닭이 없는 탄식 3수 無鷄歎【三首】 요동의 풍속이 날마다 닭 훔치는 것이 잘못된 줄241) 어찌 알랴마을의 닭이 이미 매우 드물게 되었네수령이 노의 고을에 임하여 끝내 닭을 잡지 못하였고242)객으로 신문에 머물렀다가 다만 기롱만 당하였네243)조적은 무심하게 새벽에 일어나 춤을 추었고244)전문은 무슨 방법으로 밤에 도망쳐 돌아왔는가245)산중에 술이 익으면 내 마땅히 갈 터인데다만 가을바람에 기장 쪼아 살진 닭이 없어 아쉽네세상에 거백옥이 없다면 누가 잘못을 알랴246)도를 헤매니 원래 통달한 자가 드무네술동이 사이에 취해 묶여 있으니247) 참으로 가소롭고못가에서 깨어 읊조리니248) 또한 기롱을 받을 만하네유후로 봉해져 뜻을 마치자 장량은 병이 많았고249)월을 패자로 만들어 성공한 범려는 돌아갔네250)늙어 전원으로 돌아오니 나 또한 마음 좋으니구구하게 가벼운 갓옷과 살진 말을 부러워하겠는가세상에서 병이 많아 온갖 일이 글렀으니깊은 골목에 문을 닫아걸어 오가는 이 드무네한 자리만한 위나라 표주박은 끝내 어디에 쓰랴251)삼년 동안의 제나라 비파는 다만 기롱을 보았네252)당호를 오히려 '무주'라 하니약의 이름은 어찌 '당귀'를 취하지 않으랴옛사람은 나보다 먼저 강동으로 떠났으니순채국과 농어회는 가을바람에 충분히 맛나니253)-최노첨의 호가 '무주'이기에 시에서 이렇게 언급하였다.- 遼俗安知日攘非鷄兒村巷已全稀宰臨魯邑終難割客宿晨門但見譏祖逖無心晨起舞田文何術夜逃歸山中酒熟吾當去惟欠秋風啄黍肥世無蘧玉孰知非迷道從來達者稀醉縛甕間眞可笑醒吟澤畔亦堪譏封留志畢張良病覇越功成范蠡歸歸老田園吾亦決區區不必羨輕肥多病人間萬事非杜門深巷往來稀魏瓢一席終安用齊瑟三年秪見譏庵號猶能有無住藥名胡不取當歸古人先我江東去蓴膾秋風十分肥【崔魯詹號無住故及之】 닭……줄 《孟子》 〈등문공하(滕文公下)〉에서 맹자가 말하기를 "지금 날마다 그 이웃의 닭을 훔치는 사람이 있다고 하자. 누가 그에게 '이것은 군자의 도가 아니다.'라고 하자, '닭 마리 수를 줄여서 한 달에 한 마리만 훔치고, 내년에는 훔치는 것을 그만두겠다.'라고 했다. 그것이 잘못인 줄 알았으면 바로 그만두어야지, 어찌 내년을 기다리겠는가?[孟子曰 今有人 日攘其隣之鷄者 或告之曰 是非君子之道 曰請損之 月攘一鷄而 待來年然後已 如知其非矣 斯速已矣 何待來年]"라고 하였다. 여기서는 맹자의 이 말을 인용하여 도둑질하는 요동의 풍속을 말하고 있다. 수령이……못하였고 수령이 훌륭한 정치를 하지 못한다는 의미이다. "공자가 무성에 가서 현가(弦歌) 소리를 듣고 빙그레 웃으며 말하기를 '닭을 잡는데 어찌 소 잡는 칼을 쓰느냐?' 하니, 자유가 대답하기를 '예전에 제가 선생님께 들으니 군자가 도를 배우면 사람을 사랑하고, 소인이 도를 배우면 부리기가 쉽다고 하셨습니다.'하였다. 공자가 말하기를 '제자들아, 자유의 말이 옳다. 방금 한 말은 농담이다.'[子之武城, 聞弦歌之聲, 夫子莞爾而笑曰: 割雞焉用牛刀?, 子游對曰: 昔者偃也聞諸夫子曰, 君子學道則愛人, 小人學道則易使也. 子曰: 二三子, 偃之言是也. 前言戱之耳.]"라고 하였다. 《論語 陽貨》 객으로……당하였네 '신문(晨門)'은 어진 덕을 가졌으면서도 아침에 성문 여는 미천한 일을 맡아보는 사람으로, 공자 당시의 은자(隱者)이다. 