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4년 기우만(奇宇萬) 서간(書簡)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奇宇萬 魏啓學 광주 민종기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914년 9월 13일, 기우만이 자기 집 장례식에 위문해 준 데 대한 감사를 전하고 상대가 부탁한 죽오공의 묘문을 수락하겠다는 내용으로 위계학·위계관에게 보낸 답장 편지. 1914년 9월 13일, 기우만(奇宇萬) 생(生)이 자기 집 장례에 조문해 준 데 대한 감사를 전하고 상대가 부탁한 죽오공(竹塢公)의 묘문(墓文)을 써보겠다는 내용으로 위계학(魏啓學)·위계관(魏啓寬)에게 보낸 답장 편지이다. 기우만이 상대 위씨(魏氏)들이 모두 와서 조문해 준 데 대하여 감사인사를 하는 것으로 편지를 시작했다. 그리고 무사히 장례를 치른 것이 다행이라고 하였다. 본론으로는 상대의 돌아가신 선조 죽오공 묘문을 자신에게 부탁한 것에 대해 고사하기가 어렵다며 늙어 병이 있지만 간신이 정력을 수습하여 써보겠다고 하였다. 그리고 상대가 물어준 신도(神道)는 서쪽을 위로 하는 것이 예(禮)라고 하신 말씀은 그 법식이 확실하다는 것, 장례는 지세(地勢)를 보고 묘제(墓祭)를 지낼 것이라고 하였다. 위소(慰疎: 慰狀)의 형식은 어떠하다며 잘 키운 젊은이를 칭찬하는 내용을 적었다. 죽오공은 위도한(魏道僩, 1763~1830)으로 자(字)는 슬혜(瑟兮)이다. 문집으로 『죽오선생유고(竹塢先生遺稿)』가 있다. 발신자 기우만(奇宇萬, 1846~1916)의 자(字)는 회일(會一), 호는 송사(松沙), 본관은 행주(幸州)이다. 전라남도 장성출신이며 호남에서 이름에 높았던 참판 기정진(奇正鎭)의 손자로서 학업을 이어받아 참봉 벼슬을 지냈고, 개항기 을미사변 후 호남창의 총수로 활약하였다. 1896(고종 33)년 10월 16일 왜군에게 붙잡혀 옥고를 치르고 1897년 4월에 석방되었다. 1908년 2월 순천 조계산의 암자에서 동지·문인들과 재 거사를 꾀하던 중에 고종이 강제 퇴위 당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북쪽을 향하여 통곡한 후 해산하고 은둔하였다. 저서로 『송사집(松沙集)』이 있다. 수신자 위계학(1868~1919)의 자(字)는 사열(士悅)이고, 호는 청계(淸溪)이며, 본관은 장흥이다. 위중식(魏重植)의 아들이며, 기우만의 문인으로, 장흥에서 거주하였다. 위계관(1873∼1942)의 자(字)는 자율(子栗), 호는 도곡(道谷), 5대조는 통덕랑 위백신(魏伯伸)이고 위영(魏栐)의 아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