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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부기록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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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령류

1905년 이면의(李冕儀) 관고(官誥) 고문서-교령류-관고 宮內府 李冕儀 宮內府印(6.5x6.5), 宮內大臣之印(3.2x3.0) 광주 민종기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905년 이면의를 숙릉참봉에 임명하는 관고 1905년(광무9) 3월에 공내부(宮內府)에서 이면의(李冕儀)를 숙릉참봉(淑陵參奉)에 임명하고 판임관(判任官) 8등으로 서임하는 관고(官誥)이다. 궁내부 관인이 찍혀 있고, 문서의 발급자로 "의정부찬정(議政府贊政) 궁내부대신(宮內府大臣) 임시서리(臨時署理) 의정부 찬정(議政府贊政) 이재극(李載克)이라고 적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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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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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간통고류

경신년 서간(書簡) 초(草)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광주 민종기 (재)한국학호남진흥원 경신년 2월 25일에 모인이 물품의 제작에 관한 사무를 전하는 내용으로 작성한 답장 편지의 초안. 경신년 2월 25일, 물품의 제작에 관한 사무를 전하는 내용으로 작성한 답장 편지의 초안이다. 앞면과 뒷면에 각각 편지가 쓰여 있으나 내용은 거의 동일하고 몇 구절만 수정하였다. 작성자를 알 수 없지만 중간에 자신을 '생(生)'으로 지칭했다. 여러 달 지난 시간이 마치 일 년 같다는 것, 요즈음 정체(靜體)인 당신은 잘 지내심을 알아 기쁘다고 했다. 자신은 전과 같이 지낸다고 하고, 한문(寒門)이라 냉품(冷品)하다며 이것이 이 시기의 본분(本分)이라고 했다. 보내주신 수작업 물건이 매우 좋다며 아이를 보낼 테니 직접 만나주시기를 바란다고 하였다. 며칠 뒤에 찾아뵙겠다고 인사하며 답장 편지를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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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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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빙류

1897년 위영식(魏永植) 준호구(準戶口) 고문서-증빙류-호적 長興郡守 魏永植 □…□ (7.5×7.5), 周挾字改印 광주 민종기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897년에 장흥군 관아에서 위영식에게 발급한 준호구. 長興郡 관아에서 호주인 魏泳植에게 발급한 1897년의 준호구이다. 본 준호구는 편제된 統戶를 비워둔 상태에 제출되어 나중에 붉은 먹으로 숫자를 채워 넣은 부분을 볼 수 있다. 이를 통해 애초에 호구단자 형식으로 작성하여 호주가 제출하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또한 [주협자 개인], 관인, 수령의 서압 등이 적혀 있고, '甲午戶口相準 印'라고 적혀 있다. 이는 호주가 제출한 호구단자를 접수한 고을 관아에서 추후에 기입한 부분으로, 준호구의 기능을 부가한 요소라고 할 수 있다. 18세기 이후에는 호적 작성 행정의 간소화로 인하여 호구단자와 준호구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경향이 나타났다. 즉 호주에게 1통의 호구단자를 제출하게 하여 그것에 수정 내역을 표기하고 착압·날인하여 되돌려줌으로써 준호구 역할을 겸하게 하거나, 처음부터 호주가 준호구 형식으로 작성하여 제출하면 관아에서 날인·착압하여 돌려준 경우가 종종 나타난다. 본 준호구는 전자에 해당한다. 위영식은 古邑面 山底里에 거주하고 있으며 제1통 1호에 편재되었다. 거주지는 원래 傍村里로 기재하여 제출했지만, 관아에서 추후에 山底里로 수정한 흔적을 볼 수 있다. 호주의 이름인 '魏泳植'은 같은 문서군의 다른 준호구에는 '魏永植'으로 적혀 있다. 호주의 직역은 幼學이고, 나이는 55세로 계묘년생이다. 본관은 長興이다. 같은 문서군에 포함되어 있는 다른 작성 연대의 서기 연도가 드러난 준호구와 비교하여 본 준호구의 작성연도를 파악할 수 있다. 위영식의 四祖를 보면, 父는 學生 喆基, 祖父는 學生 榮滉, 曾祖父는 通德郞 道僩이며 外祖는 學生 金洙澤(본관 金海)이다. 처 安氏는 47세 경자년생이며 본적은 竹山이다. 1890년의 준호구에는 처 안씨의 생년이 임자년으로 본 준호구와 차이가 있다. 처의 사조를 보면, 父는 學生 萬鉉, 祖父는 學生 時表, 증조부는 學生 仁煥이며 외조부는 學生 金贊斗(본관 金海)이다. 그리고 함께 살고 있는 아들 啓寬(25세, 갑술년생)과 며느리 金氏(26세, 임신년생, 본관 光山)이 기재되어 있다. 아들 계관의 출생년도는 1890년 준호구에는 계유년으로 적혀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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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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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빙류

