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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4년 고흥향교(高興鄕校) 망기(望記) 고문서-첩관통보류-망기 사회-조직/운영-망기 甲申陽九月 日 幼學 柳重憲 甲申陽九月 日 高興鄕校 柳重憲 고흥 고흥류씨 류탁 후손가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944년 9월에 고흥향교(高興鄕校)에서 류중헌(柳重憲)에게 보낸 망기(望記). 1944년 9월에 고흥향교(高興鄕校)에서 류중헌(柳重憲)에게 보낸 망기(望記)이다. 유학(幼學) 류중헌을 다음 달 15일에 시행하는 석전제(釋奠祭) 아헌관(亞獻官)에 임명한다는 내용이다. 망기는 어느 한 직책에 합당한 인물을 천거할 때 사용하는 문서로 서두에 망(望) 혹은 천망(薦望)을 기입하였다. 망첩(望帖) 또는 망단자(望單子)라고도 한다. 일반적으로 한 직책에 세 사람을 후보자로 열거하는 3 망이 원칙이었으나, 한 사람 혹은 여러 사람을 추천하기도 하였다. 고흥향교는 전라남도 고흥군 고흥읍에 있는 향교이다.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108호로 지정되었다. 1441년(세종 23) 현유(賢儒)의 위패를 봉안, 배향(配享)하고 지방의 중등교육과 지방민의 교화를 위하여 고흥현 서문(西門) 밖에 창건되었다. 정유재란 때 병화로 소실되었다가 1695년 유생 강익무(姜翊武)·치무(致武) 형제가 향교의 재건을 상소하고 신규(申樛)·송만징(宋萬澄) 등이 발의하여 1700년 교궁(校宮)을 중건하였다. 광복 뒤 몇 차례의 보수를 거쳤으며 1955년 홍살문을 세웠다. 류중헌은 1873년(고종 10) 10월 5일에 태어났으며 1952년 9월 9일에 졸하였다. 자(字)는 사범(士範)이고 호(號)는 야산(野山)이다. 석농(石農) 오진영(吳震泳)과 학문을 교류하였다. 묘는 호산(虎山) 호서(虎西) 불암동(佛岩洞)에 있다. 부인은 송위희(宋胃僖)의 딸 남양송씨(南陽宋氏)이다. 1872년(고종 9)에 태어났으며 1947년 1월 13일에 졸하였다. 석전제는 석채(釋菜), 상정제(上丁祭), 정제(丁祭)라고도 한다. 공자(孔子)를 모신 문묘(文廟)에서 선성(先聖)·선사(先師)에게 지내는 제사이다. 음력 2월과 8월의 상정일(上丁日)에 행해졌으며, 이로 인해 상정제(上丁祭)라고도 한다. 중국에서는 주대(周代)이래 순(舜)·우(禹)·탕(湯)·문왕(文王)등 여러 성인에게 석전을 올렸으며, 한(漢)나라 이후 유교(儒敎)를 숭상하면서 동자를 제사하는 의식으로 굳어졌다. 아헌관은 국가의 제례에서 아헌(亞獻), 곧 두 번째로 잔을 올리는 일을 맡은 제관(祭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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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몽수(朱夢守) 백일장(白日場) 시권(試券) 고문서-증빙류-시권 정치/행정-과거-시권 朱夢守 朱夢守 고흥 고흥류씨 류탁 후손가 (재)한국학호남진흥원 고흥군 道德面 五馬里에 사는 朱夢守가 작성한 백일장 試券 고흥군 道德面 五馬里에 사는 朱夢守가 작성한 백일장 試券이다. 백일장은 유생의 학업을 장려하기 위해 실시하는 시험으로, 대낮에 詩才를 겨룬다는 의미이다. 1414년(태종 14)에 국왕이 성균관에 가서 옛 성인과 스승에게 獻爵禮를 실시한 이후 유생들에게 時務策을 논의한 데에서 유래하였다. 조선 후기 지방에서 실시되는 백일장은 관찰사와 수령 등 관 주도로 이루어지거나, 향교나 서원의 지방 유림들이 중심이 되어 실시하였다. 백일장의 詩題는 '푸른 그늘 꽃다운 풀, 꽃 피는 시절보다 낫구나[綠陰芳草勝花時]'이며, 科目은 大古風이다. 