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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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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차계장류

1803년 장찬(張欑) 소지(所志) 고문서-소차계장류-소지류 張欑 同福縣監 官[着押] 1顆(6.8×7.0) 광주 민종기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803년 윤 2월에 동복현 내서면 학당리에 사는 장찬이 동복현감에게 내북면 웅곡에 있는 부모의 산소 수호지에 풍헌 송영국이 외조모를 투장하였으니 기한을 정해 파 옮길 것을 청원한 소지 1803년(순조 3) 윤 2월에 동복현(同福縣) 내서면(內西面) 학당리(學堂里)에 사는 장찬(張欑)이 동복현감에게 내북면(內北面) 웅곡(熊谷)에 있는 부모의 산소 수호지(守護地)에 풍헌(風憲) 송영국(宋榮國)이 외조모를 투장(偸葬)하였으니 기한을 정해 파 옮길 것을 청원한 소지이다. 장찬의 조부모와 부묘의 산소가 내북면 웅곡에 있었으나 쇠잔한 양반이었던 그는 수 년동안 겨우 용호(龍虎) 안 수 십보 땅만 수호하고 있었다. 그런데 상다촌(上多村)에 사는 풍헌 송영국이란 자가 자신의 권력을 믿고서 장찬의 산지기를 위협하여 급박함을 고하지 못하게 하고, 장찬의 부모 산소 10보(步) 땅에 거리낌없이 자신의 외조모를 투장하였다. 송영국은 지금 관의 풍헌을 맡고 있으므로 법문을 알고 있음에도 잔반(殘班)인 장찬을 업신 여기고 투총한 것이다. 이에 장찬은 '바로 적간(摘奸)하여 기한을 정해 투총(偸塚)을 파 옮길 것'을 청원하였다. 이 소지를 접수한 동복현감은 윤 2월 13일 장교(將校)에게 '산의 도형(圖形)을 적간하여 올 것' 등을 명한 판결문을 내렸다. 적간(摘奸)은 간사하고 부정한 일의 여부를 조사해서 밝힌다는 뜻으로, 이 글에서는 직접 현장에 나가 조사하는 것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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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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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2년 장욱(張旭) 준호구(準戶口) 고문서-증빙류-호적 同福縣監 張旭 行縣監[着押] *周挾無改印, 1顆(墨印, 13.0×4.7)*1顆(6.5×6.4) 광주 민종기 (재)한국학호남진흥원 HIKS_Z999_99_A02440_001 1822년(순조 22) 9월에 전라도 동복현에서 호주 장욱에게 동년의 호적대장을 토대로 작성하여 발급해 준 등본 성격의 준호구 1822년(순조 22) 9월에 전라도 동복현(同福縣)에서 호주 장욱(張旭)에게 동년(同年)의 호적대장을 토대로 작성하여 발급해 준 등본 성격의 준호구이다. 장욱의 거주지는 내서면(內西面) 학당리(學堂里) 4호이다. 직역은 유학이고, 나이는 59세 갑신생(甲申生)이며, 본관은 흥덕(興德)이다. 그의 사조(四祖)는 아버지 학생 한신(漢臣), 할아버지 학생 효지(孝智), 증조 학생 치언(致彦), 외조(外祖) 학생 김진채(金振採) 본관은 광산(光山)이다. 장욱의 아내 이씨(李氏)는 나이 50세 기축생이고 본적은 전주이다. 김씨의 사조는 아버지 학생 필달(苾達), 할아버지 학생 갑훈(甲勳), 증조 성균생원(成均生員) 상회(相會), 외조 학생 이택후(李宅垕) 본관은 공주이다. 이외 가족으로 아들 유학 윤문(允文), 나이 29세 갑인생이 있으며, 소유하고 있는 여종은 예선(禮先)으로, 어머니는 반비(班婢) 수영개(水永介)이고, 아버지는 사노(私奴) 돌윤(突潤)이다. 문서에는 동복현감의 관인(官印)과 서압(署押), '주협무개인(周挾無改印)'이 찍혀있으며, 1819년 호적과 대조 확인을 마쳤다는 '기묘호구상준인(己卯戶口相準印)'이 기재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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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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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빙류

第二東面第二三支川里戶籍單子第五統第四戶通德郞羅舜佐年六十二辛亥本錦城父學生 景瞻生父學生 景益祖學生 載挺曾祖學生 以驥外祖通德郞金處衡 本道康妻房氏年五十九甲寅 籍南陽父學生 啓亨祖學生 日佐曾祖學生 泰彦外祖學生崔恭三 本和順率子得儉年二十四己丑壬子式仰役秩婢正愛年十六丁酉父良人興德金母私婢䜳德各居秩婢甲辰年四十六丁卯父良人太萬母戶婢順每甲辰一所生奴卜同年二十七丙戌二所生婢卜丹年二十三庚寅父良人談伊順每二所生婢林尙年二十七丙戌父良人林哥名不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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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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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간통고류

