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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일 初二日 다시 들어가 고하였는데, 장석(丈席)은 담벽증(痰癖症)과 치질(痔疾)로 간혹 말을 주고받는 사이에 끙끙 앓았다. 이에 허락을 받지 못하고 물러 나왔으니 걱정스럽다. 更爲入告, 而丈席以痰癖痔疾, 間或呻吟於酬酢之間, 故不得受許而退, 悶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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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일 初五日 사랑에 머물며 때때로 나아가고 물러 나왔다. 산정(刪正)도 하였다. 留廊底有時進退, 亦爲刪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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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일 初六日 오촌(鰲村)에 들어가 절구 한 수를 지었다.십여 일 온갖 고초 겪은 끝에(萬苦千辛十日餘)이제야 간신히 인후한 고을에 이르렀다네(間關始到里仁廬)마을 앞 흐르는 냇물 드넓고 뒷산은 높은데(前川水闊山高後)그 사이 초가 있어 장자13)가 살고 있네(中有茅宮長者居)윤익(允益)이 차운하였다.고향을 뒤로하고 북쪽 향해 온 지 십여 일(背南首北十日餘)험한 여정 끝에 이곳에 이르렀어라(間關行色到此廬)물 따라 밀려온 자라가 이른 듯한 마을인데(水流鰲退格當村)그 위에 하늘이 내린 장자가 살고 있구나(其上天然長者居)이찬(而贊)이 용담(龍潭) 정재팔(丁載八)에게 시를 지어 주었다.객지에서 같은 도의 친구를 만나니(客裡相逢同道友)예전에 본적 없어도 더욱 오랜 친구 같아라(曾雖無面倍知舊)함께 모여 놀지도 못하고 도로 이별하는데(團遊未極還爲別)어느 때나 다시 손을 맞잡을른지 모르겠네(不識何時更握手)나도 그에게 주었는데, 시는 다음과 같다.오촌 문하 높은 제자 중 이런 사람 있다니(鰲門高弟有斯人)그 용모 단아하고 몸가짐 신중하여라(端雅其容謹飭身)오손도손 맘껏 즐기지 못하고 이별하는데(未極團欒旋贈別)푸르고 푸른 강가 나무 새봄을 둘렀구나(蒼蒼江樹帶新春)윤익이 주었는데, 시는 다음과 같다.객지에서 만난 사람과 친구를 맺었나니(客地逢人結親友)교분의 깊고 친밀함이 옛 친구 같아라(交契深密如故舊)가련타 한 자리에 모여 얼마간 얘기 나누는데(可憐一席多少話)머지않은 훗날 다시 손을 맞잡을 수 있으려나(早晩他時更握手)내가 차운하였다.고상한 친구 처음 만나 이야기를 나누니(逢初敍話是高友)오랜 친구인 듯 한참을 앉아 회포를 풀었네(坐久論懷若故舊)몇날 며칠 밤 베개를 나란히 하여도 부족하니(聯枕數宵猶不足)회화나무 꽃 노래지면14) 다시 만나 손을 맞잡으세나(槐秋爲約又摻手)또 절구 한 수를 읊었다.선조의 일 경영하려 현자의 집에 이르렀는데(經營先事到賢門)다행히 저버리지 않고 정성스런 은택 베푸시네(幸被不遐眷眷恩)그믐 이래로 실컷 취하고 배불리 먹으니(承晦以來精醉飽)한 무더기 화한 기운15)에 사시가 훈훈하네(一團和氣四時薰) 入鰲村, 吟一絶曰: "萬苦千辛十日餘, 間關始到里仁廬。 前川水闊山高後, 中有茅宮長者居。" 允益次曰: "背南首北十日餘, 間關行色到此廬。 水流鰲退格當村, 其上天然長者居。" 而贊贈龍潭 丁載八韻曰: "客裡相逢同道友, 曾雖無面倍知舊。 團遊未極還爲別, 不識何時更握手。" 余贈之曰: "鰲門高弟有斯人, 端雅其容謹飭身。 未極團欒旋贈別, 蒼蒼江樹帶新春。" 允益贈之曰: "客地逢人結親友, 交契深密如故舊。 可憐一席多少話, 早晩他時更握手。" 余次曰: "逢初敍話是高友, 坐久論懷若故舊。 聯枕數宵猶不足, 槐秋爲約又摻手。" 又吟一絶曰: "經營先事到賢門, 幸被不遐眷眷恩。 承晦以來精醉飽, 一團和氣四時薰。" 장자 '장자(長者)'는 덕망이 있는 사람을 뜻으로, 여기서는 오촌 송치규를 가리킨다. 회화나무 꽃 노래지면 원문의 '괴추(槐秋)'는 홰나무 꽃이 누렇게 변할 무렵의 가을이라는 뜻이다. 