古邑面傍村〔山底〕里 第一統一戶幼學魏泳植 年五十五癸卯 本長興父 學生 喆基祖 學生 榮滉曾祖 通德郞 道僩外祖 學生 金洙澤 本金海妻 安氏 齡四十七庚子 籍竹山父 學生 萬鉉祖 學生 時表曾祖 學生 仁煥外祖 學生 金贊斗 本金海率子 幼學 啓寬 年二十五甲戌婦 金氏 齡二十六壬申 籍光山丁酉式甲午戶口相準 印[周挾 字改印]行郡守[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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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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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빙류

1898년 위진식(魏震植) 준호구(準戶口) 고문서-증빙류-호적 長興郡守 魏震植 行郡守<押> □…□ (4.5×4.5), 周挾字改印 광주 민종기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898년에 장흥군 관아에서 위진식에게 발급한 준호구. 長興郡 관아에서 호주인 魏震植에게 발급한 1898년의 준호구이다. 본 준호구는 편제된 統戶를 비워둔 상태에 제출되어 나중에 붉은 먹으로 숫자를 채워 넣은 부분을 볼 수 있다. 이를 통해 애초에 호구단자 형식으로 작성하여 호주가 제출하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또한 [주협자 개인], 관인, 수령의 서압 등이 적혀 있고, '丁酉戶口相準 印'라고 적혀 있다. 이는 호주가 제출한 호구단자를 접수한 고을 관아에서 추후에 기입한 부분으로, 준호구의 기능을 부가한 요소라고 할 수 있다. 18세기 이후에는 호적 작성 행정의 간소화로 인하여 호구단자와 준호구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경향이 나타났다. 즉 호주에게 1통의 호구단자를 제출하게 하여 그것에 수정 내역을 표기하고 착압·날인하여 되돌려줌으로써 준호구 역할을 겸하게 하거나, 처음부터 호주가 준호구 형식으로 작성하여 제출하면 관아에서 날인·착압하여 돌려준 경우가 종종 나타난다. 본 준호구는 전자에 해당한다. 위진식은 古邑面 山底里에 거주하고 있으며 제1통 1호에 편재되었다. 호주의 직역은 幼學이고, 나이는 66세로 계사년생이다. 본관은 長興이다. 같은 문서군에 포함되어 있는 다른 작성 연대의 서기 연도가 드러난 준호구와 비교하여 본 준호구의 작성연도를 파악할 수 있다. 위영식의 四祖를 보면, 父는 學生 洪基, 祖父는 學生 榮啓, 曾祖父는 通德郞 道運이며 外祖는 學生 金琢(본관 靈光)이다. 처 文氏는 68세 기축년생이며 본적은 南平이다. 처의 사조를 보면, 父는 學生 在黙, 祖父는 學生 達觀, 증조부는 學生 亨光이며 외조부는 學生 張宗憲(본관 仁同)이다. 그리고 함께 살고 있는 아들 幼學 啓漢(45세, 계축년생)과 며느리 李氏(40세, 무오년생, 본관 仁川)이 기재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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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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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문기류