曩於芝齋 病裏奉別 依若夢境黙記那時贈我語 良覺情誼之勤厚而况復一度惠椷 踵至於痛苦中 慰我病懷 此意良勤 何日可忘 適此春堂叔主枉訪 以知芝齋旋旆有日曠省餘經况 不以旅苦而有損 仰慰叶聞 族從出入鬼關 洽滿數朔 尙此眞元澌奪 末由振作 悶憐奈何 窃唯美業緣於刊事 雖不能對案耽讀而博學體驗之功 正在此處 須於左右酬接之際 取之逢原 不失所學 則前日讀書儘覺不虛 而今日吾門佳子弟 非賢者而誰耶 此於平素硏究之餘 綽有餘裕 而相愛之深 如是瀆告 或可情納耶病昏手戰 略此寄情 唯冀黙亮癸丑暮春卄六日 族從會洛頓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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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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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신·통지류

1939년 김성진(金聲振) 엽서(葉書) 고문서-서간통고류-엽서 金聲振 梁會甲 광주 민종기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939년 11월 10일에 광주군 신흥여관에 머물고 있는 시생 김성진(金聲振)이 양회갑(梁會甲)에게 보낸 사과 엽서 1939년 11월 10일에 광주군 신흥여관에 머물고 있는 시생(侍生) 김성진(金聲振)이 양회갑(梁會甲, 1884~1961)에게 보낸 인사 엽서이다. 자신이 남쪽에 내려온 지 여러 날인데 아직 찾아뵙지 못하고 있는 상황을 죄송해하고 주운태(舟雲台)로부터 전 달에 받은 답서(答書)를 아직까지 문하(門下)에 전하지 못한 사실 등을 송구해 하며 조만간 직접 찾아뵙고 잘못을 사과드리겠다고 전한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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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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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신·통지류

(葉書_前面)和順郡 梨陽面 草坊里 竹林齋梁正齋先生 道座下光州郡 大正町 新興旅館留 侍生 金聲振至月十日[右便日附印: 全南·□□, 14.1.11, 前0-6](葉書_後面)南來已多日 而尙未 晋謁 盖因紛馳 而罪負則實大 况在京時自舟雲台承其答書 是前月事 而姑未奉傳於門下 則悚惧何容 當早晩間躬謁以謝前咎矣 不備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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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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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차계장류

1884년 조경환(曺敬煥) 등 상서(上書) 초(抄) 고문서-소차계장류-소지류 曺敬煥 等 和順縣監 <書押> 광주 민종기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884년(고종21) 2월에 화순에 사는 조경환과 조봉환이 선산 투총 문제로 최태환과 소송하면서 화순현감에게 올린 상서의 초본 1884년(고종21) 2월에 화순에 사는 조경환(曺敬煥)과 조봉환(曺鳳煥)이 화순현감(和順縣監)에게 올린 상서(上書)의 초본(抄本)이다. 지곡(智谷)에 사는 최환태(崔煥泰)가 증조와 고조의 산소 용미 위 가까운 곳에 재작년 12월에 투장을 한 일로 전등(前等) 수령에 이어 신임 수령에게 재차 호소하여 최씨가 투장한 무덤을 파내 주기를 청한 내용이다. 이전에 조씨 측에서는 관에 정소하기 전에 먼저 수표(手標)를 받고 기한을 정하여 묘를 파내기로 했는데 기한이 지나도 최씨는 무덤을 파내지 않았다. 그래서 이전 수령에게 정소(呈訴)했고, 그때 제사에서는 4월 말일까지 다짐을 받고 파내기로 했었는데 또 기한을 어겨 신임수령에게 정소하게 된 것이다. 본 상서는 관의 인장이 찍히지 않은 베낀 문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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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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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빙류

1866년 조병만(曺秉萬) 시권(試券) 고문서-증빙류-시권 曺秉萬 광주 민종기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866년 복시에서 제출한 조병만(曺秉萬)의 시권(試券) 부(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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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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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차계장류

1890년 김원조(金元祚) 소지(所志) 고문서-소차계장류-소지류 金元祚 和順縣監 <書押> 3顆(7.0×7.0) 광주 민종기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890년(고종27) 10월에 조교관댁 산지기 김원조(金元祚)가 화순현감에게 금양산지의 수호를 위해 이수복(李壽福)의 화속 1냥을 면제해 줄 것을 청한 소지 1890년(고종27) 10월에 조교관댁(曺敎官宅) 산지기 김원조(金元祚)가 화순현감(和順縣監)에게 금양산지(禁養山地)의 수호를 위해 산지에 대하여 세금을 매기지 말 것을 청한 소지(所志)이다. 자신은 조생원댁의 산지기로 조생원의 선산이 화순(和順) 남면(南面) 함곡(函谷)에 있는데 후동(後洞)에 사는 이수복(李壽福)이 묘계(墓階)를 침범하여 개간한 일로 작년 가을에 산주(山主)인 조 생원이 정소하여 환진(還陳)하라는 처분을 받았다는 것, 그리하여 거의 과반이 넘도록 진지(陳地)로 환속 시켰으니 이수복에게 매기던 화속(火粟) 1냥을 없애고 다시 징수하는 일이 없게 해 달라고 청원한 내용이다. 이수복에게 화속을 징수한다면 그는 그 세금을 내기 위하여 다시 땅을 개간하여 돈을 마련해야 하기 때문에 조교관댁은 금양산지를 침범 당하게 된다. 이에 대하여 관에서는 4일에 침어(侵漁: 화속 1냥을 매기는 행위)하지 말라는 제사를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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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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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차계장류

