, 則初不成事云, 故急往廟洞 龜煥主人家相議, 亦爲悶慮云, "約以某條相議, 必得狀後事可成, 幸勿泛聽。" 與李碩士, 極力周旋之道, 累累言托, 李碩士出他不見。 乘暮來京主人家, 與京主人相議, 則亦無奈何, 而今明間, 直訪姜文明, 持二百餘兩錢, 上來之道, 厥錢中五十兩, 推用爲可云云, 餘數則以京主人名爲證處事云云。 故急往齋洞, 與汝海相議, 則不然云, 故乘暮還京主人家。 事成急迫, 而終無變通之道, 此將奈何? 與同行仍留主人家。 이헌기(李憲綺) 1774~1824.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1822년 대사헌, 예조판서·수원부유수·우참찬·장례원제조를 지냈다. 한포재(寒圃齋) 이건명(李健命, 1663~1722)의 호이다.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중강(仲剛)이다. 좌의정을 지냈으며, 1721(경종1)에 왕세제 책봉을 주청하여 실현하였으나, 신임사화 때 유배되었다가 사사(賜死)되었다. 노론사대신(老論四大臣)의 한 사람이다. 저서로 시문과 소차(疏箚)를 모은 《한포재집(寒圃齋集)》 10권이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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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일 十三日 일찍 일어나 동향(同鄕)의 여러 친구들과 작별하였다. 올 때 동행했던 이들은 모두 내려갔지만 나는 예조에 소장 올리는 일 때문에 함께 가지 못하였으니 마음이 실로 난감하였다. 오늘이 비록 삼일제(三日製)이나 돈 문제가 판가름 나지 않아서 과장에 출입하는 것이 한탄스럽다. 급히 재동(齋洞)18)으로 갔더니 만나고자 했던 사람이 이미 과장에 들어갔다. 이에 급히 묘동으로 갔으나 공서(公瑞)도 과장에 들어가 상의할 수 없으니 답답하고 걱정스러웠다.삼청동(三淸洞)19)의 이 판서(李判書, 이헌기(李憲綺)) 집에 가서 잠시 이야기를 나눈 뒤에 흥양(興陽) 장보(章甫, 유학을 공부하는 선비)들이 서원 건립하는 일의 전후 사적(事蹟)을 보고 싶다고 청하니 한번 보여 드리겠다 하고서 이에 책자를 드렸다.한참 뒤에 어디에서 온 음식을 나에게 나눠 먹자기에, 감히 먹을 수 없다고 하였더니 퇴상(退床)을 보내온 것이라 하여 배불리 먹었다. 음식은 모두 여행하면서는 보지 못한 것들이었으므로 매우 감사하였다. 한참 있다가 대감이 취하였으므로 나와서 다시 재동으로 가니 과장에 들어갔던 사람들이 모두 나와 있었다. 공서(公瑞)와 함께 이 석사(李碩士)를 뵙고 상의하였더니 내일 다시 오라고 말하였기 때문에 재동(齋洞)으로 돌아왔다.여해(汝海)와 예조에 소장을 올려 받은 제사(題辭)20)를 즉시 예조 장방(長房)21)에 들어가서 재록(載錄)하려 했으나, 서리(書吏) 배광옥(裵光玉)이 밖에 나가 부재중이어서 재록하지 못하고 도로 주인집으로 와서 머물렀다. 早起與同鄕諸益作別, 來時同行, 皆爲下去, 而余則以呈禮曹之事, 不得同行, 心懷實爲難堪。 今日雖三日製, 而以錢事之不得辦, 出入場中, 可歎。 急往齋洞, 則欲見之人, 已爲入場, 故急往廟洞, 則公瑞亦爲入場, 不得相議, 悶悶。 往三淸洞 李判書家, 暫話後, 請其興陽 章甫, 以建院事前後事蹟欲見, 則答以一覽爲言, 故仍納冊子。 移時有自何來飮食, 使余分食, 而以不敢之意言及, 則饋以退床故飽食。 飮食皆以在行時, 不見之物也, 多感多感。 移時大監醉睡, 故仍爲出來, 更往齋洞, 入場之人皆出來。 與公瑞請李碩士相議, 明日更來爲言, 故還來齋洞。 與汝海呈禮曹得題, 卽爲入去禮曹 長房載錄, 則書吏 裵光玉出外不在, 故不得載錄, 還來主人家留。 재동(齋洞) 서울시 종로구 재동으로, 명칭은 계유정난에서 유래했다. 수양대군은 계유정난 때 희생된 사람들의 시신으로 피비린내가 진동하자, 이곳을 재로 덮어서 냄새가 나지 않도록 했다고 한다. 이때부터 이곳은 잿골로 불렸고, 잿골을 한자로 표현한 것이 재동이다. 