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告目右伏告事段明日朔望 賀禮以平明客舍鄕校俱爲 行次敎是如乎校生下送緣由詮次告課爲白臥乎事校中執綱 生員主 前辛未正月三十日 公禮吏 鄭安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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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8년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경제-매매/교역-토지매매명문 大韓二年戊戌十二月二十八日 金載廈 大韓二年戊戌十二月二十八日 金載廈 金載廈[喪不着], 金致善[着名], 南□熙[着名] 고흥 고흥류씨 류탁 후손가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898년에 金載廈가 논을 팔면서 작성해준 토지매매문서. 1898년(광무 2) 12월 28일에 金載廈가 논을 팔면서 작성해준 토지매매문서이다. 문서에 따르면 토지의 매매사유는 '要用所致' 즉, 필요한 곳이 있어서라고 밝히고 있다. 방매한 논의 위치는 豆上道 觀德 握禮坪으로 이곳에 있는 歸字丁 3마지기[斗落只] 10부 3속을 錢文120兩을 받고 팔았다. 논을 매득한 이는 쓰여 있지 않아 알 수 없고, 거래 당시 답주인 김재하는 상중으로 서명을 하지 않고 喪不着이라고 기재하였다. 일반적으로 부모나 승중 조부모의 喪中인 사람은 '喪不着'이라고 표기하고 着名을 하지 않았다.거래 당사자 외에 證人 金致善과 笔執 南竟熙이 참여하였다. 문서가 작성된 1898년은 대한제국의 연호가 광무인데, 문서 첫머리에 광무 연호를 쓰지 않고 大韓으로 쓰고 있다. 明文이란 어떤 권리를 증명해 주는 문서로 흔히 토지와 노비, 가옥 등을 매매하는 문서명으로 쓰인다. 토지매매명문은 파는 사람이 작성하여 사는 사람에게 주는 것이다. 여기에는 대체로 매매 연월일과 買受者, 賣渡事由, 賣渡物의 소재지, 量案上의 字 ․ 番, 結負[卜]束과 斗落, 배미[夜味] 등 매매 대상물의 정보와 가격, 그리고 賣渡人[財主], 筆執, 證人 등이 기록된다. 그러나 시대와 작성하는 사람에 따라 이들 가운데 일부가 생략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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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3년 류경준(柳敬浚)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경제-매매/교역-토지매매명문 大韓光武七年癸卯十二月十九日 申俊休 柳敬浚 大韓光武七年癸卯十二月十九日 申俊休 柳敬浚 申俊休[喪不着], 金錫奎[着名] 고흥 고흥류씨 류탁 후손가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903년에 申俊休가 柳敬浚에게 논을 팔면서 작성해준 토지매매문서. 1903년(광무7) 12월 19일에 申俊休가 柳敬浚에게 논을 팔면서 작성해준 토지매매문서이다. 문서에 따르면 답주인 신준휴는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논을 여러 해 경작해 왔는데 금년에 公私債가 대단히 많아 부득이하게 팔게 되었다 한다. 매매한 논은 道陽面 堇洞坪에 있는 畵字丁으로 위쪽에 申泰元의 논과 아랫쪽 金達浩 논 사이에 위치하며, 1米 每1夜味 昨種 2斗落 8負를 錢文133兩 가격을 받고 류경준에게 팔면서 이 문서를 작성하였다. 舊文記는 都文書에 실려 있어 넘겨주지 못하고 신문기 1장만 작성해 주었다. 이때 증인과 필집자로 金錫奎가 문서 작성에 참여하였다. 거래 당시 畓主 신준휴는 상중으로 서명을 하지 않고 喪不着이라고 기재하였다. 일반적으로 부모나 승중 조부모의 喪中인 사람은 '喪不着'이라고 표기하고 着名을 하지 않았다. 柳敬浚은 자가 乃欽, 본관이 고흥이며, 고려 때 정승을 지낸 류청신(1257~1329)의 후손이다. 1855에 태어나 1935년에 사망하였다. 배우자는 礪山宋氏이다. 明文이란 어떤 권리를 증명해 주는 문서로 흔히 토지와 노비, 가옥 등을 매매하는 문서명으로 쓰인다. 토지매매명문은 파는 사람이 작성하여 사는 사람에게 주는 것이다. 여기에는 대체로 매매 연월일과 買受者, 賣渡事由, 賣渡物의 소재지, 量案上의 字 ․ 番, 結負[卜]束과 斗落, 배미[夜味] 등 매매 대상물의 정보와 가격, 그리고 賣渡人[財主], 筆執, 證人 등이 기록된다. 