이 시제는 唐宋八家의 한 사람인 송나라 왕안석(王安石)의 詩 「初夏卽事」에서 '綠陰幽草勝花時'라는 구절을 차용한 것이다. 그리고 백일장 과목인 대고풍은 無韻詩 가운데 칠언의 긴 시편을 말한다. 주몽수는 백일장에 참여하여 次下의 점수를 받았다. 답안지 우측에 이 시권의 字號가 九列라고 쓰여 있다. 자호는 시권의 제출 순서를 말한다. 과거 시험에서 시권을 다 거두면 제출 순서대로 묶어 千字文의 순서에 따라 字號를 매겼다. 이를 作軸이라고 하는데, 예를 들면 天軸, 地軸, 玄軸 등으로 나아간다. 天軸의 첫 번째 시권은 一天, 두 번째 시권은 二天이라고 한다. 이 문서는 列軸의 아홉 번째 시권인 것이다. 이 문서는 작성자의 이름밖에 알 수 없기때문에 언제 작성한 것인지 정확히 파악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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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년 류병춘(柳秉春) 간찰(簡札)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개인-생활-서간 辛丑十二月九日 族姪 秉春 柳大錫 辛丑十二月九日 柳秉春 柳大錫 고흥 고흥류씨 류탁 후손가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961년 12월에 族姪 秉春이 柳大錫에게 보내는 간찰 1961년 12월에 族姪 秉春이 柳大錫에게 보내는 간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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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년 정재성(丁在聲) 등 간찰(簡札)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개인-생활-서간 壬寅正月九日 門中代表 丁在聲 等 2名 高興面虎東里 柳桂彦 壬寅正月九日 丁在聲 丁一聲 柳桂彦 고흥 고흥류씨 류탁 후손가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962년 丁在聲 等이 고흥 호동리 柳桂彦에게 보내는 간찰 1962년 丁在聲 等이 고흥 호동리 柳桂彦에게 보내는 간찰. *상태: 간찰 총 2장 *국한문혼용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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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년 장원택(張元澤) 간찰(簡札)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개인-생활-서간 丁未菊月五日 張生元澤 丁未菊月五日 張元澤 柳大錫 고흥 고흥류씨 류탁 후손가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967년에 구례의 張元澤이 고흥 柳大錫에게 보낸 간찰 1967년에 구례의 張元澤이 고흥 柳大錫에게 보낸 간찰. *원문: 僕之所營海東倫綱錄編輯于今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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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7년 방문(榜文) 고문서-첩관통보류-방문 법제-법령-방문 丁卯十二月 丁卯十二月 고흥 고흥류씨 류탁 후손가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927년 각 지방에 위치한 선영에서 제사를 지낼 유사를 결정한 방(榜) 1927년(丁卯) 12월에 작성한 각 선영의 제사를 주제하는 유사를 결정한 방문(榜文)이다. 