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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8년 이춘발(李春發) 준호구(準戶口) 고문서-증빙류-호적 靈光郡守 李春發 行郡守<押> 靈光郡戶口, 靈光郡守之印(7.0×7.0) 광주 민종기 (재)한국학호남진흥원 HIKS_Z999_99_A01569_001 1828년에 영광군(靈光郡)에서 한량(閑良) 이춘발(李春發, 59세)에게 발급한 준호구(準戶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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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9년 이중희(李仲希) 토지상환명문(土地相換明文)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朴聖淑 李仲希 朴聖淑<着名>, 金贊九<着名>, 全右賢<着名> 광주 민종기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889년(고종26) 10월 말일에 전주 박성숙이 이중희와 후증도의 밭을 서로 바꾸면서 발급한 토지상환명문 1889년(고종26) 10월 말일에 전주(田主) 박성숙(朴聖淑)이 이중희(李仲希)와 후증도의 밭을 서로 바꾸면서 발급한 토지상환명문이다. 박성숙은 자신이 사서 갈아 먹다가 쓸 곳이 있어서 부득이하게 거래를 하게 되었다고 거래사유를 밝혔다. 거래 토지는 영광군(靈光郡) 후증도(後甑島) 서면(西面) 상소을등(上所乙墱)에 있는 길가 전(田) 4마지기이다. 이 밭을 전문(錢文) 11냥을 받고 이중희가 소유하고 있는 후증도 당두리(堂頭里) 길가에 있는 밭 4마지기와 서로 바꾼다고 하였다. 문서 작성에 참여한 사람은 밭주인 박성숙과 증인 김찬구(金贊九), 필집(筆執) 전우현(全右賢)이다. 토지소재지인 후증도는 현재 전라남도 신안군 증도면 증동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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光緖拾伍年己丑十一月晦日李仲希前明文右明文事 買得耕食是如可 要用所致 故不得已 郡地後曾島西面上所乙墱路上 伏在田肆斗落只所耕庫叱 加錢拾壹兩依數捧上爲遣 以右人本島堂頭里路上伏在■■田肆斗落所耕 庫相換爲去乎 日後若有他談則 以此文記憑考事 六在田主 朴聖淑[着名]證參 全贊九[着名]筆執 全右賢[着名]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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光武捌年甲辰十月初五日 李中希前明文右明文事 買得賭租是如可要用所致 不得已 郡地後曾島西面古里沙嶝上伏在畓壹斗落果同坪西邊伏在畓貳斗落果南村前伏在畓貳斗落果所乙嶝伏在畓貳夜味壹斗伍刀落果村前堰頭伏在畓壹斗落斗數今柒斗伍升落只所畊 庫叱乙 折價錢文貳佰伍兩 依數捧上爲遣右人前此新文書壹丈 永永放賣爲去乎 日後如有相左之端則 持此文記憑考事亦在旧文書都文記並付 故不得出給印畓主 木浦 朴英俊[朴英俊信]證參 金守文[着名]筆 前五衛將 趙多文[署押]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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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3년 시장문기(柴場文記) 고문서-명문문기류-시장문기 南世用 南世用<着名>, 張信厚<着名>, 金元甲<着名> 광주 민종기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853년(철종4) 1월 9일에 시장주(柴場主) 남세용(南世用)이 영광군 후증도 서면 내장성동에 있는 시장을 방매하면서 발급한 시장매매명문 1853년(철종4) 1월 9일에 시장주(柴場主) 남세용(南世用)이 후증도에 있는 시장을 방매하면서 발급한 시장매매명문이다. 남세용은 물려받은 시장에서 풀을 베어 먹다가 가난 때문에 형편상 부득이하여 시장을 판다고 방매사유를 밝혔다. 방매 토지는 영광군(靈光郡) 후증도(後甑島) 서면(西面) 내장성동(內長城洞)에 있는 시장(柴場) 3홉(合)이다. 이곳을 전문(錢文) 2냥을 팔았다. 본문기(本文記: 이전 거래 및 소유 증명문서)에 대한 언급은 없으며 문서 작성시 참여자는 시장주 남세용과 필(筆: 문서 작성자) 장신후(張信厚), 증인 김원갑(金元甲)이다. 토지소재지인 전라도 영광군 후증도 장성동은 현재 전라남도 신안군 증도면 증동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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咸豊參年癸丑正月初九日 前明文右明文事段 由來刈草是如可 貧寒所致 勢不得已 灵光後甑島西面內長城洞伏在 柴場參合庫叱價折錢文貳兩 依數捧上爲遣 右人前 永永放賣爲去乎 日後若有雜談是去等 以此文記告官卞呈事柴場主 南世用[着名]筆 張信厚[着名]訂 金元甲[着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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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19년 강덕상(姜德尙) 처 배씨(裵氏) 고신(告身) 고문서-교령류-고신 肅宗 姜德尙 妻 裵氏 施命之寶(10.0×10.0) 광주 민종기 (재)한국학호남진흥원 HIKS_Z999_99_A01622_001 1719년(숙종45) 12월 3일에 강덕상(姜德尙) 처 배씨(裵氏)를 정부인에 임명한 4품 이상 고신 1719년(숙종45) 12월 3일에 강덕상(姜德尙) 처(妻) 배씨(裵氏)를 정부인(貞夫人)에 임명한 4품 이상 고신이다. 