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계선생묘석역소(屛溪先生墓石役所) 의조록(義助錄) 고문서-치부기록류-부조기 광주 민종기 (재)한국학호남진흥원 병계 윤봉구 선생의 묘석을 세우는데 의연금을 낸 명단과 금전 내역. 병계(屛溪) 윤봉구(尹鳳九, 1683~1767) 선생의 묘석(墓石)을 세우는데 의연금을 낸 위씨가문 일곱 곳의 명단과 출연 금액, 조의 대표자의 이름을 기록한 치부록이다. '위백규(魏伯珪 存齋)댁, 일금24원, 오대손 계신(啓信)'등 일곱 곳의 명단과 금액(총56圓)이 적혀있다. 조의금(助義金)은 위존재(魏存齋 伯珪)댁 일금24원(5대손 啓信), 노죽와(魯竹窩 天政)댁 10원(4대손 城鐸), 위청계(魏聽溪 德穀)댁 종중 일금6원(10대손 啓洋), 위판서(魏判書 德和)댁 종중 5원(10대손 啓玟), 위안항(顔巷 德厚)댁 종중 일금4원(10대손 啓文, 啓龍, 8대손 澤基, 9대손 琠植 ), 위청금(魏廳禽 廷勳)댁 종중 일금3원(9대손 啓祥, 啓河), 위씨문중(古邑) 일금4원(8대손 萬植)이 총 56원을 마련하였다. 존재 위백규 선생(1727~1798)은 병계 윤봉구 선생의 제자로 사제 간에 깊은 인연이 있었다고 한다. 원래 병계 선생의 묘소 등 흔적이 있던 곳은 예산군 덕산면 상가리 가야산 일원이었다. 흥선대원군 이하응은 명당 풍수설을 믿고 1846년 경기도 연천에 있던 아버지 남연군 무덤을 많은 정성과 노력 끝에 덕산면 상가리 가야산 내 가야사를 철거하고 가야사지 터로 이장(移葬)하였다. 이로 인해 가야산 자락에 위치했던 선생의 묘소는 현손 헌일 때 지금의 예산군 봉산면 궁평리로, 아우 윤봉오 선생의 묘소는 공주시 유구면으로 강제로 이장되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