삼청동(三淸洞) 서울특별시 종로구 삼청동에 있던 마을로, 도교의 뿌리로 도교 신인 태청(太淸)・상청(上淸)・옥청(玉淸)의 삼청성신( 三淸星辰)을 모신 삼청전(三淸殿)이 있던 데서 마을 이름이 유래하였다. 제사(題辭) 조선 시대에 백성이 올린 소장(訴狀), 청원서(請願書), 진정서(陳情書)의 좌편 하단 여백에 관에서 써 주는 판결문 또는 처결문을 말한다. 주로 관찰사나 순찰사에게 올린 의송(議送)에 내리는 판결문을 말하며, 수령에게 올린 민원서에 쓴 처분(處分)은 '제김[題音]'이라고 한다. 장방(長房) 서리(胥吏)들이 집무하거나 거처하는 방, 또는 서리를 지칭하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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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일 十五日 조금 눈이 내렸다. 요통이 끝내 조금도 차도가 없어 출입할 수 없는데, 큰일이 여러 가지이니 초조하고 근심스러운 마음을 말로 다 할 수가 없다. 小雪。 腰痛終無小差, 不得出入, 而大事多端, 焦悶不可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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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일 十二日 차동, 근동, 합동에 가서 이야기를 나누고 왔다. 往車洞及芹洞、蛤洞, 談話而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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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일 十三日 주동(注洞)에 갔다 왔다. 往注洞而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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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일 十四日 오전에 종이를 사고 즉시 출발하여 두곡(杜谷)에 이르러 묵었다. 20리를 갔다. 午前買紙, 卽發抵杜谷留宿。 行二十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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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일 十四日 차동에 갔다가 저녁 무렵에 내려왔다. 往車洞, 夕間下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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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일 十五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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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일 初一日 날씨가 매우 청명하여 참으로 좋았다. 日氣甚淸朗, 可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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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일 初三日 밥을 먹은 뒤에 박 상사(朴上舍)가 와서 말을 샀다고 하였으므로 7일에 길을 떠나기로 약속하였다. 