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7년 박희수(朴希壽) 등 상서(上書) 고문서-소차계장류-소지류 朴希壽 禮曹堂上 堂上<押> □…□ 7顆(8.0x8.0) 광주 민종기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857년에 박희수 등이 예조에 올린 이인걸·이정필 정려 요청 상서. 1857년(철종 8) 8월에 전라도 나주에 사는 박홍수(朴希壽) 등 27명이 예조(禮曹)에 올린 상서(上書)이다. 이들은 같은 해 6월에 이어서 영암(靈巖) 지역의 이인걸(李仁傑, ?~1593)과 그의 증손 이정필(李廷弼, 1640~)의 충절을 설명하고 정려(旌閭)를 내려달라고 호소하고 있다. 이인걸은 문충공(文忠公) 이제현(李齊賢)의 후예로서 무과에 급제하여 관직은 첨정(僉正)에 이르렀는데, 임진왜란 중 권율(權慄) 원수(元帥)의 휘하에서 싸우다가 행주(幸州) 전투에서 순절하였다. 이정필은 무과에 합격하고 선전관을 지내다가 귀향하여 부모를 봉양함에 정성을 다하였고, 묘소를 지키다가 강아지를 타일러 무덤을 더럽히지 못하게 한 사연과 머리카락을 주머니에 넣고 다니면서 항상 눈물을 흘린 행동 등으로 마을 사람들이 "세상을 감동시키는 효자[感物孝子]", "머리카락에 우는 효자[泣髮孝子]"라고 칭했다. 이런 행적은 당연히 정려(旌閭)를 받아야 하므로, 두 분의 묘소를 관리하는 묘지기 각 1명과 산지기 각 3명의 군역을 영구히 면제해 주고, 영암군의 산소 아래에 있는 망호정(望湖亭) 마을의 잡역을 면제해 달라고 요청하고 있다. 이에 대해 예조의 당상(堂上)은 29일에 "한 문중의 충효가 사람의 공경을 일으키고 있다. 포양(褒揚)하는 절차는 식년을 기다렸다가 하고, 연호와 잡역은 이전과 같이 물지 않는 것이 마땅하다."라고 처분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