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1년 김영한(金甯漢) 간찰(簡札)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개인-생활-서간 辛巳壬月八日 金甯漢 辛巳壬月八日 金甯漢 柳重燮 고흥 고흥류씨 류탁 후손가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941년에 高陽에 사는 金寗漢이 全南 高興에 사는 柳重燮에게 청탁받은 서문에 대해 써서 보낸 간찰. 1941년 壬月 8일에 高陽崇仁面樊里에 사는 金寗漢이 全南高興郡高興面虎山에 사는 柳重燮에게 청탁받은 서문에 관한 내용을 써서 보낸 간찰이다. 김영한은 류중섭이 보낸 편지를 받고 곧바로 답장을 썼다. 편지를 받고 섣달 추위에 건강하시다니 위안이 된다고 하면서 자신은 고질병인 현기증으로 인해 괴롭다고 하였다. 서문에서 주된 뜻은 오로지 2개 조항만을 살펴서 썼고, 被誣의 말은 삭제하였다고 하였으며 아직도 頭緖를 잡지 못하였으니 어쩌겠냐고 하였다. 이어서 천리 밖 멀리에서 글자를 써서 왕복하는 것은 모호(糢糊)한 것이 매우 많아 자신이 참으로 酬應하기가 어렵다면서 蔽一言하고 자신의 글이 용도에 맞지 않으니 다시 상의하여 높은 안목과 뛰어난 문장가에게 부탁하는 것이 어떻겠는냐고 자신의 생각을 전하였다. 편지 내용에서 김용한이 청탁받은 서문은 신암실기(信庵實記)에 수록 될 서문으로 짐작된다. ?신암실기?는 ?고려사?에 간신으로 기록되어 있는 고흥류씨 선조인 류청신(柳淸臣, 1257~1329)의 행적을 바로잡기 위해서 여러 사료를 고증하여 후손 류일영(柳日榮, 1767~1837)이 편찬한 것이다. 1949년에 간행되었으며, 오진영과 김영한의 서문이 수록되어 있다. 고흥류씨가문 소장자료에 1941년에 김영한이 쓴 信庵實記序와 吳震泳의 信庵實記序가 남아있다. 김영한(金寗漢, 1878∼1950)은 자가 기오(箕五)이고, 호가 급우재(及愚齋) 또는 동강(東江)이다. 본관은 안동(安東)이며, 출신지는 충청남도 공주군 공암리(孔巖里)이다.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의 13세손으로, 부친은 판돈녕원사(判敦寧院事) 김석진(金奭鎭)이고, 생부는 면천군수(沔川郡守) 김홍진(金鴻鎭)이다. 빼어난 총명함을 타고났으며 예닐곱 살 때부터 글을 지어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1894년(17세)에 식년시 진사(進士)에 합격하였다. 1898년 희릉참봉(禧陵參奉)에 제수되었으나 부친의 병으로 나가지 않았다. 1900년 시강원시종관(侍講院侍從官)으로 삭녕군수(朔寧郡守)에 제수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1901년에는 용인군수에, 이듬해에는 양근군수에 제수되었다. 1905년 을사늑약 이후 세상에 대한 뜻을 접고 벼슬에 나가지 않았다. 문집으로 『급우재집(及愚齋集)』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