좌측에 기록된 연호방서(年號傍書)에 '가선대부(嘉善大夫) 가설(加設)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인 강덕상의 처(妻) 이므로 법전에 의거하여 남편의 직을 따르도록 한다.'라고 임명사유를 기록하였다. 강덕상이 받은 가선대부는 문·무관 종2품 하(下)의 관계이므로 처 배씨도 이에 맞추어 종2품에 해당하는 외명부 봉작명인 정부인에 임명되었다. 정부인은 문·무관 정·종2품의 처에게 주었던 외명부 봉작명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 가정대부(嘉靖大夫), 자헌대부(資憲大夫), 정헌대부(正憲大夫)의 아내에게 공통으로 주어지는 작호였다. 앞서 강덕상은 1714년 국가 진휼시에 조(租) 214석을, 1718년에 조 50석을 관에 납부함으로써 진휼에 대한 공을 세워 각 년도에 모두 가설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의 첩(帖)을 성급(成給)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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敎旨裵氏爲貞夫人者康熙五十八年十二月初三日嘉善大夫加設同知中樞府事姜德尙妻依法典從夫職[施命之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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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47년 강중태(姜重泰) 준호구(準戶口) 고문서-증빙류-호적 靈巖郡守 姜重泰 行郡守<押> □…□ (7.0×7.0), 周挾字改印 광주 민종기 (재)한국학호남진흥원 HIKS_Z999_99_A01647_001 1747년에 영암군(靈巖郡)에서 첨지(僉知) 강중태(姜重泰, 56세)에게 발급한 준호구(準戶口) 호주 강중태(姜重泰)와 妻 최씨(崔氏)의 생년이 계유생(癸酉生)으로 기재되었으나 임신생(壬申生)으로 수정되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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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50년 강중태(姜重泰) 준호구(準戶口) 고문서-증빙류-호적 靈巖郡守 姜重泰 行郡守<押> □…□ (7.0×7.0), 周挾字改印 광주 민종기 (재)한국학호남진흥원 HIKS_Z999_99_A01647_001 1750년에 영암군(靈巖郡)에서 통정대부(通政大夫) 강중태(姜重泰, 59세)에게 발급한 준호구(準戶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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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7년 강지백(姜之伯) 준호구(準戶口) 고문서-증빙류-호적 靈巖郡守 姜之伯 行郡守<押> □…□ (7.0×7.0), 周挾字改印 광주 민종기 (재)한국학호남진흥원 HIKS_Z999_99_A01666_001 1807년 1월에 영암군(靈巖郡)에서 유학(幼學) 강지백(姜之伯, 45세)에게 발급한 준호구(準戶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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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차계장류

신해년 이현영(李鉉榮) 등 단자(單子) 고문서-소차계장류-소지류 李鉉榮 靈巖郡守 官<押> 靈巖郡守之印 3顆(7.0x7.0) 광주 민종기 (재)한국학호남진흥원 HIKS_Z999_99_A01693_001 신해년 4월에 이현영 등이 영암군수에게 올린 산송 단자. 신해년 5월에 이현영(李鉉榮)·이규호(李圭浩)가 영암군(靈巖郡) 관아에 올린 단자(單子)이다. 이현영과 이규호는 하성조(河聖祚)가 군종면(郡終面)에 있는 선산에 투장(偸葬)하고 도망간 일로 여러 차례 정소(呈訴)하여 독굴(督掘)하기를 바라고 있으나, 그의 간계로 아직 이뤄지지 않고 있으니, 그의 노모(老母)와 처를 잡아가두고, 장교(將校)를 보내어 무덤을 파내달라고 요청하고 있다. 