曺敎官宅 山直 金元祚右謹陳情由段 矣身爲曺生員宅山直 而曺生員先山 在於 治下南面函谷是乎所 後洞居李壽福 侵墾墓階 去年秋間 山主曺生員 以此呈訴 而題音內有曰 禁養本意 禁其火田 養其邱木謂也 而有主先壠 無難犯垦至於互相賣買之境者 聞甚駭歎 曉諭無知之氓 須令還陳是矣 若有頑拒 捉來 嚴懲向事 敎是而洞頭民的只 洞頭民曉諭李壽福 還陳者過半 則陳地火粟 所當蠲除是白齊 玆以仰陳爲白去乎洞燭敎是後 墓階陳地 李壽福火粟一兩 特爲頉給 俾無更徵之地 千萬望良爲白只爲行下向敎是事案前主 處分庚寅十月 日[署押](題辭)非良田乃火粟而旣陳廢 則結是自起自滅 勿侵向事初四日該書員[官印] 3箇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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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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첩관통보류

1873년 조병만(曺秉萬) 첩정(牒呈) 1 고문서-첩관통보류-첩정 曺秉萬 和順縣監 <書押> 1顆(6.5×6.5) 광주 민종기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873년(고종10) 12월 5일에 화순현 동이면에서 글방을 열고 있는 조병만(曺秉萬)이 화순현감에게 올린 첩정 1873년(고종10) 12월 5일에 화순현(和順縣) 동이면(東二面)에서 강당을 열고 있는 조병만(曺秉萬)이 화순현감(和順縣監)에게 올린 첩정(牒呈)이다. 명륜당에서 강회(講會)를 연 후에 두 번의 첩(帖)이 내려와 동이면 각 마을의 강유(講儒: 유학 공부하는 유생)가 읽은 것을 모두 적어내라고 하셨기에 관첩대로 각 마을에 윤고(輪告)한 지 3~4일이 지났지만 아직 수록하지 못한 사람이 많아서 매우 황송하다는 것, 때문에 기록된 사람들만 우선 치보(馳報)한다고 하고 면(面) 사람들의 범절은 강회 때에 모두 아뢰어 조처하겠다는 뜻을 전한 내용이다. 이에 대해 화순현감은 초7일에 동이면의 강생들은 다른 면에 비해 많은데 어찌 적다고 하느냐며 13일 마곡(亍谷) 회강 때는 모두 참석하도록 하라는 제사를 내렸다. 조병만(曺秉萬, 1829~1895)의 호는 회계(晦溪), 본관은 창녕(昌寧)으로, 옥천군(玉川君) 조흡(曺恰)과 화순 입향조인 조온(曺穩)의 후손으로, 할아버지는 조석윤(曺錫胤)이며, 아버지는 조치순(曺致淳)이다. 성재(性齋) 허전(許傳)의 제자이다. 1875년(고종 12)에 흥선 대원군의 재입궐을 청하다 유배 간 사람들을 위한 전라도 상소의 우두머리가 되었는데, 이로 인해 강진현 고금도(古今島)로 유배를 가게 되었다. 9년 동안 섬에 살면서 문하생을 교육시켰고, 유배가 풀려 돌아온 뒤에는 문하생들이 유허비를 세워주었다. 1889년경에 화순에 운곡정사(雲谷精舍)를 짓고 기거하면서 제자들과 함께 강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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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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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빙류

縣內面三川洞里戶籍單子第 統第 戶通德郞羅舜佐年六十五辛亥本錦城父學生 景瞻生父學生 景益祖學生 載挺曾祖學生 以驥外祖通德郞金處衡 本道康妻房氏年六十二甲寅 籍南陽父學生 啓亨祖學生 日佐曾祖學生 泰彦外祖學生崔恭三 本和順率子得儉年二十七己丑乙卯式仰役秩婢正愛年十九丁酉父良人興德金母私婢䜳德各居秩婢甲辰年四十九丁卯父良人太萬母戶婢順每甲辰一所生奴卜同年三十丙戌二所生婢卜丹年二十六庚寅父良人談伊順每二所生婢林尙年三十丙戌父良人林哥名不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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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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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부기록류

垂老情何有常懷 二子憂言思千里應行顧一身修孝 乃非徒養友▣無感 猶【一】待朋宜久敬叙族盡和約門祚當衰薄 功名可早收謙單 恒受益矯 亢必招尤【二】寄汝平生戒▣從還裏求右參判先祖垂訓松齋公兄弟昏愚兒 有五常抱淵明憂【三】如復祖先績行 將學業修 奉親宜 養志 愛弟 莫相猶家室和兼肅 操身剛且柔【四】 過要慊處改心貴叙時收兼潔從多益謙恭卽寡尤所言非止此在汝黙而求【五】 右玄孫景益伏次 示五兒旣懷風樹痛又抱荊枝應有侄家聲繼存心毋烈修【六】孝思宜與勉友愛無相猶切切學而問怡怡和且業操存由我得功業任天收【七】敏行斯無懷訥言庶免尤汝須遵警哦 此外復何求. 右又次示兩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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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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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문류