그러나 시대와 작성하는 사람에 따라 이들 가운데 일부가 생략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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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박태삼(朴泰三) 간찰(簡札)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개인-생활-서간 庚子元月之六日 姻弟 朴泰三 庚子元月之六日 [1960] 朴泰三 고흥 고흥류씨 류탁 후손가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960년 姻弟 朴泰三이 松峴草堂 姻兄에게 보내는 간찰 1960년 姻弟 朴泰三이 松峴草堂 姻兄에게 보내는 간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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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년 박태삼(朴泰三) 간찰(簡札)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개인-생활-서간 丁未全月念五 姻弟 朴泰三 丁未全月念五 朴泰三 고흥 고흥류씨 류탁 후손가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967년 姻弟 朴泰三이 虎山 松峴草堂에 있는 柳松隱(류대석)에게 보내는 간찰 1967년 姻弟 朴泰三이 虎山 松峴草堂에 있는 柳松隱(류대석)에게 보내는 간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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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년 류영휘(柳瑛輝) 간찰(簡札)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개인-생활-서간 1967.6.7 1967.6.7 柳瑛輝 柳大錫 고흥 고흥류씨 류탁 후손가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967년에 柳瑛輝가 고흥의 족인 柳大錫에게 보낸 간찰 1967년에 柳瑛輝가 고흥의 족인 柳大錫에게 보낸 간찰. *국한문혼용, 편지지에 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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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3년 송형호(宋衡浩) 간찰(簡札)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개인-생활-서간 癸亥三月二十三日 硏友 宋衡浩 癸亥三月二十三日 [1923] 宋衡浩 고흥 고흥류씨 류탁 후손가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923년 3월에 東谷에서 硏友 宋衡浩이 松峴에 사는 柳雅士에게 보내는 간찰. 계해(1923)년 3월 23일에 東谷에서 硏友 宋衡浩이 松峴에 사는 柳雅士에게 보내는 간찰이다. 宋衡浩는 편지에서 德林으로부터 집으로 돌아오니 걱정이 비늘처럼 층층히 쌓여 눈썹을 펼 겨를도 없었다는 자신의 상황을 상대방이 들어서 알 것이며, 자신 또한 지금 柳雅士의 아이가 죽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면서 이는 자신의 근심에 비할 수 없는 큰 슬픔으로 놀랍고 황공함을 말로 다 할 수 없다고 하였다. 생각건대 당신은 더욱 애통하겠지만 천명은 하늘에 달린 것이니 이것으로 위안를 삼으라고 심심한 위로의 말을 전하였다. 이어서 거리가 멀고 인편이 적어 소식이 요원하였으며 憑聞하는 것도 어려우니 밤낮으로 마음 속에 그리움이 가득 차 있던 중 從孫婦가 집으로 돌아와 소식을 자세히 듣고 조부모님과 부모님을 모시며 건강이 좋으시다는 것을 알게 되어 매우 위로가 되며, 자신은 전과 다름없이 그럭저럭 지내고 있다며 안부를 전했다. 다만 事意를 살펴보니 말의 뜻이 만나서 마주보고 토론하는 것과 조금도 다를 것이 없으며 또 문단은 비록 措語가 熟手하여도 지나치기 어려우니 기쁨을 어찌 말로 할 수 있겠느냐면서 좋은 시간은 얻기 어려우니 허비하지 말라고 하였다. 기간이 되었는데 말이 없으니 내일을 기다리는 것이 좋겠다고 하고, 이와 같은 일은 그대가 이미 마음을 세우고 또 師友의 勸勉있으니 다시 어찌 赘客이 되겠냐고 하였다. 函席에서 令季씨와 더불어 봄 한철을 편안히 지냈냐고 물으며 사제의 즐거움은 묻지 않아도 알 수 있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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丁□년 [류]주승([柳]柱昇) 간찰(簡札)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개인-생활-서간 丁二念一 老拙功制人 柱昇 丁二念一 [1927, 1987] 柱昇 고흥 고흥류씨 류탁 후손가 (재)한국학호남진흥원 丁□년 2월에 功制人 柱昇이 보내는 간찰 丁○년 2월에 功制人 柱昇이 보내는 간찰. *상태: 본문 중 적색볼펜으로 수정한 흔적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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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찰(簡札) 