1855년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李宗碩 李宗碩<着名>, 金象鉉<着名> 광주 민종기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855년(철종 6) 9월 28일에 전주(田主) 이종석(李宗碩)이 영광군 후증도 소을등에 있는 밭을 팔면서 발급한 토지매매명문 1855년(철종 6) 9월 28일에 전주 이종석이 밭을 팔면서 발급한 토지매매명문이다. 이종석은 자신이 매득하여 갈아 먹던 땅을 쓸데가 있어 부득이하게 판다고 방매사유를 밝혔다. 방매 토지는 영광군(靈光郡) 후증도(後甑島) 마을 앞에 있는 소을등(所乙墱) 방축 앞머리에 있는 밭 미모(米牟) 3마지기이다. 이곳을 전문(錢文) 25냥을 받고 판다고 하였다. 본문기(本文記: 이전 거래 및 소유 증명문서)는 도문서(都文書: 모든 재산 내역이 한 데 기록되어 있는 분재기)에 붙어 있기 때문에 내어 줄 수 없다고 하였다. 문서 작성에 참여한 사람은 전주 이종석과 증인 김상현(金象鉉)이며, 전주가 자필로 문서를 작성하였다. 토지소재지인 전라도 영광군 후증도는 현재 전라남도 신안군 증도면 증동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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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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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문기류

咸豊五年乙卯九月二十八日 前明文右明文事段 自己買得畊食是如可 要用所致 勢不得已 郡地後甑島村前中所乙墱防築頭伏在田米年三斗落所畊 庫叱價折錢文貳拾伍兩 依數捧上 右人處永永放賣爲去乎 日後若有他談則此文憑考事亦在 本文都文書中幷付 故未得出給印田主 自筆 李宗碩[着名]證人 金象鉉[着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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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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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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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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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화

1949년 퇴계이선생권학가(退溪李先生勸學歌) 초(抄) 고문서-기타-서화 광주 민종기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949년 1월 초7일에 필사한 퇴계이선생권학가(退溪李先生勸學歌) 초(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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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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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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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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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령류

1719년 강덕상(姜德尙) 증조고(曾祖考) 강억지(姜億只) 추증교지(追贈敎旨) 고문서-교령류-고신 肅宗 姜億只 施命之寶(10.0×10.0) 광주 민종기 (재)한국학호남진흥원 HIKS_Z999_99_A01622_001 1719년(숙종45) 12월 3일에 강덕상 증조고 강억지를 통훈대부 예빈시정에 추증한 추증교지 1719년(숙종45) 12월 3일에 강덕상(姜德尙) 증조고(曾祖考) 강억지(姜億只)를 통훈대부(通訓大夫) 예빈시정(禮賓寺正)에 추증한 추증교지이다. 4품 이상 고신에 양식에 맞추어 첫머리에 '교지(敎旨)'라고 적고 본문에 강억지의 임명내용을 기록한 뒤 발급일자의 좌방(左傍)에 '가선대부(嘉善大夫) 가설(加設)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인 강덕상의 증조고(曾祖考: 돌아가신 증조할아버지) 이므로 법전에 의거하여 추증(追贈)한다.'라고 임명사유를 기록하였다. 추증 시 임명 법칙은 그의 부모는 자식의 관계에 준하고 조부모는 그보다 한 단계 낮게 주며 증조부모는 다시 한 단계 낮은 관계와 준직을 주도록 규정되어 있다. 강덕상이 받은 가선대부는 문·무관 종2품 하(下)의 관계이므로 증조고인 강억지는 그보다 두 단계 낮은 정3품 당하관의 관계와 관직에 봉하도록 되어 있었다. 통훈대부는 문관 정3품 당하의 관계이며, 예빈시정은 예빈시에 둔 정3품 관직이다. 예빈시는 조선시대 빈객의 연향(燕享)과 종실 및 재신(宰臣)들의 음식물 공급 등을 관장하기 위해 설치되었던 관서이다. 강덕상은 1714년 국가 진휼시에 조(租) 214석을, 1718년에 조 50석을 관에 납부함으로써 진휼에 대한 공을 세워 각 년도에 가설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의 첩(帖)을 성급(成給)받았다. 관리가 자신의 3대 조상을 추증 받을 수 있는 조건은 실직 정2품을 지내야 했는데 이로보아 가설직이라도 강상덕이 실직 동지중추부사에 임명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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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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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간통고류