敬次澤堂先生贈別滄洲先祖詩, 謹呈行軒下.痛切乾坤未潔腥, 堂堂大義幾時明, 敬開舊牘 崇禎字, 敢和遺詩講世聲,未看道義門由事, 好惡非常不要記, 自分林泉處迍邅, 最憐澤畔久憔悴, 吉凶惟有陰陽行, 動靜愼無俯仰愧, 已篤江湖廊廟憂, 肯爲墨綬風塵吏, 鹿麋與友魚蝦隣, 渺我滄溟一粟寄, 幸吾同胞貴相憐, 何必分形血氣連, 難抑今朝風樹感,謹將木果索瓊篇.崇禎後三丙寅菊月下澣 錦城羅得麟 謹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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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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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문류

謹次.匪所韻.至治猶泣玦, 赤子號家之, 苽限一年近, 芹沈千里遐, 北樓休以角, 南海望陽槎,君召豈云駕, 四琚不在它,洛陽消息渺無傳, 况是客中又一年, 城東斗屋今難容,聖主明明復見天.前春華盖訪寒微, 化裏難聞貶是非, 莅任志存蘇邑弊, 荐歉心切救民饑, 絃歌未及黎氓和, 書批猶令海鵬飛, 往來金陵今已矣,聖朝蓂露更沾衣.己酉仲春上澣, 舊民 金聲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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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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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차계장류