食後朴上舍來言買馬云, 故約以七日發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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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일 初五日 아침을 먹기 전에 근동(芹洞)에 가서 한참을 서로 이야기하고 왔다. 저녁에 김 참봉(金參奉)의 집에 가서 머물며 이야기를 나눈 뒤에 작별하고 왔다. 朝前往芹洞, 移時相話而來。 夕往金參奉家留話, 作別而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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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일 十四日 아침을 먹기 전에 신정(新亭)의 복금(卜金)을 데리고 묘동(廟洞)으로 갔다. 돈 한 냥을 가지고 한용(韓溶), 야당(野塘)의 종인(宗人) 연영(延英)과 장방(長房)에 들어가 재록(載錄)하려는데, 《전라도원록(全羅道院錄)》은 규장각(奎章閣)에 들어갔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육현(六賢)의 사적(事蹟)을 기록해 두었다가 후일 착실하게 써서 들이라는 뜻으로 누누이 부탁의 말을 하였으나 마음이 매우 편치 않았다.주인집으로 나와서 약간의 물품과 실기(實記)를 가지고 주인과 예조에 가서 안 동지(安同知)의 아들 인성(寅成)을 방문하였다. 그는 이제 막 예조의 서리가 되었다. 약간의 물건을 주고서 강성주(姜聖周)에게 예사문(禮斜文)22)을 써 달라 부탁했었다고 녹사(錄事)23)에게 말하자, "들어온 것이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나중에 배광옥(裵光玉)과 정성들여 써서 들여 달라고 하니, 말씀하신 대로 처리할 것이니 염려하지 말라고 하였다.급히 묘동(廟洞)으로 가서 공서(公瑞)와 이 석사(李碩士)에게 내일 내려가겠다고 작별인사를 하였다. 저녁에 경주인 집에 이르니 김계한(金啓漢)이 동행들과 오후에 먼저 출발하였다고 하니, 한탄스럽다. 해가 진 뒤에 남대문(南大門) 강지문(姜之文)이 머물고 있는 곳에 가서 내일 동행하기로 약속하였다. 서소문(西小門)으로 나가 차동(車洞) 민 판서(閔判書)의 집으로 가서 주인 치항(致恒)과 함께 묵었다. 食前率新亭 卜金往廟洞, 持百兩錢, 與韓溶 野塘宗人延英, 入長房載錄, 則《全羅道院錄》入奎章閣云。 故記草六賢事蹟, 使後日着實書入之意, 累累言托, 而心甚不安也。 出來主人家, 與主人持略干物及實記, 往禮曹, 訪安同知子寅成, 則卽見今才禮曹 書吏也。 給若干物, 托姜聖周禮斜文云言錄事, 則答曰: "不無所入云矣。" 日後與裵光玉, 着實書入爲言, 則如敎爲計, 勿慮云云矣。 急往廟洞, 與公瑞及李碩士, 明日下去之意作別。 暮抵京主人家, 則金啓漢同行午後先發程云, 可歎耳。 日落後, 往南大門 姜之文所住處, 約以明日同行。 出西小門, 入車洞 閔判書家, 與主人致恒同宿。 예사(禮斜) 예조에서 양자(養子)의 청원을 허가해 주던 제도 또는 그 공문이다. 녹사(錄事) 조선 시대 중앙 관서의 상급 서리직이다. 의정부와 중추부에 나뉘어 소속되었으며, 문반의 관부에는 의정부에서 무반의 관부에는 중추부에서 나누어 파견하였다. 이들은 대체로 2품 이상의 실권이 있고 업무가 많은 관부나 대신들에게 배정되어 문서의 취급과 기록, 연락 업무, 공문서의 전달, 기타 잡무를 담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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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일 十五日 아침을 먹기 전에 회동(晦洞)에 가서 송영재(宋永載) 궤연(几筵)24)에 조문하였다. 상제(喪制) 지순(持淳)을 위로하고 실기(實記) 한 권을 주었다. 위채 사랑에 올라가 장성(長城) 숙부 송익형(宋翼亨) 씨를 만나니, 나를 보고 반갑게 맞이해 주어 매우 고마웠다. 