상동(上洞)은 20일에 류상영(柳相榮), 사현(沙峴)은 21일에 류종순(柳鍾純), 화적(花赤)은 23일 류관준(柳瓘俊), 금계형(金鷄形)은 22일 류식호(柳式浩), 24일엔 류영규(柳永奎), 비자동(榧子洞)은 24일 류영정(柳永正)이다. 적혀있는 지명들은 현재 상동은 운곡사가 있는 고흥군 고흥읍 호동리 상동을 뜻하며, 화적은 현재 고흥읍 호동리 화적재, 금계형은 고흥군 두원면 용산리 금계, 비자동은 고흥군 풍양면 호동리 비아를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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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1년 고흥향교(高興鄕校) 망기(望記) 고문서-첩관통보류-망기 사회-조직/운영-망기 辛酉正月 日 高興鄕校 幼學 柳濟洪 辛酉正月 日 高興鄕校 柳濟洪 高興鄕校之印(둥근사각, 5.7×5.2) 고흥 고흥류씨 류탁 후손가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981년 1월에 고흥향교(高興鄕校)에서 류제홍(柳濟洪)에게 보낸 망기(望記). 1981년 1월에 고흥향교(高興鄕校)에서 류제홍(柳濟洪)에게 보낸 망기(望記)이다. 류제홍을 석전제(釋奠祭) 집사(執事)로 임명하는 내용이다. 망기는 어느 한 직책에 합당한 인물을 천거할 때 사용하는 문서로 서두에 망(望) 혹은 천망(薦望)을 기입하였다. 망첩(望帖) 또는 망단자(望單子)라고도 한다. 일반적으로 한 직책에 세 사람을 후보자로 열거하는 3 망이 원칙이었으나, 한 사람 혹은 여러 사람을 추천하기도 하였다. 고흥향교는 전라남도 고흥군 고흥읍에 있는 향교이다.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108호로 지정되었다. 1441년(세종 23) 현유(賢儒)의 위패를 봉안, 배향(配享)하고 지방의 중등교육과 지방민의 교화를 위하여 고흥현 서문(西門) 밖에 창건되었다. 정유재란 때 병화로 소실되었다가 1695년 유생 강익무(姜翊武)·치무(致武) 형제가 향교의 재건을 상소하고 신규(申樛)·송만징(宋萬澄) 등이 발의하여 1700년 교궁(校宮)을 중건하였다. 광복 뒤 몇 차례의 보수를 거쳤으며 1955년 홍살문을 세웠다. 류제홍은 1926년 8월 4일에 태어났다. 자(字)는 송천(松泉)이고 다른 이름은 제구(濟九)이다. 부인은 송영기(宋永基)의 딸 남양송씨(南陽宋氏)이다. 석전제는 석채(釋菜), 상정제(上丁祭), 정제(丁祭)라고도 한다. 공자(孔子)를 모신 문묘(文廟)에서 선성(先聖)·선사(先師)에게 지내는 제사이다. 음력 2월과 8월의 상정일(上丁日)에 행해졌으며, 이로 인해 상정제(上丁祭)라고도 한다. 중국에서는 주대(周代)이래 순(舜)·우(禹)·탕(湯)·문왕(文王)등 여러 성인에게 석전을 올렸으며, 한(漢)나라 이후 유교(儒敎)를 숭상하면서 동자를 제사하는 의식으로 굳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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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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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미년 정두옥(丁斗玉) 등 상서(上書) 초(抄) 고문서-소차계장류-소지류 법제-소송/판결/공증-소지류 癸未九月日 丁斗玉 等 17名 大宗伯 癸未九月日 丁斗玉 大宗伯 고흥 고흥류씨 류탁 후손가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823년 六忠祠와 관련하여 禮曹判書에게 올린 上書와 禮曹完文 및 興陽縣監에게 올린 稟目 등을 抄한 문서 1823년 9월 丁斗玉 등이 大宗伯[禮曹判書]에게 올린 上書와 禮曹完文, 같은 해 11월과 12월에 각각 六忠祠 儒生들이 전라도관찰사 및 흥양현감에게 올린 稟目 등 총 4건의 문서를 필사한 것이다. 