▣…▣日之悠泛沁泄也明矣 顧今國勢之岌嶪 世道之板蕩 人心之渙散 日甚一日 莫可底定 澟乎若積薪厝火 漏船失楫 直令人痛哭流涕之不足 而寧欲尙寐而無訛 以臣衰癃聾瞽 有何出氣力昌言嘉謨之可論 而苟或一分報效於君父 裨補於民國 則雖死之日 猶生之年 略陳狂瞽之說 仰效芹曝之誠 一曰 勤聖以養德■(聖)〔性〕 其目有五 二曰 恤民隱以▣邦本 其目有三 三曰 立紀綱以尊朝廷 其目有三 四曰 節財用以祛奢侈 其目有三 五曰 講戎政▣備緩急 其目有三 六曰 革科弊以作人 其目有三 以其綱則經邦制治之大本領以其目則捄時矯弊之急先務 引而伸之 觸類而長之 要不出此以外耳 何謂之勤聖學也 在昔傅說之戒高宗曰 念終始典于學 厥德修罔覺 大抵君德之修不修 惟在爲學之勤不勤 而三代之世 載籍未備 無書可学 人臣進戒之辞 猶爲如此 矧惟我⭘殿下 聖姿天縱 方在冲岭 生知固無成功之異 而希聖希天 必須斅學之工 易曰 天行健 君子以 自强不息學之道 如何 亦惟曰 自强不息而已矣 請言其目 其一 在朝經幄之臣 非不立立 而只其籌衡應文備例而已 林下躬經讀書 老成碩德之士 不患無人 別選輔導之任 專委啓沃之責 簡其禮貌 致其誠敬使之朝夕納誨也 其一 聖學之最先得力者 莫如六經史乘 而聖賢格致誠正之工 古今理亂興廢之跡 無不備載 後學之柯則 前代之龜鑑也 熟玩詳味 優游厭飫 以正其本源 以明其治道 而餘外百家諸書 徒涉汗漫 無益於身心 而反有害於明善窮理之工矣 其一 開言路 乃所以廣聰明 而其有資益於學問思辨之工大矣 夫以人君之尊 處深宮廈氈之中 其何以明達庶務 知周萬物乎 所以置臺閣言責之官 凡係衮職闕遺 時政得失 人物贓否無不盡言極諫 而非特委之於諫諍之官而已 闢四方之門 來四方之言 好問好察 從諫弗咈 此所謂開言路廣聰明 而言路開則衆善畢集 聰明廣則德器自成 聖學之進 其可量哉 其一 屛其耳目玩好奇技之物 前後左右不正之類 凡可以喪德者 無或接於心目體周武旅獒之訓 漢文却馬之戒 一日之間 惟與賢士大夫 親近講究於几案方冊上工夫 而人主一心萬化之原 人心惟危 道心惟微 人心者 私慾也 道心者 善理也 可不慥慥省察於危微之幾哉 其一 顧今日悠悠萬事 宜莫大於成就聖學 保嗇聖躬而0殿下一身 卽宗庙生靈之主 其所十分頤養之方 凡於飮食起居之節 無不隨處節愼 一動一靜一語一默 俱是養正作聖之工也 苟或寒曝有時 作撤無常 則其何以日就月將 躋于聖敦之域哉 伏願殿下 惟精惟一 以期爲堯爲舜之聖焉 何謂恤民隱也 書曰 民惟邦本 本固邦寧 肆又召公之戒成王也 以諴小民 爲祈天命之本 夫民雖至愚而至卑可愛而亦可畏也 其可愛可畏 只以民心之向背 而其所以向背 在乎爲人上者之恤隱與否 恤者 懷保惻怛之謂也 隱者 疾苦恫瘝之謂也 苟論今日之民勢 何事非疾苦 何事非恫瘝 而自我祖宗朝子視之遺民 一朝盡入於推溝倒懸之中 無所控告 怨徹穹壤 特九闥旣邃 四聰未達耳 請言其目 其一 擇守令明黜陟 爲有民有邑之第一政 而民命休戚 係於守令 守令治否 係於方伯 其所榮其爵重其祿 非爲其人一人一家之私也 昔孟公綽優於趙魏老 而不可謂滕薛大夫 則人之爲才 固難無備 而百里之命 豈可人人而寄之哉 國朝取人 專以世祿之故 自來銓注之規 初非爲官而擇人 必爲人而擇官 地閥爲先 其所顔私 其所蹊路 而只論邑況之豊薄而已 雖有每政擇差之 飭敎 未見對揚之實效 又若殿最考績之法 龔·黃·杜召·之循良 范滂·蘇章之風采 夫何專美於古昔 而炎凉太明 愛惡太偏 褒者未必明 貶者未必幽 苟其邑腴而餽厚 何患乎不陟 人微而勢孤 奚徃而不黜 其未能擇其人 又未能明其黜陟 民邑之偏受其害 亦惟曰 選部方伯之責 而大公至正 無偏無私 其不在代天之工乎其一 恤民之政 莫先於薄稅斂輕徭役 而今日繁重之弊 可勝言哉 以言乎糴糶 古所以爲民 今所以厲民 而奸吏舞弄 上下交征 剝民之肌髓 浚民之膏血 究其實則邑邑虛簿 在在烏有 而千弊百瘼 指不勝摟矣 以言乎賦稅 田政定制 自有惟正之常數 而無名科外之徵斂 年增歲加 其所謂結斂戶斂 阾徵族徵 至再至三 不啻比前而倍蓰 至於各樣上納之 非意乾沒 逐年愆期 蕩盡無復有法意矣 以言乎軍政則迯故塡代之法 先通檢驗査實之後 自官庭面看疤丁 乃是不易之常法 而近來各邑 一切廢却 只以一片紙小兒名 出帖徵番 虛實愈眩 奸弊滋興 此不過厭煩避苦 創出無前無窮之弊矣 凡此三政之紊亂 皆所以無民無邑之張本 而於是乎蔀屋之甁甖升斗 鼎鐺鋤鎌 無日不搜奪 無事不搜奪看 作斂民之長技 竟敀吏隷之囊橐 安有責在字牧之任者 任他㤼掠之事 而苟是當捧當納之物 則官有常法常刑 夫安用搜民産奪民財也 唉彼窮民 終歲盻盻 不能一日之安堵 呼號載路 閭里蕭然 似此光景 足可以上干天和 此而不別般加恤 到底察隱 其何以民有孑遺乎 其一 斯民之憔悴虐政 未有若此時之甚 而我 慈聖殿下前後飭諭之惻怛懇摯 有可以感泣神 然猶惠化未沾 民不▣▣鴻嗷魚喁 去而益甚 邇來數年之間 前日之完▣無不弊敗 曩時之殘況 無不夥多 此何故焉 苟欲有國而有民 其嚴法令大懲創 在所不已 一犯贓汚不法之罪 徵其贓物 還屬本邑 