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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5년 이춘발(李春發) 준호구(準戶口) 고문서-증빙류-호적 靈光郡守 李春發 行郡守<押> 靈光郡戶口, 靈光郡守之印(7.0×7.0) 광주 민종기 (재)한국학호남진흥원 HIKS_Z999_99_A01569_001 1825년에 영광군(靈光郡)에서 한량(閑良) 이춘발(李春發, 56세)에게 발급한 준호구(準戶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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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문기류

1851년 시장문기(柴場文記) 고문서-명문문기류-시장문기 徐琦儒 徐琦儒<着名>, 李宗郁<着名> 광주 민종기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851년(철종2) 4월 7일에 시장주(柴場主) 서기유(徐琦儒)가 영광군 후증도 외장성동의 시장을 방매하면서 발급한 시장매매명문 1851년(철종2) 4월 7일에 시장주(柴場主) 서기유(徐琦儒)가 시장을 방매하면서 발급한 시장매매명문이다. 서기유는 매번 베어 먹던 시장을 형세 상 부득이하여 판다고 방매사유를 밝혔다. 방매 토지는 영광군(靈光郡) 후증도(後甑島) 외장성동(外長城洞) 북변에 있는 시장(柴場) 2홉락지이다. 이를 전문(錢文) 1냥 2전을 받고 판다고 하였다. 본문기(本文記: 이전 거래 및 소유 증명문서)는 잃어 버려서 줄 수 없다고 명시하였다. 문서 작성에 참여한 사람은 시장주 서기유와 증필(證筆: 증인과 문서작성자) 이종욱(李宗郁)이다. 토지소재지인 전라도 영광군 염소면 후증도 장성동은 현재 전라남도 신안군 증도면 증동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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咸豊元年辛亥四月初七日 前明文右明文事段 每伐食多勢不得已 靈光後甑外長城洞北邊柴場貳合落只庫叱乙價折錢文一兩貳錢 依數捧上是遣 右人處 永永放買爲去乎 日後若有他談則 以此文記 告官 卞呈事此亦中 本文記段 中間閪失 故不得出給印禁場主 徐琦儒[着名]訂筆 李宗郁 [着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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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7년 이재빈(李在彬)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李召史 李在彬 李召史<右掌> 광주 민종기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877년(고종14) 1월 28일에 답주 이조이가 이재빈에게 후증도 북면 소사동 논을 방매하면서 발급해 준 토지매매명문 1877년(고종14) 1월 28일에 답주 이조이(李召史)가 이재빈(李在彬)에게 논을 방매하면서 발급해 준 토지매매명문이다. 이 조이는 자신이 매득하여 갈아 먹다가 흉년을 당하여 목숨을 구하고자 부득이하게 논을 판다고 방매사유를 밝혔다. 방매 토지는 영광군(靈光郡) 후증도(後甑島) 북면(北面) 소사동(小寺洞)에 있는 종자(種子) 답(畓) 5배미 합1마지기이다. 이 논을 전문(錢文) 1냥을 받고 팔았으며 구문기(舊文記: 이전 거래 및 소유 증명문서)는 중간에 잃어버려서 줄 수 없다고 하였다. 문서 작성에 참여한 사람은 답주인 이조이(46세)와 증필(證筆: 증인과 문서작성자)로 참여한 전유권(全有權)이다. 토지소재지인 후증도는 현재 전라남도 신안군 증도면 증동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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光緖參年丁丑正月卄八日李左彬前明文右明文事段 買得耕食是如可 當此歉荒捄命之致勢不得已 郡地後曾島北面召地名小寺洞右人田下伏在種子畓貳夜味合參升落所耕庫叱 價折錢文壹兩依數捧上是遣 右前永爲放賣爲去乎 日後柴族間 若有相左之端則 以此文憑處事亦在此亦中 旧文書段 中間閪失 故未得出給印畓主 李召史 年四十六[右掌]證筆 全有權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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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령류