첫 번째 문서는 1823년 9월 丁斗玉과 19명의 전라도 유생들이 禮曹判書에게 올린 상서이다. 상서의 내용에 따르면 全羅道 興陽縣에 자리한 六忠祠는 비록 아직 賜額의 은전은 입지 못하였지만 事體가 정중하고 鄕先生 社儀의 예가 예사로운데 비할 것이 아닌데 모든 절차가 오히려 갖추어지지 않은 것이 많다고 하였다. 院生과 保奴는 아직 原額이 채워지지 않았으며 매번 本邑의 軍役에 見侵당함에 이르렀다고 하면서 특히 서원 아래 사는 백성의 수가 매우 적은데 연호의 잡역에서 벗어나지 못한 이유로 서원에 俎豆의 모양을 이룰 수 없어 매번 구차하고 어려움이 있음을 깨달았다고 하였다. 이에 감히 연이어 하소연하오니 바라건대 합하께서 특별히 '영구히 侵漁하지 말라'는 뜻을 완문으로 내려주시기를 요청하고 있다. 이에 대해 예조판서는 제사에서 '院奴의 침역에 이르러 사체가 매우 부당하다. 완문의 성급과 같은 것은 본읍과 본영에 許施할 수 있는 것으로 본조에서 知委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여러 유생들이 천리길을 발을 싸매고 올라온 성의는 가히 훌륭하나 許施하는 것은 앞으로 營邑에서 하라'고 처분하였다. 두 번째 문서는 예조에서 興陽縣 六忠祠에게 발급한 完文이다. 완문의 내용은 육충사는 保奴의 원액이 보충되지 못하였고 서원 아래 거주민의 수가 매우 적으며 또 본 읍의 제반잡역에서 벗어지 못하여 제사를 치르기가 매우 어렵다고하므로 이에 완문을 성급하니 이후에 다시는 侵責하지 말고 崇奉의 도리를 다하라고 하면서 이 문서에 의거하여 영구히 따르라고 하였다. 세 번째 문서는 1823년 11월에 六忠祠 儒生들이 전라도 관찰사에게 올린 稟目이다. 품목의 내용에 따르면 本院의 院奴 侵役이 많아 예조에 하소연하여 완문의 성급은 營邑에서 처리하라는 제사를 받아 本院의 完文의 모든 절차는 모두 閤下와 관계되므로 예조에 올린 문서와 완문을 함께 첩련하여 아뢴다고 하였다. 품목에는 進士 丁斗玉을 비롯한 14명의 幼學이 참여하였다. 이에 전라도관찰사는 흥양현감에게 '院奴는 반드시 원정액수가 있으니 한편으로 원액을 따라 면역을 許令하고 만약 籍에 過濫의 獘가 있거든 이 籍을 사용할 수 없으니 거듭 相考하여 시행하라'는 처분을 내렸다. 네 번째 문서는 1823년 12월에 六忠祠 儒生들이 興陽縣監에게 올린 稟目이다. 품목의 내용에 따르면 本院의 院奴 侵役이 많아 제사를 거행하기가 매우 어려운 상황으로 예조에 하소연하여 완문을 성급받았고, 또 營門에 아뢰어 題辭를 받아 이 문서들을 帖連하여 성주께 아뢰니 善處해 주기를 바란다고 하였다. 이에 흥양현감은 公禮吏에게 '법전을 取考하여 사실을 입증할 수 있는 것이 없으면 사액서원은 이미 20명이라고 하니 이것을 기준으로 15명으로 완문하는 것이 좋겠다'라고 하는 처분을 내렸다. 六忠祠는 현재 고흥군 대서면 화산리에 자리한 재동서원을 이른다. 재동서원은 여산 송씨 충강공 송간을 주벽으로 송대립, 송심, 송순례, 송희립, 송건과 김시습 등 15위를 향사하는 곳이다. 본래 고흥 운곡사에 봉안되어 있던 宋侃에게 1793년 내려지자 1796년 宣諡를 위하여 송간의 유거지인 동강면 마륜리 서재동에 사우를 짓고 재동사라 하였다. 1801년 송건, 송순례, 송희립을 추배하고 육충사라 하였다. 1833년 송상보, 송득운, 효자 송석융을 추배하고 世忠祠라 하였고, 1846년 매월당 김시습을 합설배향하고, 1848년에 세충사에서 西洞祠로 개칭하였다. 1868년에 서원 서우 철폐령에 따라 훼철되었다가 1956년 지금의 자리에 다시 지으면서 재동서원(齋洞書院)이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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全羅道興陽縣六忠祠儒生進士丁斗玉等謹齊沐再拜上書于大宗伯閤下伏以生等所居湖南有六忠祠卽端宗朝忠臣忠剛公宋先生?