以謝其民 終其身永痼不叙 則尙可以少懲也耳 伏願殿下 念玆在玆 以救如焚如溺之命 何謂之立紀綱也 詩曰勉勉我王 綱紀四方 昌黎韓愈之言曰 善計天下者 察紀綱之理而已 夫紀綱者 人主之權柄 王庭之關和 而若網之有綱 絲之有紀 網無綱則不能張 絲無紀則不能理 自古有國以來 何嘗有紀綱之理而乱 不理而治者 而苟使善計國者 試論今日之紀綱 當以謂何如時耶 恬嬉成習而百僚惰怠 禁網解弛而庶事叢脞 內而各司 外而列邑專事姑息之彌縫 了無經法之顧忌 至若灾歲蠲停之特惠 大僚申奏之行會 終歸於閼而不行 澤不下究 朝廷之上 曰綱 曰紀 可以擧一而反隅 如此而國之爲國 未敢知也 請言其目 其一 我朝聖聖相承 典章文物 燦然備具 此所謂欲法堯舜當法祖宗者也 導德崇礼 以明先王之道 信賞必罰 以行先王之政 不愆不忘 是則是傚 以之正朝廷以正百官 正四方以正萬民 則表端而影直 風行而草偃 自然有不期然之效矣 其一 五刑五流有國之紀綱 而近來王章太寬 赦典太頻 陽春霈澤之典 雖是天地好生之德 小人之幸 君子之不幸也 除非罪犯大故 擧皆薄勘旋宥 晏然若無故者然 苟無常法常刑之可畏 則凡係怙縱故犯之事 何憚而不爲乎 上無道揆 下無法守 此之謂也 其一 頻命繡衣之臣 按法持斧 巡行列邑 是亦紀綱中一事也原濕皇華 周爰諮諏 風聲所及 奸猾幷息 蓋其懲貪墨伸冤枉察幽隱 有非按道方伯之比肆惟前後名碩之名 亦多建白頻遣之事 雖或吐剛而茹柔 亦豈因噎而廢食 徒法不能以自行 而一年二年 有聞無聲 可勝歎哉 伏願 殿下之綱之紀 以励無忌無憚之習焉 何謂節財用也 大易節之爲卦 卽澤上有水 止而涵蓄之象 而君子以之而有曰 節以制度 不傷財不害民 又按大學絜矩章 卽治國平天下之事 而終之以財用 夫財用之於有國 關係重矣 無財 不可以爲國 不節 不可以有財 而生之有道 用之無限 生者衆而用者舒 則財用足矣 生者寡而食者衆 則財用竭矣 窃念 國計之哀痛未有甚於今日 而傳曰 財聚則民散 夫何財不聚而民散 國無一年之蓄 村皆十室之空■歟 抑賦稅太减經用愈煩歟 典守不謹而姦究莫遏歟人皆曰 將何以利吾家利吾身 而民窮財竭 愈往愈甚 詎無所以然而然哉 請言其目 其一 崇節儉然後 方可以祛奢侈 祛奢侈然後 方可以足財用而生財莫如節儉 糜財莫如奢侈 夫宮室器用輿馬聲色衣服飮食 何莫非日用之尾閭 而擧世靡靡 以儉爲恥 凡所以窮侈極奢 縱情肆欲者 無不有於此 財蓄何由而不匱竭 人物何由而不彫耗乎 此所以君子犯義 小人犯刑 而末流之弊 窮斯濫矣 其一 長國家務財用 聖人之所戒也 大學傳曰 與其有聚斂之臣 寧有盜臣夫聚斂者 斂民謂也 而寧爲盜國之財 不可斂民之物 大易損益之戒 有若盍徹之對 其義一也 而雖斂民而益於國 猶且不可 又况斂民而益於己哉 其一 近來侈濫之成習 不止於傷財 甚至於傷人 恭惟我 正宗大王 深軫外邑侈濫之弊 隨現罪罷 著爲定式 其時之所嘗承聆記睹者 而夫何年久禁弛 武臣之輪車 蔭倅之翼轎 已極侈濫 而又所謂乘轎之通用 此何物也 此何事也 無論尊卑貴賤老少男女之別 道里远近 祈寒盛暑之時 必也舍馬肩輿 替人膝行 謂之簡便勝馬 而曾不念肩者之背汗脅息 喘喘欲死 噫 人與馬孰重孰輕 而古者象人作俑 聖人猶責其無後 何况以人代畜視之 不如馬乘乎 傷財害人 怙侈蔑義 莫此爲甚 而恬不知恠 一世成風 誠不異哉 伏願 殿下 躬先節儉 以興上行下化焉 何謂之講戎政也 易 重門擊柝 以待暴客 蓋取諸豫 夫戎政者 陰雨備豫之事 而幷用長久之術也 雖古昔聖明之世 未嘗無討叛伐罪之擧 不得已而用之者 兵也 安固不可以忘危 治固不得不慮亂 而顧今昇平日久 玩渴成習 凡屬武備之事 視同文具 置之忘域 今日之疎虞 倘有一朝之警 卽奚異於藉寇兵而齎盜粮也 請言其目 古者兵農之制 獨不可復講於後世耶 今之說者曰 古今異宜 兵農殊塗 軍旅之事 固不可耕且爲也 夫古之農者 卽井地受田之民 而有田則有農 有農則有兵 相須相資 初非二致 而一家一丁 出兵之常也 何嘗如今日疊丁虛伍之弊耶 自夫此法廢壞 農自農兵自兵 而民不知兵矣 近世■戶布之議 卽倣兵農之遺訓 亦可謂富强之策而先正臣李珥所嘗陳達於章奏者也 終不能講究法制 斷然行之 可勝惜哉 其一 鍊兵閱武 卽是敎養之常制 而傳曰 以不敎民戰 是爲棄之 苟非常時之敎養 其何以臨猝而應敵乎 挽近軍政之寒心 專由於操習之年年停廢 而說者 除非興師動衆之時 民邑之受弊 人心之繹騷 不可以不慮也 此乃狃於苟安 諫於謀國之論也 苟是可停可廢之事 則停之可也 廢之可也 而其奈不可停而停之 不可廢而廢之 內外營閫之元戎帥臣虛擁兵權 徒縻重寄 怠忽修擧之政 弛廢鍊習之方 至若編伍之虛額 餉需之欠逋 器械之蠧傷 城堡之頹廢 任他一邊 曾不留意 擧是河上之重矛 棘門之兒戲幸而太平而無虞 終可安享 不幸倉卒而有變 亦可以坐視耶 其一 天時地利 俱是人和之不如 而若夫城池甲兵米粟虛實多寡 還屬虛文外具 多助之地 天下順之 寡助之地親戚叛之 夫豈不然 而聖人言之哉 大抵窮則思乱 乱則思治 小民之情也 試察今日之民情 和乎 不和乎 思■治乎 思乱乎 昔吳起 只列國名將也 其戒魏侯之言曰 