당(唐)나라 때 과거에 실패한 응시생들이 6월 이후 계속 장안(長安)에 머물러 공부하면서 서로 간에 시험 문제를 출제하여 실력을 점검한 뒤 홰나무 꽃이 노랗게 될 즈음에 해당 관원에게 새로 지은 글을 작성하여 천거되기를 원했으므로 '홰나무 꽃이 노래지면 수험생들이 바빠진다.[槐花黃, 擧子忙.]'라는 말이 유행했다. 《南部新書 卷乙》 한 무더기 화한 기운 사양좌(謝良佐)가 정호(程顥)의 인품을 평하기를 "명도 선생은 온종일 단정히 앉아 있을 때에는 흙으로 만든 소상과 같았으나, 사람을 대하면 완전히 한 덩어리의 화기셨다.[明道先生, 終日端坐, 如泥塑人, 及至接人, 則渾是一團和氣.]"라고 하였다. 《近思錄 卷14 觀聖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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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일 初七日 아침을 먹기 전에 남평(南平) 댁에 가서 문병하고 왔다. 이는 병이 든 뒤에 처음으로 나갔다 들어온 것이다. 오후에 비가 온종일 내렸다. 朝前往南平宅, 問病而來, 此是病後, 初出入也。 午後雨作終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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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일 二十二日 여러 날을 머물러 있으면서 청한 문자를 받아가려는 생각에 동행 윤익(允益)을 오후에 행장을 꾸려 내려 보냈다. 객지에서 서로 헤어지니 서글픈 마음을 말로 다할 수가 없었다. 欲爲多日留連, 奉請文字受去之意, 同行允益, 午後治發下送。 客裡相分, 悵懷不可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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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四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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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1년(신미) 1811年(辛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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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춘 仲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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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춘 仲春 아! 이는 선고(先考) 절와부군(節窩府君)1)께서 우리 집안의 보첩(譜牒)과 선조 충강공(忠剛公)의 시호(諡號)를 청하는 일로 서행(西行)한 것을 기록한 일기(日記)이다.아! 선조가 아름다운 행적을 남겼는데도 자손이 그것을 기술하지 않는다면 이는 자기 선조를 잊어버린 것이요, 선조가 아름다운 행적이 없는데도 자손이 거짓말을 꾸며서 치켜세운다면 이는 자기 선조를 기만한 것이다. 잊어버린 것과 기만한 것이 비록 성격은 다르다 할지라도 불의(不義)의 나락에 떨어지는 것은 매한가지이다. 그러므로 문인(文人)이나 학사(學士)들이 그 선조의 덕을 스스로 기술한 것은 이루 다 기록할 수 없을 정도로 많다. 태사공(太史公) 사마천(司馬遷)은 스스로 그 세가(世家)의 실보(實譜)를 기술하여 선열(先烈)을 잊지 않았으며, 주자(朱子) 또한 위옹(韋翁)2)의 행록(行錄)을 기술하되 선조의 뜻을 기만하지 않았으니 후세 사람들이 이를 훌륭하게 여겼다. 