피봉(皮封)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개인-생활-서간 松峴 座省案 고흥 고흥류씨 류탁 후손가 (재)한국학호남진흥원 간찰피봉 간찰피봉. *연관된 세 간찰 중 어느 것의 피봉인지 알 수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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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영선(柳永善) 간찰(簡札)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개인-생활-서간 [1938] 柳永善 柳重憲 고흥 고흥류씨 류탁 후손가 (재)한국학호남진흥원 고창의 柳永善이 고흥의 족인 柳重憲에게 보낸 간찰 고창의 柳永善이 고흥의 족인 柳重憲에게 보낸 간찰. *원문: 所敎萬宗齋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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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9년 류제필(柳濟弼) 간찰(簡札)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개인-생활-서간 昭和十四年三月三十日 高敞郡面星斗里 柳濟弼 高興郡高興面虎東里 柳沚根 昭和十四年三月三十日 柳濟弼 柳沚根 고흥 고흥류씨 류탁 후손가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939년 3월 柳濟弼이 柳沚根에게 문중 일과 관련하여 보낸 간찰 1939년 3월 30일에 고창군 星斗里에 사는 柳濟弼이 高興郡 高興面 虎東里에 사는 柳沚根에게 문중 일과 관련한 상대방의 행동을 꾸짖는 내용의 간찰이다. 편지는 국한문혼용문으로 쓰여 있고, 서두에 '答告書'라고 적고 편지를 시작하였으며, 편지 말미 발신자 柳濟弼이라 쓰고 그 아래에 도장을 찍었다. 편지의 내용은 柳濟弼이 柳沚根에게 고흥류씨 재실인 萬宗齋 일을 하면서 일어난 불미스런 일과 이후 그의 행동에 대해 나무라는 것이다. 먼저 귀 종중에서 數十年간 萬宗齋의 일을 사사로이 남용하던 중 位土 7頭를 은폐한 사실로 各宗이 상응하야 소화13년(1938) 舊8월 25일에 고흥군 過驛面 道川里 萬宗齋에서 大宗會를 개최하고, 그동안 귀 종중에서 가지고 있던 收支帳簿를 열람한 후 不微한 일이므로 門規을 고치기로 하고, 會議循序 5項 중 임원 선거에 있어서 高興郡內에 三派가 거주하니 門有司는 三派에 1員씩 3員을 뽑기로 하고, 都有司는 다른 군에 循回하기로 하였으며, 詳議員은 각 군에 1員씩 選定하기로 하고, 장부는 新舊有司가 서로 인수인계하고 부족한 것은 오는 10월 15일 享祀時에 會計하기로 하고, 諸般事는 新有司가 담당하여 처리하기로 하고 폐회하였다는 상황을 전하였다. 그럼에도 상대방이 宗人들을 무시하고 소작료를 集去하여 이 같은 혼란을 만들었냐고 꾸짖고 있다. 자신은 대종회에서 임시의장으로서 따로 책임을 묻지 않겠다고 하고 화해를 하도록 한 뒤에 양쪽의 平和를 주장하며 신신당부하고 집으로 돌아왔는데, 지금 이같이 詰讕하는 것은 양쪽이 화해치 못한 탓이니 이들 이야기는 다시 말하지 말라고 하였다. 이어서 만종재 문서를 만종재 함에다 보관하지 않고 어디로 가지고 갔느냐고 묻고, 貴派가 宗派와 서로 대립하면 이 죄를 면하지 못할 것인데 季之季派로 이같이 행동하는 것은 무슨 자격이며, 대표자면 지금 虎山의 대표자지 大門中의 대표자는 아니라고 하면서 문중재산을 남용하는 등 자칭 대표자라고 하는 그대가 하는 모든 일이 조상을 존숭하는 행동이 아니며 族誼가 아니라면서 호되게 꾸짖고, 추신으로 어느 때든지 재실의 논을 사서 代納하여야 無事할 것이라고 적었다. 만종재(萬宗齋)는 고흥군 과역면 도천리에 소재하는 고흥류씨 재실이다. 柳濟弼은 고창 출신의 독립운동가이자 유학자이다. 자는 호일(浩一), 호는 성곡(星谷)으로 1880년(고종 17) 3월 14일 지금의 전라북도 고창군 고창읍 성두리 상성마을에서 류명석(柳明錫)의 큰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효성이 지극했다고 한다. 1922년 고창향교에 친일 교육 도장이 들어서자 앞장서서 반대하였고, 일제가 성균관에 있던 계성사(啓聖祠)와 동서무(東西廡)를 훼철하려 하자 전국 유림 대표로 나아가 이를 철회시켰다. 이후 성균관 고문으로 추대되었다. 1926년 4월 순종이 승하하자 유림 대표로 국장에 참여했다가 6·10만세사건에 연루되어 옥고를 치렀다. 1940년과 1941년 고창 산소동의 학산재(學山齋) 도유사(都有司)로 학산재의 재실을 중건했고, 벽산사(碧山祠) 도유사도 역임하였다. 1943년 친일에 앞장선 면서기와 공출 반대 문제로 맞섰다가 수감되기도 하였다. 1945년 8월 광복을 맞아 고창향교 뒷산인 성산에 묻혀 있던 일본군 시신 12구를 파내어 성역을 정화하였다. 1947년 1월 고창향교의 초대 전교(典校)와 유도회장에 재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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