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8년 성균관(成均館) 통문(通文) 고문서-서간통고류-통문 成均館 珍島鄕校 西班首李<着名>, 東班首趙<着名> 광주 민종기 (재)한국학호남진흥원 HIKS_Z999_99_A01758_001 1858년 6월에 성균관에서 진도에 사는 종실 후손을 향교의 직임에 임명하라는 요청을 진도향교에 보낸 통문 1858년 7월 1일에 성균관에서 珍島鄕校로 보내는 通文이다. 진도군에 사는 종실 후손인 李啓春 등을 유생이 맡는 직임에 임명하라는 요청을 담고 있다. 통문 서두에서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그쪽 군읍의 臨淮面, 牧場面에 사는 李啓春, 李明濟, 李寅植 등은 곧 우리 定宗大王의 제9자인 石保正의 후손입니다. 떠돌다가 바닷가 시골에 살고 있고 지금은 비록 한미하지만 金枝玉葉입니다. 유림 사이에서 校院의 직임으로 마땅히 우대해 주어야 합니다. 최근에 들으니, 그쪽에서 물리치고 반열에 끼워주지 않았다고 합니다. 소중한 璿源의 계파를 대하는 의리는 어디에 있습니까."라고 하고 있다. 이어서 통문을 보낸 구체적인 목적을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이에 士論이 격하게 일어나서 화양서원과 죽림서원이 성균관의 장관에게 사림의 의문을 묻는 통문이 도달했습니다."라고 하고 있는데, 여기서 진도향교에서 定宗의 제9자인 石保正의 후손에게 유림으로써 대할 도리를 하지 않은 조치에 대해 항의하고 있고, 이는 화양서원과 죽림서원이 성균관에 알리는 통문을 보낼 정도로 조직적으로 진행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통문에서 요구하는 구체적인 조치 전주향교에서 요청하는 바와 같이 속히 석보정의 후손을 '章甫之任' 즉 향교의 임원으로 임명하라는 것이다. 여기서는 '俎豆之列'에 나란히 할 수 있게하라고 표현하는 문구가 있다. 이는 석보정의 후손이 홀대받은 구체적인 사건이 향교에서 시행한 제사에 참여하지 못한 일이었을 가능성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