불초가 비록 옛사람의 만분의 일이라도 감히 바랄 수는 없지만 어찌 감히 거짓말로 꾸며 선조의 덕을 기만하겠는가.아! 우리 선고(先考)께서는 충효 집안의 명성을 잘 따라 선업을 빛내고 후손을 위하는 것으로 자신의 책무를 삼아 10여 년 동안 서울을 오르내리는 것이 거의 수십 차례였는데, 시호를 내려 주는 은전(恩典)이 특별히 내려 백대(百代)의 보첩(譜牒)이 능히 완성되었다.아! 진실로 우리 선조의 순수한 충성과 아름다운 절의가 대범하고 특출한 것이 아니었다면 어떻게 조정의 은전을 받을 수 있었겠는가. 또한 우리 선고(先考)의 선조를 위한 성의(誠毅)가 지극한 것이 아니었다면 또한 어찌 그 일을 이룰 수 있었겠는가. 다만 선인(先人)이 뜻을 두었으나 아직 이루지 못한 것이 남아 있다. 이는 근대(近代) 양세(兩世)에 시호(諡號)를 청하는 일로 여러 차례 상언(上言)을 올렸는데 끝내 은전을 받지 못하였다. 이 때문에 통탄스럽기 그지없지만, 깊이 생각해보건대 한 집안의 대사가 동시에 이루어진다는 것이 일의 형편상 끝내 쉽지 않아서인지, 아니면 혹 시운이 돌아오지 않아서 그러한 것인지는 알 수가 없다.아! 일의 전말이 여기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으니, 불초(不肖)가 감히 덧붙일 수 있는 것이 아니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건대 위의 기록은 햇수에 따라 기록되어 있어 혹은 물에 잠겨 자획(字畵)을 판별하기도 어렵고 혹은 먼지 속에 파묻혀 문리(文理)를 이해하기도 어려워 세월이 오래되면 장차 유실(遺失)되고 훼손되는 결과를 면치 못할 것 같았다. 그러므로 감히 이를 수집하고 베껴 써서 한 권의 책으로 만들어 우리 집안의 유물3)로 만들고, 장차 우리 선고(先考)의 자손 된 자들로 하여금 그 일을 생각하여 척연(惕然)히 계술(繼述, 선대의 사업을 계승)하게 하고 이 책을 열람하여 출연(怵然)히 느끼고 사모하여 백세(百世)토록 실추되지 않게 한다면 또한 어찌 선조를 계승하고 후손에게 복록을 물려주는 도리가 아니겠는가. 이에 감히 외람됨을 잊고 대강의 전말을 서술하였다.숭정기원 후 네 번째 신미년(1811, 순조11) 중춘에 불초고(不肖孤) 석년(錫年)이 피눈물을 흘리며 삼가 쓰다.서행록(西行錄) ③ - 송석년(宋錫年) 嗚呼! 此先考節窩府君, 爲吾家譜牒與先祖忠剛公請諡事, 西行錄日記也。 噫!, 先祖有美實, 而子孫不述焉, 則是忘其先也; 先祖無美實, 而子孫飾虛辭稱道之, 則是誣其先也。 忘與誣雖殊, 其陷於不義則一也。 是故文人學士, 自述其先德者, 不可殫記。 太史遷自述其世家實譜, 而不忘其先烈, 朱夫子亦述其韋翁行錄, 而不誣其先志, 後世韙之。 不肖雖不敢望古人之萬一, 而安敢飾虛辭誣先德也? 嗚呼! 吾先考克遵忠孝家聲, 以光先裕後爲己責, 十餘年間, 上下京洛將至數十度, 而贈諡之恩典特蒙, 百代之譜牒克成。 噫! 苟非吾先祖精忠姱節磊落偉卓, 安能蒙朝家之全? 亦非吾先考爲先誠毅之極, 亦安能就其事乎? 但先人之有志, 未就者存焉。 近代兩世請諡事, 累呈上言, 終未蒙恩典。 庸是爲痛遺恨, 盖深竊想一家之大事, 同時幷成, 事勢之終未易而然歟? 抑或運會之不迴而然歟? 嗚呼! 事之顚末, 詳記於是錄, 則非不肖所敢贅者, 而竊恐右錄隨年隨記, 或水沈而字畵難辨, 或塵埋而文理難曉, 歲久年深, 將未免遺失而毁傷, 故敢此收集謄, 合爲一卷, 以爲吾家之靑氊, 將使爲吾先考之子孫者, 想其事而惕然繼述, 覽是編而怵然感慕, 以至百世而不墜, 則亦豈非承先貽後之道也耶? 玆敢忘猥, 略敍顚末。崇禎紀元後, 四辛未之仲春, 不肖孤 錫年, 泣血謹書。 절와부군(節窩府君) 송지행(宋志行)을 가리킨다. 부군(府君)은 죽은 아버지나 남자 조상을 높여 이르는 말이다. 위옹(韋翁) 주자의 부친인 위재(韋齋) 주송(朱松, 1097~1143)으로, 남송 고종 때의 문신이자 학자이다. 위재는 호이고 자는 교년(喬年), 시호는 헌정(獻靖)이다. 남송 고종 때 이부랑(吏部郞)의 벼슬을 지냈으나 간신 진회(秦檜)가 주도하는 금나라와의 화의에 반대하다가 폄적되었다. 저서로 《위재집(韋齋集)》 등이 있다. 