俎豆腏食之所也忠剛公以礪山名閥歷事 文宗 端宗自亞卿擢拜都鎭撫使未及還 朝聞 端宗遜位直向寧越復 命仍卽徑歸佯狂逃隱莫尋蹤跡積十餘年家人訪得於興陽地仍爲卜居自號西齋遺命卜葬地於樂安地薇院(西)齋號也葬地也皆有寓意焉其貞忠卓節炳煥日星俱載於諸名公選述碑狀昔在 先朝丁巳特蒙 贈職▣諡之典其平生行錄今不暇盡擧而靈醴有源世襲家風忠剛公後孫之殉烈於壬辰丙子之亂者磊落相望玄孫[牧]使諱?五代孫判官諱?六代孫 贈參議諱?水使諱?七代孫 贈承旨諱?皆蒙 貤贈之旌忠之典蔚爲南中望族由是湖南人士相與就舊居營建祠宇幷祀忠剛公及其子孫立慬者五人扁之以六忠祠已歷許多年所矣嗚呼唯玆興陽一區卽先生全節之鄕也溪山明秀宛似六臣之遺墟衣冠興起爭仰萬世之淸風其有補於 聖世扶綱常勵名敎之治夫豈淺淺也哉第伏念數間遺祠四時香火雖未蒙 宣額之恩典事體鄭重非比尋常鄕先生社儀之禮而凡節尙多未備院生保奴之屬未充原額而每致見侵於本邑之軍役院底居民數甚零星而未頉於烟戶之雜役緣此而院無成樣俎豆每悉苟難玆敢相率仰籲伏願閤下以慕賢尙忠之盛德高義 特垂採納以永勿侵漁之意成給完文俾得支保之地千萬幸甚癸未九月日柳濟濂 柳匡烈 申克泰柳壇 丁孝達 朴相喆 丁萬濟 柳日營 宋陽吉申見祿 申震祿 丁益濟 朴仁彬 申國權 宋允吉申斗祿 朴禮彬 丁敏采 宋燝 等題辭 多士之有此呈狀其在崇節厲俗之方宜有拔例示意之擧至於院奴之侵役事體極爲不當若完文之成給乃是本邑與本營之所可許施非本曹所可知委而諸生等千里褁足誠意可嘉姑爲許施以爲來頭營邑間憑處之地向事禮曹爲完文成給事興陽縣六忠祠卽 端廟朝忠臣忠剛公宋先生?及壬丙之亂相繼殉難之公之後孫牧使?判官? 贈參議?水使?七代孫 贈承旨?一門六六妥靈之所也雖未及宣額此祠事體與他鄕祠逈異而保奴之屬未充原額院底居民數甚零星又未免見侵於本邑之諸般雜役以致享祀時院儀不備擧行苟難云其在事體萬萬未狀玆以完文成給爲去乎此後段更勿侵責俾盡崇奉之道宜當依此永久遵行者興陽縣六忠祠儒生稟目伏以本縣六忠祠已載於院錄想入於照鑑更不敢煩瀆而院奴侵役間多有之故生等今秋京試觀光後以此由呈于 春曹卽題旨內多士之有此呈狀其在崇節厲俗之方宜有拔例示意之擧至於院奴之侵役事體極爲不當若完文之成給乃是本邑與本營之所可許施非本曹所可知委而諸生等千里褁足誠意可嘉姑爲許施以爲來頭營邑間憑處之地行下而第伏念本院之完文凡節都係於 閤下故玆以春曹呈狀與完文幷爲帖漣仰籲事敢稟癸未十一月日六忠祠儒生進士丁斗玉幼學柳日榮 宋陽吉 申見祿 丁益濟 申震祿朴仁彬 宋允吉 申國權 柳奎漢 朴禮彬申斗祿 丁敏采 宋燝 等題辭 院奴必有原定額數一從原額許令免役是遣如有憑籍過濫之獘則不可以此籍重相考施行事 本官齋洞六忠祠儒生稟目伏以齋洞六忠祠已載於 春曹及營門書院錄而第伏念本院未蒙 宣額之恩典自有異他祠之事體院生保奴未充原額而每每見侵於軍夫之伍院底居民數甚零星而一一未頉於烟戶之役所以春秋享祀凡節多難而以此由齊籲於春曹則更勿侵責之意成給完文且稟於 營門則從原額免役之意行下明題而亦在我 城主善處之如何耳伏願城主體春曹崇賢之心俾本院成樣之地院保與居民更勿侵役之意完文成給事玆敢帖連仰稟癸未十二月日 名帖同上題辭 取考法典宲無可據而 賜額書院旣云二十名則以此憑準實有間考十五名定數完文似好向事公禮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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興陽縣民人等狀右謹言等狀事段生等以本縣三年已納稅米中年年疊徵之寃呈訴 營邑以爲代錢上納之意宿搆狀草而壬午條則累次鄕會稟於(入)官城主至有四百石報營之擧而餘數劃策尙未出末故前狀乃姑未出末云云矣今聞査實之塲五船有司所當條七百石報 營之意下敎則公正嚴威之下更不敢容喙鳴寃然敢以累次鄕會塲邑査之決請條陳▢…▢壬午餘稅米太昨年春▢▢ 朝令賃船上納而田稅一二船及大同一二三船賃船上納有司五人自鄕中擇定本曹本廳納稅米太及各 宮房稅米與各 營移劃結作各司雜卜米昨年五月內沒數裝發而此納有司等還邑後上納件記現納鄕中故爲先取考則未納米太合二千三百九十二石六斗四升內昨年因京營關文及繡衣道節目除其目邑裁減未出給浮価添木船費等九百十二石六斗四合七夕則田稅大同實欠縮米太爲四百八十石三升五合三夕則此宜五有司之所當故敢此齊龥伏願細細垂察焉分揀處分事千萬祈懇之地令監閤下 藻鑑甲申八月日宋采浩 申▣模 