실기(實記) 한 권을 주고, 여산제각(礪山祭閣)을 영건하는 일에 대해 말하자 가을이 되기를 기다렸다가 추수한 뒤에 올라와 함께 논의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다.이어 하직 인사하고 돌아오는 길에 난동(蘭洞)25)의 이 참의(李參議)에게 들렀다. 마침 낙동(洛洞)의 승지 이광헌(李光憲)과 종제(從弟)인 참판 이광문(李光文)이 와 있어서 한 자리에서 만났다. 실기(實記)를 주었더니, 이광문도 책자를 청하였기 때문에 다음 인편을 기다렸다가 가지고 오겠다고 하였다. 이어서 사액(賜額)을 청하는 일은 영읍(營邑)에 일을 고하는 날에 반드시 영감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고 말했더니 답하시기를, "힘이 미치지 못하는 곳인데 그 사이에 내가 뭘 어찌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이어 말씀하시기를, "한포재 서원 건립에 관한 일은 어찌 쉬운 일이겠는가. 대사(大事)는 반드시 때가 있을 것이니, 후일을 기다려 상의하세나."라고 하였다.오는 길에 송유재(宋儒載)에게 실기(實記) 한 권을 주었더니, 각처에 지급할 것을 전달하겠다고 하기에 여섯 권을 부탁하였다. 오는 길에 학교동(學橋洞)26) 강화(江華) 송면재(宋冕載)의 집에 들러 그의 아들 지학(持學)을 만나 실기 한 권을 주었다. 이어 서소문(西小門) 밖 이희(李)의 집으로 나와 작별하였다. 차동(車洞)의 민치항(閔致恒) 집으로 내려와 작별한 다음, 아래채 사랑으로 가서 치명(致明)과도 작별하였다. 약현(藥峴)으로 가서 오위장(五衛將, 송인서(宋璘瑞)를 말함)과 작별하고 청파(靑坡)27)의 주인집으로 돌아왔다.강지명(姜之明) 부자, 강휘길(姜彙吉), 송순(宋淳)과 동행하여 오후에 길을 떠났다. 한강에 이르러 즉시 나루를 건너고 과천(果川) 읍내에 이르러 묵었다. 30리를 갔다. 食前往晦洞, 吊宋永載几筵, 與喪人持淳致慰, 給實記一卷。 上上舍廊, 見宋長城叔翼亨氏, 則見我忻待, 可感可感。 給實記一卷, 仍說礪山祭閣營建事, 則待秋爲計, 秋成後上來同議爲可云矣。 仍辭來路入蘭洞 李參議, 則洛洞 李承旨 光憲及其從弟參判 光文適來會。 仍見一座上, 仍給實記, 則光文, 亦自請冊子, 故待後便持來爲言。 仍說請額事, 所營事之日, 必賴諸令監之力, 答曰: "力不及處, 則何其於間乎。" 仍說"寒圃齋建院事, 則何可易也。 大事必有時矣, 待後相議。 "云矣。 來路見宋儒載, 給實記一卷, 則各處所給, 以傳致爲言, 故囑六卷。 來路入學橋洞 宋江華 冕載家, 見其子持學, 給實記一卷。 仍出西小門外李家作別。 下來車洞 閔致恒家作別, 往下舍廊, 致明作別。 往藥峴, 與五衛將作別, 下來靑坡主人家。 與姜之明父子及姜彙吉、宋淳同行, 午後發程。 到漢江, 卽爲越津, 抵果川邑內留宿。 行三十里。 궤연(几筵) 궤연은 영좌를 말한다. 영좌는 영상(靈床)과 함께 살아계실 때와 똑같이 모시기 위하여 초종(初終)에 설치하는 것이다. 즉 아침이 되면 영상에서 영좌로 혼백을 모셔 놓고, 밤이 되면 다시 영좌에서 영상으로 혼백을 모신다. 다시 말해 영좌는 혼백이 거처하는 곳이고 영상은 혼백이 취침하는 곳이다. 난동(蘭洞) 서울특별시 중구 회현동2가에 있던 마을로서, 조선 선조 때 서원부원군(西原府院君) 한준겸(韓浚謙)이 이곳에 살면서 일가와 더불어 풍류를 즐기고 친목을 도모하기 위해 모인 난정계연(蘭亭禊宴)을 자주 열었던 데서 유래된 이름이다. 한자명으로 난정이문동(蘭亭里門洞)·난정동(蘭亭洞)이라 하고 줄여서 난동(蘭洞)이라 하였다. 학교동(學橋洞) 송면재(宋冕載)의 집을 방문하고 이어 이동하는 동선으로 볼 때 '학교동(學橋洞)'은 서울특별시 중구 서소문동에 있던 마을인 '학교동(鶴橋洞)'의 오기인 듯하다. 청파(靑坡) 서울 용산구의 청파동이다. 청파(靑坡)라는 이름은 '푸른 언덕'이라는 뜻인데, 청파동이 연화봉(蓮花峰)이라는 푸른 야산에 위치한 데에서 유래하였다는 설과, 조선 세종 때 명인인 청파 기건이 거주하였던 데에서 유래되었다는 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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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일 十六日 새벽에 출발하여 사근천(肆覲川, 현 의왕시 왕림마을)에 이르러 아침을 먹었다. 