청전(靑氈) 대대로 전승된 가업(家業)이나 한 유물을 가리킨다. 진(晉)나라 왕헌지(王獻之)가 누워 있는 방에 도둑이 들어와서 물건을 모조리 훔쳐 가려 할 적에, 그가 "도둑이여, 그 푸른 모포는 우리 집안의 유물이니, 그것만은 두고 가는 것이 좋겠다.[偸兒! 靑氈我家舊物, 可特置之.]"라고 하자, 도둑이 질겁하고 도망쳤다는 고사가 있다. 《晉書 卷80 王羲之列傳 王獻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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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일 初十日 ○아침 전에 정동으로 가서 잠시 얘기를 나누고 돌아왔다. 밥을 먹은 뒤 용동으로 가서 종일 수정 문적을 보고 왔다. ○朝前, 往貞洞, 暫話而來。 食後, 往龍洞, 終日見修整文蹟而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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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일 初八日 ○밥을 먹은 뒤 용동으로 가서 종일 놀며 쉬다가, 돌아오는 길에 동구안(돈화문(敦化門) 앞길) 약방으로 가서 내일 거동(擧動, 임금의 행차)할 때 여기 와서 구경하겠다는 뜻을 언급하고 주인집으로 돌아왔다. ○食後, 往龍洞終日遊憩, 而來路, 往洞口內藥房, 以明日擧動時, 來此觀光之意言及, 而還主人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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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일 十一日 ○아침 전에 백운동(白雲洞)30)에 갔는데, 사서(司書) 이인필(李寅弼)은 광주(廣州)로 출타하여 그 조카 이정하(李正夏)하고만 작별하였다. 호정동(瓠井洞)으로 내려와 김병기(金秉耆)를 조문하고, 오면서 창정동(昌井洞)의 권중건(權中建) 집에 들러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다. 돌아오는 길에 삼청동(三淸洞)31)에 들러 이병하(李秉夏) 숙질(叔姪)을 조문하였다. 오면서 장생전교(長生殿橋)32)의 생원 이장구(李章九) 집에 들러 《장릉사보(莊陵史補)》33)를 보고, 충강공(忠剛公)34) 사적(事蹟)을 베껴서 왔다. 밥을 먹은 뒤 용동에 갔다가 오후에 돌아왔다. ○朝前, 往白雲洞, 則李司書寅弼出去廣州, 只與其姪正夏作別。 下來瓠井洞吊金秉耆, 來入昌井洞權中建家暫話。 來路入三淸洞, 吊李秉夏叔侄。 來入長生殿橋李生員章九家, 見《莊陵史譜1)》, 謄忠剛公事蹟而來。 食後, 往龍洞, 午後還來。 백운동(白雲洞) 서울시 종로구 청운동에 있던 마을로서, 항상 흰 구름이 떠 있는 명승지인 데서 마을 이름이 유래되었다. 삼청동(三淸洞) 서울시 종로구의 중앙부에 있는 동이다. 지명은 도교의 태청(太淸)ㆍ상청(上淸)ㆍ옥청(玉淸)의 3위(位)를 모신 삼청전(三淸殿)이 있었던 데서 유래하였다. 장생전교(長生殿橋) 서울시 종로구 연건동과 이화동 사이에 있던 다리이다. 조선 시대 궁중에서 사람이 죽었을 때 필요한 관곽(棺槨)의 제작과 수선을 담당하던 관청인 장생전(長生殿) 앞에 이 다리가 놓여 있었으므로 '장생전 다리'라고 불렀다. 장경교(長慶橋), 장교(長橋) 등으로도 불렀다. 장릉사보(莊陵史補) 1796년(정조 20) 왕명으로 단종에 관한 사적을 모아 편찬한 책이다. 앞서 1791년 5월 왕명으로 이의봉(李義鳳)과 윤광보(尹光普) 등이 편집한 것을, 1796년 5월 왕명에 따라 이서구(李書九)ㆍ이의준(李義駿)ㆍ윤광보 등이 다시 교정하고, 정족산 사고(鼎足山史庫)의 실록을 참고하여 보고된 별단(別單)을 참조하여 이서구가 최종적으로 《장릉지(莊陵誌)》 9권 3책을 완성하여 바쳤다. 찬진 당시에는 서명을 '장릉지'라 했으나 '장릉사보'로 바뀐 것은 기존 《장릉지》와 구별하기 위한 것으로 추정된다. 