이에 대해 영암군 관아에서는 22일에 "하성조를 잡아와서 즉시 독굴(督掘)할 것"이라고 처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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郡終望湖亭居 化民李鉉榮李圭浩 惶恐仰達于城主閤下 伏以 民以河聖祚暗葬逃避事 累次呈訴 冀望督掘 而凶彼河漢 欲售奸計 尙此不至 究其所爲 極爲痛歎 而且以當初言之 渠以同邑常汗之子肆然偸埋於境內士夫先山壓脈當禁之地者 豈非蔑法犯分之大者乎 及至捉囚其老母之日 猶且逗遛於外 而不念其母之久滯 專爲其塚不掘之計則其所設心 有不可以人倫言之者也 其犯分也如是 其無倫也如是 則安望其他日自見於 官庭之下乎 伏念 河漢今雖不來 其母其妻 亦是山隻則使之掘祛其塚 亦爲當然 故玆敢更達爲去乎 伏乞 洞燭敎是後 捉致河漢之母與妻 眼同將校 卽爲掘移其偸塚 以厲凶漢奸猾之習 千萬至祝行下向敎是事城主閤下 處分辛亥五月 日期於捉得河聖祚 不日督掘事二十二日告金正光官 [署押][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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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미년 이생원(李生員) 등 완문(完文) 고문서-증빙류-완문 韓宗默 李生員 韓宗默<着名>, 金翊魯<着名>, 金顯澤<着名>, 林成春<着名>, 河永祿<着名>, 吉有宗<着名>, 尹守儉<着名> 광주 민종기 (재)한국학호남진흥원 기미년 10월에 이생원이 관아에 토지를 기부하고 받은 완문. 기미년 10월 28일에 영암군 관아의 刑房인 韓宗默 등이 발급한 완문이다. 발급한 고을은 표기되어 있지 않지만, 본 문서가 포함된 문서군이 영암 지역에 소재한 이씨 집안 문서이므로 영암군 관아에서 발급한 문서일 가능성이 크다. 작성된 서기연도는 알 수 없다. 완문의 본문은 고을 관아의 刑房에서 사용할 재정이 부족하여 여러 수요를 감당하기 어려웠던 차에 望湖亭에 사는 李生員이 토지를 재원으로 내어주었으므로, 이 사실을 기록해 두고 그 덕을 칭송하게 한다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형방의 재정이 부족한 이유는 본문에서 본 읍이 큰 도로의 옆에 위치하는 바람에 兵營과 水營 사이에서 겪는 폐해가 다른 읍에 비해 몇 곱절은 된다고 하고 있다. 즉 도로를 지나는 관리에게 지급하는 식량과 역참을 들고나는 人馬에 들어가는 비용이 전체 고을 중에 가장 많아서, 이를 개선하고자 하지만 재원을 염출할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이생원이 이러한 실상을 통촉하여 내놓은 토지는 黎字 자호의 논 3마지기이고 負數로는 11부 6속이었다. 이에 대해 형방에서는 고마움을 표현하길, "높은 은혜가 태산과 같아 그 問喪하는 도리에 있어서 가만히 있을 수 없다."라고 하고 있다. 여기서 원문은 "匍匐之道"라는 문구를 사용하였는데, 이생원댁에서 喪禮내지 葬禮에 대한 일을 겪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어서 그 보답으로 "이 댁의 산소를 禁養하는 절도와 그 밖에 보답하는 방안을 (수령의) 처분에 따라 힘을 모아 보답하길 도모한다."라고 하고 있다. 이 완문이 포함된 문서군에는 '신해년 이규호(李圭浩) 단자(單子)' 등 영암군에 올린 상송 문서가 포함되어 있다. 따라서 여기서 언급하는 '산소의 禁養'은 이생원 집안에서 겪고 있는 산송 문제와 연관이 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좀 더 적극적으로 추측을 해 본다면, 이생원댁이 진행하고 있는 산송을 잘 처리해 주는 대가로 고을 관아에 토지를 기부하고 이에 대한 증명서를 완문의 형식으로 발급받은 것으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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伏承僉尊聯慰, 感不容喩. 仰審僉體動止崇茂, 實慰遠頌. 生老年哀耦, 自是公道, 而况今古人所謂人皆來哭我耒歌時節. 惟幸無事入土耳.尊先竹塢公墓文, 盛喩如是勤摯, 有難固辭, 而老病艱於收拾精力, 奈何?俯詢神道西上禮意, 昭然其式,葬埋則從近於地勢, 墓祭獻酌, 不可變也.慰疎式, 卽日蒙恩, 如云遠念攸及云爾. 俯賜慰問, 自是實事, 未見其疊矣.是良少年, 年少凝重, 可見法家風儀, 居其父兄賀㩘眵.不備謹謝狀.甲寅九月十三日, 奇生 宇萬 拜手.(皮封)魏 大雅 僉座【啓學 字士悅, 啓寬 字子栗】沙寓生 謹謝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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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5년 선영완(宣泳完) 서간(書簡)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宣泳完 광주 민종기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925년 12월 21일, 사제 선영완이 혼례를 마친 후 새로 들어온 식구를 칭찬하는 내용으로 쓴 답장편지. 1925년 12월 21일, 사제(査弟) 선영완(宣泳完)이 혼례를 마친 후 새로 들어온 식구를 칭찬하는 내용으로 쓴 답장편지이다. 오래된 의분으로 외람되이 인의(姻誼)를 맺었다며 감사를 전하고 상대의 편지에 답하여 신인(新人)의 의범(懿範)이 눈에 아른거리는 듯 하다고 인사하였다. 발신자 선영완(1878~1938)의 본관은 보성(寶城), 호는 동곡(東谷)이다. 장흥군(長興郡) 안양면(安良面) 장수동(長水洞)에 살았다. 저서로 『동곡유고(東谷遺稿)』 4책이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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