공자의 제자 자로(子路)에게 공자에 대하여 말하기를 "세도를 고치는 것이 불가한 것을 알면서 하는 자인가?[是知其不可而爲之者與?]"라고 하였다. 《論語 憲問》 《논어》에 은자로서 닭과 관련된 인물은 하조장인([荷蓧丈人)이 있다. 자로(子路)가 공자를 따르다가 뒤떨어졌을 때 그를 보고, 우리 선생님을 보았느냐고 묻자 그는 "사지(四肢)를 부려먹지도 않고 오곡(五穀)을 분간하지도 못하는데, 누가 선생인가."라고 하면서 지팡이를 꽂아놓고 김만 매었다. 자로가 공수(拱手)하고 공경을 표하자 자로(子路)를 자기 집에 초청하여 닭을 잡고 기장밥을 지어 대접하였다.[殺鷄爲黍而食之] 그 이튿날 자로가 공자에게 말하자, 공자는 "은자(隱者)이다."라고 말하며 자로에게 다시 가 보라고 하였는데 다시 찾아갔을 때는 이미 노인이 떠난 뒤였다. 《論語 微子》 아마도 작자가 신문과 하조장인에 대해 착오를 일으킨 것으로 보인다. 조적은……추었고 진(晉)나라 때 강개한 지절(志節)로 명성이 높았던 조적(祖逖)이 일찍이 자기 친구 유곤(劉琨)과 함께 사주 주부(司州主簿)가 되었을 때, 유곤과 한 이불을 덮고 자다가 한밤중에 때 아닌 닭 우는 소리를 듣고는 유곤을 발로 차서 깨우며 말하기를 "이것은 나쁜 소리가 아니다.[此非惡聲也]" 하고, 인하여 일어나서 춤을 덩실덩실 추었던 데서 온 말로, 전하여 닭 소리를 듣고는 일어나 춤춘다는 것은 장부가 큰 뜻을 품고 호장(豪壯)한 기개를 분발하는 것을 의미한다. 《晉書 卷62 祖逖列傳》 전문은……돌아왔는가 전문은 전국 시대 제(齊)나라 공족(公族)인 맹상군(孟嘗君)을 가리킨다. 맹상군이 일찍이 진(秦)나라에 들어갔다가 혹인(或人)의 참설(讒說)에 의하여 갇혀 죽게 되었을 때, 진 소왕(秦昭王)의 총희(寵姬)를 통하여 풀려나려고 하였다. 총희가 원하는 것은 호백구(狐白裘)였는데, 호백구는 앞서 소왕에게 바친 것 한 벌 뿐이요 달리 구할 길이 없었다. 이에 그 문객 중에 개처럼 도둑질을 잘하는 자가 진나라의 궁중에 몰래 들어가서 앞서 소왕에게 바쳤던 호백구를 훔쳐다가 그 총희에게 다시 바침으로써 마침내 맹상군이 풀려났다. 맹상군은 풀려난 즉시 성명을 바꾸고 도망쳐서 밤중에 함곡관(函谷關)에 당도했으나, 관법(關法)에 닭이 울기 전에는 문을 열어주지 않게 되어 있었다. 한편 맹상군의 속임수를 알아차린 진 소왕은 사람을 시켜서 급히 맹상군을 쫓게 하여 그들이 바짝 뒤쫓아 오고 있는 터라, 상황이 몹시 다급하던 차에 마침 그 문객 중에 닭 울음소리의 흉내를 잘 내는 사람이 닭 울음소리를 내자 인근의 닭들이 일제히 울어 댐으로써, 마침내 관문을 열어 주어 그곳을 무사히 빠져 나갈 수 있었다. 《史記 卷75 孟嘗君列傳》 거백옥이……알랴 《회남자(淮南子)》 〈원도훈(原道訓)〉에 "거백옥은 나이 오십에 사십구 년의 잘못을 알았다." 하였다. 《장자(莊子)》 〈칙양(則陽)〉에는 "육십 살에 오십구 년의 잘못을 알았다."고 하였다. 술동이……있으니 진(晉)나라 때의 문신으로 특히 술을 매우 즐겼던 필탁(畢卓)이 이부랑(吏部郞)으 로 있을 적에는 항상 술을 마시고 직무를 폐하기도 했다. 한번은 그가 이웃집에 술이 익은 것을 알고는 밤중에 그 항아리 곁으로 가서 술을 실컷 훔쳐 마시고 바로 그 자리에서 잠이 들어 마침내 술 관장하는 사람에게 붙들려서 꽁꽁 묶여 있다가 다음날 아침에야 풀려났다. 