충강공(忠剛公) 송간(宋侃, 1405~1480)이다. 호는 서재(西齋)이며, 본관은 여산(礪山)이다. 세종ㆍ문종ㆍ단종의 3조를 섬겨 벼슬이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이르렀다. 단종이 영월로 쫓겨갔다는 소식을 듣고 고향으로 돌아가 두문불출하다가 단종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자 깊은 산 속에 들어가 3년상을 마치고, 전라남도 고흥군 동강면 마륜리에서 은거하였다. 補 저본의 '譜'는 사료에 근거하여 '補'로 수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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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일 初三日 ○아침을 먹은 뒤 관정동에 가서 우 참봉(禹參奉)과 박상현을 만났다. 그 자리에 모르는 손님 서너 명이 있었다. 그래서 그 사는 곳을 물으니 고부(古阜)에 산다고 하였다. 그 성명을 물으니 두 사람은 김씨 성이고, 한 사람은 배씨 성이였다. 내가 정축년(1637, 인조 15) 호란(胡亂) 당시, 덕원 부사(德原府使)로 안변(安邊)에서 전사한 배공(裵公)113)이 누구인지 물이니, 그의 8대 조부라고 답하였다. 그 또한 우리 선조 승지공(承旨公)114)이 누구냐고 묻기에, 나는 나로서 5대조 되신다고 하였다. 모두 같은 날 전사한 분의 후손으로, 뜻하지 않게 만나 대대로 이어온 정의를 푸니 기쁘기 그지없었다. 나중에 서로 찾아볼 생각으로 그가 머무는 데를 물으니 창동 객점이라고 하였다.그길로 정동의 석사 이혜길(李惠吉) 집으로 갔다. 안부 인사를 나눈 후 그 조카 선(善)의 천연두가 어떤지 물으니, 낭패를 당해 참담하다고 하였다. 그길로 그 아우 집으로 가서 상을 당한 곡절을 위로하며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다. 안채에서 몇 가지 음식을 내와서 몹시 고마웠다. 그길로 묘동(廟洞)으로 가서 공서와 잠시 얘기를 나눈 뒤에 용동의 참봉 이경화(李景燁) 집으로 와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곳이 곧 《성원현록(姓苑賢錄)》의 개간소였다. 돌아오는 길에 관정동(冠井洞)에 들러 공서와 이야기를 나누고 함께 유숙하였다. ○朝食後, 往冠井洞, 見禹參奉及朴祥顯。 座上有不知客數三人。 故問其所居, 則居在古阜云。 故問其姓名, 則兩人以金爲姓, 一人以裵爲姓。 余問丁丑胡亂時, 德原府使戰亡於安邊裵公爲誰, 則答以渠八世祖。 而渠亦問吾祖承旨公爲誰, 故余以吾爲五世祖。 俱是同日戰亡人後裔, 意外相逢, 敍其世誼, 其喜可掬。 日後尋訪之意, 問其所住處, 則蒼洞旅店云矣。 仍向貞洞李碩士惠吉家。 敍暄後, 問其姪兒善痘與否, 則見敗云慘矣。 仍往其弟氏家, 慰其見慽之由暫話。 自內間出送數器饌以饋, 可感可感。 仍向廟洞, 與公瑞暫話後, 來龍洞李參奉景燁家談話。 此卽《姓苑賢錄》開刊所也。 來路入冠井洞, 與公瑞談話, 同留宿。 배공(裵公) 배명순(裵命純, 1597~1637)이다. 자는 수초(遂初)이고, 본관은 성산(星山)이다. 병자호란 때 퇴각하는 후금(後金) 군사의 뒤를 추격하여 안변 남산역(南山驛)까지 이르러 강행군을 하던 중, 복병의 기습을 받고 전사하였다. 무덤은 성주군 조곡에 있다. 병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충숙(忠肅)이다. 승지공(承旨公) 송심(宋諶, 1590~1637)이다. 자는 사윤(士允)이고, 본관은 여산(礪山)이다. 1614년(광해군 6)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북변수비에 종사하고 돌아온 뒤에는 노모를 봉양하며 벼슬에 나가지 않았다. 전라도 병마우후(兵馬虞侯), 홍원 현감(洪原縣監)을 거쳐 1636년 병자호란 때 함북 병마절도사 이항(李沆) 휘하에서 척후장(斥候將)으로 있다가 화의가 성립되자 횡포를 부리며 철수하는 후금군사를 추격하여, 안변 남산역(安邊南山驛)에서 전 ㆍ후 영장(前後營將)과 함께 분전 끝에 전사했다. 