在德不在險 夫修德然後 方可以人和 人和方可以親上而死長矣 伏願 殿下 儆戒不虞,以奠泰磐鞏固之業焉 何謂革科弊也 詩曰 愷悌君子 遐不作人又曰 王多吉士 伏未知近世科試之取人 皆可謂作人亦可謂多吉乎 當當禮圍之試 亟之紛競之習 是豈士子之所欲 而夫人幼而學之 壯而欲行之 又豈其所學然也 不如是則不得爲故也 而除書不出 物色先定云者 政爲今之時準備語也 一經場屋 物議沸騰 士習日就詿誤 世道日漸淆漓 此豈尋常細故也哉 請言其目 其一 古者庠序學校之設 賓興貢擧之制 其所以立敎明倫 蒐羅作成之美 顧如何哉 親策賢良孝廉之士 以取方正直言之人 當是之時 敎化明於上 風俗興於下朝以其禮 士尙其志 孰肯爲包羞之事 從他笑罵於人哉 謹稽中廟朝 有意淳古之治 申復科第 慨然行之 而一代賢俊 于于彙征 君子進而小人退 理勢固然也 奸凶媢疾 釀出士禍 竟使良法美制 作一覆轍之前鑑 豈非志士之恨乎 其一 我朝立國定制 專尙經學寄齋等諸規 其燕翼貽謨之長远 可以想見於悠久之後矣 夫五經四書 帝王之典謨聖賢之心法 卽堯舜禹湯文武周公孔孟程朱之遺書也 誦其言讀其書者 其礼段心術之正 宜無異端邪岐之惑 而比之於風雲月露之爭姸妬媚 倩人借手者 不可同年而語矣自夫世降俗偸 厭薄經術 變換經制 殊非愛礼存羊之義 而名之曰 講儒 講科則羞與爲伍 擯而不數 於是乎聖經賢傳之書 束之高閣 無復正學於斯世 向者洋學之煥幾乎 變一世於夷狄禽獸 而有識之憂嘆 厥惟久矣 其一 如今科試之弊猝難遽議其矯革 而夫設科將以取人 將以用賢 苟如今日之選士 雖日取百人 歲取千人 家紅而戶白 朝靑而暮紫 尙何望朝廷之得人 而賢材之登庸乎 靜究厥由 百弊之形形色色 蠧國病民 皆從科目中流出來耳 人臣之義 所貴乎勿欺 則欲事君而先欺君者 烏在其取人之義耶 爲今之計 惟有面試一事 不敢欺吾君於面前 許多■矯弊 只在一轉移之間 何患乎有司之不公不明 士習之如此如彼 伏願 殿下 丕變士趨 以盡鳶魚作興之方焉 大較礼義廉恥 是謂四維 而人之所以爲人 國之所以爲國 以其有四維也 漢臣賈誼之疏曰 四維不張 國乃滅亡 孟子曰 無惻隱羞惡辞讓是非之心 非人也 今此所陳奚但曰 四維之不張 而何者是惻隱羞惡 何者又辞讓是非乎 矧今災異疊現 警告丁寧觀形察影 必有所由 正宜君臣上下恐懼修省之不暇 而窮則變變則通 此乃傾否回泰之理也 窃念 頹波之泛濫 尙可以堤防 燎原之烈炎 尙可以撲滅 而副手之喚 將伯之助孰任其責 將何倚恃 其在同休共戚之地 宜有扶頹持危之策 寧或憂國不如憂家愛君不如愛身乎 如臣狗馬螻蟻之賤 尙亦■四朝逮事之舊物 獲覩大聖人親賢樂利之盛化 齒髮雖老 耳目猶存 而言念國事之日非 至於如此 攬古傷今日 無非見所不見 聞所不聞 則中夜不寐 繞壁彷徨自不覺如狂而如醉 何暇顧瞻於一世之忌諱 衆目之觸忤 而忌諱者 非國家之福也觸忤者 是藥石之戒也 出位論事 非臣義分之■(事)所敢 而嫌於越俎 有懷自阻 則此生此世 更有何酬報之日哉 然猶不敢索言枚擧 猥徹 宸聽 殆若緩聲徐步於心痛事時急 不能效先正臣趙憲之雪涕陳章 極言竭論 臣罪萬死 臣無任席蒿族勘 戰慄屛息 祈恳之至丙申正月十七日 縣道封進 二月十二日 承批省疏具悉 疏辞令庙堂稟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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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疑信之間 功有彼此之別 然后始可參酌 而取舍之矣惟彼諸臣死節之實蹟 雖不可盡考 而廟焉享之 額而榮之者 實在於平亂之初 則其死明白万賞 不待考蹟而可證左契况且可據實蹟 昭載於旌忠壇麗牲之文 取考其略 則有曰倡義使金千鎰與梁山璹等數十人 北面再拜 赴南江而死 李宗仁及姜熙烈等十餘人 奮釖斬力盡而死 又曰宗仁將死 腋二賊赴水 大呼曰 金海府使李宗仁死於此 其忠壯氣節 有令人髮竪者矣 屹然龜頭 日星耀映 昭昭赫赫 照人耳目 則載實之文 有不可誣矣 噫 當時之立廟幷享 旣出公議 中間之劖石齊芳 又是實蹟 則諸臣心事之昭著 可謂通天地亘古今 而不可疑信於其間矣 伊日 朝議 亦奚■惜死後之哀 贈 巧 爲參酌而取舍之乎雖彼隸做之賊 苟有可賞之事 則其酬板之道 不當分別而視 豈以諸臣之忠 俱辦一樣之節 而獨於 贈職之典 有何彼此之異乎 事在久遠 不可臆料 而博採有識之流傳 參以愚臣之淺慮 則當乱離甫定之初 庶事未遑之時 道臣之馳狀請 贈者 未免疏漏之患 禮宦之奉命宣恩者 或有忘忽之弊 因循至今 未能上澈之致也 此豈由於參酌取舍而然哉 至於到今過百年之後 不可率爾輕議云者 尤有所不然 苟有卓卓之節 烈烈之名則 雖或湮沒於當時 猶且褒揚之異代 矧惟我 聖朝崇獎旌表之方 不間於歲月之久近者乎 臣不必旁引而曲證 請以死節於壬辰 而 贈旌於近日者明之 忠淸兵史臣成應吉 副司果臣李瑋 俱是倭乱殉身之人 而乃於百餘歲後八九年前 始因其子孫之呼籲 特擧 贈旌之恩典 則何獨於此不輕議乎 