《晉書 卷49 畢卓列傳》 못……읊조리니 굴원의 〈어부사(漁父辭)〉에 "굴원이 쫓겨나 강담에서 노닐고, 못가를 거닐면서 시를 읊조리매, 안색이 초췌하고 형용에 생기가 없었다.[屈原旣放, 游於江潭, 行吟澤畔, 顔色樵悴, 形容枯槁.]"라고 하였고, "온 세상이 흐린데 나만 홀로 맑고, 뭇사람들은 모두 취했는데 나만 홀로 깨어 있다.[擧世皆濁, 我獨淸, 衆人皆醉, 我獨醒.]"라고 하였다. 《古文眞寶 後集 卷1》 유후로……많았고 《사기(史記)》 〈유후세가(留侯世家)〉에 "유후(留侯)는 본래 병이 많아서 도인술을 하면서 곡식을 먹지 않았다.[留侯性多病 卽道引不食穀]."라고 하였다. 월을……돌아갔네 춘추 시대 월왕(越王) 구천(句踐)이 일찍이 오왕(吳王) 부차(夫差)로부터 회계(會稽)의 치욕을 당한 뒤, 구천의 모신(謀臣)인 범려(范蠡)가 미인 서시(西施)를 오왕에게 바쳐 오왕의 마음을 현혹시켜 끝내 오나라를 멸망시켰다. 그러고 나서는 이내 월왕을 하직하고 다시 서시를 데리고 서호(西湖)에 배를 띄워 함께 떠났는데, 그 후 그는 제(齊)나라에 들어가 치이자피(鴟夷子皮)로 성명(姓名)을 바꾸고 도(陶) 땅에 살면서 주공(朱公)이라 칭하고 상업(商業)으로 치산(治産)을 잘하여 거부(巨富)를 이루었다고 한다. 이 고사는 흔히 신하가 공을 이룬 뒤에는 미련 없이 은퇴하는 의미로 쓰인다. 한……쓰랴 혜자(惠子)가 장자에게 "위왕(魏王)이 내게 큰 표주박의 씨앗을 주기에 심었는데 그 열매가 5섬(石) 들이는 되었다. 지나치게 커서 사용할 곳이 없어 깨어 버렸노라."라고 하자, 장자가 "5섬 들이의 크기라면 대준(大樽)을 만들어 강호(江湖)에 띄워 볼 생각을 않고 쓰일 곳이 없다고만 하는가."라고 하였다. 《莊子 逍遙遊》 인물이 크게 쓰이지 못함을 비유하였다. 삼년……보았네 제왕(齊王)이 음률을 좋아한다는 소식을 듣고 한 객(客)이 비파[瑟]를 가지고 제왕에게 갔다. 3년을 궐문(闕門)에서 기다렸으나 제왕을 보지 못했다. 어떤 사람이, 제왕은 피리를 좋아하는데 그대가 비파를 가져왔으니 조화될 수 없다고 했다는 고사가 있다. 《韓非子 解老》 임금의 기호에 맞지 않아 등용되지 못함을 비유하였다. 옛사람은……맛나니 《진서》 〈장한열전(張翰列傳)〉에 장한의 자는 계응(季鷹)이다. 제나라 왕 경(冏)이 그를 불러 동조연(東曹掾)으로 삼았다. 장한은 같은 고을의 고영(顧榮)에게 "천하가 이렇게 어지러우니 화가 그치지 않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나는 본래 산림에서 지내던 사람으로 지금 명망도 없습니다."라고 하자, 고영이 그의 손을 맞잡고서 "저 또한 그대와 마찬가지로 남산의 고사리나 캐고 삼강의 물이나 마셨을 따름이오."라고 하였다. 장한이 가을바람이 이는 것을 보고서 고향 오중(吳中)의 고미나물, 순채국, 농어회 생각이 나서 말하기를 "인생은 자신의 마음에 맞는 삶을 귀하게 여기는데 어찌 고향을 떠나 수천 리 땅에서 벼슬에 얽매어 명예와 벼슬을 구하려 하는가."라고 하고는 마침내 수레에 멍에를 지고 돌아왔다. 얼마 지나지 않아 경(冏)이 패하자 사람들은 모두 장한이 기미를 알았다고 하였다.