좌승지(左承旨)로 추증되고, 고흥 서동사(西洞祠)에 제향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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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일 十三日 ○아침 먹기 전에 자윤(子允)과 계성사(啓聖祠)35)로 가서 김팔주(金八柱)를 만나 한참 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다. 작별하고, 경모궁(景慕宮)36)으로 내려와 수문장(守門將) 장인원(張仁源)이 출번(出番, 당직 근무를 마치고 나옴)했는지를 물으니 아침 일찍 출번하였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곧바로 파천동(波川洞) 그의 집으로 갔는데, 밥을 먹고 출타한 터라 만나지 못해 몹시 아쉬웠다. 이 사람은 홍원(洪原)37) 사람이다. 무침교(無沈橋)38)의 진사 송현재(宋顯載) 집에 찾아갔는데, 마침 출타하여 만나지 못하였다. 돌아오는 길에 회동의 송 장성을 만나 전주 북문의 송민수 서간에 답장을 받고자 한다고 말하니, 공교롭게 몸이 아파서 답장을 쓰지 못했다고 하였다. 그대로 작별하였다. 송지순의 집으로 내려와 작별한 뒤에 낙동(洛洞)의 구백(舊伯) 이광문 집으로 와, 잠시 만나고 나서 작별하였다. 용동으로 오니 자윤이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개간소(開刊所)의 여러 사람과 작별하고 주인집으로 돌아왔다.아침을 먹은 뒤에 정동으로 가서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다. 오는 길에 확교(確橋)39)의 송 판서 집에 들렀으나, 송 판서가 출타하여 작별할 수 없었다. 다만 그 아들 송지학(宋持學)과 작별하고 나와 주인집으로 왔다. 차동(車洞)40)으로 가서 민 석사와 작별하고 오니 공서이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오후에 정동의 석사 이혜길이 찾아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날이 저무는 바람에 출발하지 못하고 그대로 머물렀다. 그러므로 저녁을 먹고 난 뒤 정동에 와서 묵으라고 간절히 부탁하고 갔다. 저녁을 먹은 후 정동으로 갔다. 밤에 비가 내렸다. ○朝前, 與子允往啓聖祠, 見金八柱, 移時談話。 仍爲作別, 下來景慕宮, 問張守門將仁源出番與否, 則早朝出番云。 故直向波川洞其家, 則食後出他, 故仍爲不見, 悵悵。 此人卽洪原人也。 尋往無沈橋宋進士顯載家, 則適出他不見, 來路入晦洞見宋長城, 以完北宋民洙書簡受答爲言, 則適以身病不爲修答云。 仍爲作別。 下來宋持淳家, 作別後, 來洛洞舊伯李光文家, 暫見後, 仍爲作別。 而來龍洞, 則子允來待矣。 與開刊所諸人作別, 來主人家。 朝飯後, 往貞洞暫話。 來入確橋宋判書家, 判書適出他, 不得作別。 只與其子持學作別, 出來主人家。 往車洞與閔碩士, 作別而來, 則公瑞來待矣。 午後貞洞李碩士惠吉來訪談話, 以日暮之致, 不得發程, 仍留。 故夕飯後, 來留貞洞之意, 懇托而去。 夕食後, 往貞洞。 夜雨。 계성사(啓聖祠) 서울시 문묘(文廟) 안에 공자(孔子) 등 다섯 성현의 아버지를 모신 사당이다. 경모궁(景慕宮) 서울시 종로구 창덕궁에 있는 사도세자(思悼世子)와 그의 비(妃) 헌경왕후(獻敬王后)의 사당이다. '경모전(景慕殿)'이라고도 했다 홍원(洪原) 함경남도(咸鏡南道)의 남부해안 중앙에 위치하는 군이다. 무침교(無沈橋) 서울시 중구 예관동과 충무로5가 부근에 있던 다리이다. 청계천의 지류인 묵사동천(墨寺洞川)에 있던 다리로 '물에 잠기지 않는 다리'라는 의미이다. 김정호의 <대동지지>와 <수선총도> 및 <슈션전도>에는 이 다리 이름이 '상무침교'로 표기되어 있다. 따라서 무침교와 상무침교를 혼용해서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일명 '무침다리' 혹은 무침교를 줄여서 '침교'라고도 불렀다. 