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8년 포충사(褒忠祠) 통문(通文) 초(抄) 고문서-서간통고류-통문 褒忠祠 광주 민종기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928년에 송와 정장규의 유고를 간행하고자 하니 호응해 달라는 내용으로 보낸 통문. 1928년에 포충사에서 보낸 통문의 초본이다. 松窩 鄭章奎의 유고를 간행하고자 契를 조직하고자 하니 호응을 부탁한다는 내용이다. 이 초본에 따라 작성된 통문의 원본을 확인할 수 있는데, 현재 국사편찬위원회 전자사료관에서 '무진년 포충사(褒忠祠) 경의당(景義堂) 포장(褒奬)관련 통문(通文)'이라는 사료명으로 제공되고 있다. 여기서 제공되는 원문과 본 통문의 초본의 내용은 거의 동일하기 때문에 이를 통해 문서 작성시기를 알 수 있다. 초본의 작성자는 '鄭'으로 적혀 있는데 원본은 鄭斗和 등이 연명되어 있다. 또한 이 통문에서 간행하고자 한다고 밝히고 있는 문집은 '故判中樞松窩鄭公'의 遺稿이다. 국립중앙도서관에는 『佯松窩遺稿』 1책 5권이 남아 있다. 여기에는 5세손 鄭煥琫이 지은 발문을 실려 있다. 본 통문 초본과 통문 원본에 분명히 5세손 '煥琫甫'가 유고를 간행하고자 하고 있음을 언급하고 있으므로, 국립중앙도서관에서 소장 중인 『佯松窩遺稿』은 이 통문에서 간행하고자 하는 '松窩鄭公'의 유고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 문집의 간행년도는 1942년이다. 따라서 통문 원본에서 가장 먼저 이름이 기입한 鄭斗和는 일제시기에 생존한 조선귀족 정두화(1882~1939)일 가능성이 크다. 통문 서두의 松窩 鄭章奎의 생전 행적에 대해 간략히 언급하고 있다. 정장규는 총명한 자질을 타고나서, 일찍이 雲坪 宋先生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여기서 송선생은 송시열의 현손인 宋能相(1709∼1758)을 가리킨다. 그리고 金漢湖 선생에게 성리학을 공부하였으며, 禮說에 대해 깊히 연구하였다. 그리고 文辭에 통달하였는데, 宋性潭, 李鏡湖, 朴謙齋 등과 교유하였다. 『佯松窩遺稿』에는 이 인물들과 주고받은 서간이 실려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당대의 석학으로 인정받던 정장규는 곧 어사의 천거로 능참봉에 제수되었다. 그러나 그는 상소를 올려 사직하며, '讀書하고 몸을 닦는 것은 선비된 사람의 본분입니다. 실상 없는 이름으로 성은을 잘못 입었습니다. 지극히 우매하고 극히 고루한 제가 어찌 감히 임금의 얼굴을 올려다 볼 수 있겠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정장규는 만년에 국왕의 부름을 받아 어전에 나아간 적이 있었다. 임금께서 '그대의 연령이 높으니 마땅히 壽爵을 내린다.'라고 하며 특별히 가선대부의 관품을 내리며 經筵에 입시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그는 또 늙어서 사리판별이 어둡워서 감당하기 어렵다고 사양하였다. 그리고는 곧 차자를 작성하여 聖學十圖를 제출하였다. 임금을 이를 극히 칭찬하며 判中樞府事의 직함을 내렸다. 끝내 관직 생활을 사양한 정장규는 사직을 요청하여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리고 곧 시골에서 학자의 학문적 의문에 답을 풀어주며 살았고, 매달 말에 鄕飮禮을 행하여 太極圖說을 강의하였다. 통문에서는 이와 같이 정장규의 삶에 대해 간단히 정리한 후, 곧 현재 후손이 그의 遺集의 초고 6책과 儀要補遺 상편을 갖고 있지만 형편이 넉넉하지 못해 간행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을 설명하였다. 그리고 5세손인 煥琫께서 지금 원고를 校印하길 원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이를 위해 契를 조직하여 간행 비용을 마련하고자 한다고 밝히고 있다. 따라서 통문을 받는 곳에서는 부디 호응해서 도와주었으면 한다고 말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