果若定取舍於當時 不輕議於今日 寵 贈均典 終始獨靳 則彼此卄一人忠魂義魄 不亦寃鬱於冥冥之重耶 此臣所以激切于心 而愍惻于中者也 且臣嘗閱柳夢寅所著野談一冊 有曰 論介者晉州官妓也 當萬曆癸巳之歲 金千鎰倡義帥 入據晉州 以抗倭 及城陷軍散 人民俱死 而論介凝粧靚服 立於矗石樓下峭岩之前其下萬丈 直入波心 羣倭見而悅之 皆莫敢近 而獨一倭 挺然直進 論介笑而迎之 遂其倭直投于潭 彼官妓淫娼也 而視死如歸 不汚於賊 渠亦 聖化中一物 不忍背國從賊 無他 忠而已 猗歟哀哉云 夢寅以文章名 爲此傳 頗詳密 臣每讀至此 未嘗不掩卷而嘆異之 及到晋營 矗石之下藍江之上 果有峭石 而義岩二字 大刻其上 臣訪於古老 則乃是論介殺身殱賊之處 而其所傳說 頗與古記無異 臣見嵓而聞其說 不覺義胆之自激也 噫 當時之乱 屈節賣身者 不知幾何人哉 而孰謂一娼妓 能辨士君子所難乎 昔者薛仁杲之降將旁地仙之復叛也 有王氏女 取地仙所佩刀 因刺地仙而斃之 詔封崇義夫人 以旌其義 夫論介之所成就 詎下於王氏之後哉 嗚呼 野記一編 芳名昭載 蒼嵓半面 義字不爛 而泯沒至今 獨無旌美 此不但賤 臣之所歎惜 實是南士之共咨嗟者也 如臣愚賤 地卑言微 前日再 啓 俱未得行 則事不當 更爲煩瀆 而且臣所管事務蝟劇 凡於恤軍賑飢之方 尙未自遑 則誠知此等事 不急於目前非關於分內 而猶且不避猥越 妄自論列者 哀彼諸臣一妓之取義抱冤 而旣無子孫之呼籲 終絶 天聦之登徹 故不容泯默而止 玆敢冒昧而陳 伏願殿下 勿以人廢言 特於卄一諸臣 均施 贈職之典 官妓論介 亦知旌表之章 用慰抑㭗之魂 以爲激勸之方 不勝幸甚臣無任激切祈懇屛營之至 謹眛死以 聞批附卿以上疏上送矣 省疏具悉 當初區別 必有委折 義嵓雖存 野談所記 何可憑信 且百餘年之事 似難輕擧 而卿之欲褒忠烈之意 嘉矣 其令廟堂稟處事 有 旨閒處起亭邀客登雪殘孤迓暮雲騰开階層疊生叢石荷沼潔堅鏞練氷夸堗夕朝溫供火几筵晨夜熟親燈老愚無料人嘲莫離却俗情心如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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化民 曺敬煥 鳳煥 泣血上書于城主閤下 伏以民之曾祖與高祖山龍眉上至近之處 智谷居崔煥泰偸葬於再昨年臘月 故先捧掘移之手標 過限不掘 故仰訴於前等 城主 而題音內有曰 龍眉上步數至近他人塚不可置也 以四月晦內納侤以給是白加尼 亦爲過限 而且先世以曺崔兩姓相勿犯葬之意完約恍若日星之明 傳爲士民之誦 是如噫彼煥泰 素以頑拒敗逆著於一鄕 而不有 官令 不顧先約 專以凶臆爲主 民之此寃徹天難伸 玆敢伏乞于新莅嚴明之下爲去乎 參商敎是後 卽爲督掘 以杜遐俗壓葬之幣 千萬祝手爲白只爲行下向敎是事城主 處分甲申二月 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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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4년 병조(兵曹) 관(關) 고문서-첩관통보류-관 兵曺 全羅道觀察使 關 *3顆(8.0×8.3)*關(墨印, 9.5×6.5) 광주 민종기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874년(고종11) 6월에 병조(兵曹)에서 전라도관찰사(全羅道觀察使)에게 도내 해남에 사는 임복손(林福孫)의 순장 임명 사실을 전하며 상경하도록 시키라고 보낸 관 1874년(고종11) 6월에 병조(兵曹)에서 전라도관찰사(全羅道觀察使)에게 발급한 관(關)이다. 전라도 해남에 사는 가선대부(嘉善大夫) 임복손(林福孫)을 순장(巡將)에 차하(差下: 임명)하였으니 서울에 올라와서 임무를 보도록 해읍(該邑)에 지시하라는 내용이다. 이 경우 전라도관찰사는 다시 해남현에 이 사실을 관(關)으로 전하고, 해남현에서는 전령(傳令)이라는 문서를 내려 임복손에게 전달할 것으로 보인다. 당시 전라도관찰사는 이병효(李秉斅)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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첩관통보류

兵曹爲相考事 道內海南居嘉善林福孫 巡將差下爲有置上來察任之意 該邑良中 知委施行 宜當向事 合行移關請照驗施行 須至關者右 關全羅道觀察使同治十三年六月相考行書 [關印] [署押]【和順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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