확교(確橋) 서울시 중구 서소문동과 신창동(새창골) 북쪽에 있던 다리이다. 1966년 발간된 ≪한국지명총람≫에 의하면 이 고을에 학다리가 있어 마을 이름이 학교동(鶴橋洞)이 되었다고 하며, 일명 확교(確橋)라고도 불렀다. 차동(車洞) 중구 의주로1가ㆍ순화동에 걸쳐 있던 마을로서, 수렛골을 한자명으로 표기한 데서 마을 이름이 유래되었다. '추모동'이라고도 하였는데, 이는 조선 숙종의 계비 인현왕후가 태어난 터에 비석을 세우고 그를 추모했던 데서 붙여진 지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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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일 十四日 ○아침에 나와 주인집으로 돌아왔다. 애초 일찌감치 출발할 예정이었으나 궂은 날씨 탓에 그대로 아침을 먹었다. 종일 비가 그치지 않았다. 오랜 가뭄 끝에 이렇게 단비가 내리니 매우 기쁘고 다행이다. ○朝出, 來主人家。 初以早發爲定矣, 以雨戱之致, 仍朝飯。 終日雨不止。 久旱之餘, 得此好雨, 忻幸忻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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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일 二十日 ○아침 먹기 전에 들어가 장석(丈席)을 뵈었다. 일행이 장석을 만나고자 하였으므로 먼저 얼굴을 돌려 나왔다. 아침을 먹은 뒤에 일행과 들어가 장석을 뵙고 한참 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다. 여옥이 《충열록(忠烈錄)》 1권을 드렸다. 그길로 하직하고 나와 출발하였다. 신탄(新灘) 저자 주변에 이르러 기주(欺酒)를 사서 먹었다. 신탄을 건너 유성(油城) 저자 주변에 이르러 점심을 먹었다. 성전(星田)52)의 집성사(集成祠)53)에 들러 참배를 하고 봉심(奉審, 사당을 살핌)을 하였다. 곧 주부자(朱夫子)와 송우암(宋尤菴) 두 선생의 영정이었다. 주부자의 영정 위에는 '문공 회암 주선생 진상(文公晦菴朱先生眞像)'이라고 쓰여 있었다. 우암의 영정 위에는 '문정공 우암 송선생 진상(文正公尤菴宋先生眞像)'이라고 쓰여 있었다. 봉심하고 난 뒤에 강당으로 나와 잠시 쉬고 나서 출발하였다. 산정령(散亭嶺)을 넘어 척후(尺後) 주막에 이르러 유숙하였다. 50리를 갔다. 절구 1수를 다음과 같이 읊었다.천 리 먼 노정을 멀다 않고 찾아오니(千里長程不遠尋)선연히 남은 영정이 예나 지금이나 같네(分明遺像古猶今)종종걸음으로 뜰을 지나 참배하니 비루한 마음 없어지고(趨庭瞻拜消鄙吝)저절로 천추토록 경외하는 마음이 생기네(自發千秋敬畏心) ○朝前, 入謁丈席。 同行欲見丈席, 故先爲旋容出來。 朝飯後, 與同行入謁, 移時談話。 汝玉納《忠烈錄》一卷。 仍爲下直而出來, 發程。 至新灘市邊, 買欺酒以食。 越新灘, 抵油城市邊午飯。 歷入星田集成祠, 參謁奉審。 卽朱夫子、宋尤菴兩先生畵像。 如朱夫子影幀上, 書文公晦菴朱先生眞像;尤菴影幀上, 書文正公尤菴宋先生眞像。 奉審後出來講堂, 暫憩後登程。 越散亭嶺, 抵尺後酒店留宿。 行五十里。 吟一絶曰: "千里長程不遠尋, 分明遺像古猶今, 趨庭瞻拜消鄙吝, 自發千秋敬畏心。" 성전(星田) 대전시 유성구 학하동 별밭 마을이다. 집성사(集成祠) 선조 혹은 선현의 신주나 영정을 모셔두고 배향하는 곳으로 사당, 사우라고 한다. 고려말 주자학이 도입되면서 향촌 교화 정책의 일환으로 건립되었다. 특히 중국 남송 때의 유학자 주희를 모시는 사당이 많이 건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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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일 初七日 ○밥을 먹은 뒤 10냥을 개간소에 냈다. 