數月如年, 景仰不已. 謹審日下,靜體候一享萬安, 諸節均吉,慰賀區區, 不任之至. 生喜非之狀, 伎倆前日, 外何可凂? 就悚, 寒門冷品, 此是本分, 惠送手品線味, 無或過度耶? 家兒起送, 而乃賴蓬直之益切企何也. 蠅能追遠, 豈非驥力歟? 子翼之切望切望耳. 餘在日後進拜, 謹不備謝候禮.(背面)數月如年, 景仰不已. 仍審日下 ,靜體候一享萬安, 諸節均吉, 慰賀區區之至. 生喜非之狀,伺倆前日外, 何可凂? 就寒門冷品, 此時本分, 惠送洋品線味, 無或過度耶? 家兒起送, 而乃賴蓬直之, 益切企何也. 餘在日後進拜,不備謝候禮.庚申二月二十五日.蠅能追遠, 豈非驥力耶? 子翼之切望切望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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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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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간통고류

기유년 백남인(白南寅) 서간(書簡) 2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白南寅 광주 민종기 (재)한국학호남진흥원 HIKS_Z999_99_A01726_001 기유년 12월 18일, 백남인이 사돈의 아드님에게 자신의 무사 귀가를 전하고 여러 날 머물렀던 것에 대해 실례했다며 인사한 편지. 기유년 12월 18일, 사하(査下) 백남인이 사돈의 아드님에게 자신의 무사 귀가를 전하고 여러 날 머물렀던 것에 대해 실례라고 인사한 편지이다. 밤사이 어른 모시고 잘 지내고 있는지 안부를 묻고 자신은 어제 집으로 잘 돌아왔다고 알렸다. 어린 사람처럼 여러 날 머물렀던 것이 대단한 실례가 아니었는지 인사하고 편지를 마쳤다. 서신 종이의 지질로 보아 기유년은 1909년 혹은 1969년으로 추측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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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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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간통고류

謹審數漢回,侍餘棣樂連護保重, 渾儀平吉, 慰溯區區. 査下再昨無事還家, 省率依前, 是幸已耳. 猶兒年淺之人, 多日留連, 倘不至大端失禮耶? 餘不備謝禮.己酉臘月十八日, 査下 白南寅 拜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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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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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문류

華甲今回六一年, 朱顔白髮似神仙, 兼全五福人人羨,豪氣風儀處處延, 肖子賢孫爭獻壽, 有朋有酒樂無邊, 無憂無事三平老, 錄慶綿綿後日傳.族從 載旭 謹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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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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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문류

1934년 위경규(魏璟奎) 시축(詩軸) 고문서-시문류-시 魏璟奎 광주 민종기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934년 3월 2일, 단강 위경규가 도곡 족속이 영남 옥계사를 다녀온 후에 지은 시에 차운한 것, 이별의 글에 차운하여 족숙에게 준 시, 장천재에서 제야를 보내며 차운한 시 각 1수를 적어 놓은 시축. 1934년 3월 2일, 족질(族侄) 위경규(魏璟奎)가 3가지 주제로 차운하여 지은 시 3수를 기록해 놓은 시축이다. 첫 번째는 도곡(道谷) 족숙(族叔)이 영남의 옥계사(玉溪祠)에 다녀온 후 지은 시에 차운한 7언절구 1수로 운자(韻字)는 능(能), 층(層), 도(都), 등(燈)이다. 두 번째는 별장(別章)에 차운하여 지은 7언절구 1수로 운자는 산(産), 신(新), 승(勝), 인(寅)이다. 세 번째는 장천재(長川齋)에서 제야의 밤을 보내며 지은 7언율시 1수로 운자는 한(寒), 간(看), 관(觀), 단(丹), 반(盤)이다. 위경규(魏璟奎, 1886~1946)는 조선 말기 유학자이자 교육자이다. 호는 단강(丹江)이며 본관은 장흥(長興)이다. 전라남도 장흥군(長興郡) 유치면(有治面) 출신으로 부친은 위계민(魏啓玟)이다. 어려서부터 남을 돕는 것을 좋아하였고 성품이 온화하였다. 고을 자제들을 교육하기 위해 사재(私財)를 들여 봉무재(鳳舞齋)를 짓고 몸소 교육하였으며, 광복 후에는 장흥향교(長興鄕校)의 초대 전교(典敎)를 역임하였다. 만년에는 단강(丹江) 근처에 영귀정(詠歸亭)을 짓고 시사(詩詞)로 소일(消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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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간통고류

