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9년 류제필(柳濟弼) 간찰(簡札)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개인-생활-서간 昭和十四年三月三十日 高敞郡面星斗里 柳濟弼 高興郡高興面虎東里 柳沚根 昭和十四年三月三十日 柳濟弼 柳沚根 고흥 고흥류씨 류탁 후손가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939년 3월 柳濟弼이 柳沚根에게 문중 일과 관련하여 보낸 간찰 1939년 3월 30일에 고창군 星斗里에 사는 柳濟弼이 高興郡 高興面 虎東里에 사는 柳沚根에게 문중 일과 관련한 상대방의 행동을 꾸짖는 내용의 간찰이다. 편지는 국한문혼용문으로 쓰여 있고, 서두에 '答告書'라고 적고 편지를 시작하였으며, 편지 말미 발신자 柳濟弼이라 쓰고 그 아래에 도장을 찍었다. 편지의 내용은 柳濟弼이 柳沚根에게 고흥류씨 재실인 萬宗齋 일을 하면서 일어난 불미스런 일과 이후 그의 행동에 대해 나무라는 것이다. 먼저 귀 종중에서 數十年간 萬宗齋의 일을 사사로이 남용하던 중 位土 7頭를 은폐한 사실로 各宗이 상응하야 소화13년(1938) 舊8월 25일에 고흥군 過驛面 道川里 萬宗齋에서 大宗會를 개최하고, 그동안 귀 종중에서 가지고 있던 收支帳簿를 열람한 후 不微한 일이므로 門規을 고치기로 하고, 會議循序 5項 중 임원 선거에 있어서 高興郡內에 三派가 거주하니 門有司는 三派에 1員씩 3員을 뽑기로 하고, 都有司는 다른 군에 循回하기로 하였으며, 詳議員은 각 군에 1員씩 選定하기로 하고, 장부는 新舊有司가 서로 인수인계하고 부족한 것은 오는 10월 15일 享祀時에 會計하기로 하고, 諸般事는 新有司가 담당하여 처리하기로 하고 폐회하였다는 상황을 전하였다. 그럼에도 상대방이 宗人들을 무시하고 소작료를 集去하여 이 같은 혼란을 만들었냐고 꾸짖고 있다. 자신은 대종회에서 임시의장으로서 따로 책임을 묻지 않겠다고 하고 화해를 하도록 한 뒤에 양쪽의 平和를 주장하며 신신당부하고 집으로 돌아왔는데, 지금 이같이 詰讕하는 것은 양쪽이 화해치 못한 탓이니 이들 이야기는 다시 말하지 말라고 하였다. 이어서 만종재 문서를 만종재 함에다 보관하지 않고 어디로 가지고 갔느냐고 묻고, 貴派가 宗派와 서로 대립하면 이 죄를 면하지 못할 것인데 季之季派로 이같이 행동하는 것은 무슨 자격이며, 대표자면 지금 虎山의 대표자지 大門中의 대표자는 아니라고 하면서 문중재산을 남용하는 등 자칭 대표자라고 하는 그대가 하는 모든 일이 조상을 존숭하는 행동이 아니며 族誼가 아니라면서 호되게 꾸짖고, 추신으로 어느 때든지 재실의 논을 사서 代納하여야 無事할 것이라고 적었다. 만종재(萬宗齋)는 고흥군 과역면 도천리에 소재하는 고흥류씨 재실이다. 柳濟弼은 고창 출신의 독립운동가이자 유학자이다. 자는 호일(浩一), 호는 성곡(星谷)으로 1880년(고종 17) 3월 14일 지금의 전라북도 고창군 고창읍 성두리 상성마을에서 류명석(柳明錫)의 큰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효성이 지극했다고 한다. 1922년 고창향교에 친일 교육 도장이 들어서자 앞장서서 반대하였고, 일제가 성균관에 있던 계성사(啓聖祠)와 동서무(東西廡)를 훼철하려 하자 전국 유림 대표로 나아가 이를 철회시켰다. 이후 성균관 고문으로 추대되었다. 1926년 4월 순종이 승하하자 유림 대표로 국장에 참여했다가 6·10만세사건에 연루되어 옥고를 치렀다. 1940년과 1941년 고창 산소동의 학산재(學山齋) 도유사(都有司)로 학산재의 재실을 중건했고, 벽산사(碧山祠) 도유사도 역임하였다. 1943년 친일에 앞장선 면서기와 공출 반대 문제로 맞섰다가 수감되기도 하였다. 1945년 8월 광복을 맞아 고창향교 뒷산인 성산에 묻혀 있던 일본군 시신 12구를 파내어 성역을 정화하였다. 1947년 1월 고창향교의 초대 전교(典校)와 유도회장에 재임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