저녁 무렵 관정동으로 돌아왔다. 저녁을 먹은 뒤 정동으로 가 이혜길 집에서 묵었다. ○食後, 持十兩錢納刊所。 夕時還冠井洞。 夕飯後, 往貞洞留李惠吉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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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일 十五日 ○밥을 먹은 뒤 여러 벗과 종루로 갔다. 비 때문에 발이 묶여 저녁때까지 비가 개기를 기다렸다. 나는 정동으로 들어가 유숙하였다. ○食後與諸益往鍾樓, 滯雨夕間待霽。 余則入貞洞留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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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일 二十六日 ○아침 전 북문 밖 송약수(宋若洙) 집으로 가니 형제가 모두 없어서 도로 주인집으로 왔다. 아침을 먹기 전에 읍인 박광옥(朴光玉)이 관원을 데리고 부중(府中)으로 찾아왔다. 아들이 보낸 편지를 열어보니 집안은 별고 없고 14일에 손자를 낳았다고 하였다. 우리 집안의 경사로 아주 큰 행운이었다. 예전에 서울에 있을 때 꾼 꿈과 점괘가 실로 헛되지 않았다. 밥을 먹은 뒤 율지와 함께 영주인(營主人)129) 집으로 가서 흥양 하인을 만났다. 돌아서 남문 밖으로 가서 류석하(柳錫夏)를 찾았는데 마침 출타하고 없었다. 그길로 동문으로 들어가 북문으로 나왔다. 마침 종인(宗人, 먼 일가) 상준(相俊)을 만나 송약수 씨 형제가 들어왔는지를 상세히 물으니, 오늘은 들어오지 않는다고 하여 주인집으로 돌아왔다. 노자가 부족해서 김제의 이 상인(李喪人)에게 1냥을 꾸었다. 그길로 출발하여 동문(東門)을 나와 법사산(法司山)의 노원(魯源) 집으로 가서 유숙하였다. 회동의 일가 송 장성의 서간을 전하고 여산의 석회 채굴을 금하는 일에 대해 상의하였는데, 11월 시사(時祀) 때 각처의 일가와 상의하여 소장을 올리겠다고 하였다. ○朝前, 往北門外宋若洙家, 則兄弟皆不在, 還來主人家。 朝飯前, 邑人朴光玉陪官行來, 府中來訪。 傳家兒書披覽, 則家中無故, 十四日得男孫云。 吾家之慶, 極爲大幸。 向日在京時, 夢中與占理, 實不虛矣。 食後, 與聿之往營主人家, 見興陽下人, 轉向南門外, 訪柳錫夏, 適出他 仍入東門出北門。 適相俊宗人, 詳問5)若洙氏兄弟入來與否, 則今日不入云, 故還來主人家。 以路貰之不足。 推一兩錢於金堤李喪人。 仍爲發程, 出東門, 往法司山魯源家留。 傳晦洞長城宗氏書簡, 相議於礪山禁灰事, 則至月時祀時, 與各處宗人相議入呈云。 영주인(營主人) '영저리(營邸吏)'라고도 하며, 감영(監營)과 각 고을의 연락을 맡아보는 아전을 말한다. 問 저본에는 '聞'으로 되어있으나 문맥상 수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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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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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부

29일 二十九日 ○밥을 먹기 전에 출발하여 선제정(先帝亭) 주점에 이르러 아침을 먹었다. 부용치(芙蓉峙)를 넘어 창화(昌華) 객점에 이르러 점심을 먹었다. 상동(上東) 주막에 이르자 날이 벌써 저물었다. 마침 강성주(姜聖周)를 만나 그와 함께 유숙하였다. 80리를 갔다. ○食前發程, 抵先帝亭酒店朝飯。 越芙蓉峙, 抵昌華店午飯。 抵上東幕日已暮矣。 適逢姜聖周。 與之同留。 行八十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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