1893년 강연(姜淵) 증직교지(贈職敎旨) 고문서-교령류-고신 高宗 姜淵 施命之寶(10.0×10.0) 광주 민종기 (재)한국학호남진흥원 HIKS_Z999_99_A01630_001 1893년(고종30) 11월에 성균진사 강연(姜淵)을 효행탁이의 이유로 가선대부 호조참판겸동지의금부사에 증직하는 4품 이상 고신 1893년(고종30) 11월에 성균진사(成均進士) 강연(姜淵)을 가선대부(嘉善大夫) 호조참판겸동지의금부사(戶曹參判兼同知義禁府事)에 증직하는 4품 이상 고신이다. 발급일자 좌측에 기록된 연호방서(年號傍書)에는 '효행(孝行)이 탁월하므로 증직하는 일로 국왕의 전교(傳敎)를 받음'이라고 임명사유가 적혀 있다. 충, 효, 열, 학행 등이 뛰어났기 때문에 이루어지는 봉작은 죽은 이후에만 이루어졌으므로 모두 증직(贈職)이고, 모든 방서에 '승전(承傳)'이 기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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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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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령류

敎旨成均進士姜淵贈嘉善大夫戶曹參判兼同知義禁府事者光緖十九年十一月 日孝學卓異 贈職事承傳[施命之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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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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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빙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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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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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빙류

1744년 강중태(姜重泰) 준호구(準戶口) 고문서-증빙류-호적 靈巖郡守 姜重泰 行郡守<押> □…□ (7.0×7.0), 周挾字改印 광주 민종기 (재)한국학호남진흥원 HIKS_Z999_99_A01647_001 1744년에 영암군(靈巖郡)에서 첨지(僉知) 강중태(姜重泰, 52세)에게 발급한 준호구(準戶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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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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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빙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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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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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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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빙류

1801년 강홍복(姜弘福) 준호구(準戶口) 고문서-증빙류-호적 靈巖郡守 姜弘福 行郡守<押> □…□ (7.0×7.0), 周挾字改印 광주 민종기 (재)한국학호남진흥원 HIKS_Z999_99_A01650_001 1801년에 영암군(靈巖郡)에서 유학(幼學) 강홍복(姜弘福, 61세)에게 발급한 준호구(準戶口) 호주 강홍복(姜弘福)의 생년(生年)이 신유(辛酉)로 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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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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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빙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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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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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빙류

1801년 강홍제(姜弘齊) 준호구(準戶口) 고문서-증빙류-호적 靈巖郡守 姜弘齊 行郡守<押> 광주 민종기 (재)한국학호남진흥원 HIKS_Z999_99_A01651_001 1801년에 영암군(靈巖郡)에서 유학(幼學) 강홍제(姜弘齊, 63세)에게 발급한 준호구(準戶口) 妻 오씨(吳氏)의 생년(生年)이 갑인(甲寅)으로 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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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차계장류

신해년 이규호(李圭浩) 단자(單子) 고문서-소차계장류-소지류 李圭浩 靈巖郡守 官<押> 靈巖郡守之印 5顆(7.2x7.2) 광주 민종기 (재)한국학호남진흥원 HIKS_Z999_99_A01693_001 신해년 4월에 이규호가 영암군수에게 올린 산송 단자. 신해년 5월에 이규호(李圭浩)가 영암군(靈巖郡) 관아에 올린 단자(單子)이다. 이규호는 같은해 4월에 선산인 군종면(郡終面)에 아버지 무덤을 투장(偸葬)한 하성조(河聖祚)를 영암군 관아에 고발하고 무덤을 즉각 파내달라고 요청하였고, 같은 달 2일에 도형을 그려온 후에 파내도록 독촉하겠다는 처분을 받은 바 있다. 본 소지에서 이규호는 하성조가 여전히 무덤을 파가지 않자, 그의 어머니를 잡아 놓고 그가 오기를 기다렸다. 그런데 그는 어머니를 인질로 잡은 것을 원망하고 글을 써서 협박하고 있다. 이에 이규호는 그 글을 적은 자를 찾아서 처벌하고 무덤을 파내달라고 요청하고 있다. 이에 대해 영암군 관아는 초5일에 "그 아들이 아직 나타나지 않으니 그 패악한 버릇을 알만하다. 천만 가지 나쁜 말을 하더라도 어찌 꺼릴 일인가. 우선 무덤을 파내도록 독촉할 것이니 사소한 안정(顔情)으로 가볍게 정소하는 것은 옳지 않다. 잠시 물러가 기다려라."는 처분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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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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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차계장류