丁性心 朴斗華 李相和 李贊基宋鎭邦 林弼煥 張在景 金正斗 等<押><題辭>若因有司輩之作奸生縮每每還涉於民間則或將何以支保況勘合法意將歸于虛地法豈嚴歸於有司而爲在情勢浮添五百餘石不矣窘辭之太甚將爲論根矣猶不知渠輩之萬幸嗾囑呈單以太濫之船価更云不足者未詳所據事初七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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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중룡(柳重龍) 백일장(白日場) 시권(試券) 고문서-증빙류-시권 정치/행정-과거-시권 柳重龍 柳重龍 고흥 고흥류씨 류탁 후손가 (재)한국학호남진흥원 高興面 虎東에 사는 柳重龍이 작성한 백일장 試券. 高興面 虎東에 사는 柳重龍이 작성한 백일장 試券이다. 이 백일장의 詩題는 馬上別虞美人이며, 科目은 大古風이다. 대고풍은 韻을 달지 않고 짓는 한국 특유의 한시체(漢詩體)이다. 시제는 중국 초나라 장수 項羽와 虞姬의 이별가에서 빌려온 것으로 보인다. 이 문서는 작성자의 이름밖에 알 수 없기때문에 언제 작성한 것인지 정확히 파악할 수 없다. 백일장은 유생의 학업을 장려하기 위해 실시하는 시험으로, 대낮에 詩才를 겨룬다는 의미이다. 1414년(태종 14)에 국왕이 성균관에 가서 옛 성인과 스승에게 獻爵禮를 실시한 이후 유생들에게 時務策을 논의한 데에서 유래하였다. 조선 후기 지방에서 실시되는 백일장은 관찰사와 수령 등 관 주도로 이루어지거나, 향교나 서원의 지방 유림들이 중심이 되어 실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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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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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4년 류영시(柳永蒔)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경제-매매/교역-토지매매명문 大韓光武八年甲辰十一月二十八日 趙班碩 柳永蒔 大韓光武八年甲辰十一月二十八日 趙班碩 柳永蒔 趙班顧[着名], 申椿模[着名], 房瑢奎[着名] 고흥 고흥류씨 류탁 후손가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904년에 趙班碩이 柳永蒔에게 논을 팔면서 작성해 준 토지매매문서. 1904년(광무 8) 11월 29일에 幼學 趙班碩이 幼學 柳永蒔에게 논을 팔면서 작성해준 토지매매문서이다. 畓主인 趙班碩은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논을 債給한 탓으로 인해 부득이하게 浦頭面 上浦里 沙嶝坪 晝字丁 3斗落을 錢文180兩을 받고 유학 류영시에게 팔았다. 이때 소작인[時作] 申椿模와 증인으로 房瑢奎가 참여하여 문서를 작성하였다. 류영시는 자가 子汝, 호가 竹窩, 본관은 高興이다. 1833년에 태어나 1918년에 사망하였다. 배우자는 靈光丁氏이다. 明文이란 어떤 권리를 증명해 주는 문서로 흔히 토지와 노비, 가옥 등을 매매하는 문서명으로 쓰인다. 토지매매명문은 파는 사람이 작성하여 사는 사람에게 주는 것이다. 여기에는 대체로 매매 연월일과 買受者, 賣渡事由, 賣渡物의 소재지, 量案上의 字 ․ 番, 結負[卜]束과 斗落, 배미[夜味] 등 매매 대상물의 정보와 가격, 그리고 賣渡人[財主], 筆執, 證人 등이 기록된다. 그러나 시대와 작성하는 사람에 따라 이들 가운데 일부가 생략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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