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8년 동춘선생 문집발간소(同春先生文集發刊所) 통문(通文) 고문서-서간통고류-통문 同春先生文集發刊所 梁會甲 同春先生文集發刊所印 광주 민종기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928년 동춘당(同春堂) 송준길(宋浚吉)의 문집 속집(續集) 간행을 위한 취지 및 절목 등을 알리는 통문(通文) 및 이와 관련한 3건의 간찰 1928년 5월 그믐날에 동춘선생(同春先生) 문집 발간소에서 양회갑(梁會甲)과 양회을(梁會乙)에게 보낸 통문(通文) 및 간찰 몇 편이 점련되어 있는 문서이다. 첫 번째 통문은 동춘선생의 문집이 숙종의 명에 의해 간행된 문집은 겨우 10권으로 만들었으나 빠진 부분이 많아서 후학들이 탄식한지 오래되었고, 이후 백 여년이 지난 뒤 선생의 현손(玄孫)인 문원공(文元公) 역천(櫟泉) 송명흠(宋明欽) 선생이 각 집안에 있던 글을 모아서 또 8권의 별집(別集)을 만들었지만 널리 배포되지 않았으니 이는 미호(渼湖) 김원행(金元行)의 말을 따른 것이며, 대대로 모은 것이 또 12권이므로 전후로 편찬된 것들을 합하면 30권이 된다고 하였다. 하지만 재력이 넉넉하지 못해 간행하지 못한 것은 후학들의 책임이고, 더구나 요즘처럼 인문(人文)이 비색한 시대에는 동춘선생의 전집을 간행하여 널리 펼쳐서 동몽을 깨우치고 풍속을 교도하는 바탕으로 삼고자 한다는 간행 취지를 전달하는 내용이다. 그리하여 귀향(貴鄕)의 유림들에게 혹 선생의 글이 있으면 일일이 수집하여 본 간행소로 보내달라고 하였고, 간소(刊所)는 상주군 내서면 연원동 흥암서원(興巖書院)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각 지방의 교통 편의를 위해서 발행소는 경성(京城)에 두고, 진행 방침은 협의해서 결정해야 하기 때문에 7월 15일로 날짜를 정했으니 발행소로 왕림해달라고 요청하였다. 문집 간행의 발기인은 윤용구(尹用求 1853~1939)를 비롯한 8인이다. 그 뒤에 10조목으로 구성된 절목(節目)이 점련되어 있는데, 간역소는 상주의 흥암서원으로 하고, 발행소는 경성에 두며, 원집(原集)과 속집(續集)의 규모 및 예산, 각수(刻手)의 비용, 지가(紙價), 배포 방법 및 예산, 발행소의 유지방침과 간부회의 등에 대한 것 등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 그 뒤에는 임원 명단이 수록되어 있다. 송자대전 중간소(宋子大全重刊所)와 화양소제고적보존회(華陽蘇堤古蹟保存會)의 이름으로 정묘년(1927) 7월 3일에 보낸 간찰은 간행하는 일을 우선 정지하고 일반임원이 모두 귀가했기 때문에 오는 8월 5일에 만나는 것으로 임시 임원회의 결의가 있었음을 알리는 내용이다. 화양 소제고적 보존회에서 정묘년 7월 7일에 보낸 간찰은 귀향(貴鄕)의 사우 가운데 지원하여 입회하는 사람의 명단을 7월 15일까지 적어 보내서 명부를 수정할 수 있도록 해달라는 것과 지원서 용지가 부족하면 더 청구하기 바란다는 내용이다. 화양은 괴산의 청천(靑川)에 있는 골짜기로 우암(尤菴) 송시열(宋時烈)이 은거하며 제자들을 가르치던 곳이고, 소제는 우암이 후학을 양성하기 위해 1686년(숙종9)에 회덕 소제동에 세운 남간정사(南澗精舍)가 있는 곳이다. 정묘년 8월에 박노정(朴魯禎) 등의 이름으로 보낸 간찰 1건이 더 점련되어 있는데 역시 화양소제고적보존회의 회원모집과 금전수합에 관한 내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