郡終望湖亭居 化民李圭浩 惶恐仰達于城主閤下 伏以 有寃必訴 有罪必懲 訟理之所由設 則其訴也 出於鳴寃之■〔心〕 而本不有所憎惡也 其懲也 緣於有罪之事 而固不可挾怨芥也 今夫民之以河聖祚暗葬事仰籲者 豈非必訴之寃乎 渠之暗理不掘者 亦豈非必懲之罪乎 惟我閤下洞察訟理之曲直 而捉囚河漢之母 以待其子之自來矣 今旣閱月 其子不來 而其母在囚 反爲致怨於民之所訴 更有何許漢從傍指嗾 造書傳致 其辭悖戾 其意陰險 有曰 故令捉囚陷於死地云 又曰 若不放釋 則生屍納宅云 究其設心 專爲脅制恐動之計也 如是 則豈有寃者訴罪者懲之理乎 大抵民之所訴者 只爲禁塚之故 而渠之所囚者 亦爲不掘之罪也 初不犯葬 則民何擧狀乎 終若掘去 則渠何久囚乎 何不以此爲念 而憑藉其病 ■〔恣〕其悖戾於文字之間 而渠不必自作自書 則必有釀計作書者也 此不可尋常看過 故玆以擧槪仰達爲去乎 伏乞 洞燭敎是後 覈其作書者 懲其無憚之習 而其病亦是實狀則代囚其家他眷 而放出爲白去乃 使之不待其子速掘其塚 卽爲蒙放是白等只 兩端間 決處之地 至祝行下向敎是事城主 處分辛亥五月 日其子之尙不自現 其悖習可知雖有千辭萬語之惡說 有何可忌之事乎 爲(背面)先督掘 則不可以些少顔情 闊俠呈訴姑爲退待事初五日 告金正奉官 [署押][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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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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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간통고류