대황교(大皇橋)28) 근처에 이르러 동행과 용주사(龍珠寺)29)에 들어가 승려 정현(貞賢)을 찾아보았다. 정현은 바로 흥양 탑승(興陽塔僧)이었는데, 지금은 이 절에 있다. 천보루(天保樓)30)에 누워서 낮잠을 자고 나니 정현이 점심을 내왔다. 밥을 먹은 뒤에 육당(陸堂)의 부처를 완상하니 다른 것과 별다른 것이 없었는데, 불좌(佛座)31) 좌우에 쌍대 유리등(雙臺琉璃燈)이 있었다. 정현이 말하기를, "이 등은 바로 선왕(先王, 정조를 말함) 때 어전의 물건으로, 이 절에 하사하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동쪽 편에 큰 목궤(木櫃)가 있어 열어 보니 또한 어전 책상(御前冊床)이었다. 이 세 가지 물건들은 평생 처음 보는 것이었다. 이어 건릉(健陵)32) 아래로 가서 멀지 않은 곳에 능소(陵所)의 석물(石物)을 바라보니 또한 평생의 장대한 구경이었다. 길을 재촉하여 오산(烏山)33)에 이르러 묵었다. 80리를 갔다. 曉發抵肆覲川朝飯。 抵大皇橋邊, 與同行入龍珠寺, 訪貞賢僧, 僧乃興陽塔僧, 方在此寺者也。 臥天保樓就寢後, 賢也進午飯。 飯後玩陸堂佛, 則與他無別, 而佛座左右, 有雙臺琉璃燈, 而賢僧曰: "此燈卽先王以御前之物, 賜此寺者也。" 東邊有大木櫃, 而開示則亦御前冊床也。 此三物平生初見也。 仍往健陵下, 不遠之地, 瞻望陵所石物, 亦平生壯觀也。 促行抵烏山留宿。 行八十里。 대황교(大皇橋) 대황교의 본래 위치는 수원시 대황교동과 화성시 황계동의 경계에 있었는데, 수원시 권선구 대황교동 138번지 부근의 황구지천이다. 《대동지지》를 보면 대황교가 남쪽으로 15리, 건릉(建陵)의 영내에 있다고 하였다. 용주사(龍珠寺) 경기도 화성시 화산(花山)에 있는 조선후기 현륭원의 능사로 창건된 사찰이다. 천보루(天保樓) 용주사에 있는 조선시대의 건축물로, 1983년 9월 19일 경기도의 문화재자료 제36호로 지정되었다. 1790년(정조14) 정조가 장헌세자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용주사를 세우고, 이때 대웅보전(경기도 문화재자료 제35호) 안마당으로 들어가는 문루로 함께 세워진 것이 천보루이다. 불좌(佛座) 부처가 앉거나 서 있는 대좌를 말한다. 건릉(健陵) 정조(正祖)의 능이다. 지금은 1821년(순조21)에 승하한 효의왕후(孝懿王后) 김씨(金氏)와의 합장릉(合葬陵)을 지칭한다. 오산(烏山) 경기도 남서쪽에 있다. 옛날에는 서해에서 오산에까지 바닷물이 들어와 배가 드나들었다고 하여 오산(鰲山)이라 불렸다고 하지만 정확한 것은 알 수 없다. 조선 중기에는 오미장(梧美場)으로 불리거나 다른 지방보다 까마귀가 유난히 많다고 하여 오산(烏山)으로 불렸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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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부

24일 二十四日 밤에 가랑눈이 내려 날씨가 매우 싸늘하였다. 夜微雪甚陰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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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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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부

2월 二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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