무신년 윤우현(尹于鉉) 서간(書簡)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尹于鉉 광주 민종기 (재)한국학호남진흥원 무신년 12월 21일, 하생 윤우현이 상대의 아들의 청년지사 출범을 축하하는 내용으로 쓴 편지. 무신년 12월 21일, 하생(下生) 윤우현(尹于鉉)이 상대의 아드님이 청년지사(靑年志事)를 출범하는 일을 축하하는 내용으로 쓴 편지이다. 지난번 하룻밤 만났던 것이 자신의 인생에 다행스런 일이었다며 헤어진 뒤의 슬픔을 전했다. 그리고 지난번에 돌아가신 노정은 어떠했으며 요즈음 잘 지내시는지 안부를 물었다. 자신은 편모를 모시는 것이 어제와 같아 다행이라고 말하고 아드님이 청년지사(靑年志事)를 출범한다니 정말 법가의 자제라 할 만하다고 했다. 상대의 가문을 칭찬하고 또 자신에게도 좋은 일이라고 한 후 앞으로 종종 자신에게 보내주어 윤택함이 이르도록 해 달라고 청한 후 연말 인사를 하고 편지를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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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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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간통고류

頃者一宵得遂御李之誠 其在愚生 何幸如之 拜別後日頗窮 下懷伏悵 比尋常時萬般 伏不審再昨風程 修塗行邁利稅又伏請 日來靜養氣體候連享萬康否乎 伏溸區區 下悃罔任 生偏省依昔 伏幸何喩 就 允兄靑年志事出凡 眞可謂法家子弟 旣敢爲 尊閥賀旋 又爲殘門 幸遽爾 臨別悵望莫旣 伏望日後種種命送 使此劣生深撫麗澤之誼 千萬千萬耳 餘歲色隔紗 只冀啓居候餞迓康寧 不備伏惟尊察 謹拜上狀戊申十二月二十一日 下生 尹于鉉 再拜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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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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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문류

1900년 위계룡(魏啓龍)의 청계당족형수모회시축서(淸溪堂族兄壽母會詩軸序) 고문서-시문류-서 魏啓龍 광주 민종기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900년 음력 5월 5일 천중절에 족제 위계룡이 지은, 청계당 족형의 어머니 칠순을 맞아 설행한 모임인 수모회의 시축 서문. 1900년 음력 5월 5일 천중절에 족제 위계룡(魏啓龍)이 지은 청계당(靑溪堂) 족형의 어머니 수연(壽筵)을 설행하며 결성한 수모회(壽母會)의 시축(詩軸) 서문이다. 청계당 족형의 어머니는 광산김씨(光山金氏)로, 족형이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약 30년에 이르기까지 모셨던 홀어머니의 칠순을 축하하는 뜻으로 결성한 모임이 수모회(壽母會)이다. 수모회가 이루어지기까지의 과정과 어머니에 대한 애정을 읊은 내용이다. 마지막에 서문의 일자를 적고 나서 7언율시 1수를 적었다. 운자(韻字)는 당(堂), 강(康), 방(方), 장(藏)이며 '미정고(未定稿)'라고 적고 마쳤다. 위계룡(1870~1948)의 본관은 장흥(長興), 호는 오헌(梧軒), 관산읍 방촌리 호동 태생이다. 면암 최익현, 연재 송병선, 송사 기우만, 일신 정의림 문하에서 공부하였고 최익현이 의병을 일으키자 참여하였으며 이후에도 항일운동에 앞장섰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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