1892년 오남(吾南) 김한섭(金漢燮) 선생(先生) 동문(同門) 통문(通文) 초(草) 고문서-서간통고류-통문 金漢燮 同門 광주 민종기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892년(고종 29) 9월 18일에 오남 김한섭의 제자 동문들이 동문에게 통지하여 스승의 가난한 삶을 구제하기 위하여 각기 의연할 것을 청하는 내용으로 보낸 통문 초안. 1892년(고종 29) 9월 18일, 오남(吾南) 김한섭(金漢燮)의 제자들이 동문(同門)에게 스승의 가난을 구제할 것을 요청하는 내용으로 보낸 통문(通文)의 초(草)이다. 스승이 말년에 안빈낙도를 하시며 지내시는 상황과 채마밭의 먹거리가 떨어지는 상황을 서술하며 내년 봄까지의 어려운 생활형편을 구제하고자 각자 먹을 것을 덜어 드리자는 내용이다. 오남(吾南) 김한섭(金漢燮, 1838~1894)의 자는 치용(致容)이고, 호는 오남(吾南)이며, 본관은 영광이다. 김노현(金魯鉉)의 아들로 장흥에서 태어났다. 유고로 『오남선생문집(吾南先生文集)』 7책이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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通文右文爲敬通事 夫師生者人之大倫也 左右就養 服勤至死 莫於禮記 生之於三事之如一 出於欒其子之言 而朱夫子編入於小學 定爲萬世之法程 則爲後學者不可一日而不講斯義也 竊惟我 吾南先生 隱德■■(南岡)〔東岡〕倡道南海 使夫人者有以知聖賢之爲可 學章句詞章爲可 陋先王之道 不可棄夷狄之敎 不可從禮義之正 不可不守禽狄之穢 不可不斥 凜然有歲寒松栢之象 巋然爲魯殿之靈光則當此淫邪萬世人紀垂絶之日凡有血氣者 莫不思有以親愛之 而况親灸之者乎 况受恩罔極 如天地父母者乎 伏念 先生家世淸素 比歲以還剝落殊甚 往往有顔子之屢空 白首衰暮之年 躬親鄙事 耕田採薪 無所不至其在安貧樂道之地 宜其無戚戚之嬰懷 而樵牧婦孺黎爲之咨嗟 而太息爲其門生 故舊者寧可恝然於斯乎至於今日 則田疇所收不足 以支寒月 明春庚癸之竭 又將如何 瑧植等 深憂永嘆 不知所出 竊惟僉君子 衛師之忠篤倫之仁 必同此一般悰緖也 各捐瓶甖共濟師友之報艱難 以情以義在所不可已者也 未知雅意以爲如何 嗚呼 世之喪久矣 父子兄弟 天屬之地 猶有視若路人者 何況師友議定之地乎 雖然吾輩 平日讀書 固不以世俗薄態爲可願則其於今日之事 寧容若越視秦瘠恬不相顧乎 如不以爲不可 則亟思所以赴急期有實效 勿止爲應文傷數而已 則千萬幸甚右敬通于同門僉君子座前壬辰九月十八日同門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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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4년 기우만(奇宇萬) 서간(書簡)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奇宇萬 魏啓學 광주 민종기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914년 9월 13일, 기우만이 자기 집 장례식에 위문해 준 데 대한 감사를 전하고 상대가 부탁한 죽오공의 묘문을 수락하겠다는 내용으로 위계학·위계관에게 보낸 답장 편지. 1914년 9월 13일, 기우만(奇宇萬) 생(生)이 자기 집 장례에 조문해 준 데 대한 감사를 전하고 상대가 부탁한 죽오공(竹塢公)의 묘문(墓文)을 써보겠다는 내용으로 위계학(魏啓學)·위계관(魏啓寬)에게 보낸 답장 편지이다. 기우만이 상대 위씨(魏氏)들이 모두 와서 조문해 준 데 대하여 감사인사를 하는 것으로 편지를 시작했다. 그리고 무사히 장례를 치른 것이 다행이라고 하였다. 본론으로는 상대의 돌아가신 선조 죽오공 묘문을 자신에게 부탁한 것에 대해 고사하기가 어렵다며 늙어 병이 있지만 간신이 정력을 수습하여 써보겠다고 하였다. 그리고 상대가 물어준 신도(神道)는 서쪽을 위로 하는 것이 예(禮)라고 하신 말씀은 그 법식이 확실하다는 것, 장례는 지세(地勢)를 보고 묘제(墓祭)를 지낼 것이라고 하였다. 위소(慰疎: 慰狀)의 형식은 어떠하다며 잘 키운 젊은이를 칭찬하는 내용을 적었다. 죽오공은 위도한(魏道僩, 1763~1830)으로 자(字)는 슬혜(瑟兮)이다. 문집으로 『죽오선생유고(竹塢先生遺稿)』가 있다. 발신자 기우만(奇宇萬, 1846~1916)의 자(字)는 회일(會一), 호는 송사(松沙), 본관은 행주(幸州)이다. 전라남도 장성출신이며 호남에서 이름에 높았던 참판 기정진(奇正鎭)의 손자로서 학업을 이어받아 참봉 벼슬을 지냈고, 개항기 을미사변 후 호남창의 총수로 활약하였다. 1896(고종 33)년 10월 16일 왜군에게 붙잡혀 옥고를 치르고 1897년 4월에 석방되었다. 1908년 2월 순천 조계산의 암자에서 동지·문인들과 재 거사를 꾀하던 중에 고종이 강제 퇴위 당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북쪽을 향하여 통곡한 후 해산하고 은둔하였다. 저서로 『송사집(松沙集)』이 있다. 수신자 위계학(1868~1919)의 자(字)는 사열(士悅)이고, 호는 청계(淸溪)이며, 본관은 장흥이다. 위중식(魏重植)의 아들이며, 기우만의 문인으로, 장흥에서 거주하였다. 위계관(1873∼1942)의 자(字)는 자율(子栗), 호는 도곡(道谷), 5대조는 통덕랑 위백신(魏伯伸)이고 위영(魏栐)의 아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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外舅主前 上書伏未審 夜來氣體候一向萬康 伏慕不任 區區之忱外甥 無撓歸庭 庭候如昨 伏幸何達 餘萬不備 